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습 제의
(1)
B월 13일 오후 2시, 파리의 리용 역을 출발한 TGV는 금방 속력을
내었다.
차창 밖으로 오랜만에 눈부신 헛살이 내려쪼이는 파리 시가지가
보였다가 뒤쪽으로 밀려가자 황량한 겨울 들판이 불쑥 다가왔다. 시
속 250킬로미터 가까운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소음도 진동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객실에서는 그야말로 총알을 타고 가는 듯한 속
도감을 만끽하고 있다.
김원국은 창에서 시선을 돌려 앞자리에 앉은 최광을 바라보았다.
횐색의 파카에 등산모를 쓰고 코와 턱에 수염을 붙인 최광은 나이보
다 20년은 젊게 보였다. 그의 옆에 앉은 지회은의 점퍼 차림과 어울
려 여유 있는 관광객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시바
다의 부하인 다케무라의 작품이다. 객실 뒤의 입구 쪽에 고동규와 마
주앉은 다케무라는 그들과 행동을 같이할 예정이었다.
기습 제의 129
"베르사유를 떠나기 전에 서울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알고 계시
는지는 모르겠는데 ."
김원국의 말에 최광이 눈을 점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김정일 씨가 이영만 대통령에게 평화 회담 제의를 했습니다. 직
접 전화를 해왔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다운 짓이오."
최광이 머리를 끄덕였다.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입니다. 성격이 섬세해서 반응이 예민하
고, 집착력이 대단하지요. 그런데 이영만 대통령은 그의 제의에 무어
라고 대답했습니까?"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
"대통령은 한시라도 빨리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
습니다. 한 달이 넘게 전시 상황이 계속되고 있어서."
"듣기보다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군 "
"예전의 북남 관계로 돌아가겠다는 건가요?그래서, 남조선 군부
는 잠자코 있을 생각입니까?"
"지난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군은 대통령의 명령에
따를 겁니다. "
최광이 머리를 돌려 스쳐 지나는 창 밖의 풍경에 시선을 주었다.
잠자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희은이 꼼지락거리더니 김원
국을 바라보았다.
"저,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130 밤의 대통령 제3부 -lU
"괜찮아, 앉아 있어."
최광에게 시선을 준 채로 김원국이 말하자 그녀는 뻣뻣한 상체를
의자에 기대었다.
이윽고 최광이 머리를 돌려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회담 조건은 아마 정상 외교 관계 수립, 이산 가족 왕래, 불가침
조약 등이겠지요?"
"대강 그렇습니다. "
"시간이 급하군 "
최광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으나 김원국은 똑똑히 들었다.
"남조선 대통령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면 마음 놓고 동쪽을 상
대할텐데 "
"물론 김정일과 이을설 차수는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잘 알고 있
습니다. "
"지금은 세력전으로 나가고 있지만 약점이 커지면 위험하지요."
"그렇게 예상하고들 있습니다. "
최광은 입을 다문 채 물끄러미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지희은이 조그맣게 헛기침을 하고는 옆에 놓인 프랑스 잡지책을
무릎 위로 펼쳤다가 이내 접었다.
김원국의 시선 끝에 객실의 반대편 입구 쪽좌석에 앉아 있는조
웅남과 김칠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옆에는 검은 테 안경을 끼고
신사복 차림을 한 최성산이 신문을 펼쳐 들고 있다.
TGV는 맹렬한 속도로 북쪽을 향해 겨울의 산야를 달려 나갔다.
기습 제의 131
우정만이 응답이 없는 전화기를 막 내려놓으려고 했을 때 매클레
인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여보세요."
"아, 매클례인 씨. 나 우정 만이오."
짜증을 잊은 우정만이 전화기를 바짝 귀에 대었다.
"그래, 몸은 어떻소?매클례인 씨."
"괜찮소. 걱정해 줘서 고맙소, 미스터 우. 그런데 무슨 일이오?"
매클레인의 분위기가 냉 담하다고 느꼈지만 그것도 예상한 일이다.
미국농들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증오심을 갖도록 교육받아 왔으
니 오히려 그것이 정상이다.
"매클레인 씨, 내가 며칠 전 부탁했던 파리 주재 KCIA의 자료 말
이오. 그것 때문에 전화한 겁니다. "
"뭐라구요? 파리 주재 KCIA의 자료라고 했습니까?"
"그렇소, 매클레인 씨. 당신이 고려해 보겠다고 하셨는데."
"당신이 오해하신 것 같은데, 미스터 우. 고려해 보겠다는 것이 아
니라 다시 연락 드린다고 한 것 같은데."
"아니, 매즐레인 씨. 그건 비슷한 내용 아니오?"
그러다가 말을 멈춘 우정만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사흘 전의 분위
기와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좋소, 매클레인. 없는 것으로 합시다. 내가 멍청한 짓을 했소."
"그렇습니까?그럼 이만."
딸깍 소리와 함께 저쪽에시 먼저 전화를 끊자 우정만은 전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매클레인에게 KCIA 요원들에 대한 정보를 요구한 사흘 전만 해
132 밤의 대통령 제3력 -lil
도 동부 전선의 반란은 문제가 아니었다. 수령 동지는 더이상의 협상
은 없다고 선언하고는 대표들을 철수시키고 당장에 남쪽과 동쪽을
깔아 뭉갤 것처럼 강경한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짚고 서 있는 그의 등뒤에서 문이 열리더니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
"대좌 동지, 박남호가 대사관을 출발했습니다. "
우정만이 선뜻 몸을 돌렸다.
"언제?"
"10분쯤 전입니다. 지금 동무들이 미행하고 있습니다. "
"놓치지 말어, 그놈을."
"예, 동무. 네 명을 보강시켰습니다. "
크리용 호텔 사건 이후로 박남호는 첫날 경시청에 조사받으러 오
간 것을 제외하고는 일절 대사관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쪽으로 가는 거야?"
"루브르 궁전 쪽 리볼리 거리를 지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지
금은‥‥‥‥
우정만은 뒷말을 다 듣지도 않고 방을 나왔다. 어느 놈이건 손에
넣고는 쥐어 짤 생각인 것이다.
박남호가 경시청의 구치소 안으로 들어서자 문 옆에 서 있던 제복
차림의 경관이 잠자코 앞장을 섰다. 담당 경위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
은 모양이었다.
구치소는 사방의 벽이 횐 페인트로 칠해진 깨끗한 건물이었지만
심한 악취가 났다. 향수와 오물이 뒤섞인 것 같은 독한 냄새여서 박
기습체의 133
남호는 입을 굳게 다물고는 코로만 숨을 쉬었다.
