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난봉기 13
채연의 다리가 자연스럽게 진국의 다리 위로 올라왔다.
“저도 실은 채연이 만나기 전까진 제 자신에게 동성을 좋아하는 감정이 숨겨져 있었는지 몰랐어요.”
송림도 진국에게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뽀얀 가슴이 눈에 들어와 진국은 정면을 주시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의 틀을 넘어서고 나니까 그렇게 편해질 수가 없더라구요.”
채연은 진국의 표정을 살피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녀의 가슴이 진국의 어깨에 닿았다.
진국은 쑥스러웠다.
한편으론 이래도 되는가 싶었다.
“진국씨, 미안해요.
진작에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실은 송림이랑 나랑 서로 좋아하는 사이에요.
그런데 진국씨도 싫지 않았어요.
처음에 진국씨가 내 고향인 정읍까지 내려와 주었을 때 진국씨 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뭔가 아니다 싶었어요.
그걸 송림일 만난 뒤에야 알게 되었어요.”
송림이 술기운을 빌어 진국의 팔을 잡았다.
그리곤 팔을 자신의 어깨 위에 올리며 채연의 눈치를 봤다.
“괜찮지?”
순간 진국이 마치 두 여자의 노리개감이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몸의 근육들이 경직되었다.
내가 보수적인가, 진국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거 저는 믿어요, 진국씨는 어때요?”
송림이 진국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수면 위로 올라온 송림의 붉은 유두가 물결에 흔들렸다.
“그, 그럴 수도 있죠.”
“진국씨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도 그런데.”
채연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물론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하는 방식이 옳다고 믿었었죠.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어요.”
채연이 몸을 비틀더니 물속에서 둥둥 떠듯이 진국의 몸 위로 올라갔다.
닿는 느낌이 가볍고 부드러웠다.
채연이 송림을 쳐다봤다.
마치 뭔가 허락 받아야 한다는 듯. 송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국씨 우린 친한 친구가 될 순 있겠지만 그 이상 힘들겠죠?”
채연이 진국의 얼굴을 잡았다. 진국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채연의 성향을 듣고 나니 마음이 허전하기도 했다.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가이아의 신해수를 만난 뒤 채연에게 향했던 마음이 얼마쯤 느슨해진 탓이었다.
여자의 마음만 갈대가 아니라 인간 모두의 마음이 갈대인 듯했다.
채연이 적극적으로 진국의 몸에 달라붙자
그 동안 긴장과 놀람으로 주눅 들었던 진국의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달리 몸은 이미 욕망에 길들여져 있었다.
“오늘 잊을 수 없는 밤을 선물하고 싶어요.”
채연이 진국의 귀를 깨물며 그 말을 흘려 넣었다.
그 순간 진국은 두 여자의 살이 동시에 느껴졌다.
송림과 채연은 서로를 응시하다 입을 맞추는가 하면 한꺼번에
진국의 얼굴에 키스 세례를 퍼붓기도 했다.
적당한 술기운, 아름다운 두 여자, 속을 데워 오는 따뜻한 온천물,
미끈거리는 자극. 진국은 황홀했다.
“저한테 일부러 이럴 필요는 없어요. 저는 그냥…”
진국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신을 속이고 있는 기분이 든 때문이었다.
“진국씨, 우린 즐거워요,
제 말은 진국씨가 제게 베푼 호의를 갚는 거라고 생각진 마세요.
그러면 나도 송림이도 슬퍼지니까.”
새벽길을 달리는 버스는 고요했다.
맨 뒷좌석 중앙에 진국이 앉았고 좌우로 채연 송림이 앉았다.
진국은 두 여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버스 안의 불이 꺼진 상태라 그런 그들에 대해 눈치 채는 사람은 없었다.
병달은 운전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인화는 그 곁에 앉아 쫑알대느라
뒷좌석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빠듯한 일정 때문에 모두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다음 달이면 가게 오픈 해요.”
채연이 나지막이 이야기를 꺼냈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진행이 되는군요.”
“인테리어 막바지 공사를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진국씨는 오픈할 때 못 오시겠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중국에 나가 있으니.”
