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난봉기 12
“그냥 함께 다 같이 가죠, 뭘.”
병달이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뭐, 조 팀장님이 같이 가기로 하신 여자분들만 괜찮다면 단체 엠티처럼 다녀오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럼 우리 단합대회도 하고 팀장님은 팀장님 대로 데이트하는 거구요.”
진국은 머리를 굴렸다.
채연이 송림과 같이 간다면 둘만의 은밀한 시간을 갖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신해수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께름칙했다.
“그래도 오늘 떠나면 내일 돌아와야 하잖아.”
“우리 날밤 새는 데 이골이 났잖아요.”
“그런데?”
“일요일까지 동해에서 놀다가 밤늦게 출발해서 아침에 출근하면 되잖아요.
요즘엔 길도 뻥 뚫려서 서울까지 오는 시간도 얼마 안 걸리고 새벽에 출발하면 차도 안 막힐테고.”
“남자들이야 괜찮지만 여자들은 좀 그렇잖아.”
병달이 오른손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팀장님이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딸린 거죠.
팀장님의 권한으로 다들 참석하라고 하면 할 거고.
그리고 지금 같으면 화련씨도 그렇고 애란 선배도 얼씨구나 하고 따라 나설 걸요.
문제는 팀장님이 말한 그 두 여자 분이 문제지.
팀장님께서 은밀한 여행을 준비하셨던 거 같은데 그게 쫌 섭섭하겠지만 말입니다.”
“내가 두 여자랑 무슨 은밀한 여행을 하겠냐.”
진국이 병달의 옆구리를 찔렀다.
“에이, 얼굴이 빨개졌는데요.”
병달이 진국의 얼굴을 가리키며 이기죽거렸다.
“이왕이면 우리 산을 탈까?”
“그래요, 그게 좋겠네. 마침 보름이니 달빛도 좋고 회식비 두둑하니까
이 돈으로 등산화나 등산조끼도 충분히 장만할 수 있겠고.”
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문제는 채연과 송림이었다.
만약 두 여자가 반기지 않으면 채연과의 약속을 없던 일로 하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진국이 채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는 괜찮은데 송림이가 어떨 지 모르겠어요. 바로 전화 드릴게요.”
팀원들은 다들 퇴근 준비를 하고 진국을 기다렸다.
병달은 회사 앞으로 15인승 버스를 이미 렌트해 놓은 상황이었다.
“송림이도 괜찮대요. 오랜만에 회사 사람들 얼굴도 보고 싶다고 그러네요.”
“그럼 회사 앞에서 봅시다.”
퇴근 후 두 시간만에 헤어졌던 팀원들이 다시 모였다.
이미 등산할 복장으로 채연과 송림도 모습을 보였다.
애란은 입사 동기였던 송림을 무척 반겼다.
이렇게 계획하지 않았던 여행이 준비되었다.
팀원들은 일은 모두 잊은 듯 흥겨웠다.
병달이 운전대를 스스로 운전대를 잡았으면서도 계속 투덜댔다.
“너 뭐가 또 불만이냐?”
“아니 이런 좋은 여행에 나만 가서 쓰겠냐 이 말입니다.”
진국이 구해주었던 인화, 그녀에 대한 병달의 사랑은 지극했다.
“팀원들만 동의하면 같이 간다.”
“정말입니까?”
병달이 노래를 부르듯 경쾌하게 말했다.
버스는 오대산 소금강 쪽으로 들어섰다.
해가 길어져 그런지 아직 산 능선에 노을이 남아 있었다.
야간산행이기에 등반길이 험하지 않은 코스로 택한 길이었다.
오대산 정상까지 오르기는 무리였다.
왕복 3시간 남짓한 코스로 길을 잡아 아홉 명이 소금강 쪽으로 묵묵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행이란 이렇게 느닷없이 떠나야 제 맛이었다.
진국은 답답한 사무실에 처박혀 지낸 시간들이 떠올랐다. 일에 몰입해 있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내다보면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진국은 일이고 뭐고 훌쩍 털어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었다.
