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재회
11월 7일 새벽 5시 30달. 청와대 정문을 타져 나온 대형 승용차 한
대가 어둠에 덮여 있는 새벽길을 달려 청진동의 좁은 길로 들어섰다.
박현식이 길가에 차를 세우고 인적이 없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는 골목 끝의 해장국집에 들어선 것은 6시 10분이었다. 식당 안에는
서너 팀의 손님들이 앉아 있었는데 한 사래만이 혼자였다. 그에게로
다가간 박현식이 앞자리에 앉았다.
"이동천이 배신하는 바람에 틀어져 버린 거야.부산은 이제 경찰
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어. 계엄은 없어."
그러자 기무 시령관 조영찬이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녹록한 놈이 아니었습니다, 그놈은. 피에로로 생각했던 저부터
소흘했습니다. "
주문을 하지 않더라도 이곳은 무조건 해장국을 날라다 준다. 종업
원이 식탁 위에 국밥을 내려놓고 가는 동안에 식욕을 잃은 표정의 두
재회 237
사래는 입을 닫았다.
"경찰 병력이 9시 정각에 부산 전역으로 출동했습니다. 그뻔 최기
대가 막 움직이던 패였단 말입니다. "
수저로 국밥을 깔짝거리며 조영찬이 말했다.
"이동천의 세력은 그때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최기대는 신나게
비어 있는 업체들을 부수고 불질렀지만 곧 경찰과 부딪치게 되었습
니다. "
"이건 경찰과 최기대의 싸움이 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저는 이번
처럼 경찰과 행정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가동되는 것을 처음 보았습
니다. "
박현식과 마찬가지로 그도 부산에 부하들을 파견하여 상황을 체크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저를 내려놓은 박현식이 그를 바라보았다.
"저녁 때는 국방 장관과 내 정보가 대통령을 긴장시켜서 소동이
한 시간 만이라도 계속되었다면 계엄을 선포할 분위기였어. 국방 장
관은 특전사 3개 여단을 고려하고 있었고."
"그런데 10시 이후로 상황이 가라앉아 버린 거야. 총격도, 방화도
일어나지 않았어. 상태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경찰의 대규모 병력이
진입해 오고 있었으니까."
"분합니다. "
"분할 것 없어. 내일 밤에만 철저히 준비하면 돼."
"그건 틀림없습니다. 제가 각 부대마다 일일이 챙기고 있으니까
요.전화는 물론 대대장급 지휘관의 동태까지 파악하고 있습니다. "
239 밤의 대통령 제좌부 -르
"각 부대장한테 연락을 해. 계엄은 안된다는 것과 내일 밤 자굄에
는 계획대로 실행한다고."
"알겠습니다. "
거의 손도 대지 않은 해장국을 놓아 두고 조영찬이 먼저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손님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청와
대 상황실에서 밤을 로박 새우고 나온 참이었는데 오늘 밤도 마찬가
지가 될 모양이었다.
밤을 꼬박 새운 것은 이동천도 마찬가지였다. 포항 바닷가의 2충
짜리 빌라를 임시 숙소로 잡은 그는 이제 상황 점검을 막 끝낸 참이
었다.
외형으로 본다면 어젯밤의 전쟁은 이동천의 참담한 패배였다. 그
가 관리를 맡은 업체들 대부분은 철저히 파괴되어서 영업이 불가능
한 상태가 되었는 데다 지난번애 구속을 면한 부하들에 대서도 수
색 작업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조직은 와해 일보 직전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2층을 오르내리는 부하들의 얼굴은 밝았고 아래층에서
는 웃음 소리까지 들려 왔다. 그들이 그령게 느끼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2층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울리더니 배장근의 상반신이 보였다.
계단을 오른 그가 이동천의 앞자리에 앉았다.
"형님, 이제 좀 쉬셔야지요."
그도 한잠도 못 잔 터라 두 눈이 챠혈되어 있었다.
"방송을 들으니 부산 시내는 지금도 소탕 작전이 계속되고 있더군
요. 체포된 자가 150명 가깝게 된다=B 했습니다. "
재회 239
이동천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형님,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안기부와 사이가 좋지 않게
되3n는데요. 그렇지 않숩니까?"
"좋고 나쁠 것도 없다. "
이동천이 짧게 말했다.
"이용당하지 않았을 빨이니까."
"그자들이 원했던 것이 김양호 세력의 일제 소탕이 아니라면 무엇
입니까?"
"폭동이다. "
"이것은 군과 관계가 있어. 기무사 장교는 우리가 요구하지도 않
은 화염탄을 가지고 왔어. 나는 그것으로 마음을 바긴다. "
"그렇다면 군과 안기부가 무엇 때문에 부산을 폭동 상태로 만들려
고 했을까요?"
"부산에 있는 모든 조직을 일제 소탕하려는 구실을 만들려고 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복잡하군요."
"내가 경찰청장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처럼 경찰 병력이 출
동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배장근이 팔을 들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침 6시 반이 되어 가
고 있었다.
240 밤의 대통령 제4부 -린
야마구치조의 부산 지부장 고노도 11월 6일 밤을 평온하게 보낸
것이 아니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물랭루즈 클럽 앞의 난장판치 되어
있는 광경과 최기대 부하들의 용맹무쌍한 빈집 공격도 두 눈으로 지
켜보았는데 군사 용어로 말한다면 전시 참관단시농이었다.
그는 일본애서 데려온 부하와 한국인 정보원으로 군성된 조직을
갖추고 있었는데 규모는 작지만 강력한 무리였다. 그리고 체계적인
정보 수집 능력은 그들이 내세우는 강점이었다.
아룅 8시 반. 시내는 지난 밤에 일어난 소동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
지 않은 상태였다. 영도의 번화가에서는 아직도 횐 연기가 불타 버린
건물들 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도를 달리던 차량들이 그것들을
보느라고 서행하는 바람애 그 일대의 거리는 말 그대로 주차장이 되
어 버렸다. 동구의 번화가도 마찬가지였고 중구도 비슷했다. 시내는
마치 지난 밤에 전쟁을 려은 분위기가 되어 있는 것이다.
고노가 탄 숭용차는 서구청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회전해 나가면
서 속력을 줄였다. 시내의 중심가를 거의 돌아온 것이었는데 평시보
다도 한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사무실 빌딩이 운집해 있는 거리를 달리던 그의 숭용차는 곧 10f
층의 깨끗한 빌딩으로 들어섰다. 5개 층을 임대해서 사무실과 창고,
그리고 2층에는 수입 양주의 직판장까지 차려 놓은, 그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차에서 내린 그는 기다리고 있던 부하들과 함께 빌딩 안으로 들어
섰다. 시내의 분위기 때문인지 부하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가
들어선 곳은 3충에 있는 그의 사무실이다.
부하들과 함꼐 들어선 고노를 손님을 맞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재쾌 241
사래는 최기대였다. 그의 옆에는 머리칼이 그을린 부하 한 명이 멀뚱
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래, 시내는 어떻습니까?"
