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전초전
(1)
횐색 시트로앵은 취리히 호수를 오른쪽으로 끼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도 호수 반대편은 짙은 그늘에 덮여 있었다.
초승달 모양의 호수는 끝쪽에 취리히 시를 정점으로 양안에 조그만
소도시 들을 거느리면서 울창한 삼림과 어울려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것도 움직이지 않을 때의 장면이다. 오늘같이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씨에 얼어 가는 도로에서 차를 운전하는 지희은은 그
것을 느낄 기분도 상황도 아니었다. 및자리에 앉은 강대홍도 긴장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한 손으로 손잡이를 쥐고는 앞쪽만 바라보
고 있었는데 그가 긴장한 이유는 언 땅에 차가 미끄러질까 봐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뒷좌석에 앉아 있는 김원국 때문이었고 지희은도 마찬가지였다.
시트로앵은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며 곧고 평탄한 길로 들어섰다.
왼쪽은 눈에 덮인 울창한 전나무 숲이어서 차는 짙은 그늘 속을 달려나갔다.
"루벤돌프가 주르메의 자금을 관리해 주고 있었을까?"
김원국이 갑자기 물었으므로 지희은은 차의 속력을 줄였다.
"그건 알 수가 없어요. 가능성은 있지만요. 반호프 은행은 괘 큰 은행입니다. "
"이필수를 만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그건 잘‥‥‥‥
지희은이 백미러로 힐끗 뒤쪽을 바라보았으나 시선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이필수와 주르메, 루벤돌프의 선으로 움직이던 것이 주르메가 없어지자
좁혀든 것 아닐까? 이필수와 루벤돌프로."
김원국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예금 증서가 없으면 돈은 인출되지 않을 것이니 북한이 떼를 쓰
는지도 모르겠군."
"떼를 쓴다고 해도 돈을 내주지는 않을 거예요. 예금 증서를 발급
한 경우에는 꼭 그것이 있어야만 인출이 됩니다. "
"스위스에서 살아서 잘 아는군."
"일본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콜머 호텔 주변에 CIA 요원과 묵
한측 공작원들이 깔려 있다는데. 널 잡으려고 하는 것 같다. "
전초전 281
"조심하도록 해 ."
"주의하고 있습니다. "
"힘든 일은 시키지 않을테니까, 위험한 일도. 난 누구에게 일을 강
_3_한 적이 없다. "
"하지만 좀 의외였다. 아무리 교민으로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더
라도 일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지희은이 차에 속력을 내자 시트로앵은 내리막길을 빠르게 달려
나갔다.
"난 여자 부하를 둔 적이 없다. 그래서 더욱 난감했지."
김원국의 얼굴에 입은 웃음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직원 한 명은 파리에 있는 모양이야. 한국 대사관을 피해서 CIA
에 보호를 요청했다는군. 영리한 녀석이지. 정보원이어서 상황을 재
빠르게 읽고 있어."
"북한측에 안 간 것만 해도 다행이지. 아니 지금은 마찬가지가 되
겠군 두 놈들이 연합 작전을 펴니까."
"전 그런 종류는 아니예요."
"장담하지 말아. 알 수 없는 것이야."
"전 배신자는 아닙니다. "
지희은의 말소리가 강해졌으므로 강대홍이 옆눈으로 힐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아. "
가볍게 대답한 김원국은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가늘게 긴 숨
28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을 뱉은 강대홍이 허리를 폈고 지희은은 핸들을 고쳐 쥐고는 차에 속
력을 내었다.
김원국이 방으로 들어서자 안승재는 안에서 문을 잠갔다.
"오시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김 선생."
김원국에게 자리를 권한 안승재가 선 채로 물었다.
"마실 것을 드릴까요?술이라면 발렌타인이 한 병 있습니다만."
"아니, 됐습니다. "
"난 낮술을 한잔 했습니다. "
안승재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히르센 광장 옆의 조그만 호텔방 안이었는데 안승재는 응접실이
딸린 왜 큰 방을 빌려 놓고 있었다.
"이 방은 임시로 빌린 겁니다. 김 선생을 만나려고."
안승재가 주름진 얼굴을 들어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두 눈의 횐
창이 붉어져 있는 것을 보면 위스키를 두어 잔 마신 것 같았다.
"장관께선 대사관에 들어가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이제 언론에
서도 모두 알고 있는 형편인데."
김원국의 말에 안승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수록 안되지요. 차라리 망명해 온 모양이라고 오해를 하더라
도 이렇게 나와 있는 것이 낫습니다. 공식적으로 나서도 날 만나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로젠스턴이나 북한의 깊사훈은 말할 것도 없고 스위스 정부의 관
리들도 마찬가집니다. "
전초전 289
안승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렌타인 병과 잔 두 개를 가져왔다.
"미국측은 날더러 꼼짝 말고 방안에 앉아 있으라고 하더군요. 모
두 우리를 위한 일이라고. 북한을 자극하게 된다나요?"
잔에 술을 채운 그는 한모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조 대사의 일이 터지고 나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젠 노골적으
로 감시를 합니다. "
"감시가 심했을텐데, 이곳으로 오실 때 말입니다. "
"염려하지 마시오, 김 선생.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간이 아닙
니다. 택시와 버스를 여섯 번이나 갈아타고 왔지요. 호텔을 나을 때
는 비상계단으로 해서 뒷문으로 나왔구요."
"아마 지금쯤에 야 내가 없어진 걸 발견했을 겁니다. "
"그런데 무슨 일로‥‥‥‥
"중요한 일을 상의 드리려고. 그래서 모험을 한 겁니다. "
안승재는 가슴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서류를 」1집어내더니 탁자 위
에 펼쳐 놓았다.
"하늘은 나에게 기회를 주셨소, 김 선생. 조 대사를 따라 나라에
봉사를 하라는 명령이오, 이것이 "
탁자 위의 서류를 힐끗 바라본 김원국이 머리를 들었다.
"북한 사람들이 건네 준 마약으로 주르메가 장사를 한 내역 아닙
니까?도매상들의 명단이 적힌‥‥‥‥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내가 일본 정보부에게 넘겨주었던 겁니다. 언론에 폭로하라고."
