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개와 늑대의 시간

제7장 수난기 1

오늘의 쉼터 2015. 2. 1. 09:40

제7장 수난기 1

 

 

봉수는 공항 로비에 서서 진국과 마평수가 탄 비행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진국이 끌어안고 입까지 맞췄던 신해수라는 여자는 먼저 떠나고 애란과 둘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애란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가시죠.”

 

봉수가 먼저 앞장섰다.

 

봉수가 보기에 애란은 요즘 부쩍 살이 빠진 듯했다.

 

전에는 늘 바지 차림이었는데 요즘 들어 치마를 즐겨 입었고

 

어쩌다 바지를 입어도 전에는 넉넉하게 보였던 살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다이어트를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굴엔 더 생기가 돌곤 했는데 오늘은 영 딴판이었다.

 

두 사람은 공항 주차장으로 말없이 걸었다.

 

봉수는 애란의 기분을 맞춰주느라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고마워요.”

 

차에 시동을 걸고 시계를 보았다.

 

모두 퇴근할 시간이었다.

 

“회사로 안 돌아가도 되겠죠?”

 

애란이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렇겠네요.”

 

애란의 목소리가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진국은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병달이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알았어요, 화련씨랑 우리도 그냥 퇴근하죠.

 

그리고 내일 우리끼리 조촐하게 한잔 어떠세요?”

 

병달이 너스레를 떨며 또 술자리 타령을 했다.

 

“너는 니 애인 보고 싶어 안달이면서 어떻게 날마다 술타령이냐?”

 

“제가 언제 술타령 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술 마신 게 지난 주에 동해에 가서 술 마신 거 말고 또 있습니까?”

 

전화상이었지만 투덜거리는 병달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알았어.”

 

“우리 그 회식비도 아직 한참 남았잖아요.”

 

봉수는 통화를 끝내며 웃고 말았다.

 

휴대폰 퓰립을 닫고 문득 애란을 쳐다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봉수는 인천공항 톨게이트를 벗어날 때까지 애란의 눈치만 살폈다.

 

“애란 선배,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봉수는 서먹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애란은 선뜻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애란 선배!”

 

그제야 애란이 봉수를 쳐다봤다.

 

“제게 뭐 물어보셨어요?”

 

애란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느냐구요?”

 

“아, 네~.”

 

애란은 그렇게 대답하고 그만이었다.

 

봉수는 머쓱해져서 더 이상 물을 말이 없었다.

 

봉수의 차가 서울순환고속도로로 올라섰을 때 애란이 봉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봉수씨, 혹시 오늘 시간 있어요?”

 

“시간이요?”

 

“저랑 술 한잔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봉수는 애란의 눈치를 봤다.

 

늘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던 여자가 어쩐 일인가 싶었다.


“시간 없으시면 됐구요.”

 

중국 진출을 준비하면서 해외개발2팀은 사실상 가족처럼 가까워졌다.

 

일주일의 절반은 야근을 했고 점심을 먹어도 저녁을 먹어도 팀원들이 떼거지로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국 먹을 때 파를 골라낸다던가,

 

늘 밥그릇 주변을 지저분하게 해 놓고 먹는다던가,

 

병달 같은 경우엔 맛있는 음식은 죄 자기 앞으로 끌어다 놓는다던가, 하는

 

그런 몇 가지 단점들도 알게 되었고 그게 흉이라기보다 서로를 더 가깝게 만들었던 것이다.

 

봉수는 이미 송화와 선약이 있었다.

 

광화문에서 붉은 티셔츠를 입고 오늘 밤 월드컵 예선전을 치르는 한국 선수들을 응원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런 자리에 나가기엔 조금 늙은 나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린 애인과 사귀려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그래도 봉수는 어린 애인 덕에 여러모로 젊어진 기분이기도 했다.

 

넓은 광장에 나가 어린 친구들과 어울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보면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때론 감동하기도 했다.

 

“시간이 없긴요, 우리 개발팀의 대모님 부탁인데 없어도 만들어야죠.”

