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6. 혼란과 배신의 서울

오늘의 쉼터 2014. 12. 17. 14:10

6. 혼란과 배신의 서울 (1)

 

 

   이영만 대통령은 한동안 말없이 국방 장관 김형태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김형태는 몸을 굳힌 채 시선을 내리깔았고 그의 옆자리에 앉은

합참 의장 겸 계엄 사령관 강동진과 박종환 비서 실장도 긴장한 채 입을 다물고 있다.
   "제시 월슨 대장은 어떤 인물인가? 그에 대해서 누가 알고 있소?"
   이윽고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강동진이 상체를 세웠다.
   "NATO 참모장을 지내다가 미 육군 본부의 제 1차장을 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육사를 졸업하고 중동전에 도 참전한 경력이 있는‥‥‥‥
   "이런 상황에서 주한 미군 사령관을 교체하는 이유가 뭘까?"
   "각하, 그것은‥‥‥‥
   "매그루더가 워싱턴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려 왔어. 언론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미국은 방위 조약을 지킬 의도가 없다는 증거일까? 이번 사령관 교체가 말이오."
   박종환이 머리를 들었다
   "언론은 그렇게 평가할 것입니다.

각하,매그루더는 북한이 공격 한다면 당연히 그들을 격퇴시켜야 한다고

여러 차례 성명을 내었습니다. "
   그러자 김형태가 입을 열었다.
   "각하, 이것은 미국측이 결의를 새롭게 하겠다는 의도로도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월슨 대장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미국 대사관의 맥슨 참사관도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 각하, 이제 국군의 사기도 올라가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나날이 고취되는 중이고, 또 국민들도 질서가 잡혀 갑니다"
   대통령이 머리를 돌려 강동진을 바라보았다.
   "연합사 부사령관이 그쪽 사정을 더 잘 알지 모르겠군."
   "예, 각하. 이영규 대장은 매그루더와 작전 회의가 끝라는 대로 각하께 보고 드리러 올 것입니다. "
   "취리히에서는 미국과 북한의 회의가 열리고 있어.우리 외무 장관은 호텔방에 앉아만 있고."
   "미국은 남북한을 동시에 만나고 있는 셈이군.

한쪽은 작전 회의, 다른 한쪽은 무슨 회의라고 해야 할까?"
대통령은 두 팔을 의자의 팔걸이에 내려놓고는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두 볼의 근육이 힘을 잃고 늘어져 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아침에 하시모토 수상한테서 전화가 왔었소.

사회당이 격렬하게 반대를 하고 있어서 며칠 지연됐지만

국회는 파병안을 통과시킬 거라고 했어요."

"자위대의 해공군은 당장이라도 출동할 수 있고 육군은 열 개 사단이

15일 내에 부산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더군."
    모두들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일본의 피병 문제가 언론에 보도 되면서부터 여론은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보수 세력과 안정을 바라는 일반 대중은 일본군의 파병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으나

학생들의 일부와 소외층은 일본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반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점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Bl3l. "
   강동진이 입을 열었다.
   "일본군 파병설이 나왔을 때부터 북한의 사주를 받는 주사파 학생조직과 대남 공작 조직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놈들은 표면에 나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파병 반대 조직은 배후에 북한이 있습니다. "
   "시위는 온건하다던데, 계엄군에 대항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점점 확산됩니다, 각하."
   "그렇다고 모두 잡아 가둘 수는 없지 않겠소?"
   "계엄 상태입니다, 각하. 평상시하고는 다릅니다. "
   한동안 강동진을 바라보던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하지만 파병 반대를 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 마시오.

질서를 어지럽힌 죄라고. 그리고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는 증거를 밝히면 더욱 좋고."
   "알겠습니다, 각하."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서자모두들 따라 일어섰다.

하루에 한번씩 비상 국무 회의가 열렸고, 그 다음엔 작전 회의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면 계엄 사령관이 동석한 기밀 회의가 있었는데 이제 그것도 끝난 것이다.
   그들이 집무실을 나가자 대통령은 한동안 멍한 시선으로 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아침 8시에 시작한 회의가 12시에 끝난 것이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강동진이 다시 들어섰다.

며칠 사이에 두 볼이 홀쭉하게 팬 그는 문민 정부가 들어서자 빛을 본 군인이 었고

대통령과는 같은 고향이었다.
    "각하, 보고 드릴 일이 ‥‥‥‥
    강동진이 굳은 얼굴로 탁자 앞에 서자 대통령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인천에서 밀항선 한 척을 나포했습니다.

2백 톤급 쾌속선이었는데 경비함이 포를 쏘아 잡았습니다. "
   "각하, 그 배에는 현직 국회 의원 세 명과 그 가족, 고급 공무원 네명,

그리고 의사와 변호사 여섯 명과 그 가족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
   "인천항의 경비를 맡은 계엄군 소속의 대령 한 명도 끼여 있었습니다, 각하."
   퍼뜩 대통령이 눈을 들었지만 입은 열지 않는다.
   강동진이 말을 이었다.
   "사기 문제도 있고 해서 국무 회의에서도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다
    "비밀리에 인천의 계엄군 막사에 감금시켜 두고 있습니다, 각하."
    대통령이 길게 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들었다.
    "처형해 "
    강동진이 눈을 치켜했다.
    "01 ?"
    "계엄령하의 군법에서는 어떻게 처리되지?"
    "군인은 총살입니다. 공무원도."
    "총살시켜. 가족은 구속시키더라도."
    ‥‥‥‥네, 각fl."
    "그리고 그 사실을 언론에 알려 주도록. 총살 장면까지 보도하도록 해."
    "네 , 각fl. "
    "이젠 앞만 보고 나갈 것이다. "
    대통령이 혼잣소리처럼 말하자 강동진이 눈을 꿈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나는 다른 아무것에도 신경을 나눠 쓰지 않을 것이다. 오직 이 일만 끝내고 죽겠다. "
   548고지는 남쪽 능선은 밋밋하게 뻗어 나가 산아래쪽의 화전 마을이 1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지만

북쪽 능선은 급경사였다.

잎을 떨구어 버린 잡목 숲이 거칠고 황량한 모습으로 가지만을 뻗치고 있는 능선이 2백 미터쯤 되었고

아래쪽은 얼어붙은 개울이다. 개울 건너편은 마른 갈대숲이 어지럽게 펼쳐진 벌판이었는데

2킬로미터쯤 더가면 분계선의 철조망이 가로막는다.
   제1소대 1분대장인 김형만 하사의 벙커 안에서는 분계선의 철조망도 훤히 내려다보였다.

or9 노루가 갈대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에 두 번이나 비상이 걸렸었다.

분대 원들은 벙커 생활에 익숙해져 갔고 김형만도 신동석 병장을 사살한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점심을 마치고 난 오후 1시 반이었다. 벙커 안은 김치와 찌개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담배 연기로 눈이 매웠다.

김형만은 기관총좌 옆에 앉아서 오늘 저녁의 불침번 명단을 작성하고 있었다.

구석에서 고참 상등병이 일등병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소리가 들려 왔다.

탄창을 제대로 쌓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참호 쪽에 쳐진 담요가 젖혀지더니 소대장이 들어섰다.
   "차렷!"
   누군가가 소리치자 벙커는 일순 조용해졌다.
   "쉬어!"
   가볍게 말한 이한성 소위가 김형만에게로 다가왔다.

쉬라고는 했지만 벙커 안은 조용해져 있다.

