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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오늘의 쉼터 2015. 1. 10. 11:39

제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1)


내가 그린 꿈의 새는 여행을 떠나 나의 친구를 찾았다.
그 회담은 아주 신기하게 내게 왔다.

어느 날 수업중의 쉬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책갈피 사이에 종이쪽지가 한 장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종이는 우리들이 종종 수업 시간중에 편지질을 할 때 접는 모양으로 접혀 있었다.
누가 그런 편지를 내게 보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어느 친구와도 그런 짓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이 학교에서 성행하는 어떤 장난을 권유하는 것이려니 생각했을 뿐,
그런 짓에 참가할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심히 종이쪽지를 읽지도 않은 채 책의 앞쪽에다 꽂아두었다.

그러다 수업중에서야 다시 그것을 손에 잡게 되었다.
종이쪽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생각없이 펼쳐본 나는
거기에 몇 귀절이 적혀 있음을 알았다.
그것을 읽자마자 그 귀절에 온 몸과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었다.
놀란 심정으로 재차 읽어보는 동안 내 마음은 몹시 추울 때처럼
떨며 운명 앞에서 움츠러들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나는 여러 번 이 귀절을 읽은 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데미안으로부터의 회답이었다.
그와 나를 빼놓고는 아무도 그 새에 대해서 알 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나의 그림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그 그림을 이해했고 나의 해석을 도와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무엇보다도 나를 괴롭힌 것은---아프락사스라는 이름의 정체였다.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한 번도 그런 이름을 들은 적도 읽은 적도 없었다.
“그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수업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그시간이 끝났다.
그날 오전 수업의 마지막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 수업은 젊은 보조 교사 담당이었는데 그는 대학을 갓 나온 사람으로
매우 젊고 공연히 잘난 티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었다.

우리는 폴렌스 박사의 지도로 헤로도투스를 읽었다.
이 강독 수업은 내가 흥미있어 하는 극소수의 과목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날만은 수업에 정신을 쏟을 수가 없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책을 펼쳐든 채 그의 수업은
귓전으로 들어넘기며 내 생각의 뒤를 좇고 있었다.

나는 pealdks이 이전의 견신례수업 시간에 내게 이야기했던 것이
얼마나 타당한지를 여러 번 느껴왔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강력히 원하면 그것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말이다.
만약 내가 수업중에 아주 강하게 내 자신의 생각에 몰두할 수 있으면
선생님들은 나를 내버려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이 산란하거나 졸릴 때면
갑자기 선생님이 옆에 와서 서 있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 경험은 여러 번 있었다.
내가 정말로 깊이 생각에 몰두해 있다면 안전했다.
나는 강한 시선으로 상대를 노려보는 실험도 해보았는데,
그것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 당시, 데미안과 함께였던 시절에는 성공할 수가 없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강한 시선과 깊은 생각으로
매우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간에도 나는 역시 그렇게 하고 앉아서
헤로도투스와 학교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선생님의 목소리가 내 의식을
번갯불처럼 내리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내 곁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 나는 다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분명하게 아프락사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첫머리는 듣지 못했지만 폴렌스 박사는 설명을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대의 그 교파와 신비적인 교단의 견해를
합리주의적인 관점에서 파악되는 것만큼 소박한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의미하는 바의 과학적 기준으로는
도대체 고대를 바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매우 높은 수준의 철학적 신비적 진리의 활동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일부는 때로 사기와 범죄에 닿는 마술과 유희로 진행되어갔습니다.
그러나 마술이라는 것도 원래에는 필연적인 이유와 깊은 사상을 지녔던 것입니다.
내가 앞서 예로 든 아프락사스의 교의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 이름은 그리스의 주문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대게 야만족들이 믿고 있는
어떤 악마의 이름이라고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프락사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뜻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개괄적으로 이 이름을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가진 일종의 신의 이름으로 파악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몸집이 작은 이 젊은 학자는 섬세하면서도 힘있게 설명을 계속했다.
크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름이 다시 거론되지 않게 되자 나도 다시 내면적인 생각으로 주의를 돌렸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한다.’
이 설명의 여운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이것을 예전의 어떤 일과 결부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들이 우정을 나누던 최후의 시절, 

데미안과의 대화로 내겐 친근한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분명히 존경하는 하나의 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그 신은 단지 인위적으로 구분된 세계의 절반만을 포용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공적이고 허용된 ‘밝은 세계’였다).

