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억류되는 미국 시민
(1)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가 우리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물리 물론
이것은 스펜인어로 이필수가 알아듣지 못했고 더욱이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한 것이다. 가브리엘이 이제는 영어로 다시 말했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 줘요, 선생님. 사만다가 화장 고치러 갔으니까. "
방으로 들어온 이필수는 더블베드의 매트를 두 개 겹쳐 놓은 것
같은 침대에 옷을 입은 채로 누웠다.
파스편 클립은 취리히의 남성 전용 일급 클럽으로서 회원제로 운
영되는 곳이다. 따라서 리마트 거리에 있는 이곳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는데 이필수는 일년 전부터 회원이 되어 있었다.
부대사인 김정철이나 대사도 모르는 일이었고 만일 알게 된다면
당장에 송환되어 수용소행이 되고도 남는다.
이필수는 몸을 굴려 옆쪽을 바라보았다. 한쪽 벽면이 거울로 장식
되어 있어서 자신의 온몸이 비쳐 보였다.
사만다는 그가 석 달 전부터 파트너로 정해 놓은 여자로 그리스 태생이었다.
검은 머리에 자그만 체구로 동양인 비슷했고 벗은 나신이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며
방중술이 뛰어나 하룻밤 천 달러의 화대가 아깝지 않은 여자였다.
"제기랄 년."
다시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이필수가 투덜거렸다.
화장을 하고 있다고 했지만 사만다는 아마 손님을 받고 있을 것이었다.
늙은 마귀 할멈 가브리엘은 처음에는 사만다가 몸이 아파 쉬고 있다면서
다른 여자를 고르라고 했다.
앙리 주르메가 죽은 이후로 가브리엘의 눈치가 달라진 것같이 느껴졌으므로
이필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회원 등록을 해준 것도 주르메였고 올 때마다
화대 계산을 한 것도 그였다.
물론 그만큼 접대를 받을 만한 일을 해주었기 때문인데
이곳을 유심히 관찰하면 돈을 낸 사람 위주로 장사를 한다. 주르메가 왔다면
그의 애인 에이미가 즉각 불려 왔을 것이었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으므로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천장을 향해 돌아누워서 눈을 감았다.
언제나처럼 가슴이 가볍게 뛰고 있었는데 그는 이때의 분위기를 대단히 즐기는 편이었다.
섹스를 할 때보다
그 직전의 기다리는 순간이 더 흥분이 되는 것이다.
"이 씨발놈이 약을 먹응 거여, 머여?"
굵고 잘라 던지는 듯한 말, 더욱이 한국말에 이필수는 소스라쳐 눈을 떴다.
그러자 흐린 시야에 거인의 모습이 덮어씌워지듯이 다가왔다.
북한에 이런 거인은 없다. 상반신을 벌떡 일으킨 이필수가 눈을 부릅떴다.
"당신들 누구요?"
사내들은 세 명이었는데 그들 중 거인이 한발짝 다가오더니 빙그레 웃었다.
"씨발놈아 니 손님여. 아침에 콩나물이나 마늘 같은 거 안 먹었 33f"
"이봐요, 당신들‥‥‥‥
침대에서 이필수가 뛰쳐 일어나는 순간 조웅남은 솔개가 병아리를 낚아채듯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요 쥐새끼 같은 놈이!"
조웅남의 대밥그룻만한 주먹이 자신의 머리 꼭지를 내려치자
눈앞으로 수백 개의 검고 횐 반점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필수는 정신을 잃었다.
1월 하순은 일년 중 추위가 제일 극심한 시기였는데
며칠 동안 따스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봄이 일찍 다가오는 것으로 착각될 만큼 피부에 와닿는 햇볕은
부드러웠고 바람은 연했다
최우식 대령은 사령부의 계단을 오르면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시린 공기가 폐 속에 가득 차면서 정신이 맑아졌다. 그러자오가는
군인들의 모습이 활기 있고 사기가 넘쳐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작전 과장실에 들어서자 강한기 소장이 머리를 들었다. 기갑
학교 교장이었던 그는 이번에 소장 장교들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작
전 과장이 되었다.
"다녀왔습니다, 과장님 ."
최우식이 기운차게 경례를 붙이며 말하자 강한기가 머리를 」1덕였
다. 50대 초반으로 검은 피부에 깡마른 몸집의 사내였다.
"배치는 완벽합니다. 오산 공군 기지에 2개 대대 병력을 배치시킨
것은 잘한 일 같습니다. 기지 주위에 출입로가 서너 개 더 있어서요. "
최우식이 선 채로 빠르게 보고했다. 그는 헬리콥터로 오산과 대구
의 미 공군 기지 주변을 확인하고 돌아온 길이다.
대통령이 그리피스 대사를 불러 봉쇄는 오후 4시에 시작될 것이라
고 통보했지만 한국군 부대는 아침 8시부터 출동 준비를 하고 있었
다. 그리고 그리픽스가 대통령과 만나고 있던 오후 2시에는 이미 미
공군 기지 주변에 한국군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미 연합사의
통제를 받지 않는 계엄군을 이동시켰고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시켰으므로
미군은 허를 찔린 셈이 되었다.
"최 대령, 최 대령이 날아오고 있는 동안에 첫번째 충돌이 일어났어, 군산에서 ."
강한기가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저음이어서 그런지 말소리가 방을 울렸다.
"비행장 출입을 저지시키는 한국군과 비행장의 미군 사이에 주먹 다짐이 있었어."
강한기가 서류를 두 손으로 쥐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총격전까지는 안 갔지만 양쪽의 감정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다.
미국인들은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돌아갔지, 물론."
미국인의 출국을 저지시키자는 발상을 한 것은 안전 기획부 부장인 임병섭이었다.