상병도 잔소리를 그쳤다.
   "김 하사, 양만호 일병이 어디 있나?"
   소대장의 목소리가 벙커 안을 울렸다.
   "예, 저기‥‥‥ 야, 양 일병!"
    "네 . "
    일병 계급장을 붙인 병사 한 명이 구석에서 나왔다.

이한성이 두팔을 허리에 짚고는 일등병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스무 살을 갓 넘은 해사한 얼굴의 사병이었는데

불안한 듯 온몸을 굳히고는 부동 자세가 되었다.
    "너, 배낭 꾸려 . 단독 군장이다. "
    이윽고 이한성이 뱉듯 말했다.
    "10분 안에 소대 본부 벙커로 와. 알았나?"
    "네 . "
    몸을 돌린 이한성이 김형만을 바라보았다.
    "대대에서 오늘중으로 보충병들이 온다.

1분대에 두 명 보낼테니까 빈자리를 메우도록 해."
    "예, 소대장님 ."
   이한성이 담요를 젖히고 벙커를 나가자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않았다.
   "씨팔, 역시 끗발 좋은 놈은 이런 때에도 빠져 나가는구만."
   누군가가 구석에서 씹어 뱉듯 말하자 다른 병사가 말을 받았다.
   "돈 없고 렉 없는 놈만 남는 거여. 여그가 우리 못자리다. "
   "조용히 못해?"
    김형만이 버럭 소리치자 더이상 말이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술렁이는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일등병은 구석 자리로 돌아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서 있었다.
   "이 새끼야, 군장 꾸려, 어서 "
   김형만이 뱉듯이 말했다.

일등병의 외삼촌이 육본의 장군이라는  것을 모르는 소대원은 없다.

외삼촌에게 미처 연락을 하지 못한 바람에 소총 소대로 떨어진 그는 곧 육본으로 전출될 것이라고

제 입으로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양안호가 꾸물대며 군장을 꾸리기 시작하자 상등병 하나가 벙커 구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관총 사수로 고졸 학력이었고 자동차 정비공으로 있다가 입대한 병사였다.
   "분대장, 곧 전쟁이 일어날 것 아니오?"
    허리에 두 손을 짚은 상등병이 김형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체력이 컸고 성격이 거칠었지만 입대하기 전에 직장 생활을 한 때문인지
상하 구별은 확실한 병사였다. 신동석과는 유형이 다르다.

이맛살을 찌푸린 김형만이 그를 쏘아보았다.
   "그래, 그런데 왜?"
   "끗발 가진 놈들이 저렇게 빠져 나가면 전쟁은 누가 합니까?

돈 없고 빽 없는 나 같은 놈들만 나라를 지키라는 거요?"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말투는 격렬했다.
   "맞어! 씨팔, 어떤 놈 좋으라고 죽어준단 말이야.

저런 새끼들이 잘 먹고 잘 살라고?"
   누군가가 따라 외쳤다.
   "쥑여 버려, 저런 새끼는."
   "좇같이, 난 전쟁 못해! 못 죽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격한 외침이 터져 나와 벙커는 금방 수라장이 되었다.
   "아,씨괄,조용히 못해!"
   김형만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모두 입을 닫았으나 격한 표정들은 그대로였다.
"좋다. 내가 소대장에게 다녀오겠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기다려."
그러자 벙커의 복판에 버티고 선 상등병이 피식 웃었다.
"육본 명령을 소대장이 어떻게 한단 말이오?사단장도 안돼, 저새 끗발은."
   이영규 대장은 망원경을 내리고는 옆에 선 매그루더 대장을 바라보았다.
   "존,달라진 건 없어요. 외관상으로는 열흘 전과 똑같습니다. "
   "중국놈들이 이쪽이 먼저 도발하고 있다고 말할 만하군."
   매그루더도 망원경을 내렸다.

그들은 휴전선 건너편의 장단 쪽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황량한 앞쪽 벌판을 쉽쓸고 온 얼음날 같은 바람이 그들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놈들은 이미 2년 전에 공격형 배치를 끝내 놓았으니

새삼스럽게 병력 이동이네 장비 수송을 할 필요가 없지요."
   이영규의 말에 매그루더가 머리를 끄덕였다.
   "밀고 내려오면 되지요. 지금 저 위치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두 시간이면 될 거요."
   "정상적인 공격을 한다면 북한측 공군이 먼저 시작해야 할 거요.

전투기와폭격기가 일제히 떠오를 것이고, 다섯 곳의 공군 기지에서 발진하는

최초 습격기는 전폭기 합쳐서 5백 대 정도Tf지요."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날렸다.

그들의 뒤쪽에 서 있던 장교 두 명이 그들을 지나 앞쪽의 산비탈을 내려갔다.

두 명 모두 어깨에 K-2 자동 소총을 메고 있었다.
    "물론 우리 쪽에서도 공군이 부딪쳐 가겠지요. 아마 우리 머리 위쪽에서 만나게 될 것이오."
    매그루더가 엄지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우리도 두 개 함대의 해군 함재기까지 모으면 7백 대는 되지. 아마 사상 최대의 공중전이 될 거야."
    작전 회의에서 몇 번씩이나 거론되었던 이야기였다.

전쟁 발발시 예상되는 수십 가지 상황에 맞추어 이쪽의 대응 전략도 수립해 놓았다.

그래서 오늘은 전선 시찰차 서부 전선에 나온 것이다.
   이영규가 매그루더를 향해 몸을 돌렸다.
   "존, 당신이 그걸 보지 못하게 되어서 유감이오."
   "할 수 없는 일이지, 명령이니까. 난 합참 본부로 들어가게 되었소."
   매그루더의 파란 눈이 이영규를 쏘듯이 바라보았다.
   "리, 월슨은 잘해낼 거요. 그 친구는 쿠웨이트 전쟁 때 이라크 군 2만 명을 포로로 잡았었소."
   "여긴 다른 상황이오, 존."
   "물론 그렇지. 이곳이 사막이라면 차라리 낫73군.

북쪽놈들, 한 달의 시간을 주었는데 한국군의 정비만 제대로 된다면."
   말을 그친 매그루더가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20여 명의 장군들과 부관, 헌병들이 추위에 떨며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리, 겨울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보급품이오.

북한은 단기전으로 끝낼 모양이지만 시간만 끈다면 우리들이 이길 확률도 많습니다. "
   매그루더가 이영규의 어깨에 한쪽 손을 올려놓았다.
   "당신 말대로 이곳을 떠나게 되어서 유감이오.

리, 이것은 야전 군인에게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인데."
   "미안합니다,리.난 직업 군인이오.

전쟁과 전투가 내 삶의 기둥이자 일이어서, "
   "제시 월슨이 백안관의 지시를 받고 온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존,
당신은 너무 호전적이어서 백악관과 불화를 일으키고 있다고도 합디다. "
   매그루더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산비탈을 출으며 바람이 휘몰려 왔다. 매서운 북풍이다.

뒤쪽에서 잠시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그쳤다.

그들의 앞쪽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은 두 명의 대장이다.

한국군과 주한 미군의 최고위 장성들인 것이다.

추우니까 내려가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존, 당신의 교체는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 것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습니다.

당신들의 언론은 며칠 전부터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문제를 축소화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
   "대통령 지명전 때문이오."
   "세계 대전이 일어나려고 해요, 이곳에서, 당신들 언론은 정치가 들과 손발을 맞추고 있는 거요."
   "방위 조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도 많아요. 리, 너무 비관적인 생각은 말아요."
   "난 군수 산업체들이 의회에 전처럼 강력한 로비를 해줄줄로 기대했어요.존,

그런데 그것이 내 단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소.

