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9. 폭풍전야

오늘의 쉼터 2014. 12. 28. 17:19

9. 폭풍전야

 

 

(1)

 

 

   지난밤에 내린 눈을 치우고 분대원과 함께 벙커로 돌아온

   김형만 하사가 이용식 일병에게 물었다.
    "소대장님한테서 연락 없었나?"
    "없었습니다, 분대장님 ."
    "없었더라도 소대 본부에 가봐라. 어젯밤에 중대 본부에서 보충병이 왔을 거다. "
    "예, 분대장님 ."
   이용식 일병은 죽은 신동석 병장의 당번으로 한때 열외로 날리던 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온몸이 빳빳하게 군기가 잡혀 있다.
   이용식이 K-2 소총을 등에 걸치고 벙커를 나가자 김형만은 총안으로 전방을 살펴보았다.

   눈으로 덮인 산야가 시야에 들어왔는데 전방에 움직이는 물체는 없다.
   "분대장님, 경계 교대 다녀오겠습니다. "
   뒤쪽에서 덜그럭거리는소리와 함쩨 김 일병과고 상병이 나란히 서서 그에게 경례를 올려 붙였다.

   벙커 앞쪽으로 경사진 능선에 경계교대를 나가는 것이다.
   "그래, 수고."
   그들이 참호 쪽의 통로에 쳐진 모포를 들치고 나가자

   벙커 안에는 양만호 일병과 김형만 하사 둘만이 남게 되었다.
   총안 쪽에 자리잡고 앉아 전방을 바라보고 있던 양만호가 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분대장님, 전쟁이 일어날까-3_?"
   "글쎄, 그걸 내가 어떻게 알Tf냐?"
   전출 사건 이후로 그와 단둘이 대화하는 것이 처음인 김형만은 조금 긴장한 듯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그건 육본에서도 모를 거다. "
   "빨리 전쟁이나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이러고 있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어요."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이냐?"
   "죽든지 살든지 얼른 결정이 났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
   "넌 아직도 육본으로 가고 싶어?"
   "생각 없습니다. "
   양만호가 머리를 저었다.
   "이젠 이쪽에서 보내 줘도 안 갑니다. "
   김형만이 힐끗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만호가 고졸 출신의 자신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깔보고 있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니 신동석 사건 이후로 전 분대원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달라진 것이 그의 분대만이 아니다. 3분대의 최 하사 말을 들어 보면

   말년 병장 김을수도 꼬박꼬박 불침번과 경계 교대를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담요가 젖혀지더니 이용식 일병과 함께 완전 군장 차림의 병장 한 명이 들어섰다.

   병장은 한눈에 소집되어 온 예비역으로 보였다.

   적어도 김형 만보다 너더댓 살이 위인 스물일곱이나 여덟쯤의 나이일 것이다.
   "분대장님, 데려왔습니다. "
   그러면서 이용식이 호기심에 찬 눈을 빛내면서 옆으로 물러섰고 병장이 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신고합니다. 병장 장영환, 1월 24일자로 제 1소대 1분대로 배속."
   "됐어 ."
   그의 경례에 가볍게 손을 올리는 시능을 하면서 김형만이 말을 잘랐다.
   "군장 풀고 쉬어,장 병장은 부분대장이야.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
   장영환이 군장을 벗어 내려놓으며 벙커를 둘러보았다.
   "이제 올 데까지 왔군요. 차라리 뱃속이 편합니다. "
   "예비역에 소집된 건가?"
   "제대한 지 2년 되었어요."
   그는 총안으로 다가가 전방을 내다보았다.
   "옛날과 다름없구만, 경치가,"
   자연스러운 그의 태도에 김형만의 얼굴도 부드러워졌다.
   "장 병장도 1소대 1분대였나?"
   "아니, 그뻔 츠소대 화기 분대였지요. 내 벙커는 바로 이 옆쪽이었습니다. "
   "사회 생활 하다가 졸지에 고생이 많구만."
   "어디 나만 고생인가요?"
   그는 옆에 있는 양안호의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쳤다.
   "어이 일병 담배 한 대만 주라."
   양안호가 서둘러 담배와 함께 불을 켜 올리자

   길게 담배 연기를 뱉어낸 장영환이 김형만을 바라보았다.
   "잘해 봅시다,분대장님.어차피 같은 못자리에 묻히게 되었으니까 말이오."
   "나도 부분대장을 믿겠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긴 김형만이 얼굴을 붉혔다.
   "와주어서 고맙, 아니 반잠구만."
   우증철 대령이 계엄 사령부 2층에 있는 작전국 회의실에 들어서자
   김길동 대령과 최우식 대령이 말을 그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계엄 본부의 장교로 김길동은 정보국 참모이고 최우식은 작전국장 보좌관이다.
   "준비되었다. 가자."
   우중철이 짧게 말하고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3시 반이다.
   방을 나온 그들은 2층의 복도를 걸어 3층으로 향해 있는 계단으로 다가갔다.

   복도를 오가는 군인들을 헤치고 걷는 그들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조민섭 대사의 취리히 분사 사건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정부는 문공부 장관인 이유석의 주도로

   조민섭의 의거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었는데 그 효과는 컸다.

        이유석의 매스컴 이용술이 기술적이고 교묘한 점도 있었지만 조민섭의 죽음 그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민들의 애국·심은 고취되어 있었다.

그들은 계엄군에 협조적이었으며 따라서 군의 사기도 진작되고 있는 중이다.

3층의 계단을 오른 그들은 오른쪽으로 꺾어져 복도 끝쪽의 방으로 다가갔다.

육본의 작전국 과장인 정병식 소장의 방이다.
   앞에 선 최우식이 노크를 하자 곧 안에서 대답 소리가 났다.
   그들이 방으로 들어서자 정병식이 서류에서 얼굴을 들었다.

