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5. 탈출

오늘의 쉼터 2015. 1. 1. 12:26

5. 탈출 

 

 

(1)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
리가 날카롭게 들려 오고 있었다. 습기를 떤 바람이어서 유리창에는
점점이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중력을 이기지 못한 방울은 아래로 미
11러져 내려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래충에서 조웅남의 목소리가 들려 나왔지만
지금은 그도 방에 들어간 모양이다. 집안은 조용했고 오직 바람 소리
만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들려 왔다.
   창문의 커튼을 내린 김원국은 몸을 돌려 방안을 바라보았다. 목제
침대 한 개와 사각렁의 조그만 테이블이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
는 이 방은 아마 손님이나 일꾼들이 쓰던 방일 것이다. 벽에 걸린 금
이 간 거울이 유일한 장식이었는데 윗부분에는 색연필로 무어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그는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풀어 놓은 손
                                                 파리 탈출 167
목 시계의 침은 밤 10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먼곳에서 땅이 울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고 그것은 곧 차동
차의 엔진 소리로 바뀌었다. 바람 소리에 섞인 차 소리는 오히려 친
숙하게 느껴졌는데 아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광과 고
동규가 다케무라의 안내로 시내에 다녀오는 것이다.
   차 소리는 저택 아래쪽에서 멈추었고 곧 현관문 열리는 소리,발
자국 소리가 집안의 정적을 깨었다. 아래층에 있던 조웅남의 목소리
도 섞여 있다. 그들은 계단을 울리며 2층으로 올라오더니 노크 소리
와 함께 김원국의 방으로 들어섰다. 앞장선 것은 고동규였고 최광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다녀왔습니다. "
   고동규가 말하자 김원국은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며 최광을 위해
의자를 앞쪽으로 밀어 놓았다.
   "수고하셨습니다. "
   "천만에. 당연한 일을 한 것이지."
   의자에 지친 듯 몸을 내려놓으며 최광이 말했다. 그는 다케무라의
주선으로 시내에 나가 이을설에게 전화를 하고 오는 길이다.
   "이미 이을설 동지는 남조선측에 연락을 해놓았더군. 앞으로 몇
시간 뒤면 남조선 군이 원산까지 올라가게 될 것이오."
   "이을설 차수가 누구에게 연락을 했습니까? 대통령입니까?"
   "아니, 청와대에 할 필요는 없지. 이영만 씨를 설득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테니까. 작전을 아는 군인들이 그를 이해시키는 것이 낫습
니다. 그래서 이케다 소장에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디다. "
   머리를 끄덕인 김원국이 고동규를 돌아보았다.
168 밤의 대통령 제길즌 -템
   "다케무라 씨는?"
   "시내에서 준비할 것이 있다고 남았습니다. "
   최광이 주름진 얼굴을 들어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김 선생, 이번 일은 남조선측이 너무 서둘렀던 것 같소. 난 이영
만 씨가 김정일의 제의를 검토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
   "그렇습니까?"
   "우리가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남조선측에 등을 돌린 것이
아니지 않소?우리 덕분에 당신들은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단
말이오."
   ".
   "우리들은 김씨 부자의 세습 독재를 끝내고 자연스럽게 개방을 하
여 통일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두었습니다. 그것이 남조선측에게
도 바람직한 순서라고 알고 있었단 말이오. 우리도 당신들의 통일 논
리에 익숙해 있으니까."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분입니다. 국가를 전쟁의
공포 속에 너무 오랫동안 두었다고 생각하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
   "그래서 다시 예전의 대치 상태로라도 돌아가자는 거였소? 김정일
의 평화 회담 제의가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도 모론단 말이오?"
    최광의 얼굴 근육이 가볍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래서 우리들을 배신하고 김정일이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려고
했던 거요?"
   "심한 말 같지만 이.영만은 김정일이와 같은 종류의 독재자요. 오
늘의 손톱만한 이득을 위해서 어제의 적에게 붙는 행태를 보시오.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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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똑같이 주고받고 하는 것을 보란 말이오."
   입맛을 다신 김원국이 머리를 돌리자 딴전을 피우고 있는 고동규
