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몽정기 10
천궁. 하늘의 궁이라는 뜻의 술집이었다.
호텔 뒷편으로 걸어서 불과 5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차덕수와 함께 나온 직원들은 박 실장을 포함해서 모두 네 사람이었다.
통역으로 함께 왔던 여직원은 행사가 끝난 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약을 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는 바람에 함께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일행은 오히려 더 즐거운 눈치였다.
천궁은 술집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천장이 마치 고대 그리스의 사원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높았고
실내의 기둥 또한 한 아름은 넘어 보였다.
실내의 색깔은 전체적으로 붉었고 네 사람을 맞이한 남자 종업원 역시
붉은 계통의 전통 의복을 입고 있었다.
술집이라기 보다 전통사원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한국 사업가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라 대부분 한국말을 잘 합니다.”
김 실장이 차덕수에게 귀뜸을 했다.
남자 종업원이 네 사람을 안내했다.
그런데 김 실장이나 장 과장, 그리고 서 과장은 모두 몇 차례 다녀본 솜씨 같았다.
물류 파트를 담당할 장 과장은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히면 중국말로
자연스럽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차덕수가 힐끔 그를 쳐다봤다.
지금 차덕수와 함께 술을 마시러 나온 사람들은 오성의 인재들이었다.
세 사람 모두 외국 유학파였으며 김 실장의 경우 중국어까지 포함해서
모두 다섯 개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실력파였다.
처음 차덕수가 ‘신의주개발사업단’ 단장으로 발령 받아 출근했을 때
부하 직원들의 이력서를 보곤 깜짝 놀랬다.
30여명이 넘는 직원들이 이미 배치되어 있었는데 절반 이상의 최하 학력이 서울대였던 것이다.
지방대를 겨우 졸업한 차덕수로서는 괜한 자격지심이 생길 법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뿌듯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차 회장의 속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적응을 해야 했다.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차덕수는 일에 무식할 정도로 달려들었다.
서류 하나를 결재할 때도 검토하고 또 검토했으며 부하 직원들의 수군거림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더 이상 ‘코지’에서의 차 실장이 아니었다.
월급쟁이를 시작한 뒤 지금 일처럼 혼신을 다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부하 직원들이 조금은 인정을 하는 듯했다.
‘학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력과 실적이 중요한 거야.’
오성 차상경 회장이 처음 그를 불러놓고 했던 말이었다.
차덕수는 그의 말을 신뢰했다.
또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었다.
종업원이 안내해 들어간 방 역시 진시황이나 묵었을 법할 정도로 으리으리했다.
테이블이 각각 네 개가 따로 놓여 있었으며 소파 역시 두 세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크기로
각각의 소파였다.
정 가운데에 둥근 무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차덕수는 호프집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단장님, 어떻게 할까요?”
차덕수가 김 실장을 쳐다봤다.
네 사람이 이미 각자의 소파에 앉아 차덕수의 눈치를 살폈다.
“알아서 하지.”
“들쭉술 괜찮겠습니까? 백두산 들쭉술이라고…
북한에서 가장 유명한 술 중의 하납니다.
김일성이 평생 애호했다는 술이기도 합니다.”
차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
술집 분위기를 보자 대충 짐작이 갔다.
“술을 마시는 데 여자가 없으면 재미있겠나. 북경까지 왔는데 말야.”
차덕수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단장님, 그렇죠? 아무래도 술 마실 땐 여자가 있어야 제 맛이죠.”
많이 배우나 적게 배우나 똑같았다. 차덕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들쭉술이 먼저 나왔다.
각 테이블마다 해산물 안주와 술이 똑같이 올려졌다.
차덕수는 들쭉술병에 쓰여진 글귀들을 눈으로 읽었다.
‘40도? 도수가 높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산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글귀를 읽자 조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괜한 노파심이었다.
차덕수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단장님, 회장님께서 가장 중점으로 생각하시는 분야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김 실장이 서먹한 분위기를 털어버리려는 듯 활기찬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래도 공단 조성이 먼저 아닐까요?”
장 과장이 끼어 들었다.
“회장님 고향이 여기시라 관광에도 유독 신경을 쓰시는 것 같던데요.”
서 과장도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차덕수는 아직 그들이 풋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와 철도야.”