앞장서서 대기실을 지난 경관이 막혀 있는 복도 끝의 오른쪽 방문
앞에 섰다. 복도 끝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수감자들이 들어가
는 곳인 모양이었다.
"이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시오."
턱으로 방을 가리킨 경관이 몸을 돌렸다.
"보좌관님,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
그를 따라온 요원이 멈춰 서면서 말하자 머리를 끄덕여 보인 박남
호는 방으로 들어섰다. 다섯 평쯤 되어 보이는 방에는 철제 테이블과
양쪽에 두 개씩의 접는 의자가 있을 뿐 창문도 없고 가구도 없다. 그
는 문이 마주보이는 위치로 다가가서 앉았다. 박은채는 처음 만나는
것이었고 한국인의 면회로서도 처음일 것이었다.
담배 반대쯤태울시간이 지나고 나서 문이 열렸다. 스웨터에 파
카 차림의 박은채가 들어서면서 눈을 깜박이며 박남호를 바라보았
다. 그 순간 박남호는 나이답지 않게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생각했던 것처럼 겁먹은 태도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낙망으
로 풀죽은 모습도 아니었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었지만 피부는 반
들거렸고 붉은 입술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를 따라온 여경찰은 몸이 남자보다 더 큰 거인이었는데 찌푸
린 얼굴이었다.
"이봐요, 대화는 영어로 할 것. 알았소?"
박은채와 나란히 앉은 여경찰이 덮어씌우는 듯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말 안돼.그리고 시간은 10달이야."
134 밤의 대통령 제3부 -및
박남호가 박은채를 바라보았다.
"저는 안기부의 보좌관으로 있는 박남호라고 합니다. "
한국말이다.
"닥쳐 !"
여경찰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쳤다.
"한 번만 더 한국말을 깼다가는 당장에 면회 취소야."
"한 번만 더 소리를 질렀다가는 네 집을 오늘 밤에 폭파시켜 버릴
at다. "
이것은 유창한 프랑스어였다.
"잠자코 있지 않으면 네 가족을 몰살시키겠어. 알아들어?"
낮았으나 칼로 베는 듯한 박남호의 프랑스어에 여경찰은 소리 내
어 침을 삼켰다.
박남호가 둘째손가락을 들어 벽의 모서리를 가리켰다.
"어차피 저것으로 내 행동과 말이 모두 녹화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간 후에 우리들의 이야기를 번역해서 감상하도록 해."
그가 가리키는 모서리에는 주먹만한 카메라가 매달려 있었다. 박
남호가 박은채에게 다시 머리를 돌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부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결정을 했으니까
요. "
"저는 괜찮아요."
박은채가 부드럽게 말했다.
"다만 저 때문에 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분한테."
"그렇지는 않습니다. "
여경찰이 힐끗 카메라를 바라보고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습 제의 135
그러자 카메라에 붙은 조그만 마이크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몽펠 경사, 그 미친 작자를 그대로 둬. 그 작자 말대로 녹화해서
볼테니까."
그리고는 서너 명의 웃음 소리가 들리면서 마이크가 꺼졌다. 얼굴
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여경찰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북한은 내분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김정일이는 제자리를 지
키는 것도 벅찰 겁니다. "
박남호÷가 다시 말하자 그녀가 머리를 끄덕였다.
"잘됐어요. 변호사한테서도 들었습니다. "
"박은채 씨는 김원국 씨의 애인이었을 뿐으로 적극적인 행동에 가
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아도 됩
니0."
퍼뜩 시선을 든 박은채가 곧 시선을 내렸다.
"김원국 씨의 애인이었다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박은채가 다시 머리를 들었으나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박남호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TGV의 프랑스 종착역은 릴이었다. 벨기에와의 국경에서 가까운
릴에서 다시 브뤼셀까지 달려야 한다. 파리를 출발한 지 한 시간이
못되어서 TGV는 릴 근처로 다가가고 있었다.
화장실에 갔던 다케무라가 돌아와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고 선생, 릴에서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경비가 심하다는 연락이
n01요."
136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어디에서 말이오?"
옆자리에 신경을 쓰면서 고동규가 묻자 다케무라가 입맛을 W
다.
"릴에 먼저 가 있는 요원한테서 요. 시바다 조장도 우선 릴에서 내
리라고 했습니다. "
그는 화장실에서 무선 전화로 연락을 하고 나온 것이다.
고동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집중적인 감시를 받고 있는
안기부 대신으로 일본 정보국이 탈출을 돕고 있었다.
"알겠소. 큰형님한테 보고를 해야겠소."
"어제만 해도 국철역에 기관원들이 몇 명 없었는데 오늘은 수십
명씩이나 우글거리고 있다는 거요."
"정보가 샐 리는 없는데."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동규가 언짢은 얼굴을 했다.
긴장은 하고 있었지만 릴의 역사를 빠져 나오는 데는 검문을 받지
도 않았고 기관원같이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역사를 나왔는데 지회은이 최광의 팔을 끼고 있었으므로 제일
자연스럽게 보였다.
앞장을 서서 걷던 다케무라가 호들갑스러운 몸짓을 하며 동양인
한 사람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동료 요원인 모양히었다. 그의 뒤쪽
으로 따라가던 최성산이 힐끗 옆에 선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최성산은 어젯밤에 합류한 다케무라와 이야기를 나누
는 것을 보지 못했다. 김원국은 잠자코 몇 사람 건너 앞장서 가는 다
케무라의 뒤를 따랐다.
"김 선생님, 남조선은 평화 회담을 맺을 겁니까?"
기습 제의 137
최성산이 김원국과 나란히 걷게 되자 불쑥 물었다. 그러나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서둘러 머리를 돌린다.
"글쎄, 대통령은 그릴 생각인 모양인데."
김원국이 말꼬리를 흐리자 그는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저는 서울로 들어가면 이을설 차수께로 가고 싶었는데요."
"평화 회담이 맺어진다면 힘들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서울에서도 할 일이 있을 거야. 안된다면‥‥‥‥
앞쪽에서 한의 사람들이 다가왔으므로 최성산은 그에게서 떨어
졌다. 파리를 출발할 때에는 햇살이 환히 비치는 포근한 날씨였는데
릴의 하늘은 잿빛이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같이 습기
를 떤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보부르 거리를 우회전한 승용차는 신호등에 걸려 멈추어 섰다. 이
차선의 일방 통행 도로였고 좌우에는 우중충한 건물들이 오후의 그
늘 속에 묻혀 있었다.
