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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베아트리체

오늘의 쉼터 2015. 1. 10. 11:35

제 4 장 베아트리체

 


(1)


방학이 끝나자 나는 내 친구를 다시 만나보지도 못하고 성○○시로 출발했다.
부모님께서는 두 분 다 나를 따라오셔서는 온갖 일에 세심히 염려 해 주시면서
김나지움의 선생님이 경영하는 소년 기숙사에 내 거처를 정해주셨다.
그렇지만 부모님들께서 나를 어떤 곳에,
어떤 아이들 사이에 넣어주셨는지를 아신다면 아마 기절할 만큼 놀라셨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가 착한 아들이 되고 선량한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나의 천성이 다른 길로 뻗어나갈 것인가에 달려 있었다.
아버지의 세계와 아버지의 정신적인 영향력 아래서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내 마지막 노력은 오래 계속되었고
한때는 거의 성공할 것 같기도 했었으나 결국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견신례를 받은 이후 방학 동안 최초로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과 고독감은
(나는 이 공허감과 희박한 공기를 후일 또 얼마나 진하게 맛보게 되었는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고향에 이별을 고하는 일은 이상스러울이만큼 쉬웠고
전혀 슬프지 않다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누나들은 끝없이 울었지만 나는 전혀 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러한 자신에 대해 무척 놀랐다.
나는 꽤나 감정이 풍부한 편이었고 근본적으로는 제법 선량한 아이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나는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아주 냉담한 태도를 취하며
온종일 나의 내부에 귀기울였었는데 결국은 가장 내면적인 곳에서 흐르고 있는
금지된 어두운 냇물 소리를 듣는 데 온 정신을 빼아시고야 마는 지경이었다.

지난 반 년 동안 나는 급격히 자라나 후리후리하고 야윈 모습으로
불완전하나마 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소년다운 귀염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져
내 자신조차도 이런 모습으로서야 남에게 사랑받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더구나 나 자신조차도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자주 막스 데미안을 깊이 동경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를 미워하기도 하였으며
내 자신이 짐어진 추악한 병과 같은 생활의 빈곤함에 대해
은연중 그 책임을 그에게 전가시키고 있었다.

학생 기숙사에서 나는 귀여움을 받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존중을 받지도 못했다.
처음엔 놀림을 받았고 다음엔 경원당했으며
음울한 녀석, 불쾌한 별난 녀석으로 취급되었다.
나는 그 역할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한층 더 과장하기까지 했는데
표면적으로는 가장 사나이답게 세상을 멸시한다는 듯이
고독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남몰래 비애와 절망감에 몸부림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집에서 쌓아두었던 지식을 조금씩 파먹었는데
지금의 학급이 이전의 학급에 비해 다소 뒤떨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나이가 같은 또래를 어린애라고 얕보는 습관마저 생겼다.

일 년쯤,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아무런 새로운 변화는 없었다.
나는 기꺼이 집을 다시 떠나왔다.
11월 초순의 일이었다.
나는 어떤 날씨에도 생각에빠져 정신없이 산책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데
그렇게 걸으면서 나는 일종의 즐거움을,
우울과 염세와 자기 모멸감에 가득 찬 뒤틀린 기쁨을 맛보곤 하였다.
어느 날 나는 축축히 안개가 내리고 있는 해질녘에
교외에 있는 공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공원의 넓은 가로수 길은 텅 빈 채 나를 맞아들였다.
길에는 낙엽이 겹겹이 깔려 있었고
나는 어두운 쾌감을 느끼면서 발로 그 낙엽을 헤적거렸다.
축축하면서도 쓴 냄새가 공기 속을 떠돌았고
먼 곳의 나무들은 안개 속에서 도깨비처럼 그림자를 지으며 서 있었다.
긴 가로수 길의 끝에서 나는 망설이는 심정으로 멈춰서서
검은 나뭇잎을 쳐다보며 그것들이 바스라져 사라져가는
축축한 냄새를 탐욕적으로 들어마셨다.
나의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그 냄새에 응답하며 환영의 뜻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 인생의 무의미함이여!

누군가 옆길에서 바람에 외투의 높은 깃을 펄럭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내가 그 자리를 떠나려 하자 그 사람이 나를 불렀다.
”이봐, 싱클레어.”
다가운 사람은 우리 기숙사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알폰스 베크였다.
나는 그를 만나는 것을 좋아했는데 내게도 다른 애들에게 하는 것 처럼
언제나 비꼬듯이 이야기하며 어른인 척하는 태도를 제외하면
별달리 그에 대해 반감을 갖진 않았었다.
그는 곰처럼 힘이 세고 기숙사의 사감을 꼼짝도 못하게 하고 있다는
김나지움 학생들간의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넌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니?”
그는 어른들이 때로 우리 또래의 학생들을 어른처럼 대해줄 때와
같은 어조로 상냥하게 말을 했다.
“어디, 내기를 해볼까. 너 시를 짓고 있지?”
”전혀 그렇지 않아.”

나는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끊었다.

그는 낄낄거리고 웃으며 내게로 다가와서
전혀 익숙치 않은 태도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경계할 건 없어, 싱클레어.
내가 그 정도도 모를 줄 아니?
이렇게 안개가 내리는 가을 저녁에 사색에 잠겨 거닐 때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법이거든.
그럴 때 사람들은 흔히 시를 쓰지.

그런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물론 사라져가는 자연에 대해서나 아니면
그것과 비유되는 사라져간 청춘에 대해서 .
하인리히 하이네를 봐.”
”난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 말에 항의했다.
”그래, 좋도록 생각하렴!
그런데 이런 날씨에는 한잔의 포도주나 아니면 비슷한 것이 있는
조용한 곳을 찾아가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때 잠깐 나를 따라올래?
나도 마침 혼자니까.

