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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종말의 발단 <끝>

오늘의 쉼터 2015. 1. 10. 11:54

제 8 장 종말의 발단

 


(1) 


여름 학기 동안에도 H시에 머무르고 싶다는 나의 뜻은 관철되었다.
집 안에 있는 대신 우리는 거의 언제나 시냇가에 있는 정원에 나와 있었다.
씨름에 완전히 진 일본인은 가버렸고 톨스토이 신봉자도 오지 않게 되었다.
데미안은 말이 한 필 있었는데, 매일같이 꾸준히 그것을 탔다.
나는 종종 그의 어머니와 단둘이 있었다.
때때로 나는 이러한 내 생활의 평화스러움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고독하게 지내는 것과 단념하는 것과
나의 고로움과 싸우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H시에서 지낸 이 수개월이 내게 있어서는 마치 안락하고 황홀하게,
단지 아름답고 유쾌한 사물과 감정 속에서만 살아도 좋은
어떤 꿈의 섬에서 보내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새롭고 보다 더 높은 공동체의 전조임을 예감했다.
그러나 자주 이 행복감에도 깊은 비애가 엄습해왔는데
그것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풍성함과 안락함 속에서 살아가도록 태어나지는 않았던 것이었고
내겐 고뇌와 광분이 필요한 것이었다.
어느 날이고 나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영상에서 잠을 깨어,
단지 고독이나 싸움만이 있을 뿐 아무런 평화도 공존도 없는 그런
다른 사람들의 차가운 세계 속에 다시금 혼자 서 있게 되리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런 생각을 한 뒤부터 나는 아직 나의 운명이
아름답고 고요한 풍경 속에 머물러 있음을 기뻐하며
갑절의 애정으로 애바 부인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여름의 몇 주일은 황급히, 너무도 쉽게 지나 갔다.
학기도 벌써 끝나가고 있었다.
머지않은 이별이 목전에 다가와 있었지만 나는 이별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그 일은 생각조차도 하지 않으려들며
꿀이 있는 꽃에 나비가 집착하듯이 그렇게 이 아름다운 날들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것은 행복의 시절이었고, 내 인생의 최초의 충족이었으며 공동체에의 가입이었다--
-다음에는 무슨 일이 올 것인가?
나는 또다시 싸워야 하고, 동경에 괴로와하고, 꿈을 꿀 것이며, 고독해질 것이었다.

이러한 날들 중의 어느 날 이러한 예감이 몹시 강렬하게 나를 엄습해왔다.
동시에 에바 부인에 대한 나의 사랑이 갑자기 고통스럽게 불타올랐다.
가슴이 저려 왔다. 머지않아 나는 그녀를 보지도 못하고,
집안을 거니는 그녀의 확고하고도 다정한 발걸음 소리를 듣지도 못하며
내 책상 위에서 그녀가 준 꽃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얻었던가?
그녀를 얻는 대신 그녀를 얻으려 싸우기만 하고,
여원히 그녀를 나의 것으로 빼앗는 대신 꿈을 꾸었고,
안락에 내 몸을 맡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까지 그녀가 나에게 이야기한 진정한 사랑에 대한 온갖 말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련된 경고의 말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벼운 유혹,
혹은 약속 같은 것들이 불현듯 뇌리에 되살아났다---
나는 그것들로써 무엇을 이룰 수가 있었던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내 방의 한복판에 서서 나는 내 온 의식을 집중하여 에바 부인을 생각했다.
나는 그녀로 하여금 나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그녀를 나에게 끌어당기기 위해 내 온 영혼의 힘을 집중시키려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로 와야 하며, 나의 포옹을 열망하여야 하며
나의 입맞춤이 그녀의 성숙한 사랑의 입술을 탐욕적으로 헤쳐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선 채로 손가락과 발이 차가와질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힘이 내게서 빠져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잠시 동안 무언가 밝고 차가운 것이 나의 내부에 단단하게 응어리졌다.
나는 잠깐 동안 가슴 속에 한 개의 수정을 품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다
나는 그것이 나의 자아임을 알았다.
냉기가 가슴까지 올라왔다.
내가 그 무서운 긴장에서 깨어나자 나는 무엇인가가 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죽을 지경으로 피로했다.
그러나 불타오르듯이 황홀하게도
에바 부인이 방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때 기다란 거리에 말발굽 소리가 울려왔다.
그것은 아주 가까이에서 요란스럽게 들리더니 갑자기 멈췄다.
나는 창가로 뛰어갔다. 데미안이 말에서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래로 내려갔다.
”무슨 일인가, 데미안? 설마 자네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는 내 말을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매우 창백해 보였으며, 땀이 그의 이마에서 양쪽 볼 위로 흘려내리고 있었다.
그는 잔뜩 열이 올라 있는 말의 고삐를 정원의 울타리에 매고는
나의 팔을 잡고 거리로 내려갔다.
”자네도 벌써 무엇인가 알고 있는 건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데미안은 나의 팔을 꽉 눌러쥐고
어둡고 동정적이면서도 이상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봐. 이제 터졌다네.
자네도 물론 러시아와의 긴박한 긴장상태를 알고 있었겠지만---.”
”뭐라고, 전쟁이 일어났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아주 낮은 어조로 말했다.

