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데미안.좁은문

제7장 에바 부인

오늘의 쉼터 2015. 1. 10. 11:50

제7장 에바 부인

 


(1)  


휴가중에 나는 몇 해 전 데미안이 그의 어머니와 살고 있었던 집에 가보았다.
한 늙은 부인이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나는 그 부인에게 말을 건네고,
이야기 중에 이 집이 지금은 그 부인의 소유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데미안의 가족 소식을 물어보았다.
그 부인은 그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몰랐다.
내가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자
그 부인은 나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가죽 표지를 한 앨범 한 권을 찾아와
데미안의 어머니의 사진을 한 장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데미안의 어머니를 거의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 조그마한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는 심장의 고동이 정지한 듯한 충격을 느꼈댜.
-그것은 내 꿈의 모습이었다!

내 꿈의 얼굴이 바로 그 여자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자기 아들을 닮은, 모성적인 표정과 엄격함과 깊은 정열을 지닌
바로 그 키가 크고 거의 남자와 같은 느낌을 주는 여자의 모습,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친근하고도 접근하기 힘든,
데몬인 동시에 어머니이며 운명인 동시에 애인인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바로 이 여자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나의 꿈의 모습이 이 지상에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되자 격렬한 기적을 본 것 같은 충격이 나를 스쳐갔다!

저런 얼굴의 여자가,
내 운명의 표정을 지닌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더욱이 그 여자는 데미안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 후 나는 곧 여행을 떠났다.
이상야릇한 여행이었다!
나는 마음내키는 대로 끊임없이
이 여자를 찾아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 여자를 생각나게 하고 이 여자를 연상하게 만들고 이 여자를 닮은,
마치 뒤엉킨 꿈속에서처럼
나를 낯선 도시의 골목길로, 정거장으로,
열차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모습만을 만나는 그런 날이 있었다.

또한 나의 찾아 헤맴이 얼마나 소용없는 일인지를
느끼게 하는 그런 날도 있었다.
그럴때면 나는 어느 공원이나, 호텔의 정원이나,
역의 대합실에서 망연하게 앉아 있곤 했으며
나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그 모습을 나의 내부에서 소생시키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것도 부끄럽고 무상한 짓이 되어버렸다.
나는 한 번도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다만 낯선 곳을 달리는 기차 속에서
십여 분쯤 눈을 붙일 수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취리히에선가는 한 여자가 나를 따라온 적이 있었는데
상당히 예뻤지만 약간은 철면피한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여자가 마치 공기인 것처럼 아무런 느낌 없이 걸어갔다.

다른 여자에게 한 시간 동안이라도 관심을 보내느니
차라리 당장 죽는 편이 나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나의 운명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실현될 날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앞당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초조감으로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한 번은 어느 정거장에서, 인스부르크라고 생각되는데,
막 떠나는 기차의 창가에서 그 여자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보고는
며칠 동안을 비참함에 빠져 있었다.
그러더니 불현듯 그 모습이 다시 꿈속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추적의 무의미함을 깨닫고는
창피스럽고 처량한 심정이 되어 곧장 집으로 되돌아왔다.

이삼 주일 후 나는 H대학에 입학했다.
만사가 다 나를 실망시켰다.
내가 수강한 철학사에 대한 강의는
공부하는 학생들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허무하고 기계적이었다.
모든 것은 너무나도 판에 박은 듯이 일정했고,
서로들 똑같이 행동하고 소년티를 못벗은 얼굴에 나타나는
과장된 쾌활성은 너무나 암담하게 공허하여 구입한 완제품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자유로왔다.
온종일을 나를 위해서 바치면서 교외의 낡은 집에서 조용하고 안락하게 지냈다.
내 책상 위에는 두서너 권의 니체가 놓여 있었다.
그와 더불어 살고,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끼며
그를 그토록 쉴새없이 몰아댄 숙명을 느끼며 그와 더불어 괴로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가차없이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뻐했다.

어느 날 저녁 늦게 나는 가을 바람에 나부끼듯 시내를 건들거리며 다녔다.
어느 음식점에선가 대학생들이 단체로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창문을 통해서는 담배연기가 자욱이 넘쳐 나오고 있었다.
노랫소리는 세찬 파도처럼 흘러넘쳤지만
조금도 흥겹지 않았고 생기가 없이 단조로왔다.
나는 거리 모퉁이에 서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두 곳의 학생 주점에서는 면밀하게 훈련된 청춘의 쾌활성이
밤의 대기로 퍼져나오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집단이 있고, 어디를 가도 모임이 있고,
어디를 가도 운명의 발산과 군중 속으로의 도피가 있었다!

나의 뒤에서 두 남자가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그들의 대화의 한 토막을 들을 수 있었다.
”흑인 마을의 청년들의 집과 똑같지 않소?”

한 사람이 물었다.
“모든 것이 합치되는군요.

문신까지도 아직 유행이랍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젊은 유럽의 모습입니다.”

그 음성이 내게는 이상스럽게도 경고하는 것처럼 귀에 익숙하게 울려왔다.
나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 두 사람을 따라갔다.
한 명은 자그마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일본인이었는데
나는 가로등 아래에서 그의 다소 검은 얼굴이 미소를 띠고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때 다른 남자가 다시 말을 했다.
”그런데 당신네 일본에서도 역시 더 나을 것이라곤 없겠지요.
군중에 추종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드문 법이니까요.
여기에도 간혹 그런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즐거운 놀라움으로 내게 와 닿았다.
나는 그 이야기하는 사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데미안이었다.
바람이 부는 밤에 나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와 일본인을 뒤따라 가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데미안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즐겁게 들었다.

옛날의 음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 음성은 옛날의 아름다운 안정감과 침착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나를 압도하는 옛날의 힘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잘 해결되었다.
나는 그를 발견한 것이었다.

교외의 거리 모퉁이에서 그 일본인은
데미안에게 작별을 고하고 어느 집의 현관문을 열었다.
데미안은 그 길을 되돌아 나왔는데
나는 거리의 한복판에 멈춰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나는

그가 단정하고도 탄력있는 걸음걸이로 나를 향해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갈색 비옷을 입고 가느다란 단장을 팔에 걸치고 있었다.
그는 발걸음을 전혀 흐트리지 않고 내 앞까지 와서 모자를 벗고
결단성 있는 입과 이마 위에 독특한 밝음을 지닌
옛날의 환한 얼굴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데미안!”

