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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좁은 문

오늘의 쉼터 2015. 1. 10. 12:03

3. 좁은 문 - 앙드레 지드

 

고모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생각하고
제로옴의 공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처럼 긴 편지를 쓰지는 않겠어요.
제로옴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제가 직접 그와 이야기 못하는 걸 보상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시겠죠?
자주 계속 쓰게 될까 두려워 이만 그치겠어요.
이번만은 너무 꾸중하지 말아 주세요.

이 편지를 읽고 나는 얼마나 숙고했는지 모른다.
나는 이모의 주착없는 참견

"편지 속에서 알리싸가 잠깐 비친 이야기,
내게 침묵을 지킨 그 이야기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내게 이 편지를 전해 주도록 이모를 충동한 그 어색한 친절을 저주했다.
이미 내가 알리싸의 침묵을 견딜 수 없게 될 바에야,
아! 그녀가 이젠 내게 하지 않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써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차라리 모르게 내버려 두는 편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모두가 짜증나는 일 뿐이었다.
자기와 사이의 사소한 비밀 그처럼 쉽사리 이야기하다니.
게다가 그 자연스런 어조, 태연한 모습, 진지한 태도, 쾌활한 문맥....

"그게 아니라니까. 네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는 사실 외엔
화낼 건더기가 아무것도 없는 거야."하고 아벨이 말했다.
그는 하루하루 내 생활의 짝이었고 성격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그 때문에 아벨에게만은 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외로울 때문 약해지는 마음, 남의 동정을 구하고 싶은 슬픈 마음,
스스로에 대한 불신임, 그리고 내가 곤란한 처지에서도
그의 충고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신뢰의 마음에서
언제나 나는 그의 도움을 바라는 것이었다.

"이 편지나 좀 검토해 보자!"
그는 편지를 자기 책상 위에 펴면서 말했다.
이미 나는 사흘 밤을 분한 마음으로 보냈으며
그 분노를 나흘이나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아벨이 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나도 자연히 끌려들어갔다.

"줄리에뜨와 떼씨에르의 문제는 사랑의 불길 속에 내던져 버리자, 응?
사랑의 불길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너나 나나 잘 알지 않아?
그렇구말구! 떼씨에르는 그 불길 속에 뛰어들어 타죽는 나비 격이지...."

"그런 이야긴 그만 두자."
나는 그의 농이 귀에 거슬려 말했다.
"나머지 문제나 이야기하자."
"나머지 문제?"하고 그는 말했다.
"나머지 문제야 모두 네게 관한 거지. 멋대로 한탄하려무나!
편지 속의 단 한 줄, 단 한 마디에도 너의 마음이 울렁대지 않는 게 있어?
편지의 사연 하나하나가 너를 향한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지.
펠리씨 아주머니는 이 편지를 네게 전해 줌으로써
결국은 원 수신인에게 돌아오게 한 것 뿐이야.
알리싸가 마치 최악의 경우에 다다른 것처럼
그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에게 편지를 부쳤던 것은 모두가 네 탓이야.
도대체 네 이모에게 꼬르네이뉴의 시구가 무슨 아랑곳이람.
말이 났으니 말이지, 실은 알리싸는 라신느의 시를 빌어서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알리싸는 이 모든 것을 바로 너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앞으로 두 주일 내에 이만큼 길고 자연스럽고 마음에 드는 편지를
알리싸가 네게 쓰도록 하지 못한다면 넌 바보야...."

"그녀는 도무지 그러질 않는걸!"


"그건 네게 달려 있는 문제야.
내 견해를 좀 들어볼 테야? 이제부터 당분간은
너희들 사이의 사랑이나 결혼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말아.
동생의 그 일이 있은 다음에 알리싸가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일이라는 걸 너는 모르겠니!
남매간의 정이라면 면에서 공작을 해봐.
그리고 기왕 네가 그 바보 녀석을 돌봐 줄 참을성이 있는 바에야
알리싸에게는 꾸준히 로베르 이야기만 써보내.
계속해서 알리싸의 머리만 즐겁게 해줘.
그렇게 되면 나머지 일은 잘 될 거야. 아아! 편지를 써야 될 게 나라면..."

"너는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어!"


그러면서도 나는 아벨의 견해를 따랐다.
그러자 과연 알리싸의 편지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줄리에뜨의 행복까지는 안되더라도,
그녀의 처지가 결정되기 전에는 알리싸로부터 진정한 기쁨이나
온갖 것을 거리낌없이 내게 맡겨 버릴 마음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알리싸가 보내 주는 그 동생의 소식은 차츰 좋아졌다.
줄리에뜨의 결혼은 7월에 거행된다는 것이었다.
그날에는 아벨과 나는 학업 때문에 못 올 줄로 생각한다고 알리싸는 써 보냈다.
나는 우리가 식에 참석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으로 그녀가 판단하고있다는 걸 짐작했다.
그래서 시험을 핑계삼아 우리는 축하의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결혼식이 있는 지 약 두 주일 후에 다음과 같은 알리싸의 편지를 받았다.

그리운 제로옴
어제 우연히 네가 준 아름다운 라신느의 시집을 펴보다가
벌써 근 1년간이나 내 성경에 간직하고 있는 네 조그마한 크리스마스카드 위에 적힌
몇 줄의 시구를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오늘의 사바 세계로부터 나를 주께로 인도해 올리는 것은
어떤 불가항력의 매력인가?
인간의 무리 위에 주추를 세우는 자는 불행하리라.
나는 그것이 꼬르네이유의 주석시에서 발췌된 것인 줄 알았지만
솔직히 거기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어.
헌데 아주 정신적인 그 제4곡을 읽어 나가다가
네게 전해 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구절을 찾아냈어.
그 책 여백에 네가 마구 적어 놓은 첫 글자들로 미루어 너는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사실 그녀에게 알려 주고 싶은 좋은 구절이 있을 때마다
나는 내 책이나 그녀의 책에 그녀 이름의  글자를 써넣은 버릇이 있었다) 상관 없어.

내가 그것은 즐거워서 일부러 옮겨 쓰는 거니까.
나는 내가 찾아냈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네가 가르쳐 준 것이라는 걸 알게 되자
다소 약이 오르긴 했지만 너도 나처럼 이것을 좋아했구나 하는
즐거움 앞에서 이 어리석은 생각은 사라져 버렸어.
그것을 여기서 다시 옮겨 쓰고 있노라니 너와 함께 그것을 읽는 것 같애.

불멸하는 지혜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인간의 아들들이여, 너희 심려로 얻은 열매는 무엇이뇨?
헛된 영혼들이여,
그 무슨 과오로 너희 혈관의 깨끗한 피로 영양을 주는 빵이 아니라,
더욱 허기지게 하는 그림자를 그토록 번번이 사들이느뇨?
내가 너희에게 권하는 이 빵은 천사들의 양식이니
주께서 먼저 밀을 고르시어 손수 만드신 빵임을 알라
이 감미로운 빵은 너희가 뒤쫓는 세상 무리들의 식탁 위에는
오르지 않는 빵임을 알라
나를 따르는 자에게 이 빵을 주리라
오라, 살기를 원하는 자 잡으라 먹으라 그리고 살지어다.
....


복되이 갇혀 있는 영혼은 속박되어 평화를 찾으며
영원히 마르자 않는 힘찬 샘물로 목을 축이도다.
누구나 와서 마실 수 있는 물, 그 물은 뭇 사람을 부르고 있도다
그러나 우리가 미친 듯이 찾아다니는 물은 진흙투성이 샘물이거나
언제나 흘러가 버리는 거짓된 웅덩이 뿐이로다
얼마나 아름다워!
제로옴, 얼마나 아름다워!
정말 나만큼 너도 이 시가 아름답다고 생각할까?
내 책에 있는 주를 보면 도말르 양이 부르는 이 송가를 듣자
맹뜨농 부인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고 그 일부를 되풀이시켰대.
나도 이젠 이걸 외었는데 아무리 읊어도 싫증이 나지 않아.
그저 한 가지 섭섭한 일은 네가 이 송가를 읽는 걸 듣지 못했다는 것 뿐이야.

신혼 여행중인 부부에게는 계속 반가운 소식 뿐이야.
찌는 듯한 더위에도 줄리에뜨가 베이욘느와 비아릿쯔에서
얼마나 즐겼는지 너도 이미 알고 있지.
다음에 그들은 퐁따라비에를 거쳐 뷔르고스에 머물렀다가
피레네 산맥을 두 번이나 넘었대.
지금 몽세라에서 줄리에뜨가 보낸 감격에 찬 편지가 왔어.
아직 열흘간은 바르셀로나에 머물렀다가
에뜨와르의 포도 수확 일로 9월 이전에 님므로 돌아올 작정이래.
일주일 전부터 아버지와 나는 퐁궤즈마르에 있어.
내일이면 미스 아슈뷔르똥이 오실 것이고 로베르도 나흘 후에는 오게 되어 있어.
가엾게도 그 애가 시험에 실패했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어려웠다기보다는 시험관이 워낙
얄궂은 문제들을 내는 바람에 그만 어리둥절했던 모양이야.
네가 편지한 것도 있고 해서 나는 그 애가 준비가 부족했다고는 생각지 않아.
단지 그 시험관은 학생들을 그처럼 골탕먹이는 에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애.