자리에 앉자 최기대가 물었다. 오늘 새벽 부하 10여 명과 함께 그
는 고노를 찾아왔는데 부산 탈출을 두 번이나 시도했다가 반수 가까
운 부하만 붙잡히고 난 후였다. 부산에서 뻗어 나간 길이라는 길은
그쪽의 지방 경찰에 의해 철저하게 봉쇄되고 있었는데 시골 경찰들
은 남자라면 부산에서 출퇴근하는 시골 국민학교 교장 선생까지 붙
잡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고노가 헌기침을 했다. 김양호의 조직과 야마구치조가 동맹 관계
에 있었고 따라서 김양호 조직의 핵심 갼부인 최기대는 서열로 따지
자면 고노의 위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아무래도 육로나 공로로 부산을 빠져 나가기는 어렵겠소, 최 사
장님 . "
"그렇다면 배로 갈까?"
최기대가 의자에 둥을 기대면서 여유 있게 웃었다.
"내가 조금 전에 서울로 연락을 했는데 곧 상황이 풀릴 것이라고
합디다. 늦러도 내일까지는 수색과 검문도 중지될 거라는 얘기였
소. "
"급하지 않으시다면 이곳애 머무셔도 됩니다. 5충애는 호텔 못지
않은 숙소도 있으니까요."
고노의 말소리도 부드러워졌다.
"of런 기회나 있어야 제가 최 At장님을 모실 영광을 갖게 되지 않
겠습니까?"
242 밤의 택통령 제식부 -르
전화기를 내려놓은 사이토는 소파로 돌아와 이제 식어 버린 커피
잔을 들었다. 그러자 양유경이 읽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최기대가 고노의 사무실에 있어요?"
"아아, 들었나?"
사이토가 얼굴애 웃음을 띠었다.
"두 번이나 부산을 라져 나오려다가 결국은 고노한태 왔다는군.
예상외로 경찰의 봉쇄가 철저해."
"이동천의 업체들은 이제 쟤기불능이라니 전쟁은 이겼군요. 신문
에서도 그래요."
양유경이 들고 있던 신문을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불타 버린 빌
딩의 사진이 커다랗게 인쇄되어 있는 신문이었다.
"이건 잘못된 거야."
사이토가 턱으로 신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긴 것은 이동천이야."
"놈은 한놈의 부햐도 하지 쟈았논 최기대는 찌금짜지 t50iB이
넘는 부하가 체포되었어. 꽤기대도 라져 나오지 못한 상태이고. 그리
고."
잠자코 바라보는 양유경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150명 중에 천기석의 부하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문재야. 지
금 김양호나 최기대는 부하들의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실정인데
그 사실을 알면 놀랄걸?"
"그렇다면 천기석은?"
"재빠르게 부하들을 끌고 부산을 라져 나간모양이야."
재회 243
"어쩠든 잡힌 부하들도 자신어 조성표의 조직원이라고 우길데니
까. 그런 교육은 철저하니까."
"문제는 정부가 이번 싸움을 어떻개 처리하느냐에 달렸는데."
사이토가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이까짓 불타 버란 업체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시 세울 수 있
어. 정부위 결장에 따라 이동천과 김양호의 생사가 결정이 돼."
"김양호가 아니라 조성표예요."
"어꼈든 간에."
사이토의 얼굴에 웃음이 떠을랐다.
"김양호는 이먼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건 간에 부산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
"지금까지도 그래요."
"그런데 지금의 상황도 묘하게 돌아가지만 배경에도 이상 기류가
흐른단 말이야."
그러자 양유경이 이맛살을 모으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요?"
"글, 당띤과 내가 우려헨던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용덕 ‥‥‥‥
"가토 씨한테서 쳔락이 왔어. 이용덕이 흔들린댜는 거야."
가토 노부야스는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과 줄이 닿았고 그들은 또
한국 정재와 선을 대고 있는 것이다.
양유경이 초점이 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용덕이 흔들리
는 경우에 다음 순서가 누구일지는 뻔한 이치였다. 그렇게 되면 부산
의 전쟁 결과도 순삭간에 달라지게 된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은
244 밤의 대통령 제4턱 -I[1
것이다.
오전 10시 45분.기무사의 하영철 중령은 시내를 빠져 나오는데
여섯 반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특히 시 경켸선에 진을 치고 있던 양
산 경찰서의 경찰은 그야말로 왁 막한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부산에
서 나오는 남자들은 모두 폭력배로 보는 모양이었다.
그들에게서 풀려 나와 고속루로애 둘어선 하영철은 달리는 차 안
에서 전화기를 들었다. -
"저, 하 중령입니다. "
조영찬과 직통 전화를 하는 것이다. 그는 절도 있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사령관님, 이동천의 세력은 어젯밤애 부쌈을 빠져 나간 것 팥습
니다. 이동천의 아지트를 모두 수색혔지만 ㅂ1어 있었습니다. "
"=1래 ?"
시큰둥한 조영찬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전화기를 바러 쥐었다.
"하지만 사령관님, 박철규를 찾다가 그가 잘 가는 음식점에서 울
산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곳으로 가는 중입니
다. "
"그래, 알았어 수고해."
그러면서 전화를 끊을 겄 같던 조영찬이 생각난 듯 말했다.
"찾으면 다시 보고하고 못 찾더라도 오늘 저녁 1시까지 귀대하라.
그쪽 상황은 그것으로 끝낸다. "
"애 , 시령관님 ."
하영철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박철규의 행적을 찾아내리라고 마음
재회 245
먹었다. 자신의 잘못은 아니더라도 이렇게 상황끌 끝낼 수는 없는 것
이다.
그가 을산의 바닷가에 있는 허름한 어구점 안에 들어선 것은 그로
부터 한 시간후인 12시경이었다. 낱은 어구들이 쌓인 내부는 넓었
는데 주인으로 보이는 사태가 안쪽얘서 손님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
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하쳔철은 그들애게로 다가갔다. 밖애서는 부하 세
명이 지켜 서 있었으므로 서슴없는 몸짓이었다.
"여기 말씀 좀 물읍시다. "
40대의 주인이 머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시오?"
위아래를 촐어보는 것이 손님이 아닌 것을 금방 알아챈 모양이다.
"여기 오면 연락이 된다고 해서."
"무슨 연락?"
주인이 앞때 서 있는손님을 바라보았다.
"또 김가 놈이 물건을 이리 보냈는카?"
"모르TR는대 ."
"부산에서 이곳에 가면 연락처를 알려 준다고 했단 말입니다. "
그렬게 말하면서도 하영철은 아무래도 글렀다는 생각을 했다. 박
철규는 부산을 라져 나가면서 사정상 연락이 안된 부하들에게는 식
당애 메모를 남겨 놓9ft. 그는 박철규가 우연히 자신이 자주 가는
식당 이름을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맛살을 찌푸린 하영철을 바라보던 주인이 몸을 돌렸다. 안쪽의
사무실로 들어선 주인이 곧 전화기를 들고 나왔다. 전화밸이 을린 모
246 밤의 대통령 제길즌 -템
양이었다.
"댁이 하영철 씨요?"
주인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눈을 치켜뜬 하영철이 머리를
31덕이자 =1는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받으슈, 제기. 여기가 무슨 다방인 줄 아는 모양인데."
