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데미안.좁은문

2. 좁은 문

오늘의 쉼터 2015. 1. 10. 12:01

2. 좁은 문 - 앙드레 지드.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곧 여느 때와 다른 떨리는 목소리로 받아 읊었다.
잘 있거라, 우리의 너무나도 짧았던
우리들 여름날의 화려한 빛이여!

"아니, 너 그걸 알고 있었니?"

하고 나는 놀라 소리쳤다.
"넌 시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왜? 오빠가 내게 읊어 주지 않아서?"
그녀는 웃으면서 다소 부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때때로 오빠는 나를 바보 취급하는 것 같애."
"아주 총명하면서도 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
난 한 번도 네가 시 이야기 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고,
또 너도 나한테 시를 읊어 달라도 부탁해 본 적이 없지 않아?"
"그야 알리싸가 도맡고 있으니까...."
그녀는 잠시 말이 없더니,
"모레 떠나는 거야?"하고 물었다.
"그래야겠어."
"이 겨울에는 무엇을 할 작정이야?"
"사범 학교 1학년이야."
"알리싸하고는 언제 결혼할 거야?"
"병역을 마치기 전에는 안되겠지.
그리고 그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더 잘 알기 전에는 안 할 생각이야."
"그걸 아직도 모르고 있어?"
"아직 알고 싶지도 않아.
마음 끄는 일이 너무나 많아 무엇이든 하나를 택해서
그것에만 몰두해야 하는 그러한 시기를 난 될 수 있는 대로 미룰 생각이야."

"약혼을 미루는 것도 생활이 고정될까 두려워서야?"
나는 말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그녀는 다그쳐 물었다.
"그럼 왜 약혼을 미루고 있어? 왜 당장 약혼하지 않는 거야?"

"구태여 약혼할 필요가 어디 있니?
세상 사람들이야 알든 말든 지금도,

또 앞으로도 우린 서로가 짝이 아냐?
나는 내 생명을 그녀에게 바치려 하고 있는데
네 애정을 무슨 약속 따위로 얽어매는 편이 좋아 보일 것 같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맹세 같은 건 사랑에 대한 모독이야...
알리싸를 믿지 못하게 되면 그녀와 약혼을 하지."


"내가 믿지 못하는 건 알리싸가 아니라...."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내가 뜻하지 않게 알리싸와 그 아버지의 대화를 엿들었던 정원까지 왔다.
그러자 불현듯 좀 전에 정원 쪽으로 나가던 알리싸가
어쩌면 지금쯤 그 둥그런 갈림길에 앉아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직접 대해서는 하지 못하던 이야기를
그녀에게 직접 들려 주게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유혹했다.
내가 꾸민 연극에 신이 나서 소리를 높여,

"아아."하고 내가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흔히 하는
좀 과장된 감격적인 어조로 나는 외쳤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이야기에 너무나 열중했기 때문에
줄리에뜨가 하는 말 속에 그녀가 입에 올리지 않고 있는
말뜻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아! 사랑하는 이의 영혼 위에 몸을 굽혀
우리가 그 영혼 속에 비치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마치 거울 속처럼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상대방의 마음속에서도 자기 자신 속에서처럼 아니,
자기 자신 속에서보다 한층 뚜렷이 지기의 모습을 헤아려 볼 수 있기만 하다면!
애정은 얼마나 부드러워질까! 사랑은 또 얼마나 순수해질까...."

줄리에뜨가 쓰라린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나는
그것이 내가 늘어놓은 이 값싼 서정이 자아낸 효과라 생각하고 흡족해했다.
그녀는 갑자기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제로옴, 제로옴, 꼭 알리싸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다짐해 줘.
만일 오빠로 인해 언니가 고민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난 정말로 오빠를 미워할 테야."

"하지만 줄리에뜨."
나는 그녀를 끌어안아 이마를 쳐들면서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을 증오하게 될 거야. 내가 알아 주기만 한다면...
내가 아직 앞길을 결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오직 알리싸와 함께 좀 더 훌륭한 생활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알리싸 없이도 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난 하고 싶지 않아..."

"오빠가 그런 이야기할 땐 알리싸는 뭐라고 하지?"


"하지만 난 그런 얘길 알리싸에겐 전혀 하질 않아.
우리가 아직 약혼을 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야.
결혼이라든가 또 그 다음에는 뭘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선
우린 아직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
아, 줄리에뜨! 알리싸와 함께 있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게 되는지
나는 감히... 알겠지? 그녀에겐 감히 그런 이야길 못해."

"갑자기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아니, 그게 아니야. 단지 두려워...
알리싸를 겁내게 할까 봐, 알겠니?...
내가 예상하는 그 큰 행복에 알리싸가 겁내지 않을까 두려워서!
언젠가 알리싸에게 여행하고 싶지 않는다고 하면서
단지 그러한 나라들이 있고, 그러한 아름다운 나라들에
남들이 가볼 수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으로 만족이라는 거야."

"오빠는 여행하고 싶어?"


"어디든지 다 가보고 싶어!
삶 자체가 내게는 긴 여행으로만 보여.
그녀와 함께 여러 가지 책과 온갖 사람들과
여러 나라를 거쳐가는 긴 여행 같애...
'닻을 올려라'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본 적 있니?"

"그럼, 때때로 생각해."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녀 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아
마치 상처받은 새처럼 그녀의 말이 땅에 떨어지게 내버려둔 채 말을 계속했다.

"밤에 떠난다.
여명의 눈부신 햇살 속에 서 잠을 깬다.
믿지 못할 파도 위에 단둘임을 느낀다...."

"그러고는 아주 어렸을 때 지도에서 보았던 어느 항구에 도착한다.
거기서는 온갖 것이 낯설고...
오빠가 팔에 기댄 알리싸와 함께 배에서 발판으로 내려오는 게 보이는 것 같애."


"우리는 바로 우체국으로 가서."

하고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줄리에뜨가 우리에게 부쳐 준 편지를 찾고...."


"이 줄리에뜨가 남아 있는 퐁궤즈마르에서 부친 편지를
아마도 오빠와 언니에게 퐁궤즈마르는 작고 쓸쓸하고 까마득하게 보일 거야...."

이것이 분명 그녀의 말이었는지 나는 단언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 마음은 너무나도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사랑의 표현 말고는 아무 이야기도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둥그런 갈림길 근처에 다다랐다.
막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별안간 그늘에서 알리싸가 나타났다.
그녀의 안색이 너무나도 창백하여 줄리에뜨는 질색하여 소리를 쳤다.

"정말 몸이 이상해."

하고 알리싸는 중얼거렸다.


"바람이 차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고는 곧 우리 곁을 떠나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돌아가 버렸다.


"우리가 하던 이야기를 들었어."
알리싸가 좀 멀어지자마자 줄리에뜨가 소리쳤다.


"하지만 알리싸가 기분 상할 이야기는 없었어. 반대로...."


"가겠어."
언니 뒤를 쫓아가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알리싸는 저녁 식사 때 나타났지만 곧 골치가 아프다고 하면서 돌아가 버렸다.
그녀는 우리의 대화에서 무엇을 들었던가?
그리하여 나는 걱정스럽게 우리가 하던 말을 회상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줄리에뜨에게 몸에 팔을 감고 있었다는 것이
아마 잘못이었는지 무른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미 어릴 때부터 우리가 늘 하던 버릇이 아니었던가.
뿐만 아니라 알리싸는 이미 몇 차례나 우리가 그렇게 걷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아! 나는 스스로의 잘못을 더듬어 찾고 있으면서도,
내게 잘 들리지 않아서 기억도 별로 나지 않는 줄리에뜨의 말을
알리싸가 나보다 더 잘 알아들었으리라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질 못했으니 나는 얼마나 슬픈 장님이었던가.
할 수 없지!
불안으로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알리싸가 나를 의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나서,
나는 또다른 위험이라곤 도무지 생각지도 못한 채
줄리에뜨에게 내가 한 말에 구애 없이,
어쩌면 그녀가 내게 한 말이 자극되어
나는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나기 위해 다음날 약혼을 해버리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내가 떠나기 전날이었다.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려니 싶었다.
그녀는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단둘이서는 만나지도 못한 채 해가 져버렀다.
서로 이야기도 나눠보지도 못한 채 떠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나는 저녁 식사 조금 전에 그녀의 방으로 갔다.