흰 살결에 용모가 단정한 정병식은 계엄 시령관이자 합참 의장인 강동친의 인맥이다.
   강동진이 12사단장이었을 때 참모였던 인연이 그를 육사동기생 중에서 선두 주자로

만들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웬일들이야?"
   서류를 덮은 정병식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앞에 벌려 선 세 명의 대령은 잠시 입을 열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정병식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을 치켜떴다.
   "이것봐, 무슨 일이냐니판?"
   "옷을 벗으셨으면 합니다, 장군님."
   입을 연 것은 우중철이다

그들 세 명은 모두 육사 동기였지만 우중철이 일년 빠른 데다가 성격도 강했다.
   "뭐라고? 옷을 벗어?"
   그러면서 어이없다는 듯 정텅식이 입을 반쯤 벌렸다.
   "물러나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이건 후배의 충언입니다. "
   최우식이 나섰다.
   "최우식이, 러 ‥‥‥‥
   직속 부하인 최우식을 노려본 정병식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너 이 새끼, 무슨 짓이야?내, 당장!"
   "추태 부리지 마십시오, 장군."
   한발짝 다가서며 말한 것은 김길동이다.
   "만일 거절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장군을 쏘고 나도 죽겠소."
   우중철이 연달아 말을 이었다.
   "아니 뭐라고?"
   정병식의 얼굴이 이제는 하얗게 굳어졌다.
   "날 쏘겠다고?"
   "그렇습니다.

부패한 장군을 처단하면 관의 사기도 오르고 심기일전하는 계기가 만들어질 겁니다. "
   "내가 어쨌다고?"
   "스스로 잘 아실 거요."
   최우식이 다시 말을 받았다.
   "군 감찰이나 보고 절차를 거칠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당신같은 사람들을 즉결처분하기로 결정했소."
   "네놈들은 도대체 뭐야?"
   파랗게 얼굴색이 변한 정병식이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결사 장교단이오,"
    맞받아 최우식이 소리쳤다.
   "물러나시오, 지금 당장."
   우중철이 최우식의 말을 받았다.
   "당신이 갖고 있는 총은 전쟁용이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of Affl ."
   그러자 정병식이 서랍을 열더니 권총을 꺼내어 들었다.
   덜거덕거리며 서람이 아래쪽까지 빠져 나왔고 손에 쥔 권총을 고
쳐 잡느라고 시간이 걸렸는데도 세 대령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허리에 찬 권총은 모두 가죽 덮개의 단추까지 채워져 있다.
   "장식용도 아니야."
   김길중이 그를 노려본 채로 뱉듯이 말했다.
   "대민용이지, 아마."
   최우식이 그의 말을 받았다.
   "한 시간의 여유를 주겠소, 장군. 그 동안 정리를 하시도록,

명예롭게 옷을 벗으실 기회를 드립니다. "
   우중철이 결론을 짓듯 말하자 그들은 일제히 몸을 돌렸다.
   방문이 닫히자 세 대령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으나

정병식은 권총을 앞쪽으로 겨눈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집무실에 들어선 이영만 대통령은 뒤따라 들어오는 네 사람을 향해 웃어 보였다.
   "월슨이 오늘은 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구만.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보았습니다. "
   국방 장관 김형태가 즉시 대답했고 이영규, 강동진 두 대장은 입을 얼지 않았다.

그들은 대통령의 책상 앞에 모여 앉았다.

월슨과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 그를 배웅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매그루더가 떠들고 있어서 월슨도 입장이 난처한 모양이오. 클린트는 말할 것도 없고."
   대통령이 계엄 사령관인 강동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국에서 장군이 그렇게 떠들고 다닌다면 어떻게 될까를 사령관은 생각해 보았소?"
   "그런 일은 없습니다, 대통령 각하."
   강동진이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무조건 통치권자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각하,
군인은 특히 장교들은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않도록 훈련시켜 왔습니다. "
   "어쨌든 매그루더는 우리의 대단한 원군이오, 사령관."
   대통령이 말머리를 돌리자 장군들은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매그루더는 아직 예편되지 않았지만 그럴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기회가 있는 대로 클린트 정권을 비난했는데 클린트가 여론만을 의식하는

정치가이고 대통령 감은 못된다고까지 했던 것이다.

그는 정의와 질서의 선도자이며 집행자인 미국의 위상이 클린트예 의해서 무너지고 있다고도 했다.

이유야 어떻든 한국의 장군이 그랬다면 그는 반역자가 될 것이다.
   "각하 월슨이 제295연대를 임진강에 보낸다고 한 것은 대단한 발전입니다. "
   김형태가 나섰다.

계엄령 이후로 그는 자신의 위상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다변가가 되어 갔다.

실제 상황으로 다가갈수록 그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제295연대는 진지를 한국군 54연대에게 맡기고 동두천에 물러나 있었습니다. "
   "클린트의 허락을 받았을 거야."
   대통령이 말을 받자 이영규가 헛기침을 했다.
   "각하, 295연대 진지는 고정 진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295연대는 기갑 연대로서 기동 타격이 장점입니다. "
   "그렇다면 언제든지 물러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공격용 부대라는 뜻입니다, 각하."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도 있지 아마?"
   "예, 각하, 있습니다. "
   김형태가 즉각 말을 받는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에서 보면, 수나라의
"잠간만, 국방 장관."
대통령이 그의 말을 잘랐다.
   "내가 보기에는 아직 미국의 입장은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어.

클린트는 월슨을 보내어 장기판의 졸을 움직이는 시능을 하지만

아직게임에 나설 채비는 하고 있지 않아."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각하."
   강동진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 여론 조사에서 10퍼센트 정도가 오른 35퍼센트가 참전에 찬성을 했습니다.