생각이 없니?
네가 모범생이 되겠다고 한다면 굳이 권하진 않겠다만.”


우리는 곧 조그만 교외의 주막집에 마주앉아
다소 미심쩍은 맛의 포도주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언지 새로운 맛이 느껴지긴 했다.
나는 술을 마셔본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곧 취하여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나의 내부의 창문이 활짝 열린 것 같았고 세계가 그 속에 비쳐들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참으로 무섭게도 오랫동안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지내왔던 것이다.
나는 정신없이 지껄였고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까지 멋지게 해치웠다!

베크는 기꺼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마침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는 내 어깨를 치며 아주 근사한 녀석,
재주있는 녀석이라 불렀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켰고 그러한 이야기들이 인정을 받았다는 것,
그것도 나이많은 선배에게서
제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날뛰었다.

나는 독창력있는 녀석이라고 한 그의 말은
내 마음속에 감미롭고도 독한 포도주처럼 스며들었다.
세계는 새로운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고
사상은 수백의 세찬 샘처럼 솟구쳤으며 영혼과 불이 나의 내부에서 불타올랐다.

우리는 선생님과 급우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멋지게 의기투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리스인과 이교도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베크는 나로 하여금 정사에 대한 고백을 들으려 애를 썼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야기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할 만한 경험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에서 혼자서만 느끼고, 만들어내고,
공상해온 것은 나의 내부를 불태우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은 술의 힘으로도 불가능했다.

여자에 대해서라면 베크 자신이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했다.
나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었지만
듣고 있자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온 일들이
사실에 있어서는 아주 평범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알폰스 베크는 열 여덟살쯤 되었을 뿐이지만 벌써 경험이 많았다.
모든 경험 가운데서도 베크는 특히 처녀들이란
아름다운 일이나 은근한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경험을 하였는데
물론 그것은 좋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이었다.

부인네들에게서 더 많은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는데
그네들이 훨씬 그 점에 대해 영리하다는 것이었다.
가령 문방구 주인인 야크겔트 씨의 부인 같은 여자와는 이야기가 잘 통하고
그 가게의 카운터 뒤에서 이제까지 있어온 일들을
어떤 책에도 적힐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넋을 잃고 이야기에 빠져들어 멍청히 앉아 있었다.
물론 내가 야크켈트 부인을 사랑하게 될 리는 없을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이먹은 사람들에게는 나는 꿈도 꾸어보지 못한
어떤 샘이 흐르고 있는 것이리라.
그 이야기에는 약간의 거짓말도 섞여 있으리라 생각되기도 했고
그가 말한 것은 내 생각 속에서의 사랑의 맛보다는
보잘것없고 평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모두 사실이었고 생활이며 모험이었던 것이고
지금 이 순간 그것을 모두 실제로 경험하고
그 경험을 아주 일상적인 일처럼 취급하는 사람이 내 곁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다소 뜸해지고 활기를 잃었다.
나는 더 이상 천재적인 어린 녀석이 아니었으며
단지 어른의 말에 혹해 귀기울이고 있는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수개월 동안의 나의 비참한 생활에 비한다면 천국에서의 일처럼 감미롭게 들렸다.
주막에 앉아 있는 일에서부터 우리의 이야기 내용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엄격히 금지되고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 속에서 미흡하나마 정신적인 어떤 것을 맛보았고 혁명의 징후를 감지했다.

나는 그날 밤의 일을 뚜렷이 기억한다.
우리가 희미하게 타오르는 가스등의 곁을 지나
차갑고 축축한 밤공기 속으로 귀가를 재촉했을 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취해 있었다.
기분은 좋지 않았고 사실 몹시 괴로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 외에 무엇인가 매력과 감미로움이 있었으니
그것은 반란과 방종이었고 생명력과 정신이었다.
베크는 나를 보고 새파란 풋나기 녀석이라고
투덜거리며 욕하긴 했지만 나를 끝까지 책임졌다.
그는 나를 반즘 떠매다시피 하여 기숙사까지 데리고 왔고
어찌어찌해서 열려져 있는 창문으로
무사히 들키지 않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극히 짧은 동안의 죽은 듯한 잠에서 깨어나자
마음은 괴로왔고 발광할 듯한 고통이 나를 덮쳐왔다.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낮에 입었던 샤쓰는 형편없이 구기어졌고
웃옷과 구두는 방바닥에 팽개쳐진 채로 있었으며
땀내와 토사물의 냄새가 풍기고 두통과 구토증과
미칠 듯한 갈증이 나를 휩싸고 있는 동안
홀연 내 마음의 거울에는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한 영상이 비쳤다.

나는 고향과 부모님의 집,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들과 정원을 보았고,
조용한 고향 집의 내 방을 보았으며
학교와 시장을 보았고, 데미안과 견신례의 장면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은 밝게 빛나고 있었으며 모두 아름답고 경건하고 청순하게 보였다.
이 모든 것은 그렇다는 것을 나는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어제까지도, 아니 몇 시간 전까지도 나의 것이었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지금 이 순간 비로소 사라져버리고 저주를 받고 더 이상 나에게 속해 있지 않으며
나를 거부하고 증오에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옛날 가장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의 정원에서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친근함,
어머니의 다정한 입맞춤과 매번의 성탄절,
경건하고도 명랑했던 주 일요일 아침과 정원에 피어 있던 온갖 꽃
이 모든 것들은 황폐해지고 말았다.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내 스스로 짓밟아버린 것이다!
만약 지금이라도 사자가 와서 나를 묶어 쓸모없는 인간,
신성 모독자로 취급하여 교수대로 끌고 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기꺼이 따라가며 그 일을 받아들였을 것이었다.

