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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야곱의 싸움

오늘의 쉼터 2015. 1. 10. 11:45

제 6 장 야곱의 싸움

 


(1)


내가 그 이상한 음악가 피스토리우스로부터 들은
아프락사스에 관한 이야기는 간단히 되풀이될 수는 없는 성질의 것이다.
오히려 그에게서 배운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로의 길을 한 발자국 내디딜 수 있던 일이다.
당시의 나는 열 여덟 살의 유난스런 젊은이였는데
오만 가지 일에 남달리 조숙해 있으면서도
또다른 오만 가지 일에는 아주 뒤떨어진 채 의젓하지가 못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해보면 어떤 때는
자기가 무척 잘난 것 같은 건방진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의기를 상실한 채 비굴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때론 나는 나 자신을 천재라 여기기도 하다가는
때로는 내가 반쯤은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기도 했다.
요컨대 나는 내 동년배들처럼 즐거움이나 생활을 함께 나눌 수가 없고
때로는 그들과의 사이에 절망적인 격리감을 느끼면서
내 생활이 폐쇄적이라는 것에 대한 깊은 가책과 걱정으로 초췌해지기도 하였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한 기이인 피스토리우스는
내게 자기 자신에 대한 용기와 존경을 간직하라고 가르쳐주었다.
나의 말 속에서, 나의 꿈 속에서, 나의 환상과 생각 속에서
그는 노상 가치있는 어떤 것을 찾아내서는 그것들을 적절하게 해석해주고,
진지하게 논했으며 내게 모범을 보여주었다.

”당신은 언젠가 내게” 그는 말했다.
“’도덕적이 아니기 때문에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소.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 아니오.
하지만 당신 자신이 바로 그 도덕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오!
다른 사람과 당신 자신을 비교하진 마시오.
가령 자연이 당신을 박쥐로 만들었다면 타조가 되려고 애쓰지 말란 말이오.
당신은 번번이 자기를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자신을 자책하고 있소.
그런 생각을 버리시오. 불을 들여다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시오.
그래서 어떤 예감이 당신을 찾아들고 당신의 영혼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그것들에게 당신의 몸을 맡기시오.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지, 혹은 어떤 흠모하는 신의 뜻과 합치되는지를,
그들의 마음에 드는지를 맨 먼저 묻지 마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망하는 거요.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안전한 땅 위를 걷게 되고
그러다가는 화석이되고 마는 거요.
이봐요,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프락사스요. 그는 신인 동시에 악마지요.
그는 자신의 내부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소.
아프락사스는 당신의 생각이나 꿈에 대해서 무슨 이의를 제기하진 않을 것이오.
그것을 결코 잊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당신이 흠잡을 데 없이 모범적인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리면
그는 당신을 버릴 것이오.
당신을 버리고는 자기의 사상을 요리하기 위한 새로운 그릇을 찾아가고 말 것이오.”

나의 모든 꿈들 중에서 그 어두운 사랑의 꿈이 가장 충실했다.
나는 매우 자주 그 꿈을 꾸고 문장의 새 밑을 지나 옛날 우리 집으로 들어갔으며
어머니를 포옹했는데 다시 보면 나는 어머니 대신
키가 크고 반은 남성이며 반은 여성인 어떤 사람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느끼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는 듯한 동경으로 그 여자에게 밀착되고자 애썼다.

나는 이 꿈에 대해서만은 피스토리우스에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온갖 다른 이야기는 그에게 다 하면서도 그 이야기만은 남겨두었다.
그 꿈은 나의 은신처이며, 나의 비밀이며, 나의 피난처였다.
나는 심정이 착잡할 때는 으레 피스토리우스에게
옛날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어스름한 저녁의 교회 안에서 이상스럽게도 친밀하며
자기 자신의 내부에 침잠하여 자기 스스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한
이 음악에 빠져 넋을 놓고 있었다.
그 음악은 항상 나에게 도움이 되었고
영혼의 소리에 정당성을 부여할 준비를 갖추게 해주었다.

풍금 소리가이미 잦아든 뒤에도 우리는 잠시 교회 안에 머물며
희미한 저녁빛이 고딕식 창문을 통해 비치고 있다가
이윽고 사라져버리는 것을 바라보곤 하였다.

”내가 이전에는 신학자였고 하마터면 목사가 되려고까지 했다는 것은”
피스토리우스가 말했다.
“어쩌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그때의 일은 다만 형식에있어서의 착각에 불과한 것이었소.
목사가 된다는 것은 여전히 나의 천직이고 나의 목표요.
단지 나는 너무 일찍 만족했던 것이고
아프락사스를 알기도 전에 여호와에게 몸을 맡긴 거요.
모든 종교는 아름다운 거요. 종교는 바로 영혼인 것이오.
사람이 그리스도교의 만찬을 먹든, 메카로 순례를 가건 그것은 한가지인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말했다.
“진정한 목사가 될 수 있을 텐데요.”
”아니, 싱클레어, 그렇지 않소.
그럼 나는 거짓말을 해야 했을 거요.
우리들의 종교는 마치 종교가 아닌 것처럼 행해지고 있소.
꼭 해야 한다면 나는 아마 가톨릭 교도는 될 수 있을 거요.
하지만 신교의 목사는---안 되지요. 얼마 안 되는 실제적인 신자는---
나는 그런 사람을 알고 있는데---
완강히 문자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오.
그들에게 나는그리스도는 개인이 아니라 신인 동시에 인간이며,
신화이며, 인류가 자기 자신을 영원의 벽에다 그려놓았다고 생각하는
한 장의 거대한 영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시오.
게다가 그밖의 사람들, 현명한 설교를 듣기 위해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무슨 일에든 태만하지 않으려는 등의 이유로
교회에 오는 사람들에게 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소?
그들을 개종시키라고 하고 싶소?
그렇지만 나는 그런 짓을하고 싶지 않은 거요.
목사란 개종시키려는 자는 아닌 것이오.
목사는 단지 신자들 사이에서, 자기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며
그것으로써 우리가 신이라 여기는 감정들을 위한 지지를 표현하고자 할 따름인 거요.”