”아직 정식으로 선전포고가 된 건 아니야. 하지만 전쟁이야.
내 말을 믿게. 나는 그날 이래로 이 문제를 갖고 자네를 괴롭히진 않았었지.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세 차례나 새로운 징조를 보았다네.
요컨대 그것은 세계의 몰락도 아니고, 지진도 아니며,
혁명도 아닌 걸세. 전쟁이 일어나는 거야.
자네는 사태가 어떤 결과을 초래하게 될지를 볼 수 있을 걸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기쁨이 될 걸세.
벌써 지금도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난 것을 기뻐하고 있다네.
그들에겐 생활이 그렇게도 무미해졌단 말일세---
하지만 싱클레어, 자네는 이것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걸세.
모르긴 하지만 대전쟁, 굉장한 대전쟁이 될 걸세.
하지만 그것도 역시 단순한 시작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네.
그 새로운 것이란 낡은 것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질겁할 일이 되겠지만. 자네는 어떻게 하려는가?”
나는 낭패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내게는 낯설고 아직도 사실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나는 모르겠네---자네는?”
그는 어깨를 움찔했다.
”동원 당하게 되면, 나는 곧 입대하겠네. 나는 소위라네.”
”자네가? 그런 줄은 조금도 모르고 있었네.”
”그렇겠지. 그건 나의 적응의 하나지. 자네도 잘 알겠지만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언제나 올바르기 위해서 좀 과다한 일을 해왔던 것일세.
나는 일주일 내로 전쟁터에 가게 되리라고 생각하네만---.”
”제발---.”
”이봐, 이 일을 감상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네.
물론 살아 있는 사람에게 발포를 명령한다는 것은
내게도 조금도 재미나는 일이 아닐 걸세.
하지만 그것은 전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네.
이제 우리들 모두는 커다란 수레바퀴 속에 휩쓸려 들어가게 될 걸세.
자네도 마찬가지겠지. 자네도 필경 징집당하게 될 거야.”
”그럼 자네 어머니는, 데미안?”

이제서야 비로소 나는 불과 십 오 분 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세상은 얼마나 변해버렸는가!
그 감미롭기 그지없는 영상을 불러일으키려고
나는 온 영혼을 모우고 있었던 것인데 지금 운명은
새로이 위협적인 무서운 가면 뒤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 말인가?
아,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네.
어머니는 믿을 만한 분이니까. 오늘날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말이네. -
--자네는 어머니를 그렇게도 사랑하는 건가?”
”자네도 그것을 알고 있었군, 데미안?”
그는 밝고 아주 활달하게 웃었다.
”이 어린 친구야! 물론 그걸 알고 있었지.
나의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서 에바부인이라고 부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네.
그런데 어땠나? 자네는 오늘 어머니나 나를 불렀지, 그렇지 않나?”
”그래, 불렀었네‥‥‥.
나는 에바 부인을 불렀네.”

 

”어머니는 그걸 감지하셨다네.
어머니가 갑자기 나더러 자네에게 가 봐달라고 부탁하시더군.
그때 마침 러시아에 관한 소식을 이야기하고 있던 참이었네.”

우리는 되돌아서 걸었고 이미 할 말이 거의 없었다.
그는 자기의 말을 풀어서 올라탔다.
이층의 나의 방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나는 데미안이 전해준 소식에 의해서,
아니 그 이전의 긴장에 의해서 내가 얼마나 기진맥진해 있는가를 느꼈다.
하지만 에바 부인은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나는 마음속의 생각만으로 그녀에게 도달했던 것이다.
그녀가 직접 와주었더라면‥‥‥. 오지 않았다 해도---
이 모든 것은 얼마나 기이한 일인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 것인가!
이제는 전쟁이 일어난 것이었다.
우리가 자주 이야기했던 바로 그 일이 시작되리라는 것이었다.
데미안은 그것에 대해 그리도 많이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의 조류는 이미 그 어느 곳에선가부터 우리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우리의 가슴 한복판을 뚫고 흘러가고
모험과 거친 운명이 우리를 부르고 있으며
지금이 아니라도 불원간 세계가 우리를 필요로 하고
스스로 변화되고자 하는 순간이 오리라는 것은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데미안이 옳았다.
그것을 감상적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다만 이상한 일은 이제 내가 그렇게도 고독하게 염원해왔던
‘운명이라는 문제를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아니 오 세상과 더불어 함께 경험해야 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좋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 저녁 무렵 시내를 걸어가자니
거리는 구석구석 흥분으로 들끓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전쟁’이라는 말밖에는 들려오는 것이 없었다.