"김 선생이?"
290 밤의 대통령 제3부 -I
안승재가 눈을 치켜떴다.
"그럼 김 선생이 앙리 주르메를‥‥‥‥
"그렇습니다. 내 부하들이었지요,"
술기운이 달아난 얼굴로 안승재가 머리를 」1덕였다.
"일련측은 『스위스 트리블』지의 폴 니젠스키에게 넝겨주었어요.
그런데 그 정보가 새어서 CIA가 빼앗아 갔습니다. "
"그렇다면 이것은‥‥‥‥
"니젠스키가 복사해 두었던 것이지요."
"나는 원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
"나는 이걸 발표할 예정이오, 김 선생,"
머리를 든 김원국과 안승재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윽고 김원국이
입을 열었다.
"위험할텐데요, 장관님."
"조 대사의 방식으로, 생방송으로 말이오. 그렇게 폭로하겠습니
다. "
"이번에는 그렇게 간단히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두 번 괌은 일을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
"그들이 라니? 누구 말입니까?"
"미국과 북한이지요."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을 끌어온 것 자체부터 비판을 받게 됩니
다. 클린트 행정부는 격렬한 국내 여론으로 위기에 몰리게 될 거구
요. 그들은 필사적으로 가로막을 겁니다. "
전초전 291
"남북한의 전쟁은 그들만의 문제라는 식의 여론을 조성했던 사람
들입니다. 그런데 북한이 대사관을 통해 마약을 세계로 공급했다는
증거를 보이게 되면 클린트 행정부의 단견이 드러나지요.치명적인
것이 될 겁니다. "
"그래도 하겠소."
"목숨을 걸고 말입니까?"
"그래요. 내 폭로가 끝날 때까지만 나를 지켜 주시오. 그후로는 아
무래도 좋소."
"난 하와이에 쾌 오래 있었지요. 아주 눌러살 작정을 했었는데, 어
쨌든 이곳과 비교하면 그곳은 천국이오."
복도의 벽에 기댄 강대흥이 말했다. 창 밖으로 흰 눈이 바람에 흩
날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건물 사이로 들어온 바람은 벽과 모서리
등에 부딪쳤다.
"난 일이 끝나면 다시 하와이로 가겠어.가서 소탕을 할 작정이
야. "
지희은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소탕하는지 알 수
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하와이 출신이라는 것에 호기심
이 일었다.
"하와이에서 태어나셨어요? 그러니까 그곳 교민이었냐구요?"
"교민? 그렇지는 않습니다. "
"그럼 어떻게?"
"유학 갔지요."
그들은 안승재와 김원국이 들어 있는 방의 옆쪽 복도 입구에 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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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었다. 4층의 복도에는 인적이 없었고 양쪽으로 나 있는 방에도
손님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강대홍이 힐끗 앞쪽의 엘리베이터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숫자판의
숫자에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건 매일 긴장하고 있어서 온몸이 굳어진 기분이야.가끔 스트
레스도 풀어야 몸이 부드러워지는데."
혼잣소리처럼 말하면서 그가 다시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8까
지 있는 숫자판의 불빛이 그가 서 있는 』를 지나 위쪽으로 올라갔다.
"난 서울에서 패 큰 클럽을 운영하고 있었지요.직원이 5백 명이
넘었는데, 빌어먹을 공산당 놈들 때문에‥‥‥‥
강대홍이 다시 입을 열었다.
"미스 지는 서울에 가본 적이 있지요?"
"그럼요, 서너 번."
"영동의 테헤란로, 그곳에 내 클럽이 있어요. 파타야라고."
"이 일은 언제 끝날까요?혹시 알고 계신 거 없어요?"
지희은의 물음이 난데없었는지 강대흥이 눈을 꿈벅이며 그녀를 내
려다보았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지겹지 않으세요, 강 선생님은?"
"지겨운 건 없습니다. "
"그럼 북한 사람들을 증오하세요?"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강대홍이 눈을 부릅떴다.
"그놈들 때문에 내 클럽이 폐쇄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돈이
전초전 293
얼마나 들어간 줄 아시오? 20억이 넘어요,20억이."
"내 편수요, 그놈들은."
"전 그 사람들한테 원한이 없어요."
"대사관에서 안기부 일을 하셨다면서."
"그냥 잡(job)이었어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
"안기부에서 교육시키지 않습디까?"
"무슨 교육요?정보 취급 요령이나 수집 방법은 배웠지만‥‥‥‥
"대공 교육, 공산당 놈들에게 대한 것."
"있기는 했죠.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난 스위스 국민이거든요. 나에게 무엇을 강요할 수는 없어요."
그러자 강대흥이 퍼뜩 눈을 치켜들고는 복도의 안쪽으로 한걸음
비껴섰다.
그가 서 있었던 쪽은 왼쪽에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정면에 비상구
가 보이는 위치였다.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이며 1를 바라보는 지희
은을 향해 강대홍은 허리춤에 꽃은 권총을 뽑아 들었다.
"비켜, 옆으로."
그제야 지희은은 강대홍의 시선이 자신의 뒤쪽으로 향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걸음 옆쪽으로 물러났다. 순간 그녀의 볼 옆에서 둔
탁한 총성이 울렸다
"퍽! 퍽 ! 퍽 !"
총알이 비상구의 쇠문에 맞아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었다.
"빨리, 큰형님께! 놈들의 습격이야!"
294 밤의 대통령 제3부 - I
한쪽 무릎을 끊으뗘 강대홍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권총을 두 손으
로 움켜쥔 채 그는 비상구를 겨누고 있다.
지희은은 어떻게 해서 자신이 김원국과 안승재가들어 있는 방까
지 달려 왔는지도 모른다. 세차게 문을 두드리자 김원국이 문을 열고
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뒤쪽으로 놀란 표정의 안승재가 서 있었
다.
"저, 저기 ‥‥‥‥
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머리를 내민 김원국이 복도의 끝쪽을 바
라보고는 뛰쳐나왔다.
"장관을 모시고 따라나와, 어서 "
강대홍 쪽으로 급히 달려가면서 김원국이 소리쳤다. 출구는 엘리
베이터와 비상 계단 둘밖에 없었고 그것을 지금 강대홍이 지키고 있
는 것이다.
