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데미안.좁은문

제 2 장 카인

오늘의 쉼터 2015. 1. 10. 11:26

제 2 장 카인

 


(1)

 
내 고민으로부터의 구원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왔고,
그것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일이 내 생활 속에 들어왔는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내게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우리 학교에 새로 전학온 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우리 마을로 이사온 부유한 미망인의 아들이었는데
소매 둘레에 검은 상장을 두르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상급 학년이었지만 곧 모든 학생들의 주목을 끌었고
나 역시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묘한 아이는 겉보다는 훨씬 나이가 들어보여 누가 봐도 소년같지 않았다.
우리들 어린 소년 사이에서 그는 마치 어른처럼
색다르고 예의바르게 행동했으므로 호감을 받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와 같이 놀이에 어울리지 않았고
더욱이 싸움 같은 건 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마음에 들어 한 것은 선생님을 대할 때의
그의 어른스럽고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는 막스 데미안이라고 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때때로 합반을 하곤 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지
어느 날 우리는 큰 교실에서 합반 수업을 하게 되었다.
데미안의 반과 함께였다.
우리들 하급생들은 성서 이야기를 들었고 상급생들은 작문을 지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어거지로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자주 데미안 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상스럽게 나를 매혹시켰으며
나는 이 총명하고 밝고 비범해 보이는 얼굴이 주의 깊게
그리고 지혜롭게 자기의 공부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전혀 과제를 하고 있는 학생처럼 보이지 않았고
독창적인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처럼 보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내게 썩 호감을 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에 대해 나는 일종의 저항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너무 초연해 보였고 냉담했다.
그의 태도는 도전적으로 느껴질 만큼 자신만만했으며
눈은 마치 어른 같은 표정을 띠고 있었으며
- 그런 것을 아이들은 결코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

다소 슬픔이 어린 듯하면서도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쉴새없이 그를 쳐다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는 내게 어떤 사랑스러움이랄까, 연민의 정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어쩌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다.
그 당시 그가 학생으로서 어떤 모습이었던가를 회상해보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점에서 평범한 아이들과는 달리
철저히 이색적이고 개성이 강했으며
그 점이 남의 관심을 집중시키게 했던 것이라고.
- 하지만 그 때문에 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그것은 마치 농부의 아들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는 변장한 왕자와도 같이,
어색한 농부의 옷차림을 하고 또 행동도 그렇게 했던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는 내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제각기 흩어져 가버리자 그는 내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물론 그는 우리들이 하는 것처럼 평범한 인사말을 건네왔지만
너무 어른스럽고 점잖게 들렸다.

”우리 좀더 함께 갈 수 있는 거니?” 그는 친절한 태도로 물었다.

나는 기뻐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우리 집이 어디쯤인지를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아, 거기?” 그는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그 집이라면 벌써부터 알고 있었어.
너희 집 현관 위의 독특한 장식물이 내 흥미를 끌었거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곧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우리 집에 대해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꼈다.
우리 집 대문의 아치위에 초석으로서 일종의 문장이 새겨져 있긴 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납작해져서
가끔 새로 칠을 하긴 했어도 거의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내가 아는 한 그 문장은 우리 가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난 거기에 대해서는 잘 몰라.” 나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
“그건 아마새이거나 그와 비슷한 무늬일 거야.
그런데 퍽 낡아서 잘 알아보기 힘들 건데.
우리 집은 옛날에 어느 수도원의 소유였었대.”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잘 살펴봐. 그런 옛 문장은 퍽 흥미로운 것이야.
내가 보기엔 매처럼 보였어.”

우린 계속 함께 걸었는데 나는 속으로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그가 웃었다.

”그래, 아까 수업 시간에 우린 한 반에 있었지.” 그는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이마에 표지를 달고 다닌 카인의 이야기를 배우는 것 같던데,
그렇지 않니? 어때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니?”

물론 그렇지 않았다.
우리들이 배워야만 하는 과목 중 어느 하나도 내 마음에 드는 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직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꼭 어른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데미안은 친근하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얘, 나까지 속일 필요는 없어.
그러나 그 이야기는 수업 시간에 배우는 다른 어떤 것보다
좀 생각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봐.
선생님은 실제 거기에 대해선 별로 가르치지 않으셨지.
그저 신이나 죄 같은 상식적인 이야기밖에은 안하셨으니까.
그러나 난 이렇게 생각해---.”

 

우리는 곧 조그만 교외의 주막집에 마주앉아
다소 미심쩍은 맛의 포도주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언지 새로운 맛이 느껴지긴 했다.
나는 술을 마셔본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곧 취하여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나의 내부의 창문이 활짝 열린 것 같았고 세계가 그 속에 비쳐들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참으로 무섭게도 오랫동안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지내왔던 것이다.
나는 정신없이 지껄였고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까지 멋지게 해치웠다!

베크는 기꺼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마침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는 내 어깨를 치며 아주 근사한 녀석,
재주있는 녀석이라 불렀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켰고 그러한 이야기들이 인정을 받았다는 것,
그것도 나이많은 선배에게서
제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날뛰었다.

나는 독창력있는 녀석이라고 한 그의 말은
내 마음속에 감미롭고도 독한 포도주처럼 스며들었다.
세계는 새로운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고
사상은 수백의 세찬 샘처럼 솟구쳤으며 영혼과 불이 나의 내부에서 불타올랐다.

