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형님만을 부르면서
(1)
현관으로 들어선 박남호÷가 서둘러 응접실에 앉아 있는 김원국에게로 다가왔다.
안톤 모리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김원국이 머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정보가 있습니다. "
김원국은 한국말로 물었으나 그의 대답은 영어였다. 안톤을 의식하고 있는 행동이다.
그는 안톤의 옆자리에 앉아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시내에 나가서 서울로 연락을 했었습니다.
안기부에는 아직도 믿을 만한 동료들이 있습니다 "
침을 삼킨 그가 말을 이었다.
"안기부의 주관으로 태국에서 평양으로 쌀을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5만 톤이 곧 출항할 예정이고 15만 톤이 이차로 선적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
안톤이 눈을 치켜뜨고는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을 듣는다.
"안기부는 태국의 아시아 엔터프라이스라는 중국계 무역 회사에
게 용역을 주어서 그들이 북한의 고려 교역과 현금 거래를 하는 것처
럼 위장했지만 자금은 한국 정부에서 댄 것입니다. "
몸매가 풍만한 마외 부인이 그들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는 활기 있
는 몸짓으로 주방으로 돌아갔다. 잠자코 그를 바라보는 김원국을 향
해 박남호가 다시 말했다.
"북한과 비밀 계약을 한 것입니다, 김 선생님. 평화 조약에는 언급
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대통령과 김정일 간의 약속입니다.
앞으로 백만 톤의 쌀이 북한으로 공급된다는 것입니다. "
이제 안톤은 수첩에 열심히 박남호의 말을 메모하고 있었다.
오후 6시가 되자 알랭 고마드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한시간도 더 전이었지만 달리 할 일도 없었
으므로 눈을 감고 누워 있었던 것이다. 차도를 지나는 차량들의 진동
음으로 침대가 가볍게 떨렸고 보도를 지나는 행인들의 발자국 소리
와 함께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도 들려 왔다. 그의 집은 보도가 창문
의 중간 위치에 놓여진 반지하의 셋방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알랭은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다가갔다. 열
평 가량의 창고를 개조한 방이어서 화장실은 벽 쪽에 칸막이만으로
가려져 있을 뿐이다. 일을 마치고 시원해진 기분으로 화장실을 나오
던 알랭은 입을 벌리며 발을 멈추었다. 두 눈을 한껏 치러뜬 채였다.
"당신, 누구요?"
형님만을 부르면서 269
방 한쪽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던 동양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
섰다. 짙은 색의 양복 차림이었고 손에는 권총이 쥐어져 있다.
"네가 알랭 고마드인가?"
사내가 영어로 물었다. 낮고 억양이 없는 목소리여서 알랭은 온몸
에 찬 기운이 스치고 지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1, 그렇지만, 나는."
"rl리에 앉ot, 알랭 ."
사내가 총구로 침대 옆의 낡은 의자를 가리켰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에 쏘아 죽일테다. "
알랭은 의자에 앉았다. 더러운 내복 차림이었으나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여보시오, 난 아무것도‥‥‥ 보시다시희
알랭이 얼굴에 땀을 흘리며 말했다.
"난 가난뱅이오. 난 가난한 운전사란 말이오."
"그런 것 같구만."
사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런 곳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안돼, 알랭 ."
저녁 무렵이 되어서 카페는 붐비기 시작했다. 날씨는싸늘했지만
추위는 많이 가셔 있어서 길가에 내다놓은 의자에도 손님들이 제법
많았다.
우정만은 카페의 안쪽 테이블에 앉아 들락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는 손도 대지 않은 커피잔이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재떨
이에는 담배 꽁초가 대여섯 개나 놓여 있다.
270 밤의 대통령 제3부 -및
손목시계가 7시 』분전을 가리켰을 때 카페의 입구로 점퍼 차림의
동양인이 서둘러 들어섰다.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휘둘러보던 그가
우정만을 발견하고는 곧장 이쪽으로 다가왔다. 손에는 묵직한 가방
이 들려져 있다.
"동무, 30분이나 늦었어."
우정만이 꾸짖듯 말하자 사내는 당황한 듯 한 손을 머리 뒤쪽에
대었다.
"대사관에 경찰들과 기자들이 깔려 있어서 시간이 걸렸습니다. "
"내 물건 꺼내 오는데 누가 워란단 말이야?"
우정만의 눈길이 그의 손에 들린 검정색 가방에 머물렀다.
"물건은 이상 없지?"
"이상 없습니다,조장 동지."
머리를 』1덕인 우정만이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
다. 그의 부하는 난장판이 되어 있는 대사관에 들러 사무실 금고에
넣어 둔 공작금을 가져온 것이다.
주위를 둘러본 우정만이 자리애서 일어섰다.
"나가자우."
=1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벽 쪽의 테이블에서 사내 두 명이 따라
일어섰다. 카페를 나온 그들은 길가에 대기하고 있는 횐색 캐딜락에
올랐다.
러시 아워의 거리를 달리는 차량들은 차량 간격이 1미터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횐색 캐딜락이 세 대 앞쪽에 있었지만 20미
터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피트 브레드는 전화기를 귀에 대고는 시계를 보았다. 저녁 7시 반
형님만을 부르면서 271
이었다. 그러자 발신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매클레인의 목소리였다.
"보스, 우정만이 카페에 있었습니다. "
"그것 봐, 대사관에서 그놈을 미행한 것은 잘한 일이야, 피트."
"예, 보스. 지금 앵발리드 광장 근처를 지나고 있습니다. "
"그림 다시 연락해."
매클레인과의 통화를 마친 피터는 좌석에 등을 기대고는 다리를
폈다.
"이봐, 피트. 저 자식들하고는 우리가 어떻게 되는 거야?"
운전석에 앉은 오웬이 =1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좋은 관계인 거야"
그는 단순한 성격의 요원이었지만 시격과 운전 솜씨가 뛰어나 렬
부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상관들은 그런 체질의 요원을 좋아하는 것
이다.
"저 놈들하고는 좋았던 때도 없었어, 오웬."
차량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으므로 앞쪽에 시선을 준 피트가
말했다.
"좋은 놈 나쁜 놈이 어디 있어? 요즘 시대에 말이야. 필요에 따라
서 맺어지고 떨어지는 것이지, "
이기팔이 AP통신발 안톤 모리스 특종을 읽은 것은 아침 8시였
다. 출근과 동시에 외신부에 들렀다가 일찍 출근한 동료들이 몰려 있
는 곳으로 다가가자 이영만 대통령의 자선 사업 내막을 읽을 수 있었
272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던 것이다.