가 보였다.
   최광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우리가 열어 준 통로로 연합군이 올라오겠지 만 우리는 이
영만 씨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에게만 말해 주는
것이오."
   들판에 위치한 저택은 2층 목제 건물이었는데 아래층에는 거실과
주방, 응접실, 아이들의 놀이방이 있었고 2층은 지붕 밑의 창고와 양
쪽에 두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저택의 뒤쪽에는 농기구와 수
확물을 저장하는 대형 창고가 바람막이처럼 뒤쪽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주위는 5천 평이 넘는 사과나무 과수원이었고 그 너머에는 잔 나
무와 자갈이 깔린 황량한 들판이 이어진다. 저택의 앞마당에서부터
과수원을 뚫고 직선으로 뻗은 길을 2킬로미터쯤 나아가면 이차선의
f·도가 나온다. 간간이 승용차들이 지나는 한적한 길이었는데 왼쪽
이 국경으로 가는 길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빗방울은 굵은 빗줄기로 바뀌어서 최성산이 경비
교대차 현관을 나섰을 때에는 비바람 때문에 눈을 뜰 수도 없을 지경
이었다. 2시 5분전이었다.
    집주인이 입던 우의를 걸친 덕분에 얼굴만을 비로 적시면서 그는
앞마당 끝에 주차된 자은 도요타 승용차로 다가갔다.
   온통 먹물을 뿌린 듯한 어둠 속이었지만 저택에서 비치는 희미한
170 밤의 대통령 제3부 -트
불으로 차체의 철판이 번들거리는 덕분에 그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었다. 최성산이 도요타로 다가가자 차의 앞쪽 문이 안에서 벌컥 열
렸0.
   "비가 세게 내리는구만. 어서 들어가."
   그런 말을 하면서 밖으로 나온 것은 김 칠성이다.
   "당신이나 나나 말년에 객지에서 고생이 많아."
   그러고는 김칠성이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는 마당을 건너 현관 목
으로 달려갔다.
   최성산은 운전석에 들어가 앉아 온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었다. 말
년이란 남조선 말로 조선 왕조의 말년이나 박정희 정권의 말년과 비
슷한 의미의 단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둘째로 치더라도 김칠
성의 말년이란 무엇인가가 궁금해졌다. 깡패 생활의 말년인가, 아니
면 객지의 고생 말년인가.그의 머리속에는두 가지밖에 아직 떠오르
는 것이 없다.
   하품을 반쯤 하다가 삼키고 난 최성산은 흐린 유리창 밖을 바라보
았다. 앞유리에 가득 붙어 있는 물방울밖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윈도
브러시로 닦아낼까 하다가 그러기 위해서는 시동을 걸어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유리창을 닦아낸다고 해도 앞에 보이
는 건 어둠뿐이다.
   손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던 최성산은 숨을 깊게 들여마시
고는 천천히 뱉어내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문의 손잡이를 쥐었다.
차 밖으로 나오자 세찬 렛줄기가 온몸을 때렸으므로 그는 머리를 숙
이고는 저택의 옆쪽으로 뛰어갔다. 대문도, 담장도 없는 과수원 집의
경비를 본격적으로 하려면 1개 소대의 병력으로도 모자랄 판이었다.
                                                 파리 탈출 171
   저택의 뒷마당으로 들어서자 고여 있던 울에 구두가 금방 젖었다.
지대가 낮아서인지 물이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발을 몌
면서 그는 뒷마당을 가로질러 창고의 앞으로 다가갔다. 반쯤 열려진
창고의 안에서는 비린 건초 냄새가 풍겨 나왔다. 몸을 돌린 그는 창
고의 처마밑에 붙어 서서 앞쪽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주방과통하는 뒷문은 이미 닫혀 있었고 불도 꺼져 있었지만 2층
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불빛이 뒷마당의 일부분을 비추고 있었다. 몸
을 돌린 최성산은 창고의 안으로 들어섰다. 비린 냄새와 함께 후끈한
기운이 피부에 닿았는데 습기에 건초가 색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의를 벗어 던지고는 발을 들어 주위를 짚어 보았다. 밟히
는 것은 물컹한 건초더미뿐이다. 어둠 속이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았지만 낮에 눈에 익혀 두어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그는 건초 더미에 몸을 묻고 앉아 다시 길게 숨을 내쉬었다. 혁떠
에 끼워 넣은 베레타가 허리에 걸렸으므로 고쳐 찌르고는 그는 이제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았다.
   2충의 계단을 내려온 최광이 막 주방의 안으로 들어섰을 때 뒤쪽
에서 인기척이 났다.
   "저, 무얼 드시려구요?제가."
   지회은이 뒤쪽에 서 있었다.
   "아,주스나 아니면 시원한 냉수라도.갈증이 나서."
   "그럼 잠간 기다리시겠어요?오렌지 주스가 조금 남아 있어요."
   그녀가 냉장고를 열고 주스를 잔에 따르는 동안 최광은 식탁의 의
자에 앉아 기다렸다. 지희은이 주스잔을 들고 다가왔다.
172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고맙소.나 때문에 잠을 갠 건 아니오?"
    최광이 잔을 받아 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녜요.자지 않고 있었습니다. "
