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개와 늑대의 시간

제5장 몽정기 8

오늘의 쉼터 2015. 1. 4. 10:30

제5장 몽정기 8

 

 

“여보 차 알아 봤거든.”


휴대폰이 울려 전화를 받으니 아내였다.

 

박춘만은 마리야와 나타샤의 가운데 벌거벗고 누워 전화를 받고 있었다.

 

“듣고 있어? 자기 듣고 있는 거야?”

 

“응, 회식 자리가 자꾸 길어지네. 피곤해서 빨리 집에 가려고….”

 

나타샤와 마리야도 벌거벗은 채였다.

 

박춘만은 한쪽 손은 나타샤의 가슴에, 다리는 마리야의 다리 위로 올려놓았다.

 

“내 친구 귀숙이 있잖아.

 

걔가 타던 찬데 좀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뭐 어때.

 

그냥 시장갈 때나 몰고 다니고 그래서 거의 새차나 다름없는데… 어떻게 할까?”

 

“한 몫에 다 못 줘도 괜찮대? 그거 때문에 중고매장에서 할부로 사려고 했던 거잖아.

 

조금씩 나눠줄 수 있으면 좋은데…”

 

전화 통화를 지켜보던 나타샤가 못 참겠다는 듯이 박춘만의 가슴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따뜻한 입술이 가슴에 닿았다.

 

아래쪽으로는 마리야의 손이 내려왔다. 사타구니가 불끈 솟았다.

 

“당신 어디 아파?”

 

“응? 아니, 그게 아니라 회식 자리에서 먹은 저녁이 좀 얹힌 모양이야.”

 

“에이 조심하지. 사실은 당신 모르게 적금 하나 들어 놓은 거 있거든.

 

차 상태가 너무 좋고 또 걔가 내 사정 알고 그래서 그 적금으로 샀으면 싶어서….

 

정말이지 귀숙이가 헐값에 넘긴다고 하거든.”

 

“그래? 차는 봤어?”

 

나타샤가 몸을 굴려 박춘만의 위로 올라왔다.

 

순간 박춘만은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터져나오려는 신음 소리를 눌렀다.

 

그래도 억눌린 신음소리는 삐져나왔다. 곧 폭발할 것만 같았다.

 

이렇게까지 원하지 않았는데 술에 이성의 경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두 여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호텔방까지 오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응, 봤지. 기스 하나 없더라. 어떻게 할까?”

 

“음, 당신이 알아서 해. 실적이 좋아서 이달에 보너스도 두둑이 나올 거 같아.”

 

“알았어. 우리도 이제 차 생기는 거지? 내일 오후에 끌고 올까?”

 

“근데, 당신 장롱 면허잖아.”

 

“그러니까 당신이 같이 가야지.”

 

박춘만도 싫지 않았다.

 

그 동안 아이들 데리고 놀이동산에 가면서도 차를 끌고 가 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도 자신만 차가 없었다.

 

마음이 아프고 자존심 상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끙! 그래, 내일 같이 가자.

 

보험이랑 명의이전이랑 오전 중에 해 놓을 수 있으면 해 놓고. 끙!”

 

“자기 속이 많이 안 좋아? 왜 자꾸 끙끙 거려?”

 

“아냐,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면 괜찮아지겠지. 사장님이 찾는다 끊자!”

 

박춘만이 서둘러 휴대폰을 끊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시원하게 방사를 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실장님,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오늘 우리가 이러는 건 우리가 좋아서 이러는 거예요.”

 

나타샤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이내 마리야와 입술을 맞췄다.

 

박춘만이 보기에도 두 사람은 그야말로 즐기기 위해 이곳까지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난 실장인데, 매사 조심해야 하는데. 이래도 되나 모르겠다.’

 

불쑥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박춘만의 몸은 마음과 달리 희열로 부르르 떨었다.

 


집으로 들어서며 벽시계를 보니 새벽 3시를 지나고 있었다.

 

맥주 반 양주 반을 섞은 폭탄주를 십여 잔 마셨는데도 몸이 말짱했다.

 

격렬하게 섹스를 한 덕에 술이 모두 깬 모양이었다.

 

박춘만은 아랫도리를 만져보았다. 얼얼했다.

 

러시아 미녀들의 벗은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박춘만은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말없이 뒤엉켜 자는 아이들이 측은해보였다.

 

‘너희들 고생도 이제 끝났다.

 

머잖아 우리도 아파트에 가서 살 거다.’

 

박춘만은 마음이 흐뭇했다.

 

아이들 방의 문을 닫고 안방으로 건너왔다.

 

불을 켜놓은 채 아내가 자고 있었다.

 

아내는 슬립만 걸친 채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박춘만은 그런 아내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예전의 아내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에 윤기가 흘렀고

 

그녀는 더 이상 츄리닝을 걸치고 자지 않았다.