우리는 선생님과 급우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멋지게 의기투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리스인과 이교도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베크는 나로 하여금 정사에 대한 고백을 들으려 애를 썼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야기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할 만한 경험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에서 혼자서만 느끼고, 만들어내고,
공상해온 것은 나의 내부를 불태우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은 술의 힘으로도 불가능했다.

여자에 대해서라면 베크 자신이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했다.
나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었지만
듣고 있자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온 일들이
사실에 있어서는 아주 평범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알폰스 베크는 열 여덟살쯤 되었을 뿐이지만 벌써 경험이 많았다.
모든 경험 가운데서도 베크는 특히 처녀들이란
아름다운 일이나 은근한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경험을 하였는데
물론 그것은 좋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이었다.

부인네들에게서 더 많은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는데
그네들이 훨씬 그 점에 대해 영리하다는 것이었다.
가령 문방구 주인인 야크겔트 씨의 부인 같은 여자와는 이야기가 잘 통하고
그 가게의 카운터 뒤에서 이제까지 있어온 일들을
어떤 책에도 적힐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넋을 잃고 이야기에 빠져들어 멍청히 앉아 있었다.
물론 내가 야크켈트 부인을 사랑하게 될 리는 없을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이먹은 사람들에게는 나는 꿈도 꾸어보지 못한
어떤 샘이 흐르고 있는 것이리라.
그 이야기에는 약간의 거짓말도 섞여 있으리라 생각되기도 했고
그가 말한 것은 내 생각 속에서의 사랑의 맛보다는
보잘것없고 평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모두 사실이었고 생활이며 모험이었던 것이고
지금 이 순간 그것을 모두 실제로 경험하고
그 경험을 아주 일상적인 일처럼 취급하는 사람이 내 곁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다소 뜸해지고 활기를 잃었다.
나는 더 이상 천재적인 어린 녀석이 아니었으며
단지 어른의 말에 혹해 귀기울이고 있는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수개월 동안의 나의 비참한 생활에 비한다면 천국에서의 일처럼 감미롭게 들렸다.
주막에 앉아 있는 일에서부터 우리의 이야기 내용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엄격히 금지되고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 속에서 미흡하나마 정신적인 어떤 것을 맛보았고 혁명의 징후를 감지했다.

나는 그날 밤의 일을 뚜렷이 기억한다.
우리가 희미하게 타오르는 가스등의 곁을 지나
차갑고 축축한 밤공기 속으로 귀가를 재촉했을 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취해 있었다.
기분은 좋지 않았고 사실 몹시 괴로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 외에 무엇인가 매력과 감미로움이 있었으니
그것은 반란과 방종이었고 생명력과 정신이었다.
베크는 나를 보고 새파란 풋나기 녀석이라고
투덜거리며 욕하긴 했지만 나를 끝까지 책임졌다.
그는 나를 반즘 떠매다시피 하여 기숙사까지 데리고 왔고
어찌어찌해서 열려져 있는 창문으로
무사히 들키지 않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말을 멈추고 웃음띤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내 이야기가 재미있니?”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난 이렇게 생각해.
카인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고 말야.
우리들이 배우는 것은 대개 어느 면으로는
전적으로 진실이고 정당한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을 선생님들이 가르치시는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는 거야.
대개는 다른 면에서 볼 때 더 나은 의미를 갖게 돼.
예를 들자면 카인의 이야기만 해도 그래.
그의 이마 위의표지에 대해서도
우린 선생님의 설명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점이 많거든.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어떤 사람이 다투다가 형제를 해치는 일은 사실상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래서 그후론 겁을 먹고 양보하게 된다는 것도 가능하긴 해.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을 겁주기 위해 특별한 훈장까지 일부러 달았다면
이건 좀 우스운 일 아니니?”

”그래, 그건 그래.” 나는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 문제가 나를 매혹시켰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달리 어떤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까?”
그는 내 어깨를 쳤다.

”아주 간단해.
여기서 문제가 되고 이야기의 주제가 되는 것은 바로 표지야.
이것 봐, 만약 남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그 무엇인가를 얼굴에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누구 하나 감히 그를 건드리려는 사람이 없고,
그의 자식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남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단 말야.
추측이 아니라, 그들의 이마에 무슨
소인 찍힌 우표 같은 것이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닌 게 확실해.
세상에 그런 심한 일은 잘 없으니까.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무언지 경외심을 일으키는 것이 그들에게 있고
평범한 사람들보단 좀 엄격하고 지혜로와 보이면서도
대담한 그 무엇인가를 그들의 눈빛에서 느낄 수 있었을 거야.
이 사람은 힘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두려웠던 거야.
이것이그가 ‘표지’를 지니게 된 내력이야.
사람들은 그것을 각자 자기 식으로 설명하는 거야.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에에 편리한 대로 자기를 정당화시키고 싶어하거든.
사람들은 카인의 자식들이 두려웠던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이표지를 훈장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전혀 그 반대로 해석한 거야. 이 표지를 가진 사람은 무섭다고 말한 거야.
또 사실 그러하기도 했겠지.
용기와 개성을 가진 사람은 평범한 이들에겐 두려운 존재니까.
두려움을 모르는 강한 종족이 자기네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매우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그 강한 종족에게 일종의 보복을 가한 거야.
그들이 두려워 떤 것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일종의 별명과 전설을 만들어서 붙였던 거지. 내 말 이해하겟니?”