나의 내면은 이러했다.
천지를 헤매어 다니며 세상을 얕잡아 본 자여!
외람된 정신으로 데미안의 사상에 공명하던 자여!
쓸모없는 인간이며 추잡하고 술에 취하고 더럽고 구역질이 나며
저열하고 거칠어진 짐승 같은 자이며,
추악한 충동의 노예가 된 내가 이럴 수밖에 더 있을까!

온갖 청순함과 빛과 사랑스런 마음으로 가득 차 있던 정원에서 자란 나,
바하의 음악과 시를 사랑했던 나, 이런 내가 그런 모습이 될 수 있다니!
내 자신의 웃음소리가, 술에 잔득 취해 자제력을 상실한 채
충동적이고도 바보처럼 낄낄거리던 웃음소리가 아직도 들려오고 있었으며
나는 심한 구역질과 분노를 느꼈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괴로운 가책 속에서도 고통을 견디는 것은 거의 향락에 가까웠다.
내 마음은 너무나 오랫동안 맹목적이고도 미련스럽게 움츠러들어 있었고
너무나 오랫동안 소리를 죽인 채 쇠잔하게 웅크리고 있었으므로
이런 가책과 고통의 전율과 영혼의 어떤 추악한 감정조차도 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는 분명 감정이 있었고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심장이 고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비참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나는 이렇듯이 해방이나 봄과 같은 그 무엇을 느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나는 거칠게 타락해가고 있었다.
최초의 주정은 얼마 되지 않아 최초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우리 학교에서도 폭주가 성행했고 난행이 속출했었고
나는 그들 가운데 최연소자 축에 끼었는데 얼마가지 않아
한몫 거드는 축이나 풋나기가 아니라 우두머리며 샛별 같은 존재였고
유명하고도 거침없는 주막집의 단골이 되었다.
나는 다시 한번 완전히 어두운 세계, 악마의 세계 속으로 투신했고
이 세계에서는 아주 근사한 녀석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내 자신을 스스로 파멸시켜가는 미치광이의 소굴에서 살고 있었던 것인데
친구들에게는 대장이니, 근사한 녀석이니,
비상하게 날카롭고 재치가 번득이는 녀석이라고 인정받고 있었지만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는 불안에 갇힌 찬 영혼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오전엔가 주일 예복차림으로 명랑하고 즐겁게 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보았을 때 돌연 눈물이 흘러내렸던 일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누추한 주막의 더러운 탁자에 기대어 맥주에 취해 낄낄거리면서
터무니없이 방탕한 풍자로 친구들을 웃기고 때로는 놀리고 있는 동안에도
내 마음속의 나는 남몰래 내가 조롱하는 모든 것에 대한 공경심을 품고 있었으며
나의 영혼 앞에, 나의 과거와 어머니 앞에,
그리고 신 앞에 울면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가 한 번도 나의 패거리들과 일체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과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고독했고 그것으로 인해
그렇게도 괴로와했던 것에는 근거가 있었다.
나는 가장 난폭한 패의 마음에도 드는 주막집의 호걸이며 독설가였다.
나는 선생, 학교, 부모, 교회에 대한 생각이나
이야기에서는 재치와 용맹을 떨쳤다
나는 음담패설조차도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 했으며, 한 가지쯤은 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패거리들이 여자에게 갈 때만은 한 번도 끼지 않았던 것인데
그것으로 미루어 나는 철면피한 탕자임에 틀림없는 척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외로웠고 사랑에 대한 격렬한 동경과
가망없는 그리움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나 이상 상심하기 쉽고 부끄럼을 많이 타는 사람은 없었다.
때로 젊은 처녀들이 아름다고 말쑥한 차림으로 명랑하고 우아하게

걸어가는 것을 보면 그들은 근사하고 깨끗한 꿈처럼 느껴졌고
나보다 천 배나 선량하고 청순하게 생각되었다.

 


(2)


얼마 동안 나는 야크겔트 부인의 문방구에는 가지도 못했는데,
그 여자를 보면 알폰스 베크가 그녀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생각날 것이었고
그러면 내 얼굴이 무참하게 새빨개지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새로운 패거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독학 이질적인 존재라고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더욱더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올 수가 없었다.
이젠 폭음을 하고 터무니없는 장담을 해대는 일이 정말로
내게 한 번이라도 즐거웠던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사실상 나는 술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번번이 고통스런 결과를 당했다.
만사가 다 강제적이었다.
그밖에 다른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몰랐으므로 그저 하던 그대로 계속했을 뿐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혼자인 것을 무서워했고,
노상 마음이 그리로 향해가는 온화하고 수줍은 내적인 자작이 두려웠으며
빈번히 엄습해오는 따뜻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결핍되어 있었다. ---
그것은 진실한 친구였다.
내가 좋아하는 동급생이 두 서너 명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실한 축에 속해 있었고
나의 악행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아무에게도 비밀스런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피했다.
모두들 나를 근본이 흔들리고 있는 희망없는 불량학생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선생님들도 나의 행동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누차 혹독한 처벌을 내리기도 했으나
마침내는 퇴학 처분을 받게 되리라고들 기대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착한 학생은 아니었고,
이러한 방탕한 생활을 더 이상 지탱해갈 수는 없다고 느끼면서도
애써 그러한 악행을 고집해감으로써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고독하게 만듦으로써
신이 우리들 자신에게로 인도해줄 수 있는 길은 너무도 많다.

