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죽음의 가치(1)
프레스 센터의 대회견장은 3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는데 지금은 입추의 여지가 없다.
회견장에 모인 것은 기it들뿐만이 아니다.
취리히에 주재하고 있는 각국의 외교관들도 기자들 틈에 끼여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텔레비전 방송국의 카메라맨들이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앞쪽에서 몸싸움을 했고 뒤쪽에서는
앞쪽을 향해 비키라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안톤 모리스는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들 중의 하나여서 연단의 바로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12시 50분이었고 빈 연단위에는 십여 개의 마이크가 줄과 함께 뒤엉켜 쌓여 있었다.
한국대사관의 직원으로 보이는 서너 명의 사내들이 장내 정리를 하였으나 소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굉장하군 안 그렇소?"
및자리에 앉은 털투성이의 사내가 안톤을 바라보았다. 주위가 시끄러웠으므로 고함치듯 말한다.
"한국측에서 큰 물건을 터뜨릴 모양이야.
이를테면 북한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강화조약 같은 것 말이오."
안톤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작업복의 가슴에 독일 방송사의 마크가 붙어 있다.
"아니면 미국을 비난하는 내용일까?
매그루더를 월순으로 교체시 킨 것에 대해 한국 대통령이 클린트에게 강력하게 항의 했다던데."
털보는 신바람이 나 있었다.
그가 다시 말을 붙이기 전에 안톤은 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오른쪽 구석에 모여 앉은 서너 명의 동양인이 그의 시선에 잡혔다.
기자는 아니다.
주위의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연단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군,궁금한 것은 북한 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 여기 모인 각국의 기자들과 외교관 중에서 제일 긴장하고 있는 무리가 바로 그들일 것이었다.
"형님, 저기 앞쪽에 북한놈들이 있습니다. "
고동규가 다가와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검정테 안경에 콧수염을 붙인 모습이었고 어깨에는
큼지막한 일제 카메라를 걸치고 있다.
그의 시선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던 김원국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됫줄에 몰려 서 있는 사람들에 끼여 있어서 온몸이 이리저리 쏠리고 있다.
옆쪽에 서 있던 박은채가 밀리는 바람에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었다가 황급히 떨어져 나갔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녀에게서 맑고 상큼한 향내가 맡아졌다.
조민섭이 프레스 센터에서 특별 성명을 발표한다는 연락을 김원국이 받은 것은 12시 15분이었다.
조민섭이 직접 해온 전화여서 김원국은 만사를 젖혀 두고 달려온 참이다.
조민섭은 그에게도 성명의 내용을 귀띔해 주지 않았다.
한국 대사관소속의 직원들이 얼굴에 땀을 홀리며 장내를 정리하고 있었다.
잠자코 그들을 바라보던 김원국은 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박은채와 시선이 마주쳤다.
"대사관 직원들이 활기 있게 움직이는군. 그렇게 보이지 않나?"
갑자기 김원국이 묻자 박은채가 놀란 듯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1덕였다.
"네, 그렇게 보여요."
"소외당하고, 무시당하고 있다가 오랜만에 언론의 초점이 되어 있는 거야.
내용이 무엇이건 지금 저들의 분위기는 활기가 있다. "
"분하다. 우리가 이렇게 무시당하고 있었다니.
여기 모인 놈들은 모두 특종을 노리는 기자들이야. 놈들은 보다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해.
남한의 항복이나 어떤 치욕적인 발표를 잔뜩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
김원국의 말소리는 낮았으나 옆에 붙어 선 박은채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비어 있는 연단을 바라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정부의 특별 성명이라니 지켜보겠지만 에센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 놈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짓을 한다면 내버려 두지 않겠다. "
"형님, 시작합니다. "
옆쪽에서 다급하게 고동규가 말하자 김원국은 머리를 들고 연단을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는 사이로 조민섭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뒤로 서너 명의 한국인이 따르고 있다.
연단의 양쪽 귀퉁이를 두 손으로 쥔 조민섭은 기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뒤쪽의 의자에는 스위스 주재 한국 대사인 오경득과 참사관 안성민,
그리고 교민회 회장인 유정호 씨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모두 굳은 표정이었다.
카메라의 번쩍이는 플래시 빛이 조금 뜸해졌고 누가시키지 않았는데도
잠지걸 서 있는 조민섭의 분위기에 이끌려 회견장은 차츰 조용해졌다.
조민섭은 표정 없는 얼굴로 회견장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반백의 머리칼은 단정히 빗어 넘겨져 있고 굵은 주름살로 깊게 팬 거친 얼굴이었으나 두 눈은 맑다.
회견장의 한쪽에서 기침 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가 그쳤다.
이젠 4백여 개의 입이 모두 다물어져 있다.
"여러분."
마이크를 통한 조민섭의 목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나는 대한민국의 외교관으로 외무부의 대리 대사인 조민섭입니다. "
낮으나 굵은 목소리로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이헌 북미 회담이 열리고 있는 취리히에 대한민국 정부의 특사 자격으로 파견이 되었으며
오늘 여러분 앞에서 특별 성명을 발표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
안톤의 옆에 앉은 독일 털보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론이 길군."