안톤은 용의주도하게도 방콕의 주재원을 시켜 아시아 엔터프라이
스의 회사 간부를 인터뷰시 켰는데 그 태국인 간부가 시종 모른다고
일관한 내용도 실려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내용은 내일 북한의 남
포로 출항한다는 파나마 국적의 화물선 두 척이다. 그 한 척의 선장
이 AP통신의 특파원에게 화물은 쌀이고 북한의 남포에 하역하기로
되어 있다고 말해 주었던 것이다. 배와 웃는 모습의 선장 사진이 기
사에 실려 있었다.
"평화 조약은 국많호도용이야!"
기자 한 사람이 영문의 기사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이영만과 김정일이 사이에 또 어떤 협잡이 맺어져 있는지도 모른
다. 안 그래?"
주위의 둘러선 기자들은 선뜻 입을 열고 나서지 않았다.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바로 어제에도 안톤 모리스는 북한과 일본, 그리고 한국 정부까지
개입한 최광과 김원국의 습격 사건을 보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
은 그것과는 종류가 다르다. 대통령이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는 증거
가 될 수도 있었다.
김정일과의 평화조약에 한국이 절대적인 주도권을 쥐고 불기점
선언, 이산 가족 상봉, 남북 왕래, 산업 활동 개방 문제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호도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북한에게 엄청난 양의 식량을
비밀리에 공급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건 국민을 우롱하는 일이다.
"이 위선자 같은 놈."
마침내 이기팔이 뱉듯이 말했다.
형님만을 부르면서 273
"이놈이 나라를 망쳐 먹고 있어, 이놈은 암세포 같은 놈이다. "
격렬한 그의 말에 동료들이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걸 국민에게 알려야 돼."
그가 머리를 들자 둘러섰던 동료들이 제각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보도 통제를 하고 있는 현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이기팔은 편집국장 안현식의 방에 불려가 있었다.
"이봐, 이 기자. 이 외신은 우리만 받은 것이 아냐. 30여 군데의
일간지, 경제지는 말할 것도 없고 AP와 뉴스 계약을 맺은 곳이 수백
군데가 넘어. 알TR어?"
"그 말씀은 우리만 총대 메고 나서서 피해 볼 이유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얼굴로 날 쳐다보지 말어. 내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내 말은 우리가 신문에 내지 않아도 알 사람은 다 알게 된다는 거
야. "
"말도 안되는 소리 마십쇼."
"이 사람이."
안현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했나?"
"신문사를 살리고 싶다고나 하세요, 딴 말 늘어놓지 말고. 말이 길
수록 구차하게 보입니다. "
"자네 조심해야 돼, 이 사람아."
이제는 안현식이 말소리를 깔고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아니었으면 자넨 자리에 앉아 있기 힘들었을 거야. 그걸 알
기나 하는 거야?"
274 밤의 대통령 제3부 -방
"안기부에서 파견된 사람들과 친하다는 건 압니다. "
자리에서 일어난 이기팔이 안현식을 바라보았다.
"이만 나가도 됩니까, 국장님?"
"조심해, 이 사람아. 다 자네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허청거리는 걸음으로 국장실을 나오는 이기팔에게 다가오는 직원
은 없었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직원도 없었다. 이기팔도 그것을 조금
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아니, 이번에는 그만둬."
월슨 대장이 부관인 허드슨 대령에게 말했다. 그들은 회담장 입구
옆쪽의 복도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어제 AFKN보도로 이영만의 컨디션이 최악이야.나뿐만 아니
라 그리피스 대사, 로젠스린 장관한테 까지 줄줄이 전화를 해왔어."
"알겠습니다, 장군. 이번에는 AFKN보도를 막겠습니다. "
"어제 사건 덕분에 AFKN시청률이 두 배나 높아졌다면 서?"
웃음 띤 얼굴로 월슨이 묻자 허드슨이 따라 웃었다.
"두 배 반입니다, 장군. 그리고 NHK의 시청률은 30퍼센트나 줄
었습니다. "
"놈들은 약은 체하다가 당한 거야. 안톤 모리스의 보도를 토막으
로 줄여 보도한 것이 한국 시청자들에게 탄로난 것이지."
"AFKN과 너무 대조가 되었으니까요."
머리를 끄덕인 월슨이 회담장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어쪘든 허드슨, 이제 이영만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어. 그런
노골적인 방법으로는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형님만을 부르면서 271
"알겠습니다, 장군 "
경례를 올려붙이는 허드슨을 뒤로 하고 월슨은 회담장으로 들어섰
다. 회담은 이미 시작되어 있어서 넓은 방안은 후끈한 열기에 덮여
있었다.
평화 조약의 기본 골격은 이제 정해졌고 남북한 대표단의 합의도
거쳤다. 그리고 세부 조항으로 들어가 제1항의 남북한 동시 철군과
감군에 있어서도 남북한 간의 협의는 되었다.
쌍방 휴전선의 군사를 2개 사단씩으로 줄이고 후방 35킬로미터
지점으로 각각 철군을 하되 서울의 특수 여건상 서울 방위에 2개 군
단 병력이 감군 때까지 주둔해 있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북한측의
파격적인 양보였고 평시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한국측 단장 김창덕 총리가 순조로운 회담 진행에 고무된 듯 상기
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럼 양국 원수의 공동 선포가 있고 난 즉시 조약이 발효되는 것
으로 하고 휴전선에서의 철군은 선포 후 한 달 후까지니까 3월 25일
이 되겠습니다. "
오늘이 17일이었고 선포 예정일은 25일이었다. 북한측 대표 김달
현이 머리를 」I덕였다.
"좋습니다. 이의 없습니다. "
"그리고 감군은 북한의 동부 지역 여건이 정상화될 때까지 쌍방
합의하에 보류하는 것으로 합니다. "
"그것도 이의 없습니다. "
"정상화 즉시 감군 협의에 들어간다고 조약에 명기해 놓읍시다. "
"좋습니다. "
276 밤의 대통령 제3부 -lB
그러자 김달현의 딘자리에 앉은 김강환이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머리를 끄덕인 김달현이 입을 열었다.
"남조선은 지금 한일, 한미 두 개의 방위 조약을 맺고 미군과 일
군이 모두 10만 명 가깜게 있습니다. 이제 평화 조약이 체결된 이상
그들을 주둔시킬 이유가 있습니까?"