박철규는 어구점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바닷가의 엎어 놓은 보
트 위에 앉아 있었다. 쌀활한 날씨였으나 하늘은 맑았고 잔잔한 바람
결에 파도는 부드럽게 밀려왔다가 모래 속으로 스러져 갔다.
"여어, 어서 오게. 하 중령."
다가오는 하영철을 향해 박철규는 횐 이를 드러내며 운었다.
"내가 자네를 실망시켰나?"
"박 선배, 그러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영철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는 바다 쪽
을 향해 박철규와 나란히 앉았다. 그가 타고 온 승용차는 부하들과
함께 어구점 앞에 세워진 채였으므로 이곳에는 혼자 온 것이다.
"내가 이렬게 하 중령을 만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있나?"
박철규가 묻자 하영철이 피식 웃었다.
"물론 모릅니다. 조금 전까지는 내가 찾아낸 것으로 알았기 때문
에 . 지금 알고 보니까 날 유인하셨는데 , "
"자넨 생각했던 것보다 대담한 사람이야."
"겁낼 이유가 별로 없지요. 참고 삼아 말씀드리는데 난 이흔해서
흘몸입니다. "
그러자 박철규가 다시 웃었다.
재회 247
"하긴 그러고 보면 내가 소심해졌어, 주변 환경에 적응해 가다 보
니까 말이야."
그는 손을 들어 옆쪽의 낮은 동산을 가리켰다. 100미터쯤 떨어진
소나무가 울창한 동산이다.
"저기에 저격병 두 명이 이쪽에다 망원 렌즈를 맞추어 놓고 내 입
모양을 보고 있을 거야."
그는 다시 뒤쪽을 가리켰다. 담장이 기울어져 가는 낡은 집이 있
는 곳이다.
"저기에도 대여섯 명이 있지. 만일을 위해서."
"박 선배가 중요 인물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과잉 경계 아닙
니까?"
"자네, 우리가 폭동을 일으키게 만들고 무엇을 하려고 했지?"
그러자 하영철이 턱을 들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초점을 맞추려
는 듯 두 눈이 가늘어졌다. 박철규가 말을 이었다.
"총기류에다 화염탄, 그것으로 시내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으면 기
무사는 무엇을 얻게 되지?"
"안기부와 기무사가 김양호와 이용덕의 제거에 우리를 도와 준 것
짜지는 이해할 수 있었어. 그리고 부산 지역의 평정까지도. 밤의 세
계를 외세에서 독립시킨다는 명분이 우리에겐 있었으니까. 우리는
그것까지 순수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지."
"그런데 자네들이 원한 것은 폭동이었어. 그 폭동을 기화로 군을
일으키려 한 것 아닌가?"
248 밤의 대통령 제4부 -및
"박 선배, 내가 어떻게 해야 저쪽에서 총을 쏩니까?"
"나도 군 출신이야. 나에게도 아직 의기가 있어. 지금 총만 쥐었다
고 다 해먹으려고 하지 말어."
"폭동이건 쿠데타건 난 모르는 일이오."
"그 계급으로는 높은 놈들의 의도를 모르는 경우가 많지. 시키는
대로만 해도 참모 총장도 되고 장관이 된 놈도 많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싸우지 않았던 겁니까?"
"그것을 그대로 보고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사면초가가 되지. 그렬
게 생각지 않나?"
"날 죽일 겁니까?"
"자레는 아니더라도 자레 상급자와 안기부장은 우리를 이용한 것
같01 "
"날 죽여야 될 것 같은데요, 박 선배."
"자네에게 이유를 확인받는 것을 포기하겠어. 그렇다면 자네만 우
리가 전쟁을 포기한 이유를 알고 가는 것이 되었군 "
박철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친 듯 그의 얼굴은 쪄푸려자 있었
다.
"자, 돌아가게. 하 중령. 언잰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우리는."
12시 2D달. 김포 주둔 제』공수 여단의 군수 참모 안형규 중령은
웃음 띤 얼굴로 앞에 서 있는 김수남 대위를 바라보갔다.
"하긴 부산의 깡패들이 시끄럽게 했다고 해서 내 천금 같은 휴가
를 반납하면 안되겠지. 그렇지 않나, 김 대위?"
"참모장님이 마음 변하시기 전에 얼른 출발하시는 것이 나을 것
재회 249
같습니다, 참모님."
김 대위도 웃는 얼굴이었다.
"이러다가 지난번처럼 비상으로 잡허시면 야단 아닙니까?"
"이번에는 안돼."
안형규의 말투는 단호했다.
"비상이고 지랄이고 난 간다. "
여름 휴가를 반납하고 하계 훈련에 지원나간 대신으로 4일 간의
휴가원을 내었으나 두 달이나 미루어졌다. 그러다가 지난 달에 겨우
참모장의 결재를 받고 났을 때 비상 훈련이 발동되었던 것이다.
김 대위가 사무실을 나가자 안형규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휴가
는 오늘부터 계산되었으므로 지금도 휴가 기간을 사무실에서 까먹고
있는 셈이 된다. 안형규는 모자를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난 여름부터 벼르고 있었던 아내와 둘만의 제주도 여행은 2박3
일의 일정이 될 것이다. 이제까지 제주도 구경을 못했다고 틈만 나면
한탄하던 아내는 조금 전에 전화를 받고는 이미 준비를 끝내 놓았을
터였다. 애들은 장모가 돌보아 줄 것이고 비행기표는 여행사에 다니
는 처남이 생색을 내며 건네줄 것이다. 아내는 두 달 전부터 여행 경
비를 박아 두고 있었으므로 자신은 몸만 가면 되었다. 그는 오랜만에
들뜬 기분이 되어 사무실을 나왔다.
12시 30란. 연천 북방의 제24사단 수색 중대 제3소대장 고정만 중
위가 벙커 안에서 막 점심을 마친 시간이다.
ROTC 출신으로 제대가 3개월 남은 터라 그는 틈만 나면 내년 2
월에 있을 입사 시험 공부를 한다. 오늘도 그는 영어 교재를 들고 벙
250 밤의 대통령 제길준 -템
커에서 나와 옆쪽의 능선으로 다가갔다. 그가 언제나 앉는 곳은 아래
쪽의 계곡과 건너편의 북한군 벙커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능선의 양
지쪽이다.
마른 나뭇잎이 쌓여 푹신한 느낌을 주는 땅바닥떼 앉은 고 중위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건너편 산등성이에 아직도 지지 않은 몇 그루의
단풍나무가 상처 자국차럼 시야에 들어왔다. 한 달 전만 해도 저쪽의
산은 붉은 단풍에 덮여 오히려 몇 그루의 침엽수가 붉은 피부의 딱지
처럼 보였었다.
1는 점심 후의 흡연을 즐기듯이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문득
아버지가 술이 늘었다는 어머니의 편지 내용이 떠올랐으므로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현대 중공업의 용접공으로 일하시던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다리
불구가 된 것은 그가 중학 2락년 때였다. 회사에서는 보상금과 자녀
들 학비를 지원하고 고정만이 원하면 그룰와 어느 회사에도 무시험
입사 시킨다는 약속도 해주었었다.