"여러분, 북한은 남한을 침공하겠다고 미국측에 통보했습니다.
그것은 1996년 1월 10일이었으며 지금 취리히 근교의 어느 곳에서는
미국과 북한의 회담이 열리고 있습니다. "
안톤은 녹음기의 스피커를 조민섭을 향해서 다시 조절해 놓았다.
회담장 안은 조용했고 가끔씩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북한은 정권 붕괴를 전쟁으로 막아 보려고 남한 침공을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미국이 한미 방위 조약에 얽매여 한반도에서 수십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 달 후로 시간을 정한 것은 미국과의 타협, 무력 통일 후의 관계를 협의하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
그러자 회담장에 잠시 소란이 일어났다.
텔레비전 카메라들이 조민섭에게 더 가깜게 다가가려다가 기자들로부터 항의를 받은 것이다.
기자 몇 명이 소리를 쳤고 누군가가 발자국 소리를 내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시바다 겐지는 왼쪽의 구석에 끼여 서 있었다. 옆에는다케무라와 서너 명의 부하들이
조민섭의 말에 열중해 있다.
"남한이 맞불을 놓는군요."
다케무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시바다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장내가 다시 고요해지자 조민섭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나왔다.
"친애하는 여러분, 지구상 단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는 세습 독재집단, 2천 7백만 국민을
철저히 유린하여 혼을 빼앗아 노예로 만든 수용소 집단,핵으로 동족을 위협하면서
그것이 자위책이라고 선전하는 정신 병자들의 집단,굶어 죽느니
차라리 전쟁을 해서 남한을 점령하여 배불리 먹고 보자는 짐승의 무리들이 이제 세계 법 질서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미국과 타협하고 있습니다. "
"어쨌든 특종이군."
독일 털보가 노트에 내용을 휘갈겨 쓰면서 중얼거렸다.
두 눈이 번들거렸고 그의 엉덩이는 의자의 3분의 1에만 걸쳐져 있다.
성명이 끝나자마자 튀어나갈 자세인 것이다.
플래시가 다시 번쩍이며 터졌고 이쪽저쪽에서 기자들이 소리내어 웅성대다가 그쳤다.
"이것, 생방송되는 거야?"
부대사인 김정철이 묻자 이필수가 굳어진 얼굴로 상체를 그에게로 숙였다.
"예, 부대사 동지, 생방송입니다. "
"회담장에서도 보겠군."
"그렇습니다, 부대사 동지 ."
에센의 회담장이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은 로젠스턴과 패트릭스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지 않았는데 김사훈이 소리내어 웃었다.
"저놈 미쳤군 아니, 남조선 놈들은 이제 갈 때까지 갔어."
"안됐습니다 저런다고 누가 동정해 주는 것도 아닌데 "
말을 받은 것은 최대민이다.
"남조선 정부가 저런 식의 성명을 발표하다니, 이젠 발악하는군요."
로젠스턴이 머리를 돌려 패트릭스를 바라보았다,
"지미, 왜 미스터 안은 보이지 않나?"
"글쎄,내가 아나?성명 내용이 독하니까 저 친구를 대신 시켰겠지, 아마 "
패트릭스에게 무언가 다시 물으려다 말고 로젠스턴은 다시 텔레비
전으로 머리를 돌렸다 조민섭이 말을 계속하고 있다.
"친애하는 여러분, 미국은 곧 북한과 타협합니다.
미국은 지난번 북한의 핵 공갈에 물러섰고,다시 전쟁 위협에 물러섭니다.
핵 공갈 대상은 남한이었으므로 남한은 30억 달러의 자금을 대었고 이제는
남침 대상이 남한이므로 미국은 남한을 북한에게 넘깁니다.
지난번도 그러했지만 주체국인 남한 정부는 이번에도 회담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외교관의 한사람으로 이러한 상황에 비애를느낍니다. "
그러고 난 조민섭이 온 얼굴을 주름살 투성이로 만들면서 웃었다.
흰 이가 몽땅 드러났으나 바로 앞에 앉은 안톤은 그의 늙은 얼굴이 어쩐지 처참해 보였다.
몇 명의 기자가 따라 웃다가 그쳤고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친애하는 여러분, 이것이 미국의 실체입니다.
냉전 시대에 인권과 인도주의를 부르짖던 그들은 이제 경쟁 상대가 힘을 잃자
진면목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오늘 미국의 실체를 말씀 드리고
북한과의 투쟁을 선언하려고 이 자리에 선 것입니다. "
점점 굵어져 가던 조민섭의 목소리가 격렬한 외침으로 끝났을 때
누군가가 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발표입니까?"
그러자 조민섭이 머리를 숙이고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잘 보시고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가 드린 말씀을 기억해 두시오.대한민국에는
나 같은 국민이 꾸린 5백만이나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는 연단 위에 놓인 종이를 뒤적이는 것처럼 보였는데
곧 한 손에 무엇인가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안톤의 및자리에 앉은 독일 기자가 와락 안톤에게 몸을 부딪쳐 왔다.