그러자 미국과 일본의 대표단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그것을 본 한국측 대표들이 따라 웃었고 북한측은 김강환이 웃자 모
두 그를 따랐다. 회담장은 한동안 웃음에 묻혔다가 하나둘씩 입을 다
물고는 다시 조용해졌다.
이영규가 헛기침을 하자 이제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어깨에 붙인
네 개의 별이 그를 더욱 권위 있게 보이게 했다. 그는 한일 연합군
사령관이자 그 전에 맺은 한미 방위 조약에 의하면 한미 연합군 부사
령관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미국과 일본은 각각 한국과 방위 조약을 맺었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북한측이 미일 양군은 전쟁 억제를 위한
평화 유지군의 성격을 띠고 한국에 주둔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
리라 믿습니다. 따라서 주한 미일 양군의 철수 문제는 이 자리에서
논의될 일이 아닙니다. "
그러자 김달현과 김강환, 흥진무 등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무엇인
가를 수근거렸다. 로젠스턴이 슬그머니 옆에 앉은 월슨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장군, 명 연설이었소."
"영어 잘하는 사람입니다. "
"난 조마조마 했어요. 이제 주한 미군은 필요없다고 할까봐서 요.w
형님만을 부르면서 277
"그럴 필가 있습니까? 이영만이."
"나도 믿었지만 불안했단 말이오."
그러자 김달현이 이야기를 끝내고 허리를 세웠다.
"좋습니다. 논의하지 말고 넘어감시다. "
박종환은 한동안 둘러앉은 간부들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제 1차장부터 3차장까지 모두 자신이 데려온 사람이었고 대통령의
추천을 받은 보좌관도 있다. 간부급 30여 명 중 전문직을 제외한 열
명 가량이 바뀌는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으므로 둘러앉은 고위 간
부 여섯 명 중에서도 네 명이 신임이었다.
"안기부 내에서 박남호에게 정보가 유출된 거요. 이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소."
박종환이 입을 열었다.
"각하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어요. 언론은 통제했지만 곧 소문이
급격히 확산될 겁니다 모처럼 평화 조약으로 안정을 찾던 국민들의
분위기가 뒤집혀질 우려가 있어요."
"부장님,"
제1차장인 주창복이 그를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청와대 비서실
의 안보 비서관이었던 인물이다.
"이왕 엎질러진 물입니다. 철저히 언론을 통제하고 사실무근이라
는 자세로 나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
두어 명이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AP 통신을 반박하거나 예민한 반응을 보일 필요도 없
다고 생각합니다. 야당은 이것을 문제삼을 것 같지 않고 학생들도 아
278 밤의 대통령 제3부 -lf
직 방학중이어서 ."
박종환이 머리를 끄덕이며 머리를 돌리자 그의 시선을 받은 제3차
장이 나섰다. 그도 체포된 설정식 대신으로 이번에 임명된 겊찰 출신
의 간부였다.
"부장님 요즘은 PC가 3백만 대 가깝게 보급된 형편입니다. PC
통신을 이용하면 AP의 뉴스는 집안에서 얼마든지 읽을 수가 있습니
다. 따라서 AP 뉴스의 외신을 단절시켜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
니다만 "
"그건 불가능해요."
보좌관 임성룡이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차라리-뉴스원을 제거하는 것이 쉽지 그것은 국제 문제가 됩니
다. 어떻게 외신을 꾼으란 말이오? 그것은 전화를 끊는 것과도 다릅
니다. 불가능해요."
"그렇다면 매일 터져 나오는 AP 뉴스에 속만 태우면서 앉아서 당
하란 말이오?"
"더 터져 나을 것이 어디 있단 말이오?"
박종환이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젓자 그들의 다툼은 멎었다.
"부원들의 동향을 철저히 감시하시오."
박종환이 화제를 바꾸었다.
"더 이상 정보가 유출되면 안됩니다. 이것은 적전 분열보다 더 위
험한 현상입니다. "
모두 잠자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감사반이 조사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마음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
리가 지금 역사의 새 장을 열고 있다는 자긍심이 부원들에게 있어야
형님만을 부르면서 279
합니다. "
잠시 말을 멈추고 간부들을 둘러본 그가 말을 이었다
"군의 동향에 주의해 주시오. 강동진이나 고성국, 강한기와 맥을
같이하는 부류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보안 사령부의 보고로는
야전 지휘관의 60퍼센트가 심정적으로 그들과 동조한다는 거요."
"그것에 대해서는 일본 정보국과 군정보국의 도움을 국이 받고 있
습니다. "
제2차장이 머리를 들고 말했다.
"일본은 한국군의 동향에 대해서는 대단히 민감하게 대처하고 있
어서 그들과 공조하고 있습니다,부장님."
머리를 끄덕인 박종환은 서류를 덮었다. 그것은 한국군이 일본군
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령부의 강동진을 비
롯한 강경파 장군들을 교체하는 데 일본군이 도왔다는 것을 이제 대
부분의 한국군 장교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찌푸린 얼굴로 박종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침에 대통령으로
부터 당한 질책의 여운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이다.
백미러를 올려다본 고동규가차의 속력을 늦추더니 옆에 앉은 박
남호를 바라보았다.
"미행당하고 있어."
12시가 지난 시간이어서 파리에서 말메종으로 향한 국도에는 차량
의 통행도 드문 편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고형 ."
박남호가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횐 전조등빛이 환하게
280 밤의 대통령 제3부 -르
비쳐 왔으므로 그는 금방 시선을 비꼈다. 뒤쪽에서는 앞차의 윤곽과
차 안에 탄 사람들까지 구분해서 보이지만 앞에서 뒤쪽을 보면 횐
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놈이 아까부터 따라왔어."
고동규가 말했다. 이차선 도로의 길가로 차를 붙이면서 고동규가
다시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입맛을 다신 박남호가 가슴에 찬 권총집에서 콜트를 꺼내 들고는
탄창 속의 총탄을 확인했다.
"없애 버립시다. "
"장소를 찾는 중이오."
고동규도 입맛을 다셨다.
그들은 우정만의 은신처일지도 모른다는 레알 근처의 아파트에서
저녁 시간을 다 보내고 오는 길이다. 헛고생을 하고 오는 길이었지만
정보를 준 현만식이 거짓말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정
만은 대사에게 보고하고 다니는 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꽁
무니에 미행이 달려 있을 줄은 뜻밖이었다. 긴장이 풀려 있었기 때문
일 것이다.