그러나 사람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경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러자면 악마까지도 겸한 새로운 신을 갖거나 아니면
신에 예배하는 동시에 악마에게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데미안은 그때 그렇게 말했었다. ---
그렇다면 지금 이 아프락사스가 신인 동시에 악마인, 바로 그 신인 것이었다.

얼마 동안 대단히 열심히 그 신에 대해 찾아보았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나는 아프락사스에 대한 것을 찾기 위해 온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나의 천성은 손에 쥐고 보면 돌맹이에 불과한 그런 진리를 발견해내는 일 같은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탐구에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한때 그렇게 몰두했던 베아트리체의 모습은 서서히 관심 속에서 멀어져
지평선에 가까워질수록 그림자처럼 아슴하고 희미해졌다.
그것은 이미 나의 영혼을 만족시켜 주지못했다.
내 자신의 내부에 틀어박혀서 몽유병자처럼 살아온
내 생활 속에 기이하게도 새로운 형태가 형성되어가기 시작했다.

생활에의 동경, 아니 사랑에의 동경이라 할 수 있는 어떤 것과,
베아트리체를 예배하는 동안 잦아들어져 있던 성적인 충동이
다시 나의 내부에서 솟구쳐 왔고 새로운 영상과 목적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내겐 어떤 충족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동경을 부인한다거나 아니면 내 친구들이 충족을 채우는
그러한 소녀들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다시 심하게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밤에보다 낮에 더 많이 꾸는 형편이었다.
표상, 영상, 혹은 소망이 나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 마음속의 그러한 영상들과 함께, 꿈과 그 그림자와 함께,
현실적인 일상 속에 있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생명력 있는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갔다.

어떤 일정한 종류의 꿈,
항상 되풀이하여 떠오르는 환상이 나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의 내 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을 크게 미쳤던 꿈은 대략 이러했다.

나는 고향의 우리 집으로 돌아갔다. ---
현관 위에서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문장 속의 새가 황금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집에서는 어머니가 나를 맞이해주셨다---
그러나 내가 막상 어머니를 포옹하려고 하자
그는 어머니가 아니라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변했는데,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고 힘이 세었으며 막스 데미안이나
내가 그린 초상과 닮았지만 또 막상 보면 다른 모습이기도 했으며
힘차 보이면서도 극히 섬세한 여성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나를 끌어당겨서 깊고 몸이 떨릴 정도의 사랑의 포옹을 해주었다.
희열과 공포가 뒤섞여 다가왔는데 그 포옹은 신에의 예배인 동시에 죄악인 것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너무나 많은 추억과
데미안에 대한 너무나 많은 추억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 가운세서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져갔다.
그녀의 포옹은 엄숙한 경건성에는 위배되는 것이었으나 희열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이 꿈에서 때로는 깊은 행복감을 느끼며 깨어나기도 했고,
때로는 무서운 죄를 범한 것 같은 죽음의 공포와 양심의 가책에 떨며 깨어나기도 했다.

아주 내적인 이 영상과 외부에서 찾아든 탐구해야 할
신에 대한 암시 사이에 어떤 무의식적인 관련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점점 일정하고 친밀하게 결속되었다.
나는 이 예감의 꿈속에서 아프락사스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점차 감지하게 되었다.
희열과 공포, 남성인 동시에 여성인 것의 혼합, 성스러움과 전율의 뒤엉킴,
다감한 천진성을 뚫고 지나가는 깊은 죄악에의 예감---
이것이 내 사랑의 꿈의 영상이었고 아프락사스 역시 그러했다.
사랑은 이미 내가 불안스럽게 여겼던 동물적인 어두운 충동이 아니었고,
동시에 내가 베아트리체의 초상에게 바쳤던 경건학 정신화된 숭배도 아니었다.
사랑은 그 양쪽 다였다. 양쪽 다였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천사인 동시에 악마였고 남성과 여성이 합일된 것이었으며
인간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 최고의 선과 극단의 악이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운명인 것이었고 이것을 맛보는 것이 숙명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것에 대해 깊은 동경을 품음과 동시에 깊은 두려움에 떨었고
그것은 언제나 내 머리 위에 실재로 존재해서는 수시로 나에게 덮쳐왔다.