나는 불렀다.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여기 있었군, 싱클레어! 난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다네.”
”내가 이곳에 있는 줄 알고 있었나?”
”그것을 확실히 알진 못했지만,
그렇게 되기를 줄곧 바라고 있었다네,
자네를 오늘 저녁에 처음으로 만났지만,
자네는 그래, 언제나 우리를 뒤좇아왔었지 않나.”
”그럼 나를 바로 알아보았군?”
”물론이야. 자네는 확실히 변했어.
그러나 자네는 분명히 표지를 달고 있지 않은가!”
’표지라니, 무슨 표지?”
”자네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네만,
우리는 옛날에 그것을 카인의 표지라고 불렀었지.
그것이 우리들의 표지야.
자네는 언제나 그것을 지니고 있었다네.
그래서 나는 자네의 친구가 된 거야.

지금은 그것이 더 뚜렷하게 되었군.”

”나는 그것을 몰랐어.

아니 애당초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언젠가 나는 자네의 초상을 그린 적이 있다네.
데미안,

그런데 나는 그 초상이 나와도 닮았다는 데 놀랐었네.
그것이 바로 표지였을까?”
”그것이 표지였지. 기쁘네. 자네가 여기에 와서! 어머니도 기뻐하실 거야.”
나는 깜짝 놀랐다.
”자네의 어머니? 어머니도 여기 계신가? 그렇지만 나를 전혀 모르실 텐데?”

”아, 어머니는 자네에 대해 잘 알고 계신다네.
자네가 누군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어머니는 아마 자네를 알아보실 거야.
자넨 오랫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더군.”

”물론 때때로 편지를 하려고 마음먹기도 했었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더군.
나는 얼마 전부터 곧 자네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네.
난 매일같이 이 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는 내 팔을 끼고 걸어나갔다.
침착성이 그에게서 나와서는 나의 내부로 옮겨왔다.
우리는 곧 옛날처럼 지껄였다.
우리는 학창 시절과 견신례 수업과 또
그 당시의 휴가중에 있었던 그 불행했던 만남을 회상했다.
단지 우리들의 사이를 밀접하게 연결해준 사건에 관해서만은,
프란츠 크로머에 대해서만은 이번에도 말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우리는 기이하고도 예감에 가득 찬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데미안과 일본인이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했고,
아울러 대학생의 생활에 관한 이야기와
어쩌면 훨씬 동떨어진 내용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데미안의 말에 의하면 그것들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것이었다.

그는 유럽의 정신과 현시대의 특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도 단합과 집단 행동이 지배하고 있을 뿐
아무데도 자유와 사랑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학생 단체와 합창단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공동체는 강제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불안과 도피와 절망감에 나온 공동체이며
내부는 썩고 낡아 곧 붕괴되고야 말 것이라는 것이었다.

”단합이란” 데미안이 말했다.
“아름다운 것이지만 우리가 가는 곳마다 볼 수 있는
이러한 식으로 번창하는 것은 전혀 단합이 아니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이 서로를 알게 됨으로써 새로이 탄생되는 것인데
그것이 한참 동안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는 거야.
지금 단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거지.
인간들은 서로에 대해서 두려워하기 때문에
서로의 품으로 도망해오고 있는 거야.
신사는 신사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들끼리,
학자들은 학자들끼리 말이야!
그런데 왜 그들은 두려워하는 것일까?
사람은 흔히들 자기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에 두려움을 느끼지.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거야.
내부의 알지 못하는 것에대한 두려움을 품은 자들만의 공동체라니!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의 법칙이
더 이상 오늘날을 살아가는 데 접당하지 않다는 것과
자기들이 좇아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로마 시대의 동판법 같은 것이라는 것과,
그들의 종교 그들의 도덕도 어느 것 하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거야.
유럽은 수백 년간, 아니 그 이상의 시간 동안
그저 연구만 하고 공장만 세우고 있었거든!
한 사람의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몇 그램의 화약이 필요한지는 정확히 알고 있지만
신에게 기도를 드릴 줄도,
한 시간 동안만이라도 만족하게 있을 수 있는 법도 전혀 모르고 있는 거야.

학생 주점 같은 곳을 한번 들여다보렴!
혹은 부자들이 드나드는 오락장이라도!

절망적이야!

싱클레어.

어디서도 진정한 명랑함이란 없어.
그렇듯 불안에 가득 차서 모여든 사람들은
더욱이나 겁을 먹고 악의에 차서 아무도 남을 믿으려 들지 않는 거야.
그들은 이상이 아닌 이상에 매달려서는
새로운 이상을 세우는 모든 사람에게 돌맹이를 던져대는 거야.
싸움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느껴.
그것이 올 거야. 머지않아 틀림없이 올 거야!
물론 그것이 세계를 ‘개선’하지는 못하겠지.
노동자가 공장주를 때려 죽이거나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 총질을 한다 해도 단지 소유주만 바뀔 뿐이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일이 헛된 일이라는 건 아냐.
오늘날의 이상의 무가치함을 증명해주는 셈이 될 거고
석기 시대의 신들을 제거해줄 거니까.
현재대로의 이 세계는 바야흐로 죽어가고 있는 거야.
이 세계는 멸망하고 있으며 또 멸망하고 말 거야.”

”그럼 그땐 우리는 어떻게 될까?”

내가 물었다.

”우리가?

아, 우리도 아마 함께 멸망하겠지.
우리와 같은 자들도 맞아 죽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단지 그것으로 처리되는 것만은 아니야.
우리들에게서 남겨진 것이나
우리들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의 주위에 미래이 의지가 결집될거야.
유럽이 얼마 동안 기술과 과학이라는 시장으로
떠들썩하게 눌러 덮었던 인간성의 의지가 결국엔 나타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인간성의 의지란 결코 국가나 민족,
단체나 교회 같은 오늘날의 공동체와는 같지 않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게 될 거야.
자연이 인간에 대해서 원하는 바는 오히려 각 개인의 마음속에,
자네나 나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거야.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도 적혀 있었고
니체의 마음속에도 적혀 있었지.
이 중요한 흐름을 위해서는 물론 그것은 매일 다른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만,
오늘날의 공동체의 붕괴되어버릴 때에만 나타날 여지가 생길 거야.

 


(2)


우리는 꽤 늦게서야 시냇가의 정원 앞에서 멈춰섰다.
”우리는 여기서 살고 있네.”

데미안이 말했다.

“가까운 시일 안에 한번 방문해주게. 우리는 자네를 몹시 고대하고 있으니.”

