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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좁은 문 <끝>

오늘의 쉼터 2015. 1. 10. 12:05

4. 좁은 문 - 앙드레 지드

 

당황해 버린 나는 대답할 말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만일 오늘이라도 너도 함께 이 설교집과 명상록을 읽어야 한다면 나는...."
"하지만."하고 그녀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네가 이런 걸 읽은 것을 보면 나는 서글퍼질 거야!
나는 네가 이런 것보다는 훨씬 훌륭한 것을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해."

그녀는 지극히 간결한 어조로 또 이처럼 자기와 나의 생을 분리시키는
이러한 말이 나를 얼마나 슬프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염두에도 없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의 머리는 확확 달아 올랐다.
나는 좀 더 이야기하고 그리고 울고 싶었다.
만일 그녀가 내 눈물을 보았더라면 굴북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벽난로 위에 팔꿈치를 짚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괴로움을 보지 못했는지
혹은 보고도 못본 체하는지 계속해서 꽃만 매만지고 있었다.
이때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이러다간 점심 먹을 채비를 못하겠네."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서 가 줘."
그러고 나서 무슨 장난 이야기나 하듯 말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해."
그 이야기는 다시 계속되지 않았다.
늘 나와는 엇갈리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나를 피해서가 아니라 단지 뜻하지 않았던 일이
훨씬 더 급박하고도 중요하게 닥쳐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나의 이 차례라 하는 것은 그 끊임없이 생겨나는 집안 일이라든가
꼭 해야 될 곳간 일의 감독이라든가, 소작인들이나 또는
그때 그녀가 점점 더 열중하게 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방문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일이 다 끝난 뒤에야 돌아오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 나머지 시간, 극히 짧은 시간밖에는 차례가 오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분주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또 나 자신 그녀 뒤를 따라다니기를 단념했기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나를 소홀히 하고 있는가 하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해보아도 그러한 느낌은 더욱 절실해졌다.
알리싸와 잠시나마 이야기를 하게 될 경우에도
그것은 어설픈 대화에 지나지 않았고 어린애 장난을 시중들어 주는 것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막연히 미소를 지으며 내 곁을 재빨리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 어느 때보다도 내게서 멀리 떠나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미소에는 가끔 멸시에 가까운 표정,
어딘가 비꼬는 듯한 표정이 섞여 있는 것 같았고
또 그렇게 내 욕망을 피하는 데 재미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스스로 나무람을 받을 짓을 하고 싶지 않고
또 내가 무엇을 그녀에게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될 뿐 아니라
무엇을 그녀에게 비난해야 할지도 몰라
나는 마침내 모든 불만을 내 자신에게로 돌려 버렸다.

그처럼 크나큰 행복을 기대했던 며칠이 이렇게 흘러가 버렸다.
나는 날이 흘러가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
날짜를 늘여 보고 싶지도 않았고 시간의 흐름을 늦추고 싶지도 않았다.
그토록 나의 고통은 하루하루 커가기만 했다.

그러나 내가 떠나기 이틀 전 알리싸가 나를 따라
폐광이 된 이회암 채굴터 근처에 있는 그 벤치에 함께 갔을 때,
안개가 끼지 않아 지평선 끝까지 모든 것이 하나하나 파랗게 물들어 있었고,
지나간 날의 가장 어렴풋한 추억마저 뚜렷이 생각나는
그러한 어느 맑은 가을 저녁이었다.
나는 참다 못해 어떤 행복을 잃었기에 지금
난 이다지도 불행하게 되었나 하는 것을 말해 보았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하고 그녀는 곧 대답했다.
"지금 너는 어떤 환영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는 거야."
"아니야, 환영이 아니야, 알리싸."
"마음 속에 그리는 어떤 영상과...."
"아아! 난 그런 걸 만들어 내고 있는 게 아니야.
알리싸는 정말 나의 여인이었어. 나는 지금 옛날의 그 알리싸를 부르고 있어.
알리싸! 너는 내가 사랑하던 여자였어.
그때의 너를 너는 지금 어떻게 해버렸지? 어떻게 해버렸어?"

그녀는 잠시 동안 말없이 천천히 꽃 산 송이를 꺾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로옴, 왜 그전보다도 나를 덜 사랑한다고 솔직히 말하지 못해?"
"왜냐구? 그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건 정말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야."

나는 분노에 차 소리쳤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널 사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야."
"지금의 나를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옛날의 나를 그리워하고!"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 하면서 또 어깨를 약간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나는 내 사랑을 과거에 붙여 둘 수는 없어."

땅이 내 발밑에서 꺼지는 듯싶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에고 잡히는 대로 매달렸다.

"사랑도 모든 다른 것도 함께 흘러가 버리는 거야."
"내 사랑은 내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거야."
"그것도 차츰 기울어 갈 거야.
네가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알리싸는 이젠 단지 너의 추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야.
그녀를 사랑한 적도 있었지, 하고 네가 단순히 추억에 잠길 날이 올 거야."

"너는 마치 다른 무엇이 내 마음 속에서 알리싸에 대치될 수 있거나
또는 애 마음이 이제 더 사랑을 해서는 안된다는 투로 말하고 있어.
너 자신 나를 사랑해 왔다는 것은 다 잊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괴롭히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듯이 보일 수가 있어?"

나는 파랗게 질린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냐, 아냐. 알리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아?"
나는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더욱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는데, 왜 못하지?"
"무슨 말을?"
"나는 나이가 많아."
"쓸데없는 소리."

나는 그 당장 나도 또한 그녀만큼 나이를 더 먹었으며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언제나 다름이 없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유일한 기회는 이렇게 해서 지나가 버렸다.
나는 말다툼에 끌려들어감으로써 모든 유리한 점을 포기한 폭이 됐다.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나는 그녀와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을 품고 또
그때까지 내가 '덕'이라고 부르던 것에 대한 막연한 혐오감과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그 집념에 대한 울화에 가득 찬 채 퐁궤즈마르를 떠났다.
이 마지막 해후에서 내 사랑을 너무 과장했던 나마지
나는 모든 열정을 소비해 버린 것 같았다.
처음 내가 항변해 보려던 알리싸의 말 한 마디가
내 항변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생생하고 의기 양양하게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녀의 말이 맞을 거야,
난 이제까지 환영만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사랑했었고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알리싸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거야...
그래! 우리는 나이가 든 거야! 내 마음을 얼어붙게 한
그녀의 멋없는 변모도 결국은 자연스러운 일에 지나지 않는 거야.

내가 그녀를 조금씩 조금씩 높여 갔고
내가 좋아하던 모든 것으로 그녀를 장식하면서
그녀를 마음속에서 우상화했다고 한들
그러한 내 노력에서 지금 피로 외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저 혼자 있게 되자마자 알리싸는 자기의 수준, 그 평범한 수준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내려가 버리자 나는 사랑할 기분이 내키지 않게 되었다.
아아!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그녀를 올려 놓았던
그 높은 곳에서 다시 그녀와 함께 있으려던 그 덕행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도 이제는 얼마나 어리석고 터무니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인가!
조금만 긍지가 덜했던들 우리의 사랑은 순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상이 없이는 사랑에의 집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고집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충실한 것도 아니다.
충실하다면 그것은 과오에 대해서 충실할 뿐이다.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자인하는 것이 가정 현명한 일이 아닐까?

그러던 때에 아테네 학원에 추천을 받아
나는 별다른 야망도 흥미도 없이 다만 떠난다는 생각에서,
달아나 버리기나 하는 것처럼 즐거워서 입학을 하기로 했다.

그런대로 나는 다시 한번  알리싸를 만났다.
그것은 3년 후 여름도  끝날 무렵이었다.
열 달 전에 나는 그녀의 편지로
삼촌이  별세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나는 여행을 하고 있었던  팔레스티나에서
꽤 긴 답장을 부쳤지만 종내 회답이 없었다.