신은 그때 나와 함께 이런 방탕의 길을 갔던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악몽과도 같았다.
더러운 것, 찐득거리는 것, 깨어진 맥주잔과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지껄이며 보낸 밤들 속에서 나는 몽유병자처럼 쉴새없이 괴로와하면서도
구역질나고 더러운 길을 기어다니고 있었던 내 모습을 본다.

주에게로 가는 도중에 악취와 쓰레기로 가득 찬
뒷골목의 진흙탕 속에 빠져버리는 그런 꿈 이야기가 있었다.
나도 그런 지경이었다.
보잘것없는 짓을 함으로써 나는 더욱 고독하게 되었고,
나와 나의 유년 시절 사이엔 냉혹한 시선으로 망을 보는 문지기가 버티어 선
굳게 닫힌 낙원의 문이 생겨났던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내 자신에의 향수의 처음이었으며 그 사실의 깨달음이었다.

사감 선생님으로부터 경고의 편지를 받고 아버지께서 성○○시에 오셔서
예기치 않게 내 앞에 나타나셨을 때 나는 기겁을 하고 몸에 경련까지 일으켰다.
그러나 그 겨울이 다갈 무렵 두 번째로 오셨을 때,
이미 나는 냉담하고 무심해져 있었고,
꾸중을 하셔도, 당부를 하셔도, 어머니를 상기시키셔도 나는 예사로 들어넘겼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께서는 몹시 노여워하시며 만일 내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불명예스럽고도 모욕적으로 퇴학을 시켜서 감화원에 집어넣겠다고 말씀하셨다.
하실 테면 하시라지! 아버지께서 떠나가신 후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아버지께서는 내게서 아무런 약속도 듣지 못하셨고
내게로 통하는 길도 발견하지 못하셨다.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러한 일이 아버지로서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장차 무엇이 되든 나에겐 상관이 없었다.
주막집에 앉아서 지껄여대는 따위의 기이하고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방식으로
나는 세상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것이 내 항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내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부수어갔고
때때로 사태는 이런 식으로 파악되곤 했다---
만약 세상이 나와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보다 더 나은 자리, 보다 더 가치있는 일을 부과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필경 자멸하고야 말 것인데,
그 책임은 마땅히이 세상이 져야 하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 해의 성탄절 휴가는 정말 불쾌했다.
나를 보신 어머니는 깜짝 놀라셨다.
나는 키가 한층 커졌고 야윈 얼굴은 생기없이 축 늘어진데다
눈 언저리엔 염증이 나서 잿빛으로 찌들어 처량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갓 나기 시작한 코 밑의 엉성한 수염 자국과
최근에 쓰기 시작한 안경이 나를 한층 낯설어 보이게 했다.
누나들은 뒤에서 킥킥거리고 웃었다. 만사가 불쾌했다.
서재에서 아버지와 나눈 대화도 불쾌하고 입맛이 썼으며
두서너 명의 친척과 나눈 인사도 그러했으며
무엇보다도 불쾌했던 것은 성탄절 전야였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후 이날은 우리 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온 날이었고,
축제와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qahslarhk 나와의 유대를 거듭 새롭게 해주는 저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성탄절에는 매사가 닫답했고 곤혹스러울 뿐이었다.
여태껏 해오신 대로 아버지께서는
‘그들은 그곳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었노라’하는
들판의 목동에 관한 복음서의 귀절을 봉독하셨고,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누나들은 기쁨에 넘쳐 선물이 놓인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음성에는 즐거운 기색이 없었고
얼굴은 늙고 피곤해 보였으며 한결 조그맣게 오그라들어 보였다.
어머니는 슬픈 표정을 하고 계셨다.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견딜 수 없이 괴롭고 거북하게 느껴졌다.
선물과 축복, 복음서와 불이 밝혀진 트리조차 그러했다.
꿀을 바른 과자는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향긋한 추억의 짙은 구름을 만들어내었다.
전나무의 향기는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이 밤과 축제일이 한시빨리 끝나기를 초조히 기대했다.

온 겨우리 그런 식으로 지나갔다.
방학이 되기 직전에 나는 교사회로부터 심한 경고를 받았고
제명시키겠다는 위협을 받았었다.
더 이상 이런 생활을 지속시켜갈 수는 없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나는 데미안에게 특별한 원망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를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성○○시로 간 초기에 나는 그에게 두 차례의 편지를 보냈었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방학 동안에 그를 방문하지 않았다.

지난 겨울 알폰스 베크와 만났던 그 교외의 공원에서 봄이 시작될 무렵,
가시울타리가 푸릇푸릇해지기 시작할 그때
나는 우연히 한 소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불쾌한 생각과 걱정에 휩싸여 혼자 터덜거리고 있는 차이었다.
건강은 나빠지고 돈은 끊임없이 모자랐고
친구들에게 빌어 쓴 액수는 점점 불어나서 집에서 돈을 타내기 위해서는
그럴 듯한 지출 명목을 생각해 내야 했다.
여러 군데의 가게에는 담배나 기타 다른 외상 물건값이
자꾸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걱정거리들이 아주 심각한 정도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머지않아 이곳의 생활이 끝장이 나서 내가 물속에 뛰어들거나
아니면 감화원에 끌려갈 지경이 되면
이런 일쯤이야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는 노상 그런 저런 종류의 아름답지 못한 일에
직접적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것들은 나를 몹시 억압하고 있었다.