"형님, 두 놈은 잡았습니다. 하지만‥‥‥‥
김원국이 다가오자 강대홍이 총신으로 앞쪽을 가리키고는 눈으로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는 시늡을 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옵니다, 형님."
비상 계단의 입구에 사래 두 명이 쓰러져 있었는데 한사람의 얼
굴은 보였다. 두 눈을 크게 뜬 놀란 듯한 얼굴이었는데 광대뼈가 나
온 동양인이다.
"비상 계단으로 간다. "
"예, 형님. 여긴 제가."
뒤쪽에서 뛰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안승재와 지희은이 다가왔다.
"계단으로, 어서 ."
전초전 295
권총을 빼어 든 김원국이 앞장을 섰다. 쓰러진 사내들을 뛰어넘으
며 김원국이 힐끗 지희은을 바라보았다.
"네 권총은?"
그녀가 맨손이었기 때문이다.
"차에 두고 내렸어요."
머리를 돌린 김원국이 안승재의 한쪽 팔을 쥐었다
"자, 어서, 염려 마시고."
그들이 3층의 계단을 내려왔을 때 위쪽에서 귀에 익은 발사음이
다시 들렸다. 계단을 세 발자국 뛰어내리는 동안 발사음이 다섯 번
울리는 것을 지희은은 셀 수 있었다.
시바다가 콜로텐 국제 공항의 1층 플로어로 들어서자 입구 근처에
서 있던 다케무라가 다가왔다.
"아직 나오시지 않았습니다, 조장님."
"다행이야. 열차를 타고 오는 건데 차로 오는 바람에 늦을 뻔했
다. "
프랑스에서 출발한 에어 프랑스 AF 759편은 이미 터미널 A에 도
착해 있었고 승객들 중에는 혼다 다카오 정보 국장이 끼여 있는 것이
다. 수행원 두 명을 거느린 비공식 방문이었으므로 입국 심사를 하고
수하물 인수를 한 다음 세관을 통하는 코스를 정식으로 밟고 나오는
중이었다.
출입구를 나오는 승객들을 바라보던 시바다가 생각난 듯 입을 열
었다.
"30분 전에 시내에서 북한 공작원 세 명이 죽고 두 명이 중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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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었어. 페스탈로치 공원 근처의 라인 호텔에서 일어난 일이야."
다케무라가 놀란 듯 한걸음 그에게로 다가와 섰다.
"한국인들이 했군요, 조장님."
"그들이야."
"그런데 왜 그곳에서‥‥‥‥
"그건 모른다. 종업원 이야기로는 50대로 보이는 동양인이 409호
실에 투숙했다가 사라졌다는데 4층에서 총격전이 있었어."
"지긍 현장에는 다무라가 나가 있다. 다시 자세한 보고가 올 거
야. "
=1들은 한동안 쏟아져 나오는 승객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혼다 국
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시바다가 입을 열었다.
"로젠스턴과 패트릭스는 지금쯤 워싱턴에 도착했겠군."
"곧장 클린트를 만나79지요.미국내 여론이 참전 쪽으로 기울고
있다니까요."
"공화당이 이 기회에 클린트의 재선에 쐐기를 박아 넣을 작정이
야."
시바다가 어깨를 으쓱 치켜올리면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민심은 변덕이 심한 법이어서, 언제 어떻게 변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또 다른 사건으로 조민섭의 죽음이 희석될지도."
그때 다케무라가 번쩍 머리를 들었다.
"저기 옵니다. 국장님이십니다. "
사람들 틈에 끼인 혼다 다카오의 작달막한 몸은 잘 보이지가 않았
다. 두점고 긴 코트를 작은 체구에 걸치고 있어서 마치 장난감 병정
전초전 297
같은 모습이었다.
시바다와 다케무라는 서둘러 그에게로 다가갔다.
"국장님, 이제 오십니까?"
"어, 시바다. 어, 다케무라."
혼다의 목소리는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굵었다. 마른 얼굴에 주름
살을 지으며 그가 활짝 웃었다
"어때? 전쟁 놀음이?"
"우리들이 주역은 아니지 않습니까?"
시바다가 그를 감싸듯 걸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행원 두 명
은 한걸음쯤 뒤쪽에 처져 있었고 다케무라는 다른 쪽에 섰다. 그들은
사람의 눈을 피하듯이 서둘러 대합실을 나섰다.
"철수해라, 시바다. CIA는 내가 취리히에 온 것도 알고 있다. 키
드먼한테 내가 직접 전화했으니까."
시내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혼다가 던지듯 말했다. 햇살이 비치는
모처럼 맑은 날씨의 오후였다. 벤츠는 낮은 엔진 소리를 내며 빠르게
달려 나갔다.
"난 너희들을 꼭 인솔하여 나오겠다고 키드먼에게 약속을 했어.
난 내일 아침에 유치원 선생처럼 너희들을 끌고 비행장에 나타날 게
다. "
그리고는 혼다가 얼굴을 펴고 활짝 웃었다.
"국장님, 우리가 그들 지시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
"닥쳐, 시바다. 지시가 아니야. 협조하는 것이지."
"무슨 협조란 말씀입니까?"
"일미 방위 조약상의 협조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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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의 적에게 대처해야만 돼, 시바다. "
"공동의 적이라니오? 한국 말입니까?"
"저런."
입맛을 다신 혼다가 둘째 손가락으로 자동차의 천장을 가리켰다.
"키드먼이 듣겠다. "
"도청 방지 장치는 미쓰비시 제품이 최첨단입니다, 국장님."
"어쨌든 이 일로 미국과 틀어 져서는 안돼 . 북한 쪽도 눈치를 챈 모
양이고."
"미국측이 말해 주었겠지 요. 지금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진전되고 있습니다, 국장님. "
시바다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정보 기관들은 정치권보다 실제 상황판단이 빠른 법입니다. 정
치권의 지시가 애매하게 되면 정보 기관은 나름대로 해석해서 상황
이 잘못 진전될 수도 있습니다. "
"흠."
혼다가 손바닥으로 턱을 쓸면서 시바다를 바라보았다.