 

어쩌다 곁에 누우면 향긋한 비누냄새가 나곤 했다.

 

박춘만은 옷을 벗고 아내 곁에 누웠다.

 

“언제 왔어?”

 

아내가 잠에서 깨 박춘만을 바라보았다. 묘한 일이었다.

 

두 러시아 여자와 질펀하게 놀고 왔는데도 아내의 그 모습을 보자

 

아랫도리가 단단해지는 느꼈다.

 

 박춘만이 오른쪽 팔을 뻗어 아내의 머리밑으로 넣었다.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아내에게 팔베개를 해준게 언제였던가 싶었다.

 

아내도 박춘만의 그 마음을 읽었는지 몸을 돌려 그의 가슴에 안겨왔다.

 

향긋한 냄새가 더욱 진해졌다.

 

“당신 언제 샤워했어?”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호텔방에서 러시아 두 미녀와 함께 샤워를 한 사실을

 

아내가 눈치챌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서둘러 변명을 늘어놨다.

 

“응, 조금 전에. 다들 너무 술을 많이 마신 거 같아서 잠깐 찜질방에 들렸다 왔지.

 

땀 좀 뺐더니 훨씬 나은데.”

 

아내의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대신 아내의 손이 박춘만의 팬티 속으로 들어왔다.

 

‘한번 하고 싶은 건가? 뭔가 확인하려는 건가?’

 

근데 정력은 몸의 상태와는 그다지 큰 연관이 없는 듯했다.

 

남자의 정력은 돈과 더욱 밀접한 모양이었다.

 

마음이 넉넉해지자 정력이 넘쳤다.

 

자신감을 느낀 박춘만은 아예 공세로 나섰다.

 

“어쭈! 이제 아주 팬티는 안 입고 사는 모양이야.”

 

“왜? 싫어? 당신 나이면 이제 정력이 떨어져 갈 나이라는데.

 

여자들은 사실 내 나이가 그 맛을 제대로 알기 시작한다고 그러더라.”

 

아내가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나한테 가장 큰 재산이 정력인데 무슨 소리를 해. 지금까지 내가 정력으로 버텼지. 봐!”

 

박춘만이 팬티를 훌렁 벗어 던졌다.

 

“어머 어머! 징그럽게. 당신 전에는 술 마시면 시들시들했잖아.”

 

“무슨 소리. 다 옛날 이야기지. 하고 싶으면 빨리 올라와.”

 

박춘만은 아내를 자신의 배 위로 끌어 당겼다.

 

아내가 슬립만 살짝 걷었다가 내리며 배 위에 올라탔다.

 

농익은 몸답게 아내의 몸은 금방 달아올랐다.

 

그녀의 머리가 찰랑거렸다.

 

“당신 머리 스타일도 달라진 거 같은데?”

 

“피~, 그걸 이제 이야기해. 1년만에 매직 파마 한번 해 본 거야.”

 

“1년? 그렇게 오래 됐어?”

 

“당신 고생해서 번 돈인데 내가 어떻게 함부로 써. 한푼이라도 아껴 쓰야지”

 

박춘만은 죄스러웠다. 아내가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며 살아온 게 안쓰러웠다.

 

“앞으론 파마 자주 해. 해놓으니까 보기에도 좋잖아. 당신 오늘 정말 예뻐!”

 

박춘만은 입이 간지러웠다.

 

그런 말을 언제 해주었던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괜한 미안함 때문이기도 했다.

 

"흥. 당신은 내가 아는 한 가장 멋있는 남자야.”

 

아내가 앉은 채로 몸을 뒤로 돌렸다.

 

물건이 빠질 듯 말 듯 간질거렸다.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이 싱글벙글 웃었다.

 

박춘만이 룸미러로 뒷좌석을 쳐다보았다.


“아빠, 운전 정말 잘한다.”

 

뒷좌석에 앉은 딸아이가 감탄했다.

 

아들놈은 사춘기에 접어들었는지 입은 다물고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빠가 못하는 게 있니?”

 

“우리 아빤 정말 최고야!”

 

그 동안은 최고가 아니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박춘만이 아내를 슬쩍 쳐다봤다.

 

선글라스를 끼고 베이지 빛 쫄티에 개나리 색 주름치마를 입은 모습이 처녀 같았다.

 

박춘만은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그가 모는 소나타는 아내의 말대로 거의 새차나 다름없었다.

 

차는 기분 좋게 굴러갔다.

 

나들이다운 나들이였다.

 

차가 북단양 IC를 빠져나갔다.

 

박춘만의 고향은 단양이었다.

 

지난 해 추석에 다녀온 뒤였으니 반년 만이었다.