"보좌관님, 아직도 따라오고 있습니다 "
운전석에 앉은 요원이 백미러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대인 것 같은데요. 뒤쪽의 회색 승용차도 아까부터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
박남호는 잠자코 무선 전화기를 집어 들고는 다이얼을 눌렀다. 신
호가 풀리자 그가 탄 한국산 대형 승용차는 불쑥 튀어 나가듯이 사거
리를 가로질렀다. 요란한 타이어의 마찰음을 내면서 승총차는 다시
오른쪽의 일방 통행로로 꺾어져 들』갔다.
138 밤의 대통령 제8부 -템
전화기를 귀에 댄 박남호3가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뒤쪽의 차들도 노골적으로 따라붙는다. 차체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급하게 꺾어져 들어오는 앞차에는 네 명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
"여보세요."
수화기에서 부하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나야, 준비해라. 놈들은 미행해 오는 게 아니다. 날 잡으려는 모
양이다. "
흔들리는 차 안에서 몸의 중심을 잡은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리볼리 거리 쪽으로 간다. 아마 또분룹 후에 그곳을 지나갈 거
야."
"알았습니다, 보좌관님 ."
전화기의 스위치를 끈 박남호는 앞좌석의 뒷면에 달린 포켓에서
베레타를 꺼내어 혁띠 사이에 젤러 넣었다.
"이놈들이 대낮에도 이러는 걸 보면 급했던 모양이군."
그러자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던 부하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
았다.
"평화 회담 하자는 건 속임수라는 증겁니다, 보죄잔님, "
"그건 신기한 일도 아니지만 놈들의 목표가 된 것도 좋은 기분은
아냐."
"도대체 왜 보좌관 님을‥‥‥‥
"내가 안기부의 책임자이기 때문이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놈들은 내가 김원국 씨와 최광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고 믿는
모양이야."
기습 제의 139
승용차는 앞쪽 사거리의 빨간 불이 켜지자 곧장 우측으로 꺾어져
들어갔다. 이제는 멈춰 서지 않으려는 것이다. 뒤쪽의 차량들도 서슴
없이 뒤를 따른다. 이번의 길은 차량의 통행이 드문 탓인지 행인들이
차도에 깔려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행인들에게 요란한 경적을 울리
면서 승용차는 아찔한 곡예 주행을 한다.
"나를 잡아서 족칠 작정이다, 저놈들은."
박남호가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멀정한 대낮에
이런 식으로 달려들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승용차는 길가의 쓰레기통을 들이받아 인도로 퉁겨 올리면서 쓰레
기를 흩뿌렸다. 행인들의 놀라고 화난 외침 소리들이 순식간에 멀어
져 갔다.
박남호는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검정색과 회색의 승용
차 두 대가 30미터쯤 뒤쪽에서 끈질기게 따라오고 있다. 그들 사이
에는 차량 두 대가 끼여 있었지만 불쑥불쑥 좌우로 머리를 내미는 검
정색 승용차는 곧 뒤쪽으로 바짝 붙어 올 것이었다. 아직도 햇살이
남아 있는 시가지 내에서의 레이스였다. 박남호는 주먹을 펴고는 땀
이 번지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보좌찬님."
운전석의 부하가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승용차는 차량들 사이
를 지그재그로 스쳐 지나면서 리볼리 거리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쌍놈의 새끼, 쥐 새끼같이 잘도 빠져 나가는군 "
앞자리에 타고 있는 이현복이 앞쪽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는 현역
소좌로 이번 작전의 지휘자였다.
140 밤의 대통령 제3부 -lH
"바짝 붙어!"
소리치던 그는 직진 도로의 앞쪽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는 것
을 보았다. 그렇다면 남조선 놈은 다시 우회전해 들어갈 것이다.
이현복은 가슴의 권총 홀더에서 루거를 꺼내어 손에 쥐었다. 차량
의 대열이 주춤대며 속력을 떨어뜨리기 시작했고 예상했던 대로 앞
쪽의 대형 남조선제 승용차는 이차선에서 사 차선으로 급히 차선을
바꾸었다.
이쪽의 운전사도 앞차의 꽁무니를 스치면서 사 차선으로 들어섰다.
사거리가 50미터쯤 앞으로 다가오자 이현복은 사거리 못 미쳐서 조
그만 우측 샛길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남조선 승용
차는 샛길로 머리를 틀고 들어서고 있다.
"따라 들어가!"
이현복이 주저하지 않고 소리쳤다. 남조선 놈들의 샛길로 들어서
는 모양이 그에게는 마치 쫓기다 힘이 다한 닭이 짚더미에 머리만 처
박는 모습을 연상시킨 것이다.
그들이 탄 검정색 피아트는 요란한 마찰음을 내면서 샛길로 들어
서고는 다시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면서 5미터쯤 미』1러지다가 멈추
어 섰다. 뒤를 따라오던 회색의 르노가 역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
지만 피아트의 꽁무니를 들이받고 말았다. 그러자 밀려 난 피아트는
1미터쯤 앞을 가로막고 선 트럭의 옆쪽에 머리를 슬쩍 부딪쳤다.
"이런 0."
문을 열고 뛰쳐 나가면서 이현복이 욕설을 뱉었다. 차 두 대가 겨
우 빠져 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이었는덴 트럭은 옆으로 멈춰 서 있
는 것이다. 트럭의 운전석으로 뛰어오른 그에게 샛길의 끝을 막 돌아
기습 제의 141
나가는 남조선제 승용차의 모습이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다.
응접실의 유리문 밖으로 회색 하늘과 검은 사과나무 숲이 보였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도 주위는 어두웠다. 한두 점씩 흩날
리던 눈발이 이제는 보이지 않았으나 방안의 불빛이 닿은 유리창은
물기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응접실은 난방이 잘 되어 있어서 따
뜻한단. 가구는 정연하게 배치되었고 집안은 깨끗하게 손질이 되어
있어서 숙소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릴 시내에서 10분쯤의 거리였지만 이곳은 사방으로 사과나무 숲
과 it른 잡초가 무성한 들판이 펼쳐져 한적했고 국도도 1킬로미터쯤
이나 떨어져 있다. 따라서 피신하기에는 안성맞춤의 장소였고 다케
무라의 말에 의하면 집주인은 가족들과 함께 남쪽의 니스로 여행중
이라는 것이다.
창 밖의 사과나무 숲을 바라보고 있던 김원국은 머리를 들었다.
조웅남이 마루를 을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형님, 출발은 내일이오?"
앞자리에 털썩 앉으면서 그가 물었다.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는데
둥근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감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
"그렇다은 오늘 밤에 한잔 히야렀는디."
"경비를 서라, 교대로."
"아따, 이런 들판에."
그러다가 힐끗 김원국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바람이 앙상한 나
뭇가지들을 쉽쓸고 지나갔다. 유리창에 부딪는 물기는 눈발인지 텟
발인지 이쪽에서는 알 수가 없다.