그는 외무 장관 안승재의 죽음 이후로 성격이 더욱 전투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계획은 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을 움직이게 되었는데
그 실무 주역이 소장 장교들의 리더인 강한기인 것이다.
"나, 6시에 회의가 있어. 나도 한바탕 해야 될 컷 같다. 월슨하고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서며 강한기가 말했다.
"과장님, 이 기회에 한국군은 흘로서기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군을 일치단결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
"부시정관 이영규 대장 같은 분은 이것이 위험한 모험이라고 말하고 있어."
"인질이면 어떻습니까?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하세요.
그렇다면 우리는 40년 동안 그들의 인질이었습니다.
동북아의 총알받이였지요
지금의 그들의 행태를 보면 말입니다. "
"쓸데없는 소리 ."
문의 손잡이를 잡은 강한기가 몸을 돌려 최우식을 쏘아보았다.
"지금 현재의 상황만을 보고 판단해라.
지금은 전시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국을 지킨다는 생각만 하란 말이다.
전후의 생각은 하지 마라."
"예, 과장님 ."
"그런 사고를 키웠다가는 권력에 욕심을 내게 된다. 우리 선배들이 그랬어, "
"그런 놈이 있다면 내가 쏘아 죽이73다. "
"염려 마십시오, 과장림 ."
강한기가 계엄 사령관 강동진,
1군 사령관인 이주석 대장 등과 함께 사령부의 회의실에 들어서자
한미 연합 시정관인 제시 월슨은 이미 막료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국군과 미군의 고위급 장성들이 10여 명 모인 자리였지만서로 작은 소리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끝나자 회의실은 순식간에 싸늘한 분위기로 되돌아갔다.
어제 아침에도 연합시정부에서 회의를 했지만 하루 만에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말석에 앉은 강한기는 이 자리가 마치 판문점의 북미 회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 장군, 오늘 오후에 당신 정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외국인 출국 규제에 관해선데 ."
월슨이 입을 열었다.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육중한 체구의 사내였다.
"우리 미국 정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따라서 한국군의 전시 작전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본인은 당신에게 미 공군 기지 주변의
계엄군을 철수시킬 것을 명령합니다. "
강한기는 그의 말에서 '명령'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강조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느낌은 다른 한국군 장군들도 똑같이 받은 모양으로 옆에 앉은 계엄군 참모장이자
제1군 참모장인 고성국 중장이 퍼뜩 머리를 들고 긴장하는 몸짓을 했다.
강동진이 월슨을 바라보았다.
"월슨 장군, 물론 계엄군도 엄격히 말한다면 당신의 통제 아래 들어가겠지만
나는 당신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
"그렇다면 한미 방위 조약을 지키지 않겠다는 말이군요, 강 장군."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해석하시오."
강한기가 힐끗 월슨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정상이고 그들로서는 한국에 손을 뗄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월슨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눈을 치켜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 미국인을 인질로 삼아 우릴 위협하고 있는 거요.
장군, 당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시오."
"알고 있습니다, 월슨 장군."
"위협하고 있는 것을 시인합니까?"
"그건 마음대로 해석하라고 말했었소."
마침내 한계에 다다른 듯 월슨의 두툼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국 시민 7만 명을 인질로 하다니, 당신, 어떤 결과가 올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글쎄요."
강동진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허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고뇌하는 표정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생각하는 얼굴 같기도 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아마, 미국이 수십만 병력을 파견하겠지요, 인질을 구하려고."
"주한 미군의 4만 병력으로는 한국군 3백만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아마 50만 병력은 파견해야 될 겁니다. "
"당신, 전쟁을 말하고 있소, 강 장군."
둘째손가락으로 강동진을 가리키며 월슨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같이 강한기에게는 느껴졌다.
"미국과 한국의 전쟁을 말하고 있소. 그렇지 않습니까?"
"월슨 장군, 내 생각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
강동진이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물론 오늘의 회의 내용도 모두 기록되Tf지만 당신의 정부에게 분명히 보고해 주시오.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미군 병력이
한국에 도착하는 즉시 미국 시민은 출국할 수 있습니다. "
"앞으로 보름밖에 남지 않았군요, 북한이 침공해 온다는 날이.
그때 엄청난 인명 피해가 나겠지요, 한국 국민이나 미국 국민이나."
"도대체 말도 안되는 짓을!"
월슨이 갑자기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냔 말이야!"
"나는 북한놈들과 이렇게 테이블에 마주앉아 회담을 하고 싶었었소.
내가 장군이 되었을 때부터요."
강동진의 말이 다른 곳으로 돌려지자 월슨이 입을 닫았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아졌다.
"그런데 그 개자식들은 우릴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더구만.
당신들이 우리의 주인이라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분합니다. "
"이봐요, 장군."
월슨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별 세 개짜리 장군이 손을 저으며 강동진의 말을 막았다.
미 제2군단 시련관인 조지 머피 중장이다.
"말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마시오, 강 장군, "
"잠자코 듣기나 해, 당신은."
그렇게 나서서 말한 사람은 강한기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고성국 중장이다.
"북한놈 별 세 개짜리 보다 내가 격이 떨어져 보인다면 우리 사령관의 말을 가로막아도 돼.
그렇지 않다면 잠rl코 있어."
고성국은 육사를 졸업하고 다시 웨스트포인트를 다녔는데
그의 동기생들이 미군의 별 셋짜리가 되어 있었다.
머피가 입을 다물자 강동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취리히에서 북쪽 놈들과 회담을 했고 지금 우리는
그와 비슷한 절박한 문제로 회담을 하고 있소. 그놈들과 우리를 비교해 보시오,
월슨 장군 누가 더 무법자인지. 이 내용도 당신 정부에 꼭 보고해 주기를 바랍니다. "
강한기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앞에 앉은 미군 소장을 바라보았다.