고동규는 앞쪽에 오른쪽으로 샛길 표시가 있는 것을 보았다.
시속 백 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밤길을 달리는 참이라 숫자만 보았지
그 위의 글자는 보지 못했지만 상관할 건 없다.
=1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박형, 내가 오른쪽으로 틀면서 속력을 줄일테니 뛰어내라요.
그리고 나서 멈출테니 그러면 놈들도 따라 멈출 거요."
(2)
"알았어요. 그러면 내가 놈들을 뒤쪽에서 공격하지요."
다시 오른쪽으로 꺾여지는 푯말이 나왔으나 고동규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액셀러레이터에서만 발을 떼었다. 그러자 곧 오른쪽으로
꺽여지는 길이 나왔다.
핸들이 급각도로 꺾인 BMW는 날카로운 타이어의 마찰음을 내면
서 오른쪽의 샛길로 들어섰다. 그러자 뒤쪽에서 요란한 브레이크 소
리가 들려 왔다. 샛길은 가로등도 없는 일차선 도로였다.
"자!"
브레이3를 밟으며 고동규가 소리치자 문의 손잡이를 쥐고 있던
박남호가 문을 열어 젖히면서 밖으로 몸을 굴렸다. 고동규는 몸을 비
틀어 열려진 자리의 문을 닫고는 브레이크에 힘을 주어 밟았다. 그러
자 뒤쪽에서 확 횐 빛이 쏟아져 왔다. 미행차가 서둘러 우회전해 들
어오는 것이다.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고동규는 차체에 몸을 숨기고는 다
가오는 차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샛길에는 오가는 차량도 없었으
므로 마음놓고 총을 쏘아제칠 생각이었다.
그자들이 이쪽의 상황을 눈치 챈 것은 조금 후였다. 다시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가 들리면서 미행차가 다가오던 속력을 줄였을 때 고
동규는 권총의 방아치를 잡아당겼다. 그들의 위치로 보아 박남호는
뒤쪽에 있을 것이었다. 놈들은 꼼짝없이 몰살이다.
요란한 총성이 밤하늘로 울려 퍼지면서 미행차의 라이트 한쪽이
갑자기 불꽃과 함께 어두워졌다. 입맛을 다신 고동규는 다시 위쪽으
로 총구를 올렸다. 맞추긴 했지만 목표는 차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
때 사람들의 외침 소리가 났다.
282 밤의 대통령 제3부-및
"중지! 중지! 우린 당신과 이야기를 하러 왔소! 우린 미국인이오!"
대충 그런 내용이었지만 고동규는 총구를 내리지 않았다. 그러자
뒤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리면서 그쪽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박
남호가 쏜 것이다.
"맙소사!헤이!코리언!우린 적이 아니야!미국인이야!이야기할
것이 있어!"
두어 명이 악을 쓰듯 소리치면서 응사를 하지 않는다. 고동규가
차체에서 머리만을 들고 소리쳤다.
"당신들 누구이?"
"CIA야."
이제는 진정된 듯 한 사람이 맞받아 소리쳤다.
"봐, 미스터 고.그 염병할 총질은 그만두라구!"
"CIA 누구야"
"네가 CIA 요원을 다 안단 말이냐?"
입맛을 다신 고동규가 이제 상반신을 내어놓았다.
"그 빌어먹을 라이트를 꺼라!"
그러자 미행차의 라이트가 금방 꺼졌다.
"무첫 때문에 우릴 쫓아온 거이?"
"말할 것이 있다고 했잖아."
새벽 2시다. 우정만은 조니워커의 빈 병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두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지만 나
른한 취기가 전신에 퍼져 있었다.
"이봐, 나 먼저 잘테니까 동무도 그만 자라우."
형님만을 부르면서 283
그의 말에 소파에 앉아 있던 사내가 머리를 들었다. 그의 보좌역
으로 언제나 옆을 따르던 30대 후반의 사내였다.
"오늘이 마지막 밤인데 술이나 실컷 마시겠수다. "
사내가 탁자 위에 어지럽게 놓여진 양주병을 집어 들자 우정만은
몸을 돌렸다. 내일 평양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다. 벌써 새벽 2시니
오늘이었고 평양에 도착하면 어떤 상황이 닥쳐올지 부하들은 제각기
궁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과업을 자아비판 한다면 실패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크리용 호
텔에서 김원국에게 놀림감이 된 것은 미국측도 함께 당했으니 그렇
다고 치더라도 최광의 도주, 습격, 그리고 대사와 부대사의 납치 사
건에 이르기까지 맡겨진 과업은 허점투성이였던 것이다.
그는 잠자코 응접실 옆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팔레 루
아얄의 아파트는 그의 은신처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 오늘 밤으로 이
곳도 떠나야 한다. 셔츠를 벗어던진 그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방안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검정색 가방에 머물자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가방은 부피가 컸고 안에 내용물이 가득 차 있어서
보기에도 무거워 보였다.
그때 바깥의 응접실에서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가
방에서 시선을 뗀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부하는 양주를 세 병째
마시고 있프 것이다. 그리고 방문이 벌컥 열렸을 때도 그는 눈만을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찌푸린 얼굴 그대로였는데 부하가 들어온
줄 알았기 때문이다.
"아!"
그 다음 순간 우정만은 펄쩍 뛰듯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으나 이
284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미 늦었다. 방안을 가득 메우고 달려온 사내에게 두 어깨를 잡히고
만 것이다.
"이 간나 새끼."
정신이 번쩍 든 우정만이 주먹으로 사내의 가슴을 치면서 연달아
머리로 얼굴을 받았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칼은 몸놀림이었다.
그러나 사내의 가슴에 닫는 주먹의 충격은 느꼈지만 이마는 허전
하게 앞으로 꺾여졌다. 순간 우정만은 아래턱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
낌을 받으면서 번쩍 머리를 치켜들었다.
눈에는 수백 개의 불꽃이 튀어나왔고 머리속은 하앙게 비워진 것
같다. 벽에 뒷머리를 부딪치며 주르르 주저앉는 동안에도 그의 의식
은 명료했다.
사내는 조웅남이다. 자료에 잔인무도한 놈이라고 씌어 있었던 것
도 번개처럼 떠오르고 있다. 그는 턱을 들어 다가오는 조웅남을 향해
무어라고 입을 열려고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머리가 건들거
렸고 온몸이 마비되어서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자 조웅남
의 뒤쪽에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김원국이다. 우정만은 길
게 숨을 내쉬었다.
"자아, 시작혀 볼끄나?"