너의 성공에 대해서는 내가 새삼스럽게 축하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네겐 당연한 이야기야. 나는 그토록 너를 믿고 있는 거야.
제로옴! 네 생각만 하면 내 가슴은 부풀어올라.
전에 이야기하던 그 연구를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어?

...여기 정원에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하지만 집안은 텅 빈 것 같애.
올해는 노지 말라고 당부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날이면 날마다 마음속으로 이 말을 되풀이 하고 있어.
그처럼 오랫동안 너를 못보고 지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가끔 나도 모르게 너를 찾을 때가 있어.
책을 읽다가도 문득 고개를 돌리곤 해...

꼭.

다시 편지를 계속해. 밤이야, 모두가 잠들었다.
열려진 창 앞에서 지금 늦도록 네게 편지를 쓰고 있어.
정원은 향기로 찼고 바람도 따스해.
우리가 어렸을 때 퍽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들었을 때
바로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런 것을 만들어 주셔서'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
오늘 밤 나는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처럼 아름다운 밤을 만들어 주셔서!'라고 생각했어
그러자 나는 갑자기 네가 내 겉에 있었으면 했고,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느꼈어.
너무도 사무치게 느껴서 아마 너도 느꼈을 거야.
그래 편지에서 흔히
'고귀하게 태어난 영혼에 있어서는'감탄은 감사와 혼동된다고 너는 썼지.
아직도 얼마나 쓸 것이 많은지 몰라!...
지금 나는 줄리에뜨가 써보낸 그 빛나는 나라를 생각하고 있어.
나는 좀 더 넓고 좀 빛나고 좀 더 쓸쓸한 다른 나라를 생각하고 있어.
어느날 어떻게인지도 모르지만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나라를 우리가 보게 되리라는 이상한 신념이 내 가슴속에 깃들어 있어...

내가 얼마나 기쁨의 소용돌이 속에서 얼마나 사랑에 흐느끼면서
이 편지를 읽었는지는 쉽사리 짐작이 갈 것이다.
뒤이어 딴 편지들도 왔다.
물론 알리싸는 퐁궤즈마르에 내가 가지 않은 것을 고마워 했고
그 해에도 그녀를 만나러 오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해 섭섭해 했고
이제는 내가 곁에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듯 편지지마다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나오고 있었다.
거기에 견뎌 낼  힘을 나는 어디서 얻었을까?
필경 아벨의 충고와 갑자기 나의 기쁨을 헛되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또 마음이 끌려들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또 마음이 끌려들지나 않을 까 하는 자연적인 긴장감에서였을 것이다.

그 뒤에 온 편지들 중에서 이 이야기와 연관이 있는 것을 전부 옮겨 쓰겠다.

그리운 제로옴
네 편지를 읽노라면 온몸이 기쁨으로 녹아내리는 것 같애.
오르비에또에서 부친 편지에 답장하려던 차에
삐루즈와 아씨지에서 쓴 편지를 동시에 받았어.
마음은 여행 중이고 몸만 이곳에 있는 것 같애.
정말 나는 너와 함께 움부리아의 하얀길을 걷고 있어.
아침이면 함께 길을 떠나고 아주 새로운 눈으로 동트는 걸 바라보고...
정말 꼬르또느의 언덕 위에서 나를 불렀니? 그래 나도 들었어...

아씨지 위의 산에서는 몹시 목이 말랐어!
그때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준 한 컵의 물이 얼마나 달았는지!
오, 제로옴! 나는 너를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있어.
성 프란체스코에 대해서 네가 써 보내준 이야기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그래, 마음의 해방이 아니라 마음의 간격을 찾아야 해.
마음의 해방이란 언제나 가증스러운 오만이 뒤따르게 마련이니까.
야심은 반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하기 위해 사용해야 될 거야.

 

님므의 소식은 너무나 좋아서 이제는
나도 즐거움에 몸을 맡겨도 좋다고 하느님이 허락해 주신 것 같아.
올 여름의 단 한 가지 근심거리는 아버지 일이야.
내가 여러 가지로 마음을 쓰지만 아버지께선 늘 쓸쓸한 표정이야.
아니, 내가 곁에서 떠나 혼자 계시게 되면
당장에 쓸쓸해 하시고 마음을 돌려 드리기가 점점 더 힘들어져.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모든 즐거운 속삭임도
아버지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됐어.
이제는 거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시지 않아. 미스 아슈뷔르똥은 안녕하셔.
네 편지를 늘 두 분께 읽어 드리고 있어.
너의 편지가 올 때마다 사흘간을 그 이야기로 보내.

그러다 보면 또 다음 편지가 오고,

...로베르는 그저께 이곳을 떠났어.
나머지 방학을 R이라는 친구 집에서 보낼 생각인데
그 아버지가 모범 농장을 경영한 대.

확실히 이곳 생활은 그 아이에게도 유쾌하지 못해.
그 애가 떠나겠다고 말했을 때 나도 그의 계획에 찬성하는 수밖에 없었어.

...할 말은 태산 같애. 끝없이 이야기하고 싶어!
때로는 말이나 분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어.
오늘 저녁은 꿈꾸듯이 쓰고 있어.
어떤 무한한 부를 주고받고 있는 듯한 숨막히는 느낌만을 품은 채 말이야.

어떻게 우리는 그처럼 긴 몇 달을 서로 침묵하고 지낼 수 있었을까?
우리는 동면을 했던 모양이지?
오! 그 무서운 침묵의 겨울이 영원히 끝나기를!
너를 다시 찾고부터는 생활도 생각도 우리의 영혼도 모두가
내게는 한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풍요해 보여.

9월 12일
피사에서 한 편지는 잘 받았어. 여기도 아주 찬란한 날씨야.
노르망디가 그처럼 아름다운 것도 처음인 것 같애.
그제는 목표도 없이 아무 데나 발길 닿는 대로 한참동안 벌판을 거닐었지.
태양과 기쁨에 함빡 취했음인지 돌아왔을 때도 피곤하기보다는 흥분한 상태였어.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짚더미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구태여 내가 이탈리아에 있다고 생각지 않아도 온갖 것이 아름다워 보였어.
그래, 네가 말하듯이 대자연의
'은은한 찬가' 속에서 내가 듣고 깨달은 것은 환희에로의 권유야.
그 권유는 새들의 노래마다 들려 왔어.
그것을 송이송이 꽃향기 속에서도 맡았어.
지금 나는 유일한 기도의 형식으로 예찬이란 것밖에는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성 프란체스코와 함께 주여! 주여! 하며
그것만을 형언할 수없이 사랑에 가득 찬 마음으로 되풀이하고 있어.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식장이가 되어간다고 걱정하진 마. 요즈음 책을 많이 읽었어.
며칠간 비가 온 덕택으로 나는 예찬을 마치 책 속에 접어 넣은 것 같애.
말브랑슈를 읽고 나서 곧 라이프니쯔의 '클라르크에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어.
그리고 좀 휴식할 생각으로 셸리의 '첸치'를 별다른 감흥도 없이 그냥 읽었어.
'라 쌍시띠브'도 읽고. 혹 네가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지난 여름 함께 읽었던 키이츠의 오드 네 편과 바꾼다면
셸리와 바이런 전부를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애.
마찬가지로 보들레르의 소네트 몇 편과 위고 전부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애.
위대한 시인이란 칭호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한 시인이라고 생각해.
아, 모든 걸 내가 알고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해준 데 대해 네게 감사해.

...아니, 서로 만나는 며칠 동안의 즐거움 때문에 여행을 단축시키지는 말아.
아직은 만나지 않는 편이 정말 좋을 것 같애. 나를 믿어 줘.
네가 내 곁에 있다 하더라도 이 이상으로 너를 생각할 순 없을 거야.
너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내 곁에 있기를 바라지 않게 되었어.
솔직히 말해서 네가 오늘 저녁에 온다는 걸 알면 나는 달아나 버릴 거야.

이 마지막 편지를 받은 지 얼마 안돼서,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징집되어 낭시로 이송되었다.