그는 말을 멈추었다. 잠시 숨을 돌리더니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가 아프락사스라고 이름지은 우리의 새로운 믿음은 아름다운 것이오,
싱클레어. 그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믿음이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갓난애에 불과하지요.
아직 날개도 돋지 않은 거요. 고독한 종교, 그건 아직 진짜가 못되는 거요.
종교란 공통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며, 예배와 도취,
축제와 비법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요.”

그는 자기의 생각에 몰두해 들어갔다.
”그 비법은 단독적으로나 아니면 조그만 단체에서 행해질 수는 없나요?”
나는 주저하면서 물었다.

”그건 될 수가 있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이미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소.
만약 그런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수년쯤은 감화원에 처박히게 될 그런 예배를 행해왔소.
그러나 나는 그것도 진짜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소.”

갑자기 그는 내 어깨를 쳤으므로 나는 놀라 몸을 움츠렸다.
“이봐요!” 그는 성급하게 소리쳤다.
“당신도 역시 비법을 갖고 있소.
당신은 분명히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꿈을 가지고 있을 것이오.
그것을 알려는 건 아니오.
그러나 분명히 말해두지만 당신은 그것을, 그 꿈을 갖고 살아가시오.
그것을 갖고 놀고 그것을 위한 제단을 마련해 주시오!
완전하진 않지만 그러는 것도 하나의 길일 수 있는 거요.
우리들이, 당신과 나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이 세계를 개선할 수 있을지는 장차 알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서
그것을 매일같이 개선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는 의미가 없는 것이오.
생각해보시오. 싱클레어, 당신은 이제 열 여덟 살이오.
당신은 매춘부의 뒤를 따라가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고 보면 당신은 아마 사랑의 꿈이나 사랑의 소원을 갖고 있을 것이 분명하오.
아마도 당신은 그것에 대해 공폴르 느끼고 있겠지.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것이 바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최상의 것일 테니 말이오!
당신은 나를 믿어도 좋소.
나는 당신과 같은 나이 때 나의 사랑의 꿈을 너무 억눌렀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었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요.
아프락사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되는 거요.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영혼이 우리의 내부에서 소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지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요.”

나는 깜짝 놀라 그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마음에 떠오르는 이리라고 해서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닐 텐데요!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요.”

그는 내게 다가섰다.
”형편에 따라서는 그것도 허용될 수 있소. 대개는 착각에 불과하지만,
내 말 역시 당신의 뇌리에 떠오르는 일이라고
무엇이든지 간단하게 해치워버리라는 건 아니오.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당신의 마음에 떠오른 그 자체의 좋은 의의를 가진 어떤 일을 배척한다든가,
그것에 대해 도덕적인 평가를 제시함으로써 그것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요.
자기나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대신
엄숙한 생각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희생의 비법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는 거지요.
물론 그런 행위를 하지 않고서도 자기의 충동과 유혹을
존경과 사랑으로 취급할 수도 있긴 할 거요.
그것들은 자기의 뜻을 나타낼 거요.
그것들은 다 뜻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혹시 당신에게정말로 미친 생각이나 죄를 범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면,
싱클레어, 혹시 당신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진다거나
얼토당토 않은 추잡한 일을 저지르고 싶으면 잠깐 동안이라도
아프락사스가당신의 내부에서 그렇게 공상하고 있다고 생가해보시오!
당신이 죽이고 싶은 어떤 사람은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그의 형상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그것을 미워하는 것이오.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우리를 흥분시키지는 못하는 법이니까 말이오!”

피스토리우스가 이토록 나의 내심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를 가장 강하게, 또는 가장 기묘하게 감동시킨 것은
이 충고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내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데미안의 말과 똑같은 음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피차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지만
그들은 내게 똑같은 소리를 한 것이다.

”우리가 보는 사물이라” 피스토리우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의 내부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오.
우리가 우리의 내부에 갖고 있는 것 이외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오.
그들은 단지 외부의 형상만을 현실이라 여기고
자기의 내부에 들어 있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세계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있는 거요.
그렇게 한다면 행복할 수는 있는 거요.
내가 만일 일단 다른 길을 발견하게 된다면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다라가지는 않을 거요.
싱클레어, 대다수가 가는 길은 편하지만 우리들의 길은 힘든 거요.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갑시다.”

 

며칠 후 두 차례의 기다림이 헛되이 지나간 후
나는 그가 혼자서 술에 만취된 채 차가운 저녁 바람을 맞으며
비틀거리며 거리모퉁이를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를 부르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내 곁을 지나쳤는데
마치 미지의 것으로부터 자기를 부르는 어두운 소리를 뒤따라가는 것처럼
불타는 고독한 시선으로 앞쪽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쯤 뒤쳐져 그를 따라 갔다.
그는 마치 유령처럼, 광신적이지만 다소 흐트러진 걸음걸이로
철사줄에 끌려 가는 것처럼 가고 있었다.

처연한 심정이 되어 나는 집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 꿈의 세계로 되돌아왔다.
”저렇게 해서 지금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세계를 개선하고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생각은 저속하고도 도덕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의 꿈에 대해서 대체 내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렇게 취한 속에서도 내가 불안스럽게 나의 길을 가는 것보다는
훨씬 확실히 그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리라.