르아브르에 있던 내가 어떤 구실로 자연스럽게
퐁궤즈마르에까지 가게 되었던 것인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알리싸가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홀로 있지 않으면 어쩔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나는 그곳에 갈 것이라고 예고도 하지 않았다.
여느 때 방문하는 것처럼 찾아가는 것이 싫어서 나는 이렇다 할 생각 없이 걸어갔다.
들어가 볼 것인가? 그래 그렇게 하자.
나는 단지 홀로 그 가로수 길을 거닐다가 혹시 지금도 가끔
그녀가 와서 앉을지도 모를 벤치 위에서 앉아 보자...
그리고 나는 내가 가버린 후에 내가 다녀갔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리려면
어떤 표시를 남겨야 할 것인가 하는 것까지 궁리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천천히 걸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기로 결심을 하자 내 마음을 졸라매고 있던
쓰라린 슬픔은 거의 감미로운 애수로 바뀌었다.

나는 벌써 가로수가 있는 길까지 이르렀다.
나는 들키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농가의 안마당을 구분하고 있는 둑을 따라 길가를 걸었다.
나는 이 둑의 한 지점에서 올라갔다.
낯선 정원사가 오솔길에서 제초 작업을 하고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새로 세워진 울타리가 안쪽을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는 발자국소리를 듣고 개가 짖었다.
좀 더 나아가 가로수길이 끝나는 곳엣 나는 흙담이 있는 바른편으로 돌았다.
그러고는 이제 막 걸어온 길과는 병행되는
너도밤나무 숲이 있는 곳을 향해 채소밭의 그 비밀 문 앞을 지나갔다.
그때 문득 이 문을 통해 정원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안의 빗장이 퍽 약해서 나는 어깨로 밀어 부술까 하고 생각했다.
바로 이때 발자국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담이 움푹 들어간 곳에 몸을 숨겼다.
정원에서 나오는 것이 누구인지 나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발자국소리를 듣고 그것이 알리싸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몇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가냘픈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제로옴이야?...."

심하게 고동을 치던 내 심상이 딱 멈추었다.
그러고는 막혀 버린 나의 목에서 단 한 마디 말도 나오지 못하는 동안
그녀는 좀 더 힘을 주어 되풀이해 불렀다.
"제로옴, 너지?"
그녀가 나를 이렇게 부르는 소리를 듣자
나는 너무도 벅찬 감동에 못이겨 무릎을 끊고 앉았다.
여전히 내가 대답을 못하자 알리싸는 몇 걸음 걸어나와 담을 돌았다.
그러자 나는 내 몸에 알리싸를 느꼈다.
그녀는 당장에 보기가 두려운 듯이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내게로 몸을 굽히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녀의 그 가냘픈 두 손에 마구 입술을 갖다댔다.

"왜 숨었지?"
그녀는 헤어져 있던 3년간이
불과 며칠 동안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나인 줄 알았어?"
"기다리고 있었어."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는 너무나도 놀라서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풀이할 뿐이었다.
내가 여전히 무릎을 끓고 있자니까,
"벤치로 가자."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래, 나는 다시 한번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사흘 전부터 나는 저녁마다 이곳에 와서 오늘처럼 너를 불렀어.
왜 대답을 하지 않았지?"

"네가 그렇게 갑자기 오지 않았던들 난 너를 보지 못하고 떠났을 거야."
나는 기절할 뻔했던 감동을 억누르면서 처음 말했다.
"마침 르아브르를 지나던 길이라 저 가로수 길을 좀 거닐어 보고
정원 주변도 돌아보고, 요즘도 네가 와서 앉을 듯 싶은
이회암 채굴터에 있는 그 벤치에서 잠시 쉬어볼까 했을 따름이야. 그러고는...."
"사흘 전부터 저녁마다 이곳에 와서 내가 무엇을 읽었나 좀 봐."

그녀는 내 말을 막으면서 한 다발의 편지를 내밀었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보낸 편지들이었다.
이때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야위고 파리해진 그녀의 모습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내 팔에 기대 의지해 있으면서도
그녀는 춥거나 혹은 겁에 질린 듯 내게 바짝 붙어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복상 중이었다.
모자 대신 머리에 쓰고 있던 검은 베일이 그녀의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금시 기절할 것 같았다.

나는 요즈음 퐁궤즈마르에 그녀 혼자 있는지의 여부가 궁금해 물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로베르가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8월에는 줄리에뜨와 에뜨와르,
그리고 그들의 세 아이가 와서 한 달 동안 함께 지내고 갔다고도 했다.
우리는 벤치까지 왔다. 우리는 앉았다.
그러나 얼마 동안 우리의 대화는 여전히 진부한 소식을 묻는 정도였다.
그녀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은 기분으로 이제는 내가
일에 대한 흥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그녀가 깨달아 주었으면 싶었다.

그녀가 전에 나를 실망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보였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원한과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 차서
될 수 있는 대로 쌀쌀하게 아야기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때때로 용솟음쳐 올라오는 감동에
목소리가 떨려나와 스스로도 원망스러웠다.
얼마 전부터 한 조각 구름에 가리어 있던 석양이
우리 맞은편 지평선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는 턴 빈 들판을 떨리는 낙조로 가득 채우고
우리 발 밑에 펼쳐 있는 좁은 골짜기를 느닷없이
붉은 빛으로 뒤덮더니 이윽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황홀해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 빛나는 도취경이 다시 한번 나를 휘감고
나의 뼈속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끼자 원망의 마음은 사라져 버리고
마음 속에서는 사랑의 속삭임만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몸을 굽혀 내게 기대고 있던 알리싸가 일어섰다.
그녀가 웃옷 속에서 보드라운 종이에 싼 조그마한 물건을 꺼내
내게 내밀려다가 망설이듯 멈추어 버리는 것을 의아해서 바라보자.

"자, 제로옴, 이건 나의 자색 수정 십자가야.
오래 전부터 네게 주고 싶었어.
사흘 전서부터 저녁마다 이렇게 가지고 왔어."
"그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나는 아주 투명스럽게 물었다.
"나에 대한 추억으로 이걸 간직했다가 너의 딸에게 주어."
"딸이라니?"
무슨 말인지 깨닫지를 못해 나는 알리싸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조용히 내 말을 잘 들어줘, 부탁이야.
아니, 나를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 그렇지 않아도 말하기가 힘들어.
하지만 이것은 꼭 이야기하고 싶어.
이것 봐, 제로옴, 언젠가는 결혼할 것 아냐? 아니, 대답하지 말아.
말을 막지 말아 줘. 부탁이야.
나는 단지 내가 너를 퍽 사랑했다는 것을 네가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그리고...벌써 오래 전부터, 3년 전부터...
네가 좋아하던 이 조그마한 십자가를 너의 딸이
어느 날 누가 준 것인지도 모르면서
나의 기념으로 달아줄 날이 올 것을 생각해 보았어...
그리고 어쩌면 그 애에게... 내 이름을 붙여 줄 수도 있으리라고...."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끊었다.
나는 적의에 찬 어조로 소리쳤다.
"왜 네가 직접 주지 않고?"

그녀는 말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의 입술은 마치 흐느껴 우는 어린애의 입술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눈길은 얼굴을
초인간적이며 천사와 같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알리싸! 내가 누구와 결혼을 하겠어?
내가 너밖에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아...."
그리고는 갑자기 미친 듯이 난폭하게 그녀를 껴안으면서 나는 마구 키스를 했다.
얼마동안 나는 거의 뒤로 몸을 젖힌 채,
온몸을 내맡긴 듯한 그녀를 꼭 껴안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길이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눈시울이 닫혀지며
비길 데 없을이만큼 뚜렷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 서로를 불쌍히 여겨 줘, 제로옴. 우리의 사랑에 상처를 주지 마."
아마 그때도 그녀는 말했을 것이다.
"비겁한 짓은 하지 말아."