그 곳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나 나는 혼자 있게 된 것이 기뻤다.
그것은, 그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내 긍지로서나
또 알리싸에게 있어서나 이렇듯 그녀의 편지만이 나의 유일한 안식처이며
또 그녀에 대한 추억만이 롱사르의 말처럼
'나의 유일한 마음'이라는 사실임을 고적함으로써 한층 뚜렷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우리에게 과해진 엄격한 군 규율도 쉽게 견디어 냈다.
나는 모든 일에 마음을 단단히 가졌다.
알리싸에게 쓰는 편지에도 함께 있지 못함을 섭섭하게 여긴다는 말밖에 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렇게 오래 헤어져 있는 중에도
우리들의 용기에 어울리는 시련을 찾아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결코 불행하지 않는 너',
혹은 '낙담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너'라고 알리싸는 써보냈다.
이러한 그녀의 말에 증거를 보이기 위해 무엇인들 내가 견디지 못하였으랴?

우리가 헤어진 지 거의 1년이 지났다.
그녀는 그런 것을 생각지도 않는 것 같았고,
단지 이제부터 기다리기 시작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그것을 비난했다.

이탈리아에서도 나는 함께 있었지 않아?
나는 하루도 네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그것도 모르다니!
지금 잠시 너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줘!
그리고 이것이, 단지 이것만이 내가 '떨어져 있다'고 부르는 거야.
정말이지 나는 군인이 된 너를 상상해 보려고 애써.
하지만 도무지 그렇게 안 돼.
그저 저녁이면 베따 거리의 조그마한 방에서
글을 쓰고 있거나 책을 읽고 있는 너를 상상해 볼 따름이야.
한데 그것마저도 까마득해. 1년 후 퐁궤즈마르나 르아브르에서 너를 다시 볼 것 같애.

1년! 이미 가버린 날들을 세는 건 아냐.
나의 희망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미래의 그 날을 주시하고 있어.
정원 안쪽의 낮은 흙담, 그 밑에 국화가 바람을 피해 피어 있고,
그 위로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가 돌아다니던 그 낮은 흙담이 생각나?
줄리에뜨와 너는 곧장 천국으로 걸어가는 회교도처럼 겁도 없이 걸어다녔지?
그런데 난 몇 걸음 내딛기만 하면 현기증이 났고 그때마다 네가 밑에서 소리쳤지.

"발밑을 보지 말래도! 앞을 봐! 그대로 걸어! 목표를 정하고!"
마침내--소리치는 것보다 그편이 더 좋았어
--넌 담 저쪽 끝에 올라와서 나를 기다려 주었지.
그러면 난 떨리지가 않았어. 현기증도 사라져 버리고!
단지 너만을 바라보고 너의 벌린 팔 속으로 달려들곤 했지....
너를 믿는 마음이 없다면 제로옴, 나는 어떻게될까?
네가 강하다는 것을 나는 늘 느껴야 돼. 약해지지 말아.

일종의 도전적인 기본에서, 우리의 기다림을 짐짓 연장하면서,
또한 불완전한 재회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해서 설날까지
며칠간의 휴가를 내어 빠리의
미스 아슈뷔르똥 곁에서 보내기로 우리는 합의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편지들을 전부 옮겨 쓰고 있는 건 아니다.
2월 중순쯤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그저께 뤼 드 빠리를 걷다가 M 서점 진열대에서 전에 네가 알려 주긴 했지만
그 사실에 대해서는 믿을 수가 없었던 그 아벨의 책이
공공연히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퍽 놀랐어. 침을 수가 없었어.
그래 서점으로 들어갔어.
그렇지만 그제목이 너무나도 야릇해서 점원에게 감히 말할 수가 없어 주저했지.
아무 다른 책이나 사들고 서점을 나와 버릴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다행히도 카운터 옆에 '미태' 한 더미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어
한 권을 뽑아 쥐고는 입도 열지 않고 백 수우를 던졌어.

아벨이 그 책을 내게 보내 주지 않은 데 대해 감사해.
책장 넘기기가 면구스러웠어. 그 책 자체 때문이 아니라
--결국 그 책에서 나는 야비성보다도 우둔성을 더 많이 발견했어--
아벨이, 너의 친구 아벨 보띠에가 이 책을 썼다는 사실이 면구스러웠어.
'르 땅' 지의 평론가가 말한 그
'위대한 소질'을 찾아보느라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으나 헛수고였어.
아벨의 이름이 곧잘 화제에 오르는 이곳 작은 르아브르에서는
이 책에 대한 평판이 퍽 좋다는 것을 알았어.
고칠 길 없는 이 경박을 정묘니 우아니 하고 부르는 것을 듣고 있어.
물론 나는 조심을 하고 있지. 이 독후감도 단지 네게만 이야기하는 거야.

처음에는 무척 슬퍼하던 보띠에 목사님도
이제는 그  책 속에 무슨 자랑거리라도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그 주위 사람들도 누구나 목사님께 그것을 믿게 하려고 애쓰고 있어.
어제만 해도 쁠랑띠에 고모댁에서... 고모님이 갑자기,
"아드님이 그렇게 성공을 하셨으니 기쁘시겠습니다, 목사님."
하니까 목사님은 좀 당황해서 이렇게 대답하셨어.
"뭘요, 아직 그렇게까지는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자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되실 걸요. 그렇게 생각되실 거예요."
하고 고모님이 말씀하시자, 물론 거기에 악의는 없었지만
그 어조가 워낙 고무적이어서, 모두 웃기 시작했고 목사님도 웃으셨어.
볼바아르의 어느 극장에서 상연하려고 그가 준비하고 있다는 말도 들리는데
벌써부터 신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듯한
'신아벨라아르'가 상연되면 무슨 꼴이 될까! 불쌍한 아벨!
이제 바로 그가 원하고 또 만족할 성공일까!

어제 '마음의 위안'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어.
'참되고 영원한 영광을 진실로 바라는 자는 일시적인 영광에
마음 속에서 경멸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성스러운 영광을 바라지 않는 자이니라'.
그걸 읽고 나자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감사합니다, 하느님. 어떠한 지상의 영광과도 비길 수 없는
이 성스러운 영광을 위해 제로옴을 선택해 주셔서".

몇 주, 몇 달이 단조로운 근무 속에서 흘러갔다.
그러나 늘 추억이나 희망에만 마음을 썼기 때문에 세월이 느리다는 것,
시간이 길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했었다.
삼촌과 알리싸는 6월에 해산할 줄리에뜨를 보러 님므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좀 좋지 않은 소식이 와서 그들은 출발을 서두르게 됐다.

르아브르로 보낸 네 마지막 편지는 우리가 막 그곳을 떠난 뒤에 도착했어.
8일이나 지나서야 이곳에서 받았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한 주일 내내 나는 뭔가 허전하고 무섭고 불안하고 위축된 속에서 지냈어.
오오! 제로옴, 네가 있어야 난 참 된 나 자신일 수 있고 또 그 이상일 수 있어.
줄리에뜨는 다시 건강해졌어.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고 해산을 기다리는 중이야.
별 걱정은 없어. 오늘 아침 내가 네게 편지 쓴다는 걸 그 애도 알고 있어.
우리가 애그비이브에 도착한 다음날,

"제로옴은 어떻게 됐어, 여전히 편지해?"하고
그 애가 묻길래 속일 수 없고 해서 말을 해줬더니,
"이번에 편지할 땐 이렇게 말해 줘...."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이젠 다 나았다고 말야."하고 말했어.

언제나 쾌활한 그 애의 편지를 받으면서
나는 혹시 그 애가 짐짓 행복을 가장하고 있지나 않을까,
또 자기 자신도 그러한 기분에 잠겨든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었어.
그런데 오늘에 와서 그 애가 행복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애가 꿈꾸던 것,
그 애의 행복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나 달라졌어.
아! 사람들이 행복이라 부르는 것은 어쩌면 이다지도 영혼과 밀접한 것일까!
행복을 외적으로 형성하는 듯한 요소는 어쩌면 그다지도 부질없는 것일까?
벌판을 혼자 거닐면서 생각한 숱한 일들을 네게 알리고 싶지는 않아.
단지 내가 그곳을 거닐며 놀란 것은
이제는 나 자신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야.
줄리에뜨가 행복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텐데...
어째서 내 마음은 억제할 수 없는 알지 못할 우울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내가 느끼는, 적어도 내가 두 눈으로 바라보는 이 고장의 아름다운 풍경도
그저 내게 알 수 없는 슬픔을 더해 줄 따름이야.

네가 이탈리아에서 내게 편지해 주던 무렵에는
너를 통해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는 너와 함께 보지 않는 온갖 것은
모두 내게 네게서 훔치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결국 퐁궤즈마르나 르아브르에 있을 때는
울적한 나날에 대비하느라고, 견디어 내는 힘을 나는 기르고 있었어.
그런데 이곳에 와서는 그것이 아무 소용도 없어졌어.
그리고 그것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됐다고 느끼니 계속 불안한 상태야.