진국은 손이 축축했지만 송림과 채연의 손에서 손을 빼내지 않았다.
왜 그런지 두 여자가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신해수가 말한 섹스 후의 친밀감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진국은 아직도 아랫도리가 얼얼했다.
눈을 감기만 하면 온천에서의 섹스가 떠올라 여전히 흥분이 됐다.
“목표한 대로 이루어지길 빌게요.”
채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채연씨도 잘 하리라 믿어요.”
“얼마 전에 중경이를 만났어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송림이 중경 이야기를 꺼냈다.
진국과 채연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코지에서 진출하기가 중국 상황이 아주 안 좋은 모양이더라구요.”
“중경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중경씨가 얘기 안 해도 대충은 짐작이 가요. 그래도 진국씬 잘 할 거예요.”
진국은 괜히 어깨가 무거웠다.
차 사장의 감정적인 배팅에 사원들이 희생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배는 떠난 상황이었다.
“저도 음으로 양으로 도와 드릴게요.
중국에 있는 친구들도 좀 있고 유학 가 있는 친구들도 몇 있거든요.”
“나중에 정말 어려워지면 그때 부탁 드릴게요.”
진국은 자신이 ‘코지’의 사장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버스는 막힘 없이 어둠 속을 달렸다. 진국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앞으로의 일이 버스처럼 막힘 없이 진행되기를 바랬다.
진국은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국의 손을 통해 그의 심정이 전해진 탓인지,
채연이 진국의 손을 잡아 당겨 자신의 다리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냥 현재만 생각해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시구요.”
손가락이 저절로 여자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채연이 그렇게 이끌었고 진국은 욕망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진국은 여전히 두 여자의 미묘한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 사랑한다면 진국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옳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마치 쌍둥이 여자처럼 무엇이든 혼자만 갖는 걸 원하지 않는 그런 심정이랄까.
채연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더니 다리를 더 벌렸다.
머뭇거리던 진국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여자의 미끈거리는 중심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주었다.
진국은 자신이 희대의 바람둥이가 된 기분이지만 결코 나쁘진 않았다.
일주일은 빨리 지나갔다.
진국은 비행기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곁에 앉아 있던 마평수도 덩달아 표를 확인하곤 웃었다.
“이제 정말로 가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진국의 곁에 앉아 있던 봉수와 애란, 그리고 가이아의 신해수가 진국을 쳐다봤다.
진국은 신해수가 공항에 나와 기쁘기도 했지만 적잖이 놀랐다.
놀란 건 진국뿐 만이 아니었다.
봉수도 애란이도, 마평수 역시 놀랐다.
진국은 어제 신 회장에게 다녀왔던 일이 떠올랐다.
신 회장은 신해수가 이미 한번의 이혼 경력이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사람에 관한 한 철저한 신 회장이었다.
‘너를 키워주고, 훌륭하게 보필할 여자다,
이혼한 걸 흠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걸 훌륭한 경험 쌓았다고 생각해라,
중국 일 끝나면 해수와 결혼하면 어떻겠냐,
결정은 네가 하는 것이다만 내가 보기에 너한테 신해수가 가장 잘 어울린다.’
신 회장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아마도 신 회장이 나서서 공항 배웅을 가라고 했던 듯했다.
보름쯤 뒤에 어차피 상해에서 만날 테지만 사실 공항에서 보니 반가웠다.
하지만 신해수는 사람들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 서서 은은하게 미소만 지었다.
“이거.”
탑승 시간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진국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봉수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냐?”
“병달이가 전해 주라는 거야.”
봉수가 건넨 물건은 둥글고 은빛이 나는, 마치 회중시계 같은 물건이었다.
“뭐야?”
“나침반, 병달이의 행운의 마스코트란다.”
“그걸 왜 나한테?”
“니 어깨 위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렸잖아.”
봉수는 목소리를 깔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진국과 마평수가 가방을 들고 출구로 향했다.
봉수가 진국의 어깨 위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우리 아침에 전철 탈 때마다 무료로 나눠주는 '스포츠한국' 있잖아, 알지?”