혹 이것은 내 자신 스스로 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갑자기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경건한 마음으로
그녀를 두 팔로 감싸면서 말했다.
"그렇게도 나를 사랑했다면 어째서 항상 나를 밀어냈어?
이것 봐! 처음에 나는 줄리에뜨의 결혼을 기다렸어.
너도 또한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녀는 이제 행복해. 이건 너 자신이 네게 한 이야기야.
오랫동안 나는 네가 아버지를 모시고 계속 그 곁에서 지내길 바란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우리 단 둘 뿐 아냐?"
"오오! 지난 일엔 마음을 쓰지 않기로 해."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제는 이미 페이지를 넘기고 난 뒤야."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어, 알리싸!"

"아니야  제로옴, 이제는 늦었어.
사랑을 통해 우리가 서로를 위해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을 엿보게 되었을 때부터 때는 이미 늦었던 거야.
네 덕택으로 내 꿈은 그처럼 높이높이 올라갔고
따라서 이지는 인간 세상의 어떤 충족감도
그것을 손상시키진 못할 것일까 하고 나는 종종 생각해 봤어.
우리의 사랑이 완전치 못한 순간부터
나는 우리의 사랑을 지탱해 낼 수가 없을 것 같았어."
"서로가 떨어져 살 때 우리의 삶이 어떠한 것일까 생각해 봤어?"
"아니! 전혀."
"이젠 알겠지!
나는 3년 전부터 테가 없어 쓰라린 마음으로 헤매다녔어...."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추워."
그녀는 일어서더니 내가 팔을 다시 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쇼올을 바싹 죄어서 몸을 감싸면서 말했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또 우리가
잘못 이해하지나 않았나 걱정하던 이 성경 구절이 생각날 거야,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말을 항상 믿고 있어?"
우리는 잠시 동안 말없이 걸었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더욱 좋은 것, 그것을 상상학 수 있어, 제로옴?"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솟아오르는 채 그녀는 여전히
'그 더욱 좋은 것!'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조금 전에 그녀가 나왔던 채소밭의 비밀문 앞에 이르렀다.
그녀는 나를 돌아다보며,
"안녕."하고 말했다.
"아니야, 더 오지 마. 안녕, 사랑하는 나의 벗,
이제부터 시작되는 거야, 더 좋은 것이."

그녀는 팔을 뻗쳐 내 어깨 위에 두 손을 얹고
형언할 수 없는 사랑에 가득 찬 눈으로 붙드는 듯
혹은 가라는 듯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고 그 위로 빗장 지르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참을 수 없이 복받치는 절망에 사로잡혀 그 문에 기잰 채 쓰러졌다.
그리고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울고 흐느꼈다.
그러나 그녀를 붙잡았더라면,
그 문을 밀치고 들어갔더라면.
어떻게든지 해서--하긴 내가 못 들어가도록 잠겨 있지도 않았겠지만--
집안으로 들어갔더라면. 하지만 아니다.
지금에 와서 이 모든 과거를 훑어보아도...아니다.
그것은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나의 심정을 모르는 사람은 그때의 내 심정도 몰랐을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혀 나는 며칠 뒤 줄리에뜨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퐁궤즈마르에 갔었다는 것, 알리싸의 창백하고 여윈 모습에 놀랐다는 것을 썼다.
알리싸의 건강에 주의해 달라는 부탁과
알리싸 자신에게서는 이제 편지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녀 대신 가끔 소식이나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후 한 달도 채 못되어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제로옴
너무나도 슬픈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우리의 가엾은 알리싸는 이미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아아! 오빠가 편지 속에서 걱정을 한 것도 다 근거가 있는 일이었군요.
몇 달 전부터 언니는 확실한 병 증세도 없이 점점 쇠약해 졌어요.
그래 언니는 애 애걸에 못이겨 르아브르의 A 의사의 진찰을 받기도 했어요.
그 후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걱정할 게 없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러나 오빠가 다녀가신 뒤 사흘 만에 언니는 갑자기 퐁궤즈마르를 떠났습니다.
그것도 로베르의 편지를 받고서야 알았습니다.
언니가 편지를 하는 일은 극히 드물어서
로베르가 아니었던들 그런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언니한테서 소식이 없다고 걱정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언니를 그대로 떠나도록 내버려 둔 것과
또 빠리까지 따라가지 않은데 대해 나는 로베르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그 뒤에는 언니의 주소조차 모르게 되었답니다.
언니를 볼 수도 없고 편지도 낼 수가 없으니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며칠 뒤에 로베르가 빠리에 갔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를 못했습니다.
어찌나 게으른지 그의 성의를 의심할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경찰에 알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뜨와르가 가서 언니가 숨어 있던 작은 요양원을 찾아냈어요.
아아! 그러나 이미 늦었어요.
언니의 죽음을 알리는 원장의 편지와
언니를 다시 보지도 못한 에뜨와르의 전보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마지막 날 언니는 우리가 통지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장의 봉투 위에 우리의 주소를 적어 놓았습니다.
다른 한 장의 봉투에는 르아브르의 우리 공증인에게 보낸
유언장 사본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편지의 한 부분은 오빠에 관한 것인 듯 생각됩니다.
근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저께 치른 장례식에는 에뜨와르와 로베르가 참석했습니다.
상여를 따라간 것은 그 둘만이 아니었습니다.
요양원 환자 몇 사람이 자진하여 식에 참석했고 묘까지 상여를 따라갔습니다.
나는 다섯째 아이의 출산이 오늘 내일 해서 섭섭하게도 집을 나서지 못했습니다.

오빠, 언니의 죽음이 얼마나 오빠를 슬프게 할 것인가를 알고 있어요.
편지를 쓰는데도 퍽 힘이 드는군요.
하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에뜨와르나 로베르조차도
우리 둘만이 이해할 수 있었던 알리싸에 관한 이야기를 맡기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제는 나이 먹은 가정 주부가 됐고 쌓이고 쌓인 잿더미가
뜨겁게 불타오르던 과거를 뒤덮어 버린 지금,
오빠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해도 되겠지요.
어느 날이고 볼일이 있거나 혹은 마음이 내키셔서
님므에 오시게 되거든 에그비이브에 들러 주세요.
에뜨와르도 오빠를 만나게 되면 퍽 기뻐할 거고
우리 둘이 알리싸 이야기도 할 수 있겠죠.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오빠. 서글픈 마음으로 키스를 보내 드립니다.

며칠 뒤 나는 알리싸가 퐁궤즈마르를 로베르에게 남겨 주었으나
자기 방에 있던 모든 물건과 몇 개의 가구만은
줄리에뜨에게 보내도록 부탁했다는 것을 알았다.
알리싸가 내 이름을 적어 내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방문했을 때
내가 받기를 거절했던 그 조그만 자색 수정 십자가를
알리싸가 자기 목에 달아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을 알았다.
또 그렇게 했다는 것도 나는 에뜨와르를 통해 알았다.

공증인이 내게 발송해 온 봉함 봉투에는 알리싸의 일기가 들어 있었다.
그 중 여러 부분을 나는 이곳에 옮겨 보겠다.
아무런 설명도 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옮길 생각이다.
이 일기를 읽으면서 내가 여러 가지로 반성해 본 점,
그리고 붓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심적인 혼란을
여러분은 충분히 짐작해 주시리라 믿는다.

 

알리싸의 일기

에그비이브에서
그저께 르아브르 출발, 어제 님므에 도착,
나의 첫 여행! 집안 일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무위 속에서 오늘 188x년 5월 23일,
스물 다섯 살이 되는 생일을 맞아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렇다 할 즐거움은 없이 그저 벗삼아 보려는 생각에서이다.
왜냐하면 아마도 난생 처음으로 나는 홀로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낯선, 거의 타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리고 아직 아무런 인연도 맺지 못한 고장에서.
이 고장이 내게 속삭여 주는 것은 노르망디나
또는 퐁궤즈마르에서 늘 듣던 것에 불과 하지만
--왜냐하면 하느님은 어디서나 다름이 없으시니까--
하지만 이 남부 지방은 내가 아직 들어보지 못한 언어를 쓰고 있다.