142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조웅남이 입을 열었다.
"형님, 김정일이가 평화 회담인지 지랄인지를 허자고 혔습니까?"
"그래, 정부에서 검토중인 것 같다. "
"검토는 무신 검토, 지랄들 허고 있네 "
코웃음을 치고 난조웅남이 말을 이었다.
"객지에서 좇빠지게 일 템그러 놓응게로 악수허고 끝낼라고 허는
거인"
김원국이 쓴웃음을 짓자조웅남의 기세가 더욱 올랐다.
"그럴라은 우리가 머헐라고 이 고생을 한다요? 아예 여그서 고스
톱이나 치다가 그 씨발놈들 일 끝내은 돌아갑시다. "
그랬다가 그는 번쩍 눈을 부릅떴다.
"응? 대통령, 그 씨발놈은 전쟁 안헐라고 항복 헐라고 혔잖여? 그
시키 몰아내야 헙니다. 김정일이한티서 돈 먹은 것이 틀림없어요."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무식한 놈 같으니."
"그것은 형님이 무식헌 거요. 영리허다고 허는 놈들은 너무 복잡
허게만 생긱헝게로 뻔헌 일을 두 눈 뻔히 뜨고도 못 보는 거요."
"윌 못 본단 말이냐?"
"뭐긴 뭐요? 남북 통일이지."
그러자 밖에 나갔던 다케무라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김
원국을 향해 머리를 숙여 보였는데 온몸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비가 많이 올 것 같습니다. "
얼굴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면서 그가 말했다.
"일기 예보에는 이 비가 며칠 계속된다고 하는군요."
"준비는 다 줬소?"
(2)
김원국이 묻자 다케무라는 조웅남의 및자리에 앉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예, 브취셀에만 무사히 도착하면 거기에서 동경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일본 항공의 관광 전세기는 모레 아침 9시에 브취셀에서 출발하니까요."
김원국의 일행은 관광객에 섞여 논스톱으로 동경까지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 시간의 한국, 프랑스와의 시차로 인해 다음날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청와대의 지하 집무실로 들어선 임병섭은 넓은 집무 실에 에 앉아 있는
대통령을 보고는 숨을 들여 마셨다.
대통령은 외로워 보였다.
상황실의 군 참모들도 피로한 몸을 침대에 눕혀 쉬고 있는 시간이다.
일국의 대통령이 해야 할 일과 책임이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가를
그의 분위기를 보면 한순간에 느낄 수가 있었다.
"어서 와요, 임 부장. 이런 시간에 불러내어서 미안해."
낮은 목소리로 대통령이 말했다.
"아닙니다,각하."
임병섭이 커다랗게 머리를 저었다.
"그보다도 각하, 건강을 생각하셔야·
"어서 앉으시오."
그가 장방형 테이블의 의자에 앉는데 문이 열리면서 비서 실장 박
종환이 들어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제 더이상의 구성원은 없는
모양인지 대통령이 헛기침을 하고는 임병섭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144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전등의 을 받아 번들거리며 빛을 내었다.
"임 부장, 김정일이 나에게 또 전화를 해왔소."
"내일 아니, 이제 오늘이군. 오늘 정오에 부수상 김달현을 대표로
하는 정상 회담 대표단을 서울로 보낸다고 했소. 김달현을 수상으로
승격시켰더군 "
"그쪽에서 내놓은 조건을 말해 주었는데 참고로 들어 보시오. 첫
째로 남북 불가침 조약의 서명, 남북한 양군의 휴전선 철수, 비무장
지대의 지뢰원을 제거하고 다섯 곳의 통행로 설치, 양국 국민의 제한
통행을 당장에 실시하겠다고 했소. 우선 이산 가족은 무조건 왕래를
허용하고, 석 달 이내에 통행증만 가지면 양국민은 남북한을 왕래할
수 있소."
"서울과 평양에 대사관 기능을 확패한 대표부를 설치해서 외교,
T·방,통상에 관한 협의체를 즉시 구성하겠다고도 했소."
대통령의 얼굴은 점점 활기를 띠어 갔고 목소리는 생기가 넘쳤다.
"이것은 김정일의 체제 전복보다 더한 소득이오.우리가 바라던
것 이상의 결과요. 그렇지 않소? 물론 김정일은 동쪽의 이을설과 최
광을 의식해서 우리에게 이런 제의를 했을 거요, 정권을 잃기보다는
개방을 해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려는 의도도 있을 거요. 하지만 우
리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소, 그렇지 않소?"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대통령이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임병섭 입
을 열었다.
기습 제의 145
"각하, 그러면 이을설은 어떻게 됩니까?그리고 그와 동조해서 김
정일에게 반기를 든 부대는요?"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소."
"지금 우리를 겨누고 있는 수천 문의 미사일을 마음 놓고 모두 그
쪽으로 쏘아 버리」E군요."
"이을설은 아직 우리에게 제대로 연락 한번 하지 않았소. 강 계엄
사령관의 말대로 이을설은 우리를 이용해서 북한의 정권을 잡는 것
만이 목적이오. 그자가 정권을 잡으면 예전의 남북한 관계로 돌아간
다고 당신들이 말했지 않소?"
대통령의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
"나는 김정일을 택하겠어.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면 말이야. 아마
임 부장도 같은 생각일 거야."
대통령이 존대 말에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반말로 되는 것에 익숙
한 임병섭이었지만 오늘은 그것도 마음슥 걸렸다.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둘 중의 하나는 피를 볼 상황이야. 그것이 남북이 아니라
북쪽의 동서가 되었으니 나로서는 다행이고."
그는 지친 듯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나는 아직 남한의 대통령이야, 임 부장. 북쪽의 주민들에 대해서
신경 쓸 여유도 없고 능력도 없어."
"이을설을 제거하면 김정일은 배신합니다, 각하."
"김정일을 제거해도 마찬가지의 상황 아닌가, 지금이."
"그래서 지난번 강 사령관이 말씀 드렸던 대로."
"하시모토 수상과도 이야기가 되었어, 임 부장."
146 밤의 대통령 제3부 -토
임병섭이 눈을 치켜뜨자 대통령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박종환이 입을 열었다.
"하시모토 수상이 먼저 전화를 해왔어요, 임 부장."
"각하에서 수상과 말씀을 나누다가 의견의 일치를 보신 겁니다.
일본은 연합군의 자격으로 회담에도 참석해서 북한측의 서약을 받아
낼 것입니다. "
"각하."
임병섭이 머리를 들었다.
"오늘 아침에 비상 각료 회의에 이 안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셔야 됩니다. "
대통령이 임병섭을 바라본 채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임
병섭은 그의 두 눈이 하니 파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의 열기가 이제는 가셔져 있는 것이다.