기쁜 심정으로 나는 냉랭해진 밤공기 속에서 먼 귀로를 재촉했다.
시내의 여기저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대학생들이 소란을 피우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자주 즐거움을 나타내는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나의 고독한 생활 사이에서 격리감과 때로는 조소에 가까운 대립감을 느끼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껏 한 번도 오늘 같은 침착성과 내밀한 힘으로
그것이 내게 있어서 얼마나 사소한 관계일 뿐인지를,
내게 있어서 그 세계는 이미 얼마나 멀리 사라져버렸는지를 느낀 적은 없었다.

나는 내 고향의 관리들, 늙고 신분높은 신사들을 상기했다.
그들은 마치 행복한 낙원의 추억처럼 음주로 허송한

그들의 대학 시절에 대한 추억에 집착했고,
마치 시인이나 낭만주의 자들이 그들의 유년 시절에 바치는 것과 비슷하게
그들의 대학 시절의 이제는 사라져버린 ‘자유’를 예배하곤 했었다.
어디서나 똑같았다!
어디서나 그들은 행여 자기 자신의 책임을 상기하게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가도록 요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자기의 과거 시절 어느 곳에서 ‘자유’를 찾고 ‘행복’을 찾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삼 년간 폭음을 하고 환성이나 지르다가 기어들어와서는
관청의 성실한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건 부패했다. 우리들의 나라는 부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대학생들의 이런 바보짓마저 그밖의 수백 가지의 일보다는
좀더 영리하고 좀더 질이 좋은 편에 속하는 것이긴 했다.

멀리 떨어진 숙소에 도달해서 잠자리에 들었을 때
이 모든 생각은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내 온 정신은 오늘이 나에게 해준 한 가지 약속에
목을 늘이고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내일이라도 당장
데미안의 어머니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술을 퍼마시거나 얼굴에 문신을 하거나
이 세상이 모조리 썩어 그 몰락을 기다리든 말든간에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랴!
나는 단 한 가지,
나의 운명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마중나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나는 아침 늦게까지 곤하게 잤다.
새로운 날이 나에게는 엄숙한 축제일로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유년 시절의 성탄절 축제 이래 경험하지 못한 그러한 날이었다.
나는 내심 불안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게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날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고,
주위의 세계가 변화하고, 기대하고 있으며,
연관에 차 있고, 엄숙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또 느낄 수 있었다.

소슬히 내리는 가을비조차 아름답고 고요하고
기꺼운 음악에 가득 차 있는 축제일의 분위기를 더하게 했다.
생전 처음으로 외부의 세계가
나의 내부의 세계와 순수하게 일치된 음향을 울리고 있었다. 

영혼의 축제일이 시작될 것이었고,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었다.

어떤 집도 어떤 진열장도 골목의 어떤 얼굴도 나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모든 것은 당연히 그렇게 있어야 하는 것처럼 있을 뿐이었지만
옛날의 눈에 익은 공허한 모습이 아니라
기대에 차 있는 자연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으며
운명을 맞아들일 준비를 경건하게 하고 서 있는 것이었다.

내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대축일의 아침에 나는 그런 세계를 보곤 했었다.
세계가 아직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나의 내부 속에 들어가서 사는 일이나
외부의 것에 대한 의미는 내게서 멀어져버렸다.
눈부신 빛의 상실은 유년 시절의 상실과 불가피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사람은 어느 정도의 영혼의 자유와
성인이 되는 것에 대한 대가로 이 사랑스러운 빛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체념하는 데 나는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 모든 것은 단지
파묻히고 어둠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과
자유롭게 된 사람이나 유년 시절의 행복을 포기한 사람으로서도
이 세계가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어린아이의 관찰의 내적인 전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황홀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막스 데미안과 작별을 고했던 교외의 정원을 다시 보게 되었다.
높다랗고 비에 젖어 잿빛으로 보이는 나무들 뒤에 가려진 채
밝고 살기에 편하게 생긴 조그마한 집이 서 있엇다.
커다란 유리벽 뒤에는 높다란 꽃이 핀 관목들이 있었고
빛나는 유리벽 뒤에는 높다란 꽃이 핀 관목들이 있었고
빛나는 유리창 뒤에는 그림과 책이 줄지어 있는 컴컴한 방의 벽이 있었다.
현관은 곧장 난방이 잘된 작은 거실과 통해져 있었는데
흰 앞치마에 까만 옷차림의 말없는 늙은 가정부가
나를 안내해주었고 내 외투를 받아 걸었다.

그 여자는 나를 거실 안에 혼자 남겨두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며 내가 곧장 내 꿈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문 위쪽의 까만 나무 벽 위에 걸려 있는
검정 테의 액자 속에 내가 잘 알고 있는 그림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지구의 껍질을 깨고 날아오르려고 하는
황금빛 새매의 머리를 가진 나의 새였다.
나는 몹시 감동이 되어 그 자리에 붙박힌 듯 서 있었다.

마치 이 순간 내가 이제껏 행하고 경험했던 모든 일들이
해답과 실현으로써 내게 돌아오는 것처럼
기쁘면서도 동시에 슬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번갯불처럼 빠른 속도로 수많은 형상이
나의 영혼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현관 문의 아치 위에 돌로 된 문장이 달려 있었던 고향의 집,
그 문장을 그리던 소년 데미안,
두려움에 떨며 크로머의 속박에 얽혀 있던 어린 소년으로서의 나 자신,
조용한 기숙사의 한구석에서 동경의 새를 그리며
영혼이 제 스스로의 줄의 그물에 뒤얽혀 있던 청년으로서의 나 자신,

이 모든 것이, 이 순간에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나의 내부에서 다시 반향되고 시인되고 보답되고 승인되었다.

젖어드는 눈으로 나는 나의 그림을 응시하며 내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때 나는 눈길을 내리뜨렸다.
새의 그림 아래 열려진 문 앞에 까만 옷을 입은
키가 큰 부인이 서 있었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의 아들처럼 시간과 나이를 초월한,
활기와 의지에 넘친 얼굴의 아름답고 품위있는 부인이
나를 향해 정답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 여자의 눈길은 충족이었고 그 여자의 인사는 귀향을 뜻하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두 손을 뻗쳤다.
그녀는 굳건하고도 따스한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었다.

”당신은 싱클레어지요. 나는 당장에 당신을 알아보겠어요. 잘 오셨습니다!”
그녀의 음성은 낮고 따스했고 나는 감미로운 포도주를 마시는 것처럼 그 음성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시선을 들어 그녀의 고요한 얼굴과
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을 들여다보고,
신선하고 성숙한 입과 표지를 달고 있는 넓고 기품 있는 이마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그녀의 두 손에 입을 맞추었다.
“저는 한평생 길 위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야 집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녀는 어머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그녀는 아주 다정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친밀한 두 길이 함께 뻗어 있을 때는
온 세계가 잠시 동안은 고향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녀는 이곳을 찾아오는 동안 내가 느겼던 것을 말하였다.
음성이나 이야기 하는 태도가 아들과 매우 비슷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전혀 딴판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한결 성숙하게 느껴졌고
더 따스했으며 한결 더 분명하게 느껴졌다.