신의주개발 단장을 맡기 시작하면서 차덕수는 오랜 시간 차상경과 시간을 보냈다.
명목상 신의주 개발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만들자는 뜻이 앞섰던 것이다.
“무한한 잠재력의 중국, 그리고 러시아를 거쳐서 유럽까지 오성에서 만드는 물건을 팔자는 거지.
그러려면 물류의 혁신이 있어야 하고 신의주는 그런 물류의 혁신을 일으켜 줄 레일로드지.
실크로드가 아니라 레일로드가 필요한 거야.”
장 과장이나 서 과장은 물론 김 실장까지 존경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차덕수를 쳐다봤다.
차덕수도 흐뭇했다.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것이다.
“단장님께서 괜히 단장님이 아니십니다.”
김 실장의 칭찬은 입에 발린 소리 같지는 않았다.
여자들이 들어왔다. 차덕수는 입이 쩍 벌어졌다.
붉은 계통의 전통 의상을 입고 들어온 네 명의 여자는 그야말로 조각 같았다.
키만 크고 불륨만 있는 서양 여자들과는 전혀 달랐다.
네 명의 여자 뒤에 푸른색의 전통 의상을 입은 마담이 앞으로 나왔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고 해서 조선족 아가씨들로 올립니다. 맘 편히 놀다 가십시오.”
김 실장은 마담과 이미 안면이 있는 듯했다.
서로 눈인사를 하는 걸 차덕수가 놓치지 않고 보았다.
여자들이 소파에 앉았다.
여자들은 한국에서와 달리 전혀 색다른 분위기였다.
허리까지 찢어진 치마가 더욱 자극적이었다.
“정수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차덕수의 곁에 앉은 여자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갸름한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 긴 목과 잘록한 허리. 젖가슴도 풍만했다.
약간은 이국적인 냄새도 풍겼다. 동양과 서양의 조화 같은 얼굴이었다.
게다가 여자의 얼굴엔 잡티 하나 없었다. 차덕수는 소파 뒤로 몸을 묻었다.
여자는 차덕수의 허벅지 위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고 술을 따랐다.
허벅지를 잡은 손이 적당히 떨렸다.
경험이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귀밑 털도 보송보송한 게 아직 어려 보였다.
“몇 살이니?”
소파마다 나누어져 있어 이제 각자 플레이였다.
조명도 약간 어두워졌고 재즈 음악이 은은하게 깔렸다.
중국이라는 느낌이 전혀들지 않았다.
“이제 스물 됩니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리고 말했다.
흘겨보는 듯한 그녀의 눈매가 차덕수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북창동 식은 뭐고 강남식은 뭐냐?”
차덕수는 여자가 하는 말에 놀라 되물었다.
차덕수의 손은 이미 여자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었다.
여자가 슬쩍슬쩍 차덕수의 손을 떼어냈다.
그럴수록 더욱 감칠맛이 났다.
“북창동식은 다 벗고 마시는 거고, 강남식은 우리만 벗고 먹는 거예요.”
차덕수는 오물조물 말하는 그녀가 너무도 귀여웠다.
오랜만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열정이 끓어올랐다.
“단장님 어떻게 할까요?”
김 실장의 눈이 반짝거렸다.
북창동 식으로 먹자면 차덕수 자신도 옷을 벗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술기운이 적당히 올라 기분은 흥겨웠지만 그네들 앞에서 옷까지 벗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곁에 앉은 여자를 다른 놈들 눈요기로 보여주기도 싫었다.
“그냥 점잖게들 먹지. 한국 사업가들은 모두 다 그렇게 술 마시는 줄 알겠네.”
차덕수는 마음을 꾹꾹 누르곤 침착하게 말했다.
술은 말 그대로 술술 잘 넘어갔다.
40도가 넘는 술인데 들쭉술은 그렇게 독하지 않았다.
기분 때문인지 소주나 양주보다 달고 맛있었다.
몸은 풀어졌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앞좌석에 앉은 장 과장은 가관이었다.
한 손은 여자 가슴으로 들어가 있고 다른 한 손은 치마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여자 앞에서 짐승이 되는 건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덕수는 가능한 점찮게 술을 마셨다.
고작해야 여자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는 게 전부였다.
마음 같아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한바탕 놀고 싶었지만
이젠 예전의 차 실장이 아니라 차 단장이었던 것이다.