그쪽도 이쪽을 바라보는 바람에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는데 한
동안 강한기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귀스나흐트는 취리히 호숫가에 있는 조그만 도시였다.
눈발이 희끗거리는 오후에 두 대의 검정색 벤츠가 빠른 속도로 시내로 진입해
들어오더니 경찰서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것은 북한 대사관의 부대사 김정철과 최성산이다.
그들은 뒤따라오는 사내들을 차 안에 남아 있게 하고는 경찰서 안으로 서두르듯 들어섰다.
한산한 거리였고 그와 어울리게 현관 안의 로비도 샐렁했다.
안내 창구에 앉아 있던 경찰관이 들어선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서장한테서 연락을 받았는데."
최성산이 나섰다.
"우린 북한 대사관에서 온 사람들이오."
"아아, 북한 대At관."
안내 창구 옆에 서 있던 경찰관 두어 명이 몸을 돌려 ÷I들을 바라보았다.
안내 경찰이 손을 들어 안쪽을 가리켰다.
"서장은 안쪽 사무실에 있습니다. 지금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요."
그들은 잠자코 복도를 걸어 문이 열려 있는 서장실로 들어섰다.
50대의 비대한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시오.북한 대사관에서 오셨지요?"
"그렇습니다. "
대답은 최성산이 한다.
"서장, 대사관의 부대사를 모시고 왔습니다. 우린 시간이 없어요."
"그러시겠지요."
서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먼저 신원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증명서나 신분증을 보여주시오."
=1들의 신분증을 확인한 서장이 그들을 안내한 곳은 경찰서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병원의 시체 안치소였다.
담당 직원의 안내를 받아 냉기가 감도는 시체 안치소에 들어서면서 서장이 말했다.
"내 구역에서도 한국인의 시체가 발견될 줄은 몰랐소.
요즘은 온통 한국인의 전쟁으로 시」1러워서 "
방의 한복판에 철제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위는 횐 시트로 덮여 있었는데
사람의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담당 직원이 시트를 젖혀 보였다.
"팔, 다리가 한쪽씩 부러졌고 손가락은 네 개가 뒤로 꺾여 있었습니다. "
시체실의 온도처럼 냉냉한 목소리로 직원이 말했다.
"사인은 목이 꺾인 것 때문인데 죽기 전에 고문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당신 직원이 맞습니까?"
서장이 최성산과 김정철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신분증이 주머니에 있었어요. 지갑에 돈도 남아 있었고.
당신 대사관의 직원 이필수가 맞지요?"
"맞습니다. "
김정철이 머리를 끄덕이며 서장에게 물었다.
"이것은 남조선 놈들이 한 짓이라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지요?"
"글쎄, 그건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서장이 팔짱을 끼고는 김정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말씀을 드리지 않은 모양인데 주변에 여러가지 증거품들이
흩어져 있었지요."
북한 사람들이 더이상 시체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직원은 흰 시트
로 시체를 덮었다.
"증거품이라니 ?"
이맛살을 찌푸린 최성산이 서장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서장의
느글느글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그의 눈매는 사나웠다.
"살해자가 누구인지 증명할 만한 것들이오?"
"아니, 살해당한 이유가 될 만한 것인데."
서장이 문 쪽으로 발을 떼었으므로 그들은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온 서장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서장, 말해 보시오. 무슨 증거품이오?"
최성산이 거칠게 묻자 서장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마약이오. 상당한 양의 마약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 마약의 반은 가짜였소. 봉투가 어진 것들이 많은 걸 보면 그
곳에서 마약을 확인했던 것 같더구만."
"말도 안되는 소리 ."
30 밤의 대통령 제3부 -ll
김정철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서장을 쏘아보았다.
"그놈이 마약을 갖고 다닐 리가 없어."
"글, 부대사님, 난 현장의 상황 그대로를 말씀 드리는 겁니다. "
서장이 계단의 난간을 잡고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시체실로
들어서는 여러 명의 경찰들 때문에 그들은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 상황은 당신 직원이 가짜 마약을 진짜와 섞어 팔려다가 고문
당하고 죽은 것같이 보입니다. 이건 상부의 생각과 내 생각이 모처럼
일치된 거요."
"아니, 그렇다면 당신네 상부에서도‥‥‥‥
"당신들이 오기 전에 다녀갔지요."
"신문 기자들도 다녀갔습니다. 그 친구들이야 워낙 냄새를 잘 맡
으니까."
"개새끼들, 함정을 봤구나."
한국말로 씹어 뱉듯이 말한 김정철이 최성산을 바라보았다.
"최 동지, 야단났어 이걸 수습해야 돼."
아랫입술을 깨문 최성산은 선뜻 말을 받지 않았다. 서장이 계단을
오르면서 그들을 돌아보았다.
"시체는 내일 인수해 가시지요. 이쪽에서도 절차를 밟아야 할테니까"
그러나 북한 사람들이 잠자코 있었으므로 그도 관심 없다는 듯 머리를 돌렸다.
"이건 통장이군, 어이구 "
억류되는 미국 시민 31
한쪽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안톤 모리스는 재빠르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거실에 쭈그리고 앉은 두 명의 사복 형사가 서랍을 뒤지고 있는 중이었다.
"달러야. 30만 달러가 넘어."
안톤 모리스가 넘겨다보자 낯익은 형사는 통장을 접었으나 이미
머리속에 숫자가 입력된 후였다.
"이 새끼, 공금을 빼돌린 거야. 가명으로 입금시킨 걸 보면."
통장을 흔들어 보이면서 형사가 동료와 안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필수의 집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연방 경찰과마약쿡의 요원
들이 10여 명이나 몰려와 있었고 기자들도 대여섯 명이 넘었다. 보
통때에는 수사를 할 동안 기자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던 경찰이 오늘
은 선별된 기자들을 수색 현장에 참여시키고 있다.