옛날, 데미안이 그 누구에게도 소년의 인상을 주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어머니도 전혀 다큰 아들이 있는 어머니처럼 보이지 않았다.
얼굴과 머리칼 위에 감도는 숨결은 젊고 감미로왔으며
황금빛의 살결은 생기있고 주름살이라고는 없었으며
그 입은 마치 꽃처럼 피어 있었다.
내가 꿈속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위풍있는 모습으로
그 여자는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것이었는데
그녀의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사랑의 행복이었고
그녀의 따스한 시선은 벅찬 충족감을 안겨주었다.

이것이 나의 숙명이 내게 모습을 나타낸 그 새로운 영상이었고,
이젠 더 이상 엄격하지도 고독하지도 않았으며
너무나 성숙했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나는 새삼스레 결심을 할 필요도 없었고 아무런 기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고
그곳으로부터 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바로 가까이에,
행복의 나뭇가지에 그림자처럼 어려 있었고
온갖 열락의 정원에 의해 신선해진 약속의 나라를 향해 길게 뻗어져
멀고도 장한 모습을 드러내보이는 길의 높은 지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나의 앞날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간다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이 부인을 알고 그녀의 음성을 음미하며
그녀 가까이에서 숨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그녀가 내게 있어서 어머니나 애인이나 여신이 된다 하더라도

그녀가 단지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나의 길이 다만 그녀의 길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은 것이었다!
그녀는 나의 새매의 그림을 가리켰다.

”당신의 이 그림을 보내왔을 때처럼 막스를 기쁘게 한 적은 없었어요.”
그녀는 생각에 잠긴 어조로 말했다.
“내게도 물론 그랬지요.

우리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이 그림이 전해지자
우리는 당신이 우리들에게로 오고 있는 중임을 아았지요.
당신이 아직 조그만 소년이었을 때 말이에요,
싱클레어! 어느 날 데미안이 학교에서 돌아와서 말하는 것이었어요.
이마에 표지가 있는 애가 있어요.
그는 틀림없이 내 친구가 될 거예요 라고 말이에요.
그 애가 바로 당신이었어요.
그러나 당신은 쉽지가 않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을 믿고 있었답니다.
언젠가 한 번 당신이 휴가로 집에 돌아왔을 때
막스와 만난 적이 있었지요.
당신이 아마 열 여섯 살쯤 되었을 때일 거예요.
막스가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더군요.---“

나는 말을 가로막았다.
“오, 맙소사. 그때의 이야기를 당신에게 해주었다구요?
그 당시는 내가 제일 비참했던 시절이었어요.”
”알아요. 막스는 내게 당신이 지금
최대의 곤란에 직면해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또다시 공동체 속으로 도망가려고 애쓰고 있으며
심지어는 술집의 단골 손님이 되어 있기까지 하더라고 말해주었어요.
그러나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었지요.
그의 표지가 지금은 숨겨져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그의 내부를 불태우고 있을 테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요

그렇지 않았었나요?”

”네, 그랬었어요.

조금도 틀리지 않아요.
그 후 저는 베아트리체를 발견했고
마침내는 지도자가 한 명 나타나 저를 도와주었지요.
피스토리우스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때서야 비로소 저는 저의 소년 시절에
막스에게 왜 그렇게 결부되어 있어야 했던가,
왜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지요.
부인 어머니,

저는 그 당시 때때로 자살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까지 생각했었답니다.
누구에게나 그 길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요?”

그녀는 손으로 내 머리를 공기를 쓰다듬는 것처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태어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요.
새도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 애써야 한다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요.
돌이켜 생각해보고 한 번 물어보세요.
대체 그 길은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그저 어렵기만 했었던가?
그러나 역시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는가? 하고 말이에요.
당신은 보다 더 아름답고도 쉬운 길을 알고 있었던가요?”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어려웠어요.”

나는 꿈을 꾸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꿈이 내게로 오기까지는 정말 어려웠어요.”
그녀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꿈을 발견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길은 한층 쉬워지지요.
하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꿈이란 없는 거예요.
또다시 새로운 꿈이 나타나는 거지요.
어떤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나는 매우 놀랐다.
그것은 벌써 일종의 경고였을까?
벌써 그것은 방어였던가?
그러나 어떻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미 그녀에 의해 인도를 받고
목적 같은 건 묻지 않으려는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잘 모르겠군요.”

나는 말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저의 꿈이 계속될 것인지는 알 수 없어요.
저는 다만 그꿈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새의 그림 아래에서 저의 운명은 마치 어머니처럼,
어쩌면 애인처럼 저를 맞이해주었어요.
저는 그 운명에 속해 있으며, 그밖에는 아무것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것입니다."

 


(3)


”그 꿈이 당신의 운명인 한에서는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언제나 충실해야겠지요.”
그녀는 엄숙한 어조로 내 말을 보충해주었다.
비애가, 그리고 이 행복한 순간 속에
그대로 죽고 싶은 열렬한 소원이 나를 사로잡았다.
눈물이 얼마나 오랜 동안 나는 울지 않았던가!

억누를 길 없이 흘러나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나는 성급히 얼굴을 그녀에게서 돌려 창가로 걸어가서는
눈물에 흐려져 보이지 않는 눈으로 화분의 꽃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가장자리까지 가득 채워진 포도주잔처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싱클레어, 당신은 아직 어린애군요!
물론 당신의 운명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산이 충실한 대로 있다면 당신이 바라듯이
언젠가는 완전히 당신의 것이 되는 거예요.”

나는 간신히 자신을 억제한 뒤 다시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겐 두서너 사람의 친구가 있어요.”
그녀는 미소를 띠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두서넛밖에 안 되는 극소수지만 지극히 가까운 사람들이랍니다.
그들은 나를 에바 부인이라고 부르지요.
당신도 원한다면 나를 그렇게 불러주세요.”

