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난봉기 2
진국은 오피스텔 건물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겠지만 두 여자가 오피스텔을 얻어 사는 건 의외였다.
진국은 택시를 기다리며 입맛을 다셨다.
‘나 선배도 애인이 있는 거 같았는데. 그 애인도 나처럼 속께나 탔겠군.’
진국은 담배를 꺼내 물며 웃고 말았다.
‘자고 가랄 데 못 이기는 척 눌러 앉는 건데.’
송림과 채연이 진국을 붙잡으며 자고 가라고 했던 것이다.
오피스텔은 그만큼 넓었다.
하지만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두 여자가 진국 앞에서 손을 마주잡고 있었는데 너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혹시 레즈비언? 아닐 거야.’
진국은 고개를 저었다.
마침 택시가 눈앞에 와서 멈추었으므로 일단 택시에 올랐다.
채연을 앞으로 몇 차례 더 만날 수 있으니 기회는 많았다.
주말쯤에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할 계산이었다.
진국은 택시에 오른 뒤 무음으로 해놓았던 휴대폰을 꺼냈다.
다시 벨소리로 복원을 시키려는 데 액정화면을 살펴보니
세 차례나 부재중 전화가 걸려와 있었다.
수영이었다.
봉수가 요즘 송화를 만난다는 이야기를 한 뒤라 언젠가 수영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리라는 예상은 했었다.
진국은 전화를 걸까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빠, 어디야?”
수영이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낙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아이였다.
관계를 진전시키기에 그녀는 너무 어렸고 천방지축이었다.
그래도 꿩 대신 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도림인데 종로로 가고 있어.”
“그러면 나 좀 데려가 줄래?”
“어딘데?”
“홍대. 비밥.”
“술값 없냐?”
“그런 게 아니라. 오빠 올 거지? 전화 끊는다.”
소란한 웅성거림이 들렸다.
수영이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목소리만으로 생각했을 땐 별 일이 아닌 듯한데
급하게 전화를 끊는 폼으로 봐선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저씨, 홍대로 갑시다.”
진국은 택시기사에게 행선지를 바꿔 말했다.
진국이 ‘비밥’으로 들어섰을 땐 새벽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술집이었다.
진국은 테이블을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술집에 손님이라곤 세 테이블이 전부였다.
수영은 입구에서 먼 창가 쪽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네 명의 남자가 수영을 에워싸듯 앉아 있었다.
수영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남자들이 일제히 진국을 쳐다봤다.
수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곁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강제로 그녀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정말 왜 이래?”
수영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진국이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수영을 에워싸고 있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부티가 줄줄 흘렀다.
네 명이 모두 귀걸이를 한 두 개씩은 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입고 있는 자켓이나 셔츠도 알마니나 베르사체 버버리 등이었다.
남자들이 비웃는 듯한 얼굴로 진국을 올려다보았다.
“왠 아저씨?”
남자 하나가 진국을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다.
진국은 수영이의 손목을 잡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수영과 비슷한 또래였다.
하나같이 건들거리며 걸었다.
“이것 봐, 아저씨. 왜 그래?”
길게 머리를 기른 녀석이 진국의 어깨를 툭 밀었다.
진국은 모른 척했다.
“허, 이것 봐라. 우리가 먹을 걸 채 가시겠다. 그런 뜻인 것 같은데…”
그래도 진국은 엘리베이터 숫자판만 노려보았다.
수영은 진국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저씨,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아. 이 년이 먼저 꼬리를 쳤다고.”
또 다른 한 녀석이 진국 앞으로 나오며 엘리베이터 앞을 막아섰다.
“비켜!”
진국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허! 이 아저씨가 뭘 믿고 이렇게 설칠까?
아, 이 년이 먼저 꼬리를 쳤다니까.
우리 술자리에 와서 로얄 살루트 다 처먹고 이젠 가겠다?
아저씨 로얄 살루트가 얼만 줄이나 알아! 이 백 만원이야 썅!”
“오빠, 거짓말이야. 술도 얼마 남지 않았었고 또 첨엔 이 남자 혼자 있었어.
어느 순간에 갑자기 나타나선 나를 막 끌고 여기까지 온 거야.”
진국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그의 어깨를 잡는 순간 진국은 남자의 목을 향해 손을 날렸다.
순식간이었다.
남자가 앞으로 폭 고꾸라지며 켁켁거렸다.
“이런 개 같은 놈이!”
양쪽에 서 있던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진국은 오른편에 달려드는 남자를 피해 뒤로 살짝 물러났다.
남자가 앞으로 몸이 기울어졌을 때 뒷목을 항정치기로 내려쳤다.
돼지를 잡는 택견의 한 기술이었다.
그 남자 역시 바닥에 그대로 쫙 뻗어버렸다.
왼편에 서 있던 남자가 진국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진국이 날아오는 주먹을 손바닥으로 잡고 탁구공을 부수듯 악력을 주며 손을 비틀었다.
그대로 팔을 비틀어 바닥에 팽개쳤다.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주춤 물러났다.
“조용히 니들 자리로 돌아가라.”