"CIA 말인가?"
"예, 그들은 이제 공공연히 북한과 정보를 나누고 작전을 같이 합
니다. 명목은 회담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한국은 이제
그들 공동의 적대 세력이 되었습니다. "
"정치권이 그렇게 지시하지는 않았을텐데 요, 국장님,"
"글쎄, 그걸 클린트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그 사람은 지금 제 손
전초전 299
으로 바지 지퍼도 못 올릴 입장이야."
"조금 전에 북한 공작원들이 시내에서 또 당했습니다. 이제 곧 이
곳에서부터 전쟁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
"그렇다면 서둘러야겠군."
혼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여기 온 건 유치원 선생 노릇 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도 짐
작했겠지만."
"그년의 주변을 다시 생각해 봐. 혹시 빼놓은 곳이 있을지도 모른
다. "
황태식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말했다. 방안은 담배 연기
로 자욱이 덮여 있어서 숨을 쉴 때마다 담배 연기가 들이 마셔졌다.
"그년을 찾으면 놈들도 찾게 돼. 그년은 놈들의 안내를 맡고 있을
테니까."
"저는 더이상 아는 곳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말씀 드린 것이 전부
요."
김준호가 지친 듯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렸다. 두
눈의 흰 창에 붉은 실핏줄이 드러나 있다.
"날 미스터 브라운과 만나게 해주시오. 그에게 할말이 있습니다. "
그러자 방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창가의 소파에 모여 앉아 있던 서너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이쪽으
로 머리를 돌렸다.
"미스터 브라운이라‥‥‥‥
황태식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300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브라운에게 할말이 있다구? 나에게는 말 못할 이야긴가?"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미 제국주의의 종놈으로 살아 오더니 제 애비를 찾듯이 놈들을
찾는구만, 이 간나 새끼가."
자리에서 일어서는가 했는데 어느 사이에 황태식의 발길이 날아와
김준호의 옆구리를 찍었다.
옆구리를 움켜쥔 김준호가 의자에서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 새끼야, 넌 우리 포로야. 정신을 차리라우."
다시 황태식의 발길이 날아와 김준호의 등판을 찼다.
"어이구!"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브라운인지 그놈한테?"
"그는 잠간만 당신들을 만나면 된다고 했습니다. "
옆구리의 통증이 더 심해졌으므로 김준호의 이마에서는 땀이 배어
나왔다.
"그에게 물어 보면 압니다. 물어 봐 주시오."
"이 자식아, 놈은 널 우리에게 인계했어. 네 애비는 안 온단 말이
다. "
그러자 소파에 모여 앉아 있던 사내들이 웃음 소리를 내었다.
"널 죽이고 살리는 건 이제 우리 손에 달려 있단 말이다. "
"날 보내 주시오.내가 아는 건 다 말했습니다. "
의자에 앉을 엄두도 못낸 김준호가 방바닥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
았다.
"난 대사관을 도망쳐 나온 몸이오.그것을 참작해 주시오."
파리의 CIA요원들은 스위스에서 빠져 나온 그에게 우호격이었
전초전 301
다. 그리고 그를 담당한 브라운이라는 요원은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
하고 걱정해 주기까지 했다.
"좋아. 그것은 참작하겠다. "
활태식이 자리에 앉아 =1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넌 이제 우리 공화국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일꾼이 되지 못하겠다면 할 수 없지. 널 없애야겠어. 죽은 동지들
의 원수를 찰아야겠단 말이다. "
"이것 보시오. 나는‥‥‥‥
겨우 몸을 일으킨 김준호가 의자에 앉았다.
"내가 당신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나는‥‥‥‥
"겁이 나서 도망쳤단 말이지?"
"남조선 요원들이 붙잡을까봐 CIA를 찾아갔고."
"네 가족들도모두우리가잡고 있어 넌 우리 일을해야돼.아는
것이 더이상 없다 하더라도 다른 일을."
김준호가 얼굴의 진땀을 소매로 닦았다.
"영광으로 생각해라, 김준호 동무. 너는 조선인이야. 조선인은 낭
이냐 북이냐 둘 중의 하나이고 다른 부류는 없다, 지금의 상황에선."
지희은이 방으로 들어서자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던 박은채가 일
어섰다.
"괜찮았어요? 금방 강대홍 씨한테서 들었는데."
302 밤의 대통령 제3부 -I
"괜찮아요."
지회은은 몸을 던지듯이 의자에 앉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시체들을 넘어서 미친 년처럼 뛰었을 뿐이에요."
"다행이에요, 우리 쪽은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금방 텔레비전을
보니까 북한 사람들은 세 사람이나 죽었던데."
"강대홍 씨가 했어요."
"잘했네."
지회은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다 말고 박은채를 바라보았다.
"박은채 씨는 이제 특공패가 다 되었네."
"특공대라구요?"
횐 이를 드러낸 박은채가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듣기가 싫지는 않군요. 외국에 나와 있으니까 어떤 뻔 독립군 같
은 느낌도 들었는데, 특공대라니 ."
"독립 군이라니 그것이 더 우승네."
지회은이 웃지도 않고 하는 말이어서 박은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셔졌다.
"지희은 씨는 쉬어야 할린데."
"돌아가고 싶어요, 집으로."
서로 마음을 터놓아 본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오늘은 지회은의 입
에서 그런 말이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난 정말 싫어요, 이런 일." -
"대사관의 정보원이었던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우습나요?"
"아니, 전혀 ."
(2)
"땐 이렇게 절박하고 양자택일하라는 식의 일이 아니었어요.
여유가 있었는데 ."
그러자 방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김원국이 들어섰으므로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서 들렀어."
김원국은 손을 뒤로 뻗쳐 문을 닫고는 지희은을 바라보았다.
"권총 다룰 줄을 모르나?"
"압니다. "
굳어진 얼굴로 지희은이 대답했다. 그러나 또렷한 눈은 똑바로 김
원국을 향하고 있다.
김원국이 지희은에게로 한걸음 다가왔다.
"네가 기피한다고 해서 저쪽이 피해 줄 것 같은가?"