이 고장 사람들이나 이 고장 즐거움에도 기분이 상해.
내가 없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몰라.
아무래도 전의 내 기쁨 속에는 어떤 오만심이 깃들어 있었던가 봐.
왜냐하면 이 낯선 지방의 즐거운 분위기 속에 싸여서
내가 느끼는 것은 일종의 굴욕감이니 말야.

이곳에 온 후에는 거의 기도도 드리지 못했어.
이제 하느님께 선 옛날 그 자리엔 계시지 않으시리라는 어린애 같은 느낌이 들어.
잘 있어. 총총히 펜을 놓아야 되겠어.
이런 모독적인 말, 나의 나약한 마음, 슬픔이 부끄럽고,또 그것을 고백한다는 것이
그리고 만일 우편 배달부가 오늘 저녁에 가져가지 않는다면
찢어 버릴 것 같은 이런 이야기를 써 보낸다는 것이 모두 부끄럽기만 해.

그 뒤에 온 편지는 그녀가 대모가 될 조카딸의 출생,
줄리에뜨와 삼촌의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뿐,
자신의 기쁨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러자 퐁궤즈마르에서 부친 편지들이 오기 시작했다.
줄리에뜨도 7월에 그곳에 왔다.

에뜨와르 씨와 줄리에뜨는 오늘 아침에 떠났어.
무엇보다도 그 갓난애가 떠나서 서운해.
여섯 달 후에 다시 보면 그 몸집도 퍽 달라지겠지.
지금까진 그 애의 동작을 하나도 빼지 않고 보아 왔어.
생성이란 언제나 퍽 신비롭고 놀라운 거야.
우리가 평소에 주의만 하면 놀라운 일을 더 많이 보게 될 거야.
희망에 가득 찬 그 잠든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몰라.
발전이란 그 무슨 이기심, 자기 만족, 선에 대한 갈망의 결핍 때문에
그처럼 빨리 정지되고, 또 모든 생물이
그리도 멀리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머물러 버리는 것일까?
오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좀 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면,
좀 더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면 얼마나 마음의 격려를 받을 것인가!

줄리에뜨는 퍽 행복해 보여.
나는 그 애가 피아노와 독서를 그만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슬펐어.
하지만 에뜨와르 떼씨에르 씨는 음악이나 독서에는 별로 취미가 없어.
확실히 남편이 따라 오지 못하는 즐거움을 찾지 않는 것은 줄리에뜨의 현명한 처사 같애.
반대로 줄리에뜨는 남편이 하는 일에 흥미를 갖고
또 그이도 자기가 하는 모든 사업을 그 애에게 가르쳐 주고 있어.
금년엔 그 사업도 꽤 번창하고 있어.

다 결혼을 인해 르아브르에 많은 고객이 생긴 덕택이라고 그이는 농담을 하지.
이번에 그이가 사업 관계로 여행을 하게 될 때 로베르도 따라 갔어.
에뜨와르는 여러 가지로 그 애를 돌보아 줄 뿐 아니라
그 애의 성격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 애가 그런 일에 정말 취미를 갖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아버지는 훨씬 좋아지셨어. 딸이 행복해진 걸 보니  젊어지시는 모양이야.
농장 일, 정원 일에 다시 흥미를 느끼시고 되었고
또 미스 아슈뷔르똥과 셋이서 전에 시작했다가 떼씨에르씨 가족이 와서 중단했던
소리를 높여 읽던 독서를 다시 계속하자고 때로는 말씀하셔,
두 분에게 휴브너 남작의 여행기를 읽어 드리고 있는데 나도 퍽 재미를 느끼고 있어.
나도 이제는 독서할 시간을 더 많이 가질 거야.
하지만 네게 서 무슨 지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오늘 아침 몇 권의 책을 하나하나 들춰 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은 한 권도 없었어.

이 무렵부터 알리싸의 편지는 차츰 혼란되고 절박해졌다.
여름이 끝날 무렵 다음과 같은 편지가 왔다.

네가 걱정을 할까 두렵기는 하지만
내가 얼마나 너를 기다리고 있는가를 말해야만 하겠어.
너를 다시 만날 때까지의 하루하루가 짐이 되어 무겁게 나를 누르고 있어.
아직도 두 달! 지금까지 너와 떨어져 지내 온 기간보다도 더 긴 것 같애!
이 가다리는 마음을 좀 잊어 보려고 기울이는 모든 노력이
우스꽝스러운 일시적인 것으로만 여겨져서
이제 나는 아무것에도 노력을 기울일 수가 없게 됐어.
책에서도 이제는 아무런 힘이나 매력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산책도 재미가 없어.

대자연 전체가 그 위력을 잃은 채 정원도 퇴색되고 향기를 잃은 것 같애.
오히려 너의 그 고역, 의무적이고 강제적인 그 훈련,
언제나 너로부터 너 자신을 빼앗아 너를 피곤하게 하고 하루하루를 빨리 지나가게 하며
저녁이 되면 피곤에 지친 너를 잠들게 하는 그 고역이 내게는 부러워.

훈련에 관해서 써보낸 감동적인 너의 편지가 나를 사로잡고
기상 나팔 소리에 벌떡 튀어 일어나곤 했어.
확실히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네가 이야기하는 그 가벼운 도취, 아침 잠을 깨면서 느끼는 기쁨,
그 절반쯤 황홀한 경지, 이 모든 것을 나는 아주 손쉽게 상상할 수 있어.
새벽의 얼어붙은 눈부신 광명 속에서 말제빌르의 그 고지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얼마 점부터 몸이 좀 불편한 것 같아. 아니, 대수로운 건 아니야.
단지 너를 좀 지나치게 기다리는 탓이라 생각해.

그리고 여섯 주일 뒤에
이것이 마지막 편지야. 제로옴,
너의 돌아올 날까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 늦어지지야 않겠지.
나는 퐁궤즈마르에서 너를 만나고 싶었으나
기후가 나빠지고 추워져서 아버지는 자꾸 시내로 돌아가자고 하셔.
지금은 줄리에뜨도 로베르도 없으니 얼마든지 집에 와서 머무를 수 있지만
너는 역시 펠리씨 고모도 그렇게 하는 걸 기뻐하시리라 생각되고.
다시 만날 날이 다가올수록 점점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어.
거의 두려움에 가까운 그러한 기분이야.
네가 돌아오기를 그처럼 기다렸는데 막상 네가 돌아온다니 두려워지는 것 같애.
이 이상 거기에 대해서 생각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
네가 누르는 초인종 소리, 계단을 올라오는 너의 발자국 소리를
상상하기만 해도 숨이 끊어지는 것 같고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내게서 어떤 말이 나오기를 기대해서는 안 돼.
내 과거가 거기서 끝나 버리는 것 같아.
그 너머 저쪽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내 삶이 정지된 듯....

그로부터 나흘 후에,
다시 말하면 내가 제대하기 일주일 전에 극히 짧은 편지를 다시 한 통 받았다.

제로옴, 너무 오랫동안 르아브르에 머물러
우리들의 첫 재회의 기간을 길게 끌지 않기로 하려는 데는 절대 찬성이야.
지금까지 서로 편지에 쓴 것 외에 또 무슨 할 말이?
그러나 학교 등록 때문에  28일까지 빠리에 가야 한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가.
이틀밖에는 함께 있지 못한다고 섭섭히 생각지도 말아.
우리 앞에는 한평생이 있지 않아.

우리는 쁠랑띠에 이모 댁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군 복무 탓인지 나는 갑자기 둔하고 어색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변했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헛된 인상이 우리 둘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나는 그녀의 옛 모습을 이제는 완전히 찾아보지 못하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처음에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아니, 우리를 어색하게 만든 것은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약혼자끼리의 어리석은 역할,
우리 둘만을 한 자리에 남겨 두려는 친절, 우리 앞에서 물러나려는 그 친절이었다.

"고모님, 정말 아무 상관없어요. 남이 들어서 어색할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알리싸는 이모가 물러나가고 수선을 피우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아니다! 그래도 그렇지 않은 거다! 난 너희들을 잘 알고 있어.
오랫동안 떨어져 있으면 자질구레하게 할말이 태산 같은 법이야."
"정말이에요, 고모님. 나가시면 오히려 저희들이 쑥스러워져요."
그 목소리에는 노기마저 서려 거의 알리싸의 목소리 같지가 않았다.
"이모님, 나가시면 저희는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나는 웃으면서, 그러나 단둘이 남게 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일종의 두려움에 살 잡혀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들 세 사람은 짐짓 쾌활한 척하는, 속된,
그리고 이면에는 각기 근심이 숨어 있으면서도
표면으로는 생기가 나는 듯한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다음날은 삼촌이 점심에 청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첫날 오후 그러한 희극을 끝마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지고 말았다.

