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도 둑
(1)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호하에 있던 안전한 내 유년 시절의 생활에 관해,
또는 어린이를 사랑하고 온화하고 밝은 환경 속에서
만족스럽고도 즐겁게 성장할 수 있도록 보살펴주는 생활에 관해서는
아름답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온갖 단어들을 통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흥미있는 것은 내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걸어왔던 그 발자취뿐이다.
물론 유년 시절의 매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온갖 아름다운 휴식처와 행복의 섬과 낙원들은 아득한 빛 속에 남겨두고
나는 다시는 그곳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아직 유년 시절에 머물러 있었던 그때의 경험,
나를 내몰고 나를 휘몰아쳐간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이런 충동은 언제나 ‘다른 세계’에서 왔으며 불안과 강요와 양심의 가책을 가져다주었고
놀랍도록 혁신적이어서 내가 머물고자 애썼던 평화로운 상태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나 있는 세계에서는
어딘가 숨을 구멍이라도 찾아야 할 것처럼 느껴지는 원시적인 충동이
내 속에서도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에 대한 호기심의 감정이
나의 적이며 파괴자로서, 금지된 유혹과 원죄로서 나를 찾아왔다.
이러한 것에 대한 호기심과 꿈과 쾌락과 불안이
내게 가르쳐준 사춘기의 비밀 같은 것은 어린 시절의 아늑한 평화와는 어울릴 수가 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으면서도 아이인 것처럼 행동하는 이중성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의식은 허용된 밝은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희미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를 완강히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비밀스런 꿈과 본능과 갈망 속에서 살았으며
그런 비밀과 의식적인 생활과의 사이에 갈수록 위태로와지는 다리를 걸쳐놓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내부의 어린이의 세계는
이미 모두 허물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러하듯이 나의 부모님들도
공개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사춘기의 생명의 충동을 도와주지 않으셨다.
단지 현실을 거부하고 갈수록 비현실적이며 허위일 수밖에 없는
어린이의 세계에 머물려고 하는 헛된 노력을 도와주실 뿐이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과연 부모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내 부모님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처리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이 나아갈 길을 발견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대부분의 소위 명문가의 자삭들처럼 이 문제를 잘못 처리하고 말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런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에게라면 특히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살아갈수록
자기의 생의 욕구와 주위의 세계가 곳곳에서 대립하게 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곧 전신의 힘을 다해 싸워서 얻어내는 것이라는
교훈을 배우는 인생의 한 기점이 되는 것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전에 사랑하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우리를 떠나려 하고
고독과 죽음과 같은 차가운 공간이 우리 주위에 다가온다고 느낄 때,
유년 시절은 점차 허물어져 없어지고
숙명적인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그러한 경험은 평생을 통해 단 한 번 가능한 것이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이 경험을 올바로 극복하지 못한 채
과거에 집착하고 모든 꿈 중에서 가장 못되고 가장 살인적인
실락원의 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다시 되돌아가자.
내게 있어서 유년 시절에 종말을 고하게 해준 감정과 환상은
별로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지 그 ‘어두운 세계’와 ‘다른 세계’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한 때 프란츠 크로머였었던 것이 지금은 내 자신의 내부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다른 세계’는 외부에서부터 다시금 나에게 지배력을 행사해왔다.
크로머와의 사건 이후 몇 년이 지난 뒤였다.
어린 시절의 그 극적이고 죄악에 가득 찬 추억은
아득히 먼 곳으로 물러가 짧은 악몽처럼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프란츠 크로머는 오래 전부터 내 생활 속에서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와 마주치게 되는 경우에도 거의 주의를 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내 비극의 또 한 명의 중요한 주인공인 막스 데미안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간혹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슨 영향을 끼치진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점점 가까이 다가와서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절의 데미안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던 바를 전부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일 년쯤,
아니 더 오랫동안 나는 한 번도 그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가급적 그를 피했고, 그는 결코 내게 추근거리지 않았다.
한 번인가, 우리가 서로 마주치게 되었을 때 그는 나에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 나서부타 나는 그의 친절에는
어떤 조소나 비꼬는 듯한 비난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간혹 하였는데
어쩌면 망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경험했던 그 사건과 그 당시에 그가 내게 끼쳤던 영향은
내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도 거의 잊혀진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을 더듬어보면 나는 그가 정말로
거기에 있어서 내 눈에 자주띄었음을 잘 알겠다.
나는그가 학교에 가는 모습을,
혼자서나 혹은 다른 큰 아이들 틈에 끼어서 학교에 가는 것을 본다.
그가 진기하게 고독하고 조용하게 그들 사이에 끼어서
자기의 특별한 분위기에 싸여 독특한 법칙 아래에 살면서
마치 별과 같이 그렇게 걸어가는 것을 본다.
누구 하나 그를 사랑하지도,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다.