”응, -그건 다시 말하면-카인이 정말은 하나도 나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지?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전부사실이 아니란 거지?”
”그렇다고 할 수도 잇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어.
아주 오랜 옛날의 이야기일수록 사실에 가까워.
하지만 그 사실들이 언제나 사실 그대로 기록되고
옳은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고는 볼 수 없는 거야.
간단히 말하자면 난 카인이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단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해.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이 단순하게 지껄여대는 허무맹랑한 소문에 불과한 거야.
그렇지만 카인과 그의 자식들이 일종의 ‘표지’를 갖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만은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해.”

나는 대단히 놀랐다.
”그럼 동생을 죽였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믿니?”
나는 충격을 받아 이렇게 물어보았다.
”물론 사실이야. 분명히 그건 사실일 거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죽였던 거야.
그들이 정말 형제였던가 하는 것에는 의심이 가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한 점이 아니야.
결국 모든 사람들은 형제라고 할 수 있는 거니까.
따라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죽인 것에 불과한 거야.
그것은 무척 영웅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고, 또 그렇지 않았을 지도 몰라.
그러나 하여간 약한 자들은 두려움을 느꼈던 거야.
그들은 한탄했겠지.
그렇지만 누군가가 그들에게 ‘그렇다면 왜 그들을 해치우지못하지?’
하고 물으면 ‘우리가 비겁하기 때문에’라고 말하지는 않을 거야. ‘
할 수가 없어. 그자들은 표지를 달고 있어.
신이 그들에게 표지를 주셨거든’ 하고 말한 거야.
대충 이렇게 해서 그 황당한 이야기가 날조되었을 거야.
아, 참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지. 그럼 잘 가!”

그가 알트 거리로 구부러져 돌아가자
혼자 남겨진 나는 이제까지보다 한층 더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가버리자마자 이제까지 한 그의 이야기가 전혀 믿을 수 없는 사실로 여겨졌다.
카인은 강한 사람이고 아벨은 겁쟁이였다니!
카인의표지가 훈장이라니!
그건 불합리한 이야기였으며 신에 대한 불경스럽고 방자한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신은 어디에 계셨던 말인가?
신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셨고,
아벨을 사랑하지 않으셨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그건 어리석은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데미안이 나를 놀리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하였다.
정말이지 굉장히 영리한 아이이긴 했다.
그리고 말도 조리있게 잘했고, 그렇지만 그렇게 아니다.

 

나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나 어떤 다른 종류의 이야기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또 오래 전부터 몇 시간, 아니 저녁 나절 내내
그렇게 씻은 듯이 프란츠 크로머의 존재를 잊어본 적도 없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성서에 적혀있는 카인의 이야기를 꼼꼼히 읽어보았지만
그 내용은 간단 명료했고,
그 속에서 특별한 숨은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제정신이 아닌 짓이었다.
그렇다면 모든 살인자들은 신의 애호를 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아니, 그건 미친 소리였다.
내 마음을 깊이 끌어당겼던 것은 데미안이 모든 것은
쉽고 분명하다는 듯이 그렇게 훌륭하고 조리있게,
그런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그것 뿐이었다!

내 자신 속에도 무언지 정돈되지 않고
무질서하기까지 한 것이 존재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밝고 맑은 세계에 속해 있었으며
내 자신이 일종의 아벨이기도 했던 것인데
지금의 나는 너무도 깊숙이 ‘다른 세계’ 속에 굴러 떨어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가라 앉아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나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일이 이 지경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렇다, 나의 마음속에서 갑자기 한 가지 회상이 치밀어 올라
하마터면 숨이 막힐 뻔하였다..

요즘의 이런 불행한 사태가 시작되었던 그 불쾌한 밤에
아버지에 대해 느꼈던 감정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한 순간이나마 아버지와 아버지의 대표되는
밝은 세계와 지혜의 이면을 단숨에 꿰뚫어 본 듯이 멸시했던 것이다.
그때의 나는 분명 카인이었고 이마엔 표지까지 달고 있었으면서도
수치심을 느끼기보단 훈장을 단 것처럼 으스대며
나의 죄악과 불행을 통해서 나는 아버지보다도,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 보다도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경험이 어떤 분명한 사상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모든 것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지극히 불행한 상태에서도 엉뚱한 긍지를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데미안은 강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해
아주 이상스런 방향에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카인의 표지에 관한 해석도 그러했다.
어른스러운 그의 눈이 그때 어떻게 빛났던가!
그러자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스쳐갔다.
데미안 자신이야말로 일종의 카인이 아닌가?
그가 자신을 카인의 일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왜 그는 카인을 옹호하는 것일까?
어떻게 그는 그러한 힘을 눈빛에 담을 수가 있을까?
경건하고 신의 마음에 드는 ‘다른 사람들’ 즉 그 비겁한 사람들에 관해서

그는 왜 그렇게 빈정대듯이 말하는 것일가?
나는 이 생각을 끝 맺을 수가 없었다.
돌멩이 하나가 샘물에 떨어진 것이었고 이 샘은 나의 어린 영혼이었다.
한동안,