나는 식사 시간보다 훨씬 전에 갔으나
알리싸는 자기 친구 하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알리싸도 그 친구에게 돌아가 달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그 친구도 도무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 친구가 나가 버리고 단둘이 있게 되자
나는 알리싸가 점심을 같이 하자고 그 친구를 붙들지 않은 걸 짐짓 놀라는 척했다.
전날 밤 잠을 자지 못해 피곤했던 우리는 도무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삼촌이 들어왔다.
삼촌도 이제는 많이 늙었구나 하고 내가 생각하고 있음을 알리싸는 눈치챘다.
삼촌은 귀가 어두워져 내 이야기를 잘 듣지 못했다.
그 때문에 나는 음성을 높여야 했고 따라서 내 이야기는 어설프게 됐다.

점심 식사 후에 미리 약속했던 대로 쁠랑띠에 이모가 마차로 우리들을 데리고 왔다.
이모는 우리들, 알리싸와 내가 돌아오는 도중
가장 아름다운 코오스를 걸어서 오도록 할 의도에서 오르쉐까지 태워다 주셨다.

계절에 비해서 날씨는 더운 편이었다.
우리가 걷게 된 언덕은 햇빛만 쬐고 아무런 운치도 없었다.
나무들은 잎이 져서 앉아 쉴 그늘도 없었다.
이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마차로
빨리 가야 되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두통이 나는 머리에서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질 않았다.
태연한 체하기 위해서, 혹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나는 걸으면서 알리싸가 내게 맡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흥분한 데다가 빨리 걸어 숨이 가빠지고
침묵으로 어색해져서 우리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 귀에는 관자놀이가 뛰는 소리가 들렸다.
알리싸의 얼굴은 민망할 정도로 붉어 있었다.
이윽고 우리는 땀에 젖은 손을 잡고 있다는 어색함을 느껴
서로 손을 슬그머니 놓아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너무나 서둘러 걸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야기 할 시간을 주려고
다른 길을 거쳐서 아주 천천히 몰고 온 이모의 마차보다 훨씬 먼저 네거리에 이르렀다.
우리는 언덕의 비탈에 앉았다.
갑자기 불기 시작한 찬바람에 몸이 오싹했다.
우리는 땀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모의 마차를 마중 가려고 일어섰다.
그러나 이모의 성가신 친절은 더 견디기 못해
눈에 눈물까지 글썽글썽해진 알리싸는 심한 두통이 난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엔 모두들 조용했다.

이튿날 잠이 깨자 몸이 무겁고 감기가 들어 아팠기 때문에
오후에야 뷔꼴랭 댁에 가볼 생각이 났다.
공교롭게도 알리싸는 혼자 있지를 않았다.
펠리씨 이모의 손녀인 마들레느 쁠랑띠에가 거기 있었다.
나는 알리싸가 곧잘 그 애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애는 며칠을 자기 할머니 집에서 묵고있던 참이었는데 내가 들어서자,
"돌아갈 때 언덕으로 해서 가시거든 같이 올라가요." 하고 소리쳤다.

나는 무심코 승낙했다. 그래서 나는 알리싸와 단둘이 걷질 못했다.
그러나 이 귀여운 어린애가 어떤 면에서는 도움이 되기도 했다.
전날의 그 어색한 기분은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우리 셋 사이에 이야기는 곧 쉽게 벌어졌고
내가 처음 염려했던 것처럼 쑥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내가,

"잘 있어."하고 인사를 하자 알리싸는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다음날 떠난다는 사실을 그녀는 그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얼마 안 있으면 또 만나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잘 있어'라는 이별의 말이 어떤 서글픈 감을 자아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저녁 식사 후에도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나는 다시 시내로 내려가서 거의 한 시간을 헤매다가 뷔꼴랭 댁에 다시 갈 작정을 했다.
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삼촌이었다.
알리싸는 몸이 불편해서 벌써 자기 방으로 올라갔고 올라간 후엔 곧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삼촌과 이야기하다가 다시 나왔다.

모든 일이 이처럼 빗나가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불평을 한들 또 무슨 소용이 있으랴.
설령 만사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역시 그런 어색한 느낌을 꾸며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리싸도 그것을 느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슬펐다.
빠리에서 돌아오자 나는 곧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제로옴, 얼마나 슬픈 재회였어!
그 잘못을 너는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 같았지만
너 자신도 그 점을 확신하지는 못했어.
그리고 이제는 앞으로도 늘 그러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항상 그러하리라는 것만을 나는 잘 알고 있어.
아아! 정말 이제는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해.

서로 할 이야기가 태산같이 많은데도 왜 그런 거북한 감정,
어색한 느낌, 마비 상태, 침묵 같은 것이 우리를 엄습했을까?
네가 돌아온 첫날은 그 침묵마저도 즐거웠어.
왜냐하면 침묵은 곧 사라지고 너는 굉장한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야.
그러기 전에 네가 떠나가 버릴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어.

그러나 오르쉐에서 우리의 침울한 산책이 침묵 속에 끝나는 것을 보고,
더구나 우리의 손이 서로 떨어져 아무런 희망도 없이 내려뜨려졌을 때,
내 가슴은 슬픔과 괴로움으로 무너지는 것 같았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슬펐던 것은 너의 손이 나의 손을 놓아 버렸다는 사실이 아니라
만일 너의 손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의 손이 그렇게 하였으리라는 생각이야.
왜냐하면 나의 손은 이미 너의 손 안에서 즐거움을 잊었으니까.
그 다음 날, 어제였지. 아침결에 나는 미친 듯이 너를 기다렸어.
집안에 있기에는 너무나 마음이 뒤숭숭해서 네가 오더라도
내가 있는 곳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방파제로 오라고
쪽지를 적어 두고 집을 나와 버렸어.
오랫동안 파도가 센 바다를 바라보았지만
너도 없이 혼자서 바라보기엔 너무도 가슴이 아팠어.
문득 네가 내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다시 집으로 돌아와 버렸어.

오후에는 혼자 있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어.
왜냐하면 마들레느가 오겠다고 그 전날 말하길래
너와는 아침에 만날 생각으로 와도 좋다고 했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애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이라도 좋은 시간을 이번 재회에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애.
잠시 동안 나도 그처럼 힘들지 않은 우리들의 대화가
오래오래 계속될 것만 같은 이상한 환상에 빠졌어.
그래서 내가 그 애와 함께 않아 있던 소파 가까이로
네가 다가와서 나를 향해 몸을 굽히며,
"잘 있어."하고 말했을 때 난 대답조차 할 수 없었어.
모든 것이 끝아 버리는 것 같았어. 갑자기 네가 떠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마드레느와 함께 네가 나가버리자마자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으며 또 참을 수 없는 일로 생각되었어.
그래서 내가 다시 뛰쳐나갔다는 것을, 너는 짐작도 못했을 거야!
좀 더 너와 이야기하고 싶었고
아직 내가 하지 않았던 많은 이야기를 네게 들려주고 싶었어.
벌써 나는 펠리씨 고모 댁을 향해 달리고 있었어.
하지만 너무 늦었어. 시간도 없고, 용기도 없었어. 나는 맥없이 돌아왔어...
이별의 편질 쓰기로 했어. 왜냐하면 결국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는 건
단지 커다란 환영에 지나지 않으며 너나 나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편지를 쓰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너무도 뚜렷이 떠올랐기 때문이야.

그리고 제로옴! 제로옴!
아! 우리는 늘 떨어져 있어 왔다는 생각!
나는 이 편지를 찢었어. 정말이야. 하지만 지금 다시 쓰고 있어.
처음 편지와 별다름 없어. 오오, 내가 전보다 너를 더 사랑하는 건 아니야!
제로옴! 오히려 반대로 네가 내 곁에 오는 순간 나는 마음이 혼란해지며
어색해졌지만 또 그때처럼 사무치도록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껴 본 적도 없었어.

하지만 거기에는 절망감이 깃들어 있었어.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너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더욱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야.
벌써부터 그렇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어.
아아! 그렇게도 보고 싶던 너를 다시 만나자 이러한 걱정이 옳았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어.
그리고 제로옴, 너도 그것을 인정해야 돼. 잘 있어,
이토록 사랑하는 제로옴, 하느님이 너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안심하고 우리가 접근해 갈 수 있는 것은 하느님 뿐이야.

그리고 마치 이 편지만으로는 아직 나를 충분히 괴롭히지 못한 것처럼
다음날 그 편지에 다음과 같은 추신을 덧붙였다.

이 편지를 부치기 전에 우리 두 사람에 관한 일에 대하여
좀더 신중한 태도를 지녀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었어.
너와 나만이 알고 있어야 할 일을 줄리에뜨나 아벨에게 들려줌으로써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몇 번인지 몰라.
바로 이런 점에서도 네가 눈치 채기 훨씬 전부터 나는
너의 사랑이 무엇보다도 머릿속의 사랑,
애정과 신뢰에 대한 아름답고 지적인 집착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어.