머리만을 안톤 뒤로 감추는 것이다. 눈을 부릅뜬 안톤은
조민섭이 쥐고 있는 권총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회견장은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플래시가 쉴새없이 터지고 서로 누군가를 부르고 대답했는데
한쪽으로 밀려나가는 사람들과 사진을 잘 찍으려고 밀려오는 사람들로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여러분,외교관으로서 주권 잃은 외교를 한 데 대해 책임지려고
나는 이곳에 왔습니다. 조국에 남은 4천 5백만 동포에게."
권총을 들어 오른쪽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붙인 조민섭이 말했다.
뒤쪽에 앉은 세 명의 사내들은 입을 벌린 채 움직이지 않는다.
플래시의 불빛에 싸인 조민섭이 회담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
선이 훌고 내려가자 회담장은 다시 순식간에 고요해지고 있다. 기다림이다.
안톤은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들고 있던 카메라를 그를 향해 겨누
었다. 렌즈 안에 그의 얼굴과 총이 드러났다. 눈이 똑바로 이쪽을 바
라보고 있다. 그러자 그의 입이 열리더니 낮은 목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대한민국 만세!"
총성이 울렸고 안톤의 카메라와 함께 그 장면을 기다리고 있던 수
십 개의 카메라가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렸다. 흰 섬광에 싸인 조민섭
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고 그제서야 회의장은 다시 아우성
소리로 뒤덮였다.
한국 대사관의 대사 집무실 안이다.
안승재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마 위로
몇 올의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왔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다. 그
의 앞쪽에 앉은 스위스 대사 오경득이 초조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
렸다가 조그맣게 헛기침을 했다.
밖에서 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희미
하게 들려 왔다 이제 한국 대사관 앞에도 기자들이 운집해 있었다.
안승재가 머리를 들었다
"수습할 것도 해명할 것도 없습니다. 그 분의 시신이나 빨리 고국
으로 보내세요."
안승재가 말하자 오경득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조처하지요."
"이젠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이 언론에 알려 졌을테지만 숙소를
옮기지는 않겠소. 어쨌든 난 비공식으로 이곳에 왔으니까."
"그렇게 하시지요."
안승재가 충혈된 눈을 들어 오경득을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조 대사는 여러 사람에게 기펀침을 주었
소.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오."
오경득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50대 초반의 그는 외무부 대사
급들 중에 아직 신참이었다. 하지만 노련한 대사라 할지라도 이런 경
우에는 당황했을 것이다.
조민섭은 오경득을 찾아가 정부의 특별 성명을 발표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조민섭은 러시아
대사까지 역임한 중량급 외교관이다. 지금은 본부의 대기 대사로 있
는 상태였지만 외무 장관 자리에 앉혀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장관님, 조금 전에도 로젠스턴 장관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
오경득이 말하자 안승재가 입술 끝을 비틀며 희미하게 웃었다.
"조금 전에 대통령 각하께서는 조 대사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겠
다고 하셨소. 로젠스턴이나 클린트 대통령이 그 국장 장면을 텔레비
전으로 보아야 합니다. "
"성명 발표 장면을 찍은 녹화 필름은 이미 한국으로 전송되었습니다,장관님."
안승재가 잠자코 있었으므로 분위기에 이끌린 오경득도 말을 멈추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후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마다 뉴
스를 방영하는 스위스 텔레비전 방송은 벌써 네 번째 조민섭의 분사
장면을 보여 주고 있었고 5시의 뉴스 시간에는 아예 특집으로 한반
도의 정세와 미국의 태도에 대한 30분짜리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이
사건은 스위스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텔레비전과 신문에 특종으로
보도되는 중이 었다.
탁자 위의 전화 벨이 방안의 정적을 깼다. 오경득이 수화기를 들
자 안승재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잠간 나갔다 오겠다면서 방을 나가던 조민섭의 모습이 눈앞에 떠
올랐으므로 그는 눈을 떴다. 오경득이 송화기를 손바닥으로 막고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관님, 로제스턴 장관입니다. "
잠시 오경득이 들고 있는 전화기를 바라보다가 안승재는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안승재입니다. "
"안 장관, 나 로젠스턴입니다. "
"쓱,장관."
"여러 차례 전화했습니다. "
그의 목소리가 차분한 것에 안승재는 가슴이 뛰었으나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차분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았습니까?"
"무슨 일이라니, 장관, 프레스 센터의 그 난동 말입니다. "
로젠스턴의 말소리는 가벼웠다.
"안 장관, 그 미스터 조는 강박감에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오, 그런 쇼를 벌이다니 "
"워싱턴에서 소동이 일어났어요. 우린 지금 잠시 회담을 중지하고 있습니다. "
"로젠스런 장관,그는 애국자요."
"외교관이 아닙니다. 안 장관, 당신은 그것을 인정해야 돼요."