    "그렇다면 다행이군."
    주위를 둘러보며 최광이 말했다.
    아래충 거실과 응접실에 나누어 들어간 조웅남 등은 잠이 들었는
지 조용했다. 지회은은 주방 옆쪽의 어린이 놀이방을 침실로 쓰고 있
었다.
    최광이 턱으로 식탁의 앞쪽 자리를 가리켰다.
    "잠깐 나하고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소?"
    "네 . "
   지회은이 자리에 앉자 최광이 한모금 주스를 마시고는 잔을 내려
놓았다.
   "내가 듣기로는 부친이 우리 공화국의 요원들에게 피살당했다던
데, 유감이오."
   "최 대좌한테서 들었소. 당신이 고생했던 이야기도."
   "지난 이야기예요.저는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없습니다. "
   최광이 머리를 끄덕였다.
   "통일이 되면 평양으로 오시오. 나도 그때에는 할 일 없는 사람이
되어 있을테니까 내가 구경 많이 시켜줄 수 있소."
   "고맙습니다. "
   "전쟁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실제로 피해를 입는 인민의
입장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야."
                                                 oH탈출 173
   혼잣소리처럼 그가 말했다.
   "아무리 마음을 비운다고 해도 나같이 나이 든 사람이 되면 저도
모르게 굳어진 아집과 욕심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아."
  "남조선의 이영만 대통령을 만나게 되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겠어. 그 사람에게 몇 마디라도 통일 사업을 조언해 주는 것이 지
금의 가장 나에게는 큰 꿈이야."
   건초 더미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있던 최성산은 눈뭉치가 웅덩이
에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러자 다시 철벅이는 소리가 계속해
서 들렸다. 저도 모르게 상반신을 일으킨 최성산은 창고의 문 쪽을
쏘아보았다. 눈뭉치가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다. 웅덩이를 밟는 발자
국 소리인 것이다.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및소리에 섞인 발
자국 소리는 여럿이었다.
   뻗뻗하게 굳힌 몸을 건초 더미 속에서 일으키면서 최성산은 허리
춤에 꽃은 베레타를 꺼내어 쥐었다. 온몸에 선뜻한 기운이 훌고 지나
가는 듯했고 가슴의 고동 소리가 밖에까지 들릴 것같이 크게 뛰었다.
철벅이는 소리는 잠시 그쳤다가 다시 이어졌는데 하나 둘이 아니다.
그리고 웅얼거리는 듯한 그들의 말소리도 귀에 들렸다.
   최성산은 베레타의 안전 장치를 풀고는 문을 향해 한걸음 발을 떼
었다. 부스럭거리며 건초가 발에 밝혔고 다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
자 문틈 사이로 저택 2충의 불빛이 보였다. 그는 다시 한걸음 나아가
창고의 문짝에 몸을 붙였다. 이제 빗소리에 묻혀 발자국·소리는 들리
지 자았다.
174 밤의 대통령 제3부 -및
   다급해진 그는 열려진 문틈 사이로 머리를 내어 밀었다. 그러자
뒷마당에서 어른거리는 서너 개의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들은 이
쪽에 둥을 돌진 채 주방의 됫문 쪽으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숨을 들여마신 최성산은 한쪽 무릎을 천천히 꿇고는 그림자를 향
해 두 손으로 베레타를 겨누었다. 시야에 들어온 검은 그림자는 셋,
아니 또 하나가 나타났으므로 넷이다. 그는 좌측에 선 사내를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리자 최광과 지희은은 번쩍 머리를 들었고 다시 연속으
로 총성이 울리자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응접실과 거실에 있던
김칠성과 고동규, 조웅남이 뛰쳐나왔는데 모두 눈을 치켜뜬 얼굴이
었다.
   "형님."
   조웅남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첫마디의 말이다. 그는 최광을 스치고
지나 계단을 뛰어오르다가 2충에서 내려오는 김원국을 보고는 멈추
어 섰다.
   총탄이 날아와 뒤쪽 주방의 유리창을 깨었다. 그 순간에 김칠성이
응접실의 전등을 껐고 고동규가 주방으로 달려가 주방의 불을 」1자
집안은 먹물 속 같은 어둠에 묻혔다. 총성이 다시 요란하게 울리면서
뒤쪽의 벽을 뚫고 들어와 무엇인가를 깨뜨렸다.
   "앞쪽이 비었다!"
   김칠성이 소리쳤다.
   "잠간만 기다려 !"
   그것은 김원국의 목소리였다.
                                                파리 탈출 175
   "불을 켜라!"
   김칠성이 스위치 옆에 있었는지 응접실의 불을 켜자 그 순간 집안
의 사람들은 현관문으로 들어서는 검은 복면의 사내들을 보았다. 허
리를 굽힌 ÷1들은 마악 좌우로 갈라서려 는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탕, 탕, 탕."
   고동규와 김칠성이 쥐고 았던 권총에서 일제히 불을 뿜어져 나왔
다. 사내들은 온몸을 비틀면서 쓰러졌는데 그중 한 사내가 쓰러지는
순간에도 이쪽으로 기관총을 쏘아 제쳤다.
   "타타타타타,"
   응접실과 주방의 가구와 유리 =1릇이 어지러운 소리를 내며 깨어
졌다. 김원국이 튕기듯이 일어나 쓰러진 사내에게로 다가가더니 손
에 쥐고 있는 기관총을 빼앗아 들었다.
   "불을 꺼라!"
   다시 집안은 코앞의 사물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에 묻혔다.