다음 해 봄에 나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진학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아직도 어디서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를 정할 수가 없었다.
내 입술 위에는 콧수염이 자리기 시작했으니 나는 이제 완전한 성인이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었으며 아무런 목표도 없었다.
확실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나의 내부의 소리, 즉 꿈의 영상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이끄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라가야 한다고 느꼈다.
그것은 퍽 어려운 일이었고 나는 날마다 그것에 반항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것일까?
그렇지만 다른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역시 할 수 있었다.
조금만 주의와 노력을 집중시키면 플라톤을 읽어낼 수도 있었고
삼각법의 문제도 풀 수 있었으며 화학적인 분석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나의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목표를 끄집어내어 내 앞에다 확실히 그려보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교수나 법관, 의사가 예술가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이루려면 얼마만한 기간이 필요하고
거기엔 어떤 현실적인 이점이 있는지를 잘 알고들 있었다.

그런데 나는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나도 그런 직업을 갖게 될 것이겠지만
지금은 내가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단 말인가.
나 역시 몇 년을 찾고 또 찾아왔지만 아무것도 된 일은 없었고,
어떠한 목표에 도달할 수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나도 역시 어떠한 목표에 도달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정말 난처하고 위험스러우며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살기 위해서 나의 내부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었던가?
나는 때때로 내 꿈속에 나타나는 힘찬 사랑의 자태를 그려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만일 그것에 성공했다면, 나는 그것을 데미안에게 보냈을 것이었다.
그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와 나는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을 뿐이었다.
언제나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베아트리체 시절의 그 몇 주, 아니 몇 달간의 고요한 정적은 옛날에 사라져버렸다.
당시에 나는 하나의 섬에 도착하여 평화를 발견해 낸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같은 상태였다---
어떵 상태가 내 마음에 들기가 무섭게,
어떤 꿈이 나를 즐겁게 해주기가 무섭게 그것는 벌써 퇴색해버리고 희미해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한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나를 완전히 야성적이고 미치광이처럼 만들고 마는,
이루어지지 않는 갈망과 긴장된 기대의 불꽃 속에서 살고 있었다.

꿈속에서 보는 그 여인의 모습을 나는 때때로 너무도 생생하게,
내 자신의 손을 보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바라보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를 저주하기도 했다.
나는 그를 어머니라 부렀고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했다.
그를 애인이라고 부르며 모든 갈망을 충족시켜주는 깊은 입맞춤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그를 악마, 매춘부, 흡혈귀, 살인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나를 다정스럽기 그지없는 사랑의 꿈으로 유인하기도 했고
이를 데 없이 철면피한 행위로 끌고 가기도 했다.
그에게는 지나치게 선량한 것도, 존귀한 것도 없었으며
동시에 지나치게 사악한 것도 비천한 것도 없었다.

그해의 온 겨울을 나는 표현하기 힘든 내적 폭풍우 속에서 지냈다.
고독하다는 것에는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으므로
새삼스럽게 고독이 나를 압박하지는 않았다.
나는 데미안과 덥루어, 새매와 더불어,
나의 숙명인 동시에 나의 애인인 커다란 꿈의 영상과 더불어 살았다.
그것들 속에서는 살아가기에 충부한 공간이 있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위대한 것, 넓은 세계를 향하고 있었고,
또 모든 것들이 아프락사스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꿈들 중의 단 하나도, 내 생각의 한 조각도 내게 복종하지는 않았으며,
나는 그것들 중의 단 하나도 내 임의로 불러들일 수가 없었으며
단 하나도 내 마음대로채색할 수가 없었다.
그것들이 내게로 와서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며,
나는 그것들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그것들로써 살아갔던 것이었다.

분명히 나는 외부에 대해서는 안전했을 것이었다.
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같은 반의 친구들도 그것을 느끼고는 은근히 나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때가 있어서
나를 실소하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하려고만 한다면 그들의 대부분을 잘 꿰뚫어볼 수가 있어서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나는 거의, 아니 전혀 그렇게 하려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나의 일, 나 자신만의 일에 몰두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생명의 작은 부분이나마 살아 보고
내 자신 속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어 그것을 세상에 주고,
세상과 관계를 맺고, 싸움을 시작하게 되기를 열렬히 원했다.
여러 번 저녁의 거리를 산책하다가 끝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한밤중까지 헤매고 다닐 때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나의 애인과 마주치리라,
다음 골목 모퉁이에서는 그와 만날 수 있으리라,
저 다음 창문에서 그가 나를 부르리라 하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때론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나를 옥죄어 와
언젠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까지 하기도 했다.