그녀는 산호 목걸이를 거는 중이었는데
그것을 걸어매려고 두 팔을 올린 채 등을 문 쪽으로 돌리고
두 개의 촛불 사이에 있는 거울 속을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본 것은 거울 속에서였다.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얼마동안 그대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문이 닫혀져있지를 않았니?"
그녀는 말했다.


"노크를 했는데 대답이 없었어. 알리싸, 내가 내일 떠나는 걸 알고 있어?"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끝내 걸어매지 못한 목걸이를 벽난로 위에 놓았다.


'약혼'이란 말이 너무나 노골적이고 거칠게 여겨졌기 때문에
나는 생각나는 대로 종잡을 수 없이 빗대어 말했다.
그녀는 나의 말뜻을 알아듣자 휘청거리는 듯 벽난로에 몸을 기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몸이 너무나 떨렸기 때문에 그녀를 쳐다보는 것을 조심조심 피했다.

나는 그녀 곁에 있었고 눈을 들지 않은 채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피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을 약간 숙이면서
내 손을 들어 입술에 갖다대고 기댄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야! 제로옴, 아니야! 약혼하지 말자. 제발...."
내 심장이 너무나도 뛰었기 때문에 그녀도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한결 다정스럽게 말했다.


"안 돼! 아직은...."


그리고는 내가,


"왜?"

하고 묻자,


"묻고 싶은 건 애 편이야, 왜 이 상태를 바꾸자는 거야?"
나는 감히 그 전날 이야기를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내가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느꼈음인지
내 생각에 답하는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넌.
나는 그렇게까지 행복해질 필요가 없어. 이대로 우린 행복하지 않아?"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그렇지 않아, 널 두고 떠나야 하니까."


"이봐, 제로옴. 오늘 저녁엔 이야기 못하겠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망치지 말자...
아냐, 아냐, 난 한결같이 널 사랑하고 있어,
안심해. 내가 편지 쓸게, 이유를 설명할께. 꼭 쓸게, 내일이라도...
네가 떠나면 곧, 자 이젠 가! 어머나, 우는 것 좀 봐...가 줘."

그녀는 나를 밀어내더니 조용히 몸을 빼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작별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그녀에게 한 마디 말도 못했고,
이튿날 내가 떠날 때도 그녀는 자기 방에 있었다.
나를 태운 마차가 멀어져 가는 것을 창가에서 바라보며
작별의 손짓을 하고 있는 그녀를 나는 보았다.

 

 

 

 

나는 그해, 아벨 보띠에를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그는 징집되기 전에 지원 입대를 한 것이었고,
한편 나는 수사학급 강의를 한 번 더 들으면서 학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벨보다 두 살 아래인 나는 우리가 그 해 입학할 예정이었던
'에꼴르 노르말르'(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병역을 연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다시 만났다.
제대 후 그는 한 달 이상이나 여행을 했다.
나는 그가 변하지 않았나 걱정했지만
그는 좀 더 침착해졌을 뿐 조금도 매력은 잃지 않고 있었다.
개학하기 전날 오후를 상부르 공원에서 함께 산책하면서
나는 혼자 간직하고 있던 내 사랑 이야기를 그 이상 숨길 수 없어 길게 해주었다.
하긴 그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해 몇몇 여인들과 경험을 얻었던 그는 약간 자만심이 깃든
선배 행세를 하려드는 것이었지만 나는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이른바 마지막 말이란 것을 내가 할 줄 몰랐다고 빈정대면서
여자를 마음이 변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은
하나의 공리라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지껄이도록 내버려두긴 했지만
그의 훌륭한 이론이 나나 알리싸에게는 전혀 부질없다는 것,
그리고 그가 우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도착한 이튿날 나는 다음과 같은 알리싸의 편지를 받았다.
그리운 제로옴
나는 네가 제의한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


"네가 제의한 것! 우리의 약혼을 이렇게 부르다니!"
나는 내게 너무 나아가 많지 않은가 두려워.


너의 아직 여자들을 사귈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되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내 생각으로는 내가 너의 것이 되고 나서
네 마음에 들지 못한다면 후에 나도 괴로와질 거야.
편지를 읽으면서 무척 화를 내겠지.
지금 난 네가 좀더 생의 경험을 쌓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너를 위해서라는 것을 이해해줘.
나로서는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될 수는 결코 없으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야.
--알리싸

사랑하지 않게 되다니! 그것이 새삼스럽게 문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서글펴지기보다도 오히려 어리벙벙했고
너무나 당황해서 이 편지를 아벨에게 보여 주러 달려갔다.

"그래 어쩔 셈이냐?"
편지를 읽고 나서 아벨은 입술은 꼭 다문 채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나는 불안과 슬픔에 차 두 손을 들었다.

"어쨌든 답장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여자하고 다툴 때는 지는 법이니까.
이봐, 토요일에 르아브르에 가서 하루 묵으면
일요일 아침에는 ㅍ궤즈마르에 도착할 수 있고
월요일 첫째 시간까지는 여기에 돌아올 수 있어.
나도 입대 후에 네 친척들을 만나뵙지 못했으니까.
이것으로 핑계는 충분히 되고 또 인사 치레도 되지.
만일 알리싸가 이것을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일은 더 수월하게 되는 거야!
네가 알리싸와 이야기하는 동안 난 줄리에뜨를 맡지.
어린애 짓은 하지 않도록 명심하고.
사실은 네 이야기 속에는 뭔가 알 수 없는 게 있어.
아마 내게는 사실을 다 털어놓지 않은 모양이지? 허나 관계 없다.
내가 알아낼 테니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간다는 것을 알리지 마.
불시에 네 사촌 누이를 찾아가서 무장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단 말이야."

정원의 사립문을 밀면서 내 가슴은 몹시 두근거렸다.
줄리에뜨는 곧 내려오지 않았다.
우리가 삼촌이며 미스 아슈뷔르똥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응접실에 들어왔다.
우리의 느닷없는 방문이 그녀의 마음을 당황케 만든 것 같았으나
그녀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벨이 하던 말을 생각하고,
그녀가 그토록 한참 동안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것은
바로 나에 대비할 무장을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줄리에뜨의 몹시 쾌활한 태도는 알리싸의 신중한 모습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돌아 온 것을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적어도 그것을 자기의 태도로써 나타내려는 듯 싶었고,
나는 그러한 감정 뒤에 숨겨져 있는 더욱 세찬 감정을 찾아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와 꽤 떨어진 창가에 앉아,
수를 놓는 데만 열중하고 있는 듯 입술을 움직이며 바늘 매듭을 세고 있었다.
다행히도 아벨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야기할 기력도 없었고,
따라서 그가 군대 생활과 여행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들
이 재회의 첫 순간은 퍽 침울했을 것이다.
삼촌도 퍽 근심스러운 기색이었다.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줄리에뜨는 나를 따로 불러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글쎄 네게 청혼을 하는 사람이 다 있다니!"
우리가 단둘이 있게 되자 그녀는 소리쳤다.
"펠리씨 고모님이 어제 아버지께 편지로 청혼을 전한 거야.
고모님 말로는 뭐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나.
올봄에 사교계에서 몇 번 나를 보고 홀딱 반했대."