나는 에바 부인의 집으로 가서 정원의 정자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내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전쟁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내가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에바 부인이 내게 말했다.
”친애하는 싱클레어, 당신이 오늘 나를 부르셨지요.
왜 내가 직접 가지 않았는지를 잘 아시겠지요.
그러나 이걸 잊지 마세요. 당신은 이제 부르는 법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 언제든지 표지를 지닌 누군가가 필요하게 될 때는 다시 부르세요!”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는 정원의 황혼 속으로 걸어나갔다.
잠잠한 나무들 사이를 이 신비에 찬 여인은 아주 당당한 걸음으로 지나갔고
그녀의 머리 위에는 뭇별들이 조그맣게, 조용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이야기의 끝이 가까워졌다.
사태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곧 전쟁은 시작되었고 데미안은 은회색의 군복을 입고
이상스레 낯선 모습으로 떠나갔다.
나는 그의 어머니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그녀와 작별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내 입에다 입을 맞추고 잠시 동안 나를 가슴에 끌어안아주고는
불타는 큰 두 눈으로 나의 눈을 바싹 들여다보았다.
모든 사람들은 형제와도 같았다.
그들은 조국과 명예를 생각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한 순간 들여다본 운명의 가리지 않은 얼굴에 불과했다.
젊은 사람들은 병영에서 나와서 기차를 탔고
그 많은 얼굴들 위에서 나는 하나의 표지를 보았다-
--그것은 우리들의 표지가 아니라---
사랑과 죽음을 의미하는 아름답고 고귀한 표지였다.
나도 역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포옹을 당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흔현히 그것에 응답했다.
그들이 그런 짓을 하는 심정은 단순한 도취일 뿐이지 운명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흥분은 신성했는데 그것은
모두가 운명의 눈에 잠깐 동안의 도취된 시선을 던진 데서 기인된 것이었다.

내가 전쟁터에 왔을 때는 거의 겨울이 다가와 있었다.
처음에 나는 끊임없는 사격의 느낌에도 불구하고 만사에 대해 다소 실망했다.
옛날에 나는 인간이 왜 그렇게 드물게 밖에는
하나의 이상을 위하여 살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았다.
물론 그것은 개인적이거나 자유롭거나 선택된 이상일 수는 없었고
공통적이고 떠맡겨진 이상임에 분명했다.

 


(2)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내가 인간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공통적인 위험이 그들을 획일화시켰다 하더라도,
살아있는 사람들이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이거나
대단히 훌륭한 태도로 운명의 의지에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많은 사람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공격할 때뿐 아니라
다른 때에도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으며
터무니없이 거대한 것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보여주는
겸허하고도 아득한, 다소는 홀린 듯한 시선을 갖고 있음을 보았다.

 설령 이들이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바를 믿고 있고 그렇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며
그들은 소용에 닿는 사람들이었던 것이고 그러한 그들에게서 미래는 형성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가 전쟁과 영웅주의를,
명예나 그밖의 낡아빠진 이상을 완고히 고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표면적으로는 인간성의 모든 음성이 멀리서 들릴 듯 말 듯 울리면 울릴수록,
이 모든 것은 마치 전쟁의 외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 대한 질문이
단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처럼 그렇게 피상적인 것에 불과햇다.
가장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었다.
새로운 인간성과 같은 그 무엇인가가. 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그들 가운데의 대다수가 내 옆에서 죽어갔지만-
--그들은 증오와 분노도, 살륙과 파괴의 감정도
그들의 적에 대해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들에게 있어서 적이란 그 목적과 마찬가지로 매우 우연한 것이었다.
가장 과격한 것조차도 본래의 감정은 적에 대해서 행해진 것이 아니었고
그 피비린내나는 행동은 내심의 방사이며,
새로이 태어나기 위하여 미쳐 날뛰고 죽이고 파괴하고
스스로 죽어버리려고 하는 내부에서 분열된 영혼의 방사에 불과한 것이었다.
거대한 한 마리의 새가 날에서 나오려고 싸우고 있는 것인데
그 알은 이 세계였고 따라서 이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어느 이른 봄날 밤, 나는 우리가 점령한 농가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맥 없는 바람이 우울하게 간간이 불어왔고
플랑드르 지방의 높은 하늘엔 구름덩이가 흩날려가고 있었다.
구름의 뒤쪽 어딘가에 달이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날은 하루종일 왠지 불안했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근심이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나는 그 어두운 전초지에서 이제까지의 내 생활과 에바 부인과 데미안을 열렬히 생각했다.
나는 백양나무에 기대서서 움직이고 있는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몰래 바르르 떨고 있는 하늘의 밝은 빛이 곧 커다랗게 솟아오르는 형상의 행렬이 되었다.
나의 먁박이 이상할 정도로 가냘프게 뛰고
바람과 비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피부의 상태와 선뜻선뜻 느껴지는 내부의 경각성에 의해
나는 지도자가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구름 속에 대도시가 보였고,
그곳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광대한 풍경 속으로 떼를 지어 흩어져갔다.
그들의 한복판에 반짝이는 별을 머리에 단,
산맥처럼 거대하며 에바 부인 같은 표정을 지닌 한 사람의 힘찬 신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모습 속으로 사람들은 마치 커다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빨려 들어가서는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 여신은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여신의 이마 위에 박힌 점이 환하게 빛났다.
마치 꿈이 그 여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신은 두 눈을 감았고 그 커다란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돌연 여신은 아루 날카로운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이마에서 별들이, 수많은 반짝이는 별들이 튀어나오고
그것들은 멋진 활 모양과 반원을 그리면서 어두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그 별들 가운데의 하나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내게 쏜살같이 똑바로 날아오며 나를 찾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것은 굉음을 내며 수없는 불꽃으로 작열했고
나를 솟구쳐 올렸다가는 다시 땅에 내동댕이쳤다.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세계가 내 위에 무너져내렸다.