곧 클린트 대통령도 달라질 것입니다. "
   "조 대사의 공로요."
   "흘릉하신 분이지요. 어제도 국립 묘지에 참배 객들이 5만 명이나 다녀갔다고 합니다. "
   김형태가 말했다.
   대통령이 강동진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숙군 운동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소?"
   "어젯밤에 계엄 사령부 작전 과장 정병식 소장이 자택에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발표는 심장마비로 했습니다만."
   "대령급의 장교들이 낮에 그를 찾아간 후에 귀가했는데 아마 그 충격으로‥‥‥‥
   "내일중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숙군 대상자들을 정리하도록 해요.
    길게 끌면 안되니까."
   "그렇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각하."
   "결사 장교단도 해체하고."
   "물론입니다, 각하 "
   "심기일전해야 됩니다, 우리 군군은."
   강동진이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는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각하, 내일 숙군이 끝나고 나면 저도 옷을 벗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안돼요. 허락할 수 없소."
   대통령이 단호한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책임은 국민에게 느끼도록 하시오. 당신이 몇몇의 참모들을 기용한 것은 편법이 아니었소.

   효율적으로 군을 장악하려는 순수한 의도 였지 ."
   "책임을 지지 않는 풍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각하, 어쨌든 저는 책임을‥‥‥‥
   "안됩니다. 내 지시를 따르시오."
   대통령의 말투가 강경했으므로 강동진은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방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는데 집무실의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면서 비서 실장 박종환이 들어섰다.
   "각하, 시간이 되어 갑니다만."
   문 옆에 선 그가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통령이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는 밤 9시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월슨과의 회의가 저녁을 먹고도 한 시간이나 더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앞장선 대통령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각하, 그리피스 대사한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클린트 대통령이
  상당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
    옆으로 다가온 박종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월슨이 떠나기 전에도 저에게 말하더군요.

   안장관의 기자 회견을 중지시키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낫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
    회의 석상에서도 월슨이 간접적으로 안승재의 이야기를 꺼냈으나
 대통령은 못들은 척했던 것이다.

대통령은 입가로 씁쓸하게 웃으며 옆쪽의 회의실로 들어섰다.
    각료의 대부분과 민자당의 대표와 중진 의원들,

그리고 야당인 민주당 대표와 당 중역들이 앉아 있다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통령은 그들에게 가볍게 웃어 보이면서 중앙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로 다가갔다.
   봉황이 새겨진 그의 의자 뒤쪽에 일성 전자가 개발한 대형 벽걸이텔레비전이 부착되어 있었고

지금 외국의 아나운서가 열심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안승재의 기자 회견 생방송 중계였다.
   식당의 옆문으로 들어션 안승재는 카메라의 플래시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연단으로 다가갔다.

입추의 여지도 없이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식당은 열기에 들떠 있었고 소란스러웠다.

연단의 정면과 양쪽 측면에는 텔레비전 방송국의 카메라가 고정 배치되어 있었는데 자리를 잡지 못한

방송국 서너 개는 뒤쪽의 식탁 위에 카메라를 설치해 놓았다.

그 사이사이에 무수한 사람들이 끼여서 있는 것이다.
   연단의 양쪽 귀퉁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선 안승재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뛰었고 머리에서는 현을 튕긴 뒤의 울림처럼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나는 듯했다.
   번쩍이는 불빛과 무언가를 소리쳐 묻는 기자들의 소음으로 가득차 실내가 터져 나갈 것 같았으므로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뱉어내었다.

그것을 세 번쯤 되풀이하자 앞쪽의 윤곽이 정확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말소리도 구분되어 귀에 들린다.
   그러자 문 옆의 사회석에 서 있던 대사관 직원이 마이크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그럼 대한민국의 외무 장관이신 안승재 씨의 기자 회견이 있겠습니다. 여러분 조용해 주십시오."
   안승재는 자신의 입 앞에 놓인 대여섯 개의 마이크를 바라보았다.
마이크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긴 막대 끝에 붙여진 마이크가 뻗어 나와 연단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것도 대여섯 개가 넘었다.
   "친애하는 기자 여러분."
   안승재가 입을 열자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앞쪽에서부터 입들이 닫혀져서

뒤쪽의 누군가가 기침 소리를 내는 것으로 소음이 그쳤다.
   "며칠 전 대한민국의 외교관인 존경하는 조띤섭 대사가 여러분께 목숨을 버리면서

진실을 밝혀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
   오늘도 앞쪽의 텔레비전 방송국의 카메라 옆에 앉게 된 안톤 모리스 기자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이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위치에 있었지만

안승재가 터뜨릴 폭탄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다.

하지만 지금 안승재가 발표할 내용은 메가톤 급의 뉴스이며,

미국이 그것을 저지시키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안승재가 말을 이었다.
   "여러분 나는 오늘자로 한국 정부의 외무 장관직에 사표를 내었습니다.

그것은내 발언이 한국 정부의 대외 관계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인으로 북한의 파렴치하고
반인룬적이며, 세계 질서를 파괴하는 범죄적 행위에 대한 증거를 여러분께 폭로하는 것입니다 "
   그러자 다시 플래시가 번쩍였고 소란이 일었다.
   그들은 소리쳐 안승재에게 증거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가지각색의 언어였다.

영어는 기본이고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일본어,중국어에다가 스페인어도 있다.