진국이 뒤로 돌아서며 으름장을 놓았다.
바닥에 쓰러졌던 남자들이 가게 안으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갔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진국와 수영이 엘리베이터를 올라탔다.
그때까지도 수영은 진국에게 푹 안겨 떨고만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부킹한 거야. 첨엔 한 놈만 있었거든.
그랬는데 갑자기 세 놈이 더 나타나서 같이 여관엘 가자는 거야.”
“네 놈이?”
수영은 진국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진국은 수영의 옷차림을 살폈다.
가슴이 깊이 파인 V넥 셔츠에 허벅지가 반은 드러나는 짧은 치마였다.
미니 스커트가 유행해도 그렇지, 너무 짧았다.
어깨에 닿은 수영의 가슴이 물렁거렸다.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듯했다.
“니가 이러고 다니니까 남자들이 헤프게 보지.”
“그래도 그렇지. 여자가 원하지 않는데 그런 법이 어딨어.”
그녀는 맹랑하고 당돌하게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췄다.
“아무튼 지저분한 새끼들 천지라니까. 그런데 오빠 쌈 잘하네.”
수영이 여전히 진국의 팔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집까지 바래다 줄게.”
“오빠도 술 한잔 한 거 같은데 우리 해장국 먹으러 가자.”
언제 남자들에게 위협을 받았냐는 듯 애교를 부렸다.
어깨에 닿은 수영의 젖가슴이 따스했다.
진국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진국은 해장국을 입에 퍼 넣으며 수영을 힐금힐금 훔쳐보았다.
봉수, 송화와 함께 동해로 놀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수영은 못 이기는 척하며 진국의 품에 안겼었다.
그러나 해변가로 나갔던 봉수와 송화가 느닷없이 콘도로 돌아오는 바람에
수영을 벗기고도 ‘거시기’까지 하진 못했다.
‘그때 못했던 걸 오늘 한번 하자고 말해?’
진국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자들에게 떼로 강간을 당할 뻔한 여자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수영인 진국보다 훨씬 어렸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럴 순 없었다.
진국이 솟아오르는 욕망을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내 욕심이나 채우자고 그럴 순 없지.’
진국은 순간 채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빠! 무슨 생각해?”
수영은 해장국을 깨끗이 비웠다.
먹성이 좋았다.
“아무 생각도 안했어.”
“에이, 거짓말!”
수영이 눈을 흘겼다. 제법 여자다웠다.
“그나 저나 너 너무 늦은 거 아냐? 부모님이 뭐라고 안 그러겠어?”
“오빠 나 독립했어.”
“독립?”
“집에서 학교까지 너무 멀어서 오피스텔 얻어서 나왔지.”
“팔자 좋구나. 혹시 송화랑 둘이 사는 거야?”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넘겨 짚어본 게 그대로 맞았다.
‘채연씨는 나 선배랑 살고 수영인 송화랑.’
진국이 입맛만 다셨다.
해장국을 반쯤 남기고 숟가락을 놓았다.
“그럼 너 혼자 나이트 간 거냐?”
“아냐. 친구들이랑 같이 갔었는데 모두 부킹 하느라 찢어졌지. 그랬다가 이렇게 된 거야.”
“무슨 기집애가 그렇게 겁도 없냐.”
“내가 잘못된 건가? 나를 어떻게 한번 해 보려는 놈들이 나쁜 놈들이지.”
진국은 가슴이 뜨끔했다.
채연에게 풀지 못한 욕망을 수영에게 풀려고 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가자.”
“그런데 오빠, 오늘 보니까 정말 멋있더라.
오빠가 다섯 살만 어렸어도 내 애인으로 삼는 건데.”
진국은 해장국 값을 계산하고 가게에서 나왔다.
수영인 춥다며 다시 진국의 팔짱을 꼈다.
채연의 속을 몰랐듯이 수영이의 속도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론 안 구해준다. 그러니까 좀 조신하게 살아.”
“이래봬도 나 할 거 다해. 학점도 빵빵하다구.
열심히 공부하고 놀 땐 화끈하게 놀자는 게 내 주의야.”
진국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수영을 바래다주고 그 택시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이 어디야?”
“서교동.”
택시가 출발했다. 수영인 택시 안에서도 진국의 팔짱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빠 실은 오늘 송화 안 들어오거든.
요즘 봉수 오빠 작업실에서 모델 노릇하느라 가끔 안 들어와.”
수영이 앞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갑자기 진국의 가슴이 뛰었다.
‘그래, 쿨하게. 채연씨가 내 여자도 아닌데 뭘.’
진국은 채연을 배신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국은 수영이 오피스텔 문을 여는 동안 뒤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여자라 채연처럼 익은 몸은 아니지만 제법 여자 꼴이 났다.
“오빠, 우리 정말 오랜만이지?”
수영이 오피스텔로 들어서는 진국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몇 달만 일 거다.”
“그렇게 오래 됐어?”
“지난번 오사카에서 한번 보고 그 뒤로 송화랑 봉수랑 같이 한번 더 본 게 전부지 아마.”
