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15고지의 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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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고지의 격전
"조금만 더 기다려, 조금만 더."
소리쳐 말한 한만규 대위는 망원경을 눈에서 떼었으나 무전기는
귀에 붙여 두고 있다. 망원경이 아니더라도 밋밋한 능선을 진격해 오
는 다섯 대의 장갑차가 내려다보였고 앞길에서 터지는 폭약으로 다
섯 줄기의 종대 대형이 화염에 드러나 있다.
그가 송화기에 대고 다시 말했다.
"내가 사격 지시할 때까지 기다려라. 아직 거리가 멀다. "
그가 지휘하는 수색 중대는 휴전선 감시 부대로 무장으로 구분하
면 경보병 중대로 분리될 것이다. 각 분대마다 한 정씩 PK 경기관총
이 지급되어 있었고 대전차 무기인 RPG-1도 분대당 한 정이다.
중기관총도 중대에 두 정 있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방어가 되지 않
는다. 본격적인 방어 진지는 5킬로미터 후방에 있는 사단 휘하의 연
대 진지들이었는데 그곳은 지하 벙커와 은폐된 참호로 연결된 견고
215고지의 격전 49
한 진지였다.
한만규는 땀이 밴 무전기를 고쳐 쥐었다.
"기관총도 쏘면 안된다. 기다려 ."
3개 소대 병력이 횡대로 늘어진 참호 속에 들어가 있어서 벌려진
거리는 5백 미터 가깜게 되었지만 그들의 정면으로 다가오는 부대는
기갑 부대로 아마 1개 사단은 되어 보였다.
한만규는 힐끗 옆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단 직속의 수색 중대장
이었으므로 사단의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사단으로 통하는 무전기
에는 아직 연락이 없다. 폭음과 장갑차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윤
곽도 더욱 뚜렷해졌다.
이번에 중대에 새로 지급된 두 대의 PRG -7V(대전차 척탄 발사
관)의 유효사정 거리는 5백 미터였고 구형 RPG-1은 1백 미터밖
에 되지 않는다. 앞장을 선 장갑차와의 거리는 7백 미터가 넘었으므
로 섣불리 발사했다가는 이쪽의 위치만 노출시키고 만다.
"중대장 동지, 왜 포를 때리지 않습니까?"
제3소대장 오연식 중위의 악을 쓰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포를 때리면 놈들은 전멸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중대장 동지."
"닥쳐!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잖아!"
한만규가 소리치자 중대 본부의 참호 안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벽과 덮개가 철근 시멘트를 입힌 6인용 참호였지 만 앞뒤가 휑하게
뚫려 있어서 바람이 휘몰려 통과하고 있다. 바람결에 짙은 화약 냄새
가 맡아졌다.
"5백 미터까지 접근시켜 라. 반복한다. 5백 미터가 되면 사격한다. "
50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한만규는 무전기를 던지고늘 앞쪽을 노려보았다.
황야는 전차의 소음과 폭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쪽의 포격은
10분쯤 전에 딱 그치고는 단 한 발도 날아가지 않는다. 포격이 그쳤
을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한만규가 사단 시령부에 연락을 하자 참
모는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곧 지시를 내리겠다면서 무전을 껐
다. 거창한 포신과 압도적인 우세를 자랑하던 갖가지의 포가 일제히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한만규의 옆에서 철적이며 노리쇠를 당기는 둔한 금속음이 들려
왔다. 중대 본부에 배치된 칼라시니코프 중기관총을 장탄하는 소리
였다. 유효 사정 거리가 8백 미터인 PKM(프레메트 칼라시니코바
모텔지도바니)은 지금이라도 장갑차를 맞출 수가 있지만 7.62mmx
54R탄으로는 장갑을 뚫을 수가 없다.
무전병이 부스럭대며 다가왔다.
"중대장 동지, 제 145박격포 중대장 동지입니다. "
한만규가 서둘러 무전기를 받아 쥐었다. 145박격포 중대는 같은
51사단 소속으로 그의 참호에서 3백 미터 후방에 위치하고 있다.
"이봐요, 김 대위 동무. 당신 왜 포를 안 쏘는 거야!"
목청이 터질 듯이 한만규가 소리를 쳤지만 잠시 저쪽에서는 대답
이 없다.
"이봐요, 동무!"
"한 대위 동무, 우린 철수합니다. "
"뭣이라고?"
"우린 지금 철수한단 말이오."
"아니, 이런‥‥‥‥
215고지의 격전 51
한만규가 참호에서 상반신을 세우댜가 시멘트 천장에 머리를 부딪
쳤다.
"도대체 누가 그런 명령을?"
"군단 사령부에서 직접 받은 명령이오.사단에서도 확인을 받았
소."
"그러면 우리는·
"동무는 명령을 받지 못했소?"
이쪽이 잠자코 있자 박격포 중대장 김경석 대위가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동무,그럼 무전 끄겠소."
전차대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폭음과 함께 캐터필러의 금속
마찰음이 귀를 울렸고 땅이 진동하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파노라마 식 조준 안경으로 밖을 내다보던 다제다 소장은 헬멧에
달린 마이크를 손으로 쥐었다.
"좋다! 사격 개시 !"
이미 1번 열의 전차장들에 의해서 목표를 지시받은 사격수들은 조
준기의 중심선에 목표를 포착하고 있을 것이었다. 야간 투시 장치를
이용해서 각종 데이터가 입력된 탄도 컴퓨터의 부양각도 결정이 되
어 있어서 방아쇠만 당기면 된다.
순간 그가 타고 있던 1번 전차가 들색 하고 흔들리면서 고막을 울
리는 발사음이 들렸다. 헬멧의 귀가리개를 하고 있어도 귀가 먹먹할
정도의 포성이다.
"목표 명중!"
52 밤의 대통령 제3부 -르
사격수가 조준 안경에 눈을 붙인 채 소리쳤다.
사정 거리가 1천 미터 미만일 때의 명중률은 95퍼센트였으므로
신기할 것은 없다. 장전수가 빠르게 20킬로그램 가까운 철갑탄을 재
장전하고 있었다.
뒤쪽에서도 요란한 포성이 울려 왔다. 마치 철판을 해머로 연달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74식 탱크는 유기압 현가 장치에 의해서 바퀴를 상하로 2백 밀리
씩 움직일 수 있었는데 능선 사격을 위해 개발된 독특한 장치이다.
따라서 포의 부양각이 컸으므로 종대로 따라오는 전차들이 앞의 전
차에 시야가 막혀 사격에 방해를 받는 일은 없다.
포성은 밤하늘을 갈갈이 고 있었다. 앞쪽 능선의 참호들은 불덩
이가 되어 타올랐고 아직도 포탄이 쉴새없이 작열하고 있었다. 앞장
선 장갑차 대열이 속력을 내었으므로 전차들도 뒤질세라 215고지의
비스듬한 능선을 달려 올랐다.