"아닙니다. "
"그렇다면 총을 놓고 다니는 이유는 뭐야?"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었으나 박은채는 온몸으로 됩싸여 오는 찬
기운을 느꼈다.
지희은은 잠자코 그를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는다.
"우린 네가 필요했다. 지금도 그렇고. 그런데 너는 무성의하고 반
항적으로도 보인다. "
"네 조국이 능멸을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있는 것이 분하지도 않
단 말인가?"
"그렇지 너는 스위스 국적의 스위스인이라고."
304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박은채의 불안한 시선이 지희은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얼굴
이 하얗게 굳어진 지희은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번은 봐주겠다. 너에게 윌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만일 우리에
게 피해가 오는 행동을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조심하도록."
말을 그친 김원국이 잠시 지회은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문이
닫히고 김원국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지희은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1정말 싫어, 저 사람."
"지희은 씨. "
박은채가 타이르듯 불렀으나 지희은은 번쩍 머리를 들고 쏘아붙이
듯 말했다.
"난 솔직히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젠 어쩔 수 없어요, 지희은 씨. 당신은 벌써 ‥‥‥‥
"저쪽의 리스트에 올라가 있단 말이지요?그래서 어쩔 수 없다
구?"
"이렇게 끌려 다니다가는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아요."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션 박은채가 창가로 다가가 섰다. 바지 호주
머니에 두 손을 찌른 그녀는 남자처럼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저녁
노을이 짙어 가는 그라이원 호수를 바라보았다
니젠스키가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는 거실로 나왔을 때 다시 현
관의 벨이 울렸다. 거실의 벽에 걸린 시계는 밤 11시 40분을 가리키
고 있었다.
전초전 제5
현관으로 다가간 니젠스키가 밖을 향해 물었다.
"거기 누구요?"
"한국 대사관에서 왔습니다. "
"한국 대사관?"
문의 손잡이를 잡은 니젠스키가 주춤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국 대사관에서 무슨 일로?"
"신문 보도 문제요, 니젠스키 씨. 난 공보관인 이정민입니다. "
"신문 보도라니. 그런 일은 내일 신문사에서 얘기해도 될텐데. 지
금은 너무 늦었지 않소?"
그들은 문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문의 렌즈 구멍으
로 보이는 한국인은 30대 후반으로 학자품의 사내였다. 니젠스키는
아예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는 벽에 붙어 섰다. 아내인 한나가 잠옷
차림으로 거실로 들어섰다. 부스스한 머리에 찌푸린 얼굴이었다.
"니젠스키 씨, 늦어서 실례된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급해서 그럼
니다. 지난번에 받으셨던 서류 문제 때문인데‥‥‥‥
"서류 문제라니?"
"북한측의 마약 문제 말입니다. "
니젠스키가 손을 저었으나 한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두어
걸음 더 이쪽으로 다가온다.
"난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니젠스키가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안승
재는 대사관측에도 비밀로 하겠다고 했었다.
밖에서 다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우린 미국측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니젠스키 씨. 그러면 이해가
306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되십니까?"
"미국측이라니?"
"당신이 미국측에 넘겨준 서류 말입니다. 그걸 우리가 받았어요."
"그걸 상의해 보려고 합니다. "
"당신, 대사관의 누구라고?"
"이정민 공보관입니다. "
"확인해도 되 겠소?"
"이것, 힘들군요. 그렇게 하시지요."
문에서 떨어진 니젠스키는 거실로 돌아와 한국 대사관으로 다이얼
을 눌렀다. 대사관의 숙직 직원이 느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거기, 공보관의 이름이 누굽니까?"
"잠깐만요. 누구시지요?"
"『스위스 트리볼』지의 니젠스키요."
"공보관은 이정민인데요."
"인상은 어떻게 생겼소?"
"마른 얼굴이지요. 안경을 끼었고."
"고맙소."
수화기를 내려놓자 곁에 서 있던 한나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여보?"
"아무 일도 아냐."
니젠스키는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다음날 아침 혼다 다카오가 아래층의 식당으로 들어서자 식탁에
전초전 301
앉아 있던 시바다가 일어섰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국장님?"
"밤 사이에 별일 없었나?"
"있었습니다, 국장님."
지나가는 말로 물었던 것인데 시바다가 정색을 하고 대답하자 혼
다는 자리에 앉으며 눈을 치켜떴다.
"또 무슨 일이야?"
"지난밤에 『스위스 트리볼』지의 니젠스키가 피살당했습니다. "
"북한놈들 짓이로군."
종업원이 커피잔을 들고 다가왔으므로 그들은 잠시 말을 멈추었
다. 그러나 일본 정보국장 혼다가 사보이 호텔의 특실에 묵고 있다는
것은 이미 취리히에 있는 모든 정보원들에게 알려져 있을 것이다.
"집안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집에 있던 부인도 함께 당했습
니다. "
종업원이 물러가자 시바다가 말을 이었다.
"아마 서류를 찾으려고 했던 젓 같습니다. "
"그놈들, 혈안이 되어 있구만 그래."
혼다가 커피잔을 들면서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빌어먹을 CIA 놈들이 가로막지만 않았더라면 벌써 터졌을 일인
fl . "
"국장님, 오늘 오후에 한국의 안 장관이 한국 대사관에서 기자 회
견을 합니다. "
시바다의 말에 혼다가 입에 대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안 장관이?"
308 밤의 대통령 제3부-I
"예, 국장넘"
"조 대사에 이어서 두 번째 폭탄인가?"
"서류의 원본은 김원국이 갖고 있습니다. 그에게 넘겨주었을 수도
있지요."
"기자들이 대거 몰려들 겁니다. 모두 기대하고 있겠지요."
"잔인한 놈들이야, 기자놈들은."
혼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식사 시간이 지나서인지 식당은
한산한 편이었다. 입구와 그들이 앉은 좌석 주위로 일단의 동양인들
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 시바다의 부하들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오전에 떠나야 한단 말이지?그 빅쇼(Big
Show)를 보지도 못하고 말이야."
"국장님,호텔의 로비에 CIA요원들이 일습니다. 어젯밤부터 지
키고 있더군요."
"빌어먹을 키드먼 놈 같으니."
혼다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모두 모였나?"