뒤쪽에서 요란한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가 멈추었다. 다시 권총의 발
사음이 들리자 김원국이 소리쳤다.
   "뒷문으로! 동규와 칠성이가 먼저 나간다. 어서!"
   김원국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동규와 김칠성이 주방의 됫문
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최 부장님, 어디 계시오?"
   김원국이 숨가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있습니다. "
   의외로 가까운 곳이다.
   "나가십시다. "
176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난 다리에 유탄을 맞았소."
    최광의 말투는 침착했지만 옆쪽에 엎드려 있던 지회은줴게는 체념
한 것처럼 들렸다.
   "웅남아! 네가!"
    김원국이 짧게 소리치자 우당탕거리면서 조웅남이 일어나는 소리
가 들렸다.
   "타타타타타."
   그 순간페 김원국이 어두운 현관 쪽을 겨냥하여 기관총을 쏘아 갈
겼고 조웅남의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 왔다.
   "형님, 나 먼저."
   최광을 들쳐맨 조웅남이 소리쳤다. 다시 우당탕거리며 집안이 울
렸다. 그가 뛰쳐나가는 것이다. 뒤쪽에서 다시 요란한 총성이 을려
나찼다.
   "지회은이, 어디 있어?"
   김원국의 목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어디야?"
   "여기 있어요."
   지희은은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면서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앞장을 선
것은 고동규였고 그의 뒤를 최광을 한쪽 어깨에 멘 조웅남이 따르고
있다. 지회은은 얼굴의 빗물을 손바닥으로 훔쳐내었다.
   빗발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끈질기게 퍼붓고 있다. 온몸의 열기
가 조금씩 식어 가면서 식은 부분은 얼음덩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파리 틸출 177
지희은은 이를 마주치며 온몸을 떨었다. 그래도 바지에 스웨터를 입
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앞쪽의 조웅남은 씨근거리는 숨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기운차게 앞
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어깨 위에 걸쳐진 최광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지희은은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
리를 내면서 다가오는 그림자는 김원국이었다. 김칠성과 최성산은
창고 뒤쪽에 모였을 때에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김원국이 대열의 끝
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나무숲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얼음 줄기 같은
빗발을 맞는 피부는 이제 감각이 없다. 목구멍으로 쇳소리를 내며 걷
던 지희은은 나뭇가지에 발이 걸렸는지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뒤
쪽에서 김원국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으나 그녀는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일어나."
    옆으로 다가온 김원국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희은이 대답이
없자 김원국은 그녀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상반신을 일으켜 세
웠다.
    "이런, 몸이."
    그녀의 이마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 김원국이 놀란 듯 말했다.
    "옷을 이것밖에 안 입었다니."
    지희은은 입을 벌렸으나 이만 마주쳐질 뿐 말이 뱉어지지는 않는
다. 그러자서들러 입고 있던 파카를 벗은 김원국이 그녀의 언 몸을
감싸 주었다.
178 밤의 대통령 제3부 -111
   "자,가자."
   그녀를 번쩍 안아 든 김원국은 발을 떼었다. 텟발이 세차게 얼굴
에 뿌려졌지만 체온이 남아 있는 파카가 따뜻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지회은은 의식을 잃었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나무숲에 가린 조그만 창고였다. 자은 농기구
와 쓰다 남은 비료가 한쪽에 쌓여 있는 것을 보면 부근에 농가가 있
을 것이었다.
   조웅남이 최광을 벽에 기대 앉혀 놓고는 허리를 폈다. 아직 짙은
어둠 속이었지만 이제 어둠에 익숙해져서 사물의 윤곽은 보인다
   "두 시간은 족히 걸은 것 같은디, 형님."
   지희은을 내려놓은 김원국이 시계를 보았다. 야광침이 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 두 시간을 걸었다. "
   "그렇다면 10킬로는 걸었을 거요. 근디 여그가 북쪽여 남쪽여?"
   김원국이 문 앞에 기대 서 있는 고동규를 돌아보았다.
   "근처에 민가가 있는가 알아보아라."
   "예, 형님 "
   고동규가 그림자처럼 어둠에 묻혀 사라지자조웅남이 부스럭거리
며 다가왔다.
   "나도 칠성이 찾으러 갈라요."
   "어딜 간단 말이냐?"
   "온 길을 되짚어서 갔다가 올 거요."
   "여기 있어."