안톤은 일어선 형사의 뒤를 따랐다
"이봐요, 벤슨, 그렇다면 죽은 친구는 마약에 이물질을 섞어 앙을
불린 다음 도매상에 팔았던 거요. 그렇지?"
안톤이 뒤를 따르며 묻자 나이든 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복도에 서 있던 상급자에게 다가가 통장을 펼쳐 보이며 이쪽에 등을 돌렸다.
안톤에게로 기자 한 명이 다가왔다. 이름은 잊었지만 낯익은 『파리 마치』지의 기자였다.
"이 자식, 잘사는군. 값비싼 물건 투성이야. 그런데 조금 전에 무슨 일 있었어?"
32 밤의 대통령 제3부 -H
"아니, 전혀."
안톤이 머리를 젓자 기대하지도 않았던 듯 사내가 등을 돌렸다.
카메라로 난장판이 된 집안의 이곳저곳을 확인하듯 몇 번 찍고 난
안톤은 서둘러 이필수의 집을 빠져 나왔다 안승재가 회담 도중에 피
살된 사건에 대해서 세계 주요 언론의 보도는 소극적이었다. 안승재
가 폭로하려고 했던 북한의 마약 판매와 도매상들의 명단을 보도한
것은 수백 개의 세계 언론사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스위스의 연방 경찰이 투입된 현장에 기자들을 참석시킨다는 것은
스위스 정부가 어떤 의지를 갖고 있다고 보아도 되었다. 이제 기사가
실리는 것이다.
신바람이 난 안톤은 차를 피해 길을 건너뛰었다.
"함정이야, 이필수가 마약을 쥐고 있을 이유가 없어. 지난번의 물
량은 이미 도매상들한테 넘겨진 지 오래고 확인도 끝났었단 말이야. "
김정철이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었고 두 눈에는 핏발이 섰다.
"남조선 놈들이 조작한 것이다. 이필수를 잡아 죽이고."
"부대사동지,이필수는 리마트 거리에 있는 파스핀 클럽의 회원 이었습니다.
그 클럽은 회원 가입비만 5만 달러가 넘는 곳입니다. "
최성산의 말에 김정철의 눈과 입이 함께 벌어졌다.
"파스핀 클럽이라구?"
"그렇습니다, 부대사 동지."
(2)
"연방 경찰이 어떻게 알았는지 파스핀 클럽까지 조사를 했습니다.
사만다라는 단골 여자도 있었다는군요."
"사만다는 이 필수한테서 항상 값진 선물을 받았었다고 합니다. "
"나쁜 놈 "
"부대사 동지, 연방 경찰이 우릴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
"그것이 문제가 아냐, 최 동지. 그 마약이 처리되어야 해."
의자에 둥을 기대면서 김정철이 이제는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었
다. 대사관 2층의 부대사실 안이었다. 밤 9시가 지나 있었지만 환하
게 불을 밝힌 대사관은 지금 비상 사태가 되어 있었다.
안종호 대사는 실권을 김정철에 빼앗겨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지만
대충 돌아가는 흐름은 안다. 그도 집무실에 틀어박혀 본국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정철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최성산을 바라보았다.
"이놈들은 남조선 정부의 특공대 노릇을 하는군, 깡패 새끼들이 ."
"보통 깡패가 아닙니다, 부대사 동지. 미국의 마피아나 일본의 야
쿠자와 비슷한 조직력을 갖춘 놈들인데 그 두목 급들이 와 있는 겁니
다. "
"날뛰어 봐도 2주일 후면 나라 없는 부랑자 신세가 될 것이다. "
"부대사 동지, 내일 아침 신문에 일제히 사건이 보도될 것 같습니
다만. "
"어쩔 수 없다. "
김정철이 어금니를 물고는 길게 콧숨을 내쉬었다.
34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이필수의 부정 행위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내 책임이다. 최 동지,
당신이 사실 그대로를 당에 보고해 주게,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부대사 동지 "
"놈들을 찾아야 돼.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것은 지금‥‥‥‥
자리에서 일어선 최성산이 다시 입을 열려다가 생각에 잠긴 듯한
김정철의 얼굴을 보고는 몸을 돌렸다
문을 열자 박은채가 신문 뭉치를 들고 서 있었다. 밝은 색 바지에
스웨터 차림이었다.
"아침 신문을 모아 왔어요. 기사가 크게 났습니다. "
"들어와."
문에서 비켜서며 김원국이 말하자 그녀는 방으로 들어섰다.
"난 영자 신문은 겨우 읽지만 불어나 독어는 모른다. 대신 저어 주
었으면 해서."
아침 커피를 마시던 참이었으므로 의자에 앉은 김원국이 앞자리를
눈으로 가ㄹ1켰다.
"여기 앉아서 읽어 줘."
스위스에서 발간되는 영문판과 불어, 독어판의 일간지를 모아 왔
으므로 박은채는 신문 뭉치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저보다 지희은 씨가 나을텐데 요."
그러면서 힐끗 김원국을 바라보았지만 반응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우선 영자 신문 하나를 펼쳐 들읓을. 신문을 모으면서 대충 훌어본
내용이라 해석은 조금 더 수월했다.
억류되는 미국 시민 35
"이 신문의 타이틀은 '북한 외교관이 마약 거래 중 피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박은채가 기사 제목부터 읽었다.
"퀴스나흐트의 숲에서 마약 더미에 묻혀 피살되었다는 내용인데
요."