새벽 2시, 청와대의 지하 상황실 앞으로 승용차 두 대가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가와 멈추어 섰다. 2월 중순이었지만 아직 영하의
차가운 날씨였으므로 차에서 내리는 사내들은 하앙게 입김을 뿜어내
었다.
어깨의 별판 계급장을 어둠속에서 희게 번쩍이며 일단의 장군들
은 서둘러 벙커의 계단을 내려갔다. 앞장션 것은 연합군 사령관인 강
동진이었고 고성국과 강한기가 그의 뒤를 따른다.
"각하께서 무리를 하고 계셔. 건강이 걱정이 돼."
고성국이 옆을 따르는 강한기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습 제의 147
"일흔이 내일 모레인데 요즘 밤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한다는 거
야. "
"어썼든 큰 결정을 하셨습니다, 이번에. 하지만 절대로 후회하시
지 않을 겁니다. "
"당연하지. 하지만 우리가 목숨을 바친다는 식의 기개만으로는 부
족해. 철저한 대비와 운용이 있어야 돼."
고성국의 말은 자신에 차 있었다. 머리를 끄덕인 강한기는 쥐고
있는 육중한 가죽 가방을 다른 손에 바러 쥐었다.
대통령은 강동진이 제안한 이을설과의 연합 계획을 검토하고 싶다
고 했던 것이다. 박종환으로부터 그런 연락이 왔을 때 강한기는 이를
악물고 기쁨의 탄성을 삼켜야만 했다.
복도의 중간 부분에는 조그만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자리에 앉
아 있던 경호실 요원이 그들을 보자 잠자코 일어섰다. 낯익은 젊은
경호원이다.
"최광 씨도 곧 이쪽으로 올테니까 문제 없습니다. 더욱이 그들도
김정일의 평화 회담 제의에 충격을 받고 있을테니 까요."
테이블 위에 권총 혁대를 풀어 놓으면서 강한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상황실로 다가갔고 문 양쪽에 서 있던 경호원들이 잠자코
문을 열어 주었다. 방안에 들어서자 그들의 눈에 띈 것은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박종환이다.
"어서 오십시오, 사령관님."
박종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나 깔끔한 옷차림이었던 그는
피로 때문인지 넥타이의 매듭을 아래쪽으로 풀어 놓고 있었다.
148 밤의 대통령 제갈근 -방
"안기부장은 어디 가셨습니까? 먼저 와 계시다고 들었는데."
자리에 앉으며 강동진이 묻자박종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먼저 가셨습니다. "
강한기가 옆자리의 고성국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고성국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박종환을 바라보고만 있다.
강동진이 헛기침을 했다.
"각하께서는?"
"들어가셨숩니다, 피곤하셔서."
눈쌥을 치켜올린 강동진이 막 입을 열려는데 문이 열리며 경호실
요원들이 들어섰다. 앞에 선 사내는 경호실의 제2인자인 문한수 차
장이었고 그의 뒤를 따른 요원들은 모두 7, 』뼜도 넘는다. 장군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일이야?"
배에 힘을 넣은 강동진이 굵고 높은 목소리로 박종환과 문한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왜 들어온 거야?"
문한수를 향해 다시 묻자 어깨를 편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종
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령관님, 각하께서는 오늘자로 사령관님의 직위를 해제하셨습
니다. "
"뭐라고?"
강동진이 벌떡 일어서자 경호실 요원들이 그의 뒤쪽으로 바짝 다
가섰다.
박종환이 말을 이었다.
기습 제의 149
"후임으로는 이영규 대장을 임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 두 분들
도."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 있는 고성국과 강한기를 바라보았다.
"모두 직위 해제가 되었습니다. 후임도 임명이 되었고."
"이 개새끼!"
소리 친 것은 강한기였다. 그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힘껏 내려쳤다.
"이영만, 그 비겁한 개새끼!"
경호실 요원 두 명이 다가와 뒤쪽에서 그의 양쪽 팔을 잡았다.
"당신들, 실수하는 거야."
고성국이 박종환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는 입술을 뒤틀며 비웃듯
이 웃었다.
"이영딴이 이렇게 비열한 놈일 줄은 몰랐어. "
"닥쳐! 고성국 중장."
박종환이 소리쳤다.
"군인의 입장으로만 각하를 판단하지 말란 말이야. 각하는 심사숙
고 하셨어."
"우리를 어떻게 할 셈이냐?"
강한기가 묻자 박종환이 문한수를 바라보았다.
"모시고 가요, 문 차장. 당신들은 당분간 모처에서 생활하게 될 거
야. 며칠 동안만 쉬고 있으면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도록 각하께서
배려하실 거야."
"평화 회담을 할 작정인가?"
어깨를 편 강동진이 묻자 다가선 요원들이 주춤하며 움직임을 멈
추었다. 박종환이 머리를 』1덕였다.
150 밤의 대통령 제길근 -방
"북한에서 대표단이 내려오기로 되어 있어요, 사령관."
"안기부장도 체포했겠군, 이런 식으로."
"당신들은 각하와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국가를 전쟁 상황으로만
끌고 갔소."
"비겁한 놈!"
처음으로 강동진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국민을 위한다는 가면을 벗으라고 이영만에게 전해라. 그놈은 국
가를 이끌어 갈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그놈이 지금 노심초사하는 것
은 제 권력의 누수 방지밖에 없다. 군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 것이야."
"말을 삼가라, 강등진!"
박종환이 맞받아 고함을 쳤다.
"이것은 시대의 조류다. 일본과 미국이 각하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단 말이다. "
"그렇군. 그럴 줄 알았다. "
굳어진 얼굴의 강동진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겠지. 제 나라의 충성스런 군인을 믿지 못하고 일본과 미국
측과 상의를 했겠지 놈은 김정일과 꼭같은 놈이다. 분하다. "
강동진이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정말 분하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원통하고 부끄럽
다. "
"사령관님. "
고성국이 손을 뻗쳐 강동진의 손을 잡았다.
"사령관님, 가시지요. 저도 이곳이 싫습니다. "
기습 제의 151
그의 눈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경호 요원들이 다가와 그들의
팔을 끼었고 박종환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영만 대통령은 그 시간에 복도 끝쪽의 대통령 집무실에서 전화
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소파에 등을 묻고는 두 다리를 앞쪽으로 길
게 뻗은 자세였다.
"가토 중장,귀국의 수상한테서 연락을 받았지요?"
그가 일본어로 묻자 가도의 딱딱하지만 공손한 대답이 들려 왔다.
"예,대통령 각하. 수상 각하로부터 지시를 받았습니다. "
"이영규 대장이 오늘 아침부터 연합군 사령관을 맡게 되었습니다.