그녀는 나를 문가로 데리고 가서 문을 열고 정원을 가리켜 보였다.
“바깥으로 나가 보면 막스가 있을 거예요.”
높다란 나무 아래에서 나는 충격을 받고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까지보다 한층 더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또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빗방울이 나뭇가지에서 방울져 떨어져내렸다.
나는 천천히 강기슭을 따라 멀리까지 뻗어 있는 정원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데미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웃옷을 벗은 채 정원의 정자 안에 매달아놓은
모래 주머니 앞에서 권투 연습을 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 나는 발을 멈추었다.
데미안은 아주 멋있어 보였다.
널따란 가슴, 야무지고 남성적인 머리,
긴장된 근육으로 치켜든 두 팔은 강하고 단단해 보였고
근육의 움직임이 파문이 이는 샘물처럼
허리와 어깨와 팔의 관절을 휘감고 있었다.

”데미안!” 나는 그를 불렀다.
“거기에서 뭘 하고 있나?”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연습을 하고 있다네.
난 그 조그만 일본인하고 씨름을 하기로 했거든.
그 사람은 고양이처럼 날쌔고 빈틈이 없단 말이야.
그러나 나를 그렇게 맘대로 다루지는 못할 거야.
그에게 빚진 아주 사소한 굴욕적인 일이 있었다네.”
그는 속옷과 웃옷을 걸쳤다.
”벌써 우리 어머니를 만나뵈었나?”
”그래 데미안, 자네 어머니는 정말 근사한 분이시더군!
에바 부인!
그 이름은 정말 완전히 그 분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야.
모든 존재의 어머니 같단 말이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그 이름을 안단 말인가?
이봐, 그렇다면 자넨 자랑할 만하네.
어머니가 처음 만나서 이름을 가르쳐준 것은 자네가 처음이야.”

이날부터 나는 그 집에 아들이나 형제처럼 드나들었고
어떤 때는 사랑하는 사람처럼 방문하기도 했다.
현관을 들어서며 내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을 때면,
아니 멀리서 정원의 키큰 나무들이 나타나기만 해도
나는 흡족하고 행복한 마음이 되었다.
바깥에는 ‘현실’이 있었는데 현실 속에는
거리와 집, 사람과 시설, 도서관과 강의실 들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 집안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었고
전설과 꿈이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세상과 단절되어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생각과 대화에서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다른 영역에 속해 있었던 것이었고
다수의 사람들과 어떤 경계선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보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분리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의 사명은 이 세계에 한 개의 섬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할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의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던 나는 단지
완전한 고독을 맛본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공동체를 알게 된 것이었다.
나는 결단코 행복한 사람들의 식탁이나
흥겨워하는 사람들의 축제에 되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공동체를 보더라도 부러워하거나 향수를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나는 차츰 ‘표지’를 달고 있는 사람들의
내밀한 냉정에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표지를 지니고 있는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상스럽다든가,
혹은 미쳤다든가, 위험스럽다고 여겨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깨달은 자 혹은 깨닫고 있는 자들이었고
우리의 노력은 갈수록 완전해지는 깨달음을 위해 경주되는 것이지만
그 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에의 탐구는
그들의 의견이나 그들의 이상과 의무,
그들의 생활과 행복의 기준을 군중의 그것에
점점 더 밀착시키려고 애쓰는 데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노력은 있었고, 그곳에도 힘과 위대성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기에는 우리들 표지를 지닌 자들은 새로운 것,
고립된 것, 미래의 것을 지향하는 자연의 의지를 제시하고 있는 데 반하여
그들은 다만 고집의 의지 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류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사랑해 마지않는 인류란---
유지되고 보호받아야 할 완성된 그 무엇이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인류란 우리 모두가 그것을 향한 도중에 있는 것이고,
그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 법칙이 적혀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그런 아득한 미래인 것이었다.

에바 부인과 막스와 나를 제외하고도
그밖의 여러부류의 탐구자들이 가깝거나 멀거나간에
우리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그들의 대다수는 특이한 길을 걸어 가며
개별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색다른 의견과 의무에 집착해 있었는데
점성술가와 카발라 학파나 톨스토이의 신봉자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부류의 섬세하고 수줍고 마음이 여린 사람들과
새로운 교파의 신봉자들과 인도적인 수도의 구도자들과
채식주의자들과 그밖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 모든 사람들과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비밀스런 삶의 꿈을 아껴주는
경의를 갖고 있다는 것 외의 어떤 정신적으로나
실제적인 일에 있어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서도 과거 속에서 신과 새로운 구원의 영상에 대한
인류의 탐구의 흔적을 찾아내고 때로는
피스토리우스의 그것을 연상시켜주는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훨씬 우리와 가까운 거리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책들을 가져와서 고대 언어의 원서를 해석해주었고,
고대의 상징물이나 의식의 도해를 우리들에게 보여주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이 소유했던 이상이란
결국 모두가 무의식적인 영혼의 꿈과 손으로 더듬어가면서
그 속에서 자기의 미래의 가능성의 예감을 추구하고자 한
꿈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고대 세계의 그 이상스러운
천 개의 머리를 가진 신들의 무리에서부터
기독교적인 개종의 여명에 이르기까지를 섭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종교가 고독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고해에서
민족과 민족으로 옮겨간 변천의 궤적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이 수집한 모든 자료를 통해서
우리들의 시대에 대한 비평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고,
방대한 노력으로 강력하고도 우수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는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극도로 황폐해져가고 있는
현대 유럽에 대한 비평적인 안목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은 온 세계를 얻기는 하였지만
결국은 그것으로 인해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여기에도 물론 약간의 희망과 구제론의 신자와 고해자가 있었다.
유럽을 개종시키려는 불교 신자들이 있는가 하면
톨스토이 신봉자와 그밖의 여러 종파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우리들은 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는 했지만,
이들 교의들의 어느 것도 상징 이외의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우리 표지를 지닌 자들에겐 미래의 형성에 대한
아무런 염려도 책임지워져 있진 않았다.
우리들에게는 모든 교파와 모든 구제론은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려 쓸모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우리들은 다만 각자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완전히 자기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의지에 뒤따르며
불확실한 미래가 초래하게 될지도 모르는 온갖 일에 대해서
스스로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순수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무로서 또한 운명으로서 느낄 뿐이었다.

새로운 탄생과 현대의 붕괴가 가까이 와 있었고
그것을 이미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입 밖에 내든 안내든
우리들 모두의 마음속에서는 분명한 일이었다.
데미안은 여러 차례 나에게 말했었다.

“무엇이 올 것인지는 짐작할 수 없어.
유럽의 영혼은 무한히 오랫동안 쇠사슬에 매어 있는 짐승과 같아.
그것이 해방되었을 때 최초로 행할 행동은
필경 그리 칭찬할 만한 것이 되진 못할 거야.
그렇지만 이제까지 그렇게도 오랫동안 노상 기만당하기만 하고
마비되어왔던 영혼의 진정한 고난이 백일하에 드러날 수 있게만 된다면
우리들이 지나온 길이나 돌아온 길 같은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거야.
그러면 우리들의 날이 오는 거야.
세상 사람들의 지도자나 새로운 입법자로서가 아니라---
우리는새로운 법률 같은 것은 더 이상 경험하지 않게 되겠지만---
우리는 오히려 의지자로서, 운명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가서 그곳에 서 있을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으로서 필요하게 될 거야.