안승재가 머리를 돌려 자신이 들어 온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문 옆의 사회자도 그쪽을 바라보았고 수백 명의 기자들도 일제히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으며

카메라도 렌즈의 초점을 그쪽으로 맞추었다.
   그러자 대사관 직원 두 명이 두 팔에 가득 프린트 물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곧장 연단 옆으로 다가가더니 이 뭉치들을 내려놓았다.
   "여러분, 북한은 마약을 들여와 전 유럽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입수한 마약 도매상들의 명단과 북한의 마약 유통 규모에 대한 자료입니다. "
   안승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뒤쪽에서 있던 사람들이 앞으로 밀치고 나오려는 것이다. 그러자 식탁 위에
위태하게 설치되었던 텔레비전 카메라와 촬영 기사 서너 명이 넘어 지면서 비명을 질러 댔고

그것에 자극받은 사람들이 소리를 더욱 높였다.
   "자, 나눠 드립니다. 질서 있게 받으시도록."
   사회자가 소리쳤으나 이미 사내들은 이성을 잃고 있었다.

누군가 움켜쥔 서류가 흩어지면서 식당 위로 흰 종이가 어지럽게 날았다.
   "아니, 저 사람‥‥‥‥
   옆에 서 있던 대사관원이 앞쪽을 손가락으로 가리괴며 말하는 것을 고동규가 겨우 들었다.
   "뭐, 뭐가?"

 

(2)

 

 

