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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간발의 차이-1

오늘의 쉼터 2015. 1. 31. 15:41

(8) 간발의 차이-1 

 

 

 

 

 

 

지완은 밖에 널어놓았던 빨래를 잔뜩 안고 거실로 들어온다.
 
지완은 마른 빨래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뽀송뽀송하고 좋은 향기가 난다.
 
하늘은 청명하지만 초가을볕은 아직 타오르는 불꽃 같다.
 
냉방된 거실 창으로 잘 가꿔진 정원과 그 뒤로 나무가 울울한 산이 보인다.
 
오랜만에 갖는 여유다. 연년생인 개구쟁이 두 아들 때문에 정신없는 여름방학을 보냈다.
 
어차피 주부에게 무슨 방학이 있겠는가.
 
방학이면 꼼짝없이 더 바쁜 게 대한민국 엄마 아닌가.
 
가을학기가 시작되어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으로 가니 그녀야말로 방학을 맞는 기분이다.

빨래를 개다 지완은 한숨을 쉰다.
 
지완이 집어든 흰색의 브래지어와 팬티.
 
재작년에 뉴욕에 갔을 때 사온 오리지널 빅토리아 시크릿이다.
 
청순하면서도 섹시하기 그지없는 백조의 깃털로 만든 것 같은 그것이 거무스레하게 변색했다.
 
얼마 전에 바뀐 파출부가 아이들 청바지와 함께 세탁기에 돌려버린 탓이다.
 
60대의 늙은 파출부를 탓하기 전에 인규를 탓해야 하는 걸까.
 
어쩌다 분기별로 때우고 넘어가는 섹스. 빅토리아 시크릿의 속옷을 사는 순간,
 
사실 지완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의 섹스를 은밀히 꿈꾸었다.
 
그러나 시크릿을 간직할 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꿩 대신 닭이라고, 올해부터는 재고정리하듯 남편에게 염가봉사하려 했다.

그러나 지난 봄, 인규가 취해서 준비 없이 급히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실상 그 속옷을 뽐낼 기회는 며칠 전 그녀의 생일날이 처음이었다.
 
아이들과 집 근처 레스토랑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 와인을 한 잔씩 나눠 마셨다.
 
그가 침대에 눕는 기척을 듣고, 재빨리 욕실로 가서 샤워하고 드레스룸의 서랍장에
 
고이 간직했던 빅토리아 시크릿을 꺼내 입었다.
 
거울을 보며 아랫배에 힘을 주니 아직은 쓸 만한 몸매였다.
 
44사이즈는 아니지만, 아직 55사이즈로는 널널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침실로 돌아오니 남편은 이미 곯아떨어져 코까지 골고 있었다.

그 대신 베드 테이블 위에는 꿈에도 그리던 마놀로 블라닉의 샌들이
 
조명을 받으며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언젠가 ‘섹스 앤 더 시티’ 영화를 보고 와서
 
그 구두가 눈에 삼삼하여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이 구두쇠가 어떻게 이런 구두를 사올 생각을 다 했을까?
 
이걸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지완도 가끔 비싼 옷을 사는 경우는 있어도 구두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그저 편한 신발이 최고였다.
 
키가 큰 지완은 늘 플랫슈즈를 신곤 했다.
 
그러나 내심 요즘 유행하는 살인적인 높이의 킬힐을 신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왠지 가슴이 서늘해졌다.
 
원래 애인이나 부부 사이엔 구두를 선물하지 않는 터부가 있다.
 
구두를 선물 받은 사람이 도망간다는 속설 말이다.
 
차라리 구두를 사라고 현금을 줄 것이지.
 
갖고 싶던 구두를 선물하는 이 센스를 칭송해야 하나…센스는 무슨!
 
구두를 신겨주며 발에다 키스를 해주진 못할망정 그 새를 못 참고 코를 골다니!
 
생각 같아서는 훌륭한 흉기도 될 것 같은 하이힐 굽으로
 
자는 남편을 찍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잠깐…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엽기적인 상상일 뿐, 구두는 너무도 요염하고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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