모두가 북한군의 포격이 갑자기 그친 것에 대해서 불안해하면서도
조급해져 있는 것이다. 10분 가량 포격이 멈추어 있었는데 그들이
아군에 의해서 포격 불능 상태가 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케다조;차도 그들이 무슨 꿍꿍이 수작을 부릴지 몰라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백여 대의 전차포가 능선
을 향해 일제 사격을 하며 돌진하고 있다. 조각조각 겨 나간 불덩
이가 능선 위의 검은 밤하늘로 치솟아 올랐고 폭음이 땅과 하늘에 가
득 차 있었다.
오연식 중위의 참호가 송두리째 날아간 것을 본 김덕천 상사는 무
215고지의 격전 53
전기의 스위치를 다급하게 눌렀다 포탄 파편이 참호의 옆면을 부수
면서 시멘트 덩이들을 그의 몸 위로 흩뿌렸다.
"중대장 동지 ! 중대장 동지 !"
잠시 후에 지글거리는 무전기의 울림 소리와 함께 수십 명이 악을
쓰며 교신하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중대장 동지! 중대장 동지! 여기는 3소대 김 상사입니다!"
"말해라! 김 상사."
겨우 알아들은 한만규가 소리쳐 말했다.
"소대장 동지의 진지가 날아갔습니다!"
"알고 있어!"
"중대장 동지! 소대 지휘는 누가‥‥‥
"1분대장 이광수 중사다. "
"사수해라! 목숨을 바쳐서 진지를 지켜라!"
그러고는 무전이 끊겼다. 이제 탱크대와의 거리는 2백 미터도 되
지 않았다. 뒤쪽에서 전차 포탄이 터지면서 뜨거운 불기운이 참호 안
으로 휘몰려 들어왔다.
"이봐, 왼쪽이다!"
포신을 이쪽으로 돌리고 있는 전열의 탱크를 향해 경기관총을겨
누며 김덕천이 소리쳤다.
이쪽에서 날아간 대전차 포탄에 맞은 탱크 한 대가 불기둥을 사방
으로 뿜으며 폭발하는 것이 보였다. 경기관총을 쏘아 대던 김덕천은
문득 머리를 돌려 옆쪽을 바라보았다. 좌측 끝의 경기관총조는 적의
포격이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포탄에 맞아 사수와 조수가 모두 즉사
54 밤의 대통령 제3부 -lU
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옆자리의 부하 전사는 미친 듯 소총을 쏘
아 대고 있었던 것이다.
"동무, 뭐하는 거쑤!"
김덕천은 총을 겨눈 채 엎드려 있는 부하의 어깨를 밀었다. 다시
앞쪽에서 포탄이 폭발했고 파편이 날아와 참호의 벽과 천장을 때렸
다. 흙먼지를 가득 얼굴에 덮어쓴 김덕천이 기침을 하면서 참호의 바
닥에 주저앉았다. 철모는 어느 사이엔가 날아가 맨머리가 되어 있었
다.
"동무, 이리 내려와."
그는 아직도 앞을 향한 채 엎드려 있는 부하 전사의 허리춤을 잡
아당겼다. 이제 이쪽의 사격은 뜸해진 대신 놈들의 포격은 더욱 심해
져 갔다
부하가 허리를 참호의 벽에 부딪치며 그의 옆으로 주저앉았다. 번
쩍이며 터지는 포탄의 섬광에 그의 얼굴이 힐끗 보였다. 죽은 얼굴이
었다.
"돌격! 돌격, 앞으로!"
장영환 옆으로 이한성 소위가 헐떡이며 다가왔다. 화염에 비친 얼
굴이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다.
"얼마 남지 않았어! 우리가 먼저 고지를 점령해야 돼!"
그들의 뒤를 쫓듯이 다가오는 일본군의 기갑 보병들을 의식하고
하는 말이다 전차포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고 불바다가 된 전방의
능선에서는 아직도 총탄이 쏟아지고 있다.
"장 병장,네가 1분대를 맡아라! 김 하사가 전사했다!"
215고지의 격전 55
이한성이 헐떡이며 소리쳤다 그들은 이제 완만한 능선을 휘청이
며 뛰어오르고 있었다. 갈대가 드문드문 나 있었지만 돌멩이가 발에
채이는 험한 지대였다.
"네 옆의 분대원을 모아! 어서!"
그들은 횡대를 이루어 돌격하고 있었지만 뛰는 속도와 지형의 차
이 등으로 대열이 흐트러졌고 적의 공격으로 비게 된 곳도 많았다.
뒤를 따르는 일본군 기갑 대대는 분계선을 넘을 때까지 장갑차 안에
들어가 있어서 포격의 피해가 적을 것이다.
"3분대를 불러!"
이한성이 다시 소리치자 장영환은 옆쪽의 어둠 속으로 머리를 돌
렸다.
"어이 ! 분대 ! 로분대 !"
희끗한 사람이 형체 두어 개가 갈대숨 위로 드러났다가 번쩍이는
섬광 속에 잠간만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이! 3분대 새끼들아!"
"어떤 씨발놈이야!"
누군가가 바로 옆쪽에서 불쑥 소리쳤으므로 장영환이 총을 고쳐
쥐었다.
"나, 1분대 장 병장이다! 너는 누구야?"
"나, 김을수야!"
제대 말년 병장 김을수였다. 그의 모습은 연막 속으로 다시 사라
졌다.
장영환은 이제 자갈 투성이의 경사면을 헐떡이며 기어올랐다. 기
관총탄이 그의 옆쪽을 스치고 지났지만 조준해서 쏘는 것 같지가 않
56 밤의 대통령 제3부 -르
다. 탱크에서 쏘아 제친 연막탄이 능선 위를 가득 덮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이제 안개 속을 혜쳐 나가는 것 같았다.
"돌격! 돌격, 앞으로!"
우측에 있던 이한성은 어느 사이에 앞쪽으로 더 나아간모양이었
다. 그의 목소리가 폭음 속에서 끊어질 듯 들렸다.
"김 병장! I분대를 이쪽으로 모아! 소대장의 지시야!"
장영환이 소리쳐 말하자 연막을 뚫고 김을수의 모습이 불쑥 드러
났다. 어둠 속에 두 눈만 뚜렷하게 보이고 있다.
"젠장, 분대원이 어디 있어! 다 죽었어!"
"분계선 넘다가 포탄 맞아 다 죽고 나 혼자 남았어!"
그들은 다시 갈대 숲으로 들어섰다. 총탄이 그들과 가까운 거리를
지나면서 섬뜩한 마찰음을 내었다. 다시 전방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다.
t돌격! 1소대 돌격, 앞으로!"
목이 터질 듯이 외치는 이한성의 목소리를 다시 듣자 자신도 모르
게 장영환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돌격 !"
갈대잎에 얼굴을 스치면서 그도 목청껏 소리쳤다. 폭발음과 총성
에 섞인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귀에도 제대로 들려 오지 않았다. 그
러자 옆쪽에서 짧고 높은 외침들이 들려 왔다.
".! 이야야!"
"돌격!"