"나는 세계의 모든 시청자들이 그의 죽음에 경의를 표한다고 보는데, 당신들 몇 사람만 빼고."
"안 장관."
"내일쯤 당신들이 좋아하는 여론 조사를 해보시지 아마 10퍼센트 쯤 높아졌을 거요, 파병 지지율이. "
"클린트가 회담을 보류시킨 이유가 그것 때문인 줄은 당신이 잘 알텐데.
모르고 있었다면 당신은 아이오와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 거요. 워싱턴 티켓은 버리고."
"안 장관, 당신도 입이 걸군."
"당신 옆에 붙어 앉아 있는 그 거지 새끼들에게 전해.
우리는 45년 전에 당신들에게 껌을 얻어 먹은 선배라고.
그래서 당신들을 몇십배 더 잘 알고 있다고. 물론 그 말을 따를 놈들이 아니TH지만."
"당신이 스위스에 있어 주어야겠소, 안 장관, "
로젠스턴도 다혈질의 사내지만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국무 장관이다.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남미의 끝까지 그의 영향력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고
그만큼 산전 수전을 겪어 온 사내인 것이다.
그가 다시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나라를 위한다면 말이오."
"아하, 우리나라에 저런 훌릅허신 양반이 있었다니."
조웅남이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준 열사보다도 더 훌릉허다, 조민섭 열사여. 아니 열사보다 더
높은 말이 있으은 그것을 뒤에다 붙여야 헌다. "
강대흥이 무엇을 가지러 가면서 텔레비전 앞을 잠간 가로막자
조웅남이 버럭 소리를 쳤다.
"저리 안 가? 이 씨발놈이!"
옷가지를 집어 든 강대홍이 그 소리에 놀라 튀어 나갔다.
7시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조민섭의 분사 장면이 다시 방영되고 있는 것이다.
조민섭이 쓰러지고 사람들이 연단으로 몰려가는 장면을 끝으로 화면이 바뀌었다.
"어이고, 씨발, 억울허다. "
마침내 조웅남이 손등으로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었다.
"이 웬수를 어뜨케 갚아야 헌단 말이냐?"
그는 에센의 회담장 근처에서 낮 동안 감시를 하고 왔기 때문에 6시 뉴스 때부터
두 번째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볼 때마다 눈물을 떨어내고 있다.
방문이 열리더니 김칠성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밖에서 들어오는 참이라 코트 어깨에는 흰 눈가주가 아직도 얹어져 있다.
"야, 텔레비전 꺼라. "
조웅남의 앞자리로 와 앉으면서 그가 말하자 백대팔이 일어섰다.
힐끗 조웅남의 눈치를 살핀 그가 텔레비전 전원을 끄고는 자리로 돌 OH·Ct.
"형님, 북한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릴 찾는 모양인데."
김칠성이 입을 열었다.
방안의 따스한 기온이 피부에 닿자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놈들은 롤머 호텔 옆에서 우리가 두 놈을 처치한 것을 아는 모양 01오. "
"당연허지."
조웅남이 선뜻 말했다.
"우리 아니은 누가 혔겄냐?"
"형님도, 참. 우리가 이곳에서 얼굴을 내밀고 다닐 상황이오?"
김칠성이 혀를 찼다.
"시바다를 만났더니 북한놈들이 온 시내를 뒤지고 다닌다고 합디다. "
"잘 되얀고만, 전쟁이여."
"더구나 미국 CIA 요원들이 그놈들에게 정보를 주고 있단 말이오"
"그놈들허고도 전쟁이다. "
"큰형 님한테 보고를 드려야겠어요.
조민섭 대사 사건이 있고 나서 미국 쪽에서도 시내에 요원들을 풀었답니다. "
"드러운
"이렇게 앉아만 있다가 당합니다.
언제 이곳이 놈들에게 노출될지 몰라요."
자리에서 일어선 김칠성이 입맛을 다셨다.
"형님, 이건 첩 보전이오. 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싸움이오. 예전과는 다릅니다. "
"알고 있어."
의외로조웅남이 선션히 대답하자 김칠성이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몸을 돌렸다.
"나도 안단 말여, 이 시키야. 그럼게로 내가 이렇게 처백혀만 있는거여."
김칠성이 방을 나가자 조웅남이 백대팔을 바라보았다.
"왕년의 나 같으은 뛰쳐나가서 몇 놈 쥑이고 왔을 것이다. "
"예, 형님 ."
"허지만 지금은 나라가 위험헌 판국여.
내가 뛰쳐 나가은 산통을 왕창 깨버릴 수도 있단 말이여 나는 그것이 겁난다. "
"예, 형님 "
백대팔로서는 달리 거들 말도 없는 데다가 그에게 조웅남이란 인물은 겁부터 나는 존재였다.
"대팔이 너한티만 애기허는디, 나도 조 대사처럼 저렇게 멋있게 죽을텡게로 두고 보거라.