그런 일상의 와중에서 나는 봄날의 공원에서
내 마음을끄는 한 젊은 처녀를 만났던 것이다.
키가 크고 날씬하며 우아한 차림을 한 그 여자는 영리한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그 여자는 첫눈에 내 마음에 들었는데
나는 그런 느낌의 여자를 좋아했으므로 당장에 그 여자에 대한 공상을 시작했다.
나보다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훨씬 성숙하고 우아하고 윤곽이 잘 정리되어 보였으며,
벌써 완전한 귀부인의 자태를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는 내가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교만함과 처녀다움이 내재해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마음에 둔 여자에게 접근하는 일에 성공해보지 못했으며
이 여자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의 인상은 과거의 어느 소녀들보다 더 깊었고
그 짝사랑은 내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돌연 다시금 내 앞에는 고귀하고 존경심을 일으키는 영상이 나타났다
나의 내부에 있어서는 어떤 것에 대한 갈망이나 충동도
경건함과 숭배하고자 하는 소원만큼 깊고 열렬한 것은 없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록 단테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영국판의 그림에서 나는 그녀를 본 적이 있었고
그 그림의 복제를 잘 간직하고 있었다.
그 그림은 영국의 라파엘 초기파의 화풍으로 그려진 소녀의 모습이었는데
갸름하고 긴 얼굴에 영혼이 깃든 손과 표정,
길쭉길쭉한 사지에 날씬한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내 마음을 끈 처녀도 모습에 있어서는 날씬한 자태와
소녀다운 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얼굴 표정에서
다소 정신화된 점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내가 사랑하는 그림의 여자와 비슷하였지만 전적으로 유사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베아트리체와 말을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시의 나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내 앞에 자기의 모습을 세워놓음으로써 성스러운 전당을 열어주었고
나로 하여금 사원의 기도자가 되게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주막집 순례와 밤의 싸움질로부터 소원해졌다.
나는 다시 홀로 있을 수 있게 되었으며 독서와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이러한 돌발적인 전향으로 나는 숱한 조소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사랑할 대상, 사모할 대상을 가지게 된 것이었으며
이상이 되살아났고 예감과 신비롭게 아롱진 어스름이 생활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를 여타의 조소에 무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비록 숭배하는 영상의 하인이나 노예로서일망정
내 자신 속에 깃들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노라면 감동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금 나는 무너져버린 생활의 폐허 속에서
‘밝은 세계’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진지하게 시작했으며
마음속에서 어둠과 악을 몰아내고 완전히 밝은 세계 속에 머물고자 하는
열망으로 신들 앞에 무릎을 꿇는 심정이 되었다.
지금 내가 영위하고자 하는 ‘밝은 세계’는 어느 정도 나의 창조물이었다.
그것은 이미 어머니나 책임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것과는 달랐으며
거기에는 책임감과 일종의 자기 억제력이 요구되었으며
새롭게나 자신에 의해 발견된 자기 봉사였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혀 와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고자 애썼던
성적인 욕구도 이 성스러운 불 속에서 정신과 예배로 정화되어갔다.
더 이상 음침하고도 흉측한 것들이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신음하면서 지낸 밤들, 음란한 생각 앞에서의 심장의 고동,
금지당한 문 앞에서 엿듣던 소리,
온갖 음탕한 짓거리들도 다 존재해서는 안되었다.
나는 이 모든 것들 대신 베아트리체의 초상을 모신 제단을 마련하였고
그 여자에게, 또한 정신과 여러 신들에게 나를 바쳤다.
음침한 세계 속에서 찾아온 삶의 대가를 밝은 세계의 제물로 바쳤다.
나의 목적은 향락이 아니라 청순함이었으며
행복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정신성이었다.

이 베아트리체에 대한 숭배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어제까지는 조숙한 풍자꾼이었던 나는 성자가 되려는
희망을 품은 사원의 하인이 되었다.
나는 내 몸에 젖어 있던 나쁜 생활 습관을 청산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먹고 마시는 일에서나
이야기나 옷차림까지도 여기에 부합되도록 신경을 썼다.
나는 아침마다 냉수 마찰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일은 대단한 노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나는 진실되고 품위있는 행동을 했고 자세를 똑바로 하고
천천히 위엄있게 걸으려고 애썼다.
보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였을지도 모르겠으나
내 마음은 그만큼 신에의 봉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신념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 가운데서 나는 한 가지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영국판 베아트리체의 초상이
그녀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았던 점이 일의 발단이었다.
나는 그 여자를 내 나름으로 그려보려고 애썼다.
아주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갖고 나는 내 방에
---최근에 나는 독방을 쓰게 되었다---