예기치 않은 피난처를 나는 당시에---‘우연히’ 발견했다.
그러나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필요로 했더 사람이 그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소망과 필연이 그곳으로 그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나는 두 번인가 세 번쯤 시내를 걸어다니다가
교외의 조그만 교회에서 울려나오는 풍금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엔 걸음을 멈추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앞을 지나다가 나는 또
다시 풍금 소리를 들었고 바하의 곡이 연주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문으로 가 보았지만 문은 닫혀져 있엇다.
골목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었으므로
나는 외투깃을 올리고 교회 옆에 있는 길가의 돌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과히 크지는 않았지만 좋은 풍금인 것을 곧 알 수 있었고,
연주는 묘하게, 독특하고도 고도의 개성적인 의지와 인내를 표현해내는
훌륭한, 거의 대가의 솜씨로서 마치 기도처럼 울려왔다.
풍금을 연주하는 사람은 이 음악 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는 자여서
마치 생명을 얻으려는 자처럼 이 보물을 얻기 위해 애쓰고
두드리고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교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음악에대해 그다지 전문적인 안목을 갖추지 못했지만
진실한 영혼의 표현은 아주 어릴 적부터 본능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음악의 본질을 아주 분명한 것처럼 내 마음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2)


그 음악가는 바하의 곡 다음에 곡목을 알 수 없는 현대 음악을 연주했다.
레거의 곡인지도 몰랐다.
교회는 완전히 어두워졌고 아주 희미한 빛이 옆 창문으로 흘러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연주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고 풍금을 치던 사람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볼 때까지 교회 앞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아직 젊었으나 적어도 나보다는 좀더 나이가 많아 보였고
억세고 체구가 오동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힘차게, 마치 기분이 나쁜 사람처럼 성급한 발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 이후 나는 때때로 저녁 무렵에 그 교회 앞에 앉아 있거나 서성거리곤 했다.
언젠가는 교회 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반시간 동안이나 풍금 연주자가 위층에서 가물거리는 가스등 밑에서 연주하는 것을
추위에 떨면서, 그러나 행복한 심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에서 나는 그 사람 자신만을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연주하는 모든 곡들은 서로 인연이 닿아 있고
남모르는 관계를 맞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가 연주하는 모든 곡은 종교적이었고 헌신적이었으며 경건했지만
교회의 신자나 목사들처럼 경건한 것이 아니라
중세의 순례자나 탁발승들처럼 경건했고,
모든 종파를 넘어서 존재하는 세계 감정을 향한 물불을 가리지 않는 헌신으로 경건했다.

바하 이전의 거장들의 곡과 옛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곡이 자주 연주되었다.
그 곡들은 모두가 똑같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연주자 자신의 마음속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엇다.
그것은 동경과 세계의 가장 내면적인 파악,
그리고 세계로부터의 가장 난폭스러운 분리와
자기 자신의 어두운 영혼에 대한 타는 듯한 심취,
헌신에의 도취와 불가사의한 것에 대한 깊은 호기심 같은 것들이었다.

언젠가 나는 그 풍금 연주자가 교회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것을 몰래 따라갔었는데
그가 시내의 변두리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조그만 술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나 자신을 억제치 못하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여기에서 나는 비로소 그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검정 펠트 모자를 쓴 채 포도주 한 병을 앞에 놓고
조그만 홀의 구석에 있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내가 상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그는 못생겼고 다소 야성적으로 보였으며, 탐구적이고 굳어버린 것 같은 표정에
집요하고 의지에 차 있어 보였지만 입 가장자리에는 부드러운,
아이와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다.
남성적이고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 눈과 이마에 모여 있었고
섬세하고도 미숙해 보이는 안정감 없는 하관과
부분적인 연약함이 함께 깃든 얼굴이었는데 우유부단해 보이는 턱은
눈초리에 대한 이율배반인 양 소년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특히 내마음에 든 것은 긍지와 적의에 가득 찬 암갈색 눈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술집 안에는 우리 두 사람 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나를 쫓아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앞에 버티고 앉아서
그가 성이 나서 투덜거릴 때까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당신은 뭘 그리 기분나쁘게 사람을 노려보고 있소?
내게 무슨 용건이 있는 거요?”

”당신에게 무슨 용건이 있는 건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난 당신에 관해 많은 걸 알고 있어요.”
그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럼 당신도 음악광이오?
음악에 미친다는 건 내가 보기엔 구역질 나는 짓이오.”
나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나는 벌써 여러 번 교회 밖에서 당신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나는 계속 말했다.
“나는 당신을 귀찮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뭔가를,
뭔가 색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할 순 없지만 말입니다.
내가 하는 소리 같은 건 귀담아 듣지 마삽시오!
나는 교회에서 당신의 연주를 듣는 것으로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난 언제나 교회 문을 잠가두는데요.”
”최근에는 그것을 잊으신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교회 안에 들어가서 들을 수가 있었지요.
그렇지 않을 때는 밖에 서서 듣거나 길가의 돌에 앉아 듣기도 했답니다.”