5월 24일
줄리에뜨는 내 옆의 소파에서 졸고 있다.
정원과 통하는 모래 깔린 안마당과 같은 높이로
이탈리아식으로 지어진 이 집에 매력을 주는 활짝 열린 갤러리 안이다.
줄리에뜨는 소파에 앉은 채로 여러 가지 색깔의 집오리들이 뛰놀고
두 마리의 백조가 헤엄치고 있는 연못까지 펼쳐져 있는 잔디밭을 바라보고 있다.

여름에도 마르는 일이 없다는 한 줄기 시냇물이 연못에 물을 채우고
차츰 야생의 숲으로 변해가는 정원을 가로질러 메마른 벌판과
포도밭 사이를 굽이치다가 멀리, 아주 멀리 살져 버리고 있다.

...어제, 에뜨와르 떼씨에르는 내가 줄리에뜨와 같이 있는 동안에
아버지를 정원, 농장, 지하실, 창고, 그리고 포도밭으로 안내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야 일찍부터 처음으로
공원의 이것저것을 살펴보며 산책할 수가 있었다.

이름 모를 수많은 초목들,
나는 점심 때 그 이름을 알아보려고 하나하나 잔가지들을 꺾어 모았다.
보르게에즈나 도리아 빵뺄리 별장에서
제로옴이 찬미하던 샌느 베에르가 이 속에 끼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가 사는 북부 지방의 초목과 같은 종류이긴 하지만 그 모습은 전혀 다르다.

공원이 거의 끝나는 곳에서 이 초목들은 좁고도 신비로운 빈터를 둘러싼 채
감촉이 보드라운 잔디 위에 늘어져 요정들의 합창을 권유하고 있다.
퐁궤즈마르에서의 자연에 대한 나의 감정이 그처럼 기독교적이었던 데 반해
이곳에서는 나도 모르게 신화적인 것으로 변해 가는 것이 놀랍고 두려울 지경이다.
하지만 점점 나를 압박하던 일종의 그 두려움도 역시 종교적인 것이었다.

여기 있는 것은 성스러운 숲이다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공기는 수정처럼 맑고 이상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오르페우스와 아르미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새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바로 내 곁에서 들려 왔고 또 너무나 감동적이고 맑았기 때문에
불현듯 자연 전체가 그 노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나는 잠시 나무에 기대 서 있다가 아직 아무도 일어나기 전에 다시 돌아왔다.

5월 25일
제로옴에게서는 여전히 편지가 없다.
르아브르로 편지를 했으면 이리로 다시 발송되었을 텐데...
나의 불안도 단지 이 일기에 고백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제는 보오까지 산책을 하고
사흘 전부터는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이 불안은 가실 길이 없다.
오늘 다른 것은 쓰지 못하겠다.

에그비이브에 온 이래로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이상한 우울은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우울을 너무도 가슴 깊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벌써 오래 전부터 그곳에 뿌리박고 있었던 것 같고,
나 자신 자랑스럽게 여겨 왔던 기쁨마저도
실은 이 우울을 감싸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5월 27일
나 자신을 속일 필요가 어디 있을까?
내가 줄리에뜨의 행복을 기뻐하는 것은 다분히 이론적인 것이다.
내가 그처럼 바라던 그 애의 행복,
내 행복까지도 희생해 주려던 그 행복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
나는 거기에 마음 괴로워하고 있다.
얼마나 복잡한가!
그래...그 애가 내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고 행복을 찾았다는 것,
내 희생 없이도 애는 행복해질 수 있었다는 데 대해
내 마음 속에 되돌아온 무서운 이기주의가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제로옴의 침묵이 얼마나 나를 불안케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스스로의 희생이 정말 내 가슴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일까? 하고 나는 물어 본다.
하느님께서 내게 그러한 희생을 요구하시지 않는 데 대해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그러한 능력이 없었던 것일까?

5월 28일
이렇게 내 슬픔을 분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나는 벌써 이 일기장에 집착해 있다.
이미 내 마음 속에서 제거되었다고 생각했던 간사한 마음이
여기서 다시 나래를 펴는 것일까? 아니다.
이 일기는 내 영혼이 그 앞에서 단장을 하는,
만족을 주는 거울이 되어서는 안된다!
내가 이 일기를 쓰는 것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심심풀이로서가 아니다.
슬픔 때문인 것이다.
슬픔이란 내가 오랫동안 모르고 지낸 온,
이제는 증오하며 영혼으로부터 떨쳐 버리고 싶은 죄의 상태이다.
이 일기는 내 마음 속에 다시 행복이 깃들도록 나를 도와야 한다.

슬픔이란 하나의 착잡이다.
나는 한 번도 나의 행복을 분석해 보려고 해보지 않았다.

퐁궤즈마르에서도 나는 정말 홀로였다.
여기서보다도 더 홀로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이 느껴지지 않을까?
제로옴이 이탈리아에서 편지를 하였을 때, 나 없이 모든 것을 바로 본다는 것,
나 없이 그가 산다는 것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고,
마음으로 그를 따랐고, 그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나도 모르게 부르고 있다.
내가 보는 모든 새로운 것도 그가 없이는 마음을 괴롭힐 뿐이다.

6월 10일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 일기는 오랫동안 중단됐다.
귀여운 리즈의 출생, 줄리에뜨를 간호하면서 지샌 긴 밤들,
제로옴에게 쓸 수 있을 모든 것을 여기에 적는다는 것은 아무런 흥미도 없다.
나는 허다한 여성들에게 공통적인
'너무 쓴다'라는 견딜 수 없는 결정을 피하고 싶다.
이 일기를 자기 완성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삼고 싶다.

그 뒤에는 책을 읽다가 적어 둔 메모라든가 책에서 베낀 구절 등이었다.
그리고서는 또 다시 퐁궤즈마르에서의 날짜로 계속되었다

7월 16일
줄리에뜨는 행복하다.
그 애 자신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고 또 그렇게 보인다.
나는 그것을 의심할 권리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런데 지금 그 애 곁에서 내가 느끼는 이 불만족감,
어색한 기분은 어디에 연유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이 행복이 너무나 쉽사리 획득되었고
또 너무나 빈틈없이 '들어맞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영혼을 죄고 질식시킨다는 느낌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지금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이 행복 그 자체인지
혹은 행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인지 묻고 있다.
오오, 주여!
제가 너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행복은 제게서 멀리 해 주소서!
제가 당신에게 이를 때까지 제 행복을 미루고 연기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 다음은 여러 장이 뜯겨져 나갔다.
아마 르아브르에서의 우리의 쓰라린 재회에 관한 대목이었을 것이다.
일기는 그 다음해에 다시 시작되었다.
날짜는 적혀 있지 않으나 틀림없이 내가 퐁궤즈마르에 머물러 있던 때에 쓴 것이다.

때때로 그 이야기하는 데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는 나에게 나 자신을 내가 설명해 주고 또 밝혀 준다.
그가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가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즉 나는 그에 대해서 내가 느끼는 것이
과연 남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인가 망설여진다.
흔히 사람들이 그려내는 사랑이란 내가 그리는 사랑과는 너무나 다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나 자신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를 사랑하고 싶다.

그가 없이 살아야 한다면 무엇 하나 내게 기쁨을 줄 것은 없다.
내가 덕을 행하는 것도 모두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도 그의 곁에 있으면 그것이 흔들거리는 걸 느낀다.