 

 

 

(2)
 

 

 

   파리 탈출 179
   "형님이나 있으쇼."
   그의 옆을 지나려는 조웅남의 어깨를 김원국이 움켜쥐었다.
   "웅남아, 기다리라고 했다. "
   "가서 송장이라도 지고 와야지 "
   조웅남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 씨발놈은 우리한티 길 터줄라고 남었던 거요."
   "빠져 나갔을지도 모른다. "
   "좌우당간 가서 확인을 헐텡게로."
   "말을 들어, 이 자식아."
   김원국이 낮으나 강한 목소리로 말하자 조웅남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동규가 을 때까지 좀 쉬어라."
   장승처럼 서 있는 조웅남을 버려 두고 김원국은 최광에게로 다가
갔다.
   "최 부장님, 괜찮습니까?"
   "김 선생, 불을 좀."
   최광이 가늘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얼굴을 비춰 주시오, 김 선생."
   김원국이 바지 주머니를 뒤지다가 지희은에게로 다가가 파카의 주
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었다. 지희은이 길게 숨을 내쉬자 문득 김원
국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제 견딜 만해?"
   "예.. "
   온몸이 뜨거운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열이 나고 있었지만 나
180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른한 느낌은 나쁜 것이 아니다.
   김원국은 최광에게로 다가가 라이터를 켰다.
   "어디, 상처를 봅시다. "
   불빛에 비친 최광의 바지는 빗물에 흠뻑 젖어 피부에 늘어붙어 있
었다.
   "여기야."
   무릎 위쪽의 다리를 가리키며 김원국이 말했다. 바지에 총탄으로
뚫린 구멍이 있다.
   "웅남아, 붕대를 지혈시켜야 된다. "
   조웅남이 두리번거리다가 마땅한 것이 없자 파카를 벗어 던지고는
셔츠를 잡아들듯이 벗었다. 옷감 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우선 지혈을 하고 병원에 갑시다, 부장님."
   라이터를 조웅남에게 들게 한 김원국은 그의 허벅다리 안쪽을 동
여매었다. 깜박이는 라이터 불 아래에서는 피와 뎃물이 구분되지 않
는다.
   "서두르면 됩니다. 걱정 마시고."
   "피를 너무 흘린 것 같소, 김 선생."
   낮은 목소리로 말한 쳐광이 희게 굳어진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해방 전쟁 때에도 총 한방 안 맞은 내가 유탄에 맞다니."
   김원국이 머리를 돌려 창고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고동규를 찾는
몸짓이다.
   "곧 민가를 찾게 될 겁니다. 그때는‥‥‥‥
   라이터가 달아올라 조웅남이 발화 버튼에서 손가락을 자 어둠
속에서 최광의 목소리가 들렸다.
                                                 파리 탈출 181
"계획된 습격이었소, 김 선생."
"우릴 습격한 놈들은 동양인이었지요?"
"그렇습니다. "
"김 선생은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
"나는 차라리 =1들이 일본농이었으면 좋겠소."
   "그래, 틀림없이 일본놈이오."
   조웅남이 다시 라이터를 켜자 창백한 최광의 얼굴이 드러났다가
불빛이 꺼지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 나왔다.
   "난 한숨 잘테니까 당신들이 떠날 때 깨워 주시오."
   고동규가 돌아왔을 때 라이터를 켠 그들은 최광이 벽에 기대고 앉
은 채 숨이 끊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잔다고 허도만 죽었는디 ."
   조웅남이 혼잣소리처럼 말하자 김원국이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가자."
   "이대로 두고 갑니까?"
   고동규가 말하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침에 프랑스 당국으로 연락을 하면 그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
   그들은 창고를 나와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이곳은
들판이 아니라 가파른 언덕이 있는 산길이었다. 빗발은 아까보다 가
182 밤의 대통령 제3부 -교
늘어져 있었지만 끈질기게 쏟아지고 있었다.
    김원국이 뒤를 따르는 지희은을 돌아보았다.
   "어때?걸을 수 있겠어?"
   지희은이 머리를 끄덕였지만 곧 어둠 속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겨
우 입을 열어 대답하자 그가 멈추어 섰다
   "업혀라."
   그리고는 그녀 앞에서 상체를 숙이는가 했더니 금방 들쳐업었다.
조웅남이 뒤쪽으로 쳐져 와서는 김원국과 나란히 걸었다. 그는 김원
국의 둥에 업힌 지희은을 본 척도 하지 않는다.
   "형님."
   낮고 굵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나는 통일이 안되더라도 칠성이가 살어 있으은 좋겄소."
"형님. "
"말해라."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요?"
"칠성이 찾을 때까지 난 아무디도 안 갈텡게 그렇게 아쇼."
"나도 안 간다. 우리를 친 놈이 누군가를 알기 전까지는."
조웅남이 마음이 놓인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형님 ."
"뭐냐?"
"갸, 무거을틴디 나헌티 넹기쇼."
"괜찮다. "
                                               파리 탈출 183
   지회은이 김원국의 등에 대었던 한쪽 뺨을 다른 쪽으로 바러 대었
다.
   "최성산이는 죽었습디다. 창고 문짝에 자빠져 있는 것을 내 눈으
로왔』요."
   조웅남이 말을 이었다.
   "서너 놈을 쏴 윅였더구만, 그 시키가."
   "그 사람 아니었으면 우리 모두 살아 남지 못했다. "
   "도대치 어떤 놈이여? 아까 영감 말대로 일본놈이 그런 거여?"
   앞장서 가던 고동규가 걸음을 늦추었으므로 그들은 곧 고와 나란
히 가게 되었다.
   아래쪽은 밋밋한 비탈이었다. 어둠에 묻힌 비탈 아래쪽으로 희끗
한 벽과 담장의 윤곽이 드러난 농가가 보였다.
