제7장 수난기 2
“오빠!”
어, 송화였다.
봉수는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고 송화는 화장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송화가 반가운 얼굴로 봉수에게 다가들었다.
“어, 일 끝나고 회사 사람들하고, 그러니까 회식하다가, 나는 또 누가 고민이 있다고 해서…”
봉수는 뒷말을 얼버무렸다.
“왜 그래? 오빠, 나한테 뭐 속이는 거 있지.”
봉수는 애란이 있는 쪽을 의식하며 침착하게 대처하려 했다.
괜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 아냐. 내가 뭘 속여.”
봉수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에이, 나도 여자라고. 내 육감이지만 오빠 나한테 뭐 속이고 있는데.”
송화가 봉수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짧은 치마에 시원한 민 소매 셔츠. 그 차림으로 광화문에 응원하러 나갔던 것일까.
광화문에 모인 남자들의 시선을 끌고도 남을 옷 차림이었다.
“아냐.”
“그럼, 누구랑 왔어?”
“그, 그게 저…”
봉수는 난감했다. 송화는 봉수의 팔짱을 끼고 홀 쪽으로 걸어나왔다.
“어머, 언니!”
송화가 애란을 발견하고 그녀를 불렀다.
거짓말은 결국 들통났다.
송화는 애란 앞에 앉아 애란의 눈가에 깃든 눈물을 보았다.
송화는 애란과 봉수를 번갈아 보았다.
더 이상 숨기다간 괜한 오해만 쌓일 듯했다.
“오빠, 애란 언니 만나려고 나한테 못 온다고 그랬던 거야?”
송화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봉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애란을 보고 지금 두 번째지만 넉살 좋은 송화는
그때부터 애란을 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
애란이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모양이었다.
“소, 송화씨 그런 게 아니라.”
“오빠, 좀 실망했는데.”
송화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화씨, 그런 게 아니라.”
송화는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애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송화를 쫓아갔다.
봉수는 처음부터 송화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하필이면 왜 이 술집으로 들어왔는가 후회가 되었다.
설마라는 게 늘 사람을 잡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애란이 돌아왔다.
“화가 많이 났네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닙니다.”
송화가 어리고 예쁘지만, 그래서 그런지 이해의 폭이 좁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가 사실대로 다 말했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자기한테 거짓말한 게 잘못이라며 나중에 전화한답니다.”
봉수가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송화와 수영 그리고 몇몇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송화는 이기주의적이었다.
송화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봉수는 화가 치밀었다.
이제는 상황이 전도되어 애란이 봉수를 위로해 주어야할 판이었다.
“여자들이 원래 그래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이번엔 봉수가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애란씨도 여자니까 물어볼게요.
여자들은 자기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건 괜찮고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이해를 못합니까?”
“그렇진 않죠. 송화씨는 봉수씨가 거짓말을 하고 저를 만났다고 화가 난 거니까요.”
“어떻게 모든 걸 진실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송화가 좀 예민한 편이어서 괜한 오해를 할까봐 말하지 않았던 거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나의 배려를 이해하지 못하죠?”
봉수는 여러모로 자신에 대해 화가 났다.
신수정에 대한 짝사랑을 끝내 고백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화가 났고,
첫 사랑이었던 그녀가 보험설계사가 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에도 화가 났다.
고향의 식구들이 자신의 월급날만 기다린다는 사실이 미웠고,
그림을 전공했지만 결국 중도에 포기하고 회사를 다닐 수밖에 없는 현실에도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저 회사의 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화가 났다.
결정적으로 지금 자신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감마저 들었다.
봉수는 눈에 보이는 대로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애란에게 퍼붓듯 그 동안 가슴 속에 쌓여 있던 말들을 토해냈다.
“봉수씨 저도 원래 서양화 전공했어요.
저 역시 먹고 사는 문제로 그만 두긴 했지만
전 그래도 속옷 디자인 하는 일을 창조적인 일이라고 믿고 현실을 받아들였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아야죠.”
좀 전까지 진국이 때문에 우울했던 애란은 온 데 간 데가 없었다.
봉수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취기가 올랐다.
그러다 문득 왜 자신이 애란 앞에서 자신에 대해 화를 내고 있는가 궁금했다.
실패한 짝사랑의 추억과 기억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봉수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열을 내고 말할 게 아니었는데…”
봉수는 창 밖을 내다보며 다시 한번 송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
창밖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젠장!”
“저, 봉수씨, 우리 어디 가서 한잔 더 할까요?”
애란은 봉수를 위로하겠다는 심정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은 꺼낸 듯했다.
하지만 봉수는 술에 완전히 취하고 싶었다.
“그럽시다.”
두 사람은 맥주집에서 나왔다.
적당한 취기에 비까지 내리자 봉수는 서글픈 감정이 밀려들었다.
봉수도 애란도 비를 피하지 않은 채 거리에 서서 비를 맞았다.
“세상은 불공평해요.”