  뒤쪽이어서 사람들에게 밀려 앞으로 나가면서 고동규가 그의 손가
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러나 벌써 대사관원은 보이지 않았고
앞쪽도 사람들로 가려져 있었다.
   안승재는 =I에게로 다가오는 대사관원을 보았다. 조금 전에 서류
를 들고 온 직원이다. 대사관원은 곧장 그에게로 다가오더니 팔을 들
어 그를 연단 밖으로 밀쳐내었다.
   "여러분, 이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그가 버럭 소리치자 마이크 소리가 그치기도 전에 사람들이 움직
임을 멈추었다. 그들은 그가 안승재를 밀어젖히는 것을 본 것이다.
   "나는 한국 대사관 직원 김준호올시다. 공보실 소속으로 KCIA
직원이오. 이 서류는 위조한 것이오. 북한을 모함하기 위해서 조작한
것이란 말입니다. "
   얼굴이 하얗게 된 김준호÷가 악을 샜다.
   "저놈을 잡아라."
   고동규가 뒤쪽에서 한국어로 소리쳤는데 그것이 마이크에 울려 식
당에 메아리가 가득했다. 아아 텔레비전 방송국의 마이크에도 잡혔
을 것이다.
   안승재가 연단으로 다가가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이놈, 이 매국노! 이 역적놈!"
   미친 사람처럼 안승재가 소리쳤다.
   "이놈, 이 천하의 역적농아!"
   안기부 직원 두어 명이 사람들을 헤치고 필사적으로 연단 쪽으로
다가갔는데 그들이 마악 손을 뻗치려는 순간 김준호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빼내어 들었다. 순간 그들은 주춤하며 멈추』 섰다.
33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나는 진실을 밝혔을 뿐이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한 손우를 안승재의 멱살을 움켜쥔 김준호가 총구를 안승재의 가
 슴에 겨누었다.
    "이것은 계략이다!"
    비통한 목소리로 안승재가 소리쳤을 때 김준호의 총구에서 횐 불
 꽃이 튀었다.
    "탕! 탕!"
    총소리와 함께 안승재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자 그 경황에도
 카메라의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김준호는 권총을 세워둔 채 몸을 돌렸다. 그가 뛰쳐나가려는 곳
은 옆쪽의 문이다.
    "놈을 쏘지 말아라! 사로잡아!"
    고동규가 한국말로 소리쳤고 문 옆의 기자들이 엎어지고 자빠지면
서 비켜섰다. 그러자 다시 총소리가 들렸다
    "이런! 누가!"
    겨우 사람을 헤치고 나오면서 고동규가 악을 쌨다 김준호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
   "이놈, 이 개새끼. "
   겨우 앞으로 나온 고동규가 이를 갈면서 발밑을 바라보았다.
   김준호는 눈을 치켜뜬 채로 가슴과 목에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
다. 쿨럭이며 피가 솟구쳐 입으로 뿜어져 나왔고 무엇인가 말을 할
듯 입을 벌렸다가 눈을 감았다.
   밀려든 카메라맨들이 다시 플래시를 번쩍였고 그들을 헤치고 안승
재에게로 다가간 고동규는 그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시체
                                                  폭풍전야 339
옆에는 흰 종이들이 널려져 있었고 붉은 핏방울이 번져 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서류를 집으려고 하지 않았다
    한동안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김정일이 몸을 돌렸으므로 방안에 모
인 사내들은 바로 앉았다. 벽에 붙어 서 있던 호위총국의 군관이 텔
레비전을 』Ixl 방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깊은 정적으로 덮였
다. 사방 유리창에 붉은색의 두꺼운 커튼이 가려져 있어서 전등빛에
비치는 사물들은 붉은 기운이 조금씩 배어 있다.
    김정일이 머리를 들고 장방형의 탁자 양쪽에 앉은 사내들을둘러
보았다.
   "김사훈 동지."
   왼쪽의 첫번째 자리에 앉아 있던 김사훈이 상체를 꼿꼿이 렸다.
   "네, 수령 동지."
   "우리 북조선은 예정대로 보름 후인 2월 10일에 남조선을 점령한
다고 하시오. 이제 미국측과 만날 필요도 없다고 전하고."
   "알겠습니다, 수령 동지."
   "예상은 하고 있었소. 남조선 놈들이 필사적으로 방해 공작을 하
리라고."
   "일본 정보국이 남조선 놈들을 도와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령
동지 ."
   "그건 당연한 일이오."
   김정일의 시선이 오른쪽 자리에 앉은 최광에게로 옮겨졌다.
   "장자량 주석은 쌀 2만 톤을 사흘 후에 보내 준다고 했어요. 열차
로 수송될테니 까 인수에 차질이 없도록 군에서 맡아 주시오."
340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예, 수령 동지, 염려하지 마십시오."
    "인민군의 사기가 오르도록 배급을 늘리는 것은 어떻겠소? 당분간
 1일 1천 그램으로 공급합시다. "
    "잡곡과 쌀의 비율은 어떻게 할까요."
    "5 대 5에서 7 대 고쯔≥ 하시오. 쌀을 1로."
    "인민군들은 수령님 만세를 외칠 것입니다. 수령님의 명령이라면
블속에라도 뛰어들 것입니다. "
    보위뚜 사령관 이동석이 엉덩이를 움찔 거리다가 김정일의 시선과
만나자 뱀을 만난 개구리처럼 굳어졌다.
    "신의주의 반동 분자들, 다시 난동을 부리지는 않겠지요?"
    김정일이 부드럽게 물었으나 옆에 앉은 김사훈은 그의 시선이 차
갑게 느껴졌다.
   "그럴 리는 없습니다, 수령 동지. 모두 당과 수령님을 위해 충성을
맹세했으며 극소수의 반동 분자는 이미 교화소로 보냈습니다. "
   이동석의 열띤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지만 동요하는 사람도 없고
동조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이틀 전 신의주의 인민 3만여 명이
폭동을 일으켜 시의 양곡 저장소를 약탈했고 상점 수십 개를 노략질
하고 방화했던 것이다. 그들의 일부는 노농적위대의 무기 창고를 습
격하여 소총과 기관총 3백여 정을 탈취해 갔다. 정규군 2개 사단이
급파되어 만 하루 만에 폭동을 진압하였지만 사상자가 천 명이 넘는
대규모 사건이었다.
   김정일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국경을 넘어 중국 영토로 도주한 놈들이 2만 명이 넘는다던데.
알고 있소?"
                                                  폭풍전야 341
   "예? 알고 있습니다, 수령 동지. 지금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고 있
는 중입니다. "
   "남한은 계엄 상태요. 군이 국내 치안까지 모두 맡고 있다 보니까
범죄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폭동이 일어났소."
   이동석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 갔다. 북한도 전시 체제로 운영하고
있었지만 국내 치안을 맡은 것은 보위 부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도 김정일은 힘을 한곳에 집중시켜 두지 않는 것이다.
   "중국과의 국경선 근처 인민들은 정신 상태가늘어져 있소.보위
부장 동지가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 합니다. "
   "명심하겠습니다, 수령 동지."
   "어쨌든 남조선 외무 장관의 기자 회견은 불발이 되었어 다행이
오."
   김정일이 화제를 돌리자 모두들 어깨의 힘들을 빼었다.
   "그놈이 조 아무개의 흥내를 내려고 하였지만 우리가 어디 두 번
같은 일을 당할까."
   "미국 공작원들이 언론사에 압력을 넣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위스
정부에서도."
   김사훈의 옆쪽에 앉아 있던 최대민이 입을 열었다.