이것은 단기전이라 그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장사인 것이오."
   "리 ."
   매그루더가 그를 부르고는 힐끗 뒤쪽을 돌아보았다.

부하들은 이제 얼음덩이가 된 것처럼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한미 방위 조약을 지키느냐 아니냐는 여론에 달려 있소."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이영규의 귀에는 똑똑하게 들렸다.
   "클린트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누구도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소, 리."
   "그 여론을 당신들의 언론이 정치인들과 함께 조작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소?"
   "아니 . "
   매그루더가 머리를 저었다.

그의 파란 눈이 똑바로 이영규의 시선과 부딪쳤다.
   "그것은 어떤 공감대가 형성이 되었을 때 만들어집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이해에 관계되었건, 의협심 때문이건 간에 "
"언론은 그것에 살을 붙일 수는 있어도 조작할 수는 없지요, 리 ."
   "동기가 필요해요, 리 ."
   바람이 다시 휘몰려 오자 매1루더는 이영규의 어깨를 잡아돌려세웠다.

그러자 굳어 있던 부하들이 뻣뻣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엄사령부는 과천의 정부 종합 제4청사를 빌려 사용하고 있었는 데 경비를 맡은 것은

수도 경비 사단 소속의 제29연대였다.

연대의 3개 보병 대대와 1개 기갑 대대는 종합 청사 전체를 삼중으로 둘러싸는 경비망을 구축해 놓아서

시령부로 들어가려면 세 번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대통령이 사령부에 들렀고 정부 요인의 대부분이 매일 사령부에 모이는 상황이다.

연대장인 우중철 대령은 청와대 경호실의 협조를 얻어 청사 앞에 추가로 경비를 배치시키고 있었다.
1월 하순이어서 일년 중 추위가 제일 기승을 떠는 때이다.
   초순에는 두어 번쯤 눈이 내리면서 날씨가 풀렸으나 지금은 일주 일째 맹렬한 추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맑다.

우중철이 경비 배치 상황을 점검하고 청사 1층에 있는 경비 연대 사무실로 돌아온 것은 오후 2시였다.

요즈음은 점심을 지프 안에서 야전용 햄버거와 우유로 때우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점심 시간은 달리 없다.

장갑을 벗으며 안쪽의 연대장실로들어가는그에게 작전 참모 김 중령이 다가왔다.
   "대장님, 대기실에서 경찰청 차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무슨 일이야?"
   그가 거칠게 묻자 김 중령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글쎄요, 용건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
   우중철이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대기실로 발길을 돌렸다.

경찰청 차장이면 군대의 군단장급이다.

계엄령하여서 군대가 치안의 주도권을 잡고는 있었지만

경찰력의 협조 없이는 치안 유지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가 대기실의 문을 열자 50대 초반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찰 제복 차림이었고 어깨에는 주먹만한 무궁화 뭉치 세 개가 달려 있다.
   "이거,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계엄 사령부에 들른 김에 잠간‥‥‥‥
   그는 우중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난 치안감 방인혁이오."
   "29연대장 우 대령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러나 다시 자리에 앉은 방인혁은 선뜻 입을 떼지 않았다.

횐 피부에 단정한 용모의 사내였으나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 고집스럽게 보였다.
   "치안감님, 제가 바빠서_5.."
   앞자리에 앉은 우중철이 재촉하듯 말하자 방인혁이 입을 열었다.
   "위충에서 작전 과장 정병식 소장을 만나고 오는 길이오."
   "OtOt, 너1 ."
   "오늘 아침에 서울대에서 시위한 학생들과 시민 2백여 명을 계엄군이 체포해 갔는데‥‥‥‥
   "그들이 모두 이곳에 있다고 해서 "
   일반 사범은 각 해당 경찰서에서 파견되어 있는 계엄군과 함께 예전과 같이 처리해 왔지만

오늘 아침에 일본군 파병 반대 시위를 한 학생과시민 230명은 모두 이곳 경비 연대의

임시 막사에 감금되어 있었다.
   우중철이 물었다.
   "그놈들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볼일이 있다기 보다도 난 그중 한 명의 신원을 인계받고 싶어서요."
"정병식 소장에게 이야기했더니 연대장께 상의해 보라고 해서."
   "이유는 묻지 마시고 나에게 인계해 주실 수 없습니까?"
   "정 장군은 계엄 사령부의 작전 과장이십니다.

제 직속 상관이니까 명령이 내려지면 인계해 드리지요."
   우중철이 탁자 옆에 놓인.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가 다이얼을 누르는 것을 방인혁은 잠자코 바라보았다.
   "저, 경비 연대장 우중철 대령입니다. "
   우중철이 상체를 곧게 세우면서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방인혁 치안감께서 이곳에 계십니다.

치안감 말씀이 시위자 한 명의 신원을 인계받고 싶다고 하시는데 ‥‥‥‥
   "보내 줘."
   짧고 굵은 목소리가 우중철의 귀를 울렸다.
   "알겠습니다. "
   전화기를 내려놓은 우중철이 방인혁을 바라보았다.
   "제가 부관에게 지시를 해서 이곳으로 데려오지요.

그런데 이름이 뭐지요?"
   "방윤호요. 내 아들입니다 "
   "법에 어긋난다는 건 잘 알지만 내가 책임을 지고 선도하지요."
   잠자코 그를 바라보던 우중철이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하도 시국이 급박한 때라 그놈이 어떻게 될지도 몰라서 하는 수 없이 ‥‥‥‥
우중철을 향해 그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전화 왔습니다. "
   무전병이 넘겨 준 비상 전화를 받아 든 조명훈 대위는 숨을 들이 마셨다.

대대와의 직통 전화였다.
   "전화 바긴습니다. "
   "조 대위, 나 대대장이다. "
   "예, 대대장님."
   조명훈의 주위에 있던 이한성 소위와 김정한 소위가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대대 본부는 548 고지의 후방으로 3킬로미터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제2방어선인 497 고지의 제2, 3중대의 뒤쪽이다.
   "조 대위, 그 일등병 이쪽으로 출발했나?"
   대대장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커다랗게 울려 왔다.
   "아직 출발 안했습니다, 대대장님."
   "아니, 지금 몇 신데 아직도‥‥‥ 내가 지시한 지 세 시간이나 지fT:ot?"
   "이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습니다, 대대장님."
   "지금 당장 출발시켜 . 벌써 5시가 다 되었으니 오늘밤은 이곳에서 재우고 내일 출발시켜야겠군."
   "대대장님."
   조명훈이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혼란과 배신의 서울(2)

 

 