수업 시간 사이의 쉬는 시간에 나는 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는 한 동급생이
나에게 접근하려고 애쓰는 것을 가끔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자그만하고 연약해 보이는 야윈 아이였는데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의 가는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그의 시선과 태도에는 무언가 특이한 것이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가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 앞을 지나쳐버리게 내버려두고는 다시 나를 따라와서는
우리 집의 현관 앞에 멈춰서는 것이었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니?” 내가 먼저 물었다.
”난 그저 너와 한 번만이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그는 수줍은 듯이 말했다
. “조금만 함께 걸어줄 수 있겠니?”
나는 그를 따라걸었다.
그가 몹시 흥분한 상태로 기대에 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너는 강신술가지?” 그가 아주 당돌하게 물어왔다.”
”아니, 크나우어.”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절대로 아니야, 어떻게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니?”
’”아니면 접신술가니?”
”그것도 아니야.”
”제발 그렇게 말문을 닫아버리지 말아줘!
나는 네가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지니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어.
너의 시선을 보면 알 수 있어. 네가 신령과 접촉하고 있다고 나는 확신해.
호기심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절대 아니야. 싱클레어,
그런 게 아니야! 내 자신도 일종의 탐구자인걸.
그래서 이렇게 외로울 수밖에 없는 거야.”

”자세히 말해봐.” 나는 그를 격려해주었다.
“난 정말 신령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난 단지 내 꿈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야. 그 점을 네가 느낀 모양이구나.
다른 사람들도 역시 꿈속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그들 자신의 꿈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나와의 차이점이야.”

”그래, 그럴지도 몰라.”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꿈이 무슨 종류의 꿈인가 하는 것만이 문제지.
---너는 선한 악마를 사용하는 마술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니?”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런 건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방법을 배우면 돼.
죽지 않게 될 수도 있고 마술을 부릴 줄도 알게 되지.
넌 한 번도 그런 연습을 해 본 적이 없니?”

이 연습에 대한 나의 호기심어린 질문에 그는
처음에는 대답을 안 할 듯하다가 내가 돌아서서 가버리려고 하자 비로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잠들려고 할때나 정신을 집중시키려고 할 때 그런 연습을 해.
나는 무엇인가를, 예를 들면 낱말 하나나
어떤 사람의 이름이나, 또는 기하의 도형을 상상하는 거야.
그러고 나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집중적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이 내 머리속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내 머리속에다 그려보려고 애쓰는 거야.
그것이 목구명에까지 차오르도록,
그것에 의해 내가 완전히 충만되기까지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러면 나는 아주 확고해지고 아무것도
나의 이 안정된 상태를 방해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나는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얼마쯤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다른 이야기들을 더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이상스러울이만치 흥분되어 있고 성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가 질문을 보다 명확하게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자 그는 곧 자신의 최대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너도 역시 절제하고 있지?” 그는 불안한 어조로 내게물었다.
”그건 무슨 뜻이니? 성적인 것을 말하는 거니?”
”그래, 그걸 뜻해. 나는 지금이 년째 절제하고 있어.
그 가르침을 알게 된 이후로 말야.
너도 이미 알다시피 그 전에는 나도 방탕한 짓을 하고 다녔지.
---넌 한 번도 여자 곁에 가본 적이 없니?”
”없어.” 나는 대답했다
. “내게 알맞은 여자를 발견하지 못했던 거야.”
”그러나 만약 네가 네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한다면
너는 그 여자와 함께 잘 수 있을 것 같니?”
”물론이야. ---만약 여자측에서도 이의가 없다면.”
나는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아, 그렇다면 너는 잘못된 길을 가는 거야!
내적인 힘은 철저한 금욕 상태에서만 지속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거야.
나는 이 년쯤 금욕을 했어. 이 년하고도 일 개월이 좀 넘도록!
그건 매우 힘든 일이야. 번번이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곤 했지.”

”들어봐, 크나우어. 나는 금욕하는 것이
그렇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곤 생각지 않아.”
”나도 알고 있어.” 그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지.
그렇지만 너한테서까지 그런 말을 들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어.
보다 더 높은 정신적인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순결을 지켜야 하는 거야, 무조건 말이야!”
”그래, 그럼 그렇게 하렴!
하지만 나는 왜 자기의 성을 억제하는 사람이
그 어느 다른 사람보다 순결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어.
넌 성적인 것을 모든 생각과 꿈속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2)


”아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밤이면 나는 내 자신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그런 꿈을 꾸곤 해,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야!”

나는 피스토리우스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를 생각해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아무리 옳은 말일지라도
그 이야기를 무작정 전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면,
또 내 스스로가 그것을 준수해볼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다음이 아니면
함부로 충고를 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필사적으로 도움을 구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충고의 말조차 해줄 수 없다는 것에 깊은 굴욕감을 느꼈다.

”나는 온갖 실험을 다 해보았어!” 크나우어는 한탄하며 말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냉수욕도 해보고,
눈으로 몸을 비비기도 하고, 체조와 달리기도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
매일 밤마다 나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할 그런 꿈에서 잠을 깨는 거야.
더욱 두려운 일은 그런 꿈으로 인해 내가 정신적으로 배웠던
모든 것을 차츰차츰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야.
나는 더 이상은 마음을 집중시키거나 스스로 잠들 수도 없게 되어
어떤 때는 하룻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기도 해.
나는 더 이상 이 상태를 지탱하지 못하겠어.
내가 만약 이 싸움을 계속해나가지 못하거나 항복해버려 자기를 더럽히게 된다면
그때는 애당초 한 번도 싸움을 하지 않았던 사람드로다
더 나빠지는 결과가 되고 말 거야. 넌 그걸 이해할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지만 거기에대해서는 한 마디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가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의 깊은 고통과 절망이 나에겐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웠다.
단지 그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만 깊이 인식될 뿐이었다.