가토 중장의 협조가 필요해요."
"각하, 염려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참고로 말씀 드리는데, 박종환 비서 실장이 안기부장 직을 맡게
되었소."
"OtOt, fl . "
"내일 오후 2시에 북한에서 평화 회담 대표들이 내려옵니다. 우리
연합군은 그자들에게 단결된 강한 인상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
"그렇습니다, 각하."
"미국의 클린트 대통령도 내 평화 회담 수락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한 미군 사령관인 월슨 대장에게 한국 정
부를 적극 후원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
"당연한 일입니다, 각하."
"그림 이만 끊겠소."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영만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깨가 쑤셔 왔
152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고 머리속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오랜만에 나른한 편만감이 온몸으로
퍼져 갔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면서 박종환이 들어섰다.
"각하, 일을 끝냈습니다. "
다가온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였다.
"불편한 점이 없도록 해. 그들이 죄인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각하."
"오늘 아침의 비상 회의 준비는 다 되었지?"
"예, 각하. 이상 없숱니다. "
"비상 회의가 끝나면 국회의 인준을 받아야 할테니까 차질이 없도
록 해."
"그것도 오늘 오후에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국회에서도 만장일치
로 가결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
"비상 회의에 여야의 대표들에다 당의 5역들을 추가시키게, 야당
도."
"야당도 말씀입니까? 알T?l습니다, 각하."
"국회 통과가 되면 내가 특별 방송을 해야 할테니까 시간을 맞춰
야 돼."
"저녁 8시로 잡아 놓겠습니다,각하."
머리를 끄덕인 대통령이 소파에 둥을 묻었다.
"일본의 무라야마 외상이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클린트가 로
젠스턴을 회담에 참석시켜 달라고 했어."
대통령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한 달도 안된 사이에 이렇듯 주객이 전도되다니. 북한이 평화 회
기습 제의 153
담을 사정하고, 미국은 회담에 끼워 달라고 부탁을 해오고 있어. 이
것은 모두 우리 국민이 똘똘 뭉쳐서 국가의 저력을 보여 주었기 때문
01다. "
"그렇습니다,각하.모두 각하의 위대한 영도력이 계셨기 때문입
니다. "
"이것 보게. 낮 간지러운 소리 그만해."
그러나 대통령의 얼굴은 밝다.
"국운이 강했기 때문이야.북한은 곯아 있었고.김정일이 그것을
남쪽으로 터뜨리려다가 군부에게 뒤통수를 맞았기 때문이지."
"그렇습니다. "
"어쨌든 회담에는 미국의 로젠스턴과 주한 미군 사령관 월슨 대
장, 그리고 일본의 무라야마 외상과 가토 중장이 참석하도록 했어
그들은 배석자로서 한국의 위상을 빛내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김정일이 내려와서 각하께 평화 회담의 서명을 해준다면 더 좋을
텐데요."
"할 수 없지. 그자는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니까."
회담의 한국 대표는 점창덕 총리였고 연합군 사령관인 이영규가
부대표였다. 그리고 외무 장관 장영식도 자리를 빛낼 것이었다. 대통
령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글린트가 체면을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더구만. 가소로운 사람이
야. "
머리를 끄덕인 박종환이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각하, 강동진과 고성국 등의 반발이 심했숩니다. "
"왜? 대항하던가?"
154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이맛살을 찌푸린 대통령이 물었다.
"아닙니다. 순순히 경호실 사람들에게 끌려 갔지만 분한 모양이었
습니다. "
"군 내부에 그들 세력이 많아.철저히 반발을 차단하도록."
"이영규 대장과 그의 연합사 참모들이 잘할 것입니다. 일본군과
미군들이 도와 줄 것이구요."
입맛을 다신 대통령이 머리를 두어 번 』1덕였다.
"군인들은 단순해. 일본군이 제 편이라고 믿고 있었단 말인가?그
들이 정략적으로 어떻게든 통일을 방해하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군 단독으로도 이을설을
이용하면 통일이 된다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
"모험이야. 확신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수백만의 회생을 치를 수
는 없어."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장, 아니, 오늘부턴 부장이군, 내 특별 성명 원고에 각별히 신
경쓰도록 하게. 역사적인 발표가 될테니까,"
"염려 마십시오, 각하. 국민들은 모두 각하의 결단을 전폭 지지하
고 환영할 것입니다. "
2월 14일 새벽 3시, 인민군 제1군단 사령부의 시청관실,
이을설과 강백진, 그리고 이번에 1군단 참모장이 된 양문석 중장
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침침한 형광등 불빛 때문인지 그들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3)
강백진이 머리를 들고는 이을설을 바라보았다.
"총참모장 동지, 김정일이는 과연 미쳤습니다. 놈이 지휘관의 가
족들을 주석궁으로 끌어 모으는 한편으로 남조선에게 평화 회담을
제의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
그러면서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 미친 놈이 이제는 지금까지 멸시해 왔던 남조선측에 엎드려
평화 회담을 애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치기 위해서 말입니다. "
"평양에서 보내 온 정보에 의하면 내일 오전에 회담 대표단을 서
울로 파견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
이을설이 잠자코 있자 강백진이 조그맣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남조선 군부가 김정일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인 것도 뜻밖입니다.
적어도 우리측에 그런 상황을 이야기해 줄 수는 있었을텐데요."
양문석이 그의 말을 받았다.
"남조선의 이영만은 파리에서 김정일에게 항복하려고 했던 자입
니다. 그에게는 좋은 기회였을 겁니다. "
"총참모장 동지, 그렇게 되면 우린 고립됩니다.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
"남조선과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 이제까지 휴전선 방위에 배치되
었던 제5군단과 2군단이 모두 이쪽으로 돌려질 것입니다. "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냐. 우궈 1군단과 7군단 병력으로 놈들을
116 밤의 대통령 제3부 -방
막을 수 있어.쉽게 끝나지는 않아, 양 동무."
이맛살을 찌푸린 강백진이 말하자 양문석도 지지 않는다.
"김정일은 기세를 타게 될 것입니다, 상장 동지. 이제까지 중립적
인 입장이었던 부대들이 =1쪽으로 붙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
"그짯 북부 지역의 몇 개 부대쯤은 붙어도 돼."
"남조선측이 김정일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우리를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상장 동지."
그러자 강백진이 어깨를 굳히면서 그를 쏘아보았다.
양문석이 아픈 곳을 건드렸던 것이다. 남조선이 바라고 있었던 것
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통일일 것이었다. 1들은 김정일에게 반기를
든 이쪽 세력이 연합해 오기를 기다려 왔다. 그러나 그 동안 수십 번
이 넘도록 대화를 시도했던 남조선군에게 이쪽은 현상태에서 기다려
달라는 말만으로 넘겨 왔던 것이다.