두 손바닥을 마주치며 조웅남이 입맛을 다셨다. 밝고 가벼운 말투
였지만 얼굴 표정은 무섭게 굳어져 있다.
"우리 칠성이를 어따 두었L 응? 야! 야, 이 씨발놈아."
조웅남의 더운 입김이 얼굴에 부딪쳤고 체취도 맡아졌지만 몸이
마비된 우정만은 입가에 침을 홀리며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
다.
형님만을 부르면서 285
김칠성이 갇혀 있는 곳은 물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 뒤따라들어
와 방을 뒤지던 고동규가 화장실 옆의 창고 방에 누여진 김칠성을 발
견했기 때문이다.
김칠성은 석고처럼 흰 얼굴로 누워 있었다. 상반신이 온통 붕대로
감겨졌으나 거친 솜씨였고 배어 나온 피가 가슴 전체에 번져 있다.
"칠성아."
제일 먼저 그를 부둥켜 안은 것은 물론 조웅남이다.
"야, 이 시키야. 나여, 나란 말여."
그의 상반신을 부둥켜안고 조웅남이 소리치자 김칠성이 희미하게
눈을 떴다. 사흘 만이었으나 그의 얼굴은 몰라보게 야위어 있었다.
"형님 ."
그러자 조웅남이 와락 눈물을 쏟았다.
"어이, 그려. 나여."
김원국이 다가가 잠자코 김칠성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큰형님."
"병원에 가자."
그러자조웅남이 정신이 든 듯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병원!"
외마디 소리처럼 외치면서 그는 김칠성을 번쩍 안아 들었다.
"동규야! 병원!"
"예, 형님."
고동규가 응접실을 달려나갔다.
"칠성아, 정신 채려라 병원 가자."
안아 든 김 칠성에게 헛소리처럼 말하면서 응접실을 나가던 조웅남
286 밤의 대통령 제3부 -111
이 주춤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안고 있던 김칠성을 내민다.
"형님, 칠성이 좀."
김원국이 그를 받아 안자 조웅남은 안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잠시
후에 그는 검정색 가방을 들고 나와서는 다시 김칠성을 받아 안는다.
아파트의 입구로 나오던 김원국이 주춤 발을 멈추었다. 고동규의 옆
에 두 명의 서양인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김원국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날 기억하시겠지요?"
푸른 눈의 사내가 한 발 다가서면서 입을 열었다. CIA의 매클레
인이었다.
"매클레인 씨."
"기억하시는군요. 영광입니다. "
조웅남이 고동규를 쏘아보았다.
"차 어디 있어?"
고함치듯이 묻는 조웅남의 서슬에 주춤했던 매클레인이 재빠르게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분은 우리가 병원으로 데려가겠습니다. 당신들이 움직이면 위
험합니다. "
조웅남이 힐끗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깊은 밤이었지만 이곳은 아
파트의 입구이다. 이렇게 서 있을 수만도 없다.
매클레인이 다시 말했다.
"우릴 믿으세요. 우리가 이 장소도 알려 드리지 않았습니까?"
김원국이 머리를 』1덕이자 매클레인이 뒤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서너 명의 사내들이 어둠 속에서 뛰어나와 김칠성을 받아 안는다.
"칠성아, 병원에 간다. "
형님만을 부르면서 287
조웅남이 사내들에게 김칠공을 넘기면서 소리쳤다. 다가간 김원국
도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김칠성이 다시 눈을 떴다.
"형님 ."
"칠성아, 미안하다. "
"형님, "
그러자 조웅남이 소리쳤다.
"야, 이 시키야. 인자 그만 말혀!"
사내들에게 안긴 김칠성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곧 자동차의 엔
진 소리가 들리더니 그것도 멀어져 갔다.
그들은 아파트의 입구를 나와 길가에 세워 둔 승용차로 다가갔다.
잠자코 옆을 따르던 매클레인이 김원국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우정만은 안에 있습니까?"
김원국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그의 시선이 이제 고동규가 받
아 쥐고 있는 검정색 가방에 머물렀다.
"저건 달러요. 아마 50만 달러가 넘어 보이던데."
매클레인이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만을 」1덕였다.
"우정 만이는 내일 떠날 생각이었소. 비행기표를 끊어 놓았더군."
그러자 매클레인이 다시 끄덕였다.
"평양으로 말이지요?"
"아니, 홍콩으로."
"홍콩에는 왜 갈까요?"
"그건 나도 모릅니다. "
그러자 조웅남이 헛기침을 했다.
"내가 완전히 홍콩으로 보냈어."
288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매클궤인이 김원국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입니까?"
"죽였다는 말이오."
그들이 타고 온 BMW 옆에 멈춰 서자 김원국이 말했다
"매클레인 씨, 신세를 졌습니다. 정말 뜻밖이었지만 염치 없이 신
세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매클레인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잘 아시는 분이. 이놈의 세상이 언제나 원수일 수도, 그리고 언제
나 친구로 지낼 수도 없는 세상 아닙니까?"
잠자코 머리를 끄덕인 김원국이 손을 내밀자 매클레인이 손을 마
주잡았다. 깊은 밤이어서 우뚝우뚝 서 있는 사내들의 모습이 마치 나
무 등걸같이 보였다.
겨울의 추위가 한풀 꺾인 초월 중순의 아침이다.
파란하늘에 횐 구름만 몇 점 떠 있는 모처럼의 밝은날씨여서 따
스한 랫살에 덮인 시가지는 활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침 9시가 되자 출근길의 차량 대열은 어느 정도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진행 속도는 느리다.
로시아르 대로를 지나 강변 도로 방향으로 우희전하던 호송차는
다시 신호에 걸려 멈추어 섰다.
"어제 마르세 유의 자크가 연습 게임에서 두 골을 넣었어."
호송차 됫좌석의 마티유가 마주보고 앉은 테드에게 말했다. 그들
은 구치소를 출발할 때부터 한 시간 가깝게 축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형님만을 부르면서 289
"한번은 혜딩이고 나머지는 왼발이야. 자크가 왼발 순도 한단 말
이야."
"부르고뉴한테라면 나는 배로 슛하더라도 골인시키겠다. 골키퍼
몬타뉴가 엉망이야."
테드가 큰소리로 말하자 앞자리에 앉은 도일 경위가 힐끗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마티유의 옆에 앉아 있는 박은채에게 잠시
머물다가 제자리로 돌려졌다.