그러나 고정만은 당당히 입사 시험을 치르고 들마갈 작정이었다.
대학의 전공이 기계 공학이었으므로 지망도 아버지가 일했던 현대
중공업이다.
그는 땅바닥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영어 교재를 펼쳤다. 나뭇잎
한 개가 바람에 날아와 그의 다리 위에 떨어졌다. 아래쪽 계곡에서
이름 모를 산새가 울다가 그쳤다. 그리고 고정만은 날카로운 쇳소리
가 하늘에서 울리는 것을 들었다. 쇳소리는 길었다. 그리고 그 소리
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자신의 온몸이 횐 섬광에 싸여 하늘
위로 떠오르는 것을 느쪘다.
재회 211
김재선이 안보 수석 오병탁으로부터 연천 북방의 전방 초소들이
포격을 당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12시 게달이었으니 보고는
신속한 편이었다. 일반 절차상으로는 수십 군데를 거쳐야 되는 일이
었지만 북한의 도발 행위에 대해서는 중간의 절차를 과감히 생략하
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야단났어. 이건 노골적인 도발이야. 우리 초소에 포격을 하고 있
단 말이야."
대통령이 점심 식사중이어서 우선 연락을 넣고 난 오병탁은 앉지
도 않고 서성대다가 곧 불려 들어갔다.
"이것, 악재가 겹치는 것 아냐?"
대기실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농수산수석 변성길이 물었으나김
재선은 대팜하지 않았다.
이것은 신호탄인 것이다. 어쩌면 스타트 라친의 총소리로 비유해
도 좋을 것이었다. 10분쯤 지났을 때 김재선은 대통령에게 불려 들
어갔다. 집무실에는 비서실장과 안보 수석이 대통령 앞얘서 긴장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이봐, 김 수석."
역시 굳은 표정의 대통령이 김재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북한이 도발을 하고 있다는데 안천 북방의 그 몇 사단이라고?"
"24사단입니다, 각하. 사단장은‥‥‥‥
대통령이 오병탁의 말을 잘랐다.
"전방의 벙커가 날아가고 소대장 이하 다섯 명이 죽었다는데."
그는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머리를 눌렀다.
"오 수석, 저기 전화로 현재 상황은 어떤가 알아봐요."
252 밤의 대통령 제4부 -방
"예, 각하."
벌떡 일어선 오병탁이 옆쪽의 전화기로 다가가자 대통령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분단 50년 가깝게 되면서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각하, 지금 포격은 그쳤다고 합니다. "
오병탁이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참모 총장인가?"
"예, 각하 "
"이리 바러요."
대통령이 참모 총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잠자코 앉아
있었다. 이윽고 대통령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포격은 그쳤지만 우리 국군의 피해는 사망 련에 부상 1녀이야.
1개 소대 병력 거의 전부가 당했다는군. 조준 포격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전군에 비상 경계령을내렸어.한미 연합사령관에
게도 연락을 하라고 했고."
집무실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대통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실장, 국방 장관을 부르도록. 여기에서 상황을 지휘해야 할테
니까. "
대통령이 끝났다는 듯 머리를 』1덕이자 세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
섰다. 그들이 집무실의 문을 막 열고 한 실장이 먼저 나긴을 때다.
"김 수석, 당신은 잠간만 나좀 봐."
대통령의 목소리에 오병탁의 굳은 얼굴을 내보낸 김재선은 문을
닫았다. 그는 대통령의 앞으로 돌아와 섰다.
재회 253
"정상 회담 재의 원고는 준비되었겠지?"
대통령이 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준비되었습니다, 각하."
"포를 쏘다니, 너무 심한 것 아닌가?"
"그쯤 되어야만. 왜냐하면 요즘은 내부 문제가 너무 시」1러워서
요,각하."
"모든 언론사가 이 사실을 즉각 보도하도륵 하겠습니다,각하."
"그래야지."
"아마 오후쯤 되면 저쪽에서 오발이었다는 해명 성명이 발표될 것
입니다, 각하."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회담 제의는 내일 아침에 특별 성명으로 발표하시는 것이 적절하
겠습니다, 각하."
"그렇게 하지."
다시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얼굴에 쓴운음을 지었다.
"남북이 손발을 맞추는 건 50년 만에 처음이군. 그렇지 않나?"
전화기를 내려놓은 특전 사령관 엄상호 중장은 테이블애 둘러앉아
있는 네 명의 장군들을 둘러보았다.
"이건 뭐라고 할까,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하면 좀 낯이 뜨려지만
이제 시간만 기다리면 되』R어."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으나 앞쪽의 장군들은 굳은
표정이었다.
254 밤의 대통령 제』닥 -방
왼쪽에 앉아 있던 참모장 강백일 준장이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 야포로 아군 초소를 조준 포격했다는 것은 휴전 이래
최대의 도발입니다. 흑시 남침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측 반격을 유도해서 전면전으로 끌어낼 작전이었단 말인
가?"
엄상호가 참모장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북한군의 수뇌부가 그런 작전을 계획했다면 해볼 만한 전쟁이 되
겠는데."
"놈들은 우리가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알아. 우리가 강력하게 대응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한 짓이야."
여단장 한 명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제5여단장 송금택 준장이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분위기를 제압하기 위한 도발입니까?"
"그렇게 보아진다. 아마 지난 달 중국의 강택민 주석이 곧 한국을
방문하TR다는 발표를 한 것과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크게 좋아진
갓 등에 대한 반발이자 시위일 것이다. "
엄상호가 부드러운 얼굴로 장군들을 둘러보았다.
"물른 이건 안기부의 의견이기도 해. 조금 전에 박 부장도 그렇게
해석을 했어."
"시령관님 말씀대로 천재일우의 기회가되었습니다. 병력의 무장
과 출동 준비가 아무런 제한 없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니까요."
여단장 하나가 말머리를 돌리자 모두들 긍정하는 얼굴이 되었다.
오후 3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보안을 지키려고 그들은 거사를 결
재회 255
정한 이후로 한번도 사령관실에 모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북한의 도
발과 비상 대기 명령이 그들의 모임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 셈이 된
것이다. 이제 부대원들은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비상 출동 준비를 하
는 중이었고껴란장들은 마지막 작전 회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 지역의 소동을 알고 북한이 한국 정부를 안팔으로 무력화시
키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
강백일이 말했다. 이제 각 부대별 작전 계획과 예상되는 돌발 사
건에 대한 대책까지도 충분히 검토된 후이라 그의 표정에도 여유가
있다.
"그렇지요. 그럴수록 민심이 현 정권에서 떨어져 나갈테니까요.
놈들은 지금 우리를 돕고 있는 겁니다. "
제3여단장이 말했다. 부산의 폭동이 계엄령으로 이어지지 않았으
므로 부대를 출동 대기시키는 명분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래서 그들은 휘하 부대 내에서 성분이 불투명한 장교들을 출장이나
휴가 둥으로 내보내고는 출동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
제5여단장 송금택이 머리를 들었다.
"출동 준비는 자연스럽게 되3n지만 내부 단속을 잘해야 할 겁니
다. 휴가로 내보낸 자들이 부대로 귀대해 올테니까 말이오."