저 양반보다 사람들을 더 모아 놓고는 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부르고 나서 배를 가를 거여 "
백대팔이 잠자코 있었으나조웅남의 말소리는 점점 더 열기를 띠어 갔다.
"그러고는 빨랫줄을 몽땅 꺼내서는 기자농들한티 던질 것이다. 어떠냐?"
"예, 형님."
"괜찮냐?"
"예, 형님 "
그러자 입맛을 다신 조웅남이 텔레비전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야, 텔레비전 켜라."
에센의 회담장 한쪽에 있는 방이다. 회담이 길어지고 있었으므로
북한과 미국의 대표들은 제각기 그곳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는데
김사훈과 최대민이 묵고 있는 곳은 오른쪽에 있는 끝방이었다.
회담장으로 쓰고 있는 곳은 2층의 저택이었으나 방이 여러 개였고
대기실에 접견실짜지 갖춘 넓은 규모여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회담 사흘째의 밤인 오늘은 북미 양측이 오후부터는 제각기 방에
틀어박혀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바로 프레스 센터에서 있었던 조민섭 사건 때문이다.
매스컴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그 사건은 이미 세계 각국의 신문과 텔레비전 방송을 타고
알려져 있었는데 지금도 스위스의 텔레비전 방송국은 뉴스 시간에 그 장면을 보여 주고 있다.
김사훈이 찌푸린 얼굴로 텔레비전에서 머리를 돌리자 최대민이 리모컨을 들어 전원을 껐다.
"남조선 정부는 조민섭이 개인 행동을 했다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입니다.
치밀하게 각본을 짜고 움직인 겁니다, 수상 동지."
최대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계 여론의 주목을 받아 보겠다는 작전이지요."
"어쨌든 성공했어, 그 목표는. 우선 우리의 회담도 중지시켜 놓았으니까."
뱉듯이 말한 김사훈이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밤 12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미국측이 당황하고 있어 내 생각엔 회담이 연기되어야 할 것 같은데 ."
김사출의 말에 최대민은 잠자코 시선을 돌렸다. 같은 생각을 하고 m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쟁이야. 어느 한쪽이 멸망할 때까지."
"멸종은 되지 않겠지. 위 아래가 같은 민족이니까.
살아 남은 자들이 역사를 쓸 것이고, 역사는 이긴 자, 정복자의 몫이니까."
죽음의 가치(2)
"수상 동지, 당에서는 이번에 어떻게든 결말을 내라는 지시였습니다. "
"우리가 이렇게 앉아 있어도 이제는 결말을 향해 진행중이네, 외교 부장 동지."
"합의서에 서명을 받아내야 합니다. "
"정말 분통이 터집니다, 수상 동지. 그 미친 놈의 자살이 아니었다면
오늘중으로 끝낼 수 있었습니다. "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최성산이 들어섰다.
"수상 동지, 취리히 남쪽 호수에서 차와 함께 저희 공작원들의 시체가 발견되 었습니다. "
굳은 얼굴의 그가 말을 이었다.
"두 명 모두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
"남조선의 여자 정보원을 잡으러 갔던 공작원 들인가?"
"그렇습니다, 수상 동지."
"계속 당하기만 하는군. 앙리 주르메가 습격당해 엄청난 손실을
입었어. 물건과 예금 증서를 찾아내는 것이 한시가 급해. 그런데 또 이렇게 되다니."
김사훈이 앞에 서 있는 최성산을 쏘아보았다.
"이것도 남조선 놈들의 짓이라고 믿나?"
"예, 수상 동지. 틀림없습니다. "
"미국인도 같이 있었다면서?"
"그는 아직 행방 불명 상태입니다. "
김사훈이 최대민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25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이것으로 남조선의 무리들이 앙리 주르메를 습격했다는 증명이
될까?그리고 그 여자가 사건에 관련이 있었고."
"그놈들 아니면 그런 짓을 할 놈이 없습니다, 수상 동지 "
"알 수가 없군."
김사훈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절박한 상황이긴 하지만 남조선 놈들의 행동이 너무 과격해. 닥
치는 대로 죽이는 걸 보면 눈이 뒤집힌 모양이야."
"미국측도 앙리 주르메를 친 것도 남조선 놈들이라고 믿고 있습니
다, 수상 동지 ."
최성산이 말하자 김사훈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
았다.
"남조선 놈들이 미국인도 처치했을까?"
"당연히 그랬을 겁니다. "
"미국측도 그렇게 알고 있던가?"
"예,수상 동지. 그들도 놈들을 찾고 있습니다. "
김사훈이 얼굴에 깊게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잘되었어. 하지만 뜻밖이야. 놈들이 그토록 과감하다니 진작 그
런 배짱을 보였다면 이런 일은 애시당초 일어나지도 않았을텐데."
월튼이 북한인들의 시체 인양소식을 들은 것은 밤 10시경이었으
니까 최성산보다는 한 시간쯤 빠른 셈이었다. 그가 현장을 돌아보고
나서 숙소인 그랜드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 1시가 되어 있었다.