   "자료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데다가 양쪽 정부의 압력을 받으면 언
론사들도 함부로 싣지 못할 것입니다, 수령 동지."
   "그놈들, 남조선의 일당들을 일망타진하시오, 최 동지."
    김정일이 안경알 속에서 눈빛을 번쩍였다.
   "그놈들이 무슨 일을 또 저지를지 알 수가 없어. 수단 방법을 가리
지 말도록 하시오."
342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최성산은 방으로 들어서는 황태식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묻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황태식뜬 시치미를 고는 코트를 벗어 옷
걸이에 걸어 놓더니 여유 일게 다가왔다.
   "이제 한숨 돌렸습니다, 조장 동무."
   "수고했소."
   "그루벌이란 마을 근처의 숲속에서 처리했습니다. "
   주머니에서 금박의 로스만을 꺼낸 황태식이 불을 붙여 물더니 길
게 연기를 내뿜었다.
   "이번 일은 모두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미국놈들이야 대충 눈치를
채겠지만 입을 열지는 않겠지요."
   "월튼한테서 연락이 왔었어, 김준호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 안했지
만 마누라하고 딸이 어디 있느냐고 묻더군."
   최성산의 말에 황태식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자식, 정말 한심한 놈이군요. 일단 넘겨 주었으면 우리 처Al에
맡겨 놓을 일이지 무얼 어떻게 하TR다고."
   "놈은 우리가 모녀를 인질로 김준호를 고용한 것을 알고 있는 눈
치야."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진작에 풀어 주었다고 했어. 며칠 되었다고 말이야."
   "잘 하셨습니다, 조장 동무."
   "만일 모녀의 시체가 숲에서 발견되면 그건 남조선 놈들이 보복한
것이 됩니다. 여러가지 증거물도 벌려 놓았으니 까요."
   "최대민 동지한테서 암호 통신이 왔는데, 남조선 놈들을 어떻게든
                                                  폭풍전야 343
 잡아 없애라는 수령님의 지시야, 황 동무."
     자리에서 일어난 최성산이 창문으로 다가가 눈에 덮인 정원을 바
 라보았다.
    "당분간 회담은 없다. 따라서 요인들을 보호하고 감시하는 우리의
 짐은 털어졌단 말이야. 이제 우리는 마음놓고 움직일 수가 있으니 그
 놈들을 잡아야 돼."
    "김원국의 일당이라는데. 남조선의 지하 조직이고. 월들의 설명대
로라면 미국의 마피아 같은 조직 아닙니까?"
    "그런 셈이지."
    "정식으로 공작원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 조무래기 깡패 새끼들한
aT ‥‥‥‥
    황태식이 이를 드러내며 눈을 치켜떠 벽을 흘겨보았다.
    "일단은 정체가 드러난 이상 염려하실 건 없습니다. 이제 대사관
사건 때 남조선의 안기부 놈들과 대사관 직원 할 것 없이 모두 사진
으로 찍어 놓았습니다. "
   "방심하면 안돼, 황 동무. 우린 이제까지 당해 왔어 어제 일만 빼
3:. "
   창에서 몸을 돌린 최성산이 =I를 향해 섰다. 어제의 과업은 계획
과 어긋난 것이 없다 김준호는 대사관에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었
는데 정문을 지키던 안기부 요원들은 그를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크
게 이상한 얼굴은 짓지 않았다.
   본부는 유럽의 요원들에게 그를 찾으라는 지시만 내렸는데 위험을
피해 도망친 비겁자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준호는 최성산의 지시대로 프린트물을 나르는 직원을 도와 자연
344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스럽게 회견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대사관 직원들은 그를 보자 반기
기까지 했던 것이다.
   "월튼의 말을 들으면 놈들은 극히 위험한 종자들이야,황 동무. =1
두목인 김원국은 남조선에서 밤의 대통령이라고 불렸던 놈이야."
   "그렇습니까? 남조선은 대통령도 여럿이군요. 밤, 낮의 대통령이
있다면 곧 아침과 저녁의 대통령도 생기겠습니다. "
   황태식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는데 그는 어제 이후로 자주 이를 드
러내고 있었다.
   무력부 부장 최광은 벤츠의 뒷좌석에서 상반신을 일으채 세웠다
맹렬한 속도로 벤츠는 대동강변을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앞쪽으로
인민무력부의 횐색 건물이 보였고 위쪽에는 붉은색 대형 천을 가로
로 걸쳐 놓았는데 횐 글씨로 '위대한 수령 김정일 동지를 위해 목숨
을 바치자'라고 씌어 있다. 그는 건물 옆쪽의 지하 벙커로 들어가려
는 운전병에계 소리쳤다.
   "그냥 가자우, 본관으로."
   소리가 컸으므로 운전병과 앞좌석에 타고 있던 호위 장교는 놀란
듯 몸을 굳혔다. 검정색 벤츠가 앞뒤로 호위 차량을 이끌고 본관 앞
에 멈추자 호위병들이 계단의 좌우로 서둘러 도열해 섰다.
   전시 체제가 되면서 정부 기관은 지하 벙커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
문에 그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남조선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쟁 태
세를 갖추자 북조선도 전시 체제로 바뀌었는데, 평상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모든 관공서가 미리 준비해 놓은 지하 벙커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또 달라진 점은 식량 배급이다. 식량 배급의 우선 순위는 군,
                                                 폭풍전야 341
관,민이었는데 이제 인민군의 1일 배급량이 쌀과 잡곡의 비율이 7
대 3으로 1킬로그램이나 되었으므로 그들의 사기는 충천할 것이다.
그 다음이 관이었는데 전과 같이 8백 그램이었고 인민들은 7백 그램
기준이다.
   그러나 인민들의 배급량은 성분과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났다. 폭동
이 일어난 신의주 같은 곳은 중국과의 밀무역으로 인민들이 다른 지
역에 비해서 기름기가끼여 있었고 중국에 있는조선족의 영향을받
아 남조선을 알고 있는 위험한 부류였다. 따라서 당이 그들의 배급량
을 6백 그램으로 정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폭동이 났다고 해서 배급량을 올린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
리였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날 것이었다
   최광이 계단을 올라 현관으로 들어서자 앞쪽에서 게대의 소장이
다가와 경례를 을려 붙였다. 그의 심복인 박기천 소장으로 작전 지도
국의 참모였다.
   "부장 동지, 다녀왔습니다. "
   최광이 잠자코 머리를 끄떡이자 그는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반
들거리는 대리석 복도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호위병들만 드문드문
서 있을 뿐이다.
   "부장 동지, 참모 총장 동지께서도 지금 현상태는 우리에게 최악
이라고 말씀하습니다. "
   낮은 목소리로 박기천이 말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총장 동지께서는 시정부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33초대소에 계
셨습니다. "
   "초대소에?"
346 밤의 대통령 제3부 - I
   걸음을 늦춘 최광이 박기천을 바라보았다. 전방의 사령부에서 군