"너도 그 사람 눈여겨 봤니?"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청혼자에 대해 반감적인 말투로 풀었다.
"그래, 누군지 알아. 사람좋은 돈키호테 타입이야.
교양도 없고, 못나고 시시한 사람인데 퍽 걸작이어서
고모도 그 사람 앞에선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양이야."
"그래, 그 자가 유망해 보이니?"
나는 비웃는 조로 말했다.
"어머나! 오빠, 농담도! 장사치야. 오빠가 그 사람 한 번만 보면 그런 질문은 안할 거야."
"그래서 삼촌은 뭐라고 대답하셨어?"
"내가 대답한 대로지. 시집가기엔 아직 나이가 어리다고...
그런데 곤란하게도."하고 그녀는 웃으며 덧붙였다.

"고모님은 반대할 걸 예측했던 거야.
그래 편지 덧붙임에 에뜨와르 떼씨에르 씨는--그 사람 이름이야--
시기를 기다리는 건 별문제 아니며 벌써부터 후보를 하는 것은
단지 '선수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어...
터무니없는 짓이지. 하지만 어떻게 해?
그 사람이 너무 못났다고 전해 달랄 수도 없고!"

"그럴 순 없지. 하지만 포도 재배자에겐 시집가고 싶지 않다고도 할 수 있지 않아?"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그런 건 다 고모한텐 통하지 않는 이야기야...
그 이야긴 이제 그만해. 알리싸가 편지했어?"
그녀는 아주 구변 좋게 말을 했지만 무척 흥분되어 있는 듯했다.
알리싸의 편지를 내가 내밀자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읽었다.

"그래 오빠는 어떻게 할 거야?"
그녀의 말소리에는 노여움이 서 있는 듯했다.
"이젠 나도 모르겠어."하고 나는 대답했다.
"막상 여기 와보니 차라리 편질 쓰는 편이 좋았을 것 같애.
그래서 온 것을 벌써 후회하고 있어.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겠니?"
"오빠를 자유롭게 해주려는 거야."
"하지만 내가 뭐 그런 걸 바라고 있나?
그런데 알리싸가 왜 이 편지를 했는지 알겠니?"
"몰라!"

그녀의 대답이 너무나 매몰찼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진정한 이유는 짐작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일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라고 그 순간부터 믿기 시작했다.
이윽고 우리가 따라 걷고 있던 오솔길이 다시 오던 길로 되도는 굽이에서
그녀는 갑자기 발길을 돌리면서 말했다.
"이젠 갈래. 나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오빠가 온 건 아니니까.
너무 오래 같이 있었어."

그녀가 집으로 달려간 잠시 후에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응접실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여전히 되는대로
즉흥적으로 피아노를 치면서 자기를 보러 온 아벨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남겨 놓은 채 나왔다.
그리고는 알리싸를 찾아 한참 동안 정원을 헤매다녔다.

그녀는 과수원 안쪽 담 밑에서 너도밤나무 숲의 가랑잎 냄새에
그 향기가 뒤섞여 나는 첫 국화를 꺾고 있었다.
대기에는 가을이 담뿍 배어 있었다.
울타리에 내리쪼이는 햇살도 겨우 온기를 던져 줄 뿐 하늘은 동녘 나라인 양 맑았다.
아벨이 여행 선물로 갖다 주어 당장 쓰고 나온
젤란드식의 큼직한 모자로 가려진 그녀의 얼굴은 틀에 끼인 듯 네모반듯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처음에는 돌아다보지 않았지만
억제하지 못하고 가볍게 몸을 떠는 것으로 보아
내 발자국소리를 알아 챈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나는 벌써 그녀가 할 책망과 그녀의 눈길이
나로 하여금 느끼게 할 준엄성에 대비해 마음을 긴장시키고 용기를 냈다.
그러나 아주 가까이 이르러 조심스럽게 걸음을 늦추자
그녀는 처음엔 얼굴을 돌리지 않았지만 마치 성난 어린애처럼 얼굴을 숙인 채
꽃을 담뿍 쥐어든 손을 나를 향해 둥 뒤로 내밀면서 오라고 청하는 시늉을 했다.
이러한 몸짓에 오히려 이번에는 내가 일부러 멈추어 서자,
비로소 그녀는 몸을 돌려 내게로 몇 걸음 걸어오더니 얼굴을 드는 것이었다.
그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눈길에 비추어지자 온갖 것이 갑자기 다시금 단순하고 쉽게만 생각되어
나는 변함없는 목소리로 힘들지 않게 말문을 열었다.

"편지를 보고 다시 왔어."
"그럴 줄 알았어."하고는 그녀는 신랄한 책망조의 억양을 부드럽게 하면서,
"내가 화를 내는 것도 바로 그 점이야.
왜 내 맘을 오해하지?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하고 말했다.
"그러자 벌써 슬픔과 번민은 정말로 나 혼자 꾸며 댄 것이어서
단지 내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듯싶었다".

"내가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이대로 행복하잖아?
그러니 그것을 네가 바꾸자는 데 내가 반대한대서 놀랄 것은 없는데?"

"사실 그녀 곁에 있기만 하면 나는 행복했다.
너무나도 행복해서 다시는 그녀의 생각 외의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나는 그녀의 미소밖에는,
그리고 이렇게 그녀와 더불어 꽃이 만발한 오솔길을
그녀 손을 잡고 거니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바라고 있지 않았다.

"그러는 편이 좋다면...."하고 나는 그 순간의 완전한 행복에 몸을 맡기고
모든 다른 희망을 포기한 채 엄숙하게 말했다.
"그러는 편이 좋다면 약혼하지 않기로 해.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 난 내가 정말 행복하다는 것과
이제부터는 그 행복이 사라져 버리려 한다는 것을 동시에 깨달았어.
아! 옛날의 내 행복을 다시 돌려 줘. 그 행복 없이는 못견디겠어.
일생을 기다려도 좋을 만큼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거나 내 사랑을 의심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알리싸, 난 정말 못견디겠어."
"아아! 제로옴, 난 그걸 의심할 수는 없어."

이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쓸쓸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환히 빛내 주던 미소가
너무도 티없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나는 의구심을 갖고 항변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녀의 목소리 깊이 내가 느낀 그 서글픔의 여운도
그러고 보면 단지 나의 두려움과 형변에서 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나는 나의 계획, 공부,
그리고 얻을 것이 많을 내 새 생활에 관해 횡설수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에꼴르 노르말르는 최근 개편된 것과는 퍽 달라 몹시 규율이 까다롭기는 했지만,
게으르다든가 다루기 까다로운 학생들에게나 구속감을 주었을 뿐
부지런히 노력하는 학생에겐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거의 수도사적인 이 관습이 사회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사회란 별로 내 마음을 끌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알리싸가 두려워하게 되면 나도 대번에 싫어질 그러한 것에 불과했다.

미수 아슈뷔르똥도 없으니 일요일이 되면 아벨과 함께 거기에 가서 몇 시간 보내리라.
일요일마다 나는 알리싸에게 편지를 쓰며 내 생활을 낱낱이 알려 주리라.

이때 우리는 열어젖힌 온실 유리창에 걸터앉아 있었다.
알리싸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것저것 묻는 것이었다.
그처럼 조심성 있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
그처럼 절실한 그녀의 애정을 나는 일찍기 느낀 일이 없었다.
근심과 걱정 그리고 아주 작은 마음의 동요까지도
푸른 하늘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안개처럼
그녀의 미소 속으로 증발되고 그 애틋한 친밀감 속에 흡수되는 듯했다.