아니 매우 오랫동안 카인의 살인과 표지에 관한 문제는
인식과 의심과 비평에 대한 나의 시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나는 다른 학생들도 데미안에게 흥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카인의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분명 다른 아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전학생’에 대해 많은 소문이 나돌았다.
만약 내가 그 소문을 전부 들을 수 있었으면
그를 아는 데 퍽 도움을 받았을 것이고 모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었던 사실은 데미안의 어머니가 퍽 부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절대 교회에 나가지 않으며
그의 아들도 그렇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회교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막스 데미안의 체력에 관해서도 말들이 많았다.
싸움을 걸었다가 응하지 않자 그를 겁쟁이라고 비웃었던 자기 반에서
제일 힘 센 아이를 거뜬히 이겼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광경을 보았던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데미안은 단지 한손으로 그 아이의 멱살을 잡고 눌렀을 뿐인데도
그 아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항복하고는 도망을 쳤는데
며칠이나 팔을 못쓰더라는 것이었다.

하루 저녁 동안에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이 모든 소문들이 얼마간 무성하였고 그 동안은 굳게 믿어졌으며
언제나 흥분과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얼마 동안은 그 정도의 소문에 만족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소문이 돌았는데
그 소문에 의하면 데미안이 어떤 여자와 친근한 사이이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프란츠 크로머와 나는 변함없이 괴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며칠즘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해도
사실상 나는 그에게 단단히 묶여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꿈 속에서 까지도 그림자 처럼 나를 따라 다녔고,
그가 실제로는 하지 않은 일까지도 나의 공상이 그로 하여금
꿈속에서 그런 일을 하도록 그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꿈속에서는 나는 그의 완전한 노에였다.
나는 현실에서 보다 꿈속에서 나는 몹시 꿈이 많은 아이였다
더 많이 살았으며 그것으로 인해 힘과 생명력을 고갈시키고 있었다..
특히 나는 크로머가 나를 학대하고 내게 침을 뱉고 내 무릎을 짓밟으며,
더 나쁜 일은 나를 무서운 범죄로 유인하는 꿈을 자주 꾸었다.
아니 유인했다기 보다는 그의 강력한 힘에 의해
강요당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 이리라.

가장 무서웠던 것은,

그 꿈에서 나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 잠에서 깨었는데,

아버지를 살해하는 꿈이었다.
크로머가 칼을 갈아서 나에게 주었고
우리들은 가로수 뒤에 숨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누구를 기다리는지는 몰랐었다.
누군가가 그곳으로 오자 크로머는 내 팔을 건드려
내가 찔러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여기서 나는 잠을 깼다.

 

 

(2)


이 꿈과 관련해서 나는 카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데미안에 대한 생각은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다시 내게 나타난 것은 이상스럽게도 또 꿈속에서였다.
나는 참고 견디지 않을 수 없는 학대받고 압박받는 꿈을 꾸었는데
내 무릎을 짓밟은 것은 크로머가 아니라 데미안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고 신기한 것은
크로머가 내게 그런 짓을 했을 때는 고통과 혐오감을 느낄 뿐이었는데
데미안에게서는 불안과 기쁨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꼈던 것이었다.
나는 이 꿈을 두 번이나 꾸었는데,
그러고나서는 다시 크로머가 원래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꿈속에서 겪은 일과 실제로 겪은 일을 확실하게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하여간 크로머와 나의 괴로운 관계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좀도둑질로 그에게 진 빚을 다 갚았을 때도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나의 도둑질에 대해서도 환히 알고 있었다.
크로머는 내가 돈을 갖고 올 때마다 어디서 났는지를 물었는데
그로인해 나는 더욱 단단히 그의 손아귀에 잡히고 만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모든 걸 일러바치겠다고 나를 위협했고
나는 두려워 떨었지만 그래도 애초에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나는 몹시 괴로왔지만 모든 일에 대해 후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으며
어떤 때는 이런 일이 필연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불길한 운명이 내 머리 위에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미루어 생각해보면 나의 부모님도 나의 이런 상태에대해 무척 고민하셨을 것이다.
낯선 영혼이 나를 덮쳐와 나는 이미 단란한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잃어버린 낙원에대해서처럼 견딜 수 없는 향수를 느끼기도 했다.
어머니에 의해서는 주로 나쁜 아이로보다는 아픈 아이로 취급을 받았는데
실제의 상황은 누나들의 태도에서 잘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무척 너그러웠지만 나를 극도로 비참하게 만들었는데
그들은 나의 상태에 대해 한탄하기보다는 동정해야 하지만
나를 악이 내재하는 미치광이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가족들이 나를 위해 이제까지 드리던 기도와는 다른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 기도가 헛된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괴로움을 던져버리고 싶은 간절한 희망과
진정으로 뉘우치고 싶다는 소망을 격렬히 느끼는 적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아버지 어머니께 똑바로 이야기할 수 없으며,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용서를 빌면 친절히 받아들여지고 따뜻히 위로받고 동정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완전한 이해를 바랄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고
이 모든 일이 진정한 나의 운명인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순히 탈선으로 취급해버리고 말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열 한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이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내 처지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의 본질을 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감정을 사상으로 변화시킬 줄 알게 된 어른들은
단지 아이들에게는 이런 사상이 없음을 아쉬워하고
심지어는 아이들은 경험조차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평생에 그때처럼 그렇게 절실한 체험을 하고
그때처럼 그렇게 고민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어느 비오는 날 나는 크로머로부터 성의 광장으로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물에 젖어 쉴새없이 떨어지는
축축한 밤나무 잎들을 발로 휘적거리고 있었다.
돈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크로머에게 주려고
과자 두 조각을 옆구리에 숨겨 왔었다.
나는 어느새 이렇게 어느 모퉁이 같은 데서
때로는 퍽 오랫동안 크로머를 기다리는 데 익숙해져 있었는데
사람들이 무슨 불가피한 일을 감수해내는 것 같은 심정으로 그것을 감수했다.