단장들을 지휘해야 할 참모 총장이 초대소에 있다는 것에 놀란 표정
이었다.
   "예, 부장 동지. 총장께서는 군단장들과 총정치국·장에게 지휘권을
넘기셨다고."
   "가끔씩 사령부에 나가셨다가 바로 초대소로 돌아오신다고 부관
이 그러더군요."
   "그렇게 되었나?"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린 최광의 걸음이 느려졌다.
   박기천이 말을 이었다.
   "총장께서는 군이 선택할 길은 이미 멀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장 동지."
   그들은 무력 부장실로 들어섰다. 박기천은 서부 전선에 나가 있는
참모 총장 이을설을 만나고 돌아온 것이다. 김정일의 감시가 철저했
으므로 최광과 이을설은 심복을 보내어 서로 의사를 주고받는 방법
을 깼다
   "이제 우리는 제동력을 잃고 내리막길로 굴러 내려가는 고장난 차
안에 있다. "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은 최광이 주름진 이마 위로 흘러내린 횐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1는 앞쪽에 부동 자세로 서 있는 박기천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총장 동지 이야기는 굴러 떨어지는 차 안에서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
                                                   폭풍전야 347
   박기천이 집무실 안을 둘러보고는 한걸음 다가섰다.
   "총장께서는 최악의 상태가 될수록 수령 동지의 입지가 강화될 것
이라면서 웃으셨습니다. "
   "계획적이었어 우리 군부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불만을 다른 곳으
로 돌리려고 도발한 것이다 난 김사훈이를 취리히로 보낸 것도 나중
에야 알았다. "
   "이제 초급 장교들까지 모두 수령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어. 그
들은 단순해. 인민들은 순진하고. 모두 수령의 술수에 놀아나고 있
다. "
   "부장 동지, 기회는 있습니다만."
   박기천이 소근대듯 말하고는 얼굴을 굳혔다. 그의 시선이 쏘듯이
최광의 얼굴에 부딪쳐 갔다. 최광이 소리 없이 웃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우린 이미 굴러가고 있다고. 운전대를
가 잡건 이젠 늦었다. "
   "나나 총장 동지는 이미 강경파에게 밀려나 움직일 수단도 없다. "
   최광이 길게 숨을 내쉬었고 박기천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잠자코
서 있었다. 그의 말대로 최광과 이을설은 군의 최고위층이었으나 전
시 체제로 바뀌면서 그들은 김정일의 심복들인 강경파 소장 그룹에
게 실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인민들과 전사들은 남조선과 미제가 공화국을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당의 선전을 믿고 있었다.
   김정일은 이을설의 표현대로 최악의 긴장 상태로 공화국을 몰아가
348 밤의 대통령 제3부 -I
면서 이제 최강의 권한을 갖추고 있는 중이었다.
   에리히 루벤돌프가 방으로 들어서자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던 두
명의 동양인이 일어섰다.
   "이거 늦어서 미안합니다. 길이 미끄러워서 차가 밀리는군요."
   사내들과 악수를 나눈 루벤돌프는 자리에 앉았다.
   원스터 거리에 있는 오래된 중국 음식집 안의 밀실이다. 붉은색
양탄자가 깔린 데다가 같은 색 벽장식이 있는 방에서는 퀴퀴한 냄새
가 났다.
   "루벤돌프 씨, 상황이 급합니다. 우진 3억 달러를 이틀 안에 인출
해 가야 돼요."
   북한 대사관의 부대사인 김정철이 입을 열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검은 피부의 그는 유창한 독일어로 말을 이었다.
   "앙리 주르메가 갖고 있던 인출 증서가 탈취당했다는 것은 당신이
잘 알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갈 돈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김 선생."
   루벤돌프가 안경 속의 눈을 반쯤 감으며 웃었다.
   "그가 갖고 있던 인출 증서는 1억 달러가 조금 넘었지요,아마?"
   "1억 5천만 달러요, 루벤돌프 씨."
   "그렇군요."
   "나머지 1억 5천만 달러의 예금증서는내가 갖고 있으니 별문제
가 없고."
   "그런데 문제는 이번 한국 외무 장관이 일으킨 소동인데‥‥‥‥
   루벤돌프가 얼굴에서 안경을 벗더니 수건을 꺼내어 꼼꼼히 안경알
                                                  폭풍전야 349
을 닦았다.
   "스위스 연방 경찰이 지금 은행을 들쑤시고 있단 말입니다, 김 선
생."
   "그 서류 때문이오?"
   이맛살을 찌푸린 김정철이 묻자 루벤돌프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 빌어먹을 서류에 도매상이라는 사람들의 가명 계좌 번호와 비
밀 번호까지 적혀 있었지 않습니까? 경찰에게 그런 친절한 정보는
드물지요."
   "망할 놈의 주르메 ."
   "주르메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지요. 도매상들의 송금 라인을 알아
야 누가 얼마를 보냈는지 확인이 되었을테니까."
   "그리고 주르메가 넘긴 돈이 당신 계좌로 간 것도 곧 경찰에게 파
악이 될 겁니다. "
   "상관없어. 가명 계좌이니까."
   김정철이 자르듯 말하고 루벤돌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황이 급해요, 루벤돌프 씨. 내 계좌에 입금되어 있는 1억 5천만
달러와 주르메 계좌에 있는 1억 5천만 달러 모두를 홍콩의 상하이
은행으로 송금해 주시오."
    그는 주머니에서 종이 쪽지를 꺼내어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이것이 계좌 번호요. 이곳으로."
   "아무리 가명 계좌더라도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실제 인물을 찾아
낼 수가 있어요, 돈이 움직이게 되면."
   "이봐요, 루벤돌프 씨 ."
350 밤의 대통령 제3부 -I
    이제까지 잠자코 앉아 았던 사내가 입을 열었는데 최성산이다. 그
가 서툰 독일어로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린 전쟁 상황에 놓여 있단 말이오. 놈들이 누굴 찾아내건
말건 상관이 없어요. 어차피 우린 반호프 은행과는 거래를 끝낼테니
까. "
    "아마도 그것이 당신한테도 안전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거야‥‥‥‥
   "주르메가 죽어 묻혔으니 이젠 내가 직접 도매상들한테서 돈을 걷
을 작정이오. 미수금이 왜 남아 있더구만."
   "당신께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앞으로 반호프 은행은 이용하지 않
을 겁니다. "
   루벤돌프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더니 얇은 입술을 벌려 웃었다.
   "생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최 선생."
    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 한점 없는 포근한 날씨여서 눈은 곧
장 떨어져 내렸는데 지희은에게는 그것이 어쩐지 무겁게 느껴졌다.
    지희은이 어깨와 머리칼에 묻은 눈을 털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서
자 방안의 사내들이 모두 얼굴을 들었다. 김원국과조웅람,고동규가
앉아 있었는데 조웅남의 얼굴은 벌겋다. 낮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다녀왔습니다. "
   "그래 , 수고했어 . "
   김원국이 턱으로 앞자리를 가리켰다. 조웅남의 앞자리다.