참모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자들은 기무사 요원들의 감시를 받게 될 거요. 그리고 출동 전
에 조처하도록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
송금택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젠 걸리는 것이 없습니다. "
256 밤의 대통령 제딘부 -방
"정말 나같이 재수엄는 놈은 세상에 얼을 것이다. "
제5공수 여단 군수 참모 안형규 중령이 여단 본부를 향해 걸으면
서 말했다. 그의 옆에는 영내에서 만난 인사 참모실 소속 최 대위가
따르고 있다.
"씨발놈의 공산당 놈들. 아예 쳐들어가서 싹 없애 버리든가 해야
fl ."
그러자 최 대위가 히죽 웃었다.
"공항에서 돌아오셨다면서요?"
최 대위는 그의 고등학교 후배였으므로 동생같이 여겨 오는 사이
다. 찌푸린 얼굴의 안형규가 대꾸를 않자 그가 말을 이었다.
"안 참모님만 돌아오신 게 아닙니다. 여단 본부와 휘하 부대의 떵
관급 장교들만 열 명 정도가 됩니다. "
안형규가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많어?"
"밀려 있었으니까요."
"아무리 밀려 있기로서니."
"하긴 기갑 연대의 최 중령님은 난데없는 휴가 명령이 떨어져서
좋다고 나갔다가 열이 뻗쳐서 돌아랐지요."
"최 중령이라니? 최인식이 말이야?"
"ft . "
그들은 막사를 돌아 본부 건물로 다가갔다. 최인식과 그는 함께
육본에서 근무하다가 1년 전에 같이 I공수로 전출되었었다. 육본에
서는 부서가 달라 친하게 지내지 않았으나 5공수에 온 후로 자주 만
나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재화 251
영내는 출동 준비를 하는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갑
차가 요란한 캐터필러 소리를 내며 그들의 옆을 지났고 병사들의 움
직임도 활가에 차 있었다.
오후 4시.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의 오산 근처는 차량 소통이 잘되
어서 대부분의 차량들이 제한 속도 이상으로 달리고 있었다. 검정색
의 대형 승용차도 그 중 하나였는데 됫좌석에 둥을 묻고 있는 것은
이동천이다. 창 밖의 메마른 산야를 바라보던 그가 머리를 돌려 박철
규를 바라보았다.
"북한군이 포격을 해왔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이런 도발은
처음이다. "
"우습게 본 거지요. 해볼테면 해보자는 태도 같습니다. "
박철규가 입맛을 댜셨다.
"우리쪽의 대응은 뻔하지요.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유야무야 해
버릴 겁니다. "
"그런데 시간마다 방송줴서 북측의 도발 사잔을 취급하고 있어.
예전과는 다르다. "
예전 같으면 짤막하게 보도하든지 아니면 사건이 수습된 후에 알
렸을덴데 지금 정부는 사망자의 인적 사항까지 자세히 보도하고 있
는 것이다.
박철규가 쓴웃음을 지으며 이동천을 바라보았다.
"국민들의 관심을 부산애서 휴전선으로 옳기려는 수작 아닐까
요?"
이동천이 머리를 」1덕였다.
258 밤의 대통령 제』력 -lH
"그령다면 정부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 되겠군."
"북한이 우리 정부를 도와 준 셈이 되었습니파."
차는 오산 톨게이트 표시를 지나치면서 속력을 줄였다.
"나는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 드는 기분이 든다. "
이동천이 혼자말처럼 말하자 박철규가 이를 드러내며 운었다.
"점점 큰 곳으로 다가간다고 생각하십시오, 형님."
차는 오산의 톨게이트로 향하는 샛길이 보이자 방향 표시등을 깜
박이며 바깥 차선으로 들어섰다. 박철규가 머리를 돌려 뒤쪽의 창문
을 바라보았다. 오른쪽의 방향 표시등을 깜박이는 승용차들이 뒤에
따라붙고 있었다.
그들이 탄 차가 톨게이트를 지나 우측으로 꺾어지자 바로 길가에
커다란 간판을 내건 음식점이 보였다. 승용차는 곧장 자갈이 깔린 음
식점의 주차장으로 들어가 멈추어 섰다. 음식점은 단충 벽돌집이었
는데 넓은 주차장의 한쪽에는 대형 물궤방아가 연못 위에 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먼저 차에서 내린 박철규와 앞자리에 탄 경호원이 주위를 둘러보
았다. 주차장에는 대여섯 대의 차량이 세워져 있었는데 대부분이 서
울 번호판이었다. 그러자 뒤쪽에서 타이어에 자갈이 깔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대여섯 대의 차략이 들어서더니 사내들이 내렸다. 1를 따
라온 부하들이다.
이동천이 박철규를 바라보았다.
"나 혼자 들어가겠다. "
"그러시지요. 안에도 애들이 있숩니다. "
음식점 안에는 이미 먼저 도착한 부하들을 배치시켜 룬 것이다.
재회 259
이동천이 음식점의 현관으로 다가가자 사내 한 명이 유리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다가오는 이동천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그는 사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어중간한 시간이어서 넓은 홀
에는 서너 팀의 손님뿐이었다. 안쪽과 주방 입구의 테이블줴 앉아 있
던 두 사내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기볍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미
리 와 있는 그의 부하들이다.
사래는 안쪽에 나란히 붙여져 있는끝쪽 방의 문을 두어 번 13
하더니 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지요."
양유경은 방으로 들어서는 이동천을 똑바로 바라보며 일어서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짧은 머리를 귀 뒤쪽으로 넘겨 얼굴의 윤곽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는데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었으나 검은 눈동자
와 붉은 입술이 선명했다. 이동천은 둥근 테이블의 한쪽애 앉았다.
그녀를 마주보는 자리였다.
"내가 쫓기는 신세가 되어서 ."
이동천이 입을 열었다.
"주변에 신경을 쓸 일이 많아. 그래, 무슨 일이야?"
"부산 전쟁은 당신이 이긴 것 같더군요."
양유경이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김양호÷가 머리를 굴렸지만 그도 당신에게 뒤통수를 맞았어요."
"그런가?"
"고대구 씨, 정말 안뤘어요. 그래서 가족에게 돈을 조금 보내 주었
260 밤의 대통령 제4력 -lH
어요."
"당분간 숨어 지내실 예정이라면 제가 도와 드릴 수도 있어요. 자
금도 얼마든지."
"용건을 이야기해."
이동천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나에게 줄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대가로 바라는 것이.무엇인
지를 말해."
그러자 양유경이 다시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시선이 흔들리지
도 눈을 깜박이지도 않는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당신을 보고 있으니까 결코 닫신과는 다시 맺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군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이동천이 머리를 끄덕였다.
"자, 그러면 용건을 이야기해."
"문재은과의 일은 아무것도 아녜요. 그 여자는 아버지가 살아 계
셨을 때도 다른 남자들과 어울린 여자니까."
"사이토와는 서로 이용하는 관계일 뿐이에요. 당신도 잘 아시다시
피 고의 도움이 컸어요."
이동천이 시졔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난 교런 이야기를 들을 여유가 없는데."