드디어 크로머가 왔다.
오늘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는 내 갈비뼈를 두어 번 쥐어박고는 기분좋은 듯이 낄낄거렸고
과자를 빼앗더니 내게 축축한 담배를 권하기까지 했는데
물론 나는 그것을 피진 않았다.
아무튼 그는 평소와는 달리 유난히 친절하게 굴었다.

”그렇지.” 헤어지려는 차에 그가 말했다.
“잊어버리기 전에 말해두는데 다음 번엔 누나를 데리고 나와.
나이 많은 누나 말이야.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미처 대답도 못하고 서 있었다.
놀란 모습으로 멍청히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내 말 못 알아듣겠니? 네 누나를 데리고 오란 말이야.”
”알아듣겠어 크로머.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난 할 수가 없어. 누나도 따라 오지 않을 거야.”

그러면서 나는 지금 그가 한 말이 계략이고 구실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따금 그런 짓을 했는데 무슨 불가능한 일을 요구해서
내 기를 꺾어놓고는 나를 꼼짝도 못하게 얽어
다른 요구에 응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면 난 또 돈을 몇 푼 더 구해다 바치든지
아니면 다른 선물로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려야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내가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의 성을 내지 않았다.
”그래.”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잘 생각해보란 말이야. 난 너의 누나랑 사귀고 싶은 거야.
언젠가 다음번에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지.
넌 그저 누나를 산책에 데리고 나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내가 그곳으로 갈 테니까. 내일 내가 다시 휘파람을 불게.
그때 다시 이 일을 의논해보자구.”

 

그가 가버리자 희미하게나마 그의 말뜻이 짐작되었다.
나는 아직 완전히 어린애였지만 우리들이 좀더 나이가 들면
어떤 비밀스런 야릇하고 금지된 짓을 서로 할 수 있다는 것쯤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나는 갑자기 그것이 얼마나 망측스런 일인가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따위 짓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게 했다.
그러나 그러고 나면 내겐 또 무슨 일이 닥쳐올 것인가.
크로머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보복 해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감히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내겐 새로운 고문이 시작되었고, 아직도 괴로움은 충분치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지극히 암담한 심정이 되어 주머니에 손을 푹 찌른 채 텅 빈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새로운 고민, 새로운 압박감이 나를 덮쳐왔다.

그때 누군가가 시원스럽고도 깊이있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누군가가 따라와서는 한쪽 손으로 나를 살며시 잡아당겼다.
그것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붙잡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난 또 누구라고.” 나는 불안을 감추며 말했다.
“사람을 놀라게 해도 분수가 있지.”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이때만큼 그의 눈빛이 어른의 우월하고도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진 그것처럼 느껴진 적은 없었다.
오래 전부터 우린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미안해.” 그는 점잖고도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잖아.”
”물론 그래, 그렇지만 놀랄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얘,

네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깜짝 놀란다면
그 사람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호기심을 가지게 되겠지.
정말 수상하게 여겨질 만큼 네가 잘 놀란다고 생각할 거고,
사람이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잘 놀라게 되는데,

하고 생각할 거란 말야.
겁쟁이는 언제나 두려워하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난 네가 원래부터 겁쟁이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그렇지 않니? 아, 물론 네가 영웅이라는 건 아니야.
네가 두려워하는 무엇인가가 있단 말이야.
네가 무서워하는 누군가가 있는 거야.

하지만 그런 것은 절대 있어선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건.
내가 두려운 건 물론 아니겠지? 안 그래?”
”아냐, 아냐, 넌 조금도 두렵지 않아.”
”그것 봐, 틀림없어. 그렇지만 넌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지?”
”난 잘 모르겠어‥‥‥. 제발 그만둬. 날 어쩌자는 거야?”


그는 나와 보조를 맞추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서 빨리빨리 걷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옆얼굴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가령 말이야.”

 

그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네게 호의를 가지고 있어. 하여간 넌 날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난 네게 한 가지 실험을 해보고 싶어.
그건 무척 재미있고, 너도 무언가를 거기서 배울 수가 있을 거야.
자, 잘 들어봐!
나는 가끔 독심술이라고 하는 걸 시험하곤 해.
거기 무슨 요술이 있는 건 아닌데
그 이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주 신기해 보이거든.
그것으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수가 있으니까 말야.
자, 우리 한번 시험해보자. 내
가 너를 좋아하거나 혹은 흥미를 갖고 있다고 치는 거야.
그래서 이젠 네 마음속이 어떤가를 알고 싶어진 거야.
난 이미 그것에 첫 발걸음을 내디딘 셈이야. 난 너를 깜짝 놀라게 했었지.
따라서 넌 잘 놀란단 말야.
그건 곧 네가 두려워하는 물건이나 사람이 있다는 증거야.
어째서 그럴까? 사람은 누구 앞에서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거야.
그런데도 그 사람이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건 자기를 지배하는 힘을 그 누군가에게 맡겨버린 때문이야.
예를 들어 네가 어떤 나쁜 짓을 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일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거야.
그러면 그 사람은 너를 지배하는 힘을 가진 것이 되는 거야,
알겠니? 분명한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니?”