왜 그런 감상이 밀려드는 것일까.
“봉수씨, 아직 우린 아무 것도 한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젊잖아요.
불공평하다는 건 뭔가 끝까지 해보고 난 후에 해야 할 말인 거 같아요.”
“선배는 여전히 낙천적이군요.”
“그래야, 사는 힘이 나잖아요.”
봉수는 애란의 손을 잡았다. 손이 뜨거웠다.
두 사람은 목적한 곳도 없이 빗속을 뛰기 시작했다.
겉옷이 젖고 속옷까지 젖어들고… 숨이 턱까지 차 오른 후에야 두 사람은 멈추었다.
두 사람의 눈앞에 ‘벽’이라는 술집 간판의 네온이 비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제가 나중에 송화씨 만나서 잘 말할게요.”
봉수는 세 잔째 양주를 비웠다.
소주나 맥주를 마실 때완 달리 속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 정도도 이해 못하면 그만 만나야죠.”
“그래도 요즘 얘들치고 송화만한 애가 어디 있나요?”
애란은 자신 때문에 한 쌍의 연인이 헤어질 판이니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일로 헤어지자고 하면 그런 얘는 더 이상 만나고 싶지도 않아요.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쩌다 송화를 만나러 나가면 친구들이 잔뜩 나와 있는 거예요.
그럴 땐 내가 송화의 액세서리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나는 안중에도 없고 돈 낼 때나 나 찾고….”
“원래 연애하면 돈 많이 들어가잖아요.”
“처음엔 안 그랬어요.
그저 둘이서만 만나곤 했는데 어느 날부턴가 친구들을 하나 둘 데리고 나오더라구요.”
“여자들이란 게 원래 그래요.
진짜 자기 남자가 되기 전까진 숨겨두었다가 자기 남자가 됐다 싶으면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그럴 거예요.”
그때 봉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송화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휴대폰 LCD창에 뜬 번호는 이상한 번호였다.
“여보세요?”
“봉수야, 나다.”
진국이였다.
봉수는 애란의 눈치를 봤다.
애란이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우리 도착해서 이제 잘려고.”
“만날 사람들은 다 만나고?”
사장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업가 한 사람이 공항에 마중을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원단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안 나왔어.”
진국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염려하지 마라. 평수씨랑 나랑 알아서 해 나갈테니까.”
“그럼 여기서도 무슨 대책 같은 거 세워야 하는 거 아냐?”
통화 내용을 듣는 애란도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술을 입안에 탁 털어놓고는 봉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일 진행되는 거 봐서. 그나저나 나 상해 와보곤 깜짝 놀랐다.
도시의 화려함에 놀랐는데 여기가 예전의 그 사회주의 국가였나 싶고…
어마어마하고 초현대적인 건물들에다 더욱 놀란 건 상해 사람들의 자유분방함과 열정이다.”
좀처럼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는 진국이었다.
그렇다면 진국이 정말 놀랐다는 말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자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다.
매일 저녁 6시에 인터넷으로 진행 상황을 알려줄 테니까
그때그때 회의해서 대책 강구하고 그래야 할거야. 그런데 봉수야.”
진국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했다.
“혹시 애란 선배 무슨 일 있었냐?”
“모, 모르겠는데. 왜?”
“오늘 얼굴 보니까 꼭 무슨 일 있는 사람 같던데.
내가 없으니까 너라도 애란 선배 잘 챙겨줘라.”
진국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가까운 상해에서 온 전화라 그런지 진국의 목소리가 애란에게도 훤히 들렸다.
애란의 눈가에 잠깐 눈물이 맺혔다.
진국과 통화를 끝낸 봉수는 애란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오지랖 넓은 사람이에요.”
애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송화씨한테 한번 더 전화 해봐요.”
애란은 어색한 순간을 모면하려고 봉수를 재촉했다.
봉수는 못 이기는 척 송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의 휴대폰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음성을 남기려면 1번을…’
봉수는 휴대폰 퓰립을 거칠게 닫았다.
“아직 어려서 그럴 거예요. 원래 어렸을 땐 잘 삐지잖아요.”
애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봉수는 가끔 송화와의 나이 차이를 가늠해보곤 했다.
열 살 차이면 결코 적은 차이가 아니었다.
“선배, 신경 쓰지 말아요. 어디서 자기 친구들하고 진탕 마시고 있겠죠.
그리고 잘은 모르지만 뭐, 애인이 따로 또 있는 눈치더라구요.”
“정말요?”
“요즘 애들 남자 하나로 성이 차겠어요?”
봉수는 잔을 들어 애란에게 건배를 청했다.
봉수는 오늘 모든 걸 잊고 싶었다.
“그래도 송화씬 봉수씨가 마음에 있으니까 장례식장까지 온 거잖아요.”
“만약 제가 애란씨 집에 그런 변고가 생겼다고 해도 갔을 겁니다.
그거랑 뭐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일이죠.”
원샷!