깨끗한 종이와 그림물감과 붓을 챙겨두었고
팔레트, 유리잔, 도자기 접시, 연필을 준비했다.
새로 사온 조그만 튜브 속에 든 색고운 템페라 물감이 나를 매혹시켰다.
지금에 와서도 처음으로 물감을 뽀얀 접시 위에 짰을 때의
그 빛깔을 눈앞에 보는 것처럼 기억할 수가 있다.
그것은 불타는 듯한 크롬 옥시트 초록색이었다.
나는 신중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른 것을그려보려고 했다.
장식 무늬, 꽃, 작은 환상적인 풍경화, 교회 앞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실버들이 서 있는 로마의 다리 같은 것을 그렸다.
나는 그림 그리는 일에 완전히 넋을 잃기도 하고
그림물감 상자를 처음 가지는 아이처럼 행보해 하기도 했다.
그러다 나는 드디어 베아트리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 몇 장은 완전한 실패작으로 나는 그것을 내던져버렸다.
때때로 거리에서 만나던 그 소녀의 얼굴을
마음속에서 생각해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잘 되지가 않았다.
결국 나는 그소녀를 그리는 것은 포기하고 생각나는 대로,
그림물감이나 붓이 이끌어가는 대로 얼굴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얼굴은 꿈에서 본 모습이었는데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시도를 계속해나갔다.
한 장 한 장 새로운 얼굴이 완성되어갈 때마다 그 모습은 한결 선명해졌고
결코 실제와 같지는 않았지만 그 소녀의 타입에 가까워가는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꿈꾸는 것처럼
붓으로 줄을 긋고 화면을 메워나가는 것에 익숙해졌다.
어떤 모델을 생각하며 그린 것도 아니었지만 장난삼아 그려가는 동안에,
무의식중에 형상화되어간 것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이제까지 그린 어떤 얼굴보다
한층 더 강력하게 내게 말을 건네오는 한 얼굴을 완성시켰다.
그 얼굴은 이미 이전의 어느 소녀의 모습은 아니었는데
오래 전부터 내가 그린 그림은 더 이상 그 여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녀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소녀의 얼굴처럼 보였고
머리칼도 그녀의 것과 같은 옅은 금발이 아니라 붉은 빛이 도는 갈색이었다.
이마는 단단하고 야무지게 보였고 입술은 붉게 타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딱딱하고 가면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그렇지만 그 얼굴에는 인상적이고도 신비스러운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내가 완성시킨 그림 앞에 앉아 있자니 어떤 야릇한 감동이 전해져왔다.
그것은 신의 초상의 일종이거나 신성한 가면처럼 보였고
절반은 남성적이고 절반은 여성적이며
나이를 초월한 모습으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의지가 엿보였으며 남 모르는 생명에 충만해 있으면서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얼굴은 나에게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는 것 같았고
나 자신 속에 존재하면서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은 확실히 어느 누구와 닮아 있었긴 했지만
누구와 닮았는지를 알 순 없었다.

이 얼굴은 얼마 동안 나의 모든 생각 속에
살아 움직이고 나와 함께 생활을 나누었다.
나는 그것을 서랍 속에 넣어두었는데
혹시라도 누가 보고 나를 놀려대는 것은 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혼자되기가 무섭게 그 그림을 꺼내어 그것과 사귀었다.
저녁엔 그 그림을 침대 맞은편 벽지 위에 핀으로 꽂아놓고는
잠들 때까지 바라보았으며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마자 그 그림을 쳐다보았다.

바로 그 시절, 나는 어린 아이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많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거의 몇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꿈을 꾼 적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제야 꿈들이, 아주 새로운 종류의 영상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3)


꿈속에서는 자주 내가 그린 그림 속의 얼굴이
생기를 띠고 나에게 이야기를 걸어왔으며
아주 친한 듯이, 혹은 적대적인 태도로, 때론 이맛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때로는 무한히 아름다우며 조화된 고귀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어느 날 아침 역시 그러한 꿈을 꾼 후 잠에서 깨어나
갑자기 나는 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얼굴은 말할 수 없이 다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내 이름이라도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만큼이나 나를 잘 알고 있는 듯,
옛날부터 항상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흥분을 억누르며 나는 그 그림 속의 얼굴을,
숱이 많은 갈색 머리칼과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입술,
그리고 믿기지 않을 만큼의 밝음을 지닌 억센 이마를 바라보았다
(그 그림은 저절로 말라 있었다).
나는 차츰 마음 속에서 눈에 익은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뛰어 일어나서 그 그림 앞에 아주 가까이 다가서서
크게 뜬 초록빛이 감도는 눈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눈을 응시하였다.
오른쪽 눈이 왼쪽보다 약간 치켜져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이 오른쪽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주 가볍게 그러나 분명히 그 눈은 움직였고,
이 작은 움직임으로 나는 이 그림이 누구의 얼굴인지를 알아차렸다‥‥‥.

어쩌면 이렇게 늦게서야 그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던 것인지!
그것은 데미안의 얼굴이었다.
그 후 나는 종종 내 추억 속에 남아 있는
데미안의 진짜 표정과 그 그림을 비교해보았다.
닮기는 했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데미안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어느 초여름 석양 무렵, 서쪽으로 나 있는 창문을 통해
기울어져가는 태양빛이 붉게 비쳐들었다.
방안은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나는 베아트리체의 초상, 아니 데미안의 초상을
핀으로 창틀 가운데에 고정시키고
석양이 비쳐드는 모양을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얼굴은 윤곽이 흐려져 몽롱해 보였지만
붉게 그늘진 눈과 이마의 밝음과 유난스레 붉은 입술은
더욱 생생하고 깊게 타올랐다.

석양은 곧 사라져 버렸지만 나는 오랫동안 그 앞에 마주앉아 있었다.
그러자 점차 그 얼굴은 베아트리체나 데미안이 아니라 ---
내 자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그림은 나와 닮진 않았다 ---
그럴 이유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렇지만 극서은 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는 것이고,
나의 마음, 나의 운명 혹은 나의 데몬이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내가 다시 친구를 구한다면 그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언젠가 내가 사랑하게 된다면 사랑하는 이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의 삶과 나의 죽음 역시 그러할 것이엇다.
이러한 생각은 나의 운명의 울림이었고 율동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이제까지 읽었던 어떤 책보다
한층 강한 인상을 남긴 책을 한 권 읽었다.
훗날에도 니체를 제외한다면 그러한 감동을 준 책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시간과 금언이 수록되어 있는 노발리스의 책이었다.
그 내용의 대부분을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 귀절들은 하나같이 내 마음을 이끌어주고 나를고무시켜주었다.
지금 그 금언의 한 귀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나는 그 귀절을 펜으로 초상의 아래에 적어두었다.
‘운명과 마음은 하나의 개념에 대한 이름들이다.’
그 말을 나는 그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베아트리체라고 이름 지은 소녀와 나는 여전히 자주 마주쳤다.
나는 이미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게 되었지만
늘 부드러운 화합과 감정의 어떤 예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대와 나는 맺어져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실체가 아니라 그대의 영상만이 그럴 뿐이다,
그대는 내 영혼의 일부분인 것이다 라고.