나는 흙에 뒤덮이고 많은 상처를 입고 백양나무 곁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나는 지하실에 누워 있었고 포탄이 나의 머리 위에서 우르릉거리고 있었다.
나는 화물자동차 안에 누워서 황막한 벌판 위를 덜거덕거리며 지나갔다.
나는 대개 잠을 자고 있었거나 아니면 혼수상태였다.
깊이 잠들면 잠들수록 나는 무엇인가가 나를 끌어당기고 있고,
나는 나를 지배하는 어떤 힘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격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마구간의 짚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몹시 머두워 누군가가 내 손을 밟고 지나갔다.
그러나 나의 내심은 더 계속해서 가려고 애썼다.
한층 더 강력하게 그것은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다시 차 안에 누워 있었고,
그 후에는 들것인지 사다리 위에인지 누워 있었다.
점점 더 강력하게 그 어느 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있음을 느꼈고
마침내 나는 그곳에 가야만 한다는 절박감 외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나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밤이었고, 나는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나는 내 마음속에서 강력한 끌림과 절박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나는 내가 어떤 홀 바닥 위에 잠자리를 펴고 드러누워 있으며
내가 부름을 받은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의 매트리스 바로 옆에 다른 매트리스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그는 몸을 굽혀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위에 표지를 갖고 있었다.
그는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말을 할 수가 없었거나 하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머리 위 벽에 걸린 등불이 그의 얼굴을 비쳐 주었다.
그는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한히 오랜 시간을 그는 끊임없이 내 두 눈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천천히 그의 얼굴을 내 가까이로 가져와
우리는 거의 얼굴이 맞닿을 정도가 되었다.

”싱클레어!~”

그는 거의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눈으로 그에게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거의 동정에 가까운 미소를 지었다.
”꼬마!”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입은 이제 나의 입과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나직이 말을 계속했다.
”프란츠 크로머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 그는 물었다.
나는 그에게 눈을 깜박여 보였다. 미소를 지을 수도 있었다.
”어린 싱클레어, 들어봐! 나는 떠나지 않으면 안 돼.
자네는 아마 언젠가 나를 다시 필요로 하게 되겠지.
크로머나 그밖의 일에 대해서 말야.
그때 자네가 나를 부른다고 해서 나는 이미 그렇게 쉽게
말을 타고 가든지 기타를 타고 가든지 할 수가 없을 거야.
그럴 때에는 자넨 자기 자신의 내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네.
그러면 내가 자네의 내부에 있음을 알게 될 거야. 알겠어?
그리고 조금만 더!
에바 부인이 부탁했어.

만약 자네가 언젠가 나쁜 처지에 있을 때는
그녀가 나에게 주어 보낸 입맞춤을 자네에게 해주도록 말이네
눈을 감게, 싱클레어!”

나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치지 않고 쉴새없이 피가 조금씩 흐르는 내 입술 위에
그가 가볍게 입맞추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다.
붕대를 감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자 나는 빨리 옆의 매트리스로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이 누워 있었다.
붕대를 감는 것은 몹시 아팠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아팠다.
그러나 나는 열쇠를 발견했고,
때때로 어두운 거울 속에 운명의 형상이 졸고 있는 그곳,
내 자신의 내부에 완전히 들어가기만 하면,
나는 단지 그 어두운 거울 위에 몸을 굽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이젠 완전히 데미안과 같은,
내 친구이자 지도자인 데미안과 같은
내 자신의 모습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ㅡ 끝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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