살아 남은 소대 원들이 지르는 기합 소리였다. 이제 적의 참호는
215고지의 격전 57
백 미터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돌격 !"
장영환은 목을 길게 빼고는 어둠 속을 향해 목청껏 고함을 쳤다.
"1소대 1분대, 돌격! 앞으로!"
그러나 살아 남아 그를 따르는 분대원이 몇 명인지는 알 수가 없
었다.
9시 40분, 연막을 헤치고 나아가던 김을수 병장은 불길 사이로 부
서진 시멘트 기둥들을 보았다. 시멘트 기둥은 철조망으로 뒤엉켜 있
었는데 북쪽의 철책 선이다. 바짝 마른 입안에서는 단내가 맡아졌고
몸은 온통 땀으로 끈적거렸다.
김을수는 헐떡이며 가쁜 숨을 뱉어냈지만 머리속은 맑고 두 다리
에는 아직도 힘이 남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돌격 !"
"이야야!"
옆쪽에서 아우성치듯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조금 전까지
옆에 있던 1분대의 소집 병장장영환의 목소리 같았다. 그는부서진
시멘트 조각을 밟고 비틀거리다가 입을 열어 고함을 쳤다.
"이야야!"
기합은 그에게 다시 새로운 기운을 가져다 주었다. 앞에총을 한
자세였으므로 그는 M -16의 방아쇠를 당겨 앞쪽의 어둠 속을 향해
대여섯 발의 총탄을 쏘아 제쳤다. 그리고는 기운차게 땅을 밟는 순간
온몸이 번쩍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이 하얗게 되었
으나 번쩍이는 의식은 자신이 지뢰를 밟았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고
18 밤의 대통령 제3부 -llf
통은 없다.
갈갈이 찢겨진 그의 육체가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그의 번갯불 같
은 의식은 상황을 알려 주었고 그 다음에 찾아온 것은 긴장감이다.
김을수는 육체가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기도 전에 고통 없이 의식이
끊겼다.
옆쪽에서 지뢰가 폭발하면서 날아온 파편이 철모를 치고 날아가는
바람에 장영환의 귀에는 잠시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머리를
흔들면서 그는 부서진 철책선을 뛰어 넘었다. 능선 위는 연막이 걷혀
가는 중인 데다가 화염에 점싸여 있어서 참호와 막사의 윤곽이 뚜렷
하게 드러났다.
"돌격! 앞으로!"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가 악을 쓰듯 소리치면서 소총을 갈겨 대었
다. 이곳 저곳에서 환성과 같은 기합 소리가 들려 오고 있다.
전차의 포격은 어느 사이엔가 그쳐 있었고 이제는 소총과 기관총
의 발사음만 들려 오고 있다.
"이야야!"
저도 모르게 목청껏 소리를 지르면서 장영환은 앞으로 돌격해 나
아갔다.
눈에 띄는 수상한 곳마다 무조건 총탄을 쏘아 제치면서 뛰어가던
그는 달리는 속도를 늦추었다. 앞쪽에 크고 검은 입을 벌리고 있는
반쯤 부서진 참호가 보였기 때문이다.
"죽여라! 로두 죽여라!"
갑자기 쉰 목소리로 외치는 고함 소리가 옆에서 들려 왔다. 회점
속에 나타난 이한성의 모습은 처절했다. 철모가 날아간 얼굴은 피와
215고지의 격전 59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한쪽 어깨에 젊어진 무전기가힘예 부
친 듯 온몸이 그쪽으로 기을어져 있다.
그들은 앞쪽의 참호로 헐떡이며 다가갔다. 소총의 사격이 주위에
서 쉴새없이 들려 오고 있었지만 적들의 반항은 기가 꺾여 있었다.
이제 215고지를 점령한 것이다.
"장 병장! 이겼다!"
참호의 어두운 부분을 향해 M-16을 서너 발 쏘아제친 이한성
이 장영환을 향해 소리쳐 말했다.
"우리가 점령했어!"
그의 번들거리는 두 눈과 함께 횐 이가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
들은 참호로 다가가 안을 내려다보았다. 뒤쪽에서 전우들의 함성이
들려 왔다. 간간이 소총의 사격 소리만 들릴 뿐 이제 고지는 점령된
것이다. 참호 안에는 서너 명의 인민군이 흙더미에 묻혀 있었다.
김덕천 상사는 붉은 기운이 어른거리는 어둠 속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두 명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국방군이다. 이제 진지는 놈들에게
점령당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동료 전사의 시체에
묻혀 머리만을 내놓고는 위쪽의 사내들을 올려다보았다.
"모두 죽었구만, 이놈들은."
사내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주위는 함성과 함께 소총의
사격 소리가 들렸고 탱크의 엔진 소리도 가까워져 있었다.
그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자 김덕천은 손에 쥐고 있던 총의 총
구를 위쪽으로 올렸다. 그 순간 옆쪽에서 불길이 뻗어 나왔다가 들어
가는 바람에 사내의 얼굴이 뚜렷이 드러났다. 피투성이가 된 사내의
60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두 눈이 이제 참호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1소대 !"
사내가 목청껏 소리를 쳤다.
"1소대! 우리는 해냈다!"
그 순간 김덕천은 방아쇠를 당겼고 날카로운 총성과 함께 사래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다시 김덕천의 시야는 의었고 참호 밖의 밤
하늘이 보였다.
화염이 일렁이는 참호 밖은 소총의 사격 소리와 폭음, 전차의 진
동음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쪽은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무엇인가가 참호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수류탄이다.
김덕천은 숨을 들여마시면서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더이상 움직
이기는 싫었다.
9시 45분, 한일 연합군 사령부의 제3초소 앞.
초소장 허원갑 대위는 허리에 두 손을 짚고 길 한복판에 서서 다
가오는 헤드 라이트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트의 숫자로 보
아 차량은 대략 열서너 대가 되어 보였는데 뒤쪽의 7, 8대는 트럭이
었다.
과천의 지하 사령부는 허원갑이 선 곳에서 t킬로쫌 후방에 있었고
2백 미터 간격으로 제쑈소와 제1초소 등으로 3중의 경계망이 쳐져
있었다. 따라서 그외 3초소가 방어 개념으로 말하면 최전방의 초소
이다.
차량의 행렬은 점점 가까워졌고 엔진의 소음이 귀를 울렸다. 평시
에도 차량의 통행이 드문 길이어서 다가오는 차량들을 바라보는 병
215고지의 격전 61
사들의 시선은 긴장되어 있었다.
허원잠이 머리를 돌려 옆에 서 있는 소대장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위치로."
세 명의 장교가 제각기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주위는 더욱 팽팽한
긴장으로 덮였고 차량의 소음은 더욱 크게 들려 왔다.
그가 지휘하는 1개 중대의 병력이 숨을 죽이고 다가오는 차량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네 대의 탱크와 여섯 대의 중기관총,그리고 백여 정이 넘는각종
화기의 총구가 앞쪽으로 향해져 있다. 선도 차량은 기관총을 매단 헌
병 지프였다.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차단용 철제범 앞에서 지프가 멈추
어 섰고 헬멧을 쓴 장교가 내렸다.