그의 어머니만은 예외였지만 그는 아이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성숙한 어른으로서 어머니를 대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들은 될 수 있는대로 그를 내버려두었는데,
그 역시 좋은 학생이긴 했지만 누구의 마음에도 들려고 애쓰진 않았다.
우리는 종종 그가 선생님에게 했다는 심한 도전이나
풍자로 생각되는 어떤 말이나 비평이나 항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은 어디였을까?
이젠 그곳도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곳은 우리 집 앞 골목이었다.
어느 날 나는 그곳에서 손에 노트를 들고 서 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우리 집 대문 위에 붙어 있는 새 모양의 낡은 문장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창의 커튼 뒤에 숨어서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예민하고도 차갑고 밝은 얼굴이
문장을 향해 있는 것에 대해 깊은 경탄을 느꼈다.
그것은 어른의 얼굴이었고, 연구자나 예술가의 그것처럼 보였다.
탁월하고 의지에 가득 차 있으며
이상할이만치 밝고 차가고 총명한 눈을 가진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를 본다.
그것은 며칠 후 거리에서의 일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우리는 쓰러진 말 주위에 붙어서 있었다.
말은 아직도 수레채에 묶인 채 농부용 마차 앞에 쓰러져 있었는데
무엇인가 애원하는 듯이 비참하게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허공을 향해 헐떡거렸고
보이지 않는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려
말의 옆구리와 거리의 먼지에 서서히 검붉게 배어들고 있었다.
매스꺼움을 참으며 그 광경에서 고개를 돌리다 나는 데미안을 발견하였다.
그는 앞으로 비집고 들어오려 하지도 않고 언제나 그랬듯이
맨 뒤쪽에서 지극히 안정되고도 여유있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말의 머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여전히 깊고 고요하면서도 거의 열광적으로,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놀랄 만치 냉담하게 느껴지는 집중력을 갖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바로 그때 나는 선명하게 의식한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독특한 무엇인가를 느꼈다.
나는 데미안의 얼굴을 보고 있었는데 내가 본 것은 단지 그가 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어른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다른 더 많은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의 얼굴이 단순한 어른의 얼굴만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보았거나 아니면 느꼈다고 확신했다.
마치 여자의 얼굴과도 같은 무언가를 그의 얼굴에서 엿볼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은 어른이니 아이니, 늙었거나 절었거나를 넘어선,
어쩌면 천 년쯤 되었거나 아니면 시간을 초월한 모습 같기도 하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처럼 생각되기도 하였다.
짐승들이 그렇게 보이는 수가 있는지도 모르고 혹은 나무나 별들이
지금에 와서 어른으로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들을
그때엔 정확히 알지도 느끼지도 못했었지만,
무언가 그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느낄 수는 있었다.
아마도 그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내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나는 그를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조차도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그가 우리들과는 아주 다르고,
어쩌면 짐승이나 아니면 영혼이나 환상과도 같은 존재라고 느꼈는데
확실히 알 순 없었지만 그는 진정으로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가 닿을 수 없을 만큼 다른 사람이었다.
이것 이상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것조차도 어느 부분은 그 후의 인상에서 보태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와 나는 다시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데미안은 그의 동급생과 같은 시기에 교회의 견신례를 받지 않았었는데
그러한 일은 당시의 관습에 어긋난 것으로 또 곧 소문의 대상이 되었다.
학교에선느 그가 본래 유대인이라는 등, 이교도라는 둥, 소문이 파다했으며
어떤 아이들은 그와 그의 어머니는 무신론자라고 하기도 했고
터무니없는 사교를 믿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
소문은 한층 과장되어 그는 자기 어머니와 마치
애인 같은 관계로 살고 있다는 이야기까지도 나돌았다.
아마 이제껏 그는 신앙 생활을 하지 않고 자라났으나
그것이 그의 미래에 어떤 지장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2년이나 늦게서야 견신례를 받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 몇 달 간의 견신례 수업 동안 그는 나와 동급생이 되었다.
얼마 동안 나는 그에게서 아주 멀어져 있었는데
그와는 되도록 어울리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는 무성한 소문과 비밀에 싸여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크로머의 사건 이래로 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채무감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다가서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또한 나로서도 나 자신만의 비밀로 인해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견신례 수업의 기간은 나의 성적인 문제의 결정적인 성숙의 시기와 일치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으려 무척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건이나 교의 따위는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목사님의 이야기는 아주 멀고도 고요하며
성스러운 비현실적인 세계에서나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가치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현실적이고 자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다른 일은 지극히 생생한 바로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 상태가 나로 하여금
수업에 무관심하면 할수록 데미안에게 접근해가도록 만들었다.
그 무엇인가가 우리들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 회상의 실마리를 되도록 정확히 따라가보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것은 아직도 교실에 불이 켜져 있던 이른 아침 시간의 일이었다.