     "양만호 일등병은 떠날 수가 없습니다"
   "뭐? 지금 뭐라고 했나?"
   "떠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
   그러자 저쪽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버럭 고함을 쳤다.
   "조 대위! 너 항명하는 거냐?"
   "항명이 아닙니다, 대대장님."
   배에 힘을 준 조명훈의 목소리도 굵어졌다.
   "그럼 뭐야? 왜 안 보낸단 말이야? 어서 말해!"
   평상시의 오진잡중령이었다면 이미 욕설이 한무더기 쏟아지고도
남았다. 학군 출신의 오진갑은 같은 학군 출신이라고 조명훈을 봐준
적이 없다. 그 자신도 대령 진급을두 번이나놓친 몸이었는데도동
병상련의 눈치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대대장님, 만일 양만호 일등병을 출발시킨다면 그의 생명이 위험
합니다. "
   조명훈이 말하자 이한성과 김정한이 가까이 다가와 섰다.
   "뭐야? 생명이 위험해? 그건 무슨‥‥‥‥
   놀란 듯 오진갑의 목청이 한 계단 낮아졌다.
   "그건 어째서 그래?"
   "중대 원들이 난동을 부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양만호가
육군 본부의 외삼촌 빽으로 전선에서 이탈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
니다. "
   "난동을 부린다구? 그런 놈들을 그냥 좌둔단 말이야? 이봐, 지금
은 전시야. 항명죄로‥‥‥‥
   "중대원 모두를 쏘아 죽일까요?"
226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이봐, 너, 지금‥‥‥‥
   "육군 본부의 장군이란 사람이 기껏 잡아 놓은 군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있단 말이오!"
   조명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우릴 이곳에 처박아 놓았으면 제발 앞만 보고 싸우다 죽게 해달
란 말이오!"
   "조 대위, 너‥‥‥‥
   "씨팔,그좇같은 명령이 몇 계단을 거쳐서 말단인 나한테 떨어져
올 때까지 한 놈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어."
   "싸우는 건 우리야. 말단인 우리 소대, 중대가 싸우다가 죽는다구.
당신들 명령만 듣다가는 싸우는 도중에 뒤에서 총을 맞는단 말이
오."
   "양만호는 못 보냅니다. 한 놈 쏘아 죽이고 겨우 군기를 잡아 놓은
참이오. 이런 때에 그놈을 보낸다면."
   "알았어."
   갑자기 오진갑이 때려붙이듯이 말했다.
   "알았으니까 개소리 그만 해라."
"알았냐너간 이 자식아!"
"알았습니다, 대대장님."
"그리고 너, 아까 욕한 것 사과해라. 어서!"
"잘못했습니다, 대대장님 ."
                                         혼란과 배신의 서울 227
"좋아"
"그렇다면 제가 잡고 있어도 됩니까?"
"잡어라.죽이든지 살리든지 네 부하니까 네가 알아서 해."
"씨팔, 네 욕을 먹고 나서 나도 꿈에서 깨었다. "
   "나도 497 고지 밑의 골짝에서 송장이 될테다. 이 새끼야, 네놈이
얼마나 대단하게 548 고지를 지키는가 두고 보겠다. "
   "걱정 마십시오,대대장님.조명훈이가 그렇게 간단히 죽을 놈이
아니오."
   "어설프게 했다가는 내가 귀신이 되어서라도 네놈을 쥑일테다. 늙
은 중령 귀신이 얼마나 지독한가 두고 보아라."
   "그펀 나도 귀신이 되어 있을 겁니다, 대대장님."
   민자당 대표 의원 임종호가 국방 장관설로 들어서자 김형태가 자
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 의원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요즘 수고가 많으십니다. "
   인사를 나눈 그들은 사람을 물리고 마주앉았다. 계엄 사령부 내에
있는 국방 장관 집무실 안이었으나 활기를 피고 있는 사령부 내의 다
서들과는 달리 한가한 분위기였다. 평시의 국방 장관은 합참 의
장의 직속 상관이었지만 계엄 사령관이 된 합참 의장은 이제 대통령
에게 직접 지시를 받고 보고하는 위치가 되어 있는 것이다.
   "어제 각하를 뵈었는데, 시위대들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더
22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군."
    임종호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60대 후반의 그는 한때 이영만 대통령과 대권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하다가 승산이 희박하자 선뜻 물러난 인물이었다. 계산과 결단
이 빠르지만 좀체로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 일본 신문들이 일제히 특종 기사를 실었더군.어제
우리가 파병 반대 시위자들을 체포한 걸 말이오."
   "예, 저도 보았습니다. 그쪽에서도 사회당 세력들을 압박하고 있
는 모양입니다. 사회당 의원 하나가 테러를 당했더군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자들이야. 우리 선조들은 천년 전에도
이러한 상황이 되었을 때 외교를 해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내었
어."
   임종호는 30년 전 역사적인 한일 회담의 주역이었다. 그로서는 일
본군의 파병이 조금도 어색하지가 않은 것이다.
   김형태가 마른 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런데 대표 의원께서는 무슨 일로 갑자기‥‥‥‥
   "아아,바쁘실텐데 이것‥‥‥ 다름이 아니라 며칠 전에 일본의 아
베 자민당 간사장에게서 연락을 받았는데."
   자리를 고쳐 앉은 임종호가 양복의 가슴 주머니에서 접혀진 서류
를 꺼내었다.
   "이건 극비 서류요. 이것을 아는 사람은 일렬에서도 하시모토 수
상과 무라야마 외상, 그리고 아베 간사장 등 몇 명밖에 없어요. 한국
에서는 나와 몇 사람의 당 중역들, 그리고 이제는 국방 장관이 되겠
구만. "
                                        혼란과 배신의 서울 229
   "대표 의원님, 이것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진 김형태가 탁자위의 서류를 내려다보
았다. 여러 장의 백지에 펜으로 휘갈겨 쓴 것이어서 내용은 알수가
없다.
   "이것은 한일 방위 조약의 초안이오. 일본측과 협의도 거쳤으니
문서로 만들기만 하면 돼요."
   "우리 당에서는 국회를 통과시킬 자신이 있소. 마침 각하께서도
그런 지시를 내려 주셨고, 분위기도 절박해 있으니까."
   "방위 조약이라면, 그것이 ‥‥‥‥
   "어허, 국방 장관도 선입견이 있구만."
   임종호가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무슨 을사 보호 조약이나 한일 합방 같은 생각을 하시는 모양인
데, 그런 엉뚱한 생각은 마시오. 미국과의 방위 조약과 비슷하니까."
   "미국과는 방위 조약을 맺으면서 인접국인 일본과는 맺지 못할 이
유가 없어요. 그것이야말로 주체성 없는 사매주의적 발상이오."
   "대표 의원님, 저는 정치가가 아닙니다. 국방 장관일 뿐입니다. "
   "행정부에서도 발의인이 있어야겠어요. 당에서만 추진할 수는 없
습니다. "
   "그래도 저는, 차라리 외무 장관이 ‥‥‥‥
   "외무 장관은 지금 취리히에서 궁상을 떨고 있지 않습니까? 우릴
상대도 해주지 않는 미국인들을 기약 없이 기다리면서 말이오."
230 밤의 대통령 제3부 - I
   "국방 장관, 우린 뭔가를 해야 합니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해내려
면, 지금은 시간이 촉박합니다 "
   "일본측도 무조건 기다려 주지 않아요. 20일 후에 북한놈들이 쳐
내려오면 그땐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일본이 도와주려 해도 도와
줄 수가 없어요."
   "계엄 사령관은 국내 치안과 휴전선의 방위 때문에 이런 일에 신
경을 쓸 수가 없습니다. 국방 장관이 해야 할 일이오, 이것이. 우리
당은 이틀 안에 발의와 동의까지 끝낼 자신이 있고 야당에서도 동조
자들이 나옵니다. 우린 행정부 쪽에서도 당신이 거들어 주기를 바라
고 있어요."
   임종호의 말은 열기를 띠고 있었고 얼굴도 활기가 넘쳐 보였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내려는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조민섭이 안승재를 바라보았다.