   그들이 칼레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6시가 되어 있었다. 농가에서
강탈한 자은 시트로앵은 잘 달려 주었지만 텟길이었다. 백 킬로미터
밖에 안되는 칼레까지 두 시간 가깝게 걸린 것이다.
   아직 해뜨기 전의 어둑한 시가지로 들어서면서 핸들을 잡은 고동
규는 힐끗 백미러를 올려다보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댄 지희은은 죽
은 듯이 잠이 들어 있었지만 김원국과는 시선이 마주쳤다.
   "가까운 여관에 대어라. 몇 시간 쉬었다가 이곳도 떠나야 할테니
까. "
   김원국이 입을 열었다.
   "지회은이가 안 좋아."
   앓자리에 앉은 조웅남이 머리를 돌려 지회은을 바라보았다. 그들
184 밤의 대통령 제3부-교
의 말소리를 들은 지희은이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총 맞은 것도 아닌디 왜 그런다요?"
   조음남미 물었다가 김원국이 잠자코 있었으므로 입맛을 다시면서
돌아앉았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바닷가의 조그만 여관이었다. 로비에는 술병
이 굴고 있는 데다가 해어진 소파 위에는 온폼을 내팽개친 자세로
사내 한 명이 엎어져 자고 있는 험악한 곳이었다. 내의 바람의 주인
이 찌푸린 얼굴로 그들을 맞았는데 이쪽의 험한 몰골에도 눈썸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 두 개를 얻어 2층으로 올라갔다.
   김원국이 지회은을 안다시피 하고 방으로 들어서자 뒤쪽에서 따라
오던 조웅남이 눈을 점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앞에서 문
을 닫은 김원국은 지희은을 침대에 눕혔다. 밝은 불빛 아래에서 본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결은 뜨거웠다.
   로크 소리가 들렸으므로 김원국은 그녀가 걸친 파카를 벗기다가
허리를 폈다. 고동규가 방으로 들어섰다.
   "형님, 차를 버리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준비할 것이 있
습니다만."
   "여기 있다. "
   김원국이 파카의 안쪽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그에게로 건네
주었다.
   "차도 한 대 준비해 오도록 해. 얘를 데리고 다른 것 타기는 어렵
다. "
   그가 침대에 누워 있는 지회은을 턱으로 가리켰다.
    고동규가 나가자 김원국은 그녀에게로 다가가 물에 젖은 스웨터를
                                                 파리 틸출 185
벗겨 내었다. 그러자 브래지어로 젖가슴만을 가린 그녀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지희은이 가늘게 눈을 떴다가는 소리 죽여 앓는 소리를 뱉으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브래지어도 흠뻑 젖어 있었으므로 김원국이 고리
를 어 던지자 두 개의 아담한 젖무덤이 튕기듯 솟아올랐다. 이제는
그가 서두르듯 바지를 벗겨내자 지희은은 금방 팬티 차림의 알몸이
되었다.
    김원국은 침대의 횐 시트로 그녀의 몸을 감았다. 그리고는 시트
위를 손바닥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않은 시트 밑의 그녀의 몸은 뜨
거웠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흐느적거리며 흔들렸는데 반쯤벌린 붉
은 입술에서는 더운 입김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깨에서 양팔로 다시 가슴에서 아랫배와 허리를 차례로 비벼 내
려가는 김원국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지희은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힘이 들어간 두 손바닥이 허벅
지를 비비기 시작하자 시트 밑으로 그녀가 두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종아리와 발을 비비고 난 김원국은 허리를 폈다. 그리
고는 땀으로 범벅이 된 시트를 걷어 젖히자 지희은이 두 손으로 가슴
을 가리면서 눈을 떴다. 잠자코 새 시트를 그녀의 몸 위에 덮은 김원
국은 그 위에 다시 두꺼운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걷은 시트
 자락을 들어 얼굴의 땀을 닦으면서 돌아섰다.
    "이제 한숨 푹 자면 나을 게다. "
그 시간의 회양,2월 14일 오후 B시 .
186 밤의 대통령 제8부 -lfl
   제1군단 사령부의 상황실에는 수십 명의 참모들이 벽에 붙여진 대
형 지도 앞에 둘러서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은 이을설
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명만이 우릴 배신했는데 가소로운 일이다. 김정일과 손을 잡으
면 남쪽 걱정이 없는 그가 우리를 쓸어낼 줄 알고 있는 모양이야."
   그가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따라서 우리는 김정일을 상대하느라고 남조선에 신경을 쓰지 못
할 줄로 계산하고 있다. "
   입가에 웃음은 띠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은 부룹뜨여 있었다. 아
침 8시에 남조선의 정변을 들은 그는 치를 떨었다. 강백진과 양문석
등의 만류로 겨우 진정은 했지만 이제 그의 당면한 적은 턱밑에 올라
와 있는 연합군이 된 것이다.
   긴장한 얼굴의 참모들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서로 약점을 샅샅이 알고 있는 김정일과 나의 전쟁에는 어느 한
쪽이 철저히 파멸당하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된다. 따라서 나나 김정일
은 전면전을 피하면서 세력 전으로 승부를 내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
은 양쪽의 공통된 작전이었다. "
   그는 번쩍 머리를 들었다.
   "하지만 남조선은 다르다. "
    이을설의 말소리가 떨려 나왔다.
    "기회주의자에게 그가 노렸던 기회라는 것이 얼마나 큰 착오였는
지를 알려 주어야겠다. 우리는 지금부터 한 시간 후, 오후 3시 정각
에 이곳을 친다. "
    그가 지휘봉 끝으로 가리킨 곳은 215고지였다. 