호송차는 앞좌석과 됫좌석 사이에 철망이 쳐진 칸막이가 있고 됫
좌석은 서로 마주보고 앉게 되어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으므로 호송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은 나라가 세 조각이 되었더군."
이제 마티유가 화제를 바꾸면서 박은채를 돌아보았다. 그는 알제
리 출신의 프랑스인으로 체중이 백 킬로그램에 가까운 30대의 사내
였다. 검은 눈동자가 또렷했지만 흰창에는 실핏줄이 어지럽게 흩어
져 있다.
박은채가 잠자코 있자 그가 다시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같은 민족이라면서?왜 서로 죽이려고
그래 ?"
테드가 피식 웃었고 이제 앞자리의 도일은 앞쪽만 바라보고 있다.
호송차는 다시 신호에 걸려 멈추어 섰으므로 짜증이 난 듯 도일이
무어라고 혼잣말을 했다. 호송차는 앞쪽에 두 대의 경찰 모터 사이클
이 인도하고 있었지만 그들도 별수가 없다.
"당신이 김원국의 정부라던데, 사실이야?"
마티유가 다시 물었다. 그리고는 이제 대답 듣기를 포기한 듯 말
290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을 이었다.
"김원국이는 잔혹한사내라던데,신문을 보니까 말이야."
‥‥‥
"이번에 북한 대사와 일본 정보 요원을 납치해서 떠들색하게 만든
것, 알아?"
"마티유, 입 닥쳐."
마침내 도일이 머리를 돌리고 말했다. 40대 초반의 머리가 벗겨진
사내였는데 횐 틸이 섞인 콧수염을 정성스럽게 기르고 있다.
"축구 이야기나 하란 말이다. 그 여자는 건드리지 마."
마티유가 입술을 찌푸렸으나 더 이상 말을 걸지는 않았다.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도일이 무전기를 들고는 경시청과
몇 마디 통화를 하더니 금방 끊었다. .1들은 구치소를 나와 시테 섬
에 있는 경시 청으로 가는 중이었다.
호송차의 머리통만한 창문 밖으로 보도를 걷는 행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밝은 햇살에 눈이 부셨으므로 박은채는 실눈을 한 채 창 밖
으로 시선을 주었다.
강변 도로가 사거리 건너로 다가왔을 때 도일은 입맛을 다시면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9시 셀랄이었으므로 10시의 도착 시간까
지는 겨우 맞출 수 있을 것 잘았다. 호송차는 속력을 내며 달려갔고
사거리는 50미터쯤 앞이었는데 아직도 파란 불이었다.
앞을 달리는 두 대의 모터 사이클이 속력을 내었으므로 호송차는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 뒤쪽의 마티유와 테드는 이제 축구 이야기도
지친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형님만을 부르면서 B9t
그는 힐끗 백미러로 박은채를 바라보았다. 처음 차에 올랐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화장기 없는 창백
한 얼굴의 미모와 흔들리지 않는 의연한 그녀의 자세는 시민들의 호
기심을 촉발시켰고 매스컴의 표적이 되어 있다. 그는 경시청 입구에
지금쯤 수십 명의 기자들이 몰려 있을 것을 생각하자 짜증이 났다.
사거리가 다가왔다. 아직도 푸른 신호등이어서 모터 사이클 두 대
는 곧장 사거리의 중심으로 직진해 들어섰다.
차량의 통행은 줄을 잇고 있었지만 진행 속도는 빠르다. 그러자
갑자기 호송차가 오른쪽으로 급회전했다. 우측길로 꺾여져 들어선
것이다. 타이어의 마찰음이 요란스럽게 났고 차체가 오른쪽으로 크
게 기울면서 호송차는 우측길로 20미터쯤 달리다가 길가에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이야?"
놀란 도일이 운전사를 돌아보았다.
"타이어가."
운전사가 말하면서 창문 밖으로 머리를 뽑아 타이어를 바라보았
다. 도일도 무의식중에 뒤쪽을 돌아보았다. 모터 사이클이 사거리를
넘어가 버린 것이다. 이쪽으로 돌아을 재주는 없다.
"젠장. "
그가 마악 욕설을 뱉었을 때 그의 옆쪽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는 동양인 하나가 그를 밀치면서 들어섰고 운전석 쪽에서도 동양인
한 명이 뛰쳐 들어왔다. 모두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권총이다.
"움직이지 마!"
호송차가 떠나갈 듯한 고함 소리가 났고 마티유가 엉겁결에 옆구
292 밤의 대통령 제3부 -lB
리의 권총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가 '퍽!' 하는 권총의 발사음과 함께
차 바닥으_로 굴러 떨어졌다.
"빨리 달려!"
권총의 총구를 운전사의 이마에 댔 사내가 다시 소리쳤다.
"달리란 말이야!"
호송차는 차량들을 헤치며 속력을 내었다. 백 미터쯤 달려나가자
우측으로 꼬부라진 주택가의 골목길이 보였다.
"우측으로!"
호송차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우측으로 꺾어져 들어갔다. 그러
자 도일은 길가에 주차된 검정색 BMW를 보았다.
"저 차 뒤에 세워라!"
호송차는 BMW 뒤에서 급정거를 했다.
"문을 열어라!"
권총의 총구가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테드는 뒤쪽의 문을
열었다.
"열쇠 !"
그는 쓰러진 마티유의 저고리 주머니에서 수갑의 열쇠를 꺼내 들
었다. 그러자 호송차의 뒷문이 바깥 쪽으로 벌컥 열리면서 거구의 동
양인이 눈을 부라리며 안쪽을 훌어보았다.
박는채가 엄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고 테드의 손에서 열쇠를 움켜
쥔 조웅남이 그녀를 부축해서 내리고는 밖에서 문을 잠갔다.
"죽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고동규가도일의 권총을 빼내면서 말했다. 그는 도일의 주머니에
꽃힌 무전기를 보고는 그것도 빼내어 손에 쥐었다.
(3)
"이런 일에 목숨을 걸 건 없잖아? 안 그래?"
"너도 마찬가지야."
운전석으로 밀치고 들어왔던 박남호가 운전사인 알랭 고마드에게
말했다. 호송차의 키를 빼낸 박남호는 차에서 내리면서 문을 세차게
닫았다.
반대쪽의 고동규가 뛰어내리면서 차를 돌아 뒤쪽의 BMW로 달려
갔다. 박남호는 발을 떼면서 호송차의 앞바퀴를 향해 권총의 방아치
를 당겼다.