그녀는 천천히 신문을 번역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이필수가 마약에 이물질을 넣어 분량을 늘려 도매상들에게 넘긴
증거가 현장에서 발견되었다고 신문은 보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필수의 사생활이 폭로되었는데 집에서 발견된 30만 달러가 넘는통
장에다가 파스핀 클럽의 사만다와의 인터뷰 내용도 적혀 있었다.
대부분의 신문은 거의 같은 내용이었고 살해범이 셋 중의 하나라
고 보도한 것도 같았다.
첫째 용의자는 이필수에게 피해를 본 도매상들이다. 그들이 현장
에 마약을 어지럽게 흩어 놓아 증거를 남긴 것은 공급자에 대한 경고
와 복수를 나타낸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둘째 용의자는 남한의 공작원들이다. 신문은 남한의 공작원들이
북한측을 공격하는 기미가 보인다고 여러 사례를 늘어놓았다.
셋째 용의자는 북한측이었다. 그들은 마약의 중량을 늘리고 공금
을 횡령하여 조국을 배신한 이필수를 응징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시체 주변에 마약이 흩어진 것이 의문점이지만 시간에 쫓기고 있었
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박은채가 사설의 중요한 내용까지를 읽고 신문을 내려놓자 김원국
이 커피 포트를 들고 물었다.
"커피, 한잔 더 하겠나?"
36 밤의 대통령 제3부 -ll
"네, 주세요."
"말하는 요령이 좋아. 중요한 것만 간추려서 잘해 주었어."
"칭찬 고맙습니다. "
커피잔을 두 손바닥으로 감싼 박은채가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북한은 지금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전쟁으로 국내의 불만을 해소
시키는 일밖에는."
"세계 여론이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데두요?"
"여론 같은 것쯤은 우습게 보는 집단이야. 그리고 신경을 쓸 여유
도 없고.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힘밖에 없다. "
박은채가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사설에도 거론되었지만 이곳 일 간지들뿐만 아니라 유럽의 언론
들도 한국 정부가 내린 강경 조치를 비난만 하진 않았어요. 간접적인
표현을 쓰지만 이해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
"우리 정부도 놈들처럼 모험을 하고 있어. 필사적인 행동이지. 난
대통령의 결단을 지지한다. "
"우리는 어떻게 되지요?"
그러자 김원국이 찬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떨어뜨린 박
은채가 손끝으로 찻잔을 만지다가 그것도 멈추었다.
"이곳이 태풍의 진원지였어.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오늘 아침의
기사가 다시 세계에 진동을 일으켰을 것이고."
김원국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섬에서 갇혀 살고 있었다. 내 스스로 닫고 가둔 것이었지만,
나는 지금 내가 얼마나 조그만 사내였던가를 느끼고 있는 중이야."
억류되는 미국 시민 37
"나에게 찾아온 이 기회는 차라리 은혜다 "
김원국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 일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야. 넌 지금이라
도 빠져도 좋아."
"저도 따른다고 했어요."
박은채가 머리를 들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지금 제자신이 자랑스런 고 그리고‥‥‥ 행복해요."
조웅남의 심부름으로 거리에 나가 위스키를 사들고 오던 오종표는
호텔을 향해 길을 건너려다가 발을 멈추었다. 눈발이 어지럽게 휘날
리는 흐린 날씨였고 길은 쉴새없이 내리는 눈에 진창이 되어 있어서
차가 지날 때마다 얼음물이 튀었다. 종이 봉지를 한 손에 움켜쥔 오
종표는 길가의 가판대 앞에 서서 호텔 옆쪽을 바라보았다. 호텔의 로
비에는 강대홍이 나와 앉아 있을 것이다.
오두막에서 시내의 리더도르프 거리에 있는 폴라 호텔로 숙소를
옮긴 것은 어제였지만 오종표는 호텔의 주변을 책을 외우듯 머리속
에 담아 두고 있다. 그의 시선은 호텔에서 50미터쯤 떨어진 길가에
세워진 흰색 벤에 멈추었다
20분쯤 전에 호텔을 나을 적에 벤을 보았는지 어쩐지 기억이 나지
않았으므로 오종표는 혀를 찼다. 가게 앞에 세워진 벤은 뒤쪽 머플러
에서 흰 배기 가스를 내뿜고 있었는데 검게 칠한 유리창 때문에 안은
보이지 않았다. 만일 미행자들이라면 서툰 놈들이다. 오종표는 그렇
게 판단했다.
38 밤의 대통령 제3부 -ll
호텔 쪽의 길가는 상점가였으므로 주차 지역이 아니다. 가게에 일
보러 왔다면 안쪽에 있는 가게 주차장에 차를 대어야 했는데 그렇게
되면 호텔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서 있는 뒤쪽의
성당에 진을 치고 있을 수도 없을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한눈에 표
가 나는 것이다.
입맛을 다신 오종표는 푸른 신호로 바뀌기를 기다려 길을 건넜다.
사람들 사이에 끼여 곧장 호텔로 들어가 강대홍에게 일러 줄 생각이
었다.
그가 길을 거의 건넜을 때 벤의 옆문에서 누군가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50미터쯤 떨어진 거리였고 이쪽은 키다리 서양인들 틈에 끼
여 가고 있어서 오종표는 마음놓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벤에서 내린 사람은 장신의 서양인이었다. 검정색 파카로 몸을 감
싼 그가 빠른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오종표는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어딜 다녀오는 거냐?"
옆에서 들리는 굵은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김칠성이 다가와 1를
내려다보았다.
"예, 저기, 형님 심부름으로‥‥‥‥
대답하면서 호텔의 현관 밖으로 시선을 돌린 오종표는 검정색 파
카가 호텔의 계단을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형님, 저놈이 수상합니다. 저쪽의 벤에서 나온 것을 보았는데."
오종표가 턱으로 사내를 가리키며 다급하게 말하자 김칠성의 시선
이 그쪽으로 옮아갔다.