"예, 국장님."
"그럼 시작할까?"
자리에서 일어선 혼다가 앞장서서 식당을 나가자 그의 뒤를 시바
다가 따랐다.
식당의 이쪽저쪽에 모여 앉아 있던 사내들도 일제히 일어섰고로
비에서 서성대던 사내들도 시바다의 뒤쪽으로 모여들었다. 혼다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에는 그의 뒤쪽에 스무 명이 넘는 사내들이
전초전 309
웅성거렸다.
"두 번으로 갈아타라. 한번에는 무리다. "
시바다의 말에 사내들은 질서 있게 두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엘리
베이터를 타려고 다가왔던 투숙객들이 주춤대며 뒤쪽으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서던 시바다는 머리를 돌려
로비 안쪽을 바라보았다. CIA 요원임에 틀립없는 백인 두 명이 이쪽
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서둘러 몸을 돌렸다.
혼다의 방은 14층이었으므로 그들은 14층의 복도에 내렸다.
"국장님, 저희들은 옆방에 있겠습니다. "
앞장서서 걷는 혼다에게로 다가간 시바다가 그렇게 말하고는 걸음
을 늦추었다.
혼다가 방문의 손잡이를 잡고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10여 명
의 부하들 사이에서 장신의 사내 한 명이 빠져 나오더니 곧장 그에게
로 다가왔다.
"혼다 국장이십니까?"
"김원국 선생이시군요."
그들은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고는 곧장 혼다의 방으로 들
어갔다.
"자, 우린 옆방이다. "
시바다가 부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담배 피울 놈들은 방에 들어오지 말고 이곳에서 피우도록."
"내가 취리히에 온 이유는 김 선생을 만나려는 것 한 가지밖에 없
310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어요. "
혼다가 앞자리에 앉은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한국 안기부의 임 부장을 통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괜히
절차만 복잡해질 것 같고, 또 김 선생이야 그들과는 별개의 조직이시
니까요."
크고 넓은 의자에 파묻히듯 앉은 혼다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조 대사의 의거로 회담이 중지되고 미국 내의 여론이 참전 쪽으
로 기울고 있습니다. 클린트가 당황하니까 잠자코 눈치만 살피고 있
던 공화당이 설쳐대고 있어요.공화당의 지명권자인 제이슨은 이제
캠페인을 벌일 기세이고."
"한T에서 밀려 나간 매고루더 대장이 어제 오후에 기자 회견을
했습니다. 정부의 우유부단함과 배신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했어요.
곧 군복을 벗을 사람이니까 부담 없이 터뜨렸을 겁니다. "
"일본 정보국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국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김원국이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시바다 씨의 말을 들으니 오늘 떠나신다고요."
"키드먼이 우릴 내버려두지를 않는군요.우리가 김 선생을도와
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단 말입니다. "
혼다가 허리를 굽혀 탁자 위로 상체를 가깝게 붙여 왔다.
"그들은 지금쯤 바쁘겠지 요. 오후에 안 장관이 기자 회견을 할테
니까 말입니다. "
"솔직히 걱정이 됩니다. 방해가 있을지 몰라서요."
전초전 311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안 장관이 터뜨리면 클린트
는 궁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
혼다가 의자 옆에 놓인 가방을 열더니 왜 두툼한 서류를 탁자 위
에 내려놓았다.
"이건 우리 정보국이 조사한 북한측의 동향입니다. 북한측은 인민
들과 팽창된 군부의 불만이 폭발 직전입니다. 김정일은 전쟁을 일으
키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자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취리히에 와 있는 북한측 공작원들의 신상 명세서이고."
혼다가 얼굴에 만족한 듯한 웃음을 띠었다.
"이런 정보를 빼낼 수 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자랑 같지
만"
서류를 집어 든 김원국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고맙습니다, 혼다 국장. 신세를 지겠습니다. "
"우린 같은 배를 타고 있지요. 북한이 남침해 오면 안됩니다. "
"잘 아시겠지만 남북한의 통일된 군력이 남아돌고, 더욱이 그것이
북한에 의해 통제된다면 동북아의 평화는 위협을 받습니다. "
"미국은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통일 조선은 중국과 연합해서 일
본을 압박할 겁니다. 일본은 아마 그들과 연합해서 반미 전선을 구축
할 가능성이 많지요. 클린트는 생각이 모자랍니다. "
"도와 주시는 이유는 이해합니다. "
"그리고 북한측의 자금원은 반호프 은행장인 에리히 루벤돌프요.
우리가 조사해 보았는데 마약 판매책은 죽은 앙리 주르메였고 이곳
312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의 북한측 책임자는 부대사인 김정철입니다. 공보관 이필수는 심부
름꾼이오."
김원국이 잠자코 혼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알겠다는 듯 천천히
머 리를 』1덕였다.
"고맙습니다, 흔다 국장."
"돌아가신 오야마 선생으로부터 김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
었습니다. "
"저도 존경하는 분이었지요."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
"신세를 졌습니다. "
서류를 옷가슴에 넣은 김원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방문을 열자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잡담을 나누던 시바다의
부하들이 몰려왔다.
#그럼 ‥‥‥ W
혼다와 눈인사를 나눈 김원국이 복도로 나서자 사내들은 올 때처
럼 그를 에워싸고는 복도를 몰려나갔다.
김준호가 방으로 들어서자 아내인 안정미가 매달리듯 그의 팔을
잡았다
"여보, 어떻게 되었어요?"
"어떻게 되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그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침대에는
다섯 살짜리 딸 수연이 두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깊게 잠들어 있다.
"당신 얼굴이 왜 이래요?"
전초전 313
그의 옆으로 다가온 아내가 놀란 듯 소리쳤다.
"볼이 부었잖아?"
"추워서 언 거야."
볼에 손을 대려는 아내를 밀치며 김준호가 조금 떨어져 앉았다.
"걱정하지 말아,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게 되었어요? 우리가 지금 북한 사람들에게 잡혀 있
는데 , "
아내의 얼굴은 금방 울상이 되었다.