”그럼 너는 내게 해줄 말이 한 마디도 없다는 거니?”
마침내 지친 그가 슬픈 듯이 말했다.
”전혀 아무것도 없어?
한 가지쯤은 있을 수도 있을 텐데! 대체 넌 어떻게 하고 있니?”

”난 너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어, 크나우어.
사람이란 이런 경우엔 서로 도울 수가 없어.
나도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은 적이 없거든.
자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그리고는 네 본질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대로 행하면 되는 거야.
다른 방법은 없어. 만일 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찾을 수 없다면
넌 어떤 신령도 발견해낼 수 없으리라는 건 확실해.”
그는 깊은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면서 말을 멈추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갑자기 증오에 불타오르는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이마를 찌푸리며 난폭하게 외쳤다.
“쳇, 넌 정말 근사한 성인군자시군!
너도역시 악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어!
너는 현자인 척하면서 뒤에서는 남몰래 나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쓰레기에 매달려 있는 거야!
너도 역시 돼지야. 내 자신과 마찬가지로 돼지란 말이야.
우리들은 모두 돼지인 거야!”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내버려둔 채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두서너 발자국쯤 나를 따라오더니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뛰어 가버렸다.
나는 동정과 혐오가 뒤범벅이 된 심정으로 심한 구토증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와 조그만 내 방에서 두서너 장의 그림을 주위에 세워놓고
간절한 내심의 동경으로 내 자신의 꿈에 몸을 맡기기까지
이러한 심정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곧 나의 꿈이, 집의 문과 문장,
어머니와 낯선 여인에 관한 나의 꿈이 다시 나타났다.
나는 그 여인의 표정을 너무나 생생히 느끼고는
당자에 그 여인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십 오 분씩 꿈속에 잠겨서 무의식중에 시간을 보낸 후
그림을 그려나가 마침내 며칠 후 그 그림이 완성되자
나는 저녁 무렵 그것을 내 방의 벽에다 붙이고
탁상용 램프를 그 앞에 옮겨다 놓고는 생사를 결판낼 때까지
싸워야 할 유령에게 대적하는 심정으로 그 그림 앞에 다가섰다.
그 얼굴은 옛날의 초상과도 닮았고 나의 친구 데미안과도 닮았으며
몇몇 표정은 내 자신과도 닮아 있었다.
한쪽 눈은 표시가 날만큼 다른 눈보다 위쪽에 붙어 있었고
눈매는 숙명에 충만된 채 내 머리 너머를 골똘히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 그림과 마주서자 내면적인 긴장으로 가슴속까지 써늘해져 왔다.
나는 그 그림을 향해 말을 걸었고, 비난했고,
어머니라 불렀고, 애인이라보 불렀으며
매춘부이며 천한 여자라고 불렀고 또 아프락사스라고도 불렀다.

그러는 동안 피스토리우스의 말이---
혹은 데미안의 말이었던가? 언뜻 생각났다.
언제한 말인지는 기억해낼 수가 없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을 다시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야곱과 신의 천사 사이의 싸움에 관한 말로서
“그대 나를 축복치 않는다면 내 그대를 놓아주지 않으리로다”라는 것이었다.

그림 속의 얼굴은 램프의 불빛을 받으며 내가 부를 적마다 변화했다.
그것은 환하게 빛나기도 하고, 검고 어둡게 변하기도 했다.
생기없는 눈으로 창백한 눈꺼풀을 감았다가는 다시 뜨고,
그러다가는 타는 듯한 광채로 눈을 빛내기도 했다.
그 얼굴은 여자였고 동시에 남자였으며 소녀였고 조그만 아이였고 짐승이었다.
몽롱하게 반점처럼 보이다가는 다시 크고 분명하게 되기도 했다.
마지막에 나는 강력한 내부의 부름에 따라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그림이 나의 내부에서 한결 더
강하고 힘찬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자신의 내부에 너무나도 깊이 들어 있었으므로
마치 그것이 온통 내 자신이 되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아서
그것을 나에게서 분리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봄의 폭풍과도 같이 어둡고 무겁게 들끓는 소리가 들려왔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과 새로운 체험의 감동에 몸이 떨려왔다.
별들이 내 앞에서 명멸해갔고 잊어버린 유년 시절의, 아니,
존재 이전의 시기와 생성의 초기적 단계에까지 이르는 추억이
나의 곁을 밀치고 또 밀치면서 스쳐갔다.
내 생활의 모든 것은,
가장 은밀한 비밀에 이르기까지도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이던 추억은,
어제와 오늘로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앞선 미래를 반영하고
오늘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더 새로운 생활의 형식으로 나를 이끌어갔다.
그 형식의 형상은 굉장히 맑고 눈 부실 정도였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정확히 기억해낼 수 없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보니 나는 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불을 켜고 중요한 걸 생각해내야 한다고 느꼈지만
몇 시간 전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그림을 찾았지만
그것은 이미 벽에도 걸려 있지 않았고 책상 위에도 없었다.
희미하게나마 그것을 내가 태워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났다.
그것은 내 손바닥 위에서 태워 그 재를 먹어버린 것은 혹시 꿈이었을까?
크고 쑤시는 듯한 불안이 나를 몰아세웠다.
나는 모자를 쓰고 집과 골목 사이를
무엇엔가에 강요당하고 있는 것처럼 걸어갔다.
폭풍에 휘몰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리를 지나고 광장을 가로질러 달리고 또 달렸다.