"일본 정 보국에서 붙여 준 현지인이다. 우리 주변을 감시해 주고
억류되는 미국 시민 34
있어 ."
머리를 돌린 김칠성이 말했다.
"그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우리는."
로비에 들어선 사내는 힐끗 이쪽을 바라보더니 보일 듯 말 듯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로비의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소파에 앉아
있던 서양인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와 교대하듯 밖으로 나
가는 것이 보였다.
"그거, 술이냐?"
김칠성의 시선이 오종표가 쥔 종이 봉투로 옮아갔다.
"예, 형님."
그러자 이맛살을 찌푸린 김칠성이 손을 뻗어 봉투를 낚아채었다.
"이건 내가 형님한테 가져가73다. "
"형님, 하지만‥‥‥‥
"술 심부름이나 시키고.이 양반한테 한번 따져야겠어.큰형님한
테 일러 바치든지 어쩌든지 할 거다. "
"형님, 그렇게 되면 저는, 제 입장이 ‥‥‥‥
"걱정 마라.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몸을 돌린 김칠성이 계단으로 올라가자 오종표가 울상을 지었다.
"형님, 애들한테 술 심부름을 시키다니요? 저래봬도 한국에선 보
스급인데."
봉투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김칠성의 말투는 오종표에게 큰소리를
칠 때와는 다르다.
그러나 김칠성의 부드러운 말투에도 불구하고 조웅남은 눈을 부릅
떴다.
40 밤의 대통령 제3부 -H
"아니, 뭐여?종표 그 시키가 뭐라고 허데?"
"내가 걔한테 그랬어요. 형님한테 따져야겠다고 말요. 술 심부름
이나 시키는 걸 말입니다. "
"응, 따져라."
건성으로 대답한 조웅남이 봉투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어 들었다.
"내 욕을 박살나게 허지 그렸냐, 종표 앞에서?"
"했어요."
"잘혔다. "
마개를 비틀어 연 조웅남이 병의 주둥이를 입에 대었다.
시가 전차 6번의 종점에서 내린 서영훈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
다. 전차에서 내린 승객은 많지 않았으나 기다리는 승객들이 많았으
므로 정류장은 혼잡했다. 눈은 그쳤지만 하늘은 언제 변덕을 부릴지
불안할 정도로 흐린 오후였다. 사람들을 헤치고 정류장을 벗어난 그
가 동물원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 10달전이 되어 있었다.
10프랑을 내고 입장권과 거스름돈을 받은 서영훈은 동물원의 안으
로 들어섰다. 월동하는 짐승도 있는 데다가 추운 날씨여서 우리 밖으
로 나온 짐승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구경꾼도 드물었다.
담배를 피워 물고 서영훈은 느린 걸음으로 맹수 우리를 돌았다.
신문을 둥글게 말아 겨드랑이에 끼고 두 손은 코트 주머니에 찌른 한
가한 모습이 었다.
그가 비어 있는 곰의 우리를 지날 때였다. 우리 옆의 벤치에 앉아
있던 20대의 건장한 사내가 일어서더니 다가오는 그를 향해 섰다.
"서영훈 씨 맞습니까?"
억류되는 미국 시민 41
"그렇습니다. 전화하신 맨튼 씨지요?"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신분증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악수를 하자는 줄 알고 손을 마주 내밀려던 서영훈이 입맛을 다시
고는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었다.
"좋습니다. "
신분증을 살펴본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 미터쯤 떨어진 우
리 옆에 남녀 한 쌍이 서 있을 뿐 주위에 인적은 없다.
"저쪽으로 가십시다. "
사내가택으로 옆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하
자는 것으로 알아들은 서영훈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는 두 걸
음쯤 옆으로 떨어져 그를 따랐다. 오른손에 쥔 권총의 손잡이는 체온
으로 따뜻해져 있었다.
한동안 사내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날카로운 시선으로 쉴새
없이 주위를 살피고 있다. 이윽고 사내는 길가의 휴게실 앞에서 멈추
어 섰다. 닫힘 팻말이 붙여진 한 칸짜리 휴게실이었는데 커피나 음료
수를 파는 곳으로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는 없는 데였다.
"여기로 들어가시지요, 미스터 서."
사내가 턱으로 휴게실을 가리켰다.
"당신을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
조지 우드와 커트 월리엄스가 한남 빌리지의 정문 초소에 들어섰
을 때는 오후 4시였다. 초소 안에 있던 하비와 탑이 적적 했는지 그들
을 반겼다.
42 밤의 대통령 제3부 -H
"이봐, 조지, 순찰 갈 것 없다. 여기서 6시까지 놀다 들어가."
맥주 캔을 던져 주면서 하비가 말했다. 그는 체중이 백 킬로가 넘
는 흑인으로 권투 선수 경력이 있는 거친 사내였지만 동료들에겐 인
기가 좋다.
"좋아, 추운데 여기 눌러 있TE어."
커트가 시원스레 말하고는 창가의 의자에 앉았다. 하비가그에게
도 맥주를 던져 주었다.
"탑, 너 요즘 재미 어때?"
조지가 빌리지를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탑에게 물었다.
탑이 잠자코 머리를 저으며 대꾸하지 않자 하비가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저 새끼 요즘 컨디션이 나빠.제 애인이 출국하지 못하고 있거
그들은 모두 미 제2사단 소속의 헌병들이었는데 다른 전투병들보
다는 한가한 시간이 많았다. 한남 빌리지는 미군 가족들이 사는 곳으
로 그들의 순찰 구역이었는데 정문의 헌병 초소는 근처 헌병들의 휴
식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치안 상태가 좋은 지역인 것이다.