 

“선약 있으신 거 아니죠?”

 

애란이 재차 확인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 봉수는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진국이 중국으로 떠나면서 당분간은 한가한 편이긴 했다.

 

그래도 그 한가한 시간에 중국 일이 바빠질 것을 예상해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쪽 판로 개발과

 

관리에 좀 더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런 말을 하려고 술 한잔하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없습니다.”

 

송화가 삐칠 게 걱정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송화는 봉수에게 그야말로 사랑스런 여자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생각지 않았는데 찾아와 주었고

 

봉수의 작품을 위해 선뜻 옷을 벗은 유일한 여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봉수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고향 어머니가 더 늙기 전에 봉수는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송화에게 내색하진 않았다.

 

그러기엔 자신과 송화의 나이 차이가 많았다.

 

게다가 송화와는 한번도 결혼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럼, 오늘 저랑 한잔 하실 수 있으시죠?”

 

“그럼요, 애란 선배가 하시자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흔쾌히 대답을 해 놓고 보니 애란은 한번도 봉수에게 그런 부탁을 했던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봉수는 계속해서 걱정이 되었다.

 

봉수는 차를 몰고 신촌으로 향했다. 송화가 가르쳐 준 술집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돼지 볼때기의 볼 살을 파는 곳인데 고기가 연해 부담이 적고 숙성이 잘 되어 그런지

 

맛도 제법 있는 술집이었다.

 

“이런 집을 어떻게 아셨어요?”

 

봉수는 송화 이야기를 하려다 입을 막았다.

 

“그냥 저냥 술꾼들이랑 다니다 보니까 알게 됐죠.”

 

술집은 방으로 꾸며져 있었다.

 

좌식 의자가 놓여져 있었고 키 작은 칸막이로 테이블이 나누어져 있어 아늑했다.

 

“저 잠시만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송화에게 전화를 걸어주어야 했다.

 

봉수는 화장실로 나와 송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오늘부터는 좀 한가하다면서?”

 

만나기 힘들겠다는 봉수의 이야기에 송화는 맥없이 물었다.

 


“혼자 나왔어?”


봉수는 괜히 애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수영이랑 몇 명 같이 나왔거든.”

 

“오늘은 안 되겠다.”

 

잠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알았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혹시 나 말고 딴 여자 만나는 거 아니지?”

 

봉수는 가슴이 뜨끔했다.

 

“뭐,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나랑 약속을 해 놓고 그런 거면 배신이다.”

 

“알았어.”

 

“나 작업실엔 언제 갈까?”

 

송화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모레 저녁에.”

 

“알았어, 뭐 회사 일 때문인데 내가 어쩌겠어. 오빠 쉬면서 일해, 알았지?”

 

통화가 끝났다.

 

애란 선배를 만나 그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 어쩌면 그 역시 회사 일인 셈이었다.

 

봉수는 자신에게 그렇게 변명했다.

 

봉수는 소변기 앞에 서서 송화를 처음 만날 때를 떠올렸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송화를 만난 게 어제 같은 데

 

벌써 여러 계절이 지나고 있었다.

 

봉수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진국처럼 매사 자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진국을 볼 때면 간혹 주눅이 들곤 했다.

 

오사카에서 망신당할 뻔한 박람회를 처리한 일이나 병달의 애인이 된 인화를 구한 일에서부터

 

자잘한 일처리까지 진국은 매사 자신감 넘친 행동을 보였다.

 

봉수가 보기에 진국은 분명 뭔가 다른 구석이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봉수는 괜한 자격지심을 떨쳐내기라도 하듯 씩씩하게 자리로 걸어갔다.

 

“선배!”

 

애란은 이미 혼자서 소주를 한 병 가까이 비운 상태였다.

 

봉수가 화장실에 다녀온 건 5분 남짓이었다.

 

그런데 애란은 빈 잔에 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봉수는 애란의 손에서 술을 빼앗았다.

 

“제가 벌써 그렇게 많이 마셨나요?”