”그래요? 다음번엔 들어와도 좋소. 그게 훨씬 따뜻할 거요.
그저 문만 두드리이오. 그러나 힘차게 두드려야 할 거요.
내가 연주하고 있지 않을 때 말이오.
그럼 이제 자---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소?
아주 젊은 분이군, 아마 고등학생 아니면 대학생이겠지. 음악을 하시오?”
”아닙니다. 전 그저 음악을 듣기를 좋아할 뿐입니다.
당신이 연주하시는 것 같은 그런 구속이 없는 음악,
그것을 듣고 있자면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잡아 흔드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음악 말입니다.
저는 음악을 대단히 좋아하는데 아마 음악은
그렇게 도덕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온갖 것들은 다 도덕적이지요.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은 것을 찾고 있는 거예요.
저는 언제나 도덕적인 것에 억눌려 괴로움을 받아왔어요.
잘 표현할 순 없지만---
당신도 신인 동시에 악마인 하나의 신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십니까?
전 그러한 신이 존재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는 넓다란 모자를 조금 젖히고 이마로 내려온 검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식탁 너머로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었다.
나직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그는 물었다.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이오?”
”유감스럽지만 저는 그 신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어요.
단지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이에요.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랍니다.”
그는 누군가가 우리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다는 듯이 조심스레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내게 한층 더 바짝 다가앉으면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내 그럴 줄 알았소. 당신은 누구시오?”
”저는 김나지움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어디서 아프락사스를 알게 되었소?”
”우연이지요.”

그는 식탁을 쳤다. 포도주 잔이 넘쳐흘렀다.
”우연이라니! 이것 보시오. 쓸데없는 소리 작작해요!
아프락사스에 관해서 우연으로 알게 되는 법은 없소.
그것을 명심하시오. 내가 그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주리다.
난 그에 관해 아는 것이 좀 있으니까.”

그는 말을 멈추고 걸상을 다시 뒤로 밀었다.
내가 기대에 가득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서가 아니오! 다음번에 이야기하리다.
---자, 이거나 좀 드시오.”

그러면서 그는 입고 있던 외투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더니
군밤 몇 개를 꺼내서는 내게 던져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집어먹으며 지극히 만족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그래!” 그는 잠시 후에 소곤거리듯 말했다.
“어디서 당신은 그 --- 그것에 대해 알게 되었소?”
나는 주저없이 이야기했다.
”전 고독했었고 방황하고 있었지요.”
나는 말을 계속했다.
“그때 저는 옛시절의 친구가 생각났는데
전 그가 무척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것을, 지구에서 나오려고 하는 한 마리의 새를 그렸습니다.
그것을 그에게 보냈지요.
제법 시간이 지나서 그것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을 무렵에
뜻밖에도 종이쪽지 한 장이 제 손에 들어오게 되었느느데
거기엔 이런 귀절이 적혀 있었어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밤을 까서 술안주로 먹었다.
”한 병 더 하겠소?” 그가 물었다.
”고맙지만 더는 못합니다. 전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그는 다소 실망했다는 듯이 웃었다.

”좋을 대로 하시오. 난 다르니까. 난 여기 더 있겠소만. 이제 그만 가 보시오.”
다음번에 그의 연주를 들은 후 그 사람과 함께 걷게 되었을 때는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는 나를 옛날 골목에 있는 낡고 거창한 집의
크고 음산하며 잔손이 가지 않은 방으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피아노를 제외하면 음악에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커다란 책장과 책상이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었다.
”참 책이 많군요.” 나는 감탄하여 말했다.

”그 일부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갖고 온 거요.
나는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으니까---이봐요.
나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 그들에게 당신을 소개할 순 없소.
이 집안에서는 내 친구가 그리 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처지가 못되니까.
나는 소위 탈선한 자식이지요.
아버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존경할 만한 분으로
이 시에서 손꼽히는 목사이자 설교가라오.
당신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나는 재능이 있고 전도가 유망한
그의 후계자였는데 탈선을 하고 얼마간 정신이 돌아버린 것이오.
나는 신학생이었는데 국가 시험 직전에 이 신성한 신학부를 팽개쳐버린 거요.
내 개인적인 공부로 말하자면 나는 여전히 이 학과를 전공하고 있는 셈이오.
사람들이 때론 어떤 신을 생각해냈는가 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여전히 내게는 최고로 중요하고 흥미있는 일이라오.
그건 그렇고 나는 현재 음악을 하고 있는데 머지않아
하찮은 풍금 연주자 자리를 얻게 되겠지요.
그러면 나는 다시 교회에서 일하게 되는 거요.”