“너무 점찮으세요.”
여자가 젓가락으로 해삼을 찍어 차덕수의 입 쪽으로 가져왔다.
‘요걸 어떻게 한번 먹어봐야겠는데.’
차덕수는 은근한 눈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창녀하고 그 짓하다가 공안원한테 걸리면 비자에 호색한이라는 도장이 찍힌다던데.’
차덕수는 마음속으로 낄낄거렸다.
그래도 곁에 앉은 여자와 한번 품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듯했다.
아무리 궁리해도 별다른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신의주에 사업을 할 때 북경을 오가며 첩실로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희들 이거 해서 살만은 하냐?”
“그냥 그렇죠.”
차덕수는 운이나 한번 떼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자리 끝나고 나한테 한번 와줄 수 있겠냐?”
차덕수는 가능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북경 호텔에 계시죠?”
차덕수가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마담 언니는 둘째치고 공안원한테 걸리면 큰일 나는데.”
전혀 방법이 없다는 말투가 아니었다.
술기운이 오른 여자의 얼굴도 불그죽죽했다.
지금 심정 같아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만 같았다.
“몇 호세요?”
“1054호.”
“장담은 못하겠어요.”
그녀가 눈을 내리 깔았다.
표정이 맑아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차덕수는 더욱 애가 탔다.
호텔로 돌아온 차덕수는 먼저 샤워를 했다.
속옷은 벗은 채 가운만 입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의 24시간 뉴스 채널을 틀었다.
마침 차상경과 북측 사람들의 조인식 광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차덕수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주변 사람들과 비교를 해 봐도 별로 손색이 없는 차림과 몸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년이 나를 찾아온다면 내게 매력을 느껴서는 아니겠지.’
차덕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못내 아쉬웠다.
그렇다고 중국에 나와서 망신을 당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중요한 일을 치른 상황에서 제 얼굴에 똥칠을 할 수는 없었다.
차덕수는 냉장고를 열어 위스키를 꺼냈다.
술기운에 젖어 잠에 푹 빠지지 못하면 여자 생각으로 잠을 못 잘 것만 같았다.
잔에 위스키를 절반쯤 따라 마시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차덕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차덕수는 떨리는 가슴으로 감시 렌즈를 통해 문밖을 내다봤다.
그녀였다.
차덕수가 얼른 문을 열었다.
그녀의 손을 잡아 끈 후 복도를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문을 잠그고 그녀를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한국에서 보는 여느 젊은 여성과 다르지 않았다.
엷은 개나리빛 외투에 소매가 짧은 반팔 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다.
“난 못 오는 줄 알았다.”
“저도 실은 많이 망설였어요.”
차덕수는 여전히 그녀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어쨌든 이곳까지 왔으니 섹스는 당연지사?
“샤워할래?”
“네.”
차덕수는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아내 모르게 바람피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처럼 흥분이 됐다.
여자가 외투를 소파 위에 벗어 놓고 욕실로 향했다.
차덕수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났다.
‘돈을 줘야 하나? 그래 줘야겠지.
마누라 이외의 여자완 돈으로 배팅하는 거야. 그 철칙이 깨지만 안 돼지.’
차덕수는 좁은 거실을 오락가락 하며 속으로 계산을 했다.
마음은 급한데 여자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등 좀 밀어줄까?”
차덕수는 급기야 욕실 문을 두드린 후 물었다.
그 말을 해 놓고 보니 우스웠다.
한동안 욕실에서 말이 없었다.
“실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돈 애기로군. 달라는 대로 줘고 안 안깝다.
“뭔데?”
“저 들어오실래요?”
여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덕수가 문을 와락 열었다.
여자는 위와 아래를 가리고 샤워기 아래에 젖은 몸으로 서 있었다.
고혹적인 몸매였다.
“할 말이 뭐냐?”
차덕수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태세였다.
“저 실은…”
여자가 아래를 가린 손을 치웠다.
어?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체모 사이로 작은 혹 같은 게 보였다.
차덕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사타구니 가까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헉! 그런데 그 혹은 퇴화한 남자의 성기였다.
차덕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정신없이 욕실에서 나와 자신도 모르게 가운을 입은 채 방에서 나가버렸다.
문이 닫혔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