"이봐, 이것들을 치워라. 사령관 행차야."
그가 소리치듯 경비병들에게 말했다.
"어서! 여기 책임자가 누구야?"
차량의 대열이 잇달아멈춰 서면서 뒤쪽의 트럭에서 헌병들이 뛰
어내리고 있었다. ·도로는 순식간에 헌병들로 메워졌다.
장교가 두 명의 부하를 뒤에 달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봐, 귀관이 이곳 경비 대장인가?"
그는 소령 계급장을 헬멧에 붙이고 있었다. 허원갑이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습니다, 소령님. 제가 이곳 지휘관입니다. "
"사령관 행차라는 연락 못 받았어? 어서 바리케이드를 치우란 말이야!"
(2)
"받았습니다, 소령님 ."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그러자 그의 뒤쪽에서 사복 차림을 한 사내 대여섯 명이 다가와 섰다.
"이봐, 대위 . 어서 통과시켜!"
"뭐하는 거야!"
허원갑은 머리를 끄덕이며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 들었다.
"이 씹새끼들, 반항하는 놈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쏘아 죽일테다"
그러자 길 양쪽의 조명등이 일제히 켜지면서 도로를 비추었다.
그리고는 좌우에 총구를 겨눈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령관 차 외에는 통과할 수 없다. 단 한 대도, 단 한 대도 못 들어간다. "
그가 고함치듯 말하자 도로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들은 환한
불빛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강력한 화력을 가진 병력에
게 포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봐, 대위."
소령이 한 손을 앞으로 내밀며 주춤 몸을 움직이는 순간 '타앙!'하
면서 밤하늘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허원갑이 쏜 것이다.
"이 새끼야,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어깨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비틀거리는 소령을 향해 허원갑이 소리쳤다.
"사령관 승용차만 빼고 모두 차를 돌려라!"
허원잠이 소리치자 차량의 행렬 뒤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타타타, 타타."
잔은 기관총의 연속 발사음이 두어 번 계속되다가 멈추었다.
그리고는 고함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이봐요,대위.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나 알아?"
신사복 차림의 사내가 허원갑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대통령 명령을 거역할 셈인가? 당신은 대한민국 국군이 아니야?"
"한번만 더 입을 놀렸다가는 네 주둥이에 한방 갈길테다. "
허원갑이 권총의 총구를 그를 향해 겨누었다.
"입을 닥치고 돌아서."
주위를 둘러싼 병사들이 총구를 내밀며 그들에게로 한잘음 다가갔
"우리가 대한민국 국군이니까 너희들을 살려 주는 거야, 이 새끼
그러자 그들을 헤치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강동진
대장이다. 야전복 치럼의 그는 거침없이 허원갑에게로 다가왔다.
"바리케이드를 치워라, 대위."
"사령관님, 저는 연대장님한테 명령을 받았습니다.
시령관님 외에는 들여 보탤 수 없습니다. "
"너는 네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나 알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사령관님 "
두어 번 눈을 깔박이며 허원갑을 바라보던 강동진이 몸을 돌렸다.
"모두 돌아가라. 난 혼자 시령부로 들어가겠다. "
"사령관님."
그렇게 말한 것은 사복 차림의 사내였다.
"흔자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저희들이 ‥‥‥‥
"닥쳐 !"
강동진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난 시령관이야!사령부에 사령관이 들어가는데 이상할 것이 없다.
너희들은 모두 철수해라. 명령이다!"
제46산악 여단장 방현수 소장은 정치 군관 한기남 대좌와 함쩨 장
갑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앞자리예 앉아 있던 부관이 그를 돌아보았다.
"여단장 동지, 출발시키TE습니다. "
"서둘러 . 회양까지 30분 안에 도착해야 된다. "
부관이 조종사의 어깨를 두드리자 장갑차는 요란한'엔진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타고 있는 장갑차의 앞에는 선도 장
갑차가 길을 텄고 뒤에는 차량 백여 대가 산악 여단의 병사들을 싣고 따르고 있다.
그의 산악 여단은 인민군의 특수 부대로 최신 화기로 무장된 정예 여단이었다.
게릴라전과 적의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조직된 부대였는데
산악전에도 적응하도록 강한 훈련으로 단련되어 왔다.
방현수는 지도를 꺼내어 무릎 위에 펴놓고는 차 안의 실내등을 켰다.
참모들과 작전 회의를 마쳤지만 다시 지도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기남이 그를 바라보았다.
' "여단장 동지, 51사단의 전초 기지가 남조선군에게 점령당했다는데, 괜찮을까요?"
"이을설이 그 반역자가 포격을 중지시켰기 때문이야."
방현수가 지도에서 얼굴을 들었다. 거친 피부에 표정이 다부진 40대 후반의 사내였다.
"그놈은 우리 공화국을 남조선 놈들에게 팔아 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
그가 말을 이었다.
"남조선 군이 우리 동부 전선 한 곳만 뚫고 들어온 것은 이을설과
최광이 짜고 남조선 놈들에게 길을 알려 준 때문이야."
"남조선 군은 215고지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
"곧 몰살당할 거다. 노동 1, 죠=가 놈들에게 쏟아져 내릴테니까."
"우리는 회양의 사령부를 쑥밭을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이을설이
를 잡아야 돼. 죽여도 좋다는 수령님의 지시다. "
앞자리에 앉아 있던 부관이 무전기를 한기남에게 건네 주었다.
"정치 군관 동지, 참모장 동지의 무전이 왔습니다. "
한기남이 무전기를 받아 쥐었다. 참모장 김명보 대좌는 바로 그들
의 뒤차에 타고 있었다.
무전기를 귀에 댄 한기남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참모장 동지."
"무슨 일이야?"
방현수가 묻자 한기남이 무전기를 부관에게 건네 주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시작하자는 이야기요, 여단장 동지 "
"무엇을 말이야?"
"당신을 처단하겠소."
어느 사이엔지 든 권총의 총구로 방현수의 가슴을 누르면서 한
기남이 말했다.
"지금 당신을 처단하는 것이 우리 공화국 인민을 살리는 일이야, 여단장 동지."
"이, 이런 반역자 같은."
얼굴이 뻗뻗하게 굳어진 방현수가충구에 밀려 문짝에 어깨를 대었다.
"이놈, 수령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잣 수령 놈의 입장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인민이 우선이다, 이간신 같은 놈아."
몸에 바짝 댄 총구에서 발사된 총성은 크지 않았지만 차 안에는 금방 옷 타는 냄새가 났다.
"참모장 동지, 끝냈습니다. "
앞자리의 부관이 무전기에 대고 커다랗게 말했다.
장갑차는 델컹 이면서 밤길을 요란하게 달려나갔다.
강동진 대장이 혹을 천천히 돌려 앞에 서 있는 장군들을 둘러보는 시간은 몇 초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뒤쪽에 물러 서 있는 수십 명의 참모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상황실은 기계의 소음만 희미하게 들릴 뿐 통신 장교들도 입을 다물고 있어서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윽고 강동진이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전면전이 시작되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야.