착하고 순진하기만 해서 언제나 마음이 놓이지 않던 아내였다. 백
프랑짜리 지폐를 들고 나가동물원의 입장료를 내고 90프랑이 넘는
거스름돈을 못받아 울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영어가 서툰 데다가
부』1럼을 많이 타는 성격 때문이다.
김준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취리히 변두리의 호텔방 안
이었고 옆방에는 북한 공작원들이 묵고 있었다. 복도에도 감시가 있
는 데다가 방의 전화는 몌내어 갔으므로 아내는 그가 나가면 공포에
시달린다. 벌써 사흘째 이런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여보, 우린 어떻게 돼요? 브라운 씨 말은 곧 파리로 돌아가게 해
준다던데."
아내가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어서 우리 셋이 같이 있고 싶어요,조용한 곳에서 이젠 파리가
아니어도 돼."
"정미야."
김준호가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곧 그렇게 돼, 그러니까‥‥‥‥
314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언제?내일?"
"나 혼자 내버려 두지 말아요. 무서워."
김준호가 눈을 치켜띤다.
"바보같이, 수연이 생각도 해야 할 것 아냐? 엄마 노룻을 해야지."
그러자 안정미의 눈에 금방 물기가 고였다. 그가 무엇을 하건 간
에 그만을 믿고 따라온 안정미였다. 그녀에게는 국가나 민족 등의 어
렵고 거창한 말보다 사랑하는 남편과 가족이 더 중요한 것이다.
"난 여기에서 할 일이 조금 있어."
가늘게 숨을 뱉어내면서 김준호가 말했다.
"일 마치고 바로 따라갈테니 까, 넌 수연이 데리고 먼저 가 있어."
"어디루요?"
"한국은 안돼. 파리나 아니면 미국도 좋고. 그들이 데려다 줄 거
야."
"당신은?"
"나도 곧 따라가."
"언제?"
"일 마치면 곧, 며칠 후야."
"정착 자금도 충분히 받아 놓았어. 우선 당신이 가져갈 20만 달러
여기 있어."
김준호는 가슴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어 그녀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는 전쟁 없는 나라에서 새 생활을 하게 될 거야, 우리 세 식
전초전 315
구가."
"그건 장관께 여쭤 보아야겠는데 요. 나로서는 지금 말씀 드릴 수
가 없습니다. "
스위스 대사인 오경득이 전화기를 귀에 대고는 진땀을 흘리고 있
었다. 그는 지금 미 국무 장관인 빌 로젠스턴과 직접 통화를 하고 있
는 것이다.
"오 대사, 난 당신 정부의 승인을 받고 이 통화를 하고 있는 겁니
다. 청와대 비서 실장 미스터 박한테서 연락이 오지 않았던가요?"
로젠스턴의 목소리는 탁하고 빨라서 오경 득으로서는 신경을 곤두
세워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한테는 직접 오지 않았습니다. 혹시 장관께는 왔는지 모르겠습
니다만."
"장관하고 정말 연락이 안됩니까?"
"예, 로젠스던 씨. 지금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
"대사관 안에 있다고 들었는데."
"글쎄 찾아보아도 없다니 까요."
시치미를 뗀 오경득이 힐끗 눈을 들어 앞자리에 앉아 있는 안승재
를 바라보았다.
"찾으면 즉시 연락을 드리도록 전하지요, 로젠스턴 씨."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늘 기자 회견은 취소해야 합니다. 만일 미
스터 안이 강행했다가는 한미 간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을 각오해야 할
거요."
"이것 보시오, 로젠스턴 씨 "
316 밤의 대통령 제3부 -I
선량한 얼굴 생김새대로 성품도 부드러운 오경득이 마침내 얼굴을
붉혔다.
"당신 나에게 협박하는 거요?"
"협박 이상이야, 미스터 오.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일이 벌어
질 거란 말이오."
"안 장관이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어. 그는
조 대사의 흥내를 내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역효과를 내게 될 거
요. "
"로젠스턴 씨, 도대체 당신은 누구 편이오? 우리 대한민국이 당신
의 적대국이오?"
"우리는 당신들을 도우려고 이 고생을 하고 있어. 그런데 당신들
들』
은 번번이 판을 깨었어."
"우리를 북한에게 팔아 넘기는 일이 잘 안되고 있나?"
아차 싶었던지 오경득이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는 안승재를 바라보
았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팔걸이에 두 팔을 올려놓은 채 그림처럼 앉아
있던 안승재가 숙였던 머리를 세웠다.
"오 대사, 그만 끊으시오."
"예, 장관님."
그러나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하더라도 전화를 그냥 끊을 수는 없
다. 오경득이 다시 수화기를 귀에 대자 로젠스턴의 말소리가 흘러나
왔다.
"우리 클린트 대통형이 곧 당신의 이 대통령께 전화를 할 거요.
그리고 곧 당신에게 대통령의 명령이 떨어질 것이고. 내 말을 믿어요,
오 대사. 그리고 안 장관에게 그렇게 전하시오."
그쪽에서 전화를 끊었으므로 오경득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안승재
를 바라보았다.
"회견을 중지하라는 전화였습니다. "
"알고 있어요"
"곧 대통령 각하한테서도 장관께 연락이 올 것이라고."
"없다고 하세요.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f1?"
"각하께도 그렇게 말씀 드리라는 말입니다. "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장관님 각하께 거짓말은
"각하께서도 그것을 바라고 계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클린트의 요구를 각하께서는 거절하시지 못합니다. 오 대사도 알
고 계실 거요."
"내가 책임을 질테니 모 대사는 준비나 해주시오."
"장관님,도대체 어떤 내용의 기자회견인지 저에게 말씀해 주실
수 없습니까?"
"북한의 구체적인 범죄 행위요."
그때 그들이 앉아 있는 대사 집무실 방문이 열리면서 직원 한 명
이 들어섰다.
"대사님, 정문에 미국 대사관원이라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만."
오경득이 안승재를 바라보자 그가 머리를 저었다.
31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회견이 시작될 때까지는 아무도 들여 보내지 마시오."
"예, 장관닝."