피스토리우스의 그 음침한 교회 앞에서 귀를 기울이다가
무엇을 찾는지조차도 모르면서
어두운 충동을 감당할 길이 없어 다만 찾고 또 찾았다.
나는 매춘부들의 집이 모여 있는 교외를 통과했다.
그곳에는 아직도 여기저기 불빛이 남아 있었다.
멀리 외곽으로는 신축 가옥과 벽돌더미가 군데군데 잿빛의 눈에 뒤덮여 있었다.
마치 몽유병자처럼 낯선 압박감에 몰려 이 황량한 곳을 헤매면서
나는 문득 고향의 신축 가옥이 생각났다.
그곳은 언젠가 한 번 나의 착취자 크로머가
최초의 거래를 하기 위해 나를 끌고 들어간 곳이었다.

그와 비슷한 느낌의 집 한 채가 잿빛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문구멍이 나를 향해 꺼먼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고
그것을 피하려다 모래와 자갈 더미에 걸려 비틀거렸다.
그러나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더 강렬했으므로
그 문을 들어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널빤지와 바스러진 벽돌을 넘어 내가 이 황막한 공간 속으로 휘청거리며 들어서자
축축한 냉기와 돌 냄새가 음산하게 코를 찔렀다.
모래 한 무더기가 마치 잿빛의 얼룩처럼 눈에 띄는 외에는
모든 것이 어둠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내 곁의 어둠 속에서
사람이 하나, 조그맣고 야윈 청년이 하나 유령처럼 일어섰다.
나는 그가 학교 친구인 크나우어임을 곧 알 수 있었지만
머리칼은 여전히 두려움에 곤두서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흥분한 나머지 정신이 산란해진 것 같은 어조로 그가 물었다.
“어떻게 나를 찾을 수 있었어?”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를 찾았던 게 아냐.” 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말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몹시 힘들어 목소리는 생기가 없고
무거운, 얼어 붙은 것 같은 입술에서 간신히 새어나왔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찾았던 게 아니라고?”
”그래, 끌려 들어온 거지. 네가 나를 불렀니? 틀림없이 네가 불렀을 거야.
도대체 넌 여기서 무얼 하는 거니? 지금은 한밤중인데.”
그는 야윈 두 팔로 나를 발작적으로 끌어안았다.
”그래, 밤이야. 곧 아침이 되겠지.
오, 싱클레어. 나를 잊고 있었던 게 아니었군! 나를 용서해줄 수 있겠지?”
’대체 무엇에 대해서?”
”아, 나는 정말 추악했었어.”

이제서야 겨우 우리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그것이 네댓새 전이었던가?
내겐 그 일 이후에 벌써 한평생이 지난 것처럼 생각되었다.
지금에야 나는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뿐 아니라, 왜 내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인지,
크나우어가 이런 위험스런 곳에서 무얼 하려고 하였는지도.
”너는 자살하려고 했었구나, 크나우어?”
그는 추위와 공포에 몸서리쳤다.
”그래, 그러려고 했어. 할 수 있었을는지는 모르지만
난 아침이 될 때까지 여기 있으려고 했어.”

나는 그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하루를 시작하려는 옅은 빛이 말할 수 없이 차갑고 냉랭하게
잿빛의 대기 속에서 희미하게 비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꼭 잡은 채 상당히 멀리까지 걸어나갔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
그리고 누구에게도 오늘 일을 말해선 안 돼!
나는 잘못 된 길을 걸었던 거야. 잘못된 길일 뿐이야!
우리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두 돼지는 아니야.
우리들은 인간이야. 우리는 여러 신을 만들어내고
그들과 더불어 싸우고신은 우리를 축복해주는 거야.”

우리는 서로 아무 말이 없이 묵묵히 걷다가 헤어졌다.
집에 들어오자 날이 희뿌연히 새어왔다.
성○○시에서의 그 시절 동안 내가 가진 최선의 것은
피스토리우스와 함께 풍금 옆인 난로 앞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우리는 아프락사스에 관한 그리스어의 원서를 함께 읽었고,
그는 베다에서 번역된 몇 귀절을 내게 읽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신성한 ‘옴’을 부르는 법도 배웠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나의 마음을 이끈 것은
그의 해박성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것이었다.
나에게 유익했던 것은
내가 내 자신의 내부를 발견해내는 일이 현저히 발전된 것이었으며
내 자신의 꿈과 사상과 예감에 대한 믿음이 커진 것이었으며,
나의 내부에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일이었다.

 

피스토리우스와 나는 어떤 식으로든지 호흡이 잘 맞았다.
단지 강력하게 그를 생각하기만 하면,
언제나 그가 오거나 아니면 그의 안부가 전해지곤 했다.
나는 데미안에게 했던 것처럼
그가 내 곁에 없어도 무엇이건 그에게 물어볼 수가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똑똑학 강렬한 사상으로 질문을 그에게 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질문에 집중되었던 내 영혼의 힘이
대답을 가지고 내 마음속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내가 마음속에 그렸던 것은
피스토리우스나 데미안이라는 어떤 특정 인물이 아니라,
내가 꿈에서 만나는, 내가 그렸던 그 초상이었으며
내가 강렬히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내 영혼의 반은
남자이며 밤는 여자인 꿈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이미 단지 나의 꿈 속에서 존재하거나
종이 위에 그려진 초상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 바라는 모습으로, 내 자신의 고양된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자살 미수자 크나우어는 내게 기이하고도 어떻게 보면 우스운 관계를 맺어놓았다.
내가 그에게로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그날 이후로
그는 충실한 하인이나 심지어는 개처럼 나에게 매달려서
자기의 인생을 나와 결부시키려고 애쓰면서 맹목적으로 나를 추종했다.
괴상한 질문이나 소원을 갖고 나를 찾아와서는
유령을 보여달라고 한다든가 카발라 비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내가 그러한 것에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그는 곧이듣지 않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내가 온갖 힘을 다 갖고 있다고 믿는 지경이었다.
한 가지 이상스런 일은 내가 내 마음속에서 엉켜져 있는 어떤 일을
풀지 않으면 안 될 때 그가 자주 나에게
기묘하고도 어리석은 질문을 가지고 찾아옴으로써
그의 변덕스런 생각이나 관심거리가
나의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때론 그가 몹시 귀찬아져서 위압적으로 쫓아버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보내어진 사람이었고,
내가 그에게 준 것이 그의 마음속에서 갑절이 되어 내게 되돌아왔으며,
그 역시 내게 있어서 한 사람의 지도자이거나 길이라는 것이 깊이느껴졌다.
그가 내게 가져오는, 그가 그 속에서 자기 구제의 길을 찾는
얼빠진 책이나 저서도 당장데 깨달을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나에게 깨우쳐주었다.