한 시간 반 동안 김정일이를 진정시키려고 대통령께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셨다.
파리에 있는 최광에게도 두 번이나 전화를 하셨어."
모두들 그를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지만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즉시 78기갑 여단을 원위치로 후퇴시 켜라. 이것은 군의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명령이다. "
상황 테이블 건너편에 서 있던 강한기 소장이 그를 바라보았다.
"사령관님,회양의 인민군 제1군단 때문에 김정일은 전면전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
"무슨 소리 야?"
강동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전면전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거야?"
"지금 1군단을 맡고 있는 이을설이 김정일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그가 우리 78기갑 여단에게 길을 터주었기 때문에 215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
"아니 , 그건 또 무슨‥‥‥‥
"실제로 그가 포격을 중지시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분계선을 넘을 수도 없었습니다, 시령관님 ."
"이을설은 78기갑 여단을 내버려 둘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이상 진격해 들어가는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현상태로 있어 달라는 요청이 조금 전에 왔었거든요."
"믿을 수가 없군."
어깨를 늘어뜨린 강동진이 얼굴을 찌푸린 채 가토 중장에게로 몸을 돌렸다.
"가토 중장, 사실이오?"
통역 장교의 귓속말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가토가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사령관 각하."
"이을설이가 우리에게 길을 터주었단 말이오?"
"처음 연락이 온 것은 파리에 있는 최광 차수한테서 였습니다.
최광이 우리에게 동부 지역을 부분 공격하라고 말해 주었소."
"무엇이? 최광이?"
이제 강동진의 눈과 입이 함께 벌어졌다.
"최광이 우리에게 연락을 해왔단 말이오?"
그러자 강한기가 나섰다.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회담장이 혼란해졌을 때 최광은 고성국 중장에게 쪽지를 건네 주었습니다. "
뒤쪽에서 그들을 힐끗거리고 있는 장교들을 의식한 강한기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는 고 중장의 연락을 받고 기갑 여단을 진격시킬 결심을 굳힌 겁니다, 사령관님."
"최광은 우리가 동부 전선 한 곳을 뚫고 들어가떤 이을설이 장악한 1군단이
길을 열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김정일은 즉각적인 반격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사실로 입증이 되었습니다. "
"그렇다면 왜 나에게‥‥‥
"사령관님은 대통령과 함께 계셨습니다.
대통령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사령관님은 잘 알고 계실텐데 요."
"강 소장,그렇다고 네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
"알고 있습니다,시령관님. 각오하고 있습니다. "
강한기가 어깨를 펴고 강동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를 체포하십시오. 하지만 215고지에 있는 병력을 철수시킬 수는 없습니다.
한국군의 18연대 1대대는 병력의 절반 이상이 전사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강동진이 시선을 상황판으로 내렸다.
그는 굵은 둘째손가락으로 휴전선 부근을 이리저리 쓸더니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렇군 이곳의 제 107연대를 21 』고지로 보내서 교대시키면 되겠다.
18연대는 예비 병력으로 뒤로 물린다. "
입국 창구로 다가기편 고성국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앞을 가로 막고 선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파리에서 서울로 날아온 대한항공은 10여 명의 승객밖에 싣지 않았으므로 입국 창구 앞은 비어 있었다.
"고 중장님,잠깐 저희들하고 같이 가주웠으면 합니다. "
사내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40대의 신사복 차림이 그를 향해 말했다.
근처의 이쪽 저쪽에 벌려 선 사내들은 얼핏 보아서도 7, 8명이 넘어 보였다.
"당신들은 누구요?"
"가보시면 압니다. "
사내 두 명이 다가와 그의 양쪽에 섰다.
70 밤의 대통령 제3부 -방
"안기부 직원들인가?"
"청와대에서 왔습니다. "
나이 든 사내가 정중하게 말했다.
"각하께서 장군을 뵙자고 하십니다. "
"좋소. "
고성국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것은 내가 바라던 바요. 잘되었어,"
입국 수속도 생략한 고성국이 그들에게 에워싸여 VIP 통로로 들어섰을 때였다.
일단의 군인들이 바닥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뒤쪽에서 뛰어왔다.
소령 계급장을 붙인 장교가 앞장을 섰고 10여 명이 넘는 병사들은 모두 K -2 기관총을 쥐고 있었다.
"정71 !"
소령의 목소리가 건물의 벽에 부딪치며 크게 울렸다. 그들은 금방 고성국과 사내들을 둘러쌌다.
소령이 고성국을 향해 기운차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모두 해병대 병력이다.
"참모정림, 모시러 왔습니다. "
그는 상황을 눈치챈 듯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을 향해 어깨를 펴고 말했다.
"난 계엄 사령부 소속 엄기하 소령이오. 계엄 사령관의 명령으로 참모장님을 모셔 갑니다. "
소령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도전적인 태도였고 그와 어울리 게 부하 병사들의 표정도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3)
"이것 봐요, 소령."
나이 든 경호실의 사내가 한걸음 소령에게 다가섰다.
"난 경호실의 이 과장이오.나는 대통령 각하의 명령으로 참모장님을 모셔 가는 거요."
소령이 번쩍 눈을 치켜뜨고는 그를 쏘아보았다. 두어 번 눈을 껌벅이고 난 소령이 말했다.
"안되겠어."
"이? 안된다)?"
이 과장이라는 사내와 경호실 요원들이 일제히 긴장했고 그것을 본 병사들도 몸을 굳힌다.
K-2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집어 넣는 병사를 보자 고성국이 그들 사이로 들어섰다
"소령, 난 청와대에 들르겠다. 사령관께 그렇게 말씀 드리도록."
7참모장님, 저는‥‥‥‥
"귀관은 사령부로 돌아가도록. 알았나?"
"예, 참모장님 "
"나도 대통령 각하께 보고 드릴 일이 있어."
고성국이 청와대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그는 요원들의 안내를 받아 곧장 본관의 상황실로 안내되었다.
물론 지하 상황실이다.
평양의 주석궁 내 지하 벙커보다는 규모와 시설 면에서 떨어지지만 한국의 건설 기술을
총동원하여 만든 견고한 지하 요새였다.
13가 상황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장방형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사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아졌다.
위쪽 상석에 앉은 사람은 물론 이영만 대통령이었고 그의 좌우에는
안기부장 임병섭, 국방 장관 김형태, 임종호 당대표, 장영식 외무, 박종환 비서 실장 등의
얼굴이 줄줄이 보였지만 계엄 사령관 강동진의 모습은 없다.
"거기 자리에 앉아요, 고 장군."
대통령이 빈자리를 손으로 가리켰으므로 고성국은 머리를 숙여 보
이고는 끝자리에 가 앉았다. 옆에 앉은 장영식이 몸을 바로 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공항에서 바로 불러들인 것을 이해하시오, 장군."
대통령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파리에서 있었던 일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소."