 

애란이 술병을 쳐다보며 맥없이 웃었다.

 

봉수는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운 후 천천히 애란에게도 따랐다.

 

“뭐 안 좋은 일 있으세요?”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던 터라 봉수는 걱정이 되었다.

 

“아니에요, 그냥 술이 먹고 싶었을 뿐이에요.”

 

애란의 눈이 슬퍼 보였다.

 

봉수는 그녀에게 더 이상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대신 애란이 급하게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막았다.

 

“봉수씨, 내가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지 모르겠어요.”

 

봉수는 애란의 속이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준비해서 잘 되고 있잖아요,

 

우리 팀의 대모가 약한 모습 보이면 어떡해요?”

 

“그래요, 열심히들 일 하셨죠.”

 

애란이 낙담하는 투로 대꾸했다.

 

“오늘 정말 기분이 이상한 거 알죠?”

 

봉수는 애란의 우울한 기분을 달래주려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요?”

 

애란이 다시 잔을 홀짝 비웠다.

 


애란은 봉수와 함께 소주 3병을 비울 때까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하지 않았다.


봉수는 애란을 데리고 송화와 두어 번 갔던 맥주 집으로 향했다.

 

조용한 곳이어서 애란을 위로할 수 있을 듯했다.

 

한편으론 걱정이 됐다.

 

‘설마 여기서 송화를 만나겠어.’

 

봉수는 주문을 한 후 홀 안을 둘러보았다.

 

역시 송화는 보이지 않았다.

 

월드컵 예선전을 보느라 술집도 한산했다.

 

송화 역시 광화문에 있을 터였다.

 

애란은 겉보기에 말짱했다.

 

“선배,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오늘같이 기쁜 날 우울해서야 쓰겠습니까?”

 

“그~그렇죠, 오늘 같이 기쁜 날.”

 

진국의 중국 출장은 해외개발2팀의 첫 결실을 맺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봉수와 팀원들은 스스로 오늘을 기쁜 날이라고 자축하곤 했던 것이다.

 

애란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을 태세였다.

 

입을 꾹 다물고 맥주를 마실 때만 잠깐씩 입을 열었다.

 

봉수는 답답했다.

 

이러려고 애란의 부탁을 들어주었던 게 아니었다.

 

“선배, 평소에 화끈하던 노애란은 어디 갔습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탁 털어놔요.”

 

봉수가 답답해 먼저 입을 열었다.

 

쿠웨이트와 예선전을 벌이고 있는 한국 선수들이 골을 넣었는지

 

거리 쪽에서 환호성과 박수가 울려 퍼졌다.

 

‘내가 이게 무슨 꼴이람, 송화한테 거짓말까지 하면서.’

 

봉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봉수씨.”

 

이제 애란을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애란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하는 말 봉수씨만 알고 있었으면 해요.”

 

애란이 본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잠깐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봉수는 그녀의 눈을 살폈다.

 

짐작이지만 실연을 당한 게 아닌가 싶었다.

 

“실은 봉수씨, 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남자가 있었어요.”

 

그럼 그렇지. 봉수는 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저 많이 변했거든요. 모르시겠어요?”

 

애란은 더 이상 침울한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예전의 모습대로 밝고 활기차게 목소리를 꾸몄다.

 

애란이 허리에 손을 짚고 몸을 위로 쭉 빼 올려 보였다.

 

날씬해지지 않았냐는 뜻 같았다.

 

“그래요, 애란 선배 요즘 들어 많이 날씬해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봉수는 갑자기 겁이 더럭 났다.

 

애란이 매력 없는 여자는 아니지만 봉수에겐 지금 송화가 있었다.

 

그녀가 느닷없이 봉수에게 사랑을 고백해오면 어찌해야 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하지만 그건 봉수가 지레짐작했던 것임이 이내 밝혀졌다.

 

“봉수씨도 그렇고 팀원들도 그렇겠지만ㅡ 저 실은 거의 10kg 가까이 살이 빠졌어요.