 

 

 

 

이윽고 줄리에뜨와 아벨이 우리를 찾아와
너도밤나무 숲의 벤치에 앉아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며
스윈번의 '시대의 개가'를 한 구절씩 읽고
또 되풀이 해서 읽으면서 우리는 나머지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됐다.
"자!"
우리가 떠날 무렵 나의 입을 맞추면서 알리싸가 말했다.
반은 농담 같기도 하고 반은 누님같은 태도였다.
무분별한 내 행동 때문에 아마도 그런 태도를 취한 듯했고
또 그것을 알리싸가 즐겨 취한 듯싶은 태도였다.

"자, 이제부터는 그렇게 공상적인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래 약혼했니?"
우리가 또다시 단둘이 있게 되자 아벨이 내게 물었다.
"이젠 그런 건 문제가 아냐."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는 모든 다른 질문을 딱 잘라 버리는 어조로 덧붙였다.
이대로가 훨씬 좋아. 오늘 오후 만큼 행복했던 때는 없었어."
"나도 그래!"하고 그는 소리쳤다.
그리고는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더니,
"기막히고 희한한 이야기를 하나 해줄까? 제로옴,
난 줄리에뜨가 미칠 듯이 좋아! 지난해에도 그런 생각을 좀 하긴 했지만.
그러나 나도 세상 맛을 보았고 해서 너의 사촌누이들을 한 번 더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네게 말하고 싶지 않았어. 이제는 됐어, 내 인생도 결정이 됐어."
사랑하노라, 사랑하노라기보다는 -나는 줄리에뜨를 예찬하노라.
"오래 전부터 난 네게 의형제 같은 애정을 느꼈어...."

그러고는 웃다가 장난을 치다가 하면서 팔을 벌려 나를 끌어 안고는
우리가 탄 빠리 행 열차 속 좌석 위를 어린애처럼 딩구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고백을 듣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거기에는 느껴지는 과장된 표현은 나로서는 듣기에 좀 어색했다.
하지만 그처럼 벅찬 감격과 희열에 대해 어떻게 항거할 것인가?

"그래, 어떻게 됐어! 고백을 했다?"
그가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이에 나는 물었다.
"천만에!"하고 그는 소리쳤다
"이야기의 가장 멋진 대목을 태워 버리고 싶진 자아."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순간은
'그대를 사랑하노라'고 말할 때가 아니니...
"이봐 나를 책망하지는 못하겠지, 느림보 대장인 너로선 말야?"
"하지만 네 생각엔 그녀가 그녀 편지에서...."
나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녀가 나를 보면서 당황해 하던 것을 못봤어?
우리가 거기 있는 동안 줄곧 흥분해서 얼굴을 붉히고 이야기를 쉬지 않고...
아니, 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너야 알리싸한테만 정신이 쏠려 있었으니 말이야.
줄리에뜨가 어찌나 이것저것캐묻는지!
또 얼마나 내 말을 솔깃히게 들으며 좋아했는지 몰라!
1년 동안에 굉장히 총명해 졌어.
어떻게 해서 그녀가 독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네가 생각하게 되었는지 난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독서란 단지 알리싸만을 위한 것이라고 너는 늘 생각하는 모양이지...
하지만 그녀는 놀랄 만큼 많이 알고 있단 말야.
저녁 식사 전에 우리가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알아?
단테의 칸쪼네를 암송하며 즐겼어.
둘이서 번갈아가며 암송했는데 내가 틀리면 그녀가 척척 고쳐 줬어, 왜 너도 알지?

내 마음 가득 채워 주는 사랑의 마음이여.
그녀가 이탈리아 말을 배운걸 너는 말해 주지 않았지."
"나도 그건 몰랐는데!"
나는 놀라서 말했다.
"아니, '칸쪼네'를 시작할 때 너한테서 배웠다고 하던데."
"아마 내가 그 언니한테 읽어 주는 것을 들었던 모양이지.
그녀는 흔히 우리 곁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거나 수를 놓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해하고 있는 듯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그랬을 거야. 알리싸와 너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니까.
자기네 사랑에만 열중하여 이 지능, 이 영혼이
놀랍도록 꽃피는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 말이야.
내가 나 자신을 추켜 세우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때맞추어 나타난 거야.
아니, 천만에 널 탓하는 것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그는 다시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단지 이것만 약속해 줘. 이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알리싸에게 알리지 않겠다고.
내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줄리에뜨는 내 것이야. 그건 틀림없어.
다음 방학까지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아무일 없을 정도야.
그때까지는 편지도 쓰지 않을 작정이야. 그렇지만 새해 방학만 되면
너와 나는 르아브르에 가서 방학을 지내고, 그러고...."

"그러고는?"
"그러고 나서 알리싸는 갑자기 우리의 약혼을 알게 되는 거야.
이 일을  나는 깨끗이 해치울 작정이야. 그리고 어떻게 되는지 알아?
네가 획득하지 못한 그 알리싸의 승낙을 내가 본을 보여 줌으로써 얻어 준단 말야.
너희들 결혼 전에는 우리도 결혼할 수 없지 않느냐고.
우리 둘이는 알리싸를 설득시킬 작정야."

그는 줄곧 이야기를 계속하여 기차가 빠리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노르말르에 우리가 돌아왔을 때까지도,
그칠 줄 모르는 이야기의 조수 속으로 나를 잠겨들게 했다.
우리가 역에서 에꼴르 노르말르까지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또 밤이 깊어졌는데도 아벨은 내 방에 따라 들어와서
아침이 될 때까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아벨은 현재와 미래를 다루는 데 열중했다.
그는 이미 우리 두 쌍의 결혼을 예견하고 이야기하는 것이었고,
각자의 놀라움과 기쁨을 상상하여 그리기도 했고 우리의 아름다운 이야기,
우정 그리고 내 사랑에서 자기가 한 역할의 아름다움에 도취하기도 했다.
나는 이처럼 솔깃한 열정에 별반 저항도 못한 채 공상적인 그의 제안에
매력을 느낀 나머지 마침내 자신도 그런 기분에 점점 끌려들어갔다.
사랑의 덕택으로 우리의  야망과 용기는 부풀어 오르기만 했다.

에꼴르를 졸업하면 곧 보띠에 목사의 주례로
우리 두 쌍의 결혼이 이루어질 것이고 넷이서는 여행을 떠난다.
그런 다음 우리가 거창한 일에 착수하면
우리의 아내들은 즐거이 거기에 협력해 줄 것이다.
교수직엔 별로 마음이 없고, 글쓰는 소질을 타고 났다고 자신하는 아벨은
몇 편의 희곡에서 성공을 거두어 별로 없던 재산을 삽시간에 굉장하게 만들 것이다.
학문에서 오는 이익보다 학문 그 자체에 마음이 끌리는 나는
종교 철학의 연구에 몰두하고 그 역사를 써 보리라...
그러나 그 많은 희망들을 여기서 회상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다음날 우리는 다시 공부에 열중했다.

 

 

 

 

새해 방학까지는 너무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전번 알리싸와의 대화로 열광된 나의 믿음은
잠시도 동요되지 않았다.
계획했던 대로 나는 일요일마다 그녀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 외의 날에도 동급생들과는 떨어져서 아벨을 만날 뿐
단지 알리싸를 그리워하며 살았고,내가 좋아하는 책에는
내 자신이 거기서 얻는 흥미보다도
알리싸가 맛볼 수 있는 재미를 먼저 고려하여
그녀에게 도움이 되도록 여러 가지 표를 했다.