"예, 각하. 저도 말씀 드리려고 했던 참입니다. "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대통령과 고성국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고성국비 말을 이었다.
"각하, 회담이 결렬되고 김원국 씨가 회담장을 뛰쳐나가자 최광
씨는 몰래 저에게 쪽지를 한장 건네 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쪽지 한 장을 꺼낸 그가 테이블 위로 밀어
놓았다. 장영식이 집어 들고는 일어나 대통령의 앞에 내려놓았다. 손
바닥만한 종이였다.
대통령이 머리를 숙여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상황실은 잠간 동안
정적에 싸였고 이윽고 쪽지에서 시선을 뗀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내용은 사실인 것 같군."
"예,각하."
대통령이 쪽지를 앞에 앉은 임병섭 앞으로 밀어 놓았다.
"그렇다면 촤뢍과 이을설은 김정일을 밀어내려고 진작부터 계획
215고지의 격전 73
하고 있었군."
"그렇습니다, 각하 "
말을 받는 것은 고성 국이다.
"쪽지를 주면서 최광 씨는 회담 결렬의 소식이 전해져서 김정일이
움직이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치고 들어가야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
다. "
"김원국 씨가 도망치고 나서 말인가?"
"예, 각하. 몇 분 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로젠스턴과 더글러스는
당황해서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
"최광과 이을설의 거Al를 앞당긴 셈인가?"
"예, 각하. 실제로 김정일이 남침 명령을 내리게 되면 거사는 불가
능해집니다. 한국군과의 전쟁에 전군이 전력투구할 수밖에 없습니
다. "
"그렇겠군."
"저는 쪽지를 읽고 그의 말을 믿었습니다, 각하."
"그래서 별 셋짜리 참모장이 북침 명령을 내린 게로군."
고성국이 입을 다물자 옆에 앉은 외무 장관 장영식이 맨 나중으로
쪽지를 읽고는 그에게로 밀어 놓았다.
검정 싸인펜으로 또박또박 씌어진 짧은 글이어서 고성국은 이제
외우고 있다.
1. 1군단의 거사.
2. 동서의 대치로 남침 계획 저지.
3. 김정일의 제거.
4. 평화조약, 연방 공화국.
74 밤의 대통령 제3부 -lH
파리, 다음날인 』월 9일 오후 3시.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는 흐린 날이다.
생미셀 광장 근처의 자크 카냐 레스토랑 안. 주방 옆쪽의 밀실에
는 굳은 표정의 김원국과 고동규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은 북한의 최광이다.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
운 가자미 요리가 놓여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 손도 대지 않고 있다.
이윽고 김원국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한국 기관원들이 단단히 경
비하고 있으니까요."
"안기부 요원들이오?"
"그렇습니다. "
"김 선생도 안기부와 관계가 있소?"
"아닙니다. 그 사람들과 협력하는 사이지만,"
머리를 끄덕인 최광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가 한국 대사관으로
전화를 해온 것은 두 시간 전이었다.
정필섭 대사는 최광의 목소리를 전화로 듣는 것이 처음이었지만
그것이 장난 전화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는 김원국과 당
장 만나기를 원했는데 30분 후에 다시 연락을 할테니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으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긴장과 흥분으로 머리칼이 곤
두선 정필섭이 수소문하여 김원국과 연락이 닿은 것은 20분이나 지
난 후였다.
김원국의 도주를 도왔던 안기부 요원들도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
었는데 대사가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김원국이
먼저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215고지의 격전 75
최광이 탁자 위의 잔을 집어 들어 한모금 물을 삼켰다.
"난 이제 북한 대사관으로는 돌아가지 못하오, 김 선생. 평양에서
는 날 잡으려 하3a지만."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정부는주석님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해드릴 것입니다. "
김원국의 말에 최광이 머리를 저었다.
"남조선 정부의 신세를 질 생각도 없소. 나는 김정일의 독선과 체
제에 반기를 든 것이지 우리 공화국을 배신한 것은 아니오."
"하지만 주석님, 혼자 계시면 여러가지로‥‥‥‥
"그래서 김 선생을 찾은 것이오."
"여러가지로 생각해 보았는데 김 선생이 날 보호해 주셨으면 해
서.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만 말이오."
그러자 김원국의 시선을 받은 고동규가 입을 열었다.
"주석님, 그것은 한국 정부의 보호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
각됩니다만. 왜냐하면 저희들은‥‥‥‥
"알고 있소."
최광이 그의 말을 잘랐다.
"당신들이 안기부와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
"나는 오늘부터 자취를 감추고 싶소. 아마 내가 남조선 정부에 공
식적으로 망명해 간다면 당신들 사기는 을라가겠지만 실익은 별로
없을 것이오. 내가 할 일들이 제한을 받을 거란 말이오."
"이을설 차수와 진행하시는 일 말입니까?"
76 밤의 대통령 제 3부 -템
김원국이 묻자 최광이 머리를 」1덕였다.
"그렇소. 난 고와 자유롭게 계획을 추진해야 하오."
"김정일은 정전 회담을 거부했소. 그러니 파리에서 할 일은 없어
졌소. "
"북한이 정전 회담을 하지 않는다면 곧 전면전을 하3a다는 뜻입니
까?"
"아니, 그러지는 못할 거요."
최광이 늘어진 눈시울을 치켜올렸다.
"이제 김정일은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동부 전선이 이을설 차수에
게 장악된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하지요."
"그렇다면 왜 회담을 거부했을까요?"
"지금 내부 수습으로 정신이 없을 거요. 그가 믿었던 제40산악 여
단도 이을설 차수의 부하들에 의해서 여단장이 처형되고 1군단에 합
류했으니까."
"그렇다면 내분이 일어납니까?"
"벌써 일어나고 있어요.운천의 미사일 기지 사령부,함흥의 7군
단, 그리고 동해 함대는 이미 우리측이 되었소. 중부와 서부 지역의
군단들에는 김정일의 심복들이 많지만 동쪽이 불안해서 전쟁을 일으
킬 상황은 아니오."
최광이 머리를 들어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김정일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오.하긴 우리 공
화국은 40여 년 동안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지도자가 명령만
내리면 되었소."
215고지의 격전 77
"이번 사건의 책임은 남조선에게도 있소. 당신들은 우리 공화국에
게 무시당할 행동들을 해왔던 거요. 우리가 세게 나오면 당신들은 즉
시 움츠러들었소. 말도 안되는 통일론을 내세우며 말이오. 그것을 보
면서 우리가 당신들을 멸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오. 그래서 김정일은
남침 선포만 하면 남조선은 총 몇 방 쏘지 않고도 항복하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될 뻔했소."
김원국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최광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치고 내려갔다면 미국은 군대를 보내지 않았을 거요. 김
정일이 실수한 것은 남침 선포를 하고 나서 열흘쯤 후에 남조선을 기
습 공격하지 않은 것이오. 그때에는 미국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고 일
본도 손을 쓰지 못했을 것이오. 그리고 남조선도 혼란스런 상태였을
711고. "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김원국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최광이 보일 듯 말 듯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자만심 때문일 거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이미 시기를 놓쳤
고,이제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오.그는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꼈을 것이고, 이제 곧 기회를 놓쳐 역사상 패
배한 수많은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될 것이오."