여보게, 모든 사람들은 만약 그들의 이상이 위협을 받게 된다면
아마 믿을 수 없을 만한 짓을 능히 해낼 용의가 있을 걸세.
그러나 새로운 이상이, 새롭고 아마도 위험스러우며
흉측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그런 성장의 움직임이 문을 두드릴 때
거기에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세.
그때에 거기에 있어서 함께 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우리인 거야.
그것을 위해 우리는 표지를 달고 있는 거니까---
공포와 증오를 일으켜 그 당시의 인류를 좁다란 전원에서
위험스러운 넓은 세계로 몰아넣기 위해
카인이 표지를 갖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네.

인류의 역사에 영향을 끼친 모든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그들이 운명에 대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유능하고 활동적이었던 걸세.
모세와 부처가 그러했고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도 그러했지.
그 사람이 어떤 파동에 휩쓸리는가,
어떤 극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선택 범위 내에 있는 일은 아닌 걸세.
만약 비스마르크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의견에 동조했었다면
그는 영리한 지배자는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운명의 인물이 될 수는 없었을 걸세.

나폴레옹도, 케사르도, 로욜라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랬던 거야!
사람들은 그것을 언제나 생물학적이며 진화론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네!
지구의 표면에 거대한 변혁이 일어나서 수서동물을 육지로,
육서동물을 물 속으로 밀어넣었을 때,
그런 새롭고도 전대미문의 일을 수행하고 새로운 적응에 의하여
자기들의 종족을 구할 수 있는 운명에 대하여 준비를 갖추고 있던 표본들이 있었다네.
그것이 그 이전에 자기의 종족 가운데서 보수적이고
보존적인 성향을 가진 것이엇는지, 아니면 오히려
기이한 별종이며 혁명적인 것이었는지를 우리가 알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그들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과정 속에서 자기의 종족을 구할 수 있었던 거야.
우린 그 점을 잘 알 수가 있다네. 그래서 우리는 준비를 하려는 거야!”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룰 때 에바 부인은 때때로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 이러한 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기의 견해를 펼치는 우리들 각자의
신뢰와 이해심에 가득 찬 경청자이자 반향이었는데
그러한 생각들이 모두 그녀에게서부터 비롯되어
다시 그녀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 가까이에 앉아 있다거나 때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성숙함과 영혼의 분위기에
한몫 끼는 일이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나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나 혼돈이나 혹은 혁신이 일어나면
그녀는 곧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내가 잠잘 때 꾸는 꿈조차 나에게는 그녀로부터의 영감에 의한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자주 그녀에게 내 꿈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 꿈은 그녀에겐 쉽게 이해가 가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으며
그녀가 분명한 느낌으로 파악해낼 수 없는 기상천외한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4)


얼마 동안 나는 마치 우리들이 나눈 일상 대화의 복제와도 같은 꿈을 꾸었다.
온 세계가 혼란에 빠지고 나 혼자서나 아니면
데미안과 함께 긴장하여 위대한 운명을 기다리는 꿈을 꾼 것이었다.
운명은 가리워진 채로 있었지만 어딘지 에바 부인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에 의해서 선택되거나 혹은 배척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운명이었던 것이다.
여러 차례 그녀는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당신의 꿈은 완전하지가 않아요. 싱클레어, 당신은 제일 좋은 것을 잊어버리셨어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 잊어버린 부분이 생각이 났고
나는 어쩌면 그것을 잊을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때때로 나는 불만을 느끼고 어떤 욕구로 고민하곤 했다.
그녀를 팔에 끌어안지도 못하면서
그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곧 그것을 알아차렸다.
한 번은 내가 여러 날 동안이나 찾아가지 않았다가
아직도 어지러운 마음으로 다시 그녀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나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당신이 믿지도 않는 소원에 정신을 잃어서는 안 돼요.
당신이 무엇을 소원하고 있는지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이 소원을 버러거나 아니면 완전하고 올바르게 바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당신이 그 소원의 성취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확신하게 되도록 소원할 수 있다면
그때엔 그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러나 지금 당신은 소원을 하면서도 다시 후회하기도 하고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내가 전설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께요.”

그녀는 별에 반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바닷가에 서서 손을 뻗치고 별에 예배했고 별의 꿈을 꾸고 자기의 생각을

별에게 보냈다.
그렇지만 별을 사람이 끌어안을 수야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거나
또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충족될 희망도 없이 별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이 생각에서 체념과 그리고 자기를 개선시키고 정화시켜줄
무언의 충실한 고민을 읊은 한 편의 완전한 생명의 시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모두 별을 찾아갔다.
그는 어느 날 밤 다시 바닷가의 높은 벼랑 위에 서서 별을 쳐다보고 별에의

사랑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동경이 절정에 달한 순간 그는 별을 향해서 허공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도약의 순간에 다시 한 번 번개처럼 생각했다.
정말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다! 라고.
그는 바닷가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사랑하는 법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그가 뛰어올랐던 그 순간에 단단하고 확실하게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정신력을 가졌었다면
그는 하늘로 날아올라가서 별과 일체가 될 수 있었을 터였다.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 “또 요구해서도 안 되지요.
사랑은 자기의 내부에서 확신에 이를 수 있는 힘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끌려오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게 되는 거지요.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 의해서 끌리고 있어요.
당신이 나를 끌게 되면 나는 가겠어요.
나는 아무런 선물도 드리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당신에게 획득 당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다음번에는 나에게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다.
희망도 없이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자기의 영혼 속에 완전히 침잠하여 사랑하는 나머지 타 없어질 것 같다고 느꼈다.
그에게는 이 세계가 사라져버렸으며 더 이상 푸른 하늘도 파릇한 숲도 보이지 않았고
시냇물도 그에게는 졸졸거리지 않았고 하프도 그에게는 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은 사라져버리고 그는 가난하고 비참해졌다.
그러나 그이 사랑은 나날이 자라서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소유할 수 없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파멸해버리고 싶은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때 그는 사랑이 자기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의 사랑은 자꾸만 강력해져서 그녀를 끌어당겼고,
그 아름다운 여자는 마침내 그를 따라오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가 왔고, 그는 그녀를 끌어당기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 여자가 그의 앞에 와서 서자
그녀는 아주 달라져 버렸고 그는 자기가 잃어버린 온 세계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겼음을 깊은 전율을 느끼며 알게 되었고 그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 세계는 그의 앞에 서서 그에게 몸을 맡겨왔다.
하늘과 숲과 시내, 이 모든 것들이 새로운 빛을 띠고 생생하고도 화창하게
그에게 다가와서는 그의 것이 되었고 그의 말을 속삭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단순한 한 사람의 여인을 얻는 대신 온 세계를

그의 마음속에 지니게 되었다.