나는 어쩔 줄 몰라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엄숙하고 영리해 보였고
또 호의를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정답다기보다는 오히려 엄격해 보였다.
정의나, 혹은 그와 비슷한 무엇이 그의 표정에 깃들어 있었다.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마법사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알아듣겠니?”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독심술이 이상하게 보인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건 극히 자연스럽게 되는 거야.
예를 들자면 언젠가 우리가 카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를했을 때에
네가 날 어떻게 생각했던가를 난 제법 확시라게 말해줄 수가 있어.
그런데 그건 지금 상황과는 관계가 없어.
넌 한 번쯤은 내 꿈을 꾸었으리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 얘긴 이제 그만 두자.
넌 무척 영리해. 대부분의 아이들은 멍청한데.
나는 때때로 내가 믿고 있는 영리한 아이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
너도 물론 괜찮겠지?”
”그래, 괜찮아. 하지만 난 네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는걸 뭐.”
”그럼 다시 그 재미나는 실험으로 되돌아가볼까?
우린 어떤 소년이 잘 놀란다는 것과 그는 누군가를 아주 두려워하고 있으니까
아마 그는 이 누군가와 매우 불쾌한 비밀이 있는 모양이란 말야.
대략 들어맞지?”


나는 꿈속에서처럼 그의 목소리와 힘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나는 그저 머리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니,
내 자신보다도 더 잘, 더 분명하게 알고 있다니!
데미안은 내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

”그럼 내 말이 맞는 거구나.
나는 그렇게 추리해낼 수가 있었어.
그럼 질문은 하나 남은 셈이군.
조금 전에 너와 헤어진 그 애가 누군지 알고 있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비밀을 들키고 말았다는 것이 무척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비밀은 밝은 곳에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어떤 애 말이니? 나 밖엔 아무도 없었는데.”
그는 웃었다.
”말해봐!” 그는 웃으며 재촉했다.
“그 애의 이름이 뭐니?”
나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란츠 크로머 말이니?”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어, 넌 정말 눈치가 빠른 애구나.
우린 친구가 될 만해. 이제 조금만 더 물어보자.
그 크로먼지 뭔지 하는 녀석은 아주 나쁜 애야.
녀석의 얼굴에 그렇게 써 있는걸 뭐. 넌 어떻게 생각하니?”
”응 그래.”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주 나쁜 애야. 악마 같은 녀석인걸.
하지만 그 녀석에게 들키면 안 돼.
제발 아무 말도 말아줘.
넌 그 녀석을 알고 있니? 크로머도 너를 알고?”
”진정해, 그 녀석은 벌써 가버리고 없으니까.
그리고 그 애는 나를 몰라. 아직은,
하지만 그 녀석에 대해 알고 싶어. 그 애는 초등학교에 다니니?”
”응.”
’몇 학년이니?”
’오 학년 하지만 아무 말도 말아 줘.
제발 부탁이야.

아무 말도 말아 줘.”

”가만 있어봐. 네겐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 녀석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줄 수가 없니?”
”해줄 수 없어. 그건 안 돼. 날 좀 내버려둬.”

그는 잠시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유감이로구나.”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린 실험을 좀더 계속할 수도 있을 건데.
하지만 난 널 괴롭히고 싶지 않아.
그런데그 녀석을 네가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건 조금도 정당한 일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고 있지?
그렇지 않니? 그 따위 두려움은
괜히 우리 자신을 망치게 만드는 것이니까 한시바삐 벗어나야 돼.
네가 진정한 사내 대장부가 되려면
그 따위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알겠니?”

”물론 네 말이 옳아‥‥‥.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걸 머.
정말 모를거야. ‥‥‥”
”네가 생각하는 것보단 난 널 더 잘 안다는 걸 너도 봤지 않니.
그 녀석에게 빚이라도 진 거야?”
”그래, 그렇기도 해. 하지만 그게 제일 큰 문제는 아니야.
그걸 말할 순 없어. 절대로. 말할 수 없어.”
”만일 그 녀석에게 빚진 돈을 내가 대신 갚아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니?
난 갚아줄 만한 돈이 있어.”
”아냐, 그런 게 아니라니까.
제발 부탁이야. 아무에게도 그런 말은 말아 줘.
한마디도!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난 무척 불행해지고 말 거야.”
”날 믿어, 싱클레어. 넌 언젠가는 그 비밀을 내게 털어놓게 될 거야.”
’절대,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야.”
나는 성급하게 외쳤다.
”너 좋을 대로 해.
난 시간이 좀 지난 뒤엔 아마 내게 이야기해줄 거라고 생각해.
물론 네 스스로 말이야.
설마 나도 너에게 크로머 같은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렇지 않아. 하지만 넌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래, 아무것도 몰라. 난 그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뿐이야.
나는 절대로 크로머가 한 것 같은 짓은 하지 않아.
그건 믿겠지? 너는 내게 빚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동안 나는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데미안이 그런 것을 알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점점 더 궁금하게 여겨졌다.