막스 데미안에 대한 동경이 다시 강렬하게 타올랐다.
나는 그의 소식을 수년 내에 한 번도 듣지 못했었다.
단 한번 방학 때 그를 만난 적이 있긴 했었다.
지금에서야 나는 이 잠깐 동안의 만남을이 기록 속에 숨겨두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이 수치와 허영심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나는 그것을 만회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내가 술집에 드너들던 시절의 어느 방학 때
언제나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고 단장을 휘두르면서 옛모습 그대로,
멸시하고 싶은 얼굴을 한 거리의 건달들을 구경하면서
건들건들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나는
그 옛날 친구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몸이 오싹해졌다.
번갯불처럼 프란츠 크로머가 생각났다.
제발 데미안이 그때의 일을 잊어버렸다면 좋겠는데!
그에게 신세 갚아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불쾌했다.
사실, 어리석은 아이 때의 일이었긴 해도 신세는 신세였던 것이다.

 

그는 내가 인사를 하려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는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 태연하게 인사를 했는데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옛날과 똑같은 그의 악수였다!
꽉 움켜쥐는,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남성적인 악수!
그는 주의깊게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싱클레어, 너 많이 컸구나.”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아 보였다.
이제껏과 똑같이 늙어 보였고 동시에 똑같이 젊어 보였다.
우리는 함께 산책을 하며 순전히 딴 이야기만 했는데
그 당시의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 내가 몇 번이나 답장도 받지 못한 편지를 보냈던 일이 생각났다.
아, 제발 그 일을 기억해내지 못했으면 좋겠는데.
그 바보 같은, 바보 같은 편지를!
그는 편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때에는 아직 베아트리체도 초상도 없었고
나는 황량한 시기의 한복판에 있었던 참이었다.
교외로 나가자 나는 주막집에 가자고 제의를 했다.
그는 함께 갔다. 나는 잔뜩 멋을 부리며 포도주 한 병을 주문해 잔에 채우고
그와 잔을 부딪치고는 학생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첫 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술을 자주 마시니?”

그가 나에게 물었다.
”응, 물론.”

나는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것 외에 무슨 할 일이 있니?
아직까지는 제일 재미있는 일이니까.”
”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니?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제법 근사한 점도 있으니까 말이야.
도취의 황홀감과 바커스적인 요소가 말이야.
그러나 주막집에서 시간을 낭비해버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멋이 쉽게 사라져버릴 거라고 생각해.
술집을 찾아다니는 일은 진짜 건달 같은 짓이라고 생각된단 말이야.
어떤 때는 하룻밤 내내 타오르는 관솔불 곁에서
진짜 아름다운 도취경과 흥분을 맛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러나 언제나 같은 식으로 자꾸 술잔을 기울여댄다는 것이 정말 잘하는 짓일까?
매일 밤 단골 주막 술상을 보고 있는 파우스트를 상상할 수 있겠니?”

나는 술을 마시며 적의에 찬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누구나가 다 파우스트는 아니니까.” 나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는 다소 놀랍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전처럼 싱싱하고도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웃음을 웃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 따위 것을 가지고 다투고 있는 거지?
하여간 술꾼들이나 건달의 생활이 어떻게 보면
모범적인 시민의 생활보다 훨씬 더 생기있는 것이기도 할 거야.
그리고---언젠가 한 번 읽은 적이 있는 이야기인데---
방탕하 생활은 신비주의자가 되기 위한 최선의 준비활동이란 말이야.
예언자가 되는 것은 언제나 성 어거스틴 같은 그런 인물이거든.
그도 예언자가 되기 이전에 향락가였고 방탕아였었거든.”

나는 은근히 미심쩍은 심정이 되어
그에게서 훈계조의 이야기는 듣지 않으려 하였다.
그래서 나는 냉담하게 말했다.
“그렇지. 누구나 다 자기 식대로 살아가는 거니까.
솔직이 말해서 나는 예언자 같은 건 될 마음이 전혀 없어.”
데미안은 눈을 지그시 내리깐 채 알아들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봐 싱클레어.” 그는 천천히 말했다.
“너에게 잔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말이야---
무슨 목적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지는 우리 둘 다 모르고 있어.
하지만 너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것,
너의 생명을 이루고 있는 그것은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우리들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우리들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해내는 누군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네게 도움이 될 거야.
---자, 이만 양해를 구하네. 나는 집으로 가야겠어.”

우리는 짤막하게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몹시 마음을 상해서는 그대로 혼자 앉아서 남아 있는 술을 다 마시고
집으로 가려고 했을 때 데미안이 벌써 술값을 치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일이 더한층 마음의 울화를 돋우었다.

이 사소한 사건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가 그 교외의 주막에서 내게 한 말들을
이상할 정도로 생생하게 한 마디도 잊지 않고 기억해낼 수가 있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네게 도움이 될 거야.”

아직도 창틀에 고정되어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그 그림에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아직도 두 눈만은 생생히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데미안의 눈초리였다.
아니면 나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눈초리였다.
온갖 것을 알고 있는 눈초리였다.