 

하늘의 모든 별들은 그의 내부에서 타올랐고
그의 영혼을 뚫고 지나가며 환희의 불꽃을 퉁겼다
그는 사랑을 하였다.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잃어 버리기위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에바 부인에 대한 사랑이 내게는 내 생활의 유일한 내용처럼 느껴졌다.
매일같이 그것의 모양은 달라졌다.
때때로 나는 확실하게 나의 본성이 나를 이끌어 도달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그 여자 개인이 아니라 나의 내심의 상징에 불과하며
그것은 나를 나의 내부로 더욱더 깊이 끌고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때론 나는 내 마음이 발하는 절박한 질문에 대하여
마치 내 속의 무의식적인 어떤 것이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또한 내가 그녀의 곁에서 관능적인 욕망에 불타올라
그녀가 만진 물건에 입맞추는 그런 순간도 있었다.
그리고 점차로 관능적인 사랑과 비관능적인 사랑이, 현실과 상징이 서로서로 겹쳐졌다.
내가 우리 집의 내 방에서 그녀를 조용한 마음으로 생각할 때면
그녀의 손을 나의 손 안에,

그녀의 입술을 내 입술 위에 느끼는 것처럼 생각되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녀의 곁에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진정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때도 있었다.

어떻게 사랑을 지속적이고 불멸의 것으로 간직할 수 있는가를 나는 예감하기 시작했다.
어떤 책을 읽으며 나는 새로운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에바 부인의 입맞춤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며 성속학 향기로운 따스한 미소를 내게 보내주었다.
나는 마치 내 자신의 내부에 무슨 진보라도 이룩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내게 있어서 중요하고 운명적이었던 온갖 것들이 그녀의 모습을 지닐 수 있었다.
그녀는 나의 모든 사상으로 변신할 수 잇었고 나의 모든 사상은 그녀로 변신할 수 있었다.

이 주일 동안이나 에바 부인과 떨어져서 지내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부모님과 함께 지내야 할 성탄절의 휴갈르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집에 있으면서 그녀를 생각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었다.

H시로 되돌아와서도 나는 이 안정감과 관능적인 그녀의 현재로부터의 독립감을

즐기기 위해 이틀 동안이나 그녀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또한 나는 그녀와의 결합이 새로운 비유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용솟음치며 흘러들어가는 바다였다.
그녀는 별이었고, 나 자신도 별로서 그녀에고로 가고 있는 중이었으며
우리는 서로 만났고 서로 끌리고 있음을 느꼈으며 함께 있으면서
가깝고 쟁쟁히 울리는 원을 그리며 서로의 주위를 영원토록 행복하게 맴도는 것이었다.

내가 다시 그녀를 방문한 첫날 나는 이 꿈을 이야기해주었다.
”그 꿈은 참 아름답군요.” 그녀는 조용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진실이 될 수 있게 하세요!”
이른 봄날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 있었다.
나는 거실에 들어섰다.
창문이 하나 열려 있어서 훈훈한 바람이 히아신드의 무거운 향기를 방안으로

휘몰아 넣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는 계단을 통해서 데미안의 서재로 갔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는 언제나처럼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은 어두웠고 커튼은 모두 드리워져 있었다.
막스가 화학실험실로 꾸며놓은 조그만 옆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져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밝고 하얀 봄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나는 무심코 한쪽 커튼을 제쳤다.
바로 그때 나는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가까이에 데미안이
이상스럽게 변한 채 걸상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번갯불처럼 언젠가 이런 일을 본 적이 있었다는 느낌이 나를 스쳐갔다.
그는 두 팔을 아무 움직임도 없이 내리뜨리고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은 채 앉아 있었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다소 앞으로 숙이고 있는 그의 얼굴은 생기가 없고
무감각해 보였고 눈동자에는 조그맣게 반짝이는 빛의 반사가
마치 한 조각의 유리처럼 생기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은 자기 가운데에 깊이 침잠해 있었으며
몸서리쳐지는 마비상태 이외에 다른 표정이라고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사원의 현관에 있는 태고 적의 짐승의 가면처럼 느껴졌다.
그는 거의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되살아난 추억에 몸을 떨었다.
수년 전,

내가 아직도 조그만 소년이었을 때
나는 지금과 꼭같은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의 두 눈은 내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의 두 손은 생기없이 나란히 놓여 있었으며
파리가 한 마리 그의 얼굴 위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육 년 전인 그때에도 그는 꼭 이렇게 나이들어 보였고
이렇게 시간을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얼굴에 있는 주름살 하나도 오늘과 다름이 없었다.

 

 


(5)


나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채 가만히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거실에서 나는 에바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창백하고 피곤해 보였는데 그녀에게서 그런 표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림자가 창문을 스쳐 지나가자 눈부신 하얀 빛이 흔연히 사라졌다.
”저는 막스에게 갔었어요.” 나는 성급하게소곤거렸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가 잠을 자는 건지
아니면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옛날에도 한 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읍니다만은.”

”물론 그 애를 깨우지는 않으셨겠죠?”

그녀는 황급히 물었다.
”예, 그는 내가 들어가는 소리를 듣지 않았어요.
저는 곧 되돌아 나왔어요.
에바 부인,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제게 말씀해주실 수는 없으세요?”
그녀는 손등으로 이마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세요, 싱클레어. 아무 일도 없으니까요.
그 애는 명상에 잠겨 있는 거예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녀는 일어서서 막 비가 내리기 시작한 정원으로 나갔다.
나는 함께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거실 안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정신을 혼미스럽게 만드는 히아신드의 꽃향기를 맡기도 하고,
문 위에 걸린 나의 새 그림을 쳐다보기도 하며서
오늘 아침 이 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상스러운 그림자를 답답하게 호흡했다.
이것이 무엇일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에바 부인은 곧 되돌아왔다.
빗방울이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에 방울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녀에게 몸을 굽히고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에

입을 맞추었다.
나에겐 그 물방울이 눈물 같은 맛으로 느껴졌다.
”그에게 가 보고 올까요?”
나는 소곤거리는 낮은 어조로 물었다.