나는 피아노 연습하기를 좋아했다.
하루하루 진전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내가 외국어로 된 책을 읽을 때 맛보는
즐거움을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어가 더 좋다든가
내가 좋아하는 몇몇 작가들이 외국 작가들만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뜻과 감정을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는 것과
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며 차츰차츰
보다 더 잘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데서 느끼는 무의식적인 자만심이,
지적인 쾌락에 알지 못할 영혼의 만족감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영혼의 만족 없이는 살아가지 못할 것 같다.

아무리 행복해도 나는 진보가 없는 상태는 바랄 수가 없다.
신성한 기쁨이란 하느님 안에서의 융합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언어의 희롱을 꺼리지 않는다면
나는 진보적이 아닌 기쁨을 경멸한다고 말할 것이다.

오늘 아침 우리 둘이는 가로수가 있는 길가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또 할 필요도 없었다...
별안간 그는 나에게 내세라는 것을 믿느냐고 물었다.
"물론이야 제로옴."하고 나는 소리쳤다.
"내게 그것은 희망 이상의 것이야. 그것은 확신이야."
그러나 갑자기 내가 외친 이 말 속으로
나의 모든 신앙이 쏟아져 들어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하고 잠시 말을 중단하더니,
"신앙이 없다면 넌 지금과는 행동이 달라질까?"하고 그는 덧붙였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어?"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역시 너 자신의 생각이야
어떻든간에 일단 열렬한 신앙에 잠긴 이상 달리 행동할 수 없는 거야.
그리고 만일 달라진다면 난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아니야, 제로옴, 아니야,
우리가 덕을 행하는 것은 미래의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야.
고귀하게 태어난 영혼에게는
스스로의 고행에 대한 보상을 생각한다는 것은 모욕적인 말이야.
그것은 이러한 영혼이 지니는 아름다움의 형상이야.

아버지의 건강이 다시 나빠졌다.
제발 대단한 병이 아니시기를 바라지만 사흘 전부터 우유로만 연명을 하고 계신다.
어젯 저녁 제로옴이 자기 방으로 올라간 후에
나와 함께 늦도록 앉아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거의
--그런 일이 없었는데 어째서 그랬는지--누워 있었다.
등갓이 내 눈과 내 몸의 상체에 불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나는 옷에서 비죽이 나와 불빛에 드러나 있는
두 발끝을 기계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들어오시더니 문 앞에 서신 채로 미소하시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시는 것이었다.
어쩐지 당황해져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아버지는 손짓을 하시며,
"이리 와 내 옆에 앉아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밤이 퍽 깊었는데도 가려 하시지 않고 헤어지신 이래
처음으로 나에게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 어머니와 결혼하시게 되었는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하셨는지,
또 처음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귀중한 존재였던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아버지."하고 나는 마침내 말했다.
"왜 오늘 저녁에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하필 오늘 저녁에...."
"그건 방금 응접실로 들어서면서 소파 위에 누워 있는 너를 보았을 때,
잠깐 동안이지만 네 어미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내가 그렇게 고집해서 물어 본 이유는
그날 저녁 제로옴이 내가 앉은 안락의자에 기대어 서서 내게 몸을 굽혀
나의 어깨 너머로 내가 읽던 책을 함께 읽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고
그의 체온과 떨림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 척하고 있었지만
이미 아무 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책 줄조차 가려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너무도 이상한 심적 동요에 사로 잡혔기 때문에
아직 그럴 기력이 있을 때 서둘러 일어섰다.
다행히도 그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잠시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응접실에서 홀로 그 소파에 누워 있었을 때
나는 정말 어머니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불안하고 답답하고 나 자신 비참하게 여겨졌을 뿐 아니라
회한처럼 마음 속에 솟아오르는 지난 날의 추억에 쫓겨
그날 밤 나는 거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주여, 악의 모습을 띤 모든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가엾은 제로옴!
그가 약간의 몸짓을 하기만 하면 되리라는 것,
그리고 때로는 내가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아직 어렸을 때 나는 벌써 그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워지고 싶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완전'을 지향했던 것도 그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완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가 없어야 된다는 것,
이것이 오오, 주여! 바로 당신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무엇보다도 저의 영혼을 당황케 하는 것입니다.

덕과 사랑이 융합되는 영혼을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사랑한다는 것, 힘껏 더욱 더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덕이라는 것이 있을까?
나는 때때로 의심해 본다.
하지만 아아! 어떤 날에는 덕이란 사랑에 대한 항거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있을까? 내 마음의 가장 자연스러운 경향을 감히 덕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오오 매혹적인 궤변!
허울 좋은 권유! 종잡을 수 없는 행복의 환영이여!

오늘 아침 라 브리에르(17세기의 작가. '성격론'의 저자)가 쓴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로는 금지되어 있기는 하지만
너무도 소중한 쾌락과 정다운 유혹이 있어
그것이 허용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이처럼 큰 매력은 덕행으로써 그것은 단념해 버릴 수 있다는
그 매력으로써가 아니면 도저히 물리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째서 나는 이 구절에서 변명을 찾아냈던가!
사랑의 매력보다 더욱 세차고
더욱 감미로운 매력이 나를 은근히 이끌고 있기 때문일까?
오오! 사랑의 힘으로 우리들 두 사람의 영혼을
동시에 사랑을 넘어선 저 건너까지 이끌어갈 수만 있다면!

아아! 이제는 너무나 잘 깨닫고 있다.
하느님과 그의 사이에는 단지 나라는 장애물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가 말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 사랑이 그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로 하여 지체하고 나를 사랑하는 데만 치우친다.

나는 그가 덕을 향해 앞으로 나가는 것을 가로막는 우상이 되었다.
우리 둘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거기에 도달해야 한다.
주여, 비열한 저의 마음은 도저히 이 사랑을 극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주여, 제발 그가 저를 사랑하지 않도록 만들 힘을 제게 주시옵소서.
그러하오면 저의 공덕보다 무한히 훌륭한 그의 공덕을 당신에게 바칠 것이오니...
그리고 오늘 그를 읽어 제 영혼은 흐느끼고 있으나
그것은 장차 당신의 품에 다시 그를 찾으려 함이 아니오니까?...

말씀해 주소서, 오, 하느님! 어느 영혼이 그의 영혼보다 더 타당하겠습니까?
그는 저를 사랑한다는 것보다는 좀 더 훌륭한 것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옵니까?
그러니 그로 인해 걸음을 멈추게 된다면 저는 그만큼 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옵니까?
영웅적일 수 있는 모든 것이 행복 속에서는 얼마나 위축되고 있습니까!..

일요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히브리 서 11장 40절 참조)

5월 3일 월요일
행복이 바로 곁에 있어 손짓을 해준다면...
손을 내밀기만 하면 잡을 수 있을 텐데...
오늘 아침 그와 이야기하면서 나는 희생을 이겨냈다.

월요일 저녁
그가 내일 떠난다....
그리운 제로옴 나는 언제나 끝없이 애정으로써 너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내 입으로 그런 말은 결코 못하게 될 거야.
내가 내 눈과 입술과 영혼에 가하는 속박이 너무도 견디기 힘들어서
너와 헤어진다는 것은 내게는 오히려 해방이기도 하고 쓰디쓴 만족이기도 하다.
나는 이성적인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행동을 하게 되면
나를 움직이게 하던 이성은 나를 저버리거니 혹은 그것이 어리숙해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것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그를 피하게 하는 이유? 이미 나는 그런 걸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유도 모르는 채 서글프게도 그를 피하고 있는 것이다.

주여! 제로옴과 제가 손을 맞잡고 서로 의지하면서
당신에게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평생을 통해 마치 두 사람의 순례자처럼 때때로 둘 중 한 사람이,
"피곤하면 내게 기대."하고 말하면 다른 한 사람이,
"네가 곁에 있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해."라고 대답하면서
당신을 향해 나아가도록 해주시옵소서.
아닙니다, 주여!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입니다.