   "아직 할 이야기가 없다는군요. 회담이 진행중이어서 대사관과 회
담장과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
   그는 피로한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방금
미국 대사관과 통화를 한 것이다.
   "물론 회담장이 어디인지도 모른답니다. 알아도 알려 주지 않겠지
만."
   "북한측은 북미 방위 협정이라도 제안했을 거요.아마 한국이 했
던 것보다 더 좋은 조건을 내 놓았겠지,설령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혼란과 배신의 서울 231
제주도를 미국 자치령으로 내준다고 해도 반대할 인민은 없습니다. "
   안승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후 』시가 넘어 있어서 방안은 어두웠으나 그들은 아무도 전등을
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북미 회담은 이틀째 계속되고 있었지만 철저하게 비밀에 싸여 있
었다. 회담의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회담 장소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언론이 로젠스턴이 투숙하고 있던 그랜드 호텔
과 북한의 대사관을 겹겹이 감시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여유 있게 빠
져 나가 어딘가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다.
   갑자기 조민섭이 어스름한 방에서 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만해도 북한은 국제 사회에서 강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북
한 외교의 완전한 승리군요. 상대적으로 우리는 미국의 속국으로, 식
민지로 전락했습니다 놈들이 바라는 대로 되었지요."
   "난 외교관 생활을 30년 가깝게 했습니다. 힘의 배경이 없는 상태
에서의 외교에는 술수와 기교가 통하지 않습니다. 장관님, 더구나 우
리 정부는 국민까지 기만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위협을 경계하는
사람은 극우파로, 보수주의로 몰아 통일의 방해 세력이라고 매도까
지 했습니다. "
   "경제 협력이 통일의 과정이라고 순진한 국민에게 홍보하고, 북한
의 위험성을 보고하면 묵살했어요. 군사 정권에서 북한의 남침 위험
을 강조하여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과는 정반대의 방법이
었지요. 문민 정부가 들어섰다고 저쪽은 하나도 달라질 이유가 없는
232 밤의 대통령 제8부 - I
데 말입니다. "
   "이봐요,조 대사."
   이맛살을 찌푸린 안승재가 그를 바라보았다.
   "우린 그런 이야기를 할 입장이 아닙니다,조 대사."
   "압니다, 장관님. 나도 공무원의 한 사람으로, 더구나 외교관으로
책임을 느끼기 때문에 이럼니다. "
   "기다립시다. 로젠스턴이 연락해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중간 상황
이라도 연락해 줄 겁니다. "
    "고트 부통령이 내일 중국에 도착한다니 미국측도 나름대로 최선
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
    그러자 탁자 위의 전화 벨이 울렸으므로 그들은 놀란 듯 몸을 굳
혔다. 그리고는 동시에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가 조민섭이 손을 거두
었다. 안승재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영어가 뱉어졌다.
   "장관이십니까?"
    한국말이어서 안승재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습니다만."
   "저, 김 칠성이라고 김원국 씨의 동생입니다. "
   "OIOt, fl "
   "형님 전갈입니다. 놈들은, 예, 미국과 북한 사람들은 취리히 북방
20킬로미터 지점인 에센 마을에서 회담하고 있습니다. "
   "에센 마을이라구요?"
                                        혼란과 배신의 서울 233
   "예, 지도를 보시면 나옵니다. "
   조민섭이 긴장한 얼굴로 안승재를 바라보고 있다. 김칠성의 목소
리가 다시 흘러 나왔다.
   "놈들은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요.하
지만 형님은 장관께서 회담장에 가실 것인가를 여쭤 보라고 하셨습
니다. "
   "회담장에요? 어떻게 말입니까?"
   "그건 우리들한테 맡기시구요. 어떻습니까?가시겠습니까?"
   "그거야, 가고 싶지만‥‥‥‥
   "가시 겠단 말이군요."
   "잠간만 기다려 주시오."
   송화기를 손바닥으로 덮은 안승재가 조민섭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김원국 씨 쪽인데 전갈이 왔소.회담장을 알아냈으니 날더러 가
겠느냐고 묻는데, 어떻게든 들어가게 하TB다고 말하는군요."
   "그들다운 생각이군요. 처들어가겠단 말일까요?"
   조민섭의 표정은 긴장되어 있었다.
   "이렇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층관님, 차라리 들어갑시다
이젠 외교 절차니 예의를 따질 입장이 아닙니다. "
   "그래도 미국측에서 ‥‥‥‥
   "우리가 간다고 미국 입장이 불리해질 것도 없습니다. "
   "우선 전화라도 해보는 것이 어떻소, 조 대사."
   "어디 있는가 알려 주지도 않았던 놈들이오. 우리더러 오라고 할
리가 없습니다. "
흐려 밤의 대통령 제조부 - I
    "가서 북한놈들을 만납시다. 놈들의 얼굴이라도 보고,놈들의 말
이라도 직접 들어 봅시다. "
    한동안 조민섭을 바라보던 안승재가 전화기를 귀에 대었다.
   "나는 갈 수 없습니다. 미국측이 회담의 중간 과정을 나에게 전해
주기로 했으니까 이곳에서 기다릴 작정이오."
   "알았습니다. "
   전화기를 내려놓은 안승재가 조민섭을 바라보았다. 이미 얼굴을
저쪽으로 돌린 조민섭의 옆모습을 향해 그가 말했다.
   "우리 모양만 더욱 비참하게 됩니다, 조 대사. 내 한 몸이라면 무
슨 짓이라도 하겠지만 난 한국의 외무 장관이오. 추태를 보일 수는
없습니다. "
    "좇같은 놈, 체면만 채리고 방에서 딸딸이나 치고 앉아 있으라고
혀라, 아니, 누워서."
   조웅남이 으르렁대며 말했다. 그의 입에서 침이 튀어나왔으므로
김칠성은 반사적으로 조금 물러 앉았다.
   "들어가서 북한놈들 멕살을 잡고 얘기허는 거여. 자, 굶어 죽게 생
긴다니 쌀을 백만 가마니점 보내 주마. 된장도 십만 통을 보내 주고
간장도‥‥‥‥
   "형님, 저기 한 놈이 나옵니다. "
   김칠성이 창 밖을 바라보며 나직이 외치자조웅남이 말을 그쳤다.
숲속의 길을 백인 사내 한 명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횐색의 오리털 파카를 입고 양손을 주머니에 찌른 장신의 사내였
는데 경호원처럼 보였다.
                                         혼란과 배신의 서울 235
    "가게로 가는 모양인데요."
    사내가 길을 건너자 앞자리에 앉은 부하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길 건너편에는 대여섯 채의 민가 사이에 그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조
그만 상점이 있다.
    부하의 말대로 사내는 곧장 상점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산골이
어서 오후 5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도 주위는 어두웠다. 상점은 이미
환하게 불을 밝혔고 주위의 민가도 하나둘씩 불을 켜는 중이다.
    "하긴 수십 명이 모여 있으니 이것저것 모자랄 것이다. "
   김칠성이 저택으로 향하는 숲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저택의 숲길 입구는 백 미터쯤 되었으나 그쪽은 출구가 하나
뿐이어서 이곳에서도 정확히 체크되고 있다.
   가지만 남았지만 삑빽한 숲길로 백 미터쯤 들어가면 조금 높은 지
반 위에 단층의 왜 넓은 저택이 나온다. 뒤쪽은 얼어붙은 조그만 호
수가 있었는데 여름 별장으로 적당한 곳이었다.
조웅남이 부스럭대며 자리를 고쳐 앉자 차가 출렁거리듯 몹시 흔
렸다.
길가에 주차시켜 놓은 차는 동네 주민들의 차량 속에 끼여 있었지
                                                             들