 

구정은 일 때문에 바빠 고향엘 내려가지 못했다.

 

박춘만은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내다보았다.

 

멀리 소백산 자락이 보였다.

 

그의 고향집은 소백산 죽령 부근의 마을이었다.

 

그의 소나타는 거침없이 고향집을 향해 달렸다.

 

아내와 아이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박춘만은 막연하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단양을 떠나 서울로 올라간 뒤 집이라고는 일년에 한 두 차례 다녀가는 게 전부였다.

 

그 동안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쁘게 살아왔나 싶었다.

 

여동생뿐이어서 의당 박춘만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리라고 마을 사람들은 생각했다.

 

큰 애의 심장에 구멍이 뚫리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아웅다웅하며 살고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잘된 일이었다.

 

‘두 늙은이가 서울로 올라와 뭘 해 먹고 살수 있단 말인가.’

 

눈에 늘 산을 담고 강을 담고 살아온 세월.

 

손과 발에 흙이 묻어야 제대로 하루를 살았다고 믿는 두 분이었다.

 

‘그래, 차라리 잘된 거야.’

 

박춘만은 마음속으로 변명을 했다.

 

두 분도 답답해서 서울선 살기 싫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다.

 

하지만 그게 자신들까지 짐 되기 싫은 당신들의 마음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박춘만의 시골집이 멀리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 앞 늙은 감나무와 너른 평상이 보였다.

 

아내와 아이들을 깨웠다.

 

“저기 어머니 나와 계시는 거 같은데요.”

 

아내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팔짱을 끼고 서서 이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박춘만은 감나무 아래 차를 멈췄다.

 

어머니가 달려왔고 잠시 후 아버지도 마당에 나타났다.

 

아이들이 할머니 품으로 뛰어 들었고 아내는 양손 가득한 선물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오늘 다 같이 온천 갑시다.”

 

단 한번도 부모님을 모시고 온천을 가 본 적이 없었다.

 

지척에 온천을 두고도 두 분을 모시고 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읍내 나가믄 목욕탕이 천지데 뭘.”

 

박춘만은 막무가내로 두 분을 차에 태웠다.

 

서울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두 분은 마다하면서도 내심 즐거운 모양이었다.

 

풍기온천으로 향했다.

 

박춘만은 가슴이 뭉클했다.

 

이제야 사람 구실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 다들 경기 어렵다는 데 너희 회사는 괜찮은 모양이구나.”

 

아버지는 차안을 둘러보았다.

 

“저흰 좀 나은 편이에요. 이번에 우린 정리 해고된 직원도 없었구요.”

 

박춘만은 슬쩍 아버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박춘만은 차마 아버지의 몸을 쳐다볼 수 없었다.

 

껍질만 남은 듯한 마른 골격과 축 처진 검은 성기가 볼썽사나웠다.

 

손바닥은 갈라져 있었고 굳은 살로 뒤덮여 누렇게 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휘청거리는 다리의 발목은 아이 놈의 손목보다 가늘어 보였다.


온천은 둘째 치고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가 본 것도 스물 살 남짓했을 때의 일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번도 아버지와 옷을 벗고 마주 선 적이 없었다.

 

아들 놈은 어슬렁거리며 이곳 저곳 구경하고 다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열탕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있었다.

 

박춘만은 아버지를 피해 온탕으로 들어갔다.

 

‘사는 게 별 거 아닌데. 내가 앞으로 30년을 더 살 수 있을까.

 

그러면 날 수로 얼마지? 1만일 정도 되겠군. 1만일…’

 

박춘만은 문득 삶의 회의가 일었다.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번듯한 집 한 채 없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박춘만은 일찌감치 몸을 씻고 탈의실로 나왔다.

 

잠시 후에 아버지가 나오고 아들 놈도 덩달아 나왔다.

 

아들놈도 다 자란 모양이었다.

 

부랄 주변에 체모가 삐죽삐죽 솟아 귀여웠다.

 

“온천이라 그런지 물이 좋긴 좋다.”

 

“할아버지, 갈비뼈다.”

 

어떤 녀석이 지나가다 아버지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야, 꼭 인백스테이크에서 먹었던 돼지갈비 같다.”

 

다른 한 놈은 한술 더 떴다. 박춘만은 두 녀석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아이들이 금방 울먹거렸다.

 

아이들은 이내 온천으로 뛰어 들어갔다.

 

“야야, 왜 그러냐. 애들이야 본 대로 말한 건데.”

 

아버지가 박춘만의 손을 잡았다.

 

박춘만은 아들과 아버지의 눈길을 피해 거울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울 속에 40대 초반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머리숱이 빠지고 적당히 배가 튀어나온 남자가 퀭한 눈으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자신의 몸에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박춘만은 온천에서 나온 뒤 기분이 영 개운치 않았다.