 

 

(3)
 

 

 

                                                 파리 탈출 187
   "김정일이와 내일 평화 조약을 맺는 남조선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다. 지금 즉시 제15전차 사단은 215고지로 출동한다. 전차 사단이
215고지의 전방 3킬로 지점에 접근했을 때 미사일로 215고지를 폭
격한다. "
   그가 지휘봉을 내리자 강백진이 한걸음 그의 및으로 다가와 참모
들을 바라보았다.
   "제18전차 사단은 215고지의 후방 405거점으로 이동하고 51사단
은 15전차사단과 함께 진격한다. 다른 부대는 현위치에서 대기한다.
질문 사항 있나?"
   참모 하나가 손을 들었다.
   "참모장 동지, 남조선군이 김정일과 연합하여 전 전선에서 반격해
올 때의 대비책이 있습니까?"
   젊은 중좌의 눈빛이 날카로웠으므로 그것을 본 이을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자 강백진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도 중좌의 질문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중좌동무, 남조선 군은 반격하지 못한다. "
   "왜 그렇습니까?"
   "첫째로,동부 전선의 우리 인민군의 병력과 화력이 월등하기 때
문이고."
   강백진의 힘찬 목소리가 상황실을 울렸다
   "둘째로, 만에 하나의 경우에 그들이 치고 올라을 통로는 우리 동
부 전선뿐이라는 것이다. 김정일이가 중부와 서부 지역을 열어 주겠
는가?"
188 밤의 대통령 제3부-111
     "셋째로, 치고 올라온다면 미국과 일본이 반대할 것이다. 일본은
 어느 한쪽이 크게 밀리면 약자를 들는데, 그 이유를 동무는 알고 있
 을 거야. 그리고 미국은 확전을 반대할 것이 틀림없고. 그리고 중요
 한 것은."
    그러면서 강백진이 입술 끝으로 웃었다.
    "김정일이 남조선군의 북상을 반대할 것이야."
    "그렇다면 우리가 남조선을 치고 내려간다면 어떤 경우가 됩니
까?"
    이렇게 물은 것은 대좌 계급장을 단 참모였다. 그러자 옆쪽에 서
있던 양문석 상장이 나섰다.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실행할 단계는 아니다. 이번
공격으로 남조선의 반응을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
   이을설이 헛기침을 했으므로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결론을
내릴 시간이다. 그는 지휘봉으로 215고지를 두드렸다.
   "이곳의 연합군을 전멸시키고 비무장 지대까지 군을 전진시킨다.
01상."
    문에서 t3 소리가 나자 김원국은 눈을 떴다. ·의자에 앉아 깜박
잠이 들었던 것이다.
   "누구요?"
   "접니다. "
   고동금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김원국이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와."
                                                락리 탈출 189
   문에서 비껴나며 말한 김원국이 그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무슨 일이 있나?"
   "형님, 한국에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
   방으로 들어선 고동규가 서두르며 말했다.
   "시령관이 이영규 대장으로 바뀌었고 장동진 대장과 참모들은 모
두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기부장도 박종환으로 바뀌었습니
다. "
   "평화 조약은 한국 시간으로 내일 오후 2시에 서울에서 체결됩니
다 체결 현장에는 미국, 일본의 국무 장관과 군사령관들이 참석한다
고 했습니다. "
   "형님, 어젯밤 일도 이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놈들은 우리를 제거
해서 후환을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
   고동규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If71 et이f."
   침대 옆의 낡은 의자에 앉으며 김원국이 앞쪽의 의자를 가리켰다.
지희은은 곤한 잠에 빠져 있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침대에 누워 있
었다.
   "금방 말한 놈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거냐?"
   김원국이 묻자 앞자리에 앉은 고동규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이영만은 우리를 제거된 그들과 같은 부류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
니다. 더구나 이을설을 배신한 상황에서 최광을 데리고 있는 우리는
부담이 가는 존재였을 겁니다. "
190 밤의 대통령 제3부 -및
   "정부에서 시킨 일입니다, 형님."
   "최광 씨가 이 자리에 없는 것이 다행이군. "
   김원국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어젯밤의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짐작은 가지만 우릴 친 놈
들이 누군가는 아직 모른다. 동양인이라는 것밖에,"
   "우리 거처를 알고 있던 것은 일본 정보국 요원들밖에 없었습니
다. 우리는 파리의 박남호에게도 보안상 거처를 알려 주지 않았습니
다. "
   "그렇다면 일본 요원들이 우리를 쳤단 말인가?"