만 김칠성은 하루에 두 번씩 위치와 자동차를 바꾸고 있었다.
   "제기럴놈, 나는 같이 들어가자고 헐 줄 알었는디 ."
   조웅남이 다시 투덜거렸다. 그는 안승재의 거절이 마음에 들지 않
는 것이다.
   김칠성이 힐끗 그를 보았다.
   "큰형님도 장관이 여기 들어가자고 할 것은 기대하지 않으신 모양
입디다. 하긴 들어가서 뭐를 할 거요?수모만 당하고 말지."
236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이 시키야, 앞뒤 가리고 일헐 바에는 우리가 허러 여그까지 왔
냐?"
   "그게 무슨 말씀이오?"
   "이것도 저것도 안 됨게로 대통령이 우릴 여고로 보냉 거여. 조웅
냄이, 니가 가서 한바탕 벌여라, 허고."
   "형님, 대통령이 그렇게는‥‥‥‥
   "일은 저지르고 보능 거여. 그러고 해결은 높은 놈들이 헌다. "
   "형님도 참!"
   "우리가 여그서 폼만 잡고 있으은 높은 놈들이 헐 일이 을다, 이
말씀01다. "
   "장관 그 시키도 무능헌 놈이여. 앙 그러냐? 니 쫄따구가 쌈을 혀
서 니가 수습허는 것이 낫겄냐? 아니은 니 쫄따구가 폼 잡고 있는디
니가 쌈허는 것이 낫겄냐?"
   "글쎄 이 경우하고는‥‥‥‥
   "씨발놈아 뭐가 틀려 ?"
   김칠성이 눈을 치켜뜨고 조웅남을 노려보았다.
   "형님,허튼 짓 했다가는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요.이건 농담이
아뇨. "
   "알고 있응게로 눈깔 내려 ."
   입맛을 다시면서 조웅남이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내는 상점에 들어가서 아직 나오지 않았고 어두운 거리에는 희
끗한 눈발이 흩날기기 시작했다.
                                        혼란과 배신의 서울 237
   호텔의 로비로 내려온 지희은은 프런트로 다가갔다. 저녁때가 되
어서 여느 때처럼 로비는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앙드레, 날 보자는 사람 어디 있어요?"
   프런트 담당 직원에게 묻자 그는 턱으로 옆쪽을 가리켰다.
   "저기 창가에 서 있는 사람이오. 시청에서 왔다던데요."
   머리를 돌린 그녀는 창가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와 시
선이 마주쳤다. 40대의 백인이다.
   그녀가 다가가자 사내도 다가왔다.
   "지희은 씨,이 호텔의 관리자 되시지요?난 시청에서 나은모리
스 와트입니다 "
   "그런데 무슨 일로‥‥‥‥
   "지난달 이 호텔에서 요청한 주차장 시설 확장 문제 때문에 왔어
요. "
   "아아!"
   지희은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렸다. 호텔 옆쪽에 있는호델 소유의
주차장이 좁아 옆에 붙어 있는 시유지의 임대 사용 요청을 냈었다.
   "어제 전화를 드렸었는데 미안합니다. 어제는 바빴어요."
   사내가 지희은을 내려다보았다. 공무원 특유의 기계적인 표현이고
얼굴이다.
   "알고 있어요. 오늘 오신다는 것도 들었고요. 그런데 조금 늦으셨
네 요."
   "오기는 좀 일찍 왔지요. 그런데 측량하는 데 두 시간 가깔게 걸렸
습니다. "
    머리를 끄덕인 지희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빈 의자는 보
23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이지 않는다.
   "당신들이 낸 1천 스퀘어 미터는 허용할 수가 없고 750정도는 되
겠어요. 지금 마악 측량을 마쳤는데."
"왜요?그쪽은 공터인데, 빈 땅으로 놀려 두시느니보다·
"우린 그곳에 공공 의료 시설을 건립할 계획입니다. "
   그들은 오가는 사람들에 조금씩 밀려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어쨌든 나가서 땅을 잠간 보십시다. 우리 측량 요원들이 기다리
고 있으니."
   "좋아요."
   머리를 끄덕인 지희은이 마침 옆을 지나는 종업원을 손짓으로 불
렀다.
   "샤샤,난 시청에서 오신 분들과 옆쪽 주차장 부지를 보고 올게."
   "예, 마드모아철."
   종업원을 보내자 시선이 마주친 사내가 웃었다. 얼굴이 온통 주름
살로 덮였으나 호감이 가는 웃음이었다.
   "자,가십시다. 늦었으니 얼른 마치고 돌아가o뗀어요."
   지희은은 앞장서 가는 사내의 뒤를 잠자코 따랐다. 현관을 나오자
밖은 어둠에 덮여 있었고 눈송이들이 한두 점씩 바람에 날려와피부
에 부딪쳤다.
   "저쪽에 우리 측량차가 있습니다. "
   사내가 턱으로 주차장 끝쪽을 가리켰는데 바로 시유지의 경계선
부근이다.
   "가서 지도를 보십시다. 당신이 사인만 하면 내일부터라도 공사를
시작해도 돼요."
                                        혼란과 배신의 서울 239
   바람이 차가웠으므로 지희은은 재킷의 깃을 올리고는 사내의 뒤를
따랐다.
   주차장은 승용차 50대를 주차시킬 수 있는 넓이였는데 이미 갖가
지 차량으로 가득 차 있어서 주차 경비원이 들어서는 차들을 돌려 보
내고 있었다.
   "늦게까지 일하시는군요. 집에 가서 쉬셔야 할텐데 말이에요."
   사내의 등을 향해 그녀가 소리치듯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
   사내가 머리만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업무에 관련된 일로 보일테니까요. 다음 기회로 미루지요."
   그들은 시유지의 경계선 안에 세워진 승합차로 다가갔다.
   "자, 들어가시지요."
   승합차의 문을 열며 사내가 지희은을 돌아보았다.
   "자, 어서."
   차 쪽으로 한걸음 다가선 지희은은 사내가 억센 힘으로 등을 밀자
차 안으로 엎어지며 들어섰다. 사내가 서둘러 따라 들어왔다. 넘어지
면서 차 바닥에 무릎을 찧은 지희은이 엎드린 자세로 머리를 들었다.
긴장과 공포로 두 눈을 치켜뜨고 있었고 입은 반쯤 벌어져 있다.
    "어어 ."
    뒤쪽에서 낮은 소리가 났고 그 순간에 그녀는 앞쪽에 앉은 사내들
의 모습을 보았다. 두 명의 사내가 권총을 이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두 명 모두 동양인이었고 낯이 익었다. 강대흥과 오종표 짝이다.
    그러자 강대홍의 입이 열렸다.
240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손을 들어, 이 개자식아.내가 쥐고 있는 것에 대해서 존경심을
보이란 말이다. "
   "너희들은 누구냐?"
   뒤쪽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시청 직원이 물었다. 긴장으로 굳은
목소리였다. 지희은이 몸을 추스려 한쪽으로 비껴나 의자에 엉덩이
를 걸쳤다. 강대흥과 백인을 양쪽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다.
   "알아맞춰 봐, 이 개놈아."
   오종표가 권총으로 사내의 이마를 겨누며 말했다. 그러는 그의 뒤
쪽으로 지희은은 무엇인가 의자 뒤쪽에서 길게 뻗어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한국어로 묻자 강대홍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저 새끼는 CIA요,지희은씨.그리고 우리 뒤쪽에 두 놈이 있는
fl . "
   그러자 지희은은 의자 뒤쪽의 기다란 것이 사람의 다리인 것을 알
아챘다. 뒤쪽의 좁은 공간에 거꾸로 처박혀 있는 것이다.
   "북한 공작원들이오. 이미 뒈져서 송장이 되어 있으니 불편하지는
않을 거요."
   강대흥이 해명을 해주는 순간 오종표의 손에 들려 있는 권총에서
횐 빛줄기와 함께 무딘 총성이 났다. 총에 맞은 충격으로 의자에 상
반신을 부딪친 사내가 어깨를 한 손으로 움켜쥐면서 주저앉았다. 이
를 악물고는 눈을 부릅뜬 얼굴이었다.
   "이 자식들, 너희들 내가 누군 줄 알고‥‥‥‥
   "누군 누구야, 이 새끼야. 북한놈의 앞잡이 미국놈이지."
                                        혼란과 배신의 서울 241
   던지듯이 말한 강대홍이 권총으로 사내의 이마를 겨누었다.
   "단숨에 죽이지는 않는다, 친구. 네놈이 이 여자를 납치하려고 한
이유를 알아야 할테니까. 더욱이 북한놈들하고 같이 말이야."
   오종표가 옆쪽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더니 운전석으로 들어섰다.
곧 엔진의 시동이 걸렸다.
   강대홍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는 한국말이다.
   "이 새끼들은 우리하고 방위 조약을 맺고 있는 줄 알았더니 어느