이윽고 이을설이 입을 열었다.
"남조선군의 고성국 중장에게 연락을 해라.평화회담은 실수라
고. 이대로 열흘만 기다리면 김정일의 정권은 붕괴될 것이라는 것도
전해 ."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
강백진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들을 납득시키기에 부족합니다. 김정일
처럼 난데없이 평화 회담 제의를 하지는 않더라도."
"동쪽을 해방시키겠다고 해."
강백진과 양문석이 몸을 굳혔다.
"어떻게 말씀입니까?"
기습 제의 117
긴장한 얼굴의 강백진이 묻자 이을설이 벽에 걸린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남조선의 기갑 사단은 열 시간이면 원산까지 올라을 수 있을 것
이다. 우리가 길을 터줄테니까. 이제 우리 인민군은 남조선 군과 연합
군이 될 것이다. 상대는 김정일 하나다. "
"김정일은 섣불리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제놈이 미사일을
쏘면 우리도 가만 있지 않을테니까. 놈은 전쟁에 자신감을 잃고 있
어. 주석궁에 인질을 모으고 있는 것도 그 증거다. "
이을설의 두 눈이 열기를 띠어 갔다.
"놈은 동쪽과 남쪽의 대군을 상대할 능력이 없다. 남조선군에게
동쪽을 맡기고 우리가 평양을 압박하면 일주일이면 평양은 무너진
다. "
강백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락하겠습니다, 총참모장 동지 ."
"그래, 통일이 우선이야 다른 것은 나증이다. "
2월 14일 새벽 3시 30분, 연합군 사령부의 지하 상황실.
참모와 함께 자료를 내려끌보고 있던 이케다는 상황실로 들어서는
일단의 군인들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장 각하, 이케다 소장입니다. "
앞장션 이영규 대장을 향해 이케다가 절도 있게 경례를 올려 붙였
다. 그와는 오래 전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인 것이다. 머리를 친덕인
이영규가 다가와 잠자코 테이블의 상석에 앉았다.
358 밤의 대통령 제3부 -llf
"이케다 소장, 이쪽은 유진영 중장이고 저쪽은 채일주 중장이오.
앞으로 같이 일해 갈 사람들이니까 인사나 하시오."
그가 좌우의 장군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이케다는 예의 바르게 경
례를 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장군."
부관과 참모들이 뒤쪽으로 몰려갔고 잠시 상황실 안은 그들의 소
음으로 활기가 찼다.
이영규가 이케다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가토 중장은?"
"잠간 쉬러 가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
"시령부를 장악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이케다 소장."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헌병대의 박 준장이 했습니다. "
이케다가 가볍게 말했다.
새벽 2시 정각에 헌병 부시정관인 박준영 준장이 일단의 무장 헌
병들을 이끌고 사령부로 진입해 들어왔던 것이다. 헌병 부대가 밖에
서 경비 부대를 장악하는 동안 이케다는 일본군으로 시령부 안을 통
제하고 있었다. 경비 연대장 우중철 대령은 강한기 소장의 심복으로
혁신 장교단의 일원이다. 그가 헌병 부대에 저항하면서 시령부 내부
의 동조자들과 합세한다면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유혈 사태 없이 우중철과 경비 연대의 지휘관들은 체포되
었고 일본군에 의해 통제되었던 사령부는 박준영이 들어와 참모들
중에서 10여 명을 골라내어 연행해 가는 것으로 짧은 시간 내에 끝
이 났다. 이것은 모두 카토와』1케다가 청와대의 지시를 받고 진행한
일이었는데 하시모토 수상의 승인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기습 제의 119
사령부는 이영규의 새로운 참모 단으로 채워졌다. 통신이나 수송
등 기술 관계의 참모들은 대부분 남아 있었지만 참모의 핵심인 작전
참모들은 새 얼굴들이 많았다.
"오늘 오전에 월슨 대장이 이곳으로 올 거요, 이케다 소장 대통령
각하의 지시로 이제는 주한 미군도 연합군의 작전 회의에 참석하기
로 되었습니다. "
이영규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한미 방위 조약이 유지되고 있으니 이상할 건 없습니다. 다
만 연합군 사령관직은 한국 대통령이 임명한 내가 맡습니다. "
"당연한 일입니다, 사령관 각하. 우리 일본군이나 미군은 지원군
일 뿐입니다. 주력군의 시령관이 연합군 사령관을 맡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
그들은 곧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사령관이 바뀌었다고 해
서 작전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정치적인 상황이
다. 전선은 그대로 고착시켜 놓고 이영만과 김정일, 이을설의 게임이
시작되었고 클린트와 하시모토는 이기는 싸움의 훈수꾼의 명예를 가
지려고 한다.
"저, 긴급 무선이 왔습니다만."
대령 계급장을 붙인 정보 장교가 이영규에게 다가와 말했다.
"북한의 강백진 상장입니다. "
"강백진?"
이영규가 눈을 치켜했다.
"그자가 왜?"
"고성국 중장이나 강한기 소장을 바러 달라고 합니다. "
160 밤의 대통령 제3부 -lEf
"내가 받겠다. "
그러면서 일어선 것은 이번에 고성국의 후임이 된 유진영 중장이
다. 그러자 이케다가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잠간, 장군. 장군보다 내가 받는 것이 낫겠습니다. "
유진영이 두 눈을 점벅이며 그를 바라보자 이영규가 머리를 끄덕
였다.
"유 중장, 당신은 앉아. 이케다 소장이 받는 것이 낫겠어. 그들에
게 당신은 생소한 사람이야."
이케다는 대령과 함께 상황실 옆쪽의 통신실로 들어섰다. 기다리
고 있던 소령이 그에게 무전기를 건네 주었다. 출력이 강한 일제 군
용 무전기였다.
"여보세요. 나, 이케다 소장입니다. "
일본식 발음이 강한 영어로 이케다가 말하자 저쪽이 금방 말을 받
는다.
"난 강백진 상장이오, 이케다 소장. 당신 이야기 많이 들었소."
저쪽은 러시아 억양이 강한 영어였다.
"그렇습니까? 나도 강 상장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반갑
습니다. "
통신실의 장교들이 시선은 이쪽으로 돌리지 않았으나 촉각을 세우
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옆에 서 있던 대령은 바짝 그에게로 한걸
음 다가선다.
"반갑소, 이케다 소장. 당신들의 땅크 여단은 왜 세었소."
"고맙습니다, 강 상장.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장교들의 시선이 참지 못한 듯 그에게로 돌려졌다.