"탑, 대장한테 말해 보지 그래? 군인 가족은 한국 새끼들이 출국
시켜 주는 모양이던데."
조지가 말하자 탑이 찌푸린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안돼, 직계 가족이라야 돼."
"빌어먹을 한국놈들."
"엿같은 놈들이야. 북한놈들한테 줄곧 당하고는 우리한테 어리광
을 부리는 거야."
(3)
커트가 캔을 우그러뜨리면서 말했다.
"개새끼들이야."
그들은 다시 맥주 캔을 뜯었고 맥주가 떨어지자 조지가 빌리지 안
의 가게에서 한 박스를 사 들고 왔다. 1월의 해는 짧아서 5시가 되자
주위는 어둑해졌다. 이제 30달만 지나면 교대가 올 것이고 그들은
숙소에 들어가 다시 마실 참이었다.
"잠간. "
창 밖을 바라보던 탑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탑이 빌리지를 나가려는 초로의 한국 여인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여자는 손에 왜 묵직한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뭐 야? 도둑인가?"
조지가 묻자 하비가 피식 웃었다.
탑이 여자와 말을주고받더니 짜증난 얼굴로 여자의 어깨를 밀어
초소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사내들은 빙글거리며 그들을 바라보았
다. 횐 머리가 반쯤 섞인 여자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내 딸, 내딸, 집."
손짓 발짓까지 섞은 몇 개의 단어를 통해 그들은 그녀가 빌리지에
사는 딸집에 다녀온다는 것은 알았다. 하비가 여자의 손에서 보따리
를 낚아채어 풀자 쌀과 쇠고기가 곱게 쌓여 있었다. 이제 여자는 온
몸을 떨고 있었다.
탑이 소리를 쳤다.
"어디에서 훔쳐 온 거야?"
"내 딸,내 딸."
"딸이 어디에 살아?"
44 밤의 대통령 제3부 -ll
겨우 말을 알아들은 그녀가 탁자 위의 전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으므로 조지가 다이얼을 눌렀다. 딸의 집에서 나오는 길이라는
게 확인되었다. 그러나 탑은 놓아 주지 않았다. 훔쳐 왔는지도 모른
다는 것이다.
마침내 그녀의 딸 둘이 찾아왔는데 그들은 탑과 하비에게 거칠게
대들었다.
"어머니에게 음식 나눠 준 게 죄야?"
"너희들이 뭔데 우리 어머니를 잡아 두는 거야?"
거칠게 항의하는 큰딸을 바라보던 탑이 그녀의 다리를 걸어 땅바
닥에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손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우자 이제는 동
생이 대들었다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이래?너희들이 뭔데?너희들은 약한 여자
한테나 폭력을 쓰고 북한한테는 꼼짝을 못하고 있지 않아?"
그러자 탑의 주먹이 동생의 배를 쳤다. 숨을 들여마신 동생이 허
리를 꺾으면서 초소 바닥으로 쓰러지자 이제는 어머니가 악을 썼다.
빌리지에 사는 한국 사람 몇이 초소 안을 바라보다가 그들과 시선이
마주치자 급히 떠났다.
"이것들, 영창으로 데려가자."
커트가 동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술기운이 가셔 버렸고 기분이 잡친 것이다.
수갑이 채워진 언니는 하비가 어깨를 눌러 땅바닥에 꿇어 앉혀 놓
았고 동생은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 있다. 그 광경에 악을 쓰면서 딸
을 일으키려던 어머니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옆으로 스르르쓰러
졌다. 그러자 다시 두 딸이 아우성을 친다.
억류되는 미국 시민 45
"빨리 차를 불러."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은 커트였다. 이대로 이곳에 두어서는 불리
하다. 미군 기지로 데려가 진정시키고 나면 한미 협정으로 미군은 한
국 사법 기관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조지가 헌병대와 마악 전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였
다. 그들은 빌리지의 정문을 구보로 들어서는 일단의 한국 군인들을
보았다.
K-2 자동 소총을 앞에총 자세로 움켜쥔 일단의 계엄군 병사들이
었고 그들 옆을 장교가 따라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쪽에 민간
인 두 명이 헐떡이며 따르고 있다. 신고한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커트가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한미 행정 협정, 알아? 우릴 건드리지 못해."
한국군들은 초소의 문을 거칠게 열어 젖히고 들어섰다. 모두 여섯
명이다.
그러자 두 자매가 그들을 보더니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어머니도 땅바닥에 누워 눈물을 흘린다.
"수갑을 풀어라."
젊은 한국군 장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중위, 우리는 이 여자를 검문, 체포할 권한이 있소. 이 지역은 미
군 순찰 지역으로."
커트가 한발짝 그에게로 다가서며 말했다.
"한미 행정 협정에 의하면."
그리고는 커트는 말을 멈추고 왔던 만큼 한걸음 물러섰다.
46 밤의 대통령 제3부 -H
장교가 권총을 빼어 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위에 들어섰던 한국
군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총을 겨누었다. 노리쇠가 철컥이는소리가
이쪽저쪽에서 들리자 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너희들을 체포한다. 모두 손들어!"
"중위 . "
"닥쳐! 이 새끼야!"
"한미 행정 협정은‥‥‥‥
"개나 먹으라고 해!"
두 손을 치켜든 커트는 여자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몸을 돌렸다.
여자들의 울음은 언제부터인가 그쳐 있었다.
"어서 오시오, 여러분."
자리에서 일어선 클린트 대통령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월리엄, 감기는 어때요?"
"견딜 만합니다, 대통령 각하."
키드먼이 정중하게 대답하고는 다른 고위급 각료들을 위해 한쪽으
로 비켜섰다. 그들과 가볍게 악수를 나눈 대통령이 얼굴에 쓴웃음을
띠었다.