"78기갑 여단에 한국군이 보충됩니다. "
고동규가 말하자 최광이 머리를 끄덕였다.
"전쟁 없이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머물라고 해주시오.
그들의 진격으로 우리 공화국 군부가 정신이 들었을 거요. 남조선군
78 밤의 대통령 제3부 -lU
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을테니 까. 그것이 가장 큰 소득이오."
최광이 얼굴에 다시 웃음을 띠었다.
"오늘부터 나는 망명자가 되었소.저쪽에서 눈치를 챈 모양이라
더이상 공화국 대사관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가 준비를 해두었으니 까요."
김원국이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외롭지도 않으실 겁니다. "
같은 시간의 콩코르드 광장 근처에 있는 미국 대사관.
환하게 불이 켜진 대사의 집무실에 로젠스턴과 더글러스 대장이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놓여진 위스키 병은 반쯤 비워져 있었고 술
잔을 쥐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붉다.
"정신이 없군, 요즘 한 달은.온통 한국 문제로만 시간을 빼앗기고
있어 "
로젠스턴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그 빌어먹을 남한놈들이 휴전선을 돌파하다니. 이거 우리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어."
"장관, 이러다가는 북쪽이 먼저 허물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내
분으로 말이오."
사복 차림의 더글러스가 소파에 등을 묻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북한이 믿었던 중국은 움직이지 않아요. 1950년의 한국 전쟁과
는 상황이 다릅니다. 동서 냉전 시대는 끝났거든."
"조금 전에 중국 대사와 통화를 했는데 한국군이 더이상 진격하지
않는다면 파병을 검토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215고지의 격전 79
로젠스턴의 말에 더글러스가 피식 웃었다.
"이젠 예전의 중국과는 달라서 중앙 정부의 명령이 먹혀 들어가지
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반도는 막대한 전비를 들여 수십만 병력
을 파병할 만한 가치가 없는 지역이 되었어요."
잠자코 머리를 끄덕인 로젠스턴은 잔에 남은 위스키를 힌모금에
삼켰다.
그것은 중국과 미국이 비슷한 입장일 것이다. 소련의 붕괴 이후로
동서 냉전의 흐름은 사라졌고 이제는 보다 강해진 국가 이기주의 시
대가 되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가 어느 쪽으로 통일이 되건 간에 안
보상의 문제는 같다. 통일이 안되어도 양쪽 한국과 정상적인 통상 외
교 관계가 수립되어 있었으므로 해될 것도 없다. 물론 그들과 50년
가깝게 형제국의 관계를 가진 북한에 의해 한반도가 통일이 된다면
기뻐해 주겠지만 경제적으로 따져 보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
한국과의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프로젝트가 중단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일본이 중국에 로비를 했을 거요. 중국은 못 이기는 척 들어주고
는 일본에게 빛을 안겨 주었고."
로젠스턴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북한이 회담을 거부했으므로
내일 아침 비행기로 워싱턴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
달 동안 양쪽 한국놈들의 농간에 놀아나 국가의 위신만 실추된 셈이었다.
"CIA는 최광이 이을설과 공모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장관.
그들은 안깎에서 손발을 맞추었다는 겁니다. "
더글러스의 말에 로젠스턴이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하면 회담장에서도 수상쩍었소. 도무지 의욕을 보이지
않는 것을 나는 김인채에게 주도권을 뺏겼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 "
"미리 이을설과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겁니다. "
"어쨌든 그의 거취도 궁금하구만.혹시 우리에게 망명 신청을 해올지 모르3a군, "
말을 멈춘 로젠스턴은 빈잔에 위스키를 따라 한모금에 마셨다. 어
쨌든 간에 그는 클린트와 함께 몇 달 후에는 정계를 떠나게 될 것이
었다. 사상 최악의 인기도를 기록하고 있는 클린트가 재선될 가능성
은 없었고 그것은 곧 그의 사직과 연결되는 것이다.
박은채가 샤를르 드골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반이었는데
자카르타행 가루다 에어라인의 출발 시간이 6시였으므로 알맞게 온 셈이다.
조그만 옷가방 하나만을 어깨에 멘 그녀는 혼잡한 대합실을 지나 출국장으로 들어섰다.
가루다의 전광판이 켜진 데스크 앞에는 사람들이 긴 줄을 만들고 있었지만
붉은 양탄자가 깔린 일등석 앞쪽은 비어 있었다.
일등석 데스크로 다가간 그녀가 여권과 탑승권을 내밀자
금발의 여직원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어서 오세요. 짐은 이쪽으로 올려놓아 주시구요."
"짐은 이 가방 한 개뿐이에요. 들고 가겠어요."
여직원이 빠르게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티켓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4)
"여기 있습니다,미에코 양.일둥석 라운지는 2층의 왼쪽에 있습니다. "
티켓을 받아 쥔 박은채는 몸을 돌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의 출국 게이트로 향하면서 박은채는 끼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도수가 없는 뿔데 안경이었지만 버릇이 되지 않아서 거북했던 것이다.
출국장이 점점 눈앞으로 다가왔다.
출국 스탬프를 찍는 관리들의 여유 있는 몸놀림을 보자 그녀의 가슴도 조금 안정이 되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은채가 코트의 주머니에서 여권과 비행기표를 꺼내면서
출국 데스크로 다가가는데 옆쪽에서 두 명의 사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출국하는 사람들처럼 출국장을 향해 서 있던 자들이었다.
출국장 로비를 가로질러 온 그들은 박은채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간 우리하고 같이 가시겠습니까?"
사내 한 명이 정중하게 물었다.
검은 머리에 눈동자가 파란 서양인이다.
"당신들이 누군데요?"
박은채가 묻자 사내가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파리 경시청의 형사입니다. "
사람들이 그들을 힐끗거리고 지나갔다.
아랫입술을 깨문 박은채가 주위를 둘러보자 사내 한 명이 그녀의 한쪽 팔을 끼었다.
"자, 어서, 저쪽으로 갑시다. "
"도대체 무슨 일로."
"당신은 한국인이고 첫 이름이 박이야.공항에 들어설 때부터 파악하고 있었어.잠자코 따라와."
그들이 박은채를 끌고 간 곳은 출국 게이트의 옆쪽에 있는 세관원 사무실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의 사무실에는 그들의 동료로 보이는 서너 명의 사내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일행은 없는 것 같습니다. "
그녀를 끌고 온 사래 한 명이 안쪽의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탑승 직전에 데려왔습니다. "
"자카르타행 가루다였지?"
"예, 반장님 ."
"김원국이의 은신처로 가는 거다. 가루다를 다시 체크해.출발을 늦추더라도."
사무실에 있던 사래 두 명이 재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박은채는
반장이라고 불린 사내의 앞자리에 앉혀졌다.