날이 맑으면 맑은 대로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또 그런 대로 마음이 뒤숭숭하곤 했다.
다들 산에 오를 일이 없어 그런지 헉헉댔다.
느닷없는 산행이 더욱 그럴 터였다.
“생각보다 힘드네요.”
앞서 가던 채연이 진국을 돌아보며 말했다.
늘 치마를 입고 다니던 그녀가 몸에 착 달라붙는 바지를 입어 더 육감적으로 보였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야간산행이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제법 사람들로 붐볐다.
“그래도 색다르고 좋네요. 오길 잘했어요.”
채연이 한참 뒤에서 따라 오는 송림을 건너다보았다.
채연과 송림이 보통 사이는 아니라는 기분은 여전했다.
“회식이라고 늘 술이나 먹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진국과 비슷한 속도로 걷던 소화련이 힘에 겨운지 진국의 팔을 잡았다.
“우리 자주 이렇게 다녀요.”
병달과 인화는 이미 폭포에 이르러 디카를 찍느라 분주했다.
그곳에서 팀원들은 일차 쉬기로 했다. 올라온 시간을 감안해 보니 한 시간 남짓 걸린 거리였다.
그래도 날이 덥고 간혹 가파른 길을 만난 터라 다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팀장님, 혹시 열정이 무엇으로부터 나오는지 아세요?”
곁에 앉아 물을 마시던 소화련이 느닷없이 물었다.
“열정은 왜요?”
“저 요즘 의욕 상실이에요.
강 실장님이 강짜 부리는 것도 그렇고 들리는 소문도 그렇고.”
“들리는 소문이라니?”
“우리 사장님 뭐 바지나 다름없다고.”
그 소문은 이미 진작에 사내에 떠돌았다.
타성에 젖어 회사엘 다녔다면 어쩌면 진작에 회사를 그만 두었을 지도 몰랐다.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진국을 ‘코지’에 붙잡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십대 중반만 넘으면 이미 퇴직을 걱정해야 하는 게 요즘의 샐러리맨들의 분위기였다.
불과 십년도 채 일하지 않아 다른 삶을 걱정해야하는 마당에 가장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나이에
그냥 타성에 젖어서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로 의욕이 상실되면 어떡합니까?”
소화련과 진국을 중심으로 팀원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나는 오히려 그러니까 더 의욕이 생기는데요.
열정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었습니까?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열정이란 억압과 구속에서 나오는 거 같아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린 훌륭한 억압과 구속 속에서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억압과 구속이라……”
채연이 진국의 말 중에 구속이라는 말을 되새김질했다.
“정말로 그런 거 같네요.”
진국의 말 때문인지 갑자기 좌중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산에서 내려와 강릉에 도착해보니 이미 자정이 가까웠다.
힘은 들었지만 팀원들은 흥겨워했다.
숙소로 정한 콘도로 돌아와 각자 샤워를 끝낸 후 거실로 모였다.
최근에 지은 콘도라 방도 깨끗했고 큰 평형이어서 방 네 개에 방마다 욕실이 딸려 있는 구조라
지내기엔 불편함이 없었다.
전망 또한 동해가 마주하고 있어 더없이 훌륭했다.
먼바다엔 오징어잡이 배들이 집어등을 밝히고 반딧불처럼 떠있었다.
진국은 팀원들이 샤워를 하는 동안 술과 안주를 준비했다.
팀원들이 거실로 모였을 땐 산해진미가 준비되어 있었다.
각종 회에서 게찜까지 없는 게 없었다.
“매일 이런 회식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병달이 게 다리를 집어들고 인화에게 건네며 능청을 떨었다.
인화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
병달의 사랑은 그야말로 지극했다.
“병달씨 국수는 언제 먹여 줄 거야?”
병달이 인화를 쳐다보았다.
“가을쯤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애란이 농담으로 물었는데 병달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인화의 얼굴이 빨개졌다.
소화련이 눈을 흘겼고 애란과 송림 채연이 깔깔거렸다.
진국이 자리를 정리했다.
“다들 가까이 앉읍시다.