재회 261
"최기대를 잡게 해주면 나에 대한 감정이 조금 풀려질까요?"
머리를 든 이동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시선을 옆쪽으
로 비켰다.
"그까짓 놈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
"조건 없이 알려 드릴 수도 있어요. 원래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이재 김양호 없이도 흔자 꾸려 나갈 자신이 선 모양이군."
"사이토가 도와 줄테니까요."
"그렇군. 사이토가 또 있군,"
"날 만나 준 당신의 의도를 말해 봐요. 전에는 거절했던 당신이었
으니 내내 그 점이 궁금했어요, 나도."
"이 새끼들이 날 휴가 보내 놓고 출동 준비를 하고 있더라구."
최인식이 눈을 치켜 뜨고 말했다.
"비상 출동 대기 명령이 떨어지기 전이란 말이다. 탄약이 이미 지
급되어 있었고 차량 점검도 끝나 있었어."
그는 귀대 명령이 떨어졌을 때 부대 근처의 식당에서 마음 놓고
낮슬을 마시던 중이었다. 이번에 발령된 비상은 갑호 비상으로 휴가
자는 즉각 귀대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는 낮술을 마시다가 차고 있
던 호출기가 울리자 10분 만에 귀대했던 것이다.
최인식이 안형규의 어깨를 잡아 작업장의 안쪽으로 데려갔다. 이
곳은 기라 부대의 차량 수리 공장이어서 공장 안에서는 귀가 멍멍할
정도로 엔진의 소음이 울려 오고 있었다. 그들은 차량 부품이 어지럽
게 쌓여 있는 구석에 서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낌새가 이상해. 내가 알아보니 너밸만 아니라 전차 대대의 박충
262 밤의 대통령 재식근 -및
식 소령도, 그리고 기잠 보병 대대의 황영만 소령도 휴가였다. 너, 생
각나는 것 없어?"
최인식의 얼굴은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었지만 눈은크게 치켜 떠
져 있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안형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휴가짜는
모두 해당 부대장으로부터 신임을 못 받고 있는 자들이라고 봐도 되
었다. 박충식 소령은 전출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고 황영만 소령은
곧 예편하여 정부 기관에 취직한다고 들은 것이다.
안형규가 입을 열었다.
"이 새끼들, 내가 나간 후에 강 대위 놈이 군수품 지급을 했어. 기
다렸다는 듯이 말이야.내가 비상출동 지급을 하려고 했더니 이미
모두 지급되어 버렸단 말이다. 강 대위 이놈은 육본에서 명령이 떨어
지자 바로 했다는데, 말도 안된다. 이건 한 시간에 끝나는 일이 아니
야. 다섯 시간은 걸리는 일이거든."
"그렇다면 뭐이? 이것이?"
그리고는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입을 연 것은
최인식이다.
"대대장이 날 따돌리고 있어. 중대장 놈들도 날 피하고, 참모 놈들
은 내가 묻는 말에 대답도 안해. 그리고‥‥‥‥
부대장인 그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나하고 잘 통하는 김 대위라고, 인사 참모가 있는데 난 걔가 휴가
간지 몰랐어. 그놈은 대구에서 전화를 해왔는데 대대장이 올라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더군,"
"이건 무슨 일이 있다. "
안형규가 땀이 밴 이마를 손바닥으로 닦으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
재회 263
에는 초점이 없다.
"야단났다. 대대장뿐만 아니라 여단장도 한통속인데 우리가 어떻
게 한단 말이냐?"
그들은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그
것을 입 밖에 내기가 두려웠고 그것아 대한 대책을 말하기에는 더욱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후 6시. 갑자기 방송이 그치더니 음악 소리가 났다. 웅장한 행진
곡이다. 그리고는 행진곡이 그치면서 아나운서의 말소리가울려 나
왔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립니다. 북한 당국은 평양 방송을 통해 오늘
12시 게분경에 있었던 아군초소에 대한포격이 포병대의 포격 훈련
중 실수에 의해 남한 진지에 명중된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북한의
정무원 총리 강성식은 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며 ‥‥‥‥
라디오의 스위치를 끈 이용덕이 민영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론은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일단은 안심할 것입니다. "
"그렇겠지."
"그리고는 분개할테지요."
"대상이 북한이겠지?"
쓴웃음을 지으며 묻는 이용덕에게 민영수도 같은 웃음을 지어 보
였파.
"대상은 우리 정부일 겁니다. "
264 밤의 대통령 제식근 -및
"무기력하고 언제나 당하기만 하는 정부를 매도할 것입니다. "
"아마 우리도 저쪽에다 포격을 해서 보복을 하자는 것에 국민 투
표를 부친다면 그러지 말라는 표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을 것인데 말
01야. "
"당연하지요. 기득권충은 모험을 원하지 않습니다. "
"그대로 내버려두면 더 매도할 것이고 말이야."
"하지만 그자들 덕분에 부산 사건의 관심이 옮겨졌숱니다. 국내
치안 문재가 국방 문제로 말씀입니다. "
머리를 끄덕인 이용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이 있어서 나가 봐야 되겠어."
당사를 나온 이용덕이 여의도에 있는 중국 식당 만강의 밀실에 들
어선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그가 방으로 들어서자 방에 혼
자 앉아 있던 양유경이 얼굴에 웃음을 띠며 일어섰다.
"안녕하셨어요, 총장님?"
"오, 그래. 왜 오래 못 보았어."
이용덕의 얼굴이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눈매는 풀어지지 않는다.
자리에 앉은 그는 잠시 방안을 둘러보는 시능을 했는데 긴장을 흐트
러뜨리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이윽고 그가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중요한 일이라니, 무슨 일이야? 그리고 김양호 씨에게도 말하면
안된다니,"
그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다.
"전화로 그렬게 함부로 말하면 쓰나?누가 들으면 내가 그 사람과
재회 265
자주 말하는 사친 줄 알 것 아닌가?"
양유경이 웃음 떤 얼굴을 숙였다.
"죄송해요. 하지만 급한 일이라서 ,"
"급하긴 무엇이? 난 당신들 일은 알지도 못하고 상관할 생각도 없
어."
"그 일이 아녜요,총장님."
입맛은 다신 이용덕이 막 말을 꺼내려는데 문이 열리면서 사래 한
명이 들어섰다. 이동천이다. 너무나 놀란 이용덕이 들고 있던 엽차잔
을 재떨이 위에 내려놓았고 그것이 미끄러져서 물이 쏟아졌다. 엉거
주춤 자리에서 일어선 이용덕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 있었다.
"이, 이동천."
그의 시선이 이동천과 양유경 사이를 두 번쯤 왕복하는 사이에 이
동천이 그의 앞에 섰다.
"앉으세요, 이 총장.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런 방법을 쓴 것이니까
이해해 주셔야겠습니다. "
"이봐,나, 나는."
"앉으시라니간. 지금 이곳은 내 부하들이 가득 차 있으니까 소란
을 부리시지 쟈는 것이 이로울 겁니다. "
이윽고 세 사람은 원탁에 둘러앉았다. 그리고는 잠시 침묵이 흘렀
는데 그 중 여유 있어 보이는 것이 양유경이다. 그녀는 원탁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이용덕에게 엽차를 따라 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동천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답답하군.눈앞의 일에만 급급하다 보니 당신은 지금 배후에서
무슨 일이 일어라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모양이오."