 

살만 빼면 탄력을 잃을까봐. 운동도 열심히 했죠.

 

저녁엔 일이 많으니까 새벽에 일어나 열심히 뛰었어요,

 

다 그 사람에게 잘 보이려구요.”

 

봉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그 사람한텐 사랑하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오늘까지 설마했는데 오늘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봉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봉수씨 생각이 맞아요, 진국씨. 나 그 사람 내 생명만큼 좋아했어요.”

 

말을 마치고 애란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봉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떨군 애란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를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 지 몰랐다.

 

왜 진작에 고백이라도 하지 못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 동안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살아왔나 싶었다.

 

그렇다고 진국이 애란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인연이 맞아 서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가슴 아프지 않지만

 

사랑이 일방적일 땐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가슴 아픈 일이라는 걸 봉수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강 실장이 봉수의 대학 동창인 신수정의 이름을 거들먹였던 적이 있었다.


봉수에게 신수정이 지금 애란에게 진국 같은 존재였다.

 

더군다나 신수정은 부유한 집안의 여자였다. 지금이야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하지만

 

신수정은 대학 시절 메이 퀸에 뽑힐 정도로 미모도 훌륭했고,

 

집안도 꽤 넉넉한 편으로 알려져 있었다.

 

자연히 많은 남학생들에겐 흠모의 대상이었고 봉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봉수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후 3년 동안 오로지 신수정만 쳐다보며 살았다.

 

그녀가 하는 짓은 뭐든 아름답고 예뻐 보였다.

 

얼굴을 찡그려도, 벌레를 보고 놀래도, 교수의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려도,

 

술에 취해 구역질을 해도, 어느 날 화장하지 않고 초췌한 얼굴로 나타났을 때에도

 

봉수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누군가에게 시집을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봉수는 이틀 동안 술에 취해 지냈다.

 

가까이 지냈던 진국이 이유를 물었지만 봉수는 그때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이제와 생각해 보니 마음에 남는 추억이 되긴 했지만

 

죽을 만큼 큰 고통은 아니었다는 걸, 가지지 못해 결국 아름답게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애란씨.”

 

봉수는 테이블 아래에 떨어져 있던 그녀의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 잡아주었다.

 

그제야 애란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되더라구요.”

 

“봉수씨 정말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될까요?

 

제 바로 앞에서 일하는 진국씨 얼굴을 보면서 그게 가능할까요?”

 

봉수는 진국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신수정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코지’ 직원들의 전속 보험설계사로 그녀의 이름을 만났을 때 아주 잠시 가슴이 아프긴 했다.

 

예쁘게 살던 여자가, 아무런 부러움 없이 살던 여자가,

 

평생 손에는 물 한번 묻히고 살 것 같지 않던 여자가 생활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하자

 

슬펐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녀를 마음의 부담없이 만나게 된다면 예전에 홀로 사랑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의 사랑을 빌미로 사랑을 쟁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봉수는 하나도 빠짐없이, 코지 전체 직원의 보험설계사로 돌아온 신수정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봉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애란의 얼굴이 평정을 찾기 시작했다.

 

“참, 사람의 일이라는 거 그 속을 듣기 전엔 아무도 몰라요.”

 

애란이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동변상련일까. 봉수도 그녀의 모습이 마음 한 구석에 불쑥 들어온 듯했다.

 

“봉수씨한테 술 한잔하자는 말 잘했네요.

 

퓽?저 회사를 그만둘까 하고도 생각했었거든요.”

 

“그만 두시면 뭘 하시게요.

 

요즘처럼 일자리 구하기 힘든 세상에. 설마 평생 직장을 찾아 훌쩍 떠나려는 건 아니겠죠?”

 

“평생 직장이요?”

 

“뭐, 선 봐서 느닷없이 결혼하면 그게 평생 직장이 되는 거잖아요.”

 

애란의 웃음이 조금 더 밝아졌다.


봉수는 그녀의 웃음을 보자

 

신수정을 훔쳐보던 과거의 아릿한 추억들이 다시 어렴풋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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