크나우어는 후일, 감회없이 나의 길에서 떨어져나갔다.
그와는 싸움이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피스토리우스와는 싸움이 필요했다.
성○○시에서의 내 학창 시절이 끝나갈 무렵
피스토리우스와 이상야릇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평생에 한 번이나 볓 번쯤은
독실과 감사와 미덕과 아울러 갈등에 빠져드는 것을 피할 수 없는 때가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은 아버지와 스승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걸음을
떼어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설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참아낼 수가 없어서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순간의 고독의 쓰라림을 조금쯤은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나의 경우, 아버지와 그들의 세계 즉 유년 시절의 ‘밝은 세계’로부터
나는 맹렬한 싸움을 하며 헤어져나온 것이 아니라
서서히 거의 눈치채이지 않게 떨어져나왔고 낯설게 되어갔었다.
나는 그것이 몹시 유감스러웠고 때로 고향에 돌아가면
아주 쓰라린 심정이 되곤 하였다.
그러나 그 심정은 아주 가슴속 깊이 뼈저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참을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인 습관에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충동에서 애정과 공경심을 바쳤을 때,
우리가 독자적인 마음으로 귀의자나 친구가 되었을 때---
만약 어느 순간에 우리 마음의 큰 부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떠나려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쓰라리고 무서운 일이다.
그런 때는 친구와 스승에게 반발하는 모든 사상이 독이 묻은 가시를 드러내며
우리 자신의 마음을 향해서 돌아오는 법이고,
그것을 막으려는 노력에서 오는 온갖 타격은
자기의 얼굴에 정통으로 명중하는 법이다.
그때에 적절한 도덕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온 사람은
‘배신’과 ‘배은망덕’이란 단어가
창피스런 부름이나 낙인처럼 의식에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놀란 마음은 근심스러워하면서
유년 시절의 미덕의 사랑스런 골짜기로 숨어들지만 곧 이것과도 단절되어버리며
이 유대조차도 갈기갈기 찢기어져나간다는 것을 애써 믿으려 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나의 내부의 어떤 감정이
피스토리우스를 그렇듯 무조건 지도자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거역하기 시작했다.
나의 청춘 시절의 가장 중요했던 몇 달간의 체험은
그와의 우정, 그리고 충고, 그의 위로, 그와의 친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를 통해서 신은 나에게 이야기를 걸어 왔던 것이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의 꿈은 다시 나에게 돌아왔고,
해석되었고, 그리고 그 본질을 드러내었다.
그는 내 자신의 용기를 내게 주었다.
---아, 그런데 나는 지금 그에게 서서히 반항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서 너무 많은 교훈적인 부분에 대해 반감을 가졌고
그가 단지 나의 일부분만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의 관계에서 싸움이나 사소할지라도 다툼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불화나 어떤 절교의 형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사이의 환상이
무늬진 파편으로 산산조각이 난 순간이 있었다.
벌써 얼마 동안 희미한 예감으로 나를 압박하던 어떤 감정이
어느 일요일 그의 낡은 서재에서 뚜렷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난로 앞의 방바닥에 누워서 그는 그가 연구하고 있으며 그
겻에 대해 명상하고 그것의 가능한 미래에 관한 기대로
심취해 있는 비법과 종교 형식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살아감에 있어서의 중대한 일이라기보다는
단지 기묘하고 흥미로운 호사거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고,
박식의 음향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고,
지난 시대의 폐허 아래서의 고달픈 탐구의 음향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불현듯 나는 이 모든 방법에 대해,
이 비법의 예배에 대해, 이 조상 전래의 종교 형식과
그것을 재조립해 내는 일에 대해 커다란 반감을 느끼게 되었다.

 

 

(3)


”피스토리우스!”
내가 듣기에도 의아스러울이만큼 놀랄 정도로
치밀어오르는 악의를 품은 어조로 나는 말했다.
“내게 다시 한번 당신이 꾼 꿈의 이야기를, 실제의 꿈 이야기를 해주시오.
당신이 말하는 것들은 모두 너무나 곰팡이 냄새가 난단 말이오!”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그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말을 내뱉은 그 순간 나는 내가 쏘아 그의 심장에 명중시킨 그 화살이
바로 그의 무기창에서 얻어온 것임을
그가 이따금 내게 하던 풍자적인 어조의 자기 비난을
지금 내가 더욱 날카롭게 갈아서 되던진 것임을
창피스러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심정으로, 번갯불처럼 선명하게 느꼈다.