목사님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나는 거의 그 이야기를 듣지 않은 채 졸음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목사님은 좀 어조를높이시면서 카인의 표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일종의 영감이랄까, 경고 같은 것을 느꼈다.
시선을 들자 앞쪽 줄에서 데미안이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눈은 밝게 빛나며 말을 걸고 있는 것같이,
또는 진지하면서도 냉소적인 여운을 담은 것같이 보였다.
아주 잠깐 동안 그는 나를 쳐다보았을 뿐이었지만 내 마음은 갑자기 긴장되어
목사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였고 그가 카인의 표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목사님의 말씀엔 영혼이 담겨져 있지 않다는 것,
그 가르침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고
그것을 비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 순간 데미안과 나는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우리의 영혼이 다시 어떠한 연관을 갖게 되었다고 느끼자마자
그것이 마술처럼 공간 속으로 전파되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그의 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전혀 우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당시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였다---
며칠 후 데미안은 견신례 수업 시간에 갑자기 자리를 바꾸어 내 앞 줄에 와 앉았다
(빽빽이 들어찬 교실의 빈민 병원 같은 냄새 속에서
아침마다 그의 목에서 풍겨나오는 비누 냄새는
얼마나 부드럽고 신선하게 느껴졌던가를 나는 오늘날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며칠이 지난 후 그는 다시 자리를 옮겨 이번에는
내 곁에 앉았고 겨울과 봄 내내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지겨운 아침 수업은 전혀 달라졌다.
수업은 더 이상 졸리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 시간을 고대하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자주 무섭게 집중하여 목사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는데
옆에 앉은 그는눈짓 한 번만으로도 주의해서 들어야 할 이야기나
말을 내게 일러주었고 나는 기꺼이 그이 지시에 따랐다.
다른 아이와는 판이하게 다른 그의 집중된 시선은 내게 어떤 경고를 주었고
내 마음속에서 의혹과 비판적인 견해를 갖게 하였다.
때로 우리는 학과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충실치 못한 학생노릇을 하였다.
데미안은 언제나 선생님과 학급 친구들에 대해서 정중하게 행동했다.
아이들이 흔히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적도 전혀 없었고
크게 웃거나 떠들어대지도 않았고 선생님께 꾸중을 듣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나직이, 속삭인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손짓이나 눈짓만으로도 나를 그 자신의 일로 끌어들일 수가 있었다.
이러한 일은 때로는 기묘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그는 나에게 어떤 아이가 그의 흥미를 끄는지,
그러면 그가 어떤 방법으로 그 아이를 관찰하는지를 말해준 적이 있었다.
많은 아이들에 관해 그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나에게 말했다.
“내가 엄지손가락으로 너에게 신호를 하며
누구누구가 우리를 돌아다보거나 목덜미를 긁적거릴 거야.”
수업이 시작되어 내가 그 일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을 무렵
막스는 갑자기 눈에 띄는 몸짓으로 엄지손가락을 나에게 보였다.
내가 급히 지적했던 그 아이를 보면 그 아이는 으레
무슨 철사줄에라도 끌려오듯이 우리를 쳐다보거나 머리를 긁적이는 것이엇다.
나는 선생님에게도 한 번 시험해보자고 막스를 졸랐지만
그 부탁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 과제를 복습해 오지 않은 날
목사님이 나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막스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목사님은 문답 교과서 한 절을 암송시킬 아이를 찾다가
마침내 그의 시선이 나의 죄지은 듯 불안해 하는 얼굴에 멎었다.
목사님은 천천히 막스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나를 향해 손짓을 하면서
내 이름을 막 부르려고 하셨는데
그때 그는 마음이 산란해진 듯 옷깃을 만지작거리더니
자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데미안에게로 시선을 옮겨
무엇인가를 물어보려고 하다가는 갑자기 몸을 돌리고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다른 학생을 지적했다.
이 장난은 대단히 재미있었는데 막스가 번번이
나에 대해서도 같은 장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에 가는 길에 갑자기 데미안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돌아다보면 정말로 그는 거기에 있곤 하였다.
”정말로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이 생각하도록 할 수 있는 거니?”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흔쾌히 친절하고 조리있게 어른처럼 설명을 해주었다.
”아냐." 그는 말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왜냐하면, 목사님은 그렇다고 말씀하시지만
사람은 자유 의지 같은 건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야.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원하는 바를 생각하게 할 순 없듯이
나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생각하게 할 순 없어.
그러나 우린 사람들을 잘 관찰할 수는 있단 말이야.
그러면 때때로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제법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게 돼.
그렇게 되면 대개는 그 사람이 다음 순간엔
무엇을 할 것인지도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아주 간단해. 단지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지.
물론 연습이 필요하긴 해.
예를 들면,
나비 중에는 수컷보다는 암컷의 수가 훨씬 적은 종류의 부나비가 있어.
이 부나비도 역시 다른 곤충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번식을 하지.