 

(3)

 

 

  "대사늠 만났나?"
   "네. 대사님은 내일중으로 스위스 정부 사람들을 만나겠다고 하셨어요."
   지희은이 자리에 앉아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분간은 은신해 있는 것이 낫다고 하시더군요."
   "흥."
   조웅남의 코웃음을 쳤다.
   "은신처? 언지는 은신 안혔간디?"
   김준호의 아내와 딸이 그루빌 마을 근처의 숲에서 처참한 시체로
발견된 것은 어제 저녁이었다. 스위스의 텔레비전은 매시간마다 그
장면을 보도하면서 복수극이라는 표현을 했다. 한국측이 김준호의
가족에게 보복을 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어젯밤 자신이 살해범이라는 한국인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김원국 부하라면서 장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다고 말
했는데 살해 방법과 현장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경찰은 그가 살해범인 것으로 확신하면서 그의 말도 믿어 버린 모
양이었다. 』첫방부터 텔레비전은 김원국과 그 일당들에 대해 톱 뉴
스로 보도하고 있었다.
   "나가서 해명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고약하게 되었습니다. "
   고동규가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놈들이 우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
   "이젠 그릴 때도 되었다. CIA는 서울에도 진을 치고 있으니까."
    "그 씨발놈의 시키들, 김준호 처자식을 적이고 우리한티 뒤집어 씌우다니."
   조웅남이 입에서 술냄새를 풍기면서 눈을 부릅떴다.
   "아주 대가리가 잘 돌아가는디. 안 그려요, 형님?"
   "잔인한 놈들이야. 놈들은 김준호의 처자식을 인질로 잡고 있다가 처치한 것일 게다. "
   김원국이 입맛을 다셨다.
   "나는 안 장관이 불쌍혀서‥‥‥

    그 쌍놈의 시키 점시로 개판이 되야 버렸고 개죽음을 당헌 것 같여서‥‥‥‥
   조웅남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응? 신문에도 마약 얘기는 나오지도 않고 말여. 이 개같은 나라에서는‥‥‥‥
   "일본하고 독일 신문에는 났다고 합니다. "
   고동규가 말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안 장관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른다고 결정했답니다. 
대통령은 안 장판의 거사를 인정해 주신 거죠. 그리고 국민들도. 
영구차가 시내로 들어갈 때 수백만 시민이 길가에 모였다고 하던데요."
   안숭재가 김준호에게 습격을 당해 회견 도중에 피살되었지만 한국
국민들은 그것이 북한측의 방해 공작이라는 것을 모두 알았다. 그들
은 분노했고 그것이 북한에 대한 적개심과 전의를 더욱 굳게 다지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안승재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한호가 콜머 호텔의 일을 마치고 프팔츠 거리에 있는 집에 도착
했을 때는 밤 1 1시가 넘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둔 그는 차갑
게 얼어붙은 돌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주위는 오래된 주택가여서

두툼한 창살 사이로 희미한 빛이 홀러나을 뿐 적막에 싸여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좁은 길을 쉽쓸고 내려오자 코트 자락이 펄럭였다.

이곳에서 30년이 넘게 살고 있어서 눈을 감고도 문고리를 잡을 수 있을 정도였으므로

그는 익숙하게 돌계단을 올랐다

부근의 저택들은 대부분이 주차장을 길 아래쪽에 두고 있었는데

수백 년 전에 지어져서 주차장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육중한 나무 문이 닫혀진 it신의 집 앞에 서서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들었다.

돌계단의 끝쪽에 위치해 있는 그의 저택은 바람이 센 편이었다.
어깨를 움츠리며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꽃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가볍게 쳤다.

화들짝 놀란 지한호는 상체를 벌떡 뒤로 젖히면서 머리를 돌렸다.
   "누구요?"
   그의 입에 배어 있는 독일어였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고 선 사내들은 모두 동양인이었다.
   "당신이 지한호 씨, 맞지요?"
   한국말이었고 지한호는 그것이 강한 억양의 북한 쪽 말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렇소만, 댁들은 무슨 일로
   "우리하고 같이 좀 갑시다. "
   세 사내 중 한 명이 그의 어깨를 손으로 쥐었다.

   표정 없는 얼굴이 마치 얼음 속에서 타져 나온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쓸데없는 짓 하면 당장에 죽이겠소. 이것 보이겠지."
   사내는 코트 주머니에 있던 권총을 잠깐 빼었다가 다시 넣었다.
   "나한테 왜 이러시오? 난 당신들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오."
   스위스 시민권을 갖고 있는 그는 그의 말대로 남한이건 북한이건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태어난 곳이 서울이었지만 일곱 살 때 부모를 따라 스위스에 온 지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에게 고향이라면 어린 시절을 보낸 레만 호숫가의 로잔이 고향이다.
   "이 간나 새끼가."
   사래 하나가 성큼 다가오더니 주먹으로 지한호의 배를 쳤다.

  숨이 꺼져 가는 듯한 신음 소리를 뱉으면서 그가 돌바학에 무릎을 꿇자

  사내 두 명이 그의 양쪽 겨드랑이를 끼고는 일으켜 세웠다.
   "소릴 지르거나 허튼 짓 하면 죽여서 데려갈 거야."
   사내 하나가 잇사이로 낮게 말했다.
   그들은 지한호를 끼고는 돌계단을 내려가 아래쪽의 주차장으로 다가갔다.

  지나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고 가끔씩 옆쪽의 주택 창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희미하게 흘러 나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허리를 숙이고 사내들한테 거의 들리다시피 끌려 가던 지한호가 겨우 묻자
  옆쪽의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네 딸 때문이야, 이 간나 새끼야. 그년만 찾으면 널 돌려보내 줄 수도 있어."
   "단 그애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
   온몸의 기운이 떨어진 지한호=가 다리를 끌며 겨우 말했다.
   "일주일이 럼도록 소식이 없소."
   "연락이 오겠지, 제 애비가 죽는 것을 보지 않으려면."
   주차장 못 미쳐서 횐색의 볼보가 세워져 있었는데 조금 전에 그가 지나쳐 온 차였다.

그들은 볼보의 뒷좌석에 거칠게 지한호를 밀어 넣었다.
차의 시동이 걸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지한호는 뒷좌석에 머리를 생각했던

남북한의 문제 상상하지도 못한 것이다.
기대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남의 일로만 가 그에게 이런 방법으로 닥쳐을 줄은 전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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