그 또한 그것을 순간적으로 느끼고는 곧 조용해졌다.
나는 불안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심정으로
그가 무섭도록 창백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오랜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새 장작을 불에 던지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아주 정당하오, 싱클레어.
당신은 정말 영리한 친구요.
난 다시금 그놈의 곰팡내나는 일을 갖고 당신을 괴롭히지 않겠소.”

그는 매우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입은 상처의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알 수가 있었다.
나는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용서를 빌고 나의 애정에 넘치는 감사를 다짐하려고 했다.
간절한 말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엎드린 채 불을 들여다 보고 아무 말 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그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저 엎드린 채 불을 들여다 보고 아무 말 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그 역시 아무 말이 없었고, 그렇게 우리들은 엎드려 있기만 했다.
불은 다 타서 사위어들기 시작했고
불꽃이 사그라들 때마다 나는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무엇인가 아름답고 친밀한 것들이 식어가고 사라져감을 느꼈다.

”당신이 내 말을 오해하지나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나는 압박감으로 메마르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 어리석고 무의미한 말이 마치 신문소설을 낭독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당신을 아주 정확히 이해하고 있소.”
피스토리우스는 나직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신이 옳은 거요.” 그
는 말을 멈추고 잠시 기다리더니 다시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사람이 남에대해서 정당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말이오.”

아니, 아니, 내가 틀렸어요! 하고 내 마음속에서는 맹렬히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단 한 마디의 말로 그의 본질적인 약점과 그의 난점과 상처를 건드렸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스스로도 믿고 싶어하지 않는 그런 부분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의 이념은 ‘곰팡내가 나고’ 그는 퇴보적인 탐구자였으며, 낭만주의자였다.
그러자 갑자기 피스토리우스가 나에 대해 존재하고,
그리고 나에게 가르쳐주었던 것들은
그 자신에게는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고
스스로에게 줄 수도 없다는 사살이 뼈저리게 느껴져왔다.

그는 지도자인 그 자신마저를 넘어서고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길로 나를 인도했던 것이었다.
어떻게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조금도 나쁜 뜻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고
파국에 대한 예감 같은 것을 느끼지도 않았었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 순간조차도 전혀
스스로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지껄였던것이었다.
나는 단지 약간 재치있고 약간은 질이 나쁜 조그만 충동에 따랐을 뿐이건만,
그것이 운명적인 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사소하고 부주의한 행동을 한 것인데
그로서는 그것이 심판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그가 성을 내고, 자기 변명을 하고
나를 나무라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을 나는 내 마음속에서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미소라도 지었을 것이다.
그가 미소를 지을 수 없다는 것으로
내가 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준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다.

피스토리우스가 나에 의해서,
이 주제넘고 배은망덕한 자기 제자에 의해서 받은 타격을
그렇듯 말없이 감수하고 나의 정당성을 승인하고,
나의 말을 운명으로 인정함으로써
그는 나로 하여금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에 빠지게 하고
나의 실책을 몇 천 배나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타격을 가할 때는 강하고
자기 방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참을성 있게 묵묵히 항복해버린 무방비 상태의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꺼져가는 불 앞에 엎드린 채로 있었는데
불타는 모든 형상과 스스로 사그라드는 모든 재의 줄기가
나에게 행복하고 아름답고 풍부했던 시간을 되새기게 해주었고
피스토리우스에 대한 의무를 배신한 죄악감을 점점 증대시켜주었다.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일어서서 걸어나왔다. 한참 동안 나는 그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컴컴한 계단 위에서,
집 앞에서 행여라도 그가 나를 뒤따라오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로 그렇게 서 있었다.
마침내 그곳을 떠나서는 몇 시간이고 시내와 교외를,
공원과 숲을 저녁 때까지 헤매어 다녔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내 이마 위에서 카인의 표지를 느꼈다.

점차 나는 그때의 일을 되새겨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생각은 오로지 나의 잘못을 책하고 피스토리우스를 옹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엇다.
그러나 매번 모든 것은 반대의 결과로 끝났다.
천 번 만 번 나는 나의 경솔한 말을 후회했고, 그것을 철회할 용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진실이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나는 피스토리우스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의 모든 꿈을 내 앞에 내세우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의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고 새로운 종교를 선포하는 것이었으며
영혼의 앙양과 사랑과 예배의 새로운 형식을 부여하고 새로운 상징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역량과 사명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열심히 이미 존재했던 일에 몰두했고
너무나도 정확히 과거의 사실들을 알고 있었고,
너무나 많이 이집트나 인도, 미트라스나 아프락사스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사랑은 이 세상이 이미 보아온 형상에 결부된 것이었는데도
그가 마음속 깊이에서 원했던 것은 전혀 새롭고 색다른 것이었으며
그것은 신선한 대지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지
박물관의 수집품이나 도서관 같은 데서
창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역할은 나에게 그러했듯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을,
새로운 신을 주는 일은 그의 사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누구에게나 ‘사명’은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스스로 선택하고 해석하고
임의로 관리할 수 있는 사명은 없다라는 깨달음이
날카로운 불꽃처럼 나를 불태웠다.
새로운 신을 원한다는 것은 잘못이었고
이 세계에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었다!
각성된 인간에서 부여된 의무란 단 한 가지,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부에서 견고하게 되어 그 길이 어디에 닿아 있건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더듬어 나가는 일 이외의 다른 의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깊이 나를 사로잡았고,
이 생각이야말로 내가 이번의 체험에서 얻은 열매였다.