어쨌든 사장님이 특별히 생각해서 내린 격려금으로 쓰는 거니까 마음껏 즐겨 봅시다.
대신 여기에선 누구도 일 얘기는 안 하는 겁니다.
그냥 사는 얘기, 할 얘기가 없으면 자기 살아온 얘기나 하는 겁니다.”
채연과 송림은 진국의 곁에 앉았다.
두 여자는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반바지 차림이었다.
소화련 역시 짧은 반바지에 민 소매를 입고 있었다.
애란과 인화는 무릎 위로 살짝 올라가는 치마 차림이었다.
진국은 눈이 즐거웠다.
아무리 여자와 많은 날들 살을 섞어도 여자의 몸은 항상 남자를 즐겁게 하는 모양이었다.
진국은 채연과 송림의 무릎 쪽에 눈길을 두었다가 자신이 너무 주책없는 듯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땀을 흘린 뒤라 그런지 술도 달고 안주도 달았다.
하나 둘 여행과 산행의 피로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병달과 인화는 진작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은 사람은 진국과 봉수 그리고 채연과 송림 네 사람이었다.
“같이 일하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송림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잠깐 휴직하신 거잖아요.”
“그런데 막상 다시 복직하려니까 맘처럼 쉽지 않네요.”
“더 늦어지면 힘들어요.”
진국은 봉수가 한때 송림을 좋아했다는 기억이 났다.
그래서 그녀의 복직을 염려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복직하는 게 쉽지 않을 듯했다.
전반적으로 경기도 좋지 않았고 회사의 사정 역시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진국은 빈 잔들에 술을 따랐다.
그때 봉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봉수가 휴대폰을 들고 자리를 떴다.
“아무튼 다들 짝 찾아가는구만.”
잠시 후 봉수가 거실로 나와 진국을 불렀다.
“왜?”
“송화가 지금 여기 왔단다. 잠깐 나가봐야 할 거 같은데.”
“정성이다.”
“그게 아니라 엠티 왔대. 잠깐 얼굴이나 보고 들어올게.”
봉수도 옷을 챙겨 입고 자리를 떴다. 이제 남은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갑자기 세 사람만 남자 진국은 술이 깨는 듯했다.
송림이 같이 있으니 채연에게 딱히 할 이야기도 없었다.
“진국씨, 우리 채연이 좋아하죠?”
술기운 때문인지 송림은 거침없이 얘기했다.
그런데 송림이 말한 ‘우리’라는 표현이 애매했다.
“조, 좋아하긴요.”
“좋아하시면서.”
송림이 채연을 진국 쪽으로 슬쩍 밀었다.
채연도 못 이기는 척 진국 쪽으로 무너졌다.
“왜 밀구 그래?”
“너도 좋아하잖아.”
진국은 깜짝 놀란 마음을 숨기려 술잔을 들었다.
“진국씨 좋은 사람이잖아.”
“우리 채연이가 늘 빚 갚아야 한다고 몸살이 다 났어요. 어쨌든 저도 고맙구요.”
송림이 왜 고마워하지? 진국은 묘한 의문이 들었다.
“이 콘도에 가족 온천 있죠? 아까 콘도 안내서 보니까 있던데.”
“네, 있더라구요. 내일 일어나서 다들 온천 갔다가 배낚시나 한번 가죠.”
“낚시는 무슨 낚시, 지금 온천 안 가실래요?”
송림은 채연이 눈을 흘기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는 진국씨 그런 거 안 좋아할 수도 있잖아.”
진국은 두 사람의 대화가 점점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송림은 진국과 채연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술도 많이 먹었는데 무슨 온천이니?”
“뭘 적당히 취해서 더 좋기만 한데.”
송림이 막무가내로 진국과 채연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안내 표지판을 따라 가족 온천을 찾아갔다.
“이 시간에 안 해.”
맥없이 흐트러지는 말투 때문에 채연의 의사가 분명하게 와 닿지 않았다.
“요즘 24시간 안 하는 데가 어딨어. 일단 가 보자고.”