나는 서가에 꽂힌 책을 대충 훑어보았다.
조그만 탁상 램프의 희미한 불빛으로 볼 수 있는 한에서 그것은
그리스어, 라틴어, 헤브라이어의 표제를 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컴컴한 속에서 벽 쪽의 방바닥에 엎드려 무언가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이리 오시오.” 얼마 후에 그가 나를 불렀다.
“이제 철학 시간을 조금 가집시다.
다시 말하면 입은 다물고 엎드려 생각을 좀 해보잔 말이오.”

그는 성냥을 한 개비 켜서는 앞에 있는 난로에 종이와 나무를 살라 불을 피웠다.
불꽃은 곧 높이 피어오랐는데 그는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불을 긁어 일으키기도 하고 장작을 집어넣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너덜너덜한 융단 위에 엎드렸다.
그는 물끄러미 불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불은 곧 내 마음을 끌어
우리는 거의 한 시간쯤이나 널름거리는 장작불 앞에
아무 말 없이 엎드려서는 불꽃이 훨훨 타오르고 바지직거리고
꺾여지고 휘어지고 가물가물 사그라들다 경련하듯 파닥거리며
마침내는 조용히 사위어들어 밑바닥에서 부화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화도 온갖 발명 중에서 제일 미련스런 발명은 아닌 것 같군.”
그는 혼잣말로 한 번 이렇게 중어러렸을 뿐이었다.
그 말 외에 우리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중된 시선으로 나는 불을 들여다보았고 꿈과 정적 속에 잠겨들었으며
연기 속에서 어떤 자태와 재 속에서 무엇인가의 형상을 보았다.
갑자기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관솔을 불 속에 던져 넣자 조그맣고 가느다란 불꽃이 솟구쳐 올라왔는데
그 속에서 나는 황금빛 새매의 머리를 가진 새를 볼 수 있었다.
사그라져가는 난로의 불 속에서 황금빛으로 불에 단 실이 그물 모양으로 엉겨들고,
문자와 갖가지 형상과 얼굴, 짐승, 식물, 벌레 그리고 뱀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왔다.
문득 정신이 들어 옆에 있는 그를 보니 그는 턱을 괴고 엎드려 정신없이,

 마치 꿈꾸는 것처럼 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3)


”전 이제 가야겠어요.”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잘 가시오. 또 만납시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말했다.
램프의 불은 어느 샌가 꺼져버렸으므로 나는 간신히
컴컴한 방과 복도와 계단을 더듬거리며
그 을씨년스런 집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거리로 나오자 나는 멈춰서서 그 낡은 집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창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놋쇠로 된 조그만 문패가 문 앞 가스등의 빛을 받아 반들거리고 있었다.
”피스토리우스 주임 목사” 나는 거기에 씌인 것을 간신히 읽을 수가 있었다.

기숙사로 도라와 저녁을 먹은 후 내 조그만 방에 혼자 있게 되자
비로소 나는 아프락사스에 대해서나 그밖의 어떤 일에 대해서도
피스토리우스에게서 들은 것이 없다는 것과
도대체 열 마디도 서로 나누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내겐 그의 집을 방문했다는 것이 지극히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다음 만날 때엔 옛날의 풍금 음악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곡인
북스테후테의 파사칼리아를 들려주기로 약속했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와 함께 그 음산한 넓은 방에서
난로 앞에 엎드려 있었을 때 이미 피스토리우스는 최초의 가르침을 시작했었다.
불을 들여다보게 한 것은 내게 매우 유익한 일이었는데
그 일을 통해 그는 내가 항상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한 번도 훈련한 적이 없는
나의 내부에 있는 기호를 강렬하게 해주고 확인시켜주었던 것이다.
부분적이나마 그 일은 점차 분명해졌다.