새 북한농과 손을 잡고 우리를 잡으러 왔어, 지희은 씨."
   "도대체 왜?"
   승합차는 덜컹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신이 대사관의 안기부 정보원이라는 걸 모르는 정보원은 없어,
지희은 씨."
   강대홍이 사내를 노려보며 말했다.
   "놈들은 우리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고 했겠지. 그건 잘 짚은 거
요. 당신을 고문하면 우리 모두는 노출되어 버렸을테니까."
   "우리는 당신이 그만둔다고 하고는 이 빌어먹을 호텔로 돌아왔을
때부터 이 고생을 하고 있었소. 결국 성과는 얻었지만."
   차가 흔들렸으므로 강대홍이 버럭 소리를 쳤다.
   "야, 이 시키야! 살살 몰아!"
   그러나 도로로 나온 승합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저 일당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뭡니까? 자기네 외무 장관을 경호
하러 온 것일까요?"
242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다케무라가 묻자 시바다는 머리를 저었다.
    "그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한국 외무 장관을 건드릴 사람
은 아무도 없다. "
    "하긴 그렇습니다. 건드릴 가치가 없지요. 가엾은 존재이군요."
    도요타 론티넨털은 시내를 소리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밤 1 1시가
넘어 있었다.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매섭게 추운 밤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차량의 통행도 뜸했다.
    "김원국은 밤의 대통령이야. 은퇴하고 인도네시아에 물러가 있다
가 이곳에 나타난 거다. 혼다 국장은 많은 기대를 하고 있어, 그 친구
rTfl ."
    "우리가 정보를 몽땅 주었는데도 아직 인사를 받지 못했습니다.
오만한 놈입니다. "
   "아마 내가 그의 상대가 아니라고 보는 거다. 그놈들은 위계 질서
가 엄격한 데가 있지 "
   "건방진 조센징 같으니. 어쩠거나 놈들은 우리 야쿠자와 비슷한
조직 아닙니까?오히려 야쿠자보다도 질과 급수가 떨어지지 않습니
까?"
   "오다라는 야쿠자 보스에게서 김원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그
는 오야마와 격의 없이 지냈던 사내야."
   "오야마하고 말입니까?"
   다케무라가 눈을 점벅이며 시바다를 바라보았다.
   오야마는 동부 일본 야쿠자의 대부로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
는 3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야마구치 조직은 그를
추모하여 해마다 그의 기일에 집회를 갖는다.
                                          혼란과 배신의 서울 243
   "그렇다면 대단하군요. 저는 통 몰랐습니다. "
   다케무라가 입을 열었다.
   차는 이제 그들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힐튼 호텔의 입구로 다가
가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은퇴해서 한국을 떠났던 사람이니까."
   호텔의 현관 앞에 차가 멈추자 그들은 차에서 내려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호텔 1층 전체를 빌려 요원들의 숙소와 통신실로 개조해
쓰고 있는 것이다.
   로비에 앉아 있던 부하두 명이 그들을 보고 일어섰는데 한 명이
다가왔다.
   "부장님, 한국인이 찾아왔습니다. "
   "한국인? 누구야?"
   저도 모르게 로비 안을 둘러보며 시바다가 물었다.
   "710호실에 데려다 놓고 감시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부장님과
만났던 미스터 고입니다. "
   머리를 끄덕인 시바다와 다케무라는 서둘러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
가갔다.
   고동규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방으로 들어서는 그들을 보
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웬일입니까, 이런 시간에?"
    시바다가 물었다. 그는 고동규가 현역 중령으로 안전 기획부로 이
름을 바꾼 KCIA의 간부인 것을 안다. 따라서 그와는 말이 통한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 ‥‥‥‥
244 밤의 대통령 제3부 - I
   그들은 인사도 생략하고 마주앉았다.
   "오늘 저녁에 콜머 호텔 주차장에서 승합차를 한 대 탈취해 왔습
니다. "
   고동규가 입을 열었다. 그는 발음이 분명하고 유창한 영어를 쓴다.
고동규가 말을 이었다.
   "승합차에는 북한 공작원 두 명과 미국 CIA 요원 한 명이 타고
있었어요. 그들은 콜머 호텔 관리인이자 소유주의 딸인 지희은을 납
치하려고 했는데 내 부하들에 의해 저지당했습니다. "
   "잠깐, CIA 요원과 북한 공작원이 말이오?"
   시바다가 묻자 고동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손을 잡은 거요, 당신들과 우리처럼. 우린 이제 놀라지도 실망하
지도 않습니다. "
   "회담의 방해 세력이 와 있는 것을 눈치챈 모양인데, 그들은 연합
작전으로 그 여자를 납치하려고 했소. CIA 놈을 족쳤는데 놈들은 우
리들이 몇 명이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소."
   "그 여자를 취조하면 우리 정체를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
이오. 그건 잘 생각한 것이지 "
   "그래서 그들을 어떻게 햇소?"
   "북한놈들은 이미 죽여 놓았고 CIA 놈도 처치하고 오는 길이오.
알아낼 건 다 알아냈으니 까."
"아마 지금쯤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있을 거요, 차와 함께."
                                         혼란과 배신의 서울 245
   시바다는 이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동기를
제공했건 간에 싸움은 이미 벌어진 것이다.
   고동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앙리 주르메를 쳐서 그놈 집안에 있는 물
건들을 훌어 왔는데 ‥‥‥‥
   그는 주머니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었다.
   "쾌 큰 소득이었소. 중국에 지불해야 할 기름 대금과 돈으로 환산
하기 어려운 마약을 거둬 왔어요. 그리고 여러가지 서류와 마약 도매
상들의 연락망까지, "
   "우리 큰형님은 북한으로 옮겨질 기름이나 식량, 그리고 모든 전
쟁 물자를 차단시킬 작정입니다. 이미 놈들은 전쟁 준비를 해놓았겠
지만 앞으로 들어갈 것은 모두 차단시킨다는 생각이오."
   그는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복한측으로부터 마약을 받는 도매상들의 연락처요.큰형님
은 당신들이 이놈들의 명단을 언론에 공개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습
니다. 우리보다 당신들이 발이 넓을테니까. 스위스 정부나 다른 기관
들과도 끈이 닿을 것이고."
   시바다가 서류를 집어 들고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고동규가 말을 이었다.
   "놈들이 얼마나 더럽고 비열한 짓을 하는 놈들인지 그것을 세계에
알려야 하고, 그놈들과 타협하는 놈이 있다면 그놈도 같은 놈이라는
것을증명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큰형님의 지시이고 우리의 뜻
이오."
246 밤의 대통령 제조부 - I
"알았소, 고 중령."
시바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최선을 다하TR소."
   아침이다. 회담이 비밀리에 시작된 지 사흘째이다. 날씨가 매섭게
추웠음에도 불구하고 회담이 시작되었다는 것만 알고 장소도 진행
과정도 모르는 수백 명의 기자들은 미국과 북한 대사관 앞에 반쯤 모
여 있었고 나머지는 시내를 헤매고 다니면서 회담 장소를 찾는다.