내가 이 편지를 아벨에게 보여 주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이 몇 줄을 덧붙였음에 틀림이 없었다.
어떤 날카로운 예감에서 그녀는 그다지도 신중하게 되었을까?
전에 내가 한 이야기 종에서 아벨의 조언을 눈치 챈 것일까?
그로부터 나는 나와 아벨 사이에 커다란 거리가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상이한 두 갈래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내 슬픔의 쓰라린 짐을 나 혼자 짊어지도록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조언은 아무런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후의 사흘간을 나는 고통 속에서 지냈다. 나는 알리싸에게 회답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너무 지나친 논쟁이나 심한 항의가 한 마디라도 실수를 하여
우리의 상처를 고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만들지 않을까 두려웠다.
내 사랑이 몸부림치는 편지를 나는 몇 번이나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우곤 했다.
결국은 부치기로 결심했던 그 편지의 사본,
눈물에 씻긴 이 종이를 오늘에 와서도 눈물 없이 나는 다시 읽을 수가 없다.

알리싸!
나를, 우리 둘을 불쌍히 여겨 줘! 너의 편지는 너무도 괴로운 것이었어.
네 걱정을 그저 웃어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네가 써보낸 모든 것을 나도 느끼고 있었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가 두려웠어.
단지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어째서 너는 소름이 끼치는 사실로 생각하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것을 어와 나 사이에 자꾸 두텁게 만들고 있는지!
만일 네가 나를 그 전체가 부인하고 있는 이 잔인한 가정을 멀리 떨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일시적인 너의 두려움이 무슨 상관이 있어?
알리싸,
이론을 캐려고 하니 말이 얼어붙어. 단지 내 가슴에 울부짖는 소리만 들릴 뿐이야.
나는 기교를 부리기에 너무나 너를 사랑하고 있고
또 사랑하면 할수록 무엇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머릿속의 사랑'... 거기에 대해 나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까.
나는 온 영혼을 기울여 너를 사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나의 지성과 애정을 구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의 편지 왕래가 너의 가혹한 비난의 원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또 그러한  편지 왕래 때문에 고무되었던 우리에게
뒤이어 찾아 온 현실에의 전락이 그토록 쓰라린 상처를 줬기 때문에,
또한 네가 편지를 한다 하더라도 이제는 단지
너 자신에게 편지할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제발 당분간은 편지 왕래를 끊기로 해.

그리고 이어서 그녀의 판단에 항의하면서
생각을 돌이켜 주도록 호소하고 다시 한번 만날 약속을 해달라고 청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만사가 어긋나 있었다.
무대 장치나 단역배우나 계절도 신통치 못했고
열이 올라 있던 우리의 편지 왕래까지도
우리의 재회에 대비해서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다시 만날 때까지 침묵을 지키리라.
나는 돌아오는 봄 퐁궤즈마르에서 우리의 재회를 갖고 싶었다.
거기서라면 지나간 날의 추억도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사촌도 반가이 맞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부활제 방학을 이용해서
며칠이고 알리싸가 좋다고 생각하는 동안 퐁궤즈마르에 머무르고 싶었다.
내 결심은 확고한 것이었다.
편지를 부치자 나는 곧 학업에 열중할 수가 있었다.

그 해가 끝날 무렵 나는 알리싸를 다시 보게 되었다.
몇 달 전부터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던 미스 아슈뷔르똥이
크리스마스를 나흘 앞두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제대 후에 나는 다시 그녀와 함께 살았으며
거의 함께 있었기 때문에 임종에도 그 곁에 있을 수가 있었다.

알리싸에게서 온 엽서를 받아 보고 나는 이번 나의 슬픔보다도
우리의 침묵의 맹세를 그녀가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삼촌이 참석을 못하시기 때문에
자기가 매장에만 잠시 참례하러 오겠다고 적혀 있었다.

장례식에서도 그리고 상여를 따라갈 때도 거의 그녀와 나 둘뿐이었다.
나란히 걸으면서 우리는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에서 그녀가 내 곁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몇 번이고 그녀의 다정한 눈길이 내게로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럼 알았지."
헤어질 무렵 그녀는 말했다.
"부활절 전에는 아무것도...."
"그래, 하지만 부활절에는...."
"기다리고 있겠어."
우리는 묘지입구에 있었다.
나는 역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나가는 마차를 세우더니 잘 있으란 말 한 마디 없이 나를 두고 가버렸다.

"알리싸가 정원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4월 말 퐁궤즈마르에 도착하자
삼촌은 친아버지처럼 내게 키스를 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선뜻 뛰어나와 나를 맞아 주지 않아서 처음에는 서운했으나
곧 그녀가 다시 만나게 된 첫 순간의 너절한 인사치레를
우리가 생략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고마왔다.

그녀는 정원 안쪽에 있었다.
때마침 철을 만나 활짝 핀 라일락, 마가목, 금잔화, 웨즐리아 등의 꽃 덩굴로
빽빽이 둘러싸인 그 둥그런 갈림길로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너무 멀리서부터 그녀를 보지 않도록,
아니  내가 오는 것을 그녀가 보지 못하도록
나는 정원 한쪽의 나뭇가지 밑으로 공기 서늘한 그늘진 오솔길을 따라갔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하늘도 나의 기쁨처럼 산뜻하게 빛나고 아련하게 맑았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다른 쪽 길로 오리라 생각하고 기다렸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 가까이 등뒤에까지 갔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시간마저 나와 함께 멈춘 것 같았다
이 순간이야말로 행복 그 자체보다 앞서 오고,
또 행복 그 자체도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녀 앞에서 무릎을 끓고 싶었다.
나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러자 그녀도 이 발걸음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별안간 일어서더니 놓고 있던 그 수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잊어버린 채
내게로 두 팔을 내밀어 내 어깨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얼마동안을 우리는 그렇게 서 있었다.
그녀는 두 팔을 내민 채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갸웃하고 말없이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휜 옷차림이었다.
나는 지나칠 정도로 경건한 그녀의 얼굴에서 앳된 그 미소를 다시 보았다....

"이것봐, 알리싸."
나는 갑자기 소리쳤다.

"나는 앞으로 열 이틀 동안 방학이야.
하지만 네가 싫다면 단 하루도 더 머무르지 않을 테야.
그러니 내일은 퐁궤즈마르를 떠나야 되리라는 걸 표시해 줄 무슨 신호를 결정하기로 해.
그러면 다음날 아무런 비난이나 불평도 없이 떠날 테야. 알았지?"

미리 준비한 말이 아니어서 한결 수월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저녁 식사하러 내려갈 때 네가 좋아하는 그 자색 수정 십자가를
내가 달고 있지 않은 저녁, 알겠어?"하고 말했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저녁이란 말이지?"
"하지만 눈물도 한숨도 없이 떠나야 해."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겠어.
그 마지막 저녁에도 그 전날 저녁과 다름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질 테야.
아직 알아차리질 못했나 하고 네가 생각할 정도로 말야.
다음날 네가 찾을 때는 나는 이미 없을 거야."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입술로 가져오면서 나는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지금부터 그 마지막 밤까지는 어떤 눈치도 보이지 않기로 해."

이제는 이 재회의 엄숙한 분위기로 하여 자칫하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색한 느낌을 씻어 버릴 차례였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정말이지 네 곁에서 지낼 요 며칠이 우리들의 지난날과 꼭 같았으면 좋겠어...
말하자면 우리도 이 며칠이 예외적인 것이라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지.
그리고 처음에는 너무 이야기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면...."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나는 덧붙였다.
"우리가 함께 해볼 만한 일은 없을까?"

전부터 우리는 정원을 가꾸는 데 재미를 붙여 왔다.
아직 익숙지 못한 정원사가 전에 있던 정원사의 뒤를 이어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두 달 동안이나 방치해 두었던 정원에는 할 일이 많았고
장미나무에도 손길이 가지 않아 그 중 싱싱하게 자라나는 것들에는
시든 가지가 잔뜩 뒤얽혀 있었다.
새끼친 가지들이 다른 가지를 시들게 했다.
이 장미나무는 대부분 우리 가 접붙여 놓은 것들이었다.
우리가 손질한 그 장미들을 우리는 잘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것을 돌보느라고 처음 사흘동안은 힘든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서로 이야기할 수 있었고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을 때에도
그 침묵이 힘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우리는 차츰 다시 서로 익숙해졌다.
나는 어떤 설명보다도 이렇게 서로 익숙해져 간다는 데 더욱 기대를 걸었다.
헤어져 있다는 기억마저 이미 우리 사이에서 사라졌고 내가 그녀에게 느끼던 두려움도,
또 그녀가 내게서 두려워하던 마음의 긴장도 차츰 흐려져 가고 있었다.
쓸쓸했던 나의 지난 가을 방문 때보다 한층 앳된 알리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아직도 그녀와 키스해 본 적이 없었다.
저녁마다 나는 그녀 웃옷 위에서 조그마한 자색 수정 십자가가
자그만 금줄에 달려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내 가슴 속에는 또다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희망이라고? 아니, 그것은 차리리 확신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알리싸도 또한 느끼고 있으리라고 나는 짐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을 거의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의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츰 우리의 대화는 대담해져 갔다.