기습 제의 161
이을설 휘하의 강백진은 상장으로 한국군 계급으로는 별 셋짜리
중장이다. 이제까지 인민군측으로부터 무선 연락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단지 두어 번 이쪽의 연락에 영관급 참모가 대답하는 형식으
로 오갔을 뿐이다.
"이케다 소장, 중대한 일로 한국군의 고성국 중장과 이야기를 하
고 싶소."
강백진의 말에 이케다는 숨을 들여 마셨다가 천천히 뱉어내었다.
"강 상장,고 중장은·지금 자리에 없습니다. "
"미안하지만 빨리 그에게 이 전화를 연결해 줄 수 없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인데요, 강 상장. 대신 나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럼 강한기 소장은 없습니까?"
"그도 지금 고 중장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가 있어서요. 사령관을
모시고 말이오."
"나에게 말씀하시면 어떻게든 전해 주지요. 급한 일이라면 말입니
다. "
잠간 동안 망설이던 강백진이 입을 열었다.
"우리 통로로 연합군을 진입시켜 주시오. 우리는 서쪽으로 이동하
겠습니다. "
"원산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들은 우리 인민군 진지에
주둔하면 됩니다. 시간이 없어요."
"원산까지 말입니까?"
162 밤의 대통령 제8부-I[1
"그렇소. 함흥까지도 가능하지만 전선을 그렇게까지 길게 뻗칠 필
요는 없소. 평양만 점령하면 되니까."
"당신들의 세부 계획을 아침 8시까지 』에게 통보해 주시오. 우리
도 준비해 놓을테니까, 그리고."
강백진이 한 호흡의 사이를 두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 뻔한 미친 놈의 농간에 넘어가지 말라고 전하시오. 이만하면
농간에 넘어갈 이유도 없겠지만."
그러자 이케다가 입술 끝만으로 웃었는데 저쪽의 강백진은 보지
못할 것이었다.
안기부의 제3차장 설정식이 소공동의 연락 사무소에 들어선 것은
새벽 4시였다. 헝클어진 머리에 두 눈을 치켜뜨고 있어서 당직으로
앉아 있던 직원 두 명이 놀라 일어섰다.
"기계 어디 있어?"
대뜸 쉰 목소리로 물으면서 그는 사무실을 두리번거렸다. 기계는
무전기를 말하는 것이다. 나이 든 직원이 정신을 가다듬으며 그에게
로 다가왔다.
"차장님, 기계라시면, 저."
"무전기 말이다. "
"예, 저쪽 방에."
설정식이 이곳 연락 사무소에 온 것은 작년 초의 시찰 방문 때 한
번밖에 없다. 1는 직원의 뒤를 따라 무전실로 들어섰다. 소공동의
연락 사무소는 신문의 외신 기사를 받는 역할과 함께 시래의 언론사
기습 제의 163
활동에 대한 지원과 보조가 주업 무였다.
설정식은 방의 한쪽을 모두 메우고 있는 국산 55-7무전기 앞에
가 섰다.
"소위치를 켜라."
그가 말하자 직원이 자리잡고 앉아 스위치를 켜고 주파수를 맞추
었다.
"어디로 하시렵니까?"
"파리의 박남호 보좌관."
그는 지친 듯 테이블의 귀퉁이에 엉덩이를 걸쳤다. 의자가 바로
옆쪽에 놓여 있었지만 앉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전파의 발신음
이 방안을 가득 채우더니 직원은 컴퓨터를 두드려 박남호의 번호를
찾아내더니 곧장 전화를 연결시켰다.
"차장님, 됐습니다. "
설정식은 직원이 건네 준 전화기를 귀에 대었다. 서울의 새벽 』시
면 파리는 전날 밤 8시이다. 신호가 다섯 번쯤 울리고 나더니 딸각
소리와 함께 신호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박남호의 목소리였다.
"박 보좌관, 나야."
"예, 차장님 ."
"긴급 사태야."
의자에 앉아 있던 직원이 온몸을 굳혔다.
"대통령이 부장님과 연합 사령관을 체포했어. 안기부와 사령부의
급진 세력은 모조리 체포되었단 말이야."
164 밤의 대통령 제3부 -템
설정식이 소리치듯 말하자 박남호는 숨을 죽인 듯 대답이 없다.
"대통령은 내일 김정일과 평화 회담을 하고 조약을 맺게 돼. 그는
상황을 이것으로 끝내려는 거야. 알겠나?"
"예, 차장님."
"김원국 씨와 최광이 서울에 오면 안돼. 이제 최광의 가치도 없어
졌고 김원국 씨의 방패막이를 해줄 사람도 없어."
설정식은 이를 악물고는 코로 깊게 숨을 들여 마셨다.
"그를 막아! 어서! 그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
어."
"알겠습니다, 차장님 ."
"일본측에 조심하도록 해. 물론 이 무전을 이쪽의 일본군 통신 위
성이 듣고 그들에게 전해 주3a지만."
"알고 있습니다. "
"대통령의 쿠데타를 도와 준 것은 일본군이야. 그자는 제 권력과
위상을 지키려고 일본군을 이용했어."
"이완용이 같은 놈입니다. "
박남호의 말소리도 격렬해졌다.
"차장님,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습니까?"
"분하지만 없어. 대통령이 그렇다고 조국에 등을 돌릴 수는 없단
말이다. "
"하지만 저는 이제부터 본국의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겠습니다,
차장님 . 잠적하겠단 말입니다. "
박남호의 목소리는 이제 떨려 나왔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릴 믿고 있던 이을설을 배신한 셈 아닙니까?"
기습 제의 165
"그것은 아니지만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친 것이야. 나는 그것이
분해 ."
그러나 대통령의 쿠데타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얼마든지 명분이
있었고 곧 그것이 훌륭하게 합리화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설정식
은 그것이 더욱 분했다. 이영만에게는 임병섭과 강동진 등이 국가의
명령을 어긴 반역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서둘러! 어서!"
악을 쓰듯 말하고 난 설정식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직원이 힐끗
그를 바라보고는 손을 뻗쳐 무전기의 스위치를 껐다. 설정식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봐,이곳에 어디 잠깐눈을붙일 곳이 없을까?"
"예, 차장님. 숙직실이 있습니다만 누추해서‥‥‥‥
"잘되었어. 그곳에서 한숨 자야겠네. 사람들이 날 데리러 올 때까
지만이라도 말이야."
건둥거리는 발길로 앞장서 가는 직원의 뒤를 따르면서 설정식은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촉각을 다투는 요즘 들어 생긴 버룻이었
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그는 머리를 들
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속에는 시계침의 영상이 남아 있었다.
4시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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