그녀의 편지에는 여전히 나를 불안케 하는 것이 있었다.
비록 내 편지에 대해 꽤 규칙적으로 답을 해주기는 했지만
나를 따라 오는 그녀의 열성은 마음으로 이끌린다기보다는
오히려 내 공부를 격려해 주려는 배려가 엿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감상, 토론, 비평 등이 내게는 단지
내가 생각하는 바를 나타내려는 방법에
지나지 않았음에 생각을 내게 숨기려는 것 같았다.
때로 나는 그녀가 그것으로 장난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 있으랴.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나는
편지 속에 전혀 불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12월 말 경, 아벨과 나는 르아브르를 향해 떠났다.
나는 쁠랑띠에 이모 댁에 머물렀다.
내가 도착했을 때 이모는 집에 없었다.
그러나 내 방에 들어가 있자, 곧 하인이 오더니
이모가 응접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그러나 내 방에 들어가 있자,
곧 하인이 오더니 이모가 응접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내 건강, 숙소, 공부에 관해서 대충 듣고 나자 이모는 곧
그 애정이 넘치는 호기심에 이끌려 아무 조심성 없이 말했다.
"퐁궤즈마르에서는 만족했는지,
너는 내게 아직 말하지 않았지? 일이 좀 진척됐니?"

나는 이모의 이 어설픈 친절을 참아야만 했다.
아무리 순수하고 다정한 말씨로 대해 줘도 역시 마음 아프게 느껴지는
그러한 감정을 이처럼 간단히 다루는 걸 듣는 건 괴로웠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이모의 어조가 너무나도 구김살 없고
정다왔기 때문에 화를 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 같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대꾸를 좀 했다.

"지난 봄에는 약혼이 시기상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그래, 나도 안다. 처음에는 으레 그렇게 말하는 법이야."

이모는 나의 한 손을 잡아 자기의 두 손 안에
감동적으로 꼭 쥐면서 서슴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네 공부라든가 병역 때문에 몇 해 더 기다리기 전에는

혼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 같아서는 약혼을 오래 끄는 것은 불찬성이야.
그렇게 되면 처녀들은 지쳐버리거든.

때때로 그것은 아주 딱하게도 여겨진단다.
그건 그렇고, 약혼은 반드시 공개해 둘 필요가 있어.
단지 그렇게 하면 남들이...아무렴,

은근히 속짐작으로
이제는 그 처녀에게 손을 뻗쳐 볼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단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해 두면 너희들도 편지나 교제를 떳떳이 할 수 있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청혼해 오면...그것도 물론 있을 법한 일이지."

이모는 그럴 듯한 웃음을 띠면서 암시조로 말했다.


"그런 경우에는...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게 됐습니다라고 은근히 거절할 수도 있단 말이다.
너도 알겠지만 줄리에뜨한테 청혼이 들어왔단다.
올겨울에 그 애는 남의 눈에 무척 띄었거든.

그 애는 아직 좀 어리지.
그래 그 애도 그걸 이유로 대답했어.

한데 그 청년은 기다리겠다는 거야.
정확히 말해서 그 사람은 이미 청년이 아니야.
아무튼 좋은 자리야.

 아주 틀림없는 사람이지.

 너도 내일이면 볼 거다.
우리 집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러 올 테니까.
네가 본 인상이 어떤지 내게 좀 말해 주려무나."

"이모, 모르긴 하지만 그 남자는 헛수고하는 게 아닐까요.
줄리에뜨에게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에요."
나는 아벨의 이름을 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말했다.
"응?"
설마 하는 표정으로 이모는 입을 뾰족 내밀고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의심쩍다는 듯이 말했다.
"놀라운 얘기구나, 그렇다면 왜 그 애가 내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까?"

나는 더이상 말하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두고 보면 알겠지. 줄리에뜨는 요즘 좀 앓고 있단다...."
하고 이모는 다시 계속했다.


"우린 지금 그 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그래?
알리싸도 귀여운 아이야,

그런데 그 애한테 선언을 했니 안했니?"

이 '선언'이란 말이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게 거친 듯해서 나는 발끈했으나
거짓말을 못하는 성미라 정면으로 질문을 받자 그만 우물쭈물 대답해 버렸다.


"네."
그러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래 그 애는 뭐라고 하든?"


나는 고개를 숙였다.
대답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번에는 한층 더 막연히,

그리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약혼하길 반대했어요."


"그래! 그것도 일리가 있어."하고 이모는 소리쳤다.


"너희야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그렇구말구...."


"제발 그 이야긴 그만 해요, 이모."
나는 말을 막으려 했으나 헛일이었다.


"그 애로선 있음직한 일이야. 그 애는 언제나 너보다는 분별이 있어 보였으니까."

나는 이때 무엇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긴 했으나,
아마 그렇게 다그쳐 물어서 흥분되었음인지,

 갑자기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래서 마치 어린애처럼 마음씨 좋은 이모의 무릎에 이마를 비벼 대며 흐느끼면서,


"아니에요. 이모, 이모는 몰라요."

하고 소리쳤다.


"그 애는 기다려 달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뭐라고? 그 애가 너를 싫어하기라고 한단 말이냐?"


이모는 손으로 내 이마를 받쳐올리면서 퍽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도 아니에요...아니에요. 확실히 그런 것도 아니에요."
나는 서글프게 머리를 저었다.


"이제는 그 애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까봐 겁이 나니?"


"아아! 아니에요, 제가 두려워하는 건 그가 아니에요."


"얘야, 좀 더 분명하게 말을 해야 내가 알지."
약한 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나는 부끄럽고 슬펐다.


내가 애매한 태도를 취한 동기를 이모는 틀림없이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알리싸가 약혼을 거절한 이면에 어떤 뚜렷한 동기가 있다면
이모가 나를 도와 부드럽게 그녀에게 물어 봄으로써
그것을 밝혀낼 수도 있을 성싶었다.

 

 

 

 

이모는 스스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얘야!"
하고 이모는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알리싸는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러 올 테니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내 당장 알아보마. 그것을 점심 때 알려 줄게.
그럼 네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틀림없이."

나는 뷔꼴랭 댁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정말 며칠 전부터 앓고 있던 줄리에뜨는 사람이 변한 듯했다.
그녀의 눈초리에는 적지 않게 표독스럽고
또 거의 쏘는 듯한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전보다 훨씬 더 자기 언니와는 달라 보였다.
그날 저녁 나는 알리싸와 줄리에뜨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도 이야기할 맘이 내키지 않았고
삼촌이 피로해 보여서 식사가 끝난 귀 곧 물러나와 버렸다.

쁠랑띠에 이모가 꾸미는 크리스마스트리는
해마다 많은 아이들과 친척들, 친구들을 모여들게 하는 것이었다.
이 트리는 계단 골을 이루는 현관 한 어귀에 세워져 있었는데
이 현관은 첫 문간방, 응접실, 찬장을 들여놓은
온실 비슷한 방의 유리문 등으로 되어 있었다.

트리의 장식은 아직 끝나지 않아 축제일 아침, 죽 내가 도착 한 이튿날,
알리싸는 이모 말대로 꽤 일찍 와서 여러 가지 장식,
촛불, 과실, 과자, 장난감 등을 나뭇가지에 다는 일을 거들었다.
나도 그러한 일을 그녀 곁에서 거들고 싶었으나
이모가 그녀와 이야기를 하도록 해야만 했다.
그래 나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집을 나와
아침 한나절을 불안한 마음을 달래느라고 애썼다.

줄리에뜨를 다시 보고 싶어서 나는 먼저 뷔꼴랭 댁으로 갔다.
아벨이 나보다 앞서 그녀 곁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중요한 이야기를 방해할까 두려워
곧 물러나와 점심 때까지 부둣가의 거리를 헤매다녔다.