알랭 고마드와의 약속이었다. 그는 이미 20만 달러를 받았지만 타
이어가 펑크 난 증거를 만들어 주기로 한 것이다.
BMW가 배기통으로 흰 증기를 내뿜으며 달려오는 그들을 기다리
고 있었다.
그 시간의 슈프랑 거리에 있는 소르본 병원.
대리석의 2층 건물인 소르본 병원은 규모는 작았지만 첨단 의료
기기를 장치한 현대식 병원이었고 미 대사관 직원의 전용 병원이기
도 했다.
2층으로 향하는 대리석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올라 복도 안쪽의
특실로 다가가던 매클레인은 마침 방에서 나오는 닥터 다니엘과 마
주쳤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가 묻자 다니엘이 머리를 저었다.
"위험합니다. "
"수술은?"
294 밤의 대통령 제8부 -및
"말씀 드렸다시피 불가능합니다. "
다니엘이 헝클어진 흰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긁어 올렸다.
"피를 너무 흘렸어요.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매클레인 씨,"
뒤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매클레인의 부하들이 그들을 둘
러쌌다.
"지금 누군가를 찾고 있는데."
다니엘이 방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부른 겁니다. "
매클레인은 그를 제치고 방으로 다가갔다. 특실 문을 열고 들어서
자 환자를 내려다보고 서 있던 간호원이 머리를 들었다.
"누굴 부릅니다. "
그녀의 옆에 선 매클레인이 김칠성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얼굴
이었지만 눈은 똑바로 뜨여져 있다. 그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치자
김칠성이 입술만 움직였다.
"우리 형님을 보고 싶다. "
영어다 그의 말은 정확했고 아직도 힘이 실려 있었다.
"매클례인, 우리 형님을 불러 다오."
"김원국 씨 말인가?"
"그렇다. "
"그 사람은 이곳에 을 수가 없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위험하
단 말이다. "
김칠성이 입을 다물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시선을
견디다 못한 매클레인이 머리를 돌리자 아래쪽에서 가늘고 긴 한숨
형님만을 부르면서 295
소리가 들렸다. 김칠성이 뱉는 숨소리였다.
"김, 할말이 있는가?내가 전해 주겠다. "
그가 서두르며 말하자 김칠성이 다시 눈을 부릅떴다.
"형님."
한국말이다.
"김, 뭐라고 했나?"
"웅남 형님."
"영어로 해봐, 내가 전해 주마."
그러자 김칠성은 더욱 눈을 부릅떴다.
"형님, 형님!"
그리고는 목구멍에서 컥 소리가 들리면서 목이 뒤로 젖혀졌다. 그
러나 아직도 두 눈을 부릅뜬 얼굴이다. 간호원이 서둘러 그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바로 눕히고는 시트를 끌어다 목까지
덮었다.
"돌아가셨습니다. "
"도대체 뭐라고 한 거야? 행임이 뭐야?"
매클레인이 둘러선 부하들을 바라보며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간호원이 김칠성의 부릅뜬 눈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
러나 그의 눈꺼풀은 다시 솟구쳐 올라간다.
어두운 표정으로 김칠성을 바라보던 매클레인이 몸을 돌렸다.
"이자는 끝까지 날 믿지 않은 것 같군."
응접실로 들어선 조웅남은 김원국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에게서
술 냄새가 풍겨 왔으므로 김원국·은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296 밤의 대통령 제3부 -르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지희은과 박은채는 방에서 쉬고 있
는 모양이었고 고동규와 박남호는 밖에 나가 있었다. 마외 씨의 가족
들도 방에 있는지 집안은 조용했다.
조웅남이 눈을 점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반쯤 벌려져 있
는 데다가 술기운으로 눈은 충혈된 헝클어진 얼굴이었다.
"형님, 무신 일이오?"
지친 듯한 목소리였으므로 김원국은 침을 삼켰다.
"칠성이가 죽었다. "
조웅남은 눈을 꿈택이며 그를 바라볼 뿐 헤벌린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방금 매클레인한테서 연락을 받았다. 쇠약해져서 고통 없이 죽었
다고 했다. "
"시체는 매클레인이 책임지고 한국으로 보내 준다고 했어."
"뭐, 헐 수 없지 머 ."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웅남이 말했다.
"죽을 줄 알었어, 나도."
이제는 김원국이 잠자코 탁자 위를 내려다보았다. 조웅남이 말을
이었다.
"새벽에 봉게 갸 눈깔이 맛이 갔더라고."
"그 말 헐라고 불중 거요?"
"그리고 오늘 밤에 우린 서울로 간다. "
"감시다. "
형님만을 부르면서 297
"매클레인이 우릴 데리러 올 것이다. 우린 미 공군 기지로 가서 공
군기로 간다. "
"그럼 준비해라."
자리에서 일어선 조웅남이 응접실을 나서다가 힐끗 김원국을 바라
보았다. 마침 그의 됫모습을 바라보던 김원국과 시선이 부딪쳤고 그
들은 서둘러 시선을 비됐다.
방에 들어선 조웅남은 창가에 놓인 의자로 다가가 천천히 몸을 내
려놓았다. 탁자 위에는 조금 전까지 마시다만 위스키가 반 병쯤 남
아 있었지만 그는 시선만 줄 뿐으로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이제 그
의 입술은 굳게 닫혀졌고 눈의 초점도 또렷하게 잡혀져 있다.
두 손으로 깍지껴 몸을 잡고 의자에 둥그렇게 굽힌 채 그는 손끝
하나 까닥 하지 않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시선은 이제 술병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술병을 뚫고서 끝없이 뻗어 나가는 시선이었다.
집안에서 누군가가 발자국 소리를 내며 걸었고 주방 쪽에서 달그
락거리는 소리도 들려 왔다. 먼 쪽에서 자동차의 엔진 소리도 들렸다
가 사라졌다.
이윽고 조웅남은 입술을 열었다.
"그려, 병원에서 죽었응게 다행이여."
가늘고 약했지만 자신의 말소리여서 그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딴 놈들은 객사했는디 호강이지 머 ."
밤 9시 아미템 근처의 미 공군 기지 휴게실 안.
토요일 밤이어서 휴게실은 텅 비어 있었는데 파일럿들이 아미앵이
298 밤의 대통령 제3부 -lU
나 파리로 여자를 찾아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김원국과 마주앉은 매클레인이 머리를 들어 휴게실을 둘러보았다.