수컷이 암컷을 수정시키면 암컷이 알을 낳는 거야.
만약 네가 지금 이 부나비 암컷을 한 마리 가지고 있다면
이런 실험은 자연과학자들이 자주 하는데
밤에 이 암컷을 찾아 수컷들이 날아오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몇 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에서 날아 온 거야. 몇 시간이나 되는!
생각해봐.
수 킬로나 떨어진 곳에서도
수컷들은 그 부근에 있는 유일한 암컷을 아아차리는 거야.
사람들은 그 사실을 해명해보려고 애쓰지만 어려운 문제야.
일종의 냄새나,
그 비슷한 무엇이 있긴 할 거야.
사냥개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흔적을 추적해내는 것처럼 말이야.
알아듣겠니?
그것도 바로 이런 중류의 일이지.
자연계에서는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어.
그렇지만 이 정도는 설명할 수 있겠지.
만일 그 부나비의 암컷이 수컷만큼 많이 있었다면
그것들도 그렇게 예민한 후각을갖게 되진 않았을 거야.
그것들은 짝을 찾는 일에 여러 대를 걸쳐 훈련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후각을 갖게 된 거야.
짐승이나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기의 모든 주의력과 온 의지를 어느 한곳에 모은다면
그것에 도달할 수 있게 될 거야.
그게 전부야.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래.
어떤 사람을 아주 세밀하게 관찰해보렴.
그럼 그 사람 자신보다도 그에 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게 될 거야.”
(2)
,독심술’이란 말을 꺼내어 오래 덮어두었던
크로머와의 사건을 상기시킬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 일은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아주 미묘한 문제가 되어 있었다.
수년 전에 그가 내 생활에 개입했었던 그 일에 대해서는
그나 나나 아주 은근히 암시하는 일조차 없이 지내왔다.
마치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기거나 아니면
서로가 상대편이 그 일에 대해선 깡그리 잊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은 상태였다.
한 두 번쯤 함께 거리를 걷다가 크로머를 만난 적도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지도 않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럼 의지는 어떻게 되는 거니?”
나는 물었다.
“넌 사람은 자유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으면서도
또 사람이 그의 의지를 어느 곳에 집중시키면
자기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어.
그건 서로 일치되지 않는 말인걸.
내가 내 의지를 지배할 수 없다면 내 의지를 임의로 집중시킬 수도 없지 않겠니?”
그는 내 어깨를 쳤다.
그건 내가 그를 즐겁게 해주었을 때 그가 하는 행동이었다.
”좋아, 그걸 질문해줘서.”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사람은 항상 묻고 의심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만 그 문제는 지극히 단순해.
예를 들어 아까 이야기한 부나비가 자기의 의지를 별이라든가
또는 그밖의 어디엔가 집중시키려고 한다면 그건 불가능해. 단지
그 부나비들은 애당초 그런 노력을 하려고 하지 않는 거야.
그것들은 오직 그들을 위해 의의와 가치가 있는 것,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절대로 가져야 하는 것만을 찾기 때문이야.
그렇게 할 때만이 믿을 수 없는 일조차 성공하게 되는 거야.
그럴 때에 그들은 그들 외에 다른 어떤 짐승도 가질 수 없는
불가사의한 육감을 발전시킬 수 있는 거야.
우리들은 분명히 짐승들보다는 더 많은 활동의 영역과 흥미를 갖고 있어.
하지만 우리들 역시 퍽 좁은 범위 내에 머물러 있도록 제약을 받고 있어서
그 이상을 성취하긴 힘들어. 나는 틀림없이 이것저것 상상할 수는 있고,
무조건 북극에 가고 싶다든가 하는 공상을 할 수도 있어.
그러나 그 소원이 정말 내 자신의 내부에 충분히 깃들어 있고,
나의 전 존재가 그것에 의해 가득 차 있을 때에만 그것을 실행할 수 있고
충분히 강하게 바랄 수도 있는 거야. 그럴 수만 있다면
네가 너의 내부에서 요구하는 바를 시험해보기가 우섭게 잘 될 것이고,
너의 의지를 훈련 잘 된 망아지처럼 다룰 수가 있을 거야.
가령 내가 지금 목사님이 앞으로는
안경을 쓰지 않도록 하려고 생각한다면 그건 안 되는 말이야.
그건 단순히 장난에 불과할 뿐이지. 지난 가을에 말이야,
나는 내가 앞쪽에 있는 내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
확고한 요구를 가졌었는데 그건 아주 잘 되었어.
그때 마침 이름 순서로 보아 내 앞에 앉아야 하는 애가 나타난 거야.
그는 쭉 앓고 있다가 학교에 다시 나오게 되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리를 비워주어야 했어.
내가 비켜주었지. 그건 내 의지가 기회를 잡을 준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 나는 말했다.
“나에게는 그 당시 그게 매우 이상하게 생각되었어.