나는 데미안에게 얼마나 깊은 동경을 품고 있었던가!
그러나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나에겐 도달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아마 어디에선가 공부를 계속하고 있을 터이고,
그가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그의 어머니도 우리 고장을 떠났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크로머의 일을 포함해서 나는 데미안과 관련된 온갖 일들을 다시 생각해내었다.
그가 일찍이 내게 이야기해주었던 것들이 생생하게 지금 다시 울려왔고,
그 말들은 오늘에 있어서까지도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나와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우리가 별 기쁘지 않은 해후를 했을 때
방탕자와 성자에 관해 이야기를 했던 뜻도 갑자기 마음속에서 분명해졌다.
나에게도 그가 이야기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새로운 생에대한 충동과 함께 청순함에 대한 욕구와
성스러움에 대한 동경이 나의 마음속에서 솟구쳐오르기까니
나 역시 술주정과 더러움과 마비와 방탕 속에서 헤매고 다니지 않았던가?

 

기억을 더듬고 있는 동안 밤이 깊어갔고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의 기억 속에서도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밤나무 아래에서 그가 프란츠 크로머에 대해 캐묻고
그와 관련된 나의 비밀을 알아맞히던 때의 빗소리였다.
학교에 오가는 길에 나누었던 대화, 견신례 수업 시간,
이렇게 한 가지의 기억이 끝나면 또 다른 기억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스 데미안과 맨 처음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무슨 문제가 있었던가?
그 기억은 당장에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시간을 두고 그 기억을 되살리기에 열중했다.
그러자 그 생각도 다시 떠올랐다.
그가 카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뒤 우리들은 우리 집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 현관 아치 밑의 초석 안에 새겨져 있는
낡고 퇴색한 문장에 관해서 이야기했었다.
그는 그것에 대해 흥미를 느꼈으며
누구나 그런 물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었다.

잠자는 동안 나는 데미안과 그 문장의 굼을꾸었다.
데미안이 그것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어떤 때는 조그맣고 잿빛이 되었다가도
때로는 굉장히 커져서 여러가지 빛깔을 띠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그것은 언제나 한가지고
똑같은 문장이라고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그는 나에게 그 문장을 삼키라고 명령했다.
그것을 삼키자 나는 질겁을 했다.
삼킨 문장 속의 새가다시 살아나서는
내 배를 채우고 뱃속을 쪼아대기 시작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죽은 듯한 두려움을 느끼며 나는 놀라서 잠을 깼다.

정신이 말똥해졌다.
한밤중이었고 방 안으로 비가 들이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닫으려고 일어났을 때 방바닥에 놓인 무언가 흰 것을 밟았다.
아침에서야 그것이 내가 그린 그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림은 물에 젖은 채로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불룩하게 부풀어 올라 잇었다.
나는 그것을 말리려고 흡수지 사이에 끼워 두터운 책 속에 넣어두었다.
다음 날 다시 보니 잘 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림은 변해 있었다.
붉은 입술은 다소 파리해지고 얼마간 가늘어져 있었다.
이제야말로 정말 데미안의 입 그대로였다.
나는 그 문장의 새를 그리기 시작했다.
본래의 그 새 모양을 나는 똑똑히 알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것은 너무 낡아서 때때로 다시 색칠을 했기 때문에
어떤 부분은 가까이에서조차도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 새는 서 있었거나 아니면 무엇인가의 위에 앉아 있었는데
한 송이 꽃이었는지, 바구니나 둥우리였는지 또는 나무 꼭대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소한 것에 마음쓰지 않고 마음속에서
분명히 영상이 떠오르는 부분부터 그려가기 시작했다.

어떤 분명치 않은 욕구에서 나는 곧 강한 색깔을 쓰기 시작했다.
새의 머리는 내 그림에서는 황금빛이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그려나가 그 그림은 며칠 안에 완성되었다.
그려진 것은 날카롭고 겁없어 보이는 새매의 머리를 한 한 마리의 커다란 새였다.
그 새의 반신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어두운 지구에 박혀 있었고
마치 커다란 알에서 깨어나오려는 것처럼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그림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나에게는 꿈속에서 보았던 아롱진 문장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데미안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부칠 곳을 안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에 무슨 일을 할 때나 느끼던 꿈과같은 예감으로
그것이 그에게 전해지거나 그렇지 못하거나가에 그
에게 그 새의 그림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 위에다 아무것도, 내 이름조차도 적지 않고 가
장자리를 조심해서 오래내고는 커다란 봉투에 데미안의 옛날 주소를 썼다.
그리고는 그것을 부쳤다.
시험이 다가왔고, 나는 옛날보다는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나의 행실을 바로잡은 이후로 선생님들은 나를 너그럽게 대해주셨다.
지금도 역시 나는 썩 선량한 학생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제 와선 어느누구도 반 년 전의 퇴학 처분 경고에 대한
기억을 들추어내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께서도 이제는 비난이나위협조가 아닌 옛날의 어조로 편지를 보내셨다.
나는 그에게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나 어떤 이유로
내게 그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싶진 않았다.
이 변화가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의 기대와 일치되었다는 것은 우연이었다.
이 변화로 나는 다른사람을 찾아가지도 않았고
남이 나에게 접근해오는 것을 허용치도 않았으며
단지 나를 한층 더 고독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어느 곳인가를, 데미안을, 멀고 먼 운명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사실상 그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지도 못했으면서 그 한복판에서 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베아트리체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 속의 초상이나
데미안에 대한 생각으로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베아트리체는 완전히 내 시선과 생각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누구에게도 나는 꿈에 관해, 나의 기대와 내적인 변화에 관해
한마디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설사 그렇게 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원할 수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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