7월 4일
6주일 이상이나 일기를 펼치지 않았다.
지난달의 일기 몇 장을 다시 읽어 보면서 나는 애써 좋은 문장을 쓰려고 노력했던
어리석고도 그릇된 나의 속마음을 글 속에서 대뜸 알아보았다.
순전히 그의 탓이다.
그가 없이 살아 나갈 수 있기 위한 도움이나 될까 하고
쓰기 시작한 일기 속에서도 마치 계속해서 그에게 편지라도 쓰는 것 같다.
문장이 잘 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모두 찢어 버렸다.
"이러한 나의 마음의 나는 잘 알고 있다."
그에 관한 부분은 전부 찢어 버렸어야 했을 것이다.

한 장도 남김 없이 모두 뜯어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자 벌써 나는 이 몇 장을 찢어 버렸다는데 어느 정도의 긍지를 느꼈다.
내 마음이 이토록 병들지 않았다면 웃어넘겼을 긍지이다.
정말로 뜻있는 일을 한 것 같고
그 버린 몇 장 속에 무슨 중요한 것이나 들어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7월 6일
나는 책장으로부터 그의 책들을 추방해 버려야만 했다.
책에서 책으로 나는 그를 피하지만 어디에서나 그를 만났다.
나 혼자 펴보는 책장 속에서도 그 구절을 읽어 주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 온다.
그가 흥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면 나도 별로 흥미가 없었다.
나는 사고방식마저 그의 것을 취했기 때문에
우리 둘의 생각이 같은 것이라고 느끼면서 기뻐할 수 있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구별 할 수가 없다.
때로는 그의 문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문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역시 그에게 전념하는 것이다.
얼마 동안은 성경만을 읽고(아마 '예수를 본받아'도 함께) 이 일기장에는
읽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하나씩을 매일 적을 작정이다.

이 뒤에는 일종의 '나날의 양식'이 적혀 있고
여기에 7월 1일부터 시작되는 하루하루의 날짜마다
발췌구가 하나씩 덧붙여 있었다.
여기에도 주석이 붙은 부분만을 옮겨 쓴다.

7월 20일
'네가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누가 복음 18장 22절 참조).
나는 제로옴만을 생각하고 있는 나의 마음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동시에 제로옴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닐까?
주여, 제게 그러한 용기를 주시옵소서.

7월 24일
나는 '마음의 위안'을 읽기를 중단했다.
그 옛 글은 퍽 재미가 있었지만 마음을 산만케 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맛본 거의 이교도적인 즐거움은
내가 구하려던 교훈과는 전혀 방향이 다른 것이다.

'예수를 본받아'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아무래도 이해가 안되는 라틴어 원본으로는 읽지 않기로 했다.
내가 택한 번역본에 서명이 없는 것이 마음에 든다.
신교파의 번역임에 틀림없는데 표제에는
'모든 기독교 단체에 적합함'이라고 적혀 있다.
'오오! 그대가 덕을 향해 나갈 때 어떤 평안을 얻을 것이며
어떤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될 것인지 안다면
그대는 더욱 정성들여 거기에 매진할 것이다.'

8월 10일
주여, 제가 당신을 향하여 어린 신앙심의 충동과
천사들의 초인간적인 목소리로 외칠 때 이 모든 것은
제로옴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서 오는 것임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나 당신과 저 사이에 그의 모습을 두심은 어찌된 연유이옵니까?

8월 14일
이 일을 완수하는 데는 앞으로 두 달...
오오, 주여!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8월 20일
아직도 내 마음 속에서 희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느끼고 있다.
내 슬픔으로 미루어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다.
주여, 이 기쁨, 지금까지는 오직 그만이 내게 가르쳐 주던
이 기쁨을 당신만이 제게 주시옵소서.

8월 28일
나는 얼마나 속되고 서글픈 덕에 이르렀나!
스스로 나 자신에 대해 지나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하자.
언제나 하느님께, 힘을 주시옵소서 하고 탄원을 하다니,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이제 내 기도는 온통 하소연 뿐이다.

8월 29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누가 복음]12장 27절"
이 간단한 말씀이 오늘 아침 풀길 없는 슬픔에 나를 잠기게 했다.
들로 나와 나도 모르게 되풀이 한 이 말이 내 마음과 눈을 눈물로 가득 채웠다.
나는 농부가 몸을 굽혀 쟁기질을 하고 있는 끝없는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에 핀 백합을...'하지만 주여, 그 백합은 어디에 있사옵니까?

9월 16일 밤 10시
다시 그를 만났다. 나와 같은 지붕 밑에 있는 것이다.
그의 창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잔디밭을 비추고 있다.
내가 이 몇 줄을 적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는 잠들지 않고 있다.
아마도 나를 생각하고 있겠지.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도 그렇게 말하고 나도 그렇게 느낀다.
그의 사랑이 나를 용납하지 않도록
내가 결심한 그대로의 나를 그에게 보일 수 있을까?

9월 24일
오오! 속마음은 꺼질 듯하면서도 끝내 무관심과 냉담을 가장 했던 잔인한 대화...
지금까지는 그를 피한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나는 하느님께서 내게 이겨낼 힘을 주시리라 생각했고
싸움을 피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리라고도 생각했다.
나는 과연 승리를 했던가?

제로옴은 전보다 나를 덜 사랑하게 되었는가?
아아! 이것은 내가 바라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그를 사랑해 본 적은 없다.

그리고 주여,
제게서 그를 구해내시기 위해 저의 희생이 필요 하시다면 뜻대로 하시옵소서!
'저의 마음과 영혼 안에 들어오셔서 저의 고난을 짊어지시고
당신의 수난에서 아직 남아 있는 고통을 저의 속에서 계속하여 감당하옵소서.'

우리는 빠스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이라 말할 수 있었던가?
그 무슨 부끄럽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했던 가!
그런 말을 하면서도 괴로웠지만
오늘밤은 그런 말이 하느님에 대한 모독인 것처럼 뉘우쳐진다.
묵직한 '빵세'를 다시 뽑아들었다. 저절로 펴진 것이
로안네즈 양(로안네즈 공작의 누이로 빠스깔의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은 곳이다.

'자진해서 남을 따라갈 때는 속박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항거하기 시작하고 홀로 떨어져 걷기 시작하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이 너무나 내 가슴을 찔렀기 때문에 더 읽어 나갈 기력이 없어졌다.
그러나 이 책의 다른 곳을 펼치면서
나는 아직까지 읽어보지 못한 훌륭한 구절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제 막 베꼈다.

일기의 첫 부분은 여기에서 끝나고 있었다.
그 다음 부분은 아마 찢어 버린 모양이다.
왜냐하면 알리싸가 남긴 서류에는 그로부터 3년 뒤
다시 퐁궤즈마르에서--9월에--즉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나기 조금 전부터,
이 일기가 다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일기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되고 있다.

9월 17일
주여,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아시옵니다.

9월 20일
주여, 그를 제게 주옵소서. 그러면 이 마음을 당신에게 바치오리다.
주여, 한 번만 더 그를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이 마음을 당신에게 드리기로 약속하옵니다.
그러하오니 저의 사랑이 당신에게 청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의 남은 목숨은 당신에게 바치겠나이다.
주여, 저의 이 천박한 기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저는 제 입술에서 그의 이름을 떼지도 못하겠고
제 마음의 고통을 잊지도 못하겠나이다.
주여, 당신께 외치옵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저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9월 21일
'너희가 나의 이름으로 나의 아버지께 구하는 모든 것은'
(요한 복음 14장 13절 참조)
주여, 당신의 이름으로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하오나 비록 제가 기도를 드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당신은 이 마음에서 타오르는 소원을 알아 주실 줄 아옵니다.