나는 조그만 아이였을 적부터 이미 자연의 기이한 모양을 관찰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모양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진 특이한 매력과 난삽하고도 의미깊은 언어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길다란 목질로 벼한 나무 뿌리, 층이 져 있는
암맥, 물 위에 뜬 기름의 얼룩, 유리의 섬세한 균열.
---이와 같은 온갖 것들이 때때로 내겐 기은 매력을 주었고
무엇보다도 심취했던 것은 물고 불, 연기, 구름, 먼지,
내가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빙빙 맴도는 갖가지 빛깔의 무늬였다.
피스토리우스를 방문한 후 며칠 동안 그때의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그러한 기억이 어떤 흥분과 기쁨,
그리고 그때부터 내가 느껴온 나 자신의 감정의 고양감이 훨훨 타오르는
불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ㄱ서에 의해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을 응시한다는 것은 이상스럽게 마음을 유쾌하고도 만족스럽게 채워주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경험은 내가 나의 본래의 인생의 목표를 향해 가는 동안
발견했던 다른 경험에 보태어졌다.
어떤 형상을 세밀히 관찰하는 것과 불합리해 보이며
난잡하고 괴상하게 느껴지는 자연 형상에 몰두하는 일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우리들이 이 형상을 만들어낸 어떤 의지와 조화되어 있는 존재라는 깨우침을 갖게 해준다.
---우리는 극서들이 곧 우리들 자신의 기분이며,
우리들 자신의 창조물이라고 여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들과 자연 사이의 경계가흔들리고 녹아버리는 것을 느끼고
또한 우리들의 망막에 맺히는 형상이 외부적인 인상에서 연유된 것인지
혹은 내부적인 것에 연유하는 것인지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얼마나 우리가 창조자이며,
얼마나 우리들의 영혼이쉴새없이 이 세상의 끊임없는 창조에 관여하고 있는가를
이 연습에서만큼 단순하고 쉽게 발견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내부에서와 자연의 내부에서 존재하는 신은 동일한,
나뉘어질 수 없는 하나의 신이며 만일 외부의 세계가 붕괴되면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그것을 재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과 강, 나무나 잎, 뿌리와 꽃 등 모든 자연의 형성물의 원형은
우리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 본질은 영원하고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영혼에서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개는 사랑의 힘과 창조의 힘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나의 관찰이 어떤 책에 증명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침을 뱉은 벽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크게
그리고 얼마나 깊이 흥미를 끄는 일인가에 대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일찍이 설파한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축축한 벽의 얼룩 앞세서 마치
피스토리우스와 내가 불을 보고 느낀 것과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었다.
우리가 다음 번에 만났을 때 그 풍금 연주자는 내게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흔히 개인의 한계를 너무 좁게 책정해버리는 경향이 있소.
우리는 우리가 개성적인 것이라고 일컫고
다른 것과 판이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을 개인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우리들은 누구나가 다 이 세계의 온갖 축적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오.
우리들의 육체가어류나 더 이전의 생물체에까지 소급될 수 있는
발달의 계보를 지닌 것처럼 우리들의 영혼 속에도 이제까지
인간의 영혼 속에 살아왔던 온갖 것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오.
이제까지 존재해왔던 모든 신들과 악마들은,
그것들이 설령 그리스인들에게 있었건, 중국인들에게 있었건,
혹은 쑬루카퍼인들에게 있었건간에 모두 어떤 가능성으로서, 소망으로서,
방편으로서 우리들 내부에 존재하며 또 다른 곳에도 존재하고 잇는 것이오.
만일 조금도 교육받지 못한 한 명의 평범한 아이만을 남기고

전 인류가 멸망해버린다 해도 이 아이는 사물의 전 과정을 다시 발견해낼 것이오.
여러 신과 악마와 낙원과 게율과 금제와 구약, 신약 등,
이 모든 것들을 그 아이는 다시 창조해낼 수가 있는 것이오.” 

 

”네, 그럴 수도 있겠읍니다만,”
나는 반대 의견을 말했다.
“그렇다면 개인의 가치는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내부에 모든 것이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우리는 여전히노력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잠깐!” 피스토리우스는 성급히 소리쳤다.
“당신이 단순히 자신의 내부에 세계를 지니고만 있느냐,
혹은 그것을 의식하고있느냐는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지는 일인 것이오!
미친 사람일지라도 플라톤을 연상시키는 사상을 창조해낼 수도 있을 것이고,
헤른후트파의 학교에 다니는 경건한 어린 학생이
그노시스파나 조로아스터파에 나타난 깊은 신화적인 연관을
독창적으로 생가해낼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하오.
그렇지만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의식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는
한 그루의 나무나 돌, 기껏해야 짐승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오.
그러나 이 인식의 최초의 불꽃이 한번 번쩍 빛나기만 해도 그는 인간이 되는 거요.
당신도 역시 저기 거리 위를 걷고 있는 모든 두 발 달린 족속들을
단지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다는 것과
자식을 열 달 동안 뱃속에 넣고 다닌다는 것만으로 해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요.
그들 중의 얼마나 많은 부류가 단지 물고기나 양, 벌레나 거머리에 불과한지,
얼마나 많은 부류가 개마나 벌과 같은 존재에 불과한지를 당신도 잘 알 것 아니오.
그들 각자에게는 물론 인간이 될 가능성이 이미 부여되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예감하고 부분적일망정 의식할 수 있게 되는 동안에만
그 가능성은 비로소 그들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오.”