죠6 밤의 대통령 제긱부 -템
그러자 이용덕이 어깨를 펴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적응력과
임기응변이 뛰어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나를 배후에서 치려고 했던 자를 한 사람 알고 있기는 하지."
=1는 앞에 앉은 이동천을 향해 턱을 들었다.
"자레 아닌가?"
"당신이 김양호의 손을 들어 주었을 매부터 당신과 나는 공공연한
적이었소. 배후의 적이 아니오."
이동천이 치켜 뜬 눈으로 이용덕을 바라보았다.
"정신차려서 잘 들으시오. 내가 전단을 제작할 때 도와 준 사람이
있소. 안기부장과 기무 사령관이야."
퍼뜩 머리를 든 이용덕이 시선을 굳혔고 양유경도 움직임을 멈추
었다.
이동천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협조 관계였습니다. 목표는 색어빠진 정치인인 당신과 교
활한 김양호의 제거였으니까."
"그런데 이번의 부산 사건을 그들은 폭동이나 내란으로 확태하려
고 했던 거요. 안기부와 기무사가 우리를 도왔는데 총기와 수류탄까
지 공급해 주었소."
"아시다시피 난 충돌을 피하고 부산을 빠져 나왔지요. 덕분에 업
체들은 폐허가 되고 이제는 그들과도 적이 된 것 같습니다. "
"그만하면 분위기를 알 수 있을 거요. 그들은 당신의 제거 이상의'
재회 267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단 말입니다. "
이용덕이 헛기침을 했다.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나? 나를 돕는 이유가 뭔지 알고 싶
은데?"
"내가 당신을 도와?"
쓴웃음을 지은 이동천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싣은 이미 나에겐 지워진 사람이야."
그러자 양유경의 시선이 퍼뜩 이동천에게서 비켜났다.
이동천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오.난목적이야 어떻
든 이용당하는 것은 질색이야.그 사람들은 나를 아마 폭동의 주모자
로 몰고 내버려두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당하기는 싫었지. 그것을 이
유로 생각하면 되T?l소."
유덕환 대령은 삼각지 로터리 부근의 은하 식당에 들어서서는 주
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비상이 풀리지 않은 상황이어서 평시에는
군인들로 북적거리던 식당안에는서너 명의 민간인밖에 보이지 않
았다. 이맛살을 찌푸린 그가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을 때 카운터 위에
놓인 전화벨이 울렸다. 낯익은 주인이 전화를 받더니 곧 그에게로 전
화를 내밀었다.
"유 대령님, 전화요."
그는 육본 작전 참모부 소속의 대령으로 전주에 살고 있는 동생이
은하 식당에서 기다린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나온 것이다. 육본에
서 식당까지는 도보로 5분 거리였지만 비상 대기 상황이라 작전 차
268 밤의 대통령 제살근 -템
량을 타고 왔다. 하지만 북한이 사과를 표명했으니 내일쯤이면 비상
이 풀릴 예정이었다.
"여보시오."
짜증이 난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화장품 대리점을 하는 동생 놈
은 언제나 손을 벌린다.
"유 대령님, 저, 안형규올시다. "
"아니, 안 중령 , "
유덕환이 눈을 크게 떴다. 안형규와는 육본에서 2년 동안 같이 근
무하면서 다소 덜렁거리는 성격의 그를 보살펴 주었었다.
"너, 이거 웬일이야?"
"듣기만 하십시오. 형님, 큰일났습니다. "
안형규가 소리치듯 말했으므로 유덕환은 다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 , 또 사고쳤어?"
"그게 아니오, 형님. 쿠데타요."
"뭐ㄹf?"
전화기를 귀에 댄 채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쪽에 앉은주인
은 신문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장난해?"
"형님, 나, 잠간 부대를 빠져 나와 공중 전화로 말하는 거요. 시간
없으니까 잘 들어요."
안형규는 서둘러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제5여단장 송금택 준장은 전형적인 무인이다. 육사를 졸업하고 30
년 가까운 군 생활을 해오면서 그는 군인으로서의 긍지를 잊은 적이
재회 269
한번도 없다. 지금도 그렇다. 여단 상황실에 자리잡고 앉은 그는 오
늘 밤의 거사에 대한 망설임이나 두려움이 한점도 없었고 오직 그의
여단의 작전 목표를 완수하는 데에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현 정권으
로는 대한민국이 공산화된다. 따라서 목숨을 걸고 그것을 저지하여
나라를 지킨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상황실의 입구로 기무사의 파견 장교 한승옥 소령이 들어서고 있
었다. 곧장 이쪽으로 다가온 그는 허리를 숙여 입을 송금택의 귀에
가깝게 대었다.
"여단징림, 안형규 중령이 부대를 이탈했습니다. "
"저회 수사관이 쫓았지만 놓쳤습니다. "
"무단 이탈인가?"
"예, 감시를 하고 있었는데 손쓸 사이도 없이."
상황실에 모여 앉은 장교들은 작전의 점검에 여념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분위기를.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저녁 6시 20분이었다.
거사는 여섯 시간도 남지 않은 것이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부대 이탈자는 체포하도록 되어 있지 않
나?"
"그렇습니다만 참모여서 ."
"철저히 경계하도록."
"예, 여단징림 ."
"그놈을 찾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다. "
한승옥이 서둘러 상황실을 나가자 송금택은 팔을 뻗쳐 전화기를
쥐었다. 그리고는 앞쪽에 앉은 부하들을 의식한 듯 옆으로 몸을 돌리
270 밤의 대통령 제갈」 -및
고는 다이얼을 눌렀다. 특전 사령관 엄상호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
므로 금방 전화를 받았다.
"시련관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
송금택의 낮은 목소리에 엄상호도 긴장한 듯 목소리가 낮다.
"무근 일이이?"
엄상호는 안형규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성분이 의심스러워 휴가를 보냈던 자가 귀대했다가 부대를 이탈한
것이다. 위급한 상황이었다. 안형규가 작전 전체를 망쳐 놓을 가능성
이 얼마든지 있었다.
"사령관님, 작전 시간을 당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송금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출동 준비는 모두 끝내 놓았습니다. "
"기다려, 상의해 볼데니까."
전화기를 내려놓은 송금택은 부하들을 향해 돌아앉았다. 밖에서
전차의 캐터필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가 차츰 멀어져 갔다.
박현식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저녁 1시 10랄전이다. 시간가는
것이 한없이 더딘 것 같기도 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시간이 지나
는 것 갊기도 한 오늘이었다.
"다 왔습니다. "
앞자리에 앉은 민영택은 그가 초조해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
다. 아직도 일식집 해월이 100미터쯤 남았는데도 다 왔다고 말하고
있다. 해월은 이태원 입구 근처에 있는 고급 일식집이었는데 주방장
이 일본인으로 음식맛이 담백한 데다 시중드는 여자들이 미인이었
재회 271
다. 술을 마실 때에도 꼭 분위기를 찾는 박현식은 해월에서 손님을
맞는 때가 많았다.