"이런 바보!"
내가 들어오자 이모가 소리쳤다.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살아가다니.
오늘 아침 네가 한 소리는 모두가 당치도 않아.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얘길 꺼냈다.
우리 일을 거드느라고 피곤해진 미스 아슈뷔르똥을
산책이나 하라고 내보내고 알리싸와 단들이 있게 되자,
나는 곧 왜 지난 여름에 약혼하지 않았느냐고 아주 간단하게 물었다.
아마 그 애가 당황했으리라 너는 생각하겠지?
그 애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아주 침착하게
제 동생보다 먼저 결혼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더라.
만일 너도 그 애에게 솔직히 물어 보았더라면 그렇게 대답했을 거야.
혼자서 괴로워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야, 그렇지?
그봐, 솔직하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야.
가엾은 알리싸는 아버지를 떠날 수가 없다는 거야...
우리는 별별 이야기를 다 했다.
그 애는 참 지각이 있어. 제가 네게 적합한지 어떤지 아직 자신이 없대.
또 너보다 너무 나이가 많은 것을 걱정하며
네 게는 줄리에뜨 또래의 여자가 차라리 나을 것 같다고...."

이모는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단 한가지,
즉 알리싸가 제 동생보다 먼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벨이 있지 않은가! 그 녀석 말이 옳았구나.
그 녀석은 단번에 두 쌍의 결혼을 성사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모가 밝혀 준 이야기는 나를 흥분시켰고
나는 최선을 다해 이 흥분을 이모에게 감추었다.
이모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기쁨,
그리고 또 그것이 모두 다 자기의 덕택이라고 생각될수록 그만큼
이모에게 흡족감을 줄 그러한 기쁨만을 보였다.
점심이 끝나자 나는 구실을 만들어 이모 곁을 떠나 아벨에게로 달려갔다.

"어때! 내가 뭐라고 그랬어!"
내가 기쁨을 알려 주자마자 그는 나를 껴안으며 소리쳤다.
"이봐, 오늘 아침 줄리에뜨와 한 이야긴데,
거의 결정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우리는 거의 네 이야기만 했지.
그러나 그녀는 피곤해서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것 같았어.
지나치게 깊이 들어가면 그녀의 신경을 자극할까 두려웠고,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그녀를 흥분시킬까 염려도 되었어.
네 말을 듣고  나니 일은 다 됐어! 이봐,

내 단장과 모자를 달려가 가져올게.
혹시 도중에 날아가려고 하면 붙잡아 줄 셈치고 뷔꼴랭 댁 문전까지만 동반해 줘.
나는 외포리옹보다 더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애.
자기 언니가 승낙을 거절하는 이유가 단지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줄리에뜨가 알게 되면,

그리고 곧 내가 청혼을 하면...
아아! 이봐,

나는 우리 아버지가 오늘 저녁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을 찬양하며 축복에 넘치는 손을
무릎 끓은 네 사람의 약혼자의 머리 위에 뻗치시는 게 벌써 눈에 선해.
미스 아슈뷔르똥은 한숨 속으로 증발해 버릴 것이고
쁠랑띠에 이모님도 웃음속에 녹아 버릴 거야.
그리고 환하게 불 밝혀진 크리스마스트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할 것이고 성경에 나오는 산들처럼 손뼉을 칠 거야."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이 켜지고 아이들,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이 그 주위에 모여들게 되는 것은 해가 질 무렵으로 정해져 있었다.
아벨과 헤어지고 나자 불안과 초조로 인해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나는 기다리는 동안을 잊으려고 생뜨 아드레스의 낭떠러지까지 걸어갔다가 길을 잃어,
겨우 쁠랑띠에 이모 댁에 왔을 때는 다행히 조금 전부터 축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나는 알리싸를 보았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나를 보자 곧 내게로 왔다.
엷은 겉옷 깃 사이가 파여진 곳에는
목에서부터 오래된 자그마한 자수정 십자가를 늘이고 있었다.

어머니의 기념으로 내가 준 것인데,
그녀가 달고 있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긴장된 그녀의 얼굴과 괴로운 표정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왜 이렇게 늦었지?"
그녀는 다급하고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낭떠러지 길에서 방향을 잃어버렸어...
그런데 왜 안색이 그리 좋지 않지... 아니, 알리싸, 웬일이야?"

 

 

 

 

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 내 앞에서 입술을 떨고 있었다.
이러한 고뇌의 표정을 보자 마음이 아파 나는 감히 묻지를 못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끌어 당기려는 듯 내 목에 손을 갖다댔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는 눈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손님들이 들어왔다.
힘이 빠진 그녀의 손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는 시간이 없어."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내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고

마치 그런 하잘것없는 변명으로
나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처럼

내 눈길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냐...안심해, 단지 머리가 좀 아플 뿐이야.
어린애들이 너무 소란을 피워서...

이리로 피해 온 거야...
이제는 그 애들 곁에 돌아가 봐야지..."
그녀는 급히 내게서 멀어져 갔다.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나를 그녀에게서 떼어 놓았다.
나는 응접실에 가서 다시 그녀를 만나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방 저 끝에서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놀이를 짜주고 있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여러 사람들이 보였고
그녀에게로 가려면 필시 누구에게 붙잡힐 것 같았다.
인사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혹시 벽을 따라 살짝 빠져나간다면...나는 그렇게 해보았다.

정원으로 난 커다란 유리문 앞을 막 지나가려는 순간,
누가 내 팔을 잡는 것을 느꼈다.
문에 반쯤 몸을 숨기고 커튼으로 몸을 휘감은 줄리에뜨가 거기 있었다.


"온실로 가!"

고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꼭 할 말이 있어, 그쪽으로 혼자 가. 곧 따라갈게."


그러고는 문을 조금 열더니 정원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는 곧 아벨을 보고 싶었다.
아벨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현관으로 되돌아온 나는 줄리에뜨가 기다리고 있는 온실로 갔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있었다.
눈썹을 찌푸리고 있어 그녀의 눈초리는 날카롭고 괴로운 표정을 띠고 있었다.
목소리마저 거칠고 경련을 일으킬 듯 싶었다.
그녀는 뭔가 분노로 흥분되어 있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움에 놀라 어색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단둘이었다.

"알리싸가 이야기 했어?"

하고 그녀는 내게 다그쳐 물었다.


"겨우 두어 마디, 내가 아주 늦게 와서 말야."


"언니는 내가 자기보다 먼저 결혼하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


"응."


그녀는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언니는 내가 누구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는지 알아?"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건 오빠야!"

하고 그녀는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그렇대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망과 승리감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그녀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기보다 되로 몸을 젖혔다.
"이제는 내게 남은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겠어."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면서
희미하게 덧붙여 말하더니 그녀는 문을 쾅 닫고 버렸다.

내 머리와 가슴 속에서 모든 것이 비틀거렸다.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뛰논 것을 느꼈다.
단 한 가지 생각만이 그런 내 마음의 혼란을 버티고 있었다.
아벨을 찾자, 그러면 그는 아마도
이 두 자매의 기이한 이야기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혼란된 모습이 누구에게나 뜨일 것 같아서
응접실에서 다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정원의 차가운 공기가 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는 잠시 그대로 정원에 머물러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바다 안개가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앙상했고 땅과 하늘은 한없이 쓸쓸해 보였다...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둘러선 어린이들의 합창인 모양이었다.
나는 현관을 통해 다시 들어갔다.
응접실과 문간방의 문이 모두 열려 있었다.
이제는 텅 빈 응접실에서 피아노 뒤에 반쯤 몸을 가린 이모가
줄리에뜨와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다.
문간방에는 잔뜩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를 둘러싸도 손님들이 빈틈없이 모여 있었다.
어린애들은 이미 찬송가를 마친 때였다.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보띠에 목사가 설교 비슷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얘기는 이른바 '좋은 씨를 뿌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회도 놓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불빛과 훈기가 나는 싫었다.
나는 다시 나가고 싶었다.
문에 기대어 선 아벨이 보였다.
그는 얼마 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적의에 찬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는데
우리의 시선이 마주치자 어깨를 들먹였다. 나는 그에게로 갔다.