우리가 서로에게 흥미를 느끼게 된 때부터 넌 내게 점점 가까이 왔지.
그런데 그건 왜 그랬니?
처음부터 바로 내 곁에 앉은 것이 아니라 몇 번은 내 앞자리에 앉았었잖아.
그렇지 않니?
그건 어째서니?”
”맨 처음 내 자리를 옮기려고 했을 때는 나 스스로도 어디에 앉고
싶은 것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했었기 때문이야.
난 그저 뒤쪽으로 가고 싶다고 느꼈을 뿐이었어.
네 곁에 앉으려는 것이 내 의지였엇지만 처음엔 그것이 의식되지 않았던 거야.
동시에 너의 의지도 함께 나를 이끌어주고 있었던 거야.
내가 네 앞에 앉았을 때 나는 내 소원이 이제 반쯤은 충족되었다고 느꼈어.
내가 네 곁에 앉는 것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는 걸 알았던 거야.”
”하지만 그땐 새로 들어온 학생이 없었을걸.”
”그랬지. 하지만 말이야, 그때 나는 단순히 내가 원한 바를 행했을 뿐이야.
아주 쉬운 방법으로 네 곁에 앉은 거야.
나와 자리를 바꾸었던 아이는 그저 좀 이상하게 여겼을 뿐 상관하지 않았거든.
목사님은 필경 한 번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셨을 거야.
요컨대 목사님은 나와 관련이 있을 때마다 은연중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을 거야.
내 이름이 데미안이고, 이름에 D자가 있는 내가
뒤쪽의 S자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엇을 거란 말이야!
그러나 나의 의지가 자꾸 그 의혹에 반대하고 방해했기 때문에
그의 의식 속에까지 배어들진 않았어.
그는 여러 번 무엇인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고는
나를 쳐다보고 연구하기 시작했거든.
그런데 그런 때에 대처하는 좋은 방법을 나는 알고 있어.
매번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거야.
거의 모든 사람은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해.
왠지 불안해지는 거야.
만약 네가 누군가에 대해 무엇을 이루려 할 때는
가자기 그의 눈을 흔들리지 말고 응시해봐.
그때 그가 하나도 불안해 하지 않으면 그 일을 단념하는 것이 좋아.
그 사람에 대해선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으니까 말야.
하지만 그런 일은 아주 드물어.
난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보지 못했어.”
”그게 누구니?” 나는 재빨리 물어보았다.
그는 흔히 깊은 생각에 잠겼을때의 버릇인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는 시선을 돌리고는 대답을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몹시 궁금하였지만 다시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때 그가 자기 어머니에 대해 말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어머니와 대단히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으며
집으로 데리고 간 적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여러 번 그런 시도를 하고
나의 의지를 집중시키는 노력을 해보았다.
아주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소용이 없었고 성공할 수도 없었다.
그 일에 대해선 감히 데미안에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내가 소원한 바를 그에게 고백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데미안 역시 묻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의 신앙심에는 많은 틈이 생겼다.
나의 생각은 데미안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긴 했지만
전혀 불신자인 다른 동급생들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불신자가 몇몇 있긴 했다.
그들은 유일신을 믿는다는 건 가소롭고 인간답지 않은 일이며
삼위일체나 예수의 동정녀 탄생 따위는 웃음거리에 불과한 것인데
아직도 이런 촌스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는 결코 그렇게는 생각지 않았다.
나 또한 다소의 의혹을 품고 있다 할지라도 내 유년 시절의 전 체험을 통해
나의 부모님이 영위하고 있는 것 같은
경건한 생활이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무가치한 일도, 단지 위선일 뿐임도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나는 종교적인 것에 대해 여전히 가장 깊은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데미안만이 성서적 이야기와 교의에 대해 보다 자유롭고 개인적이며
유희적이고 공상적으로 보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나에게 제시한 해석에 나는 언제나 흔쾌히, 즐겁게 따랐다.
확실히 많은 생각들이 나에겐 지나치게 거부적인 것처럼 보였는데
카인에 대한 문제 역시 그러했다.
언젠가 한 번은 견신례 수업중에
그 이상 더 대담할 수는 없으리라고 할 수 있는 견해로 나를 놀라게 하였다.
선생님은 골고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옛날부터 아주 인상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예수 수난일 같은 때에
아버지께서 수난의 이야기를 읽어주신 다음이면 이 고난에 찬
아름답고 창백하고 무시무시하면서도 무섭게 발랄한 세계,
즉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 나는 열렬히 감동되어 살았었다.
바하의 ‘마태 수난곡’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신비에 가득 찬
세계의 어둡고 힘찬 고난의 광채가 경이로운 선율로
내 마음에 가득 차 넘치는 것을 느꼈다.
오늘에도 역시 나는 이러한 음악 속에서 또 모든 ‘비장한 행위’ 속에서
모든 시와 예술적인 표현의 본질을 느끼곤 하였다.