그러자 옆쪽 책상 위로 그녀의 가방이 뒤집혀지면서 내용물이 쏟아져 나왔다.
핸드백도 털려지고 있다.
"김원국이를 어디서 만나기로 했지?이곳인가?아니면 자카르타 야?"
40대쯤으로 보이는 반장은 머리가 반질거리는 대머리였다.
그가 실눈을 뜨며 박은채를 향해 물었다.
"미인이군 사진보다 실물이 더 낫다. 넌 김원국의 정부인가?"
힐끗 시선을 든 박은채가 그를 쏘아보다가 머리를 돌렸다.
사내가 붉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아니면 다른 여자, 지 무엇인가 하는 여자가 정부야?"
"당신들은 머리속에 그 생각밖에 없는 모양이군."
그러자 옆쪽에서 가방 속의 내용물을 뒤지던 사내들이 웃음 소리를 내었다.
대머리도 붉은 입안을 보이며 웃었다. -
"이봐, 장. 청장에게 전화 연결하고 이 여자 송치시킬 준비해."
자리에서 일어선 대머리가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곧 파리가 떠들썩하게 될 거다. 김원국의 일당을 처음 잡았단 말이다, 우리가."
"세계가 떠들썩할 거요, 반장님 "
옆쪽에서 누군가가 말을 받았다. 사무실은 들락이는 요원들과 무전을 주고받는 소리로
소란스러웠지만 활기에 차 있었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박은채의 옆으로 사내 한 명이 다가오더니 팔을 끌어 당겨
두 손에 수갑을 채웠다.
머리를 든 박은채와 시선이 마주치자 젊은 형사가 한쪽 눈을 살짝 감아 보였다.
"영광이오, 테러리스트 아가씨."
파리 교외의 베르사유에 있는 2층짜리 아담한호텔 방안이다.
가구는 오래 되어 낡았지만 잘 닦여져 반들거렸고 방안 구석까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마치 중세의 귀족 거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방이었다.
2층 방이어서 창 밖의 호텔 앞마당이 내려다보였는데
그늘진 정원에는 녹지 않은 눈더미가 쌓여 있었다.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던 최광이 머리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최성산을 바라보았다.
84 밤의 대통령 제3부 -및
"내가 동무에게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나는 지금 조국을 버린 것도 남조선 쪽에 붙은 것도 아니다. 내가 여기 김 선생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야."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힘이 실려 있었다.
"나는 이을설 차수와 손발을 맞추어 우리 공화국을 김씨 부자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기로 결심을 했어 이것은 김일성 주석이 죽고 나서부터 계획된 일이야.
내 말 알아듣겠나?"
"예., 주석 동지."
최성산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주석 동지라는 말도 듣기 싫다.
나는 내 힘으로 차지한 무력 부장이라는 직책이 차라리 낫다. "
"네, 무력 부장 동지."
"동무는 과업에 실패하고는 조국에 둥을 돌린 사람이야. 그렇지 않나?"
"네, 그렇습니다. 무력 부장 동지."
"호위총국의 백학림의 밑에 있었고?"
"네 . "
최성산의 이마에 진땀이 배어 나왔지만 그는 손을 들어 땀을 훔쳐낼 엄두도 내지 못한다.
나라를 떠났고 권력도 잃은 늙은 몸이었지만
아직도 최광에게는 방안을 압도하는 기백과 경륜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좋다. "
팎동안 창 밖을 바라보던 최광이 다시 머리를 최성산 쪽으로 돌리고는 말했다.
"동무는 군인이야. 그렇지 않나?"
"네, 무력 부장 동지 "
"동무가 충성을 맹세했던 것은 김정일 수령이었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무력 부장 동지."
"그것은 실패했다. 그것은 동무의 배신으로 끝이 난 것이다. "
"하지만 마지막 기회가 있다. 나와 함께 인민을 위해 싸우는 것,
인민을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싸움에 동참하는 것, 그 일을 동무에게 맡기겠다. "
"무력 부장 동지."
"동무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남조선측의 일을 하는 것보다,
그리고 유랑 생활을 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
"목숨을 바치fl습니다, 무력 부장 동지."
눈을 치켜뜬 최성산이 목메인 소리로 말하자 최광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아직 나는 동무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사명을 주었는데
도 또다시 배신을 한다면 동무는 군인은 물론 사람도 아니다. "
"나와 함께 큰일을 하자. 그리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하자."
"네 ‥‥‥‥
최성산은 말을 잇지 못하고는 시선을 내렸다.
최광이 다시 창 밖으로 머리를 돌렸으므로 방안은 한동안 정적에 싸였다.
그러나 아까처럼 가라앉은 정적은 아니었다.
그 시간에 우정만은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으며 북한 대사관의 대사 집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책상 앞에 서서 전화를 받고 있던 현만식 대사가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다급하게 물었다.
"찾았소?"
"없습니다, 아무 곳에도."
"큰일났구만."
현만식이 어깨를 떨어뜨리면서 두 눈을 크게 떴다.
"남조선측의 동향은 어떻소?"
"CIA 사람들한테서 들었는데 남조선 쪽은 수상한 낌새가 없답니다. "
"그렇다면 도대체 ‥‥‥‥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는 제각기 시선을 돌렸다.
최광이 행방을 감춘 지 세 시간이 지난 것이다.
오늘 아침 홍진무는 혼자서 귀국했는데 최광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우정만이 어금니를 물면서 앞쪽의 벽을 노려보았다.
오전에 병원으로 최장을 호위해 간 것은 그였고 입원실에 누워 있던 최광의 심부름으로
현만식에 게 쪽지를 전해 주고 돌아와 보니 침대는 비어 있었다.
병실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부하는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는 최광의 지시를 받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최광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행동에 제동을 가할 신분이 못 되었다.
그것은 우정만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현만식이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최광이 자의로 사라졌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가 남조선측에 가지도 않았다면 어딘가로 피신한 셈이 된다.
그때 방안의 정적을 깨고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으므로 현만식이 서들러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나요. "
날이 선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는 현만식이 번쩍 허리를 폈다.
"네, 수령 동지. 현만식입니다. "
"동무, 찾았소?"
"수령 동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
우정만은 하알게 질린 얼굴로 현만식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는다.
"그놈은 반역자요. 그 자식농과 가족들이 1군단의 관할 지역으로
넘어가 있는 것을 보면 계획적으로 이을설이와 반역을 하려는 거요. "
김정일의 말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동무,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그놈을 잡으시오. 데려을 수 없다면 그곳에서 처리해도 좋소."
"잘 알겠습니다. 수령 동지."
"미국으로 넘어간다면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이라고 전하시오. 받아들이면 안된다고."
"예, 수령 동지."
현만식은 끊긴 전화를 한동안 그대로 들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잡으라는 명령이오. 잡지 못하면 처치해도 좋다고 하셨소."
"알겠습니다. 아마 파리를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
"수령께서는 격노하고 계시오. 서둘러야 합니다, 동무 "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우정만은 서둘러 방을 나갔으므로 현만
식은 의자에 무너지듯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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