9월 27일
오늘 아침부터는 마음이 퍽 안정되어 있다.
어젯밤은 묵상과 기도로 거의 지새웠다.
그런데 문득 어린 시절에 성령에 대해서 그려 보던 상상과 비슷한 광채가,
찬란한 마음의 평안이 나를 둘러싸고 나에게 내려오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이 기쁨이 신경의 흥분이나 아닐까 두려워 얼른 잠자리에 들어갔다.
이 크나큰 행복감이 사라지기 전에 나는 곧 잠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도 이 행복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제는 그가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9월 30일
제로옴! 나의 벗,
아직 동생이라고 부르지만 동생보다 한없이 더 사랑하는 너...
그 너도밤나무 숲에서 내가 얼마나 너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는지...
저녁 때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나는
채소 밭의 작은 문을 나서서 이미 어둠이 깃든 가로수 길로 내려갔어.
갑자기 너의 대답 소리가 들리고 그리하여
돌이 많은 언덕 위에서 재빨리 지나치는 너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또는 벤치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너의 그림자가
멀리서 보이다 할지라도 내 가슴은 놀라 뛰지 않을 거야.
오히려 네 모습이 보이지 않는 데 놀랄 거야.

10월 1일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다.
태양은 비할 데 없이 맑은 하늘에서 졌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나는 곧 이 벤치에 그와 함께 나란히 앉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벌써 그의 음성이 들린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는 것이 좋다.
바로 여기에 그는 올 것이다.
나는 그의 손 안에 내 손을 놓으리라.
그리고 나의 이마를 그의 어깨 위에 얹으리라.
나는 그의 곁에서 호흡을 하게 될 것이다.

어제도 다시 읽어 보려고 그가 보낸 편지를 몇 장 가지고 나왔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너무나 그의 생각으로 가득 차서 편지를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그가 좋아하던 그 자색 수정 십자가,
지나간 어느 여름, 그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동안
저녁마다 내가 목에 걸었던 그 십자가도 몸에 지니고 나왔었다.
아 십자가를 그에게 주고 싶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이런 생각을 꿈꾸고 있었다.
그가 결혼을 하면 나는 그의 첫딸인
작은 알리싸의 대모가 되어 이 보석을 주고...
왜 나는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까?

10월 2일
오늘 내 영혼은 하늘에 등지를 친 새처럼 가볍고 즐겁다.
그는 틀림없이 오늘 올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또 알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외치고 싶다.
여기에도 그것을 적어야겠다.
내 기쁨을 숨기고 싶지는 않다.
평소에는 그처럼 방심한 채 내게 무관심한 로베르조차도 나의 기쁨을 알아챘다.
그가 묻는 말에 나는 당황했고 또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저녁까지 어떻게 기다릴까?
알 수 없는 투명한 띠가 어느 곳을 보아도
그의 모습을 크게 확대시켜 내 눈에 비추어 주며
사랑의 모든 빛을 내 마음의 단 하나 초점 위에 집중시키고 있다.
오오! 기다림이란 이다지도 나를 지치게 하는 것일까!
주여, 행복의 그 큰 문을 잠시 동안만이라도 제게 보여 주시옵소서!

10월 3일
모든 것이 꺼져 버렸다.
아아!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나의 두 팔에서 빠져나갔다.
바로 저기에, 저기에 그가 있었다.
아직도 나는 그를 느끼고 있다.
나는 그를 부르고 있다.
내 손, 내 입술이 어둠 속에서 그를 찾고 있다. 헛되이....

나는 기도할 수도 없고 잠들 수도 없다.
다시 어두운 정원으로 나갔다.
내 방에서나 집안 어디서나 그저 무섭다.
슬픈 마음에 못이겨 나는 그를 뒤에 남긴 채 돌아와 버린 문까지 다시 갔다.
어리석은 희망을 품고 그 문을 열어 보았다.
그가 돌아와 있었으면!
나는 불러 보았다. 어둠 속을 더듬었다.
그에게 편지를 쓰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슬픔을 지탱할 길이 없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에게 무엇이라 이야기했던가? 내가 무엇을 했던가?
부슨 필요로 나는 그의 앞에서 언제나 나의 덕을 과장하는 것일까?
나의 온 마음이 부정하는 덕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느님이 나의 입술에서 나오게 하신 말씀을 나는 몰래 배반하고 있었다.
내 마음 속에 가득 차 있던 것은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제로옴, 제로옴! 곁에 있으면 내가 죽을 것 같은 나의 불쌍한 벗,
내가 이야기한 것 중에서 내 사랑이 네게 들려 주었던 것 외에는 다 잊어 줘.

편지를 썼다가 찢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썼다. 벌써 새벽이다.
내 마음처럼 슬프고 눈물에 함빡 젖은 잿빛의 새벽...
농장에서 일 시작하는 소리가 들리고
잠들었던 모든 것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제는 일어나라. 때가 왔느니라.'

편지는 부치지 않겠다.

10 월 5일
저를 앗아가 버리신 질투심 많은 하느님,
이제는 저의 마음을 독점하시옵소서.
이제는 어떠한 열정도 이 마음을 저버릴 것이오며,
어느 하나 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아직도 제 마음에 남아 있는
슬픔의 찌꺼기를 이겨내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 집, 이 정원이 어쩔 수 없이 제 사랑을 북돋우고 있습니다.
당신만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달아나고 싶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처분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제가 쉽사리 팔 수 없는 퐁궤즈마르의 이 집만은
로베르에게 주는 것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유언장은 썼지만 필요한 수속 절차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어제 공증인을 만났을 때도 그가 내 결심을 눈치채고
줄리에뜨나 로베르에게 알릴가 두려워서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했다.
빠리에 가서 이 일을 마치자.

10월 10일
이곳에 도착하자 너무도 피곤해서 처음 이틀간은 꼼짝 못하고 누워 지냈다.
내가 싫다는 데도 청해 온 의사는 꼭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대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나 나는 수술하기가 무섭다는 것과
기운이 좀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것을
쉽사리 의사에게 납득시킬 수가 있었다.

이름과 주소도 숨길 수가 있었다.
나를 이곳에 받아들이고 또 하느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동안은
아무런 곤란이 없도록 나는 이곳 사무실에 충분히 돈을 맡겨 놓았다.

방도 마음에 든다.
깨끗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벽의 장식이 된다.
나 자신 스스로 기쁨마저 느끼는 데 놀랐다.
생에 대한 아무런 애착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느님만으로 만족해야 하고
또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차지하실 때
비로소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성경 외에는 아무 책도 가져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 안에 적혀 있는 말씀보다도
빠스깔의 그 열광적인 흐느낌 소리가
더 강하게 내 마음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하느님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나의 기다림을 채워 줄 수 없다.'

오오, 경솔한 내 마음이 바랐던 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기쁨이었다.
주여! 이 외치는 소리를 듣기 위해 당신은 나를 절망 속에 빠뜨렸나이까?

10월 12일
당신의 통치가 군림하옵기를!
저의 마음 속에 군림하옵기를.
그리하여 당신만이 나를 다스려 주소서.
이제는 아낌없이 이 마음을 송두리째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퍽 노쇠한 것처럼 피곤하면서도 내 영혼은 이상한 동심을 간직하고 싶다.
방안의 모든 것이 잘 정돈되고 머리맡에 벗어 둔 옷이 잘 개어 있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던 지난날의 소녀 그대로의 마음이다.
죽을 준비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10월 13일
찢기 전에 다시 한번 일기를 읽었다.
'자기가 느끼는 괴로움을 털어놓는 것은
훌륭한 마음을 지닌 사람으론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아름다운 말은 끌로떨드 드보가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증주의 사상가 오귀스뜨 꽁뜨의 애인이 젊은 미망인)

이 일기를 불 속에 던지려는 순간 일종의 경고와 같은 것이 나는 제지했다.
이미 이 일기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것을 제로옴에게서 빼앗을 권리가 내게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단지 그를 위해서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품었던 걱정이나 근심도 이제 와서는 너무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되어
이제는 거기에 아무런 중요성도 없게 되었고
제로옴이 그로 인해 고민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주여, 저 자신은 이미 도달할 수 없어 단념해 버린 덕의 절정까지
그만이라도 밀어올리려고 미칠 듯이 바랐던 이 마음의 어설픈 표현을
그가 이일기장 속에서 때로 찾아볼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주여, 제가 이르지 못한
그 바위 위로 저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시편 31편 3절)