때때로 나는 미래의 형상과 함께 놀았고,
혹은 시인으로서 혹은 예언자 혹은 화가로서 혹은 다른 어떤 것으로서
나에게 부여되었을 역할에 대해 꿈꾸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짓기 위해서, 설교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도 그것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모두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을 뿐인 것이었다.
각자를 위한 진정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가지뿐이다.
그가 설령 시인이나 미치광이나 예언자나 심지어 범죄자로 일생을 마친다 해도 좋다
---그것은 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결국 그리 중대한 일은 아닌 것이다.
그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임의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 운명을 자신의 내부에서 송두리째, 그리고 온전하게 끝까지 지켜내는 일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일부일 뿐이며, 도피하려는 노력이고,
대중의 이상 속에 숨으려는 재도피이며,
순응이고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무섭고 경건하게 그 새로운 생각이 내 앞에 솟아올랐다.
그것은 이미 몇 백 번이나 예감되어왔고,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된 적이 있었을 것이었지만
나는 이제서야 겨우 그것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나는 자연의 투척이다.
미지의 것에의, 어떤 새로운 것, 아마도 허무에의 투척일 것이었고,
이 투척으로 하여금 본연의 깊이에서 작용하게 하고 그 의지를 나의 내부에서 느끼고
송두리째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이 나의 천직인 것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나는 이미 많은 고독감을 맛보았다.
이제 내 앞에는 보다 더 깊은 고독이 펼쳐져 있었고
그것을 피할 도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피스토리우스를 달래려고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친구였지만 우리의 관계는 달라졌다.
우리는 그 일에 관해서 단 한 번 다시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그 말을 한 것은 피스토리우스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는 말했다
. “나는 당신도 알다시피 목사가 되려는 소원을 갖고 있소.
나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렇게도 많은 예감을 품고 있는
새로운 종교의 목사가 되고 싶은 거요.
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는 걸 잘 알고 있소.
감히 입 밖에 내어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요.
나는 결국 다른 목사적인 봉사를 하게 되겠지요.
풍금을 통해서나 혹은 다른 방법을 통해서 말이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가 아름답고 신성하다고 느끼는 무엇인가에 의해,
다시 말하면 풍금 연주의 비법,
상징과 신화 같은 것에 의해 둘러싸여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요.
나는 그것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그것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거요
---그것이 내 약점이지요.
나는 때때로 싱클레어,
그러한 것을 원해서는 안 되고 그것은 사치이고 내 약점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으니까 말이요.
만약 내가 아주 단순하게 아무런 요구나 주장도 없이
운명에 자신을 맡긴다면 더 위대하고 더 정당하겠지요.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다오.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인 거요.
그것은 정말 어렵소.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정말로 어려운 일인 거요.
나는 때때로 그것을 꿈꾸지만 한 번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소.
나는 몸서리가 나오.
이렇듯 완전하게 벌거숭이가 되어 고독하게 서 있을 수만은 없는 거요.
나도 별 수 없이 다소의 따뜻함과 먹을 것이 필요하오,

이따금씩은 자기 동류의 체온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어하는
한 마리의 불쌍하고 연약한 개에 불과한 거요.
자기의 운명 이외에는 전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미 동류란 없는 거요.
그는 아주 고독하고, 주변에는 싸늘한 세계의 공간밖에는 없는 거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리스도가 그러했던 거요.
흔연히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교자도 있긴 했지만
그들 역시 영웅이 아니었고 자유롭지도 못했었소.
그들 역시 자기들에게 친밀하고 다정스런 무언가를 웒ㅆ던 거요.
그들에겐 모범이 있었고, 그들에겐 이상이 있었던 거요.
그저 운명만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모범도 이상도 없는 거니까.
그들에겐 아무런 사랑도, 아무런 위안거리도 있을 수 없소.
그런데도 사람은 이런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오.
나나 당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고독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서로 피차라는 것을 갖고 있소.
우리들은 뭔가 남다르고 반항하고 특이한 것을 추구하는 데서
남모르는 만족을 느끼긴 하지만 만약 온전하게 그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것까지도 단념해야 하는 것이오.
또 우리는 혁명가도 이상가도 순교자도 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거요.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인 거요.”

그렇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꿈꿀 수도 있었으며, 미리 느끼고 예감할 수는 있는 일이었다.
몇 번인가 아주 조용한 시간에 나는 그것을 조금쯤은 느껴본 적이 있었다.
그런 때에 나는 내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았고
내 운명의 모습의 그 강하게 부릅뜬 두 눈을 들여다보곤 하였다.
그 눈은 예지에 충만해 있는 때도 있었고 미친 듯한 열기에 충혈되어 있는 때도 있었고
애정에 빛나거나 깊은 악의에 차 있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것이건 다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것 하나라도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무엇 하나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단지 자기 자신만을 원하고 자신의 운명만을 원할 수 있을 뿐이었다.
피스토리우스는 지도자로서 내가 이 길을 제법 멀리까지 나갈 수 있게 도움을 주었던 것이었다.

그 시절, 나는 천지를 모르는 것처럼 돌아다녔다.
마음속에선 언제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고, 발걸음마다 위험에 차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 모두 그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아득한 심연이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마음속에서 데미아과 닮은,
그 두 눈에는 나의 운명이 깃든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한 장의 종이에다 이렇게 썼다.
“지도자가 날르 버렸다. 나는 아주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 서 있다.
나는 혼자의 힘으로는 한 발자국도 걸어나갈 수가 없다. 오, 나를 도와주오!”

나는 그 쪽지를 데미안에게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게 하려고 할 때마다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짤막한 기도문을 외고 있으면서 때때로 혼자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곤 하였다.
그 기도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따라다녔다.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의 학창 시절은 끝났다.
나는 휴가 여행을 떠나기로 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제안이셨다.
여행이 끝나면 나는 대학에 가야 했는데 무슨 학부에 가야 할지를 정할 수가 없었다.
한 학기 동안 철학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다른 어떤 학과일지라도 만족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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