호텔 현관을 들어서자 로비는 텅 비어 있었고 구석의 의자에 앉아
있던 부하 두 명이 일어나 그를 맞았다. 오늘 아침만 해도 10여 명의
죽음의 가치 269
기자들이 로비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은
이제 로젠스턴과 패트릭스가 호텔 안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
문이다.
부하 한 명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보스,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
"알고 있어. 어디 있나?"
"커피씁 안에 계십니다. "
머리를 끄덕인 그가 로비 왼쪽의 커피숍으로 몸을 돌렸다.
늦은 시간이어서 커피숍에는 벽을 등지고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명의 사내밖에 없다. 짧게 깎은 머리에 강한 인상의 동양인
이었다.
월튼은 거침없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시바다 겐지 씨, 맞습니까?"
"그렇소. 당신은 찰스 월튼 씨."
그들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고는 마주앉았다. 그리고는 잠시
서로의 시선이 부딪쳐 떨어지지 않더니만 거의 동시에 비껴났다.
"날 보자고 한 건 무엇 때문입니까, 월튼 씨?"
시바다가 먼저 물었다.
"난 일본 정보국 요원들이 대거 취리히에 몰려 온 이유를 알고 싶
소."
월튼이 굵은 음성으로 묻자 시바다가 빙그레 웃었다.
"당연한 일 아니오?바로 인접국인 한국 땅에 전쟁이 일어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회담이 이곳에서 열리고 있지 않소."
"그걸 알아보려면 당신 외무부에 물어 보면 될텐데. 미국은 동북
270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아의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일본과 협력하고 있지 않소?"
"우리의 일이 따로 있지요. 당신에게 설명해 줄 수 없어서 유감이
지만 말이오."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한국인들을 도와
주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서요."
"북한이오? 아니면 남한인가요?"
입맛을 다신 월튼이 시바다를 노려보았다.
"내 부하 한 명이 행방 불명이오, 시바다 씨. 내 생각엔 이미 죽은
것 같은데."
"저런."
시바다가 눈을 치켜줬다.
"그것과 우리와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이오?"
"그렇게 생각지는 않아요, 시바다 씨, 다만 한국인 일곱 명의 행적
을 당신이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일곱 명이라니 "
"지난주에 입국한 놈들이지.모두 정식 여권에 가명을 써서 신원
파악이 안돼. 한국 정부에서 만들어 준 거야."
"내가 그들을 알고 있다는 증거가 있소?"
"당신들의 분주한 움직임이오. 꼴허 호텔의 사건 직후에도 당신
부하들이 나타났었고 조금 전의 호숫가에서도 당시 부하들을 보고
온 길이오."
"당연하지. 정보 요원이라면 그것은 기본이오."
"『스위스 트리볼』지의 편집 국장 니젠스키에게 앙리 주르메가 갖
고 있던 마약 도매상 명단을 넘겨준 것이 누구요?"
죽음의 가치 271
월들의 말에 시바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가 월튼을 쏘아보았
고 두 사람의 시선은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모르겠는데, 무슨 말인지."
시바다가 시선을 비끼면서 낮게 말했다
"앙리 주르메가북한측 문화재 판매 책임자인 것은 이미 알고 있
는 사실이고, 그런데 그가 마약까지 맡았던 모양이군."
"한국 대사관의 미스터 김인가 뭔가 하는 자가 오늘 아침 니젠스
키에게 자료를 가져다 주었다지 만 우리가 확인해 보았소. 한국 대사
관에 그런 자는 없어."
"가명을 쓸 수도 있fl지. 익명의 투고니까."
월들이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봐요, 시바다. 그런 메가톤 급 국제 사건은 해당 국가의 위상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 때문에 내용과 제보자의 신원이 확실해야 기
사화되는 법이오. 잘 알면서."
"런가?"
"니젠스키에게 제보자의 신원 보장을 한 사람은 일본 대사관의 안
도 공보관이오. 바로 당신의 부하이지."
"안도는 니젠스키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소. 자신을 비밀에
부쳐 달라고. 니젠스키는 특종을 쥐게 되었지. 앙리 주르메 필적의
마약 도매상 명단을 쥐었으니까. 도매상 중에는 유명한 의사도, 전직
고관도 끼여 있어서 스위스가 발칵 뒤집힐 사건이오."
"북한은 구제 불능의 범죄 집단, 악의 무리로 지울 수 없는 낙인이
272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찍히게 되고‥‥‥‥
"세계 여론이 들고 일어날 거요. 미국도 마찬가지고. 우파들이 격
렬하게 정부를 비판하겠지. 저런 무리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면서 회
담이나 하고 있다고."
시바다가 머리를 들고 월튼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니젠스키를 어떻게 했겠구만.그 대특종 대신 어떤 것을
고 입을 막았소?"
"그건 말할 수 없소, 시바다. 어쨌든 그것으로 당신과 한국인 암살
f=
단들이 끈이 닿아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까."