   모두들 눈에 불을 켜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갔기 때문이다. 이제는 회담장만이라도 찾아낸다면 그것만
이라도 특종이 될 것이었다. 이런 때면 으레 터져 나오는 갖가지의
루머가 기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그 일부분은 기사화되기도
했다.
   미국과 북한이 동맹을 맺고 남한 정부를 없애기로 했다는 것이 그
중 하나다. 그것은 프랑스 기자가 눈 딱 감고 짧은 석 줄짜리의 기사
로 내었다가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관측이 미친 듯이 반발하자 두번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로젠스키가 회담 중에 북한의 김사훈을 권총으로 쏘았
다는 소문이었다. 취리히의 종합 병원에 총상을 입은 김사훈이 입원
한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나섰는데 그것도 곧 시들해졌다.
   시내를 뒤지다가 지친 기자들은 꼭 미국과 북한 대사관 앞으로 돌
아와 진을 쳤는데 덕분에 근처의 식당과 커피숍은 호황이었다. 따라
서 미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북한 대사관의 직원들은 출입할 때마다
수백 명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질문 공세에 시달렸고 근처의 가게
                                        혼란과 배신의 서울 247
에 들르면 주인과 손님들의 경외 어린 시선을 받고 있었다.
    한국 대사관은 북한 대사관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
다. 북한 대사관이 허름한 10층 빌딩의 2개층을 빌려 사용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국 대사관은 5백 평이 넘는 대지에 정원이 있는 3층
짜리 대리석 건물이다. 정원 복판의 깃대에서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
리는 품위 있는 건물이었다.
    그러나 북적이는 북한 대사관과는 달리 오늘도 한국 대사관의 철
문 앞은 인적이 없었다. 가끔씩 직원 한두 명이 정문 옆의 쪽문으로
들락였는데 마치 숨어 지내는 사람들처럼 재빠르게 들어가고 나온
다. 가끔씩 한국 대사관 앞을 지나는 행인들이나 기자들은 서로 얼굴
을 마주보고는 입을 다물었고 어떤 사람은 턱으로 대사관을 가리키
며 한두 마디만 뱉고는 머리를 돌렸다.
   조민섭이 대사관의 정문 앞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30분이었다.
택시에서 내린 그가 쪽문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안성민 참
사관이 머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대사님."
   50대 초반으로 대머리가 번들거리는 그는 한때 조민섭과 같이 영
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대사는 계신가?"
   대사관 정원의 마른 잔디 위를 가로질러 가면서 그가 안성민을 바
라보았다.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
   "서둘러야 돼, 참사관. 시간이 없네 "
   "f1? fl ."
24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그들은 서둘러 건물의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북한대사관의 정문이 마주보이는 길 건너편의 카페에 앉아 있던
AP 통신의 안톤 모리스 기자는 카페 앞에서 승용차 한 대가 급정거
하는 것을 보았다. 검정색 벤츠였고 뒤쪽 문이 열리더니 동양인 두
사람이 서둘러 내린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들 중 한 명이 카페의 입구 쪽으로 다가
오자 안톤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20년이 넘는 현장 기자
생활에서 나오는 육감이다. 동양인이 카페의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안톤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뭐요?무슨 일이오?"
    낮고 빠르게 물었는데 카페 안에는 날고 뛰는 기자들이 20명이 넘
게 모여 있는 것이다. 동양인이 힐끗 안톤을 바라보더니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안톤이 그의 팔을 잡았다.
   "이봐요, 당신 코리언이지?"
   "기자 여러분."
   대답 대신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30대 초반으로 세련
된 옷차림의 사내였다. 코리언이라면 남쪽 한국이 틀림없었다. 카페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고 모든 시선이 사내에게로 옮겨졌다.
   놀란 안톤도 한걸음 비껴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여러분, 난 한국 대사관의 서기관 이응모입니다. 오늘 오후 1시
정각에 시내 맥슨 빌딩 13층의 프레스 센터에서 한국 정부에서 파견
된 외무부 관리의 중대 발표가 있습니다. 늦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
   "잠간, 무슨 발표요?"
   대뜸 물은 것은 안톤이다.
                                         혼란과 배신의 서울 249
   "정부 발표인가?"
   "그렇습니다 이번 회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발표요."
   사내가 소리쳐 대답하고는 몸을 돌렸다.
   "이봐요, 잠간, 내용은 어떤‥‥‥‥
   "여보시오, 1시라고 했나? 남한 혼자서."
    "미국은 어때?"
    "남한 단독이야?"
    수십 개의 입에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대사관의 사내는 이
'미 밖으로 나갔고 카페 안은 금방 수라장이 되었다. 시간은 12시가
되어 있었는데 준비하고 도착하려면 빠듯할 것이다. 가방을 챙기다
가 의자가 넘어지고 서로 부르고 거기에다 카페 주인의 돈 내고 나가
라는 고함 소리까지 겹쳐지고 있었다.
   북한 대사관의 공보관 이필수가 남한의 중대 발표 소식을 들은 것
은 그로부터 10분 후였다. 그것은 친절하게도 서방의 기자 한 명이
전화를 걸어와 남한의 중대 발표가 있다는데 당신들의 회담의 결말
이 났기 때문이냐고 물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화기를 내려놓
자마자 밖에 나갔던 직원들도 뛰어 들어와 남쪽의 중대 발표 소식을
전해 주었던 것이다.
   "별거 아닐 겁니다, 부대사 동지, 아마 다급하니까 그러는 것이겠
지요. "
   속력을 내어 달리는 승용차 안이다. 앞자리의 이필수가 몸을 돌려
김정철에게 말했다.
   부대사인 김정철은 50대 후반으로 날카로운 인상치 사내였다.

그는 잠자코 시선을 들었다가 내리고는 입을 열지 않았다.

불편한 기색이었고 그것은 이필수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잠시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발표 내용을 잘 녹음해 두도록 해, 공보관 동무 "
    김정철이 입을 열었다.
   "수상 동지는 놈들의 발표 내용을 알게 될 때까지 회담을 잠시 중단하라고 했어.

미국놈들도 그러자고 했다는데."
   "염려 마십시오, 부대사 동지. 녹음기를 가지고 갑니다. "
   "하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다니까 그럴 필요도 없을지 모르겠구만, "
   "기자들에겐 특종이니까요."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놈들이 내놓을 조건이 무엇이 있나? 항복아니면 전쟁 둘뿐인데."
   김정철이 혼잣소리처럼 말하자 이필수는 섣불리 거들지 않는다.
   "시간을 끈다던가, 해묵은 경제 협력 이야기로 우리에게 사정할 수도 없을 것이고."
   차가 속력을 내어 로터리를 회전했기 때문에 타이어의 마찰음이 크게 들렸다.

12시 45분이어서 15분이 남았으나 이제 프레스 센터가 있는 맥슨 빌딩까지는 5분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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