그런데 데미안은 그 수업이 끝나갈 무렵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내게 말했다.
“싱클레어, 뭔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다시 한번 그 이야기를 읽어봐.
그리고 혀로 그 맛을 음미해봐. 좀 김빠진 맛이 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아.
두 명의 도둑에 관한 이야기 말이야.
언덕 위엔 세 개의 십자가가 위풍도 당당히 서 있는 거야.
그런데 그 잔악한 도둑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감상적이고 종교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니?
그는 죄인이고 누가 봐도 수치스런 행동을 하던 자인데
이제 와서 그렇게 쉽게 개심을 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짓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무덤을 코 앞에 두고서 그 따위 후회가 무슨 소용이 되니?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건 한갓 감상적이고도 교화적인 배경을 가진
달콤한 속임수에 불과한 이야기일 뿐이야.
만약 나더러 두 도둑 가운 데 한 명을 친구로 고르라고 한다면,
적어도 신뢰감을 가질 수 있는 상대로 선택하라고 한다면
난 이 눈물을 찔끔거리는 개종자를 택하진 않을 거야. 단연코 다른 도둑을 택하겠지.
그는 사내 대장부며 개성이 잇는 자이기 때문이야.
그는 자기 처지에서 본다면 단지 아름다운 유혹처럼 느껴질 뿐인
개종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거야.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던 거고 최후의 순간까지
이제까지 그가 손잡고 있던 악마에게서 비겁하게 손을 놓진 않았거든.
그는 적어도 특이한 인물이야.
특이한 사람들은 성서 속에서는 흔히 손해를 보게 되거든.
아마 그도 역시 카인의 후예일 거야, 그렇게 생각되지 않니?”
나는 깜짝 놀랐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이야기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말을 듣자 얼마나 상상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개성없이 그저 듣고 읽기만 했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데미안의 이 새로운 견해는 숙명적으로 들렸는데,
그것은 내가 고수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왔던 모든 관념을 뿌리에서부터 흔들고 있었다.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온갖, 내가 가장 신성하다고 생각해온 것을 전부 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내가 미처 한마디도 하기 전에 내가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 네 생각은 벌써 알고 있어.” 그는 단념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한갓 옛날 이야기에 불과해.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여기엔 이 종교가 갖는 근본적인 결함이 잘 나타나 있단 말이야.
구약이나 신약 속의 신의 모습은 아주 완전하고 훌륭하지만
그것이 본래 나타내야 할 모습이 아니란 것이 문제라고 생각되는 거야.
신이란 선하고, 고귀하며 마치 아버지의 존재와 같이
아름답고도 높으면서도 다감한 것이다
라는 것은 아주 정당한 견해야!
그러나 세상에는 또 다른 세계도 존재하고 있단 말이야.
이 다른 부분은 전부 악마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세상의 이러한 부분의 전부,
즉 세상의 절반은 은폐당하고 묵살되어버리고 있는 거야.
신을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찬양하면서도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성적인 생활은 전적으로 묵살하고, 악마적인 것,
죄많은 것으로 단죄해버리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
나는 사람들이 여호와를 숭배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아.
그렇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를
인정하고 신성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도식적으로 분리된 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절반만이 아니라 온전한 전체를 말이야.
우리는 신께 예배드리는 동시에 악마에게도 얘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 돼.
그래야만 정당하다고 할 수 있어.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내부에 악마까지도 내재시키고 있는 신,
즉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 앞에서도 사람들이
그 앞에서 의례적으로 묵인할 필요가 없는
그런 신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는 그의 본성과는 반대로 대단히 흥분되어 있었으나
곧 진정되어 미소를 짓더니 더 이상 추궁하는어조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던 소년 시절의 깊은 의혹을 그대로 간파하고 있었다.
데미안이 말한 공인된 신적인 세계와 금지된 악마의 세계에 관한 생각은
바로 나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고 있었다.
두 개의 세계, 또는 세계의 두 부분에 관한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에 관한 내 자신의 생각과 말이다.
나의 문제가 곧 모든 사람의 문제이며 모든 생명과 사색의 근본이 되는
문제라는 의식이 무슨 성령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3)
나 자신의 독자적이고 개인적인 생활과 견해가 위대한 이념의 강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불안하면서도 경건한 심정이 되었다.
그러한 깨달음은 무엇인가를 증명해주고
가벼운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었지만 썩 기꺼운 것은 아니었다.
거기엔 가혹하고도 떫은 맛이 있었다.
그 속에는 인생에 대한 책임이, 나는 이미 어린애가 아니며
인생을 혼자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런 느낌들을 이야기하면서 데미안에게
유년 시절부터 갖고 있던 ‘두 개의 세계’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나의 가장 내면적인 감정이
그의 견해에 공명하고 있으며 또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이런 감정을 악용한다든지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이야기에 과거 어느때보다도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면서
내 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나는 다시 눈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에는 내가 직시할 수 없는 어떤 묘하게 짐승 같은,
시간을 초월하여 나이를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언제 한번 더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는 달래듯이 말했다.