"이젠 무엇으로 내 입을 막을 셈이오?월튼 선생, 니젠스키에게
한 방법으로는 안될텐데 "
그러자 월튼이 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신이 아냐. 곧 당신의 보스인 흔다 다카오 국장께서 연락을 할
거요. 당신에게 말이오."
"그 동안만이라도 잠자코 있어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당신을 불렀
소."
"남한을 버릴 셈인가, 당신들은?"
시바다의 질문이 난데없었던지 한동안 멍한 표정이던 월튼이 입을
열었다.
"그건 내 소관이 아니오. 정치가들이 결정할 문제지.
그리고는 상체를 시바다 쪽으로 기울였다.
"어쩠든 더이상 그런 장난을 하지 않는 게 좋아. 미국과 일본의 관
죽음의 가치 273
계를 위해서도 말이오."
바깥 날씨는 영하 10도였지만 숲에 가려 그늘진 오두막은 3, 』도
쯤 더 기온이 내려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언 호수 위를 횝쓸고 온
바람이 정면으로 부딪쳐 오고 있다. 단단하게 만들어진 창틀도 덜컹
대며 흔들렸고 통나무 처마끝에 달려 있던 고드름 덩이들이 소리내
어 떨어졌다. 아침 햇살은 옆쪽의 나뭇가지 위에 걸쳐져 있었지만 맑
기만 할 뿐 추위에 잔뜩 움츠려든 듯했다
오두막은 임대용 여름 별장으로 만들어진 정시긱헝의 통나무 집으
로 호숫가를 따라 10여 채가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호수는 넓었
고 뒤쪽의 울창한 숲과 어울려 여름에는 사람들이 몰릴 만한 곳이었
지만 지금은 인적이 없다
오직 날카로운 바람 소리만 들리는 이곳은 취리히 남동쪽으로 10
킬로미터쯤 떨어진 그라이편 호숫가로 지희은이 찾아낸 새로운 은신
처였다.
벽에 걸린 낡은괘종 시계가 천천히 아홉 번을 쳤다. 창가에서 몸
을 뗀 김원국·은 방 가운데 놓인 커다란 난로로 다가가 장작 서너 개
를 집어 넣었다. 마른 나무는 불꽃을 파닥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김칠성이 들어섰다. 그의 뒤
로 방한복 차림의 조웅남이 보였다.
"아따, 드럽게 춥네 잉 "
커다랗게 말한 조웅남이 인사도 젖혀 두고 난로 옆으로 바짝 다가
왔다.
"형님, 북한 대표들이 대사관에 도착했답니다. 미국 대표들은 아
274 밤의 대통령 제 I부 - I
직 회담장에 있다고 하는군요."
김칠성이 다가와 말했다.
회담은 중단된 것이다. 그러나 언제 다시 열릴지 알 수 없는 일이
었다. 어젯밤 조민섭 대사의 분사에 충격을 받은 로스앤젤레스의 한
인들은 대대적인 시위를 했다. 경찰 추산으로 50만 명의 한국인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시위는 미국인들에게도 호응
을 얻고 있었다. 뉴욕에서 워싱턴에서 시카고에서도 시위가 있었는
데 미국인들이 반수 이상 끼여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매스컴은 클린트 정권의 외교 정책에 회의를 나타내기 시
작했다. 북한에게 끌려 다니고만 있지 않느냐는 비판이 민주당 의원
들 내에서도 터져 나오는 참이니 공화당은 말할 것도 없다. 아침 뉴
스는 공화당 의원들이 로젠스턴과 패트릭스를 당장에 미국으로 소환
하라고 클린트에게 압력을 가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런 때에 마약건이 터져야 한다. "
길원국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일본측이 빨리 손을 써야 될텐데."
"아직 시바다한테서 연락이 없습니다. 신문사와 이야기가 되었으
면 연락이 올린데요."
조웅남이 난로불에 벌개진 얼굴을 들었다.
"차라리 우리가 허지,그것들한티 왜 일을 맬겼난 말이여?도로
갖고 오그라. 내가 경찰한티 냉겨 줄팅게로."
김칠성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주르메를 치고 랫어 왔다고 말할까요?"
"그려, 내가 윅였다고 자백헐란다. 그리고 배를 가르지."
죽음의 가치 215
"배 가르떤 장땡인가? 이제는 걸핏하면 배 가른다고 하니‥‥‥‥
"이런 쌍놈의 새끼가."
"거 아침부터 욕하지 말아요, 형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김원국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북한측은 악에 받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정
체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을 것이고."
"미국·측이 정보를 주고 있을 겁니다. 형님, 지희은이를 잡으려고
했던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
김칠성의 말에 김원국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취리히 호에서 불어온 강바람이 뷔르콜리 광장을 훌고 지나가자
우중충한 색깔의 비둘기 떼가 흐린 하늘로 솟아올랐다. 마른 낙엽이
바람에 쏠렸다가 어지럽게 나부꼈고 광장의 벤치에 앉아 있던 서너
명의 노인들이 추위에 견딜 수 없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대쪽
승선장에 매어진 유람선 두 척이 거칠어진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승선장 앞의 차도에 횐색 시트로템 한대가 멈춰 서 있었는데,운
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지희은이다.