"바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더니 갑자기,
"아아, 이봐, 나가자. 좋은 말씀은 이제 지긋지긋해!"했다.
우리가 밖으로 나오자 그는 다시 한번 "바보!"하고는
아무 말 없이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애가 사랑하는 건 바로 너야, 이 바보야! 나한테 그런 것을 말해 줄 수도 없었니?"
나는 아찔했다.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말할 수 없었지? 너 혼자선 그것을 깨달을 수가 없었을 테니까!"


그는 내 팔을 잡더니 미친 듯이 흔들어 댔어.
악문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숨찼다.

"아벨, 제발 부탁이야."


잠시 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그가 나를 끌고가는 동안 말했다.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게 말을 좀 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가로등 불빛 밑에서 그는 느닷없이 나를 세우더니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와락 나를 끌어안고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흐느끼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잘못했어, 나도 바보야. 너와 마찬가지로 나도 잘 몰랐어."
울고 나더니 다소 마음이 진정되는 듯싶었다.
그는 머리를 들더니 다시 울기 시작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이제 와서 다시 그 이야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
네게 말했지만 아침에 줄리에뜨와 이야기했어.
굉장히 예쁘고 쾌활했지.
난 그것이 다 나 때문인 줄 알았어.
알고 보니 그것은 순전히 우리가 너의 이야기를 한 까닭이었어."


"그때는 짐작을 못했니?"


"못했어, 확실히는. 하지만 지금에 와서
아무리 작은 대목이라도 환히 짐작이 가...."


"그렇다면 알리싸는...."


"알리싸가 희생을 하는 거지.
동생의 비밀을 알자 자기 자리를 양보하려 한 거지.
어때, 넌! 뭐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지...
나는 줄리에뜨에게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싶었어.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아니, 내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자마자
그녀는 우리가 앉아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그런 줄 알고 있었어요.] 하는 거야.
그런데 그 어조는 그런 줄 몰랐던 사람의 어조야...."

 

 

 

 

"아! 농담은 제발 그만둬!"


"어째서? 참 우스운 이야기야...

그녀는 자기 언니 방으로 뛰어갔어.
그러자 느닷없이 격렬한 소리가 들려 와, 난 깜짝 놀랐지.
잠시 후에 줄리에뜨가 다시 나온 줄 알았는데
나를 보고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앞을 지나가면서
잽싸게 '안녕하세요?' 하더군...그것뿐이야."


"줄리에뜨는 다시 보지 못했니?"
아벨은 약간 망설였다.

"봤어, 알리싸가 가버린 후에 방문을 열었지.
줄리에뜨는 난로 앞 대리석 위에 팔꿈치를 세우고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꼼짝 않고 서 있었어.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내 기척을 듣더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발을 흔들어 대면서
'제발 나가 줘요!' 하는데 그 어조가 어찌나 매몰찬지
더 묻지도 않고 나와 버렸어. 그게 전부야."


"그래 이제부터는?"


"아! 털어놓고 나니 기분이 봄 낫군. 그래 이제부터는,
글쎄...넌 이제부터 줄리에뜨의 사랑이 식도록 해야겠지.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러기 전엔 알리싸는 네게 돌아오지 않을 거야."

우리는 오랫동안 말없이 걸었다.
"돌아가자."하고 마침내 그가 말했다.
"손님들도 이제는 다 갔을 거야. 아버지가 날 기다리실지도 모르고."
우리는 돌아왔다. 과연 응접실은 텅 비어 있었다.

문간방에는 장식이 다 떨어지고 촛불도 거의 다 꺼진 크리스마스트리 곁에
이모와 그 두 아이들, 뷔꼴랭 삼촌, 미스 아슈뷔르똥, 목사, 사촌 누이들,
그리고 이모가 여태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과,
그가 바로 줄리에뜨가 말하던 청혼자라는 것을 이때 처음 알게 된,
너무도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사나이 뿐 아무도 업었다.
우리들 중 누구보다도 크고 튼튼하고 대머리에 혈색이 좋으며,
다른 계급, 다른 사회, 다른 종족에 속한 그 사나이는
우리 사이에 끼인 것이 퍽이나 어색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는 희끗희끗한 거창한 카이제르 수염 끝을
초조한 듯 잡아 당겼다 비볐다 하는 것이었다.
문이 활짝 열린 현관에는 이제 불빛도 없었다.
우리 둘이 소리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가 와 있는 줄 몰랐다.
오싹하는 어떤 예감이 나를 엄습했다.
"멈춰!"
아벨이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 순간 우리는 그 낯선 사나이가 줄리에뜨에게 다가가서는
그녀가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내맡긴 손을 잡는 것을 보았다.
캄캄한 어둠이 내 가슴을 덮었다....
"아벨,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이야."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혹은 잘못 알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나는 중얼거렸다.
"글쎄! 저 애는 경매를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언니한테 지기 싫다, 이 말이지.
천사들도 하늘에서 박수 갈채를 보내고 있을 거야."

삼촌이 오더니 미스 아슈뷔르똥과 이모에게 둘러싸여 있는 줄리에뜨의 뺨에 입맞추었다.
보띠에 목사도 가까이 왔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알리싸가 나를 보고 뛰어오더니 떨면서


"제로옴, 이럴 수가 없어.

그 애는 저 이를 사랑하지 않아.
바로 오늘 아침에도 그렇게 말했어.

제발 좀 말려, 제로옴.
아아! 저 애가 어떻게 되려고...."

하고 낮은 소리고 부르짖었다.


그녀는 절망적인 애원을 하면서 내 어깨에 매달렸다.
그녀의 이 고통을 덜어 줄 수만 있다면 나는 목숨이라도 바치고 싶었다.

갑자기 크리스마스트리 곁에서 고함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는 달려갔다.

 줄리에뜨가 의식을 잃은 채 이모의 팔에 안겨 있었다.
모두가 다급히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어서 

내게는 잘 보이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칼이 무섭도록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귀로 잡아당기고 있는 듯 했다.
그녀의 몸이 그처럼 경련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보통으로 기절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하고 이모는 벌써 어절 줄 모르는 뷔꼴랭 삼촌을 안심시키려고 큰 소리로 말했다.
보띠에 목사도 집게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위로를 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흥분한 때문이야.

신경이 좀 발작 한 것 뿐이야.
떼씨에르 씨, 튼튼하시니까 좀 거들어 줘요.
내 방으로 올려가야겠어요. 애 침대로...."

그리고 나서 이모가 자기 맏아들 쪽으로 몸을 굽혀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이자
그는 의사를 청하러 가는 듯 곧 나가 버렸다.
이모와 그 청혼자는 그들 팔에 몸을 반쯤 젖히고
안기어 있는 줄리에뜨를 어깨 밑으로 손을 넣어 받치고 있었다.
아벨은 자칫하면 뒤로 떨어질 듯한 머리를 받쳐 주고 있고,
몸을 굽혀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모으며 마구 입을 맞추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줄리에뜨는 침대 위에 뉘어졌다.
알리싸가 떼씨에르 씨와 아벨에게 몇 마디 말을 했지만 내겐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문까지 그 두 사람을 따라 나와서 쁠랑띠에 이모와
단둘이서 간호하고 싶으니 자기 동생이 안정하도록 돌아가 달라고 당부했다.

아벨이 내 팔을 잡고 밖으로 이끌어,
우리는 아무런 목표도 용기도 생각도 없이 오랫동안 어둠 속을 거닐었다.
알리싸에 대한 사랑만이 내 삶의 유일한 이유였다.
나는 그 사람에 매달렸으며 그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또 기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다음날 내가 그녀를 만나러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모가 나를 잡더니 금방 받은 편지를 내게 내밀었다.