우리들이 나눈 대화는 대략 이런 종류였다.
우리들의 대화가 나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나
아주 놀랄 만한 깨우침을 가져다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모든 대화들은, 심지어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들까지도
나의 내부의 어떤 한 지점을 가볍게 그러나 끊임없이 망치질해대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나의 형성을 도와주고,
내가 허물을 벗고, 껍질을 깨뜨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한 매번의 대화로 나는 내 머리를 조금씩 더 높이,
조금씩 더 자유롭게 치켜들어 마침내 내 황금빛 새는
그 아름다운 머리를 산산이 부수어진 세계의 껍질 밖으로 내밀었던 것이다.

우리는 자주 서로의 꿈 이야기를 하곤 했다.
피스토리우스는 꿈을 해석할 줄 알았다.
한 가지 놀라운 예가 기억에 떠오른다.
나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서 나는 날 수가 있엇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비상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대 비약에 의해 공중에 내동댕이쳐진 것이었다.
이 비상의 감각은 내 정신을 몹시 고양시켜주었지만
나는 곧 원하지 않았는데도 걱정될 만큼
높이 공중으로 치솟아로르는 것이 두려워졌다.
나는 상승과 낙하를 호흡의 정지와 내뿜는 것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꿈에 대해서 피스토리우스는 이렇게 해석해주었다.

“당신을 날 수 있게 한 비약이란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커다란 특전이오.
그것은 모든 힘의 근원과 연관된 감정으로
그런 감정에 휩싸이게 되면 누구나 불안을 느끼게 마련이오.
그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니까!
그러므로 대개의 사람들은 쉽사리 나는 것을 포기하고
법의 규정에 따라 걸어가는 편을 택하는 것이오.
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소.

당신은 유능한 청년답게 계속 날고 있는 거요. 그러니 이것 봐요.
당신은 점차 당신 스스로 그것을 제어할 수 있게 되고
당신을 휩쓸어가는 보편적인 위대한 힘에 대해 섬세하고 가냘르기까지 한
자기 자신의 힘이, 하나의 기관이 하나의 키와 맞먹게 된다는
믿을 수 없는 일을 깨닫게 될 것이오.
기막힌 일이지요.

그러나 그런 일이 없다면 미친 사람이 그런 것처럼 아무런 의지없이 공중을 나는

결과가 되는 거요.
하늘을 나는 자들에게는 안전한 땅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에게보다
깊은 예감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오.
하지만 이들이 거기에 대한 어떤 열쇠나 키를 갖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밑바닥도, 끝도 없는 곳으로 굴러들어가고 마는 거요.
그러나 당신은 말이오, 싱클레어. 당신은 그것을 할 수 있소.
그런데 어째서 그걸 아직도 전혀 모르고 있는 거요?
당신은 하나의 새로운 기관, 즉 호흡 조절기를 가지고 그걸 하고 있는 거요.
이제는 당신의 영혼이 근원에 있어서는 얼마나 ‘개인적’이 아닌가를 알 수 있을 거요.
다시 말하자면 당신의 영혼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 조절기를 고안해낸 것은 아니란 말이오.

그렇소, 그것은 새것이 아니오!
그건 빌려온 것이며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오.
그것은 물고기의 평형기관, 즉 부레인 거요.
부레가 일종의 폐를 겸하고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정말로 호흡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소수이지만
몇몇 이상스럽고 보수적인 어류가 오늘날까지도
분명히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거요.
당신이 꿈속에서 날 때 쓴 부레는 이러한 폐와 같은 종류인 것이오.”

그는 내게 동물학 책을 한 권 가져와서
그 고색창연한 물고기의 이름과 그림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나는 나의 내부에 진화 초기 시대의 기능이 생동하고 있음을
신비스런 전율과 더불어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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