그의 대형 승용차가 해월의 주차장에 멈추자 차에서 내리는 그에
게 사래 한 명이 다가왔다. 짧은 머리에 말쑥한 신사복이 어울리는
사래였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머리를 」1덕인 박현식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2충의
한쪽 방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자 식탁에 앉아 있던 두 사래가 얼굴
에 웃음을 띠었다.
"어서 오시오."
3군 시령관 오채국 대장과 참모 총장 이동진 대장이다. 그들 셋은
모두 육사 출신으로 박현식의 기수가 하나 아래였는 데다가 군 시절
엔 상관으로 모신 적도 있었던 관계였지만 지금 이쪽은 안기부장이
다. 정치력이 곧 힘인 세상이었으므로 서로간에 꿀릴 것도 없는 위치
가 되어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주문해 놓은 생선회가 날라져 왔다.
군이 비상 대기 상태여서 다시 육본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장군
들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의 사과 성명이 발표된 후
에 내일 아침 10시에 비상 대기는 해제하기로 결정되어 있었으므로
분위기는 밝았다.
참모 총장 이동진이 입을 열었다.
"박 부장, 이왕 군복을 벗고 관직에 올랐으니 정치를 해보시는 게
어떻소?"
웃음기가 떠오른 얼굴이다. 그러자 오재국이 회를 셉으며 머리를
272 밤의 대통령 제4닥 -트
11덕였다.
"당연하지요. 정치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박 부장처
럼 어쩔 수 없이 끌려든 사람도 많아요."
두 대장은 사이가 좋았다. 전 정권 때 같이 물을 먹는 동안에 동지
의식이 강해진 것이다
"글쎄, 난 이 정권 밑에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요."
박현식.의 말에 두 대장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하긴 차기 정권에서 일하셔도 좋지."
오재국이 말하자 이동진도 머리를 끄덕였다. 오랜만이니 저녁이나
같이 드시자는 박현식의 초대였고 서로 연관된 일도 별로 없는 터이
라 분위기는 밝았다. 지난 시절 두 대장의 고생했던 이야기를 듣던
박현식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7시 반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박 부장, 왜, 다른 약속이 있소?"
오재국이 묻자 박현식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예, 오늘 밤 일이 있어서. 하지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도 8시에는 돌아가야 돼. 자리에 앉아 있어 줘야지."
그러는141 방문이 열리면서 대여섯 명의 사래들이 쏟아져 들어왔
다. 모두 신사복 차림으로 두어 명은 가방을 손에 들었다. 그들은 이
맛살을 찌푸리며 바라보는 이동진과 오재국을 문시한 채 그들의 뒤
에 가 섰다.
박현식이 사내 한 명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밖은 정리 되었나?"
"예, 끝낸습니다. "
머리를 』1덕인 박현식이 이동진과 오재국을 턱으로 가리켰다.
재회 273
"그럼 이제 이 자들을 정리해."
이동진과 오재국이 제각기 입을 열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금방 사내들에게 붙잡혔고 얼굴에는 클로로포름을 적신 수건이 덮여
졌다. 잠간 동안 발버둥을 치던 그들이 사지를 늘어뜨리자 박현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쓸개도 없는 것들."
그들을 향해 뱉듯이 말한 박현식이 몸을 돌렸다. 사내들은 대장들
의 옷을 벗기고 있었는데 아마 다른 옷으로 갈이입힐 모양이었다.
"그래, 무슨 일이이?"
이용덕이 앞자리에 앉자 김재선이 눈을 크게 떠 보였는데 다소 과
장된 몸짓이다.
"저녁 식사는 했어?"
청와대의 정무 수석실 안이다. 오늘도 김재선은 야근을 할 모양으
로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이용덕이 넥타이의 매듭을 내리고는 김재
선을 바라보았다.
"각하께선 퇴근하셨나?"
"그래. 오늘은 일젤 쉬시려고. 어젯밤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한 데
다가 오늘 낮에 있었던 인민군 포격으로 놀라셨거든."
김재선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 사람들, 할 때는 확실하게 하는구만.그저 총 몇 방 쏠 줄 알았
는데 우리 진지를 포격해 버리다니, "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안정한 분위기를 내던 이용덕이 머리를
들었다.
274 밤의 대통령 제살』 -르
"특별 성명 발표 준비는 되었나?"
"여부가 있나."
김재선이 머리를 」1닥였다.
"오늘 밤 9시 뉴스 시간에 일제히 내일 아침 10시에 대통령의 특
별 성명이 있을 예정이라는 방송이 나가.조금 전에 공보실에서 각
방송사에 연락을 했어."
언론사에 기습적으로 뉴스를 주는 것이 효과가 있다. 말 많은 그
들에게 여유를 주면 특별 성명의 내용을 추측해낼 가능성도 있는 것
이다.
"잘 진행되고 있어. 그래, 갑자기 날 보자는 건 뭣 때문이야?"
이용덕이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었다.
"박현시이 수상해. 군부 세력하고. 아니,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무
사인데."
"이런 말 하면 자레는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난 오늘 오후에 이동
천이를 만났어.부산 폭동의 주모자 말이야."
"이동천이를 만났다구?"
하면세 김재선이 두 눈을 치켜 떴으나 잠자코 그의 다음 말을 기
다렸다.
"이동=천이를 배후에서 지원한 것은 안기부와 기무사야. 그는 기무
사로부터 총기와 수류탄까지 지원을 받았대. 그렇지만 사용하지 않
았어, 고자들이 원했던 것은 부산 지역의 폭동이었지. 그것이 이동천
의 배신으로 그 정도로 끝나고 말았단 말이야."
재회 275
"박현식과 기무사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겠나? 군 세력이야. 그자
들이 목적 없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
"이동천이 왜? 이동천의 말을 믿을 수가 있겠어?그리고 군은."
그렇게 묻던 김재선 스스로가 정신이 어지러운 모양이었다. 그가
말을 멈추자 이용덕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동천은 나에 대한 전단 살포도 박현식과 기무사가 도와 주었다
고 했어. 그놈은 나를 포함한 정치, 정부 세력에 적대감을 품고 있지
만 자신이 군의 쿠데타에 이용당하기는 싫었던 거야."
"이것,조처를 해야 돼."
"그래서 어젯밤 회의 때 안기부장와 국방 장관이 폭동이네 뭐네
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인가?"
혼자소리처럼 김재선이 말했는데 그의 얼굴은 이제 뻣뻣하게 굳어
져 있었다.
"폭도들이 경찰의 무기고를 탈취하려고 한다면서 금방이라도 계
엄령을 선포해야 되는 것처럼."
그러다가 김재선이 머리를 들었다.
"지금 전군이 비상 출동 대기 상태 아니야?"
대답 대신 이웅덕은 소리내어 침을 삼켰다. 김재선이 이제 하얗게
된 얼굴로 말했다.
"이것, 야단났네 ."
이제 북한군의 포격은 쿠데타 세력에게 의심받지 않고 무장하여
출동 준비까지 하게끔 만들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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