두 사람은 서로 흉허물없는 사이가 되어 부어라, 마셔라 했다.
양주 한 병 비우고 입가심으로 맥주를 또 시켰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어요.
진국이 말대로 사장님 오기에 우리만 희생당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중 나오기로 한 사람이 안 나왔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봉수는 이제 송화의 일은 잊기로 했다.
더 이상 인연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 주제에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봉수는 발갛게 홍조를 띄기 시작한 애란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가 측은해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봉수의 마음을 흔들었다.
봉수는 송화와 만나면서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둔 적이 없었다.
송화가 삐진 덕에 그런 마음의 빗장이 풀어진 탓일까.
단추 하나가 풀려 약간 아래로 처진 블라우스 안으로 애란의 흰 가슴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요. 이건 우리 사장님하고는 이제 별개의 문제예요. 안 그래요?”
애란이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맞아요.”
봉수는 애란의 주먹을 잡아주며 대꾸했다.
두 사람이 술집에서 나와보니 거리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쩌죠?”
애란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기지 못하고 봉수의 어깨에 기댔다.
봉수도 그런 애란이 싫지 않았다.
폭우 때문인지 아니면 술집이 골목 깊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지나가는 택시도 없었다.
“그냥 비 맞을까요?”
애란이 불쑥 말을 꺼냈다.
봉수는 망설임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처마 밑에서 거리로 나섰다.
비는 삽시간에 두 사람을 적시기 시작했다. 봉수도 애란도 뛰지 않았다.
몸에서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비에 젖은 애란의 블라우스가 몸에 착 달라붙었다.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춘 곳은 ‘4월의 그 집’이라는 모텔 앞에서였다.
모텔 이름이 독특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한기가 들어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라면
어디에라도 들어갈 태세였다.
두 사람은 아주 잠깐 서로를 마주보았다.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었다.
봉수는 애란의 손을 잡고 모텔로 들어갔다.
비에 젖은 몸에서 빗물이 흘러내려 복도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방 하나 주세요.”
남자 종업원이 휘둥그레진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침까지 우리가 입은 옷 세탁 좀 해줄 수 있습니까?”
“24시간 세탁소에 맡기면 될 겁니다.
요즘 손님들 같은 분들이 많아서 세탁하고 드라이 몇 시간이면 끝납니다.
올라가셔서 전화로 불러 주시면 옷 받으러 가겠습니다.”
좋은 세상이다. 뭐든 하루 24시간 열려 있는 세상이다.
봉수와 애란은 거침없이 방 열쇠를 받아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봉수는 잠깐 놓았던 애란의 손을 찾아 쥐었다.
애란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방으로 들어선 뒤 애란은 현관에 서 있기만 했다.
“들어와서 얼른 옷 벗어요.”
애란이 마지못해 방안으로 들어왔다.
빗물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봉수는 이미 속옷만 남기고 모두 벗었다.
“그대로 서 있을 겁니까?”
봉수가 다가가자 한걸음 뒤로 물러난 애란이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블라우스를 벗고 치마를 벗었다.
애란의 미끈한 몸이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났다.
“수건 좀…”
봉수가 그녀에게 수건을 건넸다.
애란은 수건으로 몸을 가렸다.
“옷 좀 가져가 주십시오.”
봉수는 인터폰을 들어 사람을 불렀다.
잠시 후 종업원이 올라와 두 사람의 옷을 가져갔다.
봉수가 종업원에게 옷을 건네고 돌아보니 애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봉수는 속옷도 젖어 마음 놓고 앉지도 못하고 있었다.
“봉수씨.”
화장실 문이 조금 열린 후 애란이 봉수를 불렀다.
“속옷 주세요. 젖은 채로 입고 잘 순 없잖아요.”
봉수는 머뭇거렸다.
뭐랄까, 오랜 친구와 같이 있는 기분이었다.
봉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팬티를 벗어 애란에게 건넸다.
봉수도 수건으로 아랫도리를 가렸다.
봉수는 그래도 마땅히 앉을 곳을 찾지 못해 방안을 빙빙 맴돌았다.
애란이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 욕실에서 나왔다.
봉수는 방안을 가득 채운 어색함과 적막을 몰아내기 위해 TV를 켰다.
화면 가득 홀딱 벗은 남자와 여자가 나타났다.
국산 3류 애정영화였다.
봉수와 애란의 눈이 화면에 고정되었다.
“그렇게 허리 돌리지 말란 말야.”
화면 속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잡았다.
“미치겠는데 그럼 어떡해?”
“너 내가 빨리 싸면 좋겠냐?”
남자가 허리 운동을 멈추더니 여자 아래에 누웠다.
3류 애정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답게 풍만한 가슴이 눈앞에서 출렁거렸다.
화면 오른쪽 위에 영화 제목이 적혀 있었다.
‘굳세어라 홍순아.’
봉수는 제목을 보고 히죽 웃었다.
뒤돌아보던 봉수는 애란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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