"알리싸."
아름다운 대기가 웃음을 머금고 우리의 가슴이
꽃봉오리처럼 피어나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말했다.
"이제는 줄리에뜨도 행복하게 되었으니 우리도..."
나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너무나 창백해져서 나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시작했다.

"네 곁에서 나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어...
하지만 내 말을 들어 봐, 우리는 행복하려고 태어난 건 아냐."
"그렇다고 영혼이 행복 외에 무엇을 택한단 말이야?"하고 나는 성급히 소리쳤다.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성스러운 것을...."
그 목소리가 너무도 낮았기 때문에
나는 이 말을 들었다기보다는 그러한 말일 거라고 짐작했다.
내 모든 행복은 날개를 펴고 나를 버린 채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너 없이 나는 그렇게 될 수가 없어."
나는 그녀의 두 무릎에 이마를 파묻고 어린애처럼 울면서 말을 이었다.
"너 없이는 안 돼, 너 없이는 안 돼!"

그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흘러갔다.
그러나 그 저녁, 알리싸는 구 조그마한 자색 수정 십자가를 달지 않고 나타났다.
이튿날 나는 약속한 대로 충분한 새벽녘에 떠났다.

그 다음 날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세익스피어의 시 몇 줄이 인용구로 적혀 있었다.

그 곡을 다시 한번, 꺼질 둣 스러지는 곡이더라.
오오, 오랑캐꽃 핀 언덕 위를 스쳐 내 귀엔 들려 왔다--됐어 그만,
이젠 아까처럼 감미롭지 못해
그래! 아침 내내 나도 모르게 너를 찾았어.
제로옴, 네가 떠났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어.
네가 약속을 지켜 준 것이 원망스러웠어.
나는 이것이 장난이려니 생각했어.
덩굴마다 네가 나타날까 하고 보러 갔어.
하지만 너는 정말 떠나 버렸어. 고마워.

그러고 나서는 온종일 네게 알려 주고 싶은 몇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고
그리고 또 만일 그 생각들을 네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네게 해주어야 할 일을 소홀히 했다는 느낌과,
마땅히 네게 꾸중을 들을 만한 것이라고 장차 생각하게 되리라는
이상하고도 또렷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어.
네가 퐁궤즈마르에 체류한 처음 몇 시간 에 곁에서 느낀
내 온몸과 마음의 그 야릇한 충족감에 놀랐고 그것이 곧 불안해졌어.

'이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을 정도의 충족감!'이라고 너는 내게 말했어.
그런데 내가 불안해 하는 것은 바로 그거야.
내 의도를 잘못 이해할까 두려워. 제로옴,
가장 강렬한 내 심정의 표현을 하나의 까다로운 이론의 전개
(오오! 얼마나 어설픈 이론일까)로 생각지나 않을 까 두려워.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행복이 아닐 거야.'라고 내게 한 말이 생각나?
그때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어.
하지만 아니야. 제로옴, 그것은 우리를 충족시켜 주지 않아.
지난 가을 우리는 이러한 충족감 뒤에 어떤 슬픔이 깃들어 있는 가를 깨닫지 못했던가?
오오! 하느님,
그러한 충족감이 진실된 것이 아니도록 해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의 다른 행복을 위해서 태어났어.

전에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가 가을의 재회를 슬프게 했듯이
이제 네가 여기 있었다는 추억이 오늘 내가 쓰는 이 편지의 기쁨을 앗아가 버렸어.
언제나 네 곁에서 지낼 때면 느꼈던 그 황홀감이 이제는 어디로 갔나?
편지를 주고받고 서로 만나고 했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가질 수 있는 그 순수한 기쁨을 우리는 남김없이 고갈시켜 버렸어.
그래서 나는 이제 나도 모르게 '십이야'에 나오는 오시노처럼 부르짖고 있어.
'됐어 그만, 이젠 아까처럼 감미롭지 못해.'

잘 있어, 제로옴.
'이로부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시작되노라'.
아아!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너도 알까?
--영원한 너의 알리싸

덕이라 하는 함정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온갖 영웅적인 기본이 나를 현혹하면서 나를 자꾸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기분을 사랑과 분리해서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리싸의 편지는 나를 가장 무모한 열정으로도 도취 시켰다.
내가 좀 더 덕을 쌓으려고 한 것도 단지 알리싸만을 위해서였다.
어쩐 길도 위로 올라가는 길이라면
그것은 나를 알리싸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것 같았다.

아아! 대지가 제 아무리 갑작스럽게 좁나진다 하더라도
단지 우리 둘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넓다고 생각될 것이었다.
아아! 나는 아직도 그녀의 미묘한 가장을 간파하지 못했으며
또 이변에도 이제 겨우 올라간 상상봉에서 그녀가 나를 두고
다시 도망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긴 답장을 썼다.
나는 그 중에서도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케 할 수 있는
단지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사랑은 내가 지니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 돼.
내 모든 덕행이 거기에 딸려 있고,
사랑이야말로 나를 나 이상의 위치로 끌어올려 주는 것같이 생각 돼.
또 만일 사랑이 없다면 난 대부분 평범한 인간들이 차지하는
보통의 높이로 다시 떨어져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애.
너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가장 험준한 길도 내겐 언제나 좋은 길이라 생각돼.

이 편지에 나는 또 무슨 말을 덧붙였는지 그녀는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하지만 제로옴,
성스럽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야
(편지에는 이 의무란 단어 밑에 줄이 셋이나 그어져 있었다).
만일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와 다름이 없는 사람이마면
너도 역시 이것을 피하지는 못할 거야.

그것 뿐이었다.
우리의 편지 왕래는 이것으로 끝났고 아무리 교묘한 충고나 굳건한 의지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리라 하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기보다도 오히려 예감했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애정에 넘치는 긴 편지를 썼다.
세 번째 편지를 부친 뒤에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제로옴
내가 네게 편지를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생각지는 말아.
다만 마음이 내키지 않을 뿐이야.
네 편지는 여전히 나를 즐겁게 해주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네가 나를 생각하도록 만든 데 대해서 나는 점점 더 나 자신을 꾸짖고 있어.
이젠 여름도 멀지 않았어. 당분간은 편지를 쓰지 않기로 하고,
9월 하순의 두 주일을 퐁궤즈마르에 와서 함께 보내 줄, 수 없겠어?
승낙한다면 답장은 필요 없어, 그것을 승낙의 표시로 알 테니까?
회답이 없기를 바래.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이 침묵이야말로 그녀가 나에게 부과한 마지막 시련이었음에 틀림없다.
몇 달 동안의 공부와 몇 주일의 여행을 마치고
퐁궤즈마르에 왔을 때 나의 마음은 지극히 안정되어 있었다.
이 짧은 이야기로써 처음에는 나 자신도 이해 못했던 일을
어떻게 독자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 후 나를 여지없이 절망 속으로 밀어넣은
그 슬픈 사건 이 외에 무엇을 내가 여기에 적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에 와서는 그 가장 부자연스러워 보이던 가면 밑에서
아직도 사랑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 것을 통탄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 가면밖에 보이지를 않아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길이 없을 만큼
그녀가 변한 것을 보고 비난하지는 않았어,
알리싸.
단지 지난 그녀가 변한 것을 보고 비난하지는 않았어 알리싸,
단지 지난날의 너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어 절망에 울었을 따름이야.
너의 애정이 지니고 있었던 침묵의 술책이나 잔인한 기교 등에 의하여
네가 품었던 사랑의 힘을 잴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
나는 너로부터 잔인하게 설움을 받으면서도
그로 인해 더욱 너를 사랑해야 할 것인가?
경멸? 냉정? 아니, 이겨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마주 서 싸울 아무런 대상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가끔 주저했고 내 불행도
내가 꾸며낸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보기도 했다.
그처럼 내 불행의 원인은 미묘했고 그토록 알리싸는 모르는 척 했던 것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한탄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 어느 때보다도 그녀는 애교 있게 나를 대해 주었다.
그녀가 그토록 친절하고 상냥해 보이기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거의 속아넘어갔다.
전과 달리 납작하게 졸라맨 머리 매무새로 인해 표정까지 달라질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딱딱해 보였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었으랴!
거친 촉감을 주는 검은 색의 어울리지 않는 웃옷으로 말미암아
그 아름다운 몸의 곡선이 손상되었기로 그것이 무슨 상관이었으랴.
그것 스스로 혹은 내가 부탁한다면 그녀는 고치리라고 나는 어리석게도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친절하고 상냥한 마음씨가 슬펐다.
그러한 일은 우리 사이에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서 충동보다는 오히려 결심을, 또 말하기는 거북하지만
사람보다는 오히려 예의를 발견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저녁 때 응접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피아노가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실망한 소리로 묻자,
"수선하러 보냈어."하고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알리싸가 대답했다.
"글쎄 몇 번이나 내가 말하지 않았니?"