줄리에뜨의 그 심한 흥분은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 준 몰약으로 아침결에야 겨우 가라앉았습니다.
당분간 제로옴이 이곳에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줄리에뜨가 그의 발걸음 소리나 목소리를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아서인데,
지금 그 애에게는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줄리에뜨의 상태로 보아 아무래도 제가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아요.
제로옴이 떠나기 전에 제가 만나지 못하게 되면
후에 제가 편지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이 방문 금지는 순전히 나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모나 그 외의 누구도 뷔꼴랭 댁의 초인종을 누를 수 있었고,
이모는 오늘 아침에도 거기에 갈 셈이었다.
내 발걸음 소리? 목소리? 얼마나 어설픈 구실인가... 아무든 좋다.
"좋습니다. 가지 않겠습니다."

 

 

 

 

알리싸를 쉬 만날 수 없다는 것은 퍽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반면 다시 그녀를 만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동생의 병을 내 탓으로 돌리지나 않을까 두려웠고,
따라서 그녀가 성이 난 것을 보느니 보다는
차라리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벨만은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의 방문 앞에서 하녀가 쪽지 하나를 전해 주었다.

네가 염려하지 않도록 몇 마디 적는다.
르아브르에서 이처럼 줄리에뜨 가까이 머물어 있다는 것이 도저히 견딜 수 업었다.
간밤에 너와 헤어진 후 사잠프톤 행 배표를 샀다.
런던의 S 집에서 방학을 보낼 셈이야. 에꼴르에서 다시 만나자.
인간의 무든 도움이 한꺼번에 나를 저버렸다.
고통밖에 남지 않은 이 체류를 단축하고 나는 개학이 되기 앞서 빠리로 돌아왔다.
나는 하느님에게로, '모든 참 된 은혜,
완전한 혜택을 주시는'하느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나의 온갖 고행도 하느님에게 바쳤다.
나는 알리싸도 또한 하느님에게서 안식처를 구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도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알리싸의 편지와 내가 쓴 답장 외에는
이렇다 할 별다른 일 없이 명상과 공부의 긴 세월이 흘렀다.
나는 그녀의 편지를 모두 간직해 두었다.
이제부터 희미한 내 추억을 이 편지들을 참고하며 더듬어 갈 생각이다.
이모를 통해서...
처음에는 이모만을 통해 처음 며칠간을
줄리에뜨의 병세가 심해 모두들 얼마나 근심했는가를 알았다.
떠나온 지 이틀 만에 비로소 나는 알리싸로부터 다음과 같은 쪽지를 받았다.

그리운 제로옴, 좀 더 일찍 편지 못한 걸 용서해.
가엾은 줄리에뜨의 상태가 그럴 겨를을 주지 않았어.
네가 떠난 후 나는 거의 그 애 곁을 떠나지 못했어.
고모에게 이곳 소식을 전해 주십사고 당부했는데, 그렇게 하셨겠지.
그래서 알겠지만 사흘 전부터 줄리에뜨는 좀 나았어.
나는 벌써부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지만 아직 마음이 놓이자 않아.

이제까지 로베르에 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는 나보다 며칠 후에 빠리에 와서 제 누이들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오로지 그의 누이들 때문에 나는 마음내키는 이상으로 그를 보살펴 주었다.
그가 다니던 농업 학교가 쉴 때마다 나는 그를 돌봤으며 즐겁게 해주려고 애썼다.

내가 알리싸나 이모에게 감히 물을 수 없던 일도 그를 통해 알았다.
에뜨와르 떼씨에르는 줄리에뜨의 병세를 알아보려고 꾸준히 찾아왔으나
로베르가 르아브르를 떠날 때까지는
줄리에뜨는 아직 그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떠나온 이래로 줄리에뜨는
자기 언니 앞에서 항구 무언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나는 이모를 통해,
내가 예측하기로는 알리싸가 곧 깨어지기를 바랐던 줄리에뜨의 약혼은
줄리에뜨 자신이 하루 바삐 공식적인 것으로 해주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충고도 명령도 애원도 소용이 없게 된 이 결심은
그녀의 가슴에 아로새겨졌고, 그녀의 눈을 가렸고, 그녀를 침묵 속에 가두었다.

세월이 흘렀다.
하긴 나도 그녀에게 무엇이라 써야 할지 몰랐지만
알리싸로부터는 너무나 실망적인 쪽지밖에는 받지 못했다.
짙은 겨울 안개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학업도, 그리고 나의 사랑과 신앙의 모든 열정도,
아아! 가슴으로부터 어둠과 추위를 털어내지는 못했다.

세월이 흘렀다.

느닷없이 찾아든 어느 봄날 아침,
그때 마침 르아브르에 없었던 이모에게 부쳐 온
알리싸의 편지를 이모가 내게 전해 주었다.
그 편지 가운데 이야기를 밝혀 줄 수 있는 몇 부분을 여기에 적는다.

...제가 온순하다고 칭찬해 주세요.
고모님이 시키신 대로 떼씨에르 씨를 만났어요.
그 분과 한참 이야기 했어요.
나무랄데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또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결혼이 제가 처음 두려워했던 것처럼
불행하게 되진 않으리라는 것도 거의 믿게 될 정도였어요.
확실히 줄리에뜨는 그 분을 사랑하지 않아요.
하나 제가 보기에는 그 분은 한 주일 한 주일
점점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그 분은 사정도 잘 알고 줄리에뜨의 성격도 잘 파악하고 계셨어요.
그런데다 그 분은 줄리에뜨에 대한 자기 사랑의 능력에 자신을 갖고
자신의 꾸준한 마음이 반드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말 것이라 확신하고 계세요.
말하자면 줄리에뜨에게 홀딱 반하신 거죠.

정말 제로옴이 그처럼 동생을 돌봐 주는 데 대해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일종의 책임감에서 그렇게 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의 성격과 로베르의 성격은 퍽 다르니까요--
그리고 아마도 저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아요--
하지만 수행할 의무가 벅찰수록 의무는 영혼을 가꾸고 향상시켜 준다는 것을

그는 이미 터득했을 거예요.
아주 지고한 생각이죠.

큰조카딸의 이런 이야기를 너무 웃지 마세요.
왜냐하면 줄리에뜨의 결혼을 좋은 일로 바라보도록 힘쓰는 저를
받쳐 주고 도와 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생각이기 때문이에요.

그처럼 살뜰하게 염려해 주시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고모님, 하지만 제가 불행하다고는 생각지 말아 주세요.
'저는 오히려 그 반대예요.'라고 말씀 드릴 수 있어요.
줄리에뜨를 휩쓸고 간 시련이 제 마음 속에서 그 반동을 일으켰기 때문이에요.
잘 이해하지도 못한 채 되풀이해 읽던 성경 말씀이  갑자기 이해가 되었어요.
'인간을 믿는 자는 불행하니라',
이 말씀은 제가 성경에서 찾아내기 훨씬 전에
제로옴이 아직 열 두 살도 채 못되고 제가 열 네 살이 되던 해
제로옴이 제게 보내 준 자그마한 크리스마스카드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그 카드에는 그 당시 저희들에게도 퍽 아름다워 보였던 꽃다발 곁에
꼬르네이유의 다음과 같은 주석시가 적혀 있었어요.
오늘의 사바 세계로부터 나를 주께로 인도해 올리는 힘은어떤 불가항력의 매력인가?
인간의 무리 위에 주추를 세우는 자는 불행하리라.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이 시구보다는 에레미야의 그 간결한 구절을 좋아합니다.
필경 제로옴도 그 당시에는 이 구절에 별다른 주의를 하지 않은 채 카드를 골랐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날마다 저희들을 동시에 하느님께로 접근시켜 주신 것을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다음계속

'소설방 > 데미안.좁은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좁은 문 <끝>  (0) 2015.01.10
3. 좁은 문   (0) 2015.01.10
1. 좁은 문  (0) 2015.01.10
제 8 장 종말의 발단 <끝>  (0) 2015.01.10
제7장 에바 부인  (0) 2015.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