”난 네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너 또한 네가 생각한 바를 전부 살아보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
건 좋지 않아.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는 거야.
넌 이미 너에게 ‘허용된 세계’가 세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 말야.
그러면서도 목사님이나 선생님들의 말씀처럼
다는 절반의 세계를 은폐하려고 애썼던 거야.
그런 시도는 성공할 수가 없어. 이미 생각을 시작한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야.”
그의 이야기는 내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하지만” 나는 외치다시피 말했다.
“사실상 금지된 추악한 것들도 이 세상엔 존재하고 있어.
너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것들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단념할 수밖엔 없을 거야.
난 살인이라든지 다른 온갖 가능한 죄악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서 내 스스로 범죄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잖아?”
”그런 것들을 오늘 모두 해결할 수는 없어.” 막스는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넌 살인을 하거나 소녀를 능욕해서는 안 돼.
그건 분명히 안 되는 일이야.
너는 아직도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이라고 불려지는 것을
너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데까지는 못갔어.
단지 진리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을 감지한 것뿐이야.
다른 부분들을 더 많이 깨달을 수 있게 될 거야.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는 거야. 넌 한 일 년 전부터
너의 내부에 어떤 충동을 지니고 있었던 건데,
그런 건 흔히 다른 어떤 충동보다 강하기 때문에 ‘금지된 것’으로 간주되는 거야.
그리스 사람이나 다른 민족들은 우리와는 반대로 그러한 충동을
일종의 신성한 것으로 취급해서 굉장한 축제를 벌이고 그것을 신봉햇어.
‘금지된 것’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변경될 수도 있는 거야.
오늘에라도 목사님 앞에서 결혼을 하면 누구나 당장 여자와 잘 수 있잖아.
다른 민족은 우리와는 달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역시 다르단 말야.
그러므로 우리들은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자기에게 그러한 것을 제각기 자신의 힘으로 찾아야 하는 거야.
실제로는 금지된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아도
대악당이 될 수 있는 일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그것은 단지 편의상의 문제에 불과해!
안일해서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판정해낼 수 없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금지된 것에 복종하고 말지.
그것이 쉽거든.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내부에서 그 금지된 것을 스스로 느끼기도 한단 말이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매일같이 하는 일이라도 그들에겐 금지되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겐 금지되어 있는 일이 그들에겐 허용되어 있을 수도 있는 거야.
요컨대 사람은 각자 독자적이 되어야 하는 거야.”
그는 갑자기 자기가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을 후회하기라도 하듯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때 그가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매우 유쾌해 보이고
자기의 생각을 닥치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언젠가 말했듯이 ‘그저 지껄이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은
죽어도 참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서 내가 진정으로 흥미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울러 약간의 오락적인 기분과 재치있는 농담을 즐기는 듯한 기분,
다시 말하자면 완전한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마지막에 쓴 ‘완전한 진지함’이란 귀절을 다시 읽어보니,
내가 데미안과 더불어 경험했던 사춘기의 체험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 다시 생각난다.
마침내 견신례를 받는 날이 가까워졌고,
종교 수업의 마지막 몇 시간에는 최후의 만찬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그것은 목사님이 생각하시기엔 매우 중요한 대목이었기 때문에
그는 애를 많이 썼고, 신성한 느낌과 기분이 우리들에게도 잘 전해졌었다.
그런데 마지막 두서너 시간밖에 남지 않은
문답 수업 시간에 내 생각은 딴 곳을 헤매고 있었다.
내 친구에 관해서였다.
교회 사회로의 엄숙한 입문이라 할 견신례를 준비하는 동안
내게 있어서의 이 반 년 동안의 종교 수업의 가치는
목사님의 설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데미안 가까이에서 그의 영향 속에서 지낸 일에 있다는 생각이
피할 도리 없이 엄습해왔다.
이제 나는 교회가 아니라 아주 다른 것에,
즉 사상과 개성의 교단에 입회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것은 어떻든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할 것이었고
데미안이 대표자이거나 사도로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어떻든간에 나는 견신례의 의식만은
진심으로 경건하게 경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나의 새로운 생각과는 거의 조화될 수 없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원하던 바를 하고 싶었고 그 소원은 간절했다.
그 생각은 가까워오는 교회의 의식에 대한 생각과 결부되어
결국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의식을 치르겠다고 결심을 했다.
내게 있어서 그 의식은 데미안에 의해 열려졌던
사색의 세계로의 입문을 의미해야 했던 것이다.
그와 다시 한번 열띤 토론을 벌인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문답 수업 시간이 시작되기 바로 전이었다.