진국은 오피스텔을 둘러보았다.
2층 침대와 소파, 응접 테이블, 분리된 주방. 둘이 살기엔 적당했다.
수영은 냉장고 문을 열고 캔 맥주 두 개를 꺼내왔다.
“오빠, 나 샤워할 동안 마시고 있어.”
수영이 테이블 위에 캔 맥주를 올려놓고 욕실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치마와 셔츠를 벗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환한 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팬티만 걸치고 욕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욕실에서 고개를 내밀고 진국에게 혀를 낼름 내밀어 보였다.
진국은 웃고 말았다.
진국은 캔 맥주를 들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창 쪽으로 두 개의 책상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송화의 책상이고 다른 하나는 수영이의 책상인 모양이었다.
진국은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엔 사진이 담긴 작은 액자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수영이의 얼굴이 보였다.
진국은 의자에 앉아 사진들을 구경했다.
부모님인 듯한 중년 내외의 사진, 수영이 혼자 찍은 사진
그리고 제법 잘 생긴 남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진국은 남자와 같이 찍은 사진을 들고 보았다.
애인인 듯했다.
한 10분쯤 흘렀을까?
수영은 수영이 팬티만 걸친 채 젖은 머리로 욕실에서 나왔다.
자기 집이라지만 너무 거리낌이 없었다.
진국은 그런 수영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이 사진 속의 남자 누구니?”
진국은 무심한 척 물었다.
“응, 내 애인.”
“애인?”
“지금 미국에 유학 가 있어.”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수영은 진국에게로 다가왔다.
가슴이 흔들렸다.
연분홍 빛의 꽃판이 진국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바지 속에 숨죽이고 있던 진국의 물건이 슬금슬금 위로 솟아올랐다.
“너 그럼, 지금 애인을 배신하는 거잖아.”
진국은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했다.
“오빠는 고리타분하게스리. 쟤가 뭐 내 남편인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 아니냐?”
“사랑? 하지. 사랑과 섹스는 별개 아냐?”
수영은 진국의 손을 잡고 소파 쪽으로 끌어당겼다.
‘사랑과 섹스가 별개다? 그럼 별개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진국은 선뜻 수영을 안지 못했다.
하지만 수영은 진국의 팔을 들어 자신의 어깨 위로 올렸다.
매끈한 살이 만져졌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손끝이 짜릿했다.
진국이 수영을 마주보았다.
아직 젖살로 통통한 그녀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오빠, 콘돔 없지?”
“사, 사올까?”
“아냐, 안전한 날이긴 한데…. 정 뭐하면 밖에다 해.”
진국이 수영의 팬티를 벗기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진국이 놀라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짜증나, 이 밤중에 누구야.”
수영이 짜증을 내며 반팔 셔츠를 입었다.
진국은 그녀의 젖가슴을 쳐다보며 헛기침을 했다.
수영이 인터폰을 들었다.
“어, 오늘 안 들어올 거 같다며?”
송화였다.
진국은 얼른 바지를 추슬렀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른 모양이다.’
수영이 문을 열자 송화가 들어왔다.
“어머, 오빠 와 있었네. 기집애 진작에 전화하지.”
진국은 붉어진 얼굴로 송화를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어떻게 된 거야? 봉수 오빠랑 싸웠어?”
“아냐. 갑자기 밤에 오빠 고향집에서 전화가 와서 고성에 간다고 나갔어.”
“고성에? 무슨 일인데?”
“나도 몰라. 그런데 좀 심각해 보였어.”
진국은 빳빳하게 섰던 물건이 스르르 죽어버리는 걸 느꼈다.
“나도 가야겠다.”
진국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어딜 가. 그냥 오빠 여기서 자.
내일 출근해야잖아. 언제 집에 가서 씻고 언제 자겠어.”
송화가 수영이 보다 먼저 나서서 만류했다.
진국이 수영이의 눈치를 살폈다.
“송화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
“그럴까.”
진국은 다시 소파에 앉아 봉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영이 진국 곁에 바짝 다가앉아 귀를 기울였다.
송화도 진국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무슨 일이냐?”
“너 어떻게 알았어?”
“방금 송화한테 들었다.”
“송화가 전화했냐?”
“아냐, 지금 오피스텔에 와 있거든.”
두 여자가 점점 더 가깝게 진국에게 다가왔다.
수영인 아예 진국에게 달라 붙을 것 같았다.
진국의 어깨에 닿은 수영의 맨살이 말랑말랑 했다.
“실은 아버지가 좀 위독하다고 해서.”
“회사는?”
“전화해야지. 그나 저나 바쁜데 미안해서 어떡하지?”
“회사 바쁜 게 문제냐. 아무튼 회사는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라.”
통화가 끝났다.
“많이 아프신 모양이네.”
송화의 얼굴이 울상이었다.
송화는 봉수를 사랑하고 있는 듯했다.
송화의 책상 위엔 다른 남자의 사진도 없었다.
“오빠, 씻어!”
수영이 농을 뒤져 밴드로 된 반바지와 박스 티를 꺼내주었다.
“정말 나 여기서 자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