구석의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앉아 위스키를 들이키는 조
웅남의 모습이 먼저 보였다. 그 앞쪽으로 고동규와 박남호가 창가에
나란히 앉아 활주로의 등불을 바라보고 있다
지희은과 박은채는 바로 옆쪽에 앉아 있었다. 이쪽에 시선을 주고
있었던지 매클레인의 머리가 그쪽으로 돌려지자 제각기 몸을 돌렸
다.
김원국은 박은채의 탈주 사건으로 프랑스 매스컴을 마지막까지 장
식하고 떠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의 주인공은 이번에도 안톤 모리스
였다. 박은채를 탈취해 오자 헤어지는 기념으로 조웅남은 박은채를
둘러싼 자신들의 사진을 찍게 해주었던 것이다.
미우라와 현만식, 김동선 등은 눈을 가린 채 차에 싣고는 파리 교
외에 버리고 왔으므로 그들은 아마 지금쯤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
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10만 달러를 받은 마외 가족은 그들과 만난 일도 없었고 들은 적도
없다고 할 것이다.
"오산에 도착하면 흥 대위가 당신을 맞을 겁니다. 그는 웨스트 포
인트를 나온 한국계 미군이오."
매클레인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 요원이기도 합니다. 그가 당신을 안내할 겁니다.
"한국은 내 고향이오, 매클레인 씨. 안내는 필요없어요."
"압니다. 내가 잘못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연락원입니다. "
제트 전투기가 바로 머리 위를 지나갔으므로 그들은 잠시 말을 멈
형님만을 부르면서 299
추었다.
"김 선생, 미스터 김이 죽은 것을 당신 부하들에게 말해 주었습니
까?"
그가 묻자 김원국의 시선이 조웅남에게로 돌려졌다.
"한 사람한테 만은."
"Ot4t."
매클레인도 그의 시선을 따라 조웅남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렇습니까?"
"그는 꼭 알아야 할 사람이니까."
머리를 끄덕인 매클레인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김 선생, 한국의 상황을 대충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
"이제 군말은 레겠습니다. 우리가 왜 당신들을 돕고 있는지도 짐
작하시지요?"
"대충은."
"우방이니 동맹이니 그런 말도 랩시다. 당신한테는 나도 직설적으
로 말하고 싶으니까요. 당신 대통령은 정치적인 술수를 부리다가 지
금 일본에게 몰려 있습니다. "
매클레인이 김원국에게로 바짝 다가 앉았다.
"상패적으로 우리 미국의 영향이 한반도에서 약화되고 있지요. 우
린 어떤 계기가 필요합니다. 그 계기를 만드는 데 당신의 도움이 필
요하구요."
"대통령은 평화 회담에 미국도 참가시키면서 일본을 견제시키던
01. "
300 밤의 대통령 제3부 -lH
매클레인이 머리를 저었다.
"약해요. 솔직히 말해서 우린 일본에게 주도권을 앗겼습니다. "
"대통령을 도와서 우리를 밀어 주시오. 한국은 반일 감정의 뿌리
가 깊은 나라입니다. 당신이 강하게 한번만 더 터뜨려 주면 일본은
다시 제트기의 소음으로 그는 말을 멈추고 맥주 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김 선생, 이건 당신의 대통령과 당신들의 조국을 위한 일입니
tl."
"생각해 줘서 고맙소, 매클레인 씨."
"일본은 곧 이을설에게 일본군을 주둔시킬 것이고 머지 않아 김정
일에게도 병력을 파견할 계획입니다. 이을설에게는 이미 특사가 가
있고 김정일로서도 혼자만 고립되지 않으려면 일본군을 받아들여야
할 거요."
"한반도의 세 동강이가 난 지역에 모두 일본군이 주둔하게 된단
말이오, 김 선생."
"일본군이 아니면 미군이겠지."
"당신도 알다시피 우린 한반도에 대해선 집착하지 않습니다. "
비웃는 듯한 김원국의 말에도 매클레인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단순하지만 집념이 강한 성격이다.
"일본의 영향력을 배제하자는 것,그것이 우리의 지금 목표이고
아마 당신도 동의할 혹표일 것입니다, 김 선생."
형님만을 부르면서 301
비행기 안, DC -9을 개조해서 만든 군인 전용 수송기 안이다.
좌석은 백여 개가 되었지만 승객은 김원국의 일행과 CIA 요원으
로 보이는 서너 명의 사복 차림이 전부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먹장 같은 어둠 속으로 제트기는 굉음을 내며 날아갔는데 마치 소리
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창가의 좌석에 앉아 머리를 창틀에 기댄 김원국은 눈을 감고 있었
다. 제트 엔진의 분사 음으로 귀가 먹먹해 왔지만 기내에서 들리는 소
음도 모두 귀에 들렸다. 고동규와 박남호에게 무어라고 야단을 치던
조웅남은 잠이 들었는지 조용했고 통로를 오가던 병장 계급장을 붙
인 흑인 승무원도 이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미앵을 출발한 지 두 시간이 되었으므로 비행기는 아마 지중해
위에 떠 있을 것이다.
통로로 다가오는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그의
옆쪽에서 발자국 소리는 멈추었다.
"주무세요?"
박은채의 목소리였다. 눈을 뜬 김원국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버롯처럼 아랫입술을 물었다.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했어요."
"여기 앉아."
김원국이 바로 앉으며 옆자리를 눈으로 가리켰다. 뒤쪽 좌석에서
는 이제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통로에 나선 사람도 없다. 자리에
앉은 박은채에 게서 엷은 비누 냄새가 풍겨 왔다.
"제가 일찍 떠나지 않아서 괴로움을 끼쳐 드렸습니다. "
박은채의 검은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302 밤의 대통령 제3부 -방
"도움도 되지 못하고."
"이제 그만."
김원국이 머리를 숙여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런 말 할 필요는 없다. "
그는 손을 뻗어 박은채의 턱 밑을 손가락 끝으로 잠깐 쓸었다.
"너는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어."
숨을 커다랗게 들여마신 박은채가 가슴을 부풀린 채 움직이지 않
았다. 그러자 김원국이 가늘게 긴 숨을 내쉬었다.
"이제 자리로 돌아가 쉬어."
그러자 박은채가 머리를 들었다.
"지금이라도 제가 만탄 섬에 가도 되겠어요?"
"서울에 내리면 바로 그곳으로‥‥‥‥
"안돼 ."
김원국이 머리를 저었다.
"그곳은 네가 잠간 몸을 숨길 곳이지 살 곳이 아냐."
"돌아가."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선 박은채는 뒤쪽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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