’이젠 집으로 가야 해.”
그는 이렇게 말하며 빗발 속에서 거칠게 짠 모포로 만든 외투깃을 여몄다.
”우린 벌써 많은 것을 이야기했으니까 한마디만 더 할게.
너는 그 녀석으로부터 벗어나야 해.
다른 도리가 없으면 그 녀석을 때려 죽여버려!
네가 그럴 수 있다면 난 무척 놀라고도 유쾌해 할 거야. 나도 널 도와줄게.”

갑자기 새로운 불안이 나를 덮쳐왔다.
카인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고 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래서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소름끼치는 일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 좋아.” 막스 데미안이 미소를 지었다.
“집으로 가, 우린 틀림없이 그 녀석을 해치우게 될 거야.
때려 죽이는 것이 가장 간단하긴 해.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가장 최선인 법이거든.
네가 그 녀석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건 하나도 좋은 일이 못돼.”

 

 


(3)

 

나는 집으로 왔는데 한 일 년쯤이나 떠돌다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달라져 보였다.
나와 크로머 사이에 뭔가 미래랄까,

희망 같은 것이 끼어든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다.
이제서야 나는 비밀을 안고 몸부림치던 몇 주간 동안
얼마나 무섭도록 외로웠던가를 확실히 느꼈다.
나는 그동안 여러 번 곰곰이 생각해보았던 어떤 일을 다시 생각해내었다.
그것은 내가 부모님께 내 죄를 모두 말하고 용서를 비는 일이
나의 괴로움을 좀 가볍게 해줄 수는 있지만
결코 완전히 구원해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로 조금 전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다른 낯선 사람에게 고해를 할 뻔 했고,
그러기만 한다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는
예감의 냄새를 강렬하게 느꼈다.

나의 불안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나는 아직도 크로머와의 기리고도 괴로운 관계를 각오하고 있었다.
만사가 아무 일 엇이 그렇게 평화롭게 진행되어가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우리 집 앞에서 날카롭게 들려오던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도 나지 않았다.
나는 감히 그런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다시 나타나지나 않을까 해서 내심 조바심을 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집으로 오지도 않았고, 불쑥 나타나지도 않았다.
이 놀라운 자유를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유에 대한 불안감은 마침내 어느날 프란츠 크로머를 우연히 만났던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사일러 거리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흠칫 놀라더니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피해 그대로 되돌아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건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나의 적이 내 앞에서 달아나다니!
악마가 내게 겁을 먹다니!
기쁨과 놀라움이 나를 관통해 지나갔다.

그 무렵의 어느날 데미안이 내게 나타났다.
그는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고 나는 인사를 했다.
”그래. 잘 있었니, 싱클레어.
어떻게 지내는지 만나보고 싶었어.
크로머도 더 이상 널 괴롭히지 않을걸. 그렇지?”

”네가 그랬니?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한 거야?
난 영문을 모르겠어. 그 녀석은 전혀 나타나질 않아.”
”잘 됐군. 만일 그 녀석이 다시 나타나면
그러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 녀석은 워낙 뻔뻔스런 녀석이니까
그럼 그 녀석에게 그저 데미안을 기억하라고만 말해.”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거니?
그 녀석과 한판 붙어서 실컷 때려 준 거니?”
”아냐. 난 싸움하는 건 과히 좋아하지 않아.
난 그저 너하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녀석과 애기했을 뿐이야.
널 가만히 놓아두는 게 그 녀석의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주었을 뿐이야.”
”설마 그 애에게 돈을 준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 방법이라면 이미 네가 시험해 보았잖아.”

나는 그에게 좀더 자세히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는 가버렸고 나는 감사와 두려움, 경탄과 불안감,
호감과 내면적인 반항심 등이 이상하게 뒤엉킨,
옛날부터 그에 대해 느껴왔던 가슴답답함을 느끼며 혼자 남아 있었다.

나는 머지않아 다시 그를 만나 모든 일에 대해서,
더욱이 카인의 문제에 대해서 까지도
더 많이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먹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진 않았다.
감사의 심정이란 거의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더욱이 아이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잘못인 것처럼 내겐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데미안에게 보였던
내 자신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그다지 탓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나는 만일 그가 나를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구해내주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병들고 타락해버렸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해방감을 그 당시로서도 내 소년기의 최대의 체험으로 느끼긴 했지만
해방을 시켜준 사람에 대해선 기적을 이루어 내기가 무섭게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배은망덕이란 내게 있어서 결코 이상스런 일은 아니었다.
이상스러운 일은 내가 그것에 대해 전혀 호기심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데미안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 건드리게 했던 비밀에 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은 채 어떻게 단 하루라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가.
카인에 관해, 크로머에 관해, 독심술에 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호기심을 나는 어떻게 누를 수가 있었을까?