   "다케무라가 시내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놈이 직접 습격하지
는 않았더라도 거처를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
   "일본은 이영만의 조약 체결에 환령하는 입장입니다. 그들에게도
우리는 걸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
   "파리의 박남호에게 연락을 해보도록."
   김원국이 말차자 고동규가 눈을 점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박남호에게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우리는 이곳을 떠난다. "
   머리를 』1덕인 고동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에 나가서 연락하겠습니다. "
   고동규가 방을 나가자 김원국은 그가 놓고 간 가방을 풀어 딘자
위에 옷가지들을 내려놓았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여자용 바지와 스
웨터, 오리털 파카까지 있다.
                                                파리 탈출 191
   그는 머리를 돌려 침대 위의 지희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순간적
으로 김원국이 시선이 굳어졌다. 지희은의 시선과 마주친 것이다. 머
리만을 내놓은 채 누워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맑았고 피부는 만질거
리며 윤이 났다.
   "깨었나?"
   그가 묻자 지희은이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
   "이젠 괜찮아?"
   "예.."
   "그럼 일어나 옷을 입어라. 떠난다. "
   박남호가 전화를 받은 것은 몽마르트르 근처의 허름한 호텔방 안
에서였다. 벌거벗은 몸으로 침대를 빠져 나온 그는 비틀대며 옷걸이
에 걸린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들어 있는 휴대폰을
꺼내어 뚜껑을 열자 신호음이 그쳤다.
   "여보세요."
   허리를 펴며 침대 쪽으로 돌아선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자 저
쪽은잡시 대답이 없다 어지럽게 시트가첫혀진 침대 위에는어첫밤
에 끌고 온 혼혈 여자가 사지를 뒤튼 자세로 엎드려 자고 있었다.
   "여보세요."
   "박남호 보좌관이시오?"
    한국말이었으므로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
    "나 고동규올시다. "
192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아, 고형 ,"
   그와는 안기부 내에서의 직급이 비슷한 위치로 서울에서부터 안면
이 있던 사이다. 박남호가 다급히 물었다.
   "지금 어디 계시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당신은 숙소에도 없습디다. "
   "사정이 생겨서."
   "무슨 사정 말입니까?"
   "고형, 서울에서 일이 터졌습니다. 바로 어젯밤에 말이오."
   "나도 금방 뉴스를 들었소."
   박남호가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침 1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아, 뉴스로 나갔겠군. 난 어제 저녁에 들었습니다. 부장님과 강
동진 사령관, 그리고 참모들은 대통령에게 속아서 청와대로 들어갔
다가 당했습니다. 난 서울의 설정식 차장에게서 연락을 받았습니
다. "
   연락을 받고 김원국의 거처를 찾으려고 동분서주 하다가 새벽녘에
야 길거리에서 만난 여자를 끌고 이곳에 들어왔다. 지금은 여자와 위
스키를 몇 병 마셨는지 섹스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형, 어젯밤 내내 당신들을 찾아 수소문을 했습니다. 서울의 설
차장이 체포당하기 전에 연락을 해와서요. 설 차장은 김 선생과 최광
씨를 서울에 오게 하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
   "어젯밤 몇 시에 연락을 받았소?"
   "저녁 8시가 조금 지났을 때요. 서울 시간으로 새벽 4시경이지
요. "
                                                 파리 탈출 193
   "사건이 일어난 지 두 시간쯤 지났을 접니다, 고형."
   "늦었군."
   "그래도 설 차장은 최선을 다했소. 나에게 연락을 마치고 난 후에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끌려 갔다고 합디다. "
   "내 말은 우리에게 연락이 늦었단 뜻이오."
   "아니 내가 당신들의 연락처를 모르는데 어떡합니까? 일본 정보국
애들하고만 돌아다녔으면서 ."
   "시 바다한테도 물어 보았단 말이오.그자도 모른다고 합디다. "
   "우리는 어젯밤에 습격을 당했소. 최광은 총상을 입고 죽었습니
다. "
   숨을 멈춘 박남호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고동규가 말을 이
었다.
   "우리측의 피해가 큽니다, 박형."
   "그럼 김 선생은?"
   "무사하시오."
   "습격한 자는?"
   "그건 아직,"
   박남호는 이를 물고는 한동안 벌거벗은 몸으로 서 있었다.

온몸에 싸늘한 한기가 배어 들고 있었지만 선뜻 입을 열기도 움직이기도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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