내 친구는 아무 말이 없었는데 분명 조숙하고 잘난 척하며
대드는 내 이야기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우린 너무 많이 지껄이고 있어.”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약삭빠른 이야기는 아무 가치가 없어. 조금도 없단 말이야.
다만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갈 뿐이야.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간다는 건 죄악이야.
사람이란 마치 거북이처럼
자기 자신의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나서 곧 우리는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나는 수업에 열중하려고 애썼는데
데미안도 나를 방해하진 않았다.
잠시 후 나는 그에게서 무슨 독특한 것, 공허하달까 냉정하달까,
어쩌면 그의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느낌이 가슴을 압박하기 시작하자 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가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똑바르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보였다.
무엇인가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그로부터 나와서
그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가 눈을 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눈은 떠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 눈은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물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눈은 단지 물끄러미 열려 있을 뿐
내부의 세계가 아니면 아득히 먼 세계를 향해 있었다.
완전한 정지 상태로 그는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엇고 거의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입은 마치 나무나 돌로 새겨놓은 것 같았다.
얼굴은 창백하여 돌처럼 보였다. 갈색의 머리칼만이 가장 생기를 띠고 있었다.
두 손은 자기 앞의 걸상 위에 놓여 있었는데 마치
돌이나 과일 같은 물체처럼 생기가 없고 고요하며
창백하게 움직이지 않았지만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숨어 있는 강력한 생명를 감싸고 있는 야무지고 질 좋은 깍지처럼 보였다.
그 광경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는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하마터면 큰 소리로 그렇게 외칠 뻔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매혹된 눈빛으로 그의 창백하고 굳어버린 가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야말로 데미안의 본질임을 느꼈다.
나와 함께 걷고 이야기하던 이제까지의 그는 단지 데미안의 절반,
즉 때론 배역을 맡아주고 내게 잘 맞추어 호의로 협조해주던
데미안의 절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 데미안은 이처럼 굳어 있고, 고색창연하고, 짐승 같기도 하고,
아름다우며 차갑게 죽어 있으면서도 그 내면에는
견줄 데 없는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절대 고요의 이 공허,
이 에테르와 별이 가득한 하늘, 그리고 고독한 죽음!
지금 그는 완전히 자기의 내면으로 몰입했다는 것을 느끼고 나는 전율했다.
이렇게 고독한 적은 없었다.
그와 나는 전혀 무관한 존재였고, 그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존재였으며
세상의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섬보다 내게서 더 먼 곳에 있었다.
나 외의 누구도 그를 보는 사람이 없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는 오싹하고 모서리칠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를 주의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내가 보기에는 석상처럼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파리가 한 마리 그의 이마 위에 내려앉더니 천천히 코와 입술로 내려왔다.
---그는 주름살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어디에, 그는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는 하늘에 있는 것일까? 지옥에 있는 것일까?
그에게 그것에 관해 물어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끝나고 다시 되살아나 숨쉬고 있는 그를 보았을 때,
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이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 혈색이 돌고 그의 손은 다시 움직였지만
그의 갈색 머리칼은 윤기를 잃어 지친 것처럼 보였다.
그후 여러 날 동안 침실에서 나는 한 가지 새로운 연습을 하는 데 몰두했다.
꼿꼿한 자세로 걸상에 앉아 눈을 한곳에 고정시키고
부동자세를 한 채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지,
그리고 그때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를 알려고 하였다.
그저 나는 몹시 피곤해지기만 했고, 눈꺼풀이 가꾸 가려울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견신례를 받았지만
거기에 대한 중요한 기억이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유년 시절은 산산이 부서져 나의 주위에 떨어져내렸다.
부모님께서는 일종의 낭패를 느끼시는 표정으로 나를 대하셨다.
누나들은 아주 낯선 존재가 되었다.
냉담함이 예전의 감정과 기쁨 사이를 비집고 들어 그것을 왜곡시키고 퇴색시켜버렸다.
정원은 향기를 잃고 숲은 더 이상 마음을 끌지 않았으며
세계는 무슨 골동품의 재고정리장처럼 무미견조하고 매력없이
나를 둘러싸고 있을 뿐 책은 단지 종이조각이었고 음악은 소음에 불과했다.
가을이되면 나무의 주위에는 낙엽이 떨어지게 마련이었지만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비가 나무를 적시고 혹은 햇빛이 혹은 서리가 내리고,
나무의 내부에서는 생명이 서서히 위축되고 깊숙이 움츠러든다.
그러나 나무는 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다림인 것이다.
휴가를 지낸 후 나는 다른 학교에 가기 위해 난생 처음 집을 떠나 생활하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때때로 유난히 다정하게 내게 가까이 오셔서 미리 이별을 고하시고
내 마음속에 사랑과 향수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간직하게 하려고 애쓰셨다.
데미안은 여행을 떠났다.
나는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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