이 일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러했다.
나는 갑자기 적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어 밝고 즐거운 세계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으며,
이미 불안의 발작이나 숨막힐 듯한
가슴의 고동소리에 내 자신을 맡기지 않아도 되었다.
질곡은 풀렸고, 나는 더 이상 가책에 떠는 죄인이 아니었으며,
다시 예전의 학생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나의 본성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전의 균형과 평온 속으로 되돌아 오려고 애썼고,
무엇보다도 그 끔찍하던 일들과 고통스럽던 일들을 빨리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나의 죄와 깊고 긴 고통의 역사는 흔적이나 이상한 남김없이 내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잊어버리려 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라
나를 도와주고 구원해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오늘날에 와서는 잘 이해할 수 있다.
저주받은 죄의 구렁텅이 속에서,
크로머에게 당한 몸서리치는 수모에서 상처를 입은 영혼이 모든 힘과 노력을 다해

이전의 행복하고 만족스러웠던 세계로 도망쳐 돌아온 것 이었다.
다시 내게 문을 열어준 잃었던 낙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밝은 세계로, 누나들에게로,
좋은 향기와 아벨에 대한 신의 사랑이 존재하는 곳으로 나는 되돌아왔던 것이다.

 

데미안과 짧은 이야기를 나눈 그 다음날,
되찾은 자유에 대해 충분히 확신이 서고
그것이 다시 사라져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되었을 때
나는 그렇게도 자주 열렬히 원했던 일을 했다
나는 용서를 빌었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께 열쇠가 부서지고 장난감 돈이 들어 있던 저금통을 갖다 보이고
얼마나 오랫동안 어리석은 거짓말 때문에
못된 아이에게 시달림을 받아왔는지를 고백했다.
어머니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시지는 못했지만,
저금통과 달라진 내 눈빛을 보고 달라진 내 목소리를 듣고는
내가 병에서 회복되어 다시 어머니의 아들로 되돌아왔음을 느끼셨다.

나는 극도로 흥분되어 내가 다시 돌아온 것에
축제를 벌이고 방탕아의 귀향식을 거행했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아버지께 데리고 가셔서는
다시 이야기가 되풀이되고 질문을 하시고 놀라시더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오랫동안의 난처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게 된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셨다.
모든 건 멋있었고 이야기 같았으며,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려들었다.

나는 진심으로 이 조화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평화를 되찾고, 다시 아버지 어머니의 신뢰를 받게 되었다는 건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모범적인 아들이 되었고, 옛날보다 누나들과도 더 잘 어울렷으며,
기도를 드릴 때에는 구원을 얻은 자와 회개한 자의 감사에 넘친 심정으로,
내가 좋아하던 옛날의 찬송가를 함께 불렀다.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일이며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전적으로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데미안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여기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데미안에게도 나는 참회를 했어야만 했다.
그 참회는 그럴 듯하거나 감동적이지는 않았을 테지만
나로서는 참회를 했어야만 더 기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온 힘을 다해 옛날의 낙원에 집착했고
귀향을 해왔고 신선한 자비로써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데미안은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고
이 세계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는 크로머와는 달랐지만 어떤 미로는 그 또한 유혹자였으며
내가 영원히 다시 알고자 하지 않았던
다른 나쁜 세계와 연관을 맺게 했던 것이었다.
나 자신은 이제 겨우 아벨로 돌아와 있는 상태에서
또 다시 아벨을 버리고 카인을 찬미하는 것을 도울 수는 없었으며
스스로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것이 표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정이었다.
그러나 내면적인 사정은 달리 존재했었다.
나는 크로머의 손에서 해방되었지만
내 스스로의 힘으로 그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 세상의 좁은 길을 곧바로 걸어가려고 애썼지만 내겐 너무 위험했다.
다행히 어떤 친절한 손이 나를 붙들어 위험에서 구해주었기 때문에
지금 나는 더 이상 한눈을 파는 일 없이,
어머니의 품, 경건하고 따스했던
어린 시절의 안락한 보호 속으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실제보다 더 어리고 더 순종했으며 더 어린애처럼 굴었다.

크로머에 순종했던 것을 나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해야만 했었는데
나는 이미 혼자 걸어가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맹목적이다 싶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켜주시는
옛날의 익숙한 ‘밝은 세계’에 속하기를 갈망했었지만
그것이 유일한 세계가 아닌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데미안에게 의지하고
그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 당시의 나에게는 지극히 정당한,
그의 이단적인 사상에 대한 불신임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데미안은 내게 부모님들이 요구하는 그 이상의 많은 것을,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자극과 경고로써 조롱과 풍자로써
나를 보다 적극적인 인간이 되게 하려고 애썼을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나는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서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반 년쯤 후의 어느 날
산책길에서 아버지께 많은 사람들이
카인보다 아벨이 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여쭤보았다.
아버지께서는 대단히 놀라시면서
그러한 견해는 전혀 새로운 점이 없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셨다.
그 견해는 원시기독교 시대 대부터 시작되어 여러 종파에서 전도되어 왔는데
그 종파들 가운데의 하나는 ‘카인교파’라고 불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이단적인 사상은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려는 악마의 기도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카인이 옳고 아벨이 부정하다고 믿는다면
신을 잘못 생각한 것이 되고, 따라서
성서의 신은 올바른 유일신이 아니라 그릇된 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카인교파들은 그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교도들은 먼 옛날에 사라졌다.
아버지께서는 나의 학교 친구가 그런 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셨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단연코 배척해야 한다고 엄숙히 경고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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