송림의 말대로 온천은 24시간 운영했다.
송림이 가족탕을 찾자 졸음이 잔뜩 든 눈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던
남자 종업원이 수영복 필요하냐고 물었다.
“아뇨.”
송림이 맹랑하게 말했다. 진국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송림은 남자 종업원이 안내해주는 대로 두 사람을 밀고 갔다.
진국은 점점 더 이상해지는 분위기 때문에 완전히 술이 다 깨고 말았다.
난감했지만 도로 물리는 게 더 우스운 꼴이 될 거 같았다.
“안에서 잠글 수 있습니다.”
남자는 세 사람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다간 사라졌다.
가족탕은 정자처럼 꾸며져 있었고 탕과 휴게실로 나누어져 있었다.
탕에서도 동해가 한눈에 보였다.
“아까 안내서 보니까 탕에서 바다가 보인다고 하더라.
그래서 꼭 오겠다고 별렀거든. 진짜 왔네.”
송림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송림아, 진국씨 의사도 중요한 거잖아.”
“알아, 하지만 분명하게 알아야 할 일도 있잖아.”
온천으로 들어온 뒤 송림은 처음 진지하게 말했다.
송림은 익숙하게 전화기를 들어 맥주 세 병을 시켰다.
“진국씨 술 더 하실 수 있죠?”
분위기가 묘하게 흘렀지만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
송림은 탕 안에 발을 담그고 장난을 쳤다.
잠시 뒤 맥주와 안주가 왔고 송림은 탕 가까이 술판을 벌렸다.
채연도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다가와 앉았다.
“진국씨, 채연이 정말 예쁘죠?”
“예쁘죠.”
“그래서 좋아하시죠?”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도 좋아해요.”
진국은 술잔을 들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설마 했는데.
“그럼, 혹시 동성애자?”
진국은 이런 마당에 빙빙 돌려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죠, 우린 동성애자가 아니라 양성애잔 거 같아요.
저도 그렇고 채연이도 그렇고… 남자도 좋고 여자도 좋고 그렇거든요.”
진국은 머리 속이 얼른 정리가 되지 않았다.
“사실 저 진국씨가 채연이 좋아해서 질투 많이 했어요.”
“그, 그랬었니?”
채연도 모르는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럼, 양성애자라는 건 남자하고도 자고… 여자하고도 놀 수 있다 그런 말입니까?”
“그런 셈이죠.”
송림은 이미 셔츠를 벗고 반바지를 벗어 던졌다.
속옷 차림이었다.
진국은 어찌할 바를 몰라 눈을 돌렸다.
언뜻 보긴 했지만 꽤 육감적인 몸매였고 움직일 때마다 발정난 짐승의 암내가 풍겼다.
회사에서 알았던, 정숙하고 단정한 송림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국 앞에서 자유분방하고 거침이 없었다.
“송림아…”
더 재미있는 사실은 채연이 그런 송림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온천에 왔으면 온천을 해야지.”
송림은 속옷마저 벗어 던지더니 탕 안으로 들어갔다.
진국은 그저 넋놓고 송림이 하는 양만 지켜보았다.
“뭐해?”
송림의 채근에 채연은 진국의 눈치를 이리저리 보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늘 따라 송림이가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나, 솔직히 말할게. 실은 너랑 진국씨랑 둘이서만 하게 할 순 없었어.”
“얘는, 내가 하긴 뭘 하니?”
두 여자는 이제 진국을 재촉했다.
얼떨결에 반바지와 반팔 셔츠 차림으로 탕 안으로 불쑥 들어간 진국을 향해
“옷을 그냥 입고 들어오면 어떡해요?”라고 쏘아붙였다.
그리곤 진국의 팔을 들게 한 뒤 셔츠를 벗기고 반바지까지 벗겨주었다.
“꼭 뭘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세 사람이 온천이나 하자는 거예요.”
송림의 말에 채연이 키득거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까요? 우린 그냥 나체촌에 와 있는 거라고.”
진국은 어안이 벙벙했다.
술 취한 정신에도 딱히 손해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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