 

하지만 이왕 나온 길이니 계획대로 일을 치르고 싶었다.

 

그는 식구들을 데리고 장어구이 집을 찾았다.

 

“우와, 너무 비싸다. 우리 그냥 집에 가서 된장에 밥 먹자.”

 

어머니가 메뉴판을 보고 놀랬다.

 

“이 아들이 이 정도도 못 사드릴까봐 걱정이세요.”

 

“어머니 그러세요.

 

이이가 보너스도 두둑이 받았고 또 어머니한테 늘 죄송스러워하고 그랬거든요.”

 

“너희가 뭐가 죄송스러워. 우린 생각할 거 없어.

 

서울 갔으면 새끼들하고 잘 살믄 되는 거지.”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받아갔다.

 

박춘만은 우울한 기분을 감추느라 동네 친구들 이야기를 억지로 물었다.

 

“동만인가는 진작에 서울 생활 때려 치고 내려왔지.

 

당기던 회사가 부도 났다던가 그랬을 거여. 인수 걔는 의사 아니냐.

 

그래도 그 놈 마누라가 얼마나 못 됐는지 내 지금까지 그 집 며느리 한번도 본 적이 없어야.

 

돈만 많았지. 그기 어디 사람이냐. 지 마누라 하나 휘어잡지 못하고.

 

그 놈 가르치려고 논하고 밭하고 몽땅 팔아 치웠는데 이젠 마누라 때문에 시골도 안 내려온다.”

 

박춘만은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어머니를 쳐다볼 수 없었다.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박춘만은 아버지와 함께 소주를 세 병 넘게 마셨는데도 쉬이 잠이 들지 않았다.

 

아내는 온천에서 집까지 박춘만 대신 차를 몰고 오느라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진작에 곯아 떨어졌다.


박춘만은 새벽녘에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이른 새벽부터 마당에서 인기척이 난 때문이었다.

 

잠도 이미 달아났고 갈증도 일어 박춘만은 조용히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춘만은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남아 있는 마당을 어머니가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이 새벽부터 뭐 해?”

 

“차 밀릴 테니 빨리 가야 할 거 아니냐.

 

그래서 니들 지난 구정 때 줄려고 했던 놈들까지 미리 미리 챙겨놔야 잊어버리질 않지.”

 

평상 위엔 짐이 벌써 가득 쌓여 있었다.

 

박춘만은 물끄러미 평상 위에 쌓여진 짐을 쳐다보았다.

 

“엄마, 자주 올게.”

 

박춘만은 겨우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바쁜데 그럴 거 없다. 너그 아부지가 아프니까 전화나 자주 좀 하고.”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밭에서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버지는 소쿠리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는데

 

소쿠리 안엔 고추며 오이, 심지어 상추까지 가득 담겨 있었다.

 

“이런 걸 뭐하러 따와요. 서울 가면 천진데.”

 

“그래도 올해 하우스가 잘 됐다.

 

그리고 이게 서울 가믄 다 돈 아니냐.

 

내 손자 놈 아팠을 때 한 푼도 못 도와준 걸 생각하믄 가슴이 아프고…”

 

“아, 이 영감탱이가 아침부터 뭔 소리요.”

 

사람은 늙으면 남자보다 여자가 더 드세지는 모양이었다.

 

박춘만은 마음이 아릿하면서도 기어이 웃고 말았다.

 

계획은 계획이었다.

 

모처럼의 나들이답게 부석사도 들리고 단양팔경도 구경하고 디카로 사진도 박아댔다.

 

시골 부모는 차가 밀린다며 일찍 떠나보냈는데 그 자식들은 유람 가기 위해

 

시골집을 일찍 나선 것이었다.

 

단양팔경을 두루 돌고 서울로 올라갈 때 시골집에 전화를 걸어 도착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우리 이제 자주 찾아 뵈요.”

 

“당신이 어쩐 일이야?”

 

“내가 뭐 어쩐 일은요.

 

대중교통 이용해서 다니려니까 너무 힘들고 그래서 그랬지.”

 

“그래, 자주 다니지.”

 

“그런데 당신 말야.”

 

아내가 뒷좌석에서 졸고 있는 아이들 눈치를 봤다.

 

박춘만은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그저께 어디 갔었어요?”

 

“그저께? 회식이 있었잖아.”

 

“잘 때 보니까 팬티를 거꾸로 입고 있던데?”

 

아내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박춘만이 아내의 눈길을 피하며 침착하게 전방을 주시했다.

 

“당신 하룻밤 바람 피는 거 나 뭐라고 할만큼 속 좁은 여자 아니라는 거 알죠.

 

그 이상은 안 돼요. 알았죠?”

 

박춘만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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