10월 15일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빠스깔이 결정적인 개종 후 옷 속에 꿰매어 넣고 다녔다는 기도문)

인간적인 기쁨과 모든 고통을 초월한 곳에서,
그렇다! 나는 이 찬란한 기쁨을 예감한다.
내가 다다르지 못한 그 반석의 이름이 '행복'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나의 삶은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아! 주여!
그러하오나 당신께서는 욕심 없는 깨끗한 영혼에게는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의 성스러운 말씀은
'주 안에서 죽는 자는 지금부터 행복하리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옵니까?
여기에서 저의 신앙은 동요된 것입니다.
주여, 힘껏 당신께 외치옵니다. 저는 어둠 속에 있사옵니다.
새벽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목숨이 다하도록 당신께 외치고 있나이다.
제 마음의 갈증을 풀어 주시옵소서.
저는 바로 이 행복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사옵니다.
혹은 이 행복을 가지고 있다고 자위해야 하겠나이까?
새벽도 되기 전에, 날이 밝아 오는 것을 알린다기보다는
그것을 부르고 있는 애타는 새처럼
저는 밤이 새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노래를 불러야 하겠나이까?

10월 16일
제로옴, 나는 네게 완전한 기쁨을 가르쳐 주고 싶어.

 

오늘 아침 심한 구토로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 직후에 너무도 심신이 약해지는 것 같아서 잠시 동안은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엔 온몸에 아주 조용한 평온이 깃들었다.
그리고는 심한 고통, 육체와 영혼의 전율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내 생애의 급격하고도 명료한 계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 방의 벽이 보기 흉하게 노출되어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겁이 났다.
지금도 마음을 안정시키고 가라앉히기 위해 이렇게 쓰고 잇는 것이다.
오오, 주여! 당신을 모독함이 없이 종말에 이르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아직 일어날 수가 있었다. 어린애처럼 무릎을 끓었다.
이제는 자신이 홀로라는 것을 또다시 깨닫기 전에 빨리 죽고 싶다.
지난 해 나는 줄리에뜨를 다시 만났다.
알리싸의 죽음을 알린 그녀의 마지막 편지를 받은 뒤로 10년 이상이 지났다.

**********************

나는 프로방스 지방에 여행을 갔던 길에 잠시 밈므에 들렀다.
소란한 도시 중심지인 프쉐르 거리에 위치한 떼씨에르 댁은 퍽 훌륭해 보였다.
이미 통지는 했지만 막상 문턱을 넘을 때 내 마음은 적지 않게 설레었다.

하녀의 안내로 응접실에 올라가 있노라니 잠시 후에 줄리에뜨가 들어왔다.

쁘랑띠에 이모를 보는 듯했다.
걸음걸이, 몸맵시하며 반가와 어쩔 줄 모르는 품이 판에 박힌 듯했다.
곧 내게 여러 가지를 물어 댔다.
나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
빠리의 거처는 어떠냐, 무슨 일을 하느냐,
대인 관계는 어떠냐, 남프랑스에는 무슨 일로 왔느냐,
왜 에그비이브까지 가지 않느냐,
그곳에 가면 에뜨와르도 퍽 반가와 할 텐데 등.
그리고는 자기 남편, 어린애들, 자기 동생, 추수 이야기,
그리고 불경기 등 여러 가지 소식을 들려 주었다.

로베르는 퐁궤즈마르 집을 팔고 에그비이브에 와 산다는 것,
지금도 에뜨와르와 동업을 하고 있어 에뜨와르는 여행도 하고
자기 사업상의 판매고를 더욱 확장하는 데 전심할 수도 있다는 것,
한편 로베르는 밭에 남아 여러 가지 계획을
확장 개선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과거를 회상시켜 줄 것이 없나 찾아보았다.
나는 응접실의 새 가구 중에 퐁궤즈마르에 있던
가구가 몇 개 끼어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아보았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서 떨고 있는 이 과거를
줄리에뜨는 모르거나 그렇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열 두서너 살짜리 사내아이 둘이 계단에서 놀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부러 내게 인사를 시켰다.
맏딸인 리즈는 제 아버지를 따라 에그비이브에 가고 없었다.
산책 나간 열 살짜리 사내 아이도
곧 낳게 되리라던 아이가 바로 이 아이였던 것이다.
이 마지막 출산은 난산이었으며
그로 인해 줄리에뜨는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마음을 돌이킨 듯 그녀는 또 딸을 낳았는데 말
하는 걸 들어보니 다른 아이보다
이 아이를 특히 더 귀여워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애가 자고 있는 방이 바로 내 옆방이에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가보지 않겠어요?"
그래서 내가 따라가자,
"오빠, 편지로는 부탁할 용기가 나질 않았는데...
이 애 대부가 돼주시겠어요?"
"좋다면야 그렇게 하지."
나는 약간 놀란 채 요람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름이 뭐지?"
"알리싸...."
줄리에뜨는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좀 닮은 것 같지 않아요?"

나는 대답 없이 줄리에뜨의 손을 꼭 쥐었다.
그 작은 알리싸는 어머니가 안아 일으키자 눈을 반짝 떴다.
나는 어린애를 받아 안았다.
"오빠는 정말 훌륭한 아빠가 될 거예요."
줄리에뜨는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언제까지 결혼하지 않을 작정이세요?"
"여러 가지 일을 잊을 때까지."
나는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곧 잊고 싶으세요?"
"언제까지나 잊고 싶지 않아."

그녀는 불쑥,"이리로 오세요."하고는
좀더 작고 벌써 어둠이 깃든 방으로 앞장서 들어갔다.
그 방에는 두 개의 문이 있어 하나는 줄리에뜨의 방으로 통해 있고
다른 하나는 응접실로 통했다.
"잠시라도 틈이 있으면 이 방에서 쉬곤 해요.
이 집에선 제일 조용한 방이에요.
여기에 오면 생활의 피난처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 작은 방의 창은 다른 방들처럼 시가지의 소음이
들리는 곳으로 나 있지 않고 나무가 있는 안뜰을 향하고 있었다.
"앉으세요." 그녀는 안락의자에 힘없이 앉으면서 말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오빠는 언제까지나 알리싸의 추억에 성실하려는 거죠?"
나는 잠시 대답 없이 앉아 있었다.
"오히려 알리싸가 나에 대해 생각하여 주던 것에 관해서겠지..
.아니, 내가 무슨 칭찬받을 일이나 한 것처럼 생각지는 말아.
그렇게 할 수밖엔 없었다고 생각해.
설사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 할지라도
나는 단지 그 여자를 사랑하는 척 할 수밖엔 없을 것 같아."

"아아!" 그녀는 짐짓 무관심한 척했다.
그리고는 내게서 얼굴을 돌리더니 무슨 잃어버린 물건이라도
찾아내려는 것처럼 마룻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랑이
그처럼 오래도록 마음 속에 간직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땅거미가 잿빛 밀물처럼 몰려와 물건들을 하나하나 어둠 속에 잠기게 하자,
이러한 물건들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나
제각기 지난날의 추억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알리싸의 방을 다시 보는 듯했다.
줄리에뜨가 이 방에 그 모든 가구를 옮겨다 놓은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다시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이미 얼굴을 윤곽을 구별할 수 없어,
그녀가 눈을 감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몹시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자! 이젠 잠을 깨야죠...."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한걸음 내밀더니 맥이 빠진 듯
곁에 있는 의자에 다시 털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램프를 들고 하녀가 들어왔다.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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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종말의 발단 <끝>  (0) 2015.01.10
제7장 에바 부인  (0) 2015.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