삼촌은 거의 엄하다고 할 만한 꾸지람조로 말했다.
"기왕 고치러 보냈더라면 좋지 않았겠니.
네가 서둘렀기 때문에 커다란 즐거움을 하나 잃었어...."
"하지만 아버지."
알리싸는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요새는 빈소리만 나서 제로옴 역시 아무 곡도 치지 못했을 거예요."
"네가 치는 것을 들었을 땐 그렇게 고장난 것 같지는 않았는데."
하고 삼촌이 말했다.

그녀는 얼마 동안 그늘진 쪽으로 몸을 굽힌 채
안락의자의 덮개 치수를 재는 데 몰두하는 듯 말이 없다가 이윽고 방에서 나가더니
한참만에야 삼촌이 저녁마다 드는 탕약을 쟁반에 받쳐들고 돌아왔다.

 

다음날도 그녀는 그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을 바꾸지 않았다.
집 앞에 내놓은 벤치에서 앉아 그녀는
전날 저녁부터 손에서 떼지 않던,
바느질이라기보다는 꿰매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자기 옆의 벤치였는지 혹은 탁자 위엔지
낡은 양말이 가득든 바구니를 놓고
그 속에서 줄곧 일거리를 꺼내는 것이었다.
며칠 뒤에는 냅킨과 홑이불을 만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에 그녀는 완전히 몰두해 있는 것 같았고
이로 인해 입술은 표정을 잃었고 눈에는 광채가 없었다.

"알리싸!"
어느 날 저녁 나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멋없게 변한 것을 보고 놀라 소리를 쳤다.
그녀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변해 버렸고
내가 조금 전부터 뚫어지게 그녀를 쳐다보았으나 내 눈길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그래?"
그녀는 머리를 들며 말했다.
"내 말이 들리는지 알아 보고 싶었어.
네가 하고 있는 생각이 내게서 멀리 가 있는 것 같아서."
"아니야, 난 여기 있어. 하지만 여간 조심을 하지 않고는 꿰매질 못해."
"바느질하는 동안에 책을 읽어 줄까?"
"잘 들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왜 그렇게 신경 쓰이는 일을 하지?"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해야 돼."
"이런 일로 하루하루 벌어 사는 여자들이 많지 않아.
절약을 하려고 이런 보람 없는 일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대뜸 그 일이 어떤 일보다 더 재미가 있으며
벌써 오래 전부터 다른 일은 하지 않아
다른 일에는 서툴러져 버렸다고 단언하는 것이었다.
말을 하면서 그녀는 줄곧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음성이 그 순간보다 더 부드러웠던 적은 없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없이 서글펐다
그녀의 표정은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슬퍼하지?'라고 말하는 듯 싶었다.
그리하여 내 마음 속의 모든 항의는 입술에까지 올라오기도 전에 목에서 막혀 버렸다.
그로부터 이틀 뒤 둘이서 장미꽃을 꺾고 나자 그녀는 나에게
그 해에는 아직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던 자기 방으로 꺾은 꽃을 옮겨 달라고 했다.
나는 얼마나 희망에 부풀었던가!
나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해서는 안된다고 다시 한번 마음 먹었다.
그녀의 말 한 마디로 내 마음은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방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감격에 사로잡히곤 했다.
거기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아늑한 고요함이 감돌아
알리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었다.
창과 침대 둘레에 친 커튼의 푸른 그늘, 반들반들한 마호가니 가구들,
정돈되고 정결하고 조용한 방안 분위기가
그녀의 티없는 순결함과 사색적인 우아로움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 그녀의 침대 곁 벽에 내가 전에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두 개의 커다란 마사치오 의 사진이 걸려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어떻게 됐느냐고 물으려던 찰나에 내 시선은 바로 그 옆,
그녀가 애독하는 책들을 얹어 주는 선반 위로 갔다.
이 조그마한 장서는 절반은 내가 준 책과
또 절반은 우리가 같이 읽은 책으로 오랜 간을 두고 꾸며졌던 것이다.
나는 그 책들이 모두 없어지고 대신 그녀가 경멸해 주었으면 싶던
저속한 신앙에 관한 너절한 작은 책자들만이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눈을 드니 알리싸는 웃고 있었다.
그렇다, 알리싸는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미안해."하고 그녀는 곧 말했다.
"네 표정을 보고 웃었어. 내 장서를 보며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길래...."
나는 농담할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아니, 알리싸, 정말로 요즘은 저런 책을 읽고 있어?"
"응, 이상해?"
"자양이 많은 양식에 익숙해 온 지성은
이런 무미 건조한 것을 맛보면 구역질이 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무슨 소리지?"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건 모두 경건한 사람들로서 열심히 자기들이 생각하는 바를 설명하고,
나와 솔직히 이야기해 주는 사람들이야.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퍽 좋아.
처음부터 이 사림들은 미사 여구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았으며,
나 또한 이 사람들의 쓴 것을 읽으면서
세속적인 찬양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래 이제는 이런 것밖에는 읽지 않아?"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래, 몇 달 전부터는. 게다가 이제는 독서할 시간도 별로 없어.
사실은 아주 최근에도 네가 전에 감탄할 만하다고 가르쳐 주려고 해보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제 키를 한 자 늘여 보려고 애를 쓴 사나이와 같은 결과가 되어 버렸어."
"네게 그런 이상한 생각을 일으키게 한 그 '위대한 작자'란 누구야?"
"그 작자가 내게 그런 생각을 일으키게 한 건 아니야.
단지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렇게 생각했을 따름이야,
빠스깔이야. 아마도 벌로 좋지 않은 구절을 읽었던 모양이야..."

나는 초조한 몸짓을 했다.
그녀는 아직 손질하지 않은 꽃다발에서 눈을 들지도 않은 채
마치 교과서나 암송하듯이 맑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 몸짓에 잠시 말을 끊더니 같은 어조로 계속했다.

"그와 같은 호언 장담이나 열성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어.
하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거의 없어.
빠스깔의 그 비상한 어조가 신앙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회의의 결과가 아닌가 하고 나는 가끔 생각했어.
완전한 신앙이란 그처럼 눈물을 흘린다거나 목소리를 떠는 법이 없으니까."
"빠스깔의 음성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떨림,
그 눈물에 있는 거야."라고 나는 반박을 하려 했으나 용기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 속에는 내가 알리싸에게서
귀히 여기던 것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의 대화를 고치거나 논리적인 것으로 다듬지 않고 그대로 여기에 옮긴다.

"만일 그가 현세의 생활에서 먼저 즐거움을 제거해 버리지 않았더라면."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현세의 생활을 저울에 달아본다면 아마도...."
"어떻단 말이야?"
나는 그녀의 이상한 이야기에 놀라 물었다.
"그가 풀이하는 막연한 행복보다 더  무거울지 몰라."
"그렇다면 그 행복을 믿지 않아?"하고 나는 소리쳤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거래같이 이해타산이 있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행복은 차라리 막연한 편이 좋겠어.
하느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덕행에 몸을 바치는 것은
무슨 보수를 바라서가 아니라 타고난 고귀한 마음씨 때문이 아니겠어?"

"바로 거기에서 저 빠스깔과 같은
고귀한 마음의 피난처인 그 비밀의 회의주의가 나온 거야."
"회의주의가 아니지, 장세니즘이야."하고 그녀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여기 이 불쌍한 사람들은--하고 그녀는 자기 책을 돌아보았다.--
자기들이 장세니스트인지 또는
다른 그 무엇인지 대답하라고 하면 퍽 당황해 할 거야.
이들은 마치 바람에 불리는 풀잎처럼 당황해 할 거야.
이들은 마치 바람에 불리는 풀잎처럼 아무런 악의도 괴로움도
또 아름다움을 보이려는 마음도 없이 그저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있는 거야.
자기들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 생각하면서,
단지 자기들에게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들 스스로의 모습을 지워 버림으로써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알리싸."하고 나는 소리쳤다.
"왜 너는 너의 날개를 떼어 버리려는 거야?"
그녀의 음성이 너무나 잔잔하고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그만큼 내 고함 소리는 우스울 정도로 과장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빠스깔을 읽고 얻은 것은...."
"뭐야?"
그녀가 말을 중단했기 때문에 내가 물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야.
'생명을 구하려고 애쓰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다.' 그 나머지 것은...."
그녀는 한층 더 환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사실은 잘 모르겠어.
이 조그마한 사람들과 얼마 동안 살고 있다가
위대한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에 접하게 되면 당장 숨이 가빠져서."


 다믐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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