그녀는 연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린애 같은 짓 마세요, 싱클레어!”
그녀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깃든 마력을 깨뜨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크게 나무랐다.
“지금은 가세요. 나중에 다시 오세요. 지금은 당신과 아무런 이야기도할 수가 없군요.”

나는 그 집에서 나와 시내를 지나 산으로 달려갔다.
흩날리는 가는 빗방울이 나를 향해 다가왔고
구름은 무엇엔가 억눌린 듯 겁을 집어 먹은 것처럼 나지막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래쪽에서는 바람이라곤 거의 불지 않았지만
높은 곳에서는 폭풍이 일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잠시 동안 태양이 강철 같은 잿빛 구름 사이로
파리하게 때론 눈부시게 얼굴을 내밀곤 하였다.
그때 하늘에서는 누런 구름이 뭉게뭉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구름이 잿빛의 벽에 걸리고 몇 초 동안 바람이
이 누런 구름과 잿빛 하늘로 하나의 형상을, 한 마리의 거대한 새의 형상을 만들었다.
이 새는 푸른 혼돈으로부터 뛰쳐나와서는 훨훨 날개를 치면서 하늘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나자 폭풍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리고 비가 우바과 뒤섞여 쏟아졌다.
짤막하지만 엄청나게 무서운 천둥소리가 빗발에 얻어맞은 풍경 위에서 울려왔다.
그러더니 곧 다시 햇살이 비쳐들고 갈색의 숲 너머에 있는
가까운 산 위에 희미한 눈이 어슴푸레 비현실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가 흠뻑 젖은 채 마에 밀려서 몇 시간 후에 되돌아오자
데미안이 손수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자기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실험실에는 가스 불이 타고 있었고 종이가 사방에 흩어져 있어
그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 볼 수 있엇다.
”앉게.” 그는 의자를 권했다.
“자네는 피곤할 거야. 지긋지긋한 날씨야.
자넨 바깥에서 몹시 헤맨 모양이군, 곧 차를 가져 올 거야.”
”오늘은 무슨 일이 있는 것이군.”

나는 주저하면서 말했다.
“그저 약간 뇌우가 친 것만은 아니지!”
그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자넨 무엇을 보았나?”
”응, 구름 속에서 잠깐 동안이지만 하나의 형상을 보았다네.”
”무슨 형상을?”
”한 마리의 새였어.”
”그 새매? 그것이었나? 자네의 꿈의 새 말이야?”
”응, 내 새매였어. 그것은 누렇고 굉장히 컸었네 곧 검푸른 하늘로 날아들어가버렸다네.”

 

데미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늙은 가정부가 차를 가져왔다.
”자, 싱클레어, 차를 들게. 나는 자네가 그 새를 우연히 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우연히? 그런 것을 우연히 볼 수가 잇을까?”
”그렇지, 우연히 볼 수는 없겠지.
그것은 무엇인가 의미하고 잇을 거야.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나”
”아니, 나는 다만 그것이 변화를, 운명의 한 걸음을 뜻한다고 느낄 뿐이네.
나는 그것이 우리들 모두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네.”
그는 성급한 걸음으로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운명의 한 걸음이라고!”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똑같은 꿈을 나도 꾸었다네,
어머니도 어제 똑같은 것을 의미하는 예감을 느끼셨다고 하시더군
나는 사다리를 타고 어떤 나무 줄기엔가 탑엔가에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네.
내가 위에 올라가서보니까 그곳은 넓은 평야였는데,
온 나라가, 도시나 마을 할 것 없이 모두 불타고 있는 것이었어.
나는 아직 전부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네.
아직도 도든 것이 뚜렷하게 파악되진 않으니까.”
”자네는 꿈을 자네와 관련시켜서 해석하나?”

나는 물었다.
”나와 관련시켜서? 그야 물론이지.
자기와 관련되지 않는 꿈을 꾸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그렇지만 그 꿈은 나 혼자에게만 관련된 것은 아니었네.
거기에 대해선 자네 말이 맞아.
나는 자기 자신의 영혼의 동요를 보여주는 꿈과 매우 드물긴 하지만
온 인류의 운명을 암시해주는 꿈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다네.
물론 그런꿈은 드물게밖에 꾸지 않네만.
그것이 예언이고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꿈은
아직 한 번도 꾸어 본 적이 없다네.
그런꿈은 해석이 너무 애매하지.
그렇지만 나에게만 관계되는 것이 아닌
어떤 꿈을 꾸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네.
다시 말하자면 그 꿈은 과거에도 여러 번 꾸어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옛날의 다른 꿈에 속해 있는 것이네.
이 꿈들은 싱클레어,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겠지만
그것들에게서 내가 예감을 얻고 있는 그런 꿈들이란 말일세.
우리들의 세계는 정말 부폐되어 있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멸망이나 또는 그와 비슷한 일을 예언할 근거가 될 순 없는 거지.
그러나 나는 여러 해 전부터 그것들로부터
이 세계의 붕괴가 다가오고 있다고 결론지우거나,
느끼거나, 혹은 자네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도 좋네만,
하여간 그와 같은 것을 느끼는 그런 꿈을 꾸어왔다네.
그것은 처음에는 아주 약하고 아슬아슬한 예감이었지만
갈수록 뚜렷하고 강해지는 것이었네.
아직도 나는 나와도 관련이 있는 어떤 크고 무서운 것이
다가오고 있다 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
싱클레어, 우리들이 여러 번 이야기했던 일을 우리는 경험하게될 걸세!
이 세계는 스스로 혁신하려 하고 있는 것이라네.
죽음의 냄새가 나네. 죽음 없이는 어떠한 새로운 것도 올 수 없는 법이니까.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한층 몸서리처지는 일이로군.”

나는 깜짝 놀라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 꿈의 나머지 부분을 내게 이야기해줄 수는 없겠나?”
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부탁했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수 없다네.”

문이 열리고 에바 부인이 들어왔다.
”여기에 같이 있었군! 설마 슬퍼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녀는 다시 싱싱해져서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은 어머니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아이에게 다가오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우리들에게로 왔다.
”우리는 슬퍼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
우리는 그저 이 새로운 표지에 대해 좀 추측해보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물론 그것엔 아무런 표지도 안 붙어 있어요.
오려고 하는 것은 갑자기 오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결국은 알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러나 나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작별을 고하고 혼자 거실을 지날 때 풍겨온 히아신드의 향기가
시들고 무미한 죽음의 냄새처럼 느껴졌다.
한 자락의 그림자가 우리들을 덮쳐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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