“그럼 잘 알지. 그런데 왜?”
“요즘엔 그 신문 보는 재미로 전철 타거든.
차 끌고 오면 막히지, 짜증나지 그래서 말야.
그런데 조금만 늦게 나가도 신문이 없어요.”
“나도 자주 봤지.”
“하하, 봉수 선배도 그 스포츠 신문 보는 게 낙입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가면 못 보겠네요.
혹 모아 놓을 수 있으면 모아서 중국으로 좀 보내 주세요.”
“인터넷으로 보면 되죠.”
“그래도 신문은 쫙 펼쳐서 보는 맛이라는 게 있는 건데…”
마평수가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오늘 네 운세를 보니까 말야, 큰 거상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나왔더라.”
“에이, 그럼 나랑 띠 똑같은 사람은 모두 거상이 되게?”
“다들 그렇게 되면 좋지.
하지만 그럴 수 있는 환경이나 조건이 주어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는 거 아닐까?”
봉수가 진국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부디, 기반 잘 다져놓고 불러라.”
진국은 봉수를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조 팀장, 그 여자 분 상당히 미인입디다.”
비행기는 파란 하늘 속에 떠 있었다.
한동안 헤어지는 감상에 젖어 입을 열지 않았던 마평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
진국은 출국장에서 신해수를 와락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신해수도 주변 사람도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그렇게 영화처럼 자신이 행동하리라곤 꿈에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해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주변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겁니다.”
“어떻게요?”
“가이아 백화점 기획실장인데, 다음 달 상해에 가이아 할인점이 들어섭니다.
그래서 중국에 자주 다니러 와야 한답니다.”
“능력 있는 여자 분을 애인으로 두셨군요.”
마평수가 둥근 창으로 허공에 떠있는 구름을 내다보았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 집사람, 애들 데리고 교육시켜야 한답시고 호주로 나가 있습니다.
벌써 몇 년짼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요즘은 연락도 뜸합니다.
그런데 중국까지 가게 되었으니.”
“그럼 병달이를 선발대로 보내시죠.”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 와이프는 제가 뭘 하든 돈만 많이 벌면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가족이 아니에요.”
마평수가 슬쩍 진국을 쳐다봤다.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아까 그 여자 분하고 결혼하게 되면 교육을 위해서는 뭘 위해서든
같이 외국으로 나가지 않으려면 혼자 보내지 말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겁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의식이 많이 깨 한국 교육에 진저리를 치고 외국으로 조기 유학을 보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전 그래도 이 땅에서 교육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마평수의 이야기가 쓸쓸하게 들렸다.
그래서 그는 퇴근도 가장 늦게 했고 외로움을 잊으려 매사 열심히 일에 매달렸던 모양이었다.
진국도 마평수의 어깨 너머 창밖에 펼쳐진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구름이 비행기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 구름들 사이로 그 동안 만났던 여자들의 얼굴이 뭉실뭉실 떠올랐다.
수영, 채연, 송림, 신해수….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유로웠지만 신해수 만큼은 나름대로 진지했던 듯 싶었다.
“연애할 때랑 달라요, 결혼하면 모든 상황이 바뀝니다.
사실 결혼하면 뭔가 나아지겠다고 막연하게 생각들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매일 볼 수 있으니 좋죠.
그러나 결혼하면 사는 건 두 배로 힘들어지는 겁니다.
나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라 두 배의 책임과 의무가 생기는 겁니다.
저는 처음부터 와이프한테 애들 교육은 한국에서 시켜야 한다고 못 박지 못한 게 후회돼요.
그러니까…”
마평수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저는 사실 말입니다, 아이들만 없다면 혼자 살고 싶습니다.
혼자 살아도 이제 세상은 넉넉하니까요.”
하지만 진국은 어느 집 보다 많은 아이들을 낳아 대가족을 이루는 가정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외롭게 보냈던 어린 시절을 보상받고 싶었다.
그걸 신해수가 받아줄 수 있다면 중국에서 돌아온 뒤 그녀와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 밖으로 멀리 상해의 홍교 공항이 보였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박이 터져라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진국은 공항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이빨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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