"『뉴욕 타임스』는 날 트루먼과 비교했더구만."
그들은 창가의 의자에 앉았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무 장관인 빌
로젠스턴, 안보 보좌관 지미 패트릭스, 합참 의장 제임스 오닐, 그리
고 CIA국장인 월리엄 키드먼의 순서였다.
"각하는 판단 착오를 하신 게 아닙니다. 『뉴욕 타임스』의 기사도
그렇게 비판적이지는 않았습니다. "
억류되는 미국 시민 47
로젠스턴이 대통령을 향해 말했다.
『뉴욕 타임스』는 6 · 25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CIA
의 정보를 무시하고 육군 정보대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반도에서 미
군을 철수시켰던 것을 지적했다. 6 · 25 동란 발발 일년 전인 1949년
』월 주한 미군은 철수를 완료했는데 한국이 미국의 극동 방위선 밖
에 있다는 에치슨 선언에 의한 것이었다. 북한이 이러한 분위기에 고
무되어 남침을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상황은 갈수록 수렁에 빠져드는데, 한국놈들
이 그렇게 나을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소?"
대통령이 탄식하듯 말하자 모두들 잠자코 시선을 돌렸다.
이틀째 한국 내의 미국 시민들은 억류되어 있었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질 사건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7만 5천 명의 미국
시민과 어떻게 보면 4만 2천 명의 미군도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대통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피스 대사한테서는 연락이 있습니까?"
"이번에 외무 장관이 된 장영식을 만났고 대통령 비서 실장도 만
났지만 대통령은 아직 ‥‥‥‥
로젠스턴이 대답했다.
"그는 만나지 않을 작정입니다, 각하."
"그 사람, 예전부터 엉뚱한 짓을 잘했어. 대통령이 되어서도 여전
해."
클린트가 한동안 탁자 위를 노려보다가 머리를 들었다.
"월슨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오닐 장군?"
"좋지 않습니다, 각하."
48 밤의 대통령 제3부 -H
백발의 오닐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군속으로 근무하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이탈해서 행정 업무가대
단히 어렵습니다. 카투사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골치 아프다고 했습니다. 만일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들부터 조
처해야 될 테니까요."
"보급이나 통신, 장비와 수송에 이르기까지 한국군과 한국인에 연
결되어 있어서 그들이 사보타주한다떤 월슨은 당장에 고립됩니다. "
"각하, 한국은 미국과 전쟁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미국군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겁니다. "
지미 패트릭스가 한숨처럼 말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행위에 대한 분노와 반발이 생각했던 것보다
강도가 낮다. 일부 공화당의 보수파 의원들은 공개적으로 한국인의
행위에 원인을 제공한 대통령과 그 측근들에 대해 비난을 했고 한국
전쟁 참전 자들은 백악관 앞에서 데모를 했다. 지상군을 속히 파병하
라는 그들의 구호는 어젯밤에도 CNN을 통해 방영되었다.
키드먼이 헛기침을 챘다.
"각하,어젯밤 여객기 한대가 일본에서 김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
클린트가 잠자코 있자 그는 말을 이었다.
"일본 자위대의 막료급 간부들 20여 명이 타고 있는 비행기였습
니다. 그들은 지금 한국군 간부들과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
"재빠르군, 일본놈들."
클린트가 뱉듯이 말하자 로젠스턴이 말을 이었다.
억류되는 미국 시민 49
"자위대 파병 법안은 오늘 밤 일본 국회를 통과할 것 같습니다, 각
하."
오닐이 나섰다.
"각하, 자위대의 공군과 해군은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군은 일본의 도움을 받으면 공군과 해군력에서 북한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
지미 패트릭스가 말을 이었다.
"각하, 일본놈들에게 기회만 준 것 같습니다. 놈들은 대군을 모집
해서 실전에 뛰어들 명분을 갖게 되고 그 대신 우리는‥‥‥‥
그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와 반대로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 신
의를 지키지 않는 대국으로 지탄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키드먼 국장, 로스앤젤레스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대통령이 말머리를 돌렸다.
"FBI 쪽 이야기를 들으니까 사태가 커질 것 같다던데 "
"글쎄요,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
키드먼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자 패트릭스가 말을 받았다.
"각하,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50만을 상대로 하기에는 너무 벅찹니
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미국 시민이고."
‥‥‥
"흑인들은 더이상 한국계 시민들을 공격하지 않습피다. 한국인들
이 단단히 결속되어 있어서 지난번 폭동 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각
하. "
그러자 키드먼이 상체를 세우고 클린트를 바라보았다.
50 밤의 대통령 제3부 -I
"한국계의 친북 단체들도 위축되어 있습니다. 워싱턴의 북한 연락
사무소를 중심으로 세력을 늘려 나가던 친북 단체들은 오히려 이번
사건으로 급격히 세력을 잃었습니다. "
친북계 인사 여섯 명이 총격을 받아살해되었는데 범인은 친한계
가 틀림없을 것이었다. 미국 내의 한인들은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까
지만 해도 남북한의 화해 무드에 젖어 있었다.
대다수의 교민들은 북한의 연락 사무소 설치에 관대했고 그것을
통일의 수준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침공 선언
이후 그들은 꿈에서 깨었다. 그리고 이곳은 미국이다.
그들은 거리낌없이 한쪽을 선택하고는 다른 쪽을 적으로 보았다.
대부분의 교민들이 남한을 선택한 것은 당연했고 북한측 인사들은
테러를 피해 숨었다. 한창 붐비던 북한의 워싱턴 연락 사무소도 인적
이 꾼기고는 경찰들만 겹겹이 둘러싸고 있을 뿐이다.
클린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 그럼 상황을 정리해 봅시다, 여러분."
자리를 고쳐 앉은 그의 얼굴은 쾌 피로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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