몸을 돌린 직원이 방을 나갔다. 대사관저는 그 나라의 영토나 마
찬가지였고 해당국의 국민이라도 출입을 통제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강득이 머리를 들어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1시가조금 넘
어 있었다. 점심을 걸렀으나 전혀 시장기가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제
2시면 정문 밖에 몰려 있는수백 명의 기자들을 들여놓고 회견을 시
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동규는 단상에 서서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빈 의자가 매꼭하게
놓여 있는 이곳은 식당을 개조하여 만든 회견장이었다. 대사관 직원
들이 아직도 분주하게 의자를 배열해 놓고 있었는데 어림잡아 계산
하면 2백 명은 입장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봐, 단상이 기자석하고 너무 가까운 것 아냐?"
김칠성이 옆쪽에서 다가왔다. 그의 팔에는 대사관원임을 표시하는
횐색 완장이 둘러져 있다. 헝겊에 대사관의 고무인이 찍힌 임시 완장
이다.
"어잴 수 없어요. 대사관 안에서 이곳보다 넓은 곳은 없으니까."
고동규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15분전 2시였다.
"금속 탐지기가 있으면 좋은데."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하면 뭘 해?"
던지듯이 말한 깅칠성이 몸을 돌렸다.
조웅남과 김원국, 지희은 세 명을 핸 나머지가 모두 대사관에 들
어와 있었는데 이번에는 파리와 베를린, 빈 등의 공관에 파견되어 있
전초전 319
던 안기부 요원들도 도착해 있었다. 임병섭의 특별 지시를 받고 온
요원들은 모두 열네 명이었다.
"이봐, 거기 두 명은 이쪽으로."
단상에 서 있던 고동규가손짓으로 벽 쪽에 서 있는 사내들을 불
렀다.
"자네들은 이쪽 입구를 맡아 주어야겠어. 장관님이 나오고 들어을
때를 책임져."
고동규는 자연스럽게 이번 작전의 경호 책임자가 되었다. 직급도
높았지만 김원국최 말을 들은 안승재가 그를 지명했기 때문이다.
박은채는 식당 밖의 입구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서 있
었다. 명색은 회견장의 감시였지만 대사관 정문 앞에 구름처럼 몰려
와 있는 기자들이 들이닥쳤을 때를 생각하면 난감해졌다. 백인은 모
두 CIA 요원으로, 동양인은 북한인 같이 보이는 것이다.
현관을 나온 강대홍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다.
정문 밖에는 데모대 같은 신문 기자들이 아우성을 치는 중이었고
대사관 안에서는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기자 회견이 곧 시
작되는 것이다.
정문 앞에는 기자들의 소지품 검사를 위해 대여섯 명의 직원들이 모여 서 있었는데
그 속에는 오종표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 일이 맡겨져 있어서 김칠성은 2층의 대사 집무실에서 안승재,오경득과 함께 있었고
고동규는 식당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이윽고 강대홍은 식당 입구에 서 있는 박은채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풍성한 횐색 파카를 입은 그녀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다가오는 그를 향해 웃었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의 양볼이 추위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모두들 바쁘군요."
그녀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신문 기자들 좀 보세요. 한국 대사관에 저렇게 기자가 많이 모인 건 처음일 거예요."
"재미 붙인 모양이야, 저놈들. 조 대사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
강대홍은 그녀 옆에 나란히 섰다.
"은채 씨는 나한테 빛이 있을텐데, 그렇게 시치미만 떼고 있을 거요?"
"빛이라구요?"
박은채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빛이 있다면 그걸 갚으라는 말이네."
"내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군 형무소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되었을텐데, 안 그래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빛을 갚지요?"
"당신은 영리한 여자야. 일찌감치 형님들한테 찾아가 정체를 밝히고 나서 짐을 벗어 버렸더구만 "
"덕분에 나만 죽일 놈이 되었지.칠성 형님한테 얻어맞은 옆구리가 지금도 결려.
웅남 형님이 알게 되었다면 난 지금쯤 병원에 누워 있는 신세가 되었을 거요."
"미안해요. 어쨀 수가 없었어요. 날 돌려보내려고 해서."
"내 입장을 한번이라도 생각을 해봤어야지. 큰형님한테까지 낙인이 찍혔단 말이오, 나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던데요."
"그건 당신 생각이야. 여자 밝히는 놈으로 난 이미 소문이 나 있었단 말이오. 그런 데다가‥‥‥‥
"그래요?"
머리를 돌린 박은채가 강대홍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이봐, 농담하지 말어."
강대홍이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날 배신한 거야.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구. 나한테 두 번 빛을 진 거야."
"알고 있어요. 하지만 배신이라는 말은 좀 심해요."
"당신한테 빛을 갚을 기회를 주겠어."
강대홍이 힐끗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밤에 말이오. 내가 연락을 할테니까."
"솔직히 난 밥은 굶어도 여자는 그럴 수 없어. 그런데 벌써 보름이
"그러니까 날더러 ‥‥‥‥
"딱 한 번이면 돼. 난 구질구질한 놈이 아냐. ]
여자가 매달리면 하는 수 없이 몇 번 더 만나 주지만 내쪽에서 사정해 본 적은 없어."
"당신한테 다리를 벌려 주라는 말이군요, 빛을 갚으려면."
"이봐, 당신답지 않게 그렇게 험한 표현을‥‥‥ 어쨌든 알아들은 모양이지만."
"할 수 없군요."
가늘게 숨을 뱉으며 박은채가 정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큰형님께나 아니면 웅남 형님께 당신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어요.
당신한테는 세 번 빛지는 게 되겠지만 "
"이, 이런!"
강대홍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나한테 협박하는 거야?"
"당신이 먼저 시작했어요, 강대흥 씨."
"그것 한번 준다고 걸음을 못 걷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내가그렇게 매력 없는 놈이란 말이야?"
"사람을 잘못 보았을 뿐이에요."
"빌어먹을 년."
"이젠 안으로 들어가 봐요, 감대홍 씨."
"드럽군."
몸을 돌리려던 강대홍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넌 배은망덕한 년이야. 그리고 사람을 잘못 본 건 너야. 너 아니래도‥‥‥‥
"여자는 많아요. 그러니까 다른 곳을."
무어라고 말을 할 듯 턱을 올린 강대홍은 어깨를 내리더니 식당쪽으로 몸을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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