"패 늦네요, 오늘은, "
지희은이 옆자리에 앉은 박은채를 바라보았다.
"9시 정각이면 배가 도착했는데 ‥‥‥ 바람이 세어서 그런가?"
"ID분밖에 지나지 않았어요. 곧 오겠지요."
길가에 늘어선 수십 대의 차량은 모두 배에서 내릴 사람들을 기다
리는 승용차였다. 택시 정류장은 뒤쪽에 있다.
276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박은채 씨는 이 일을 자원했나요? 아니면‥‥‥‥
지희은이 묻자 박은채가 이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자원했다고 봐야겠죠. 우연이었지만."
"우연이라뇨?"
"우연히 형님들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에요."
"이제는 거기도 형님이란 말이 입에 배었군요."
둘은 얼굴을 마주보고 웃었다.
"난 이 일이 좋아요.정말 요즘처럼 하는 일에 대해 보람을 느껴
본 적이 없어요."
박은채가 말하자 지희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내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한 것 알고 계시죠? 그리고 내가 다시
돌아오게 된 이유도."
"알고 있어요."
"난 대사관 일을 했어요. 그땐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보람도 있었
는데 . "
"내가 모시고 있던 상관이 갑자기 실종되었지요. 아마 살해된 것
같아요. 그리고 상황이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빠르게 진행되더군요.
한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나한테는 그런 이야기 할 필요가 없
어요."
"난 목숨을 걸고 일할 자신이 없었어요. 한국인의 피를 받고 태어
났지만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이곳이고, 난 스위스 국민이에요."
죽음의 가치 271
"절박한 상황이 되자 나 자신을 알게 되었지요. 난 한국인이 아니
예요."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어요. 살기 위해서는 이 사람들하고 같
이 있는 수밖에."
"솔직하군요, 지희은씨는."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들은 승선장 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직 정기 연락선은 보이지 않았다.
"난 김원국 씨가 싫어요. 그를 보면 온몸에 찬기운이 덮이는 것 같
아요."
지희은이 입을 열었다.
"그의 눈과 마주치면 숨이 막혀요. 아마 살기라는 것이 그런 건가
봐요."
"난 그렇지 않던데, 처음에는 무섭기도 했지만."
힐끗 박은채를 바라본 지희은이 승선장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박은채 씬 남자 있어요?좋아하는 남자."
"아직 ,"
"난 스위스 남자 애인이 있어요. 찰스라는 의사인데 요즘은 만나
지도 못했어요. 괜찮은 남자인데."
말을 그친 지희은이 얼굴을 굳히고는 승선장을 바라보았다. 머리
를 돌린 박은채의 눈에 물결을 가르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연락선이
보였다. 검은 선체가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뚜렷하게 드러났고 갑판
위에 몰려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27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이필수가 선착장에 내린 것은 오전 11시 20분이었다. 엔진에 이상
이 생긴 연락선이 제대로 속력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20분이나 늦게
도착한 것이다.
코트의 깃을 세운 그가 대합실을 빠져 나오자 현관 앞에 서 있던
사내 한 명이 다가왔다. 두툼한 털 코트를 입은 장신의 백인이다.
"이쪽이오, 미스터 리, "
이필수는 잠자코 그에게로 다가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배가 고장이 나서
"나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소."
그들은 서둘러 차도로 다가갔다. 차도에 세워진 차량들 주변은 배
에서 내린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이쪽은 케 다리 쪽으로 향하는 차선이고 콘서트흘 쪽으로 길을 건
너야 했으므로 성급한 사람들은 차도를 건너뛰고 있었다. 앞장선 사
내는 케 다리 쪽으로 늘어선 차량들의 앞쪽으로 다가갔다.
강바람에 코트 자락을 날리면서 이필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이윽
고 사내는 검정색 를스로이스에 다가가더니 뒷문의 손잡이를 잡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여기요, 미스터 리 ."
이필수가 됫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사내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고는 앞좌석의 문을 열었다.
됫좌석의 안쪽에 앉아 있던 회색 머리칼의 50대 사내가 마악 들어
와 앉은 이필수를 바라보았다. 금테 안경을 쓰고 있어서 번들거리는
안경알 속의 눈이 차갑게 느껴졌다.
"미스터 리,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놀란 것 같은데."
죽음의 가치 279
"아니 괜찮습니다, 루벤돌프 씨.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
이필수의 말투는 정중했다.
에리히 루벤돌프와는 서너 번 만난 적이 있다 물론 죽은 앙리 주
르메와 함께한 자리에서였는데 그는 루벤돌프가 행장으로 있는 반호
프 은행의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앙리 주르메가 반호프 은행에 예치
해 놓은 대금을 이필수가 인출하는 관계였으므로 어쨌든 이쪽도 고
객이다.
"그런데 웬일이십니까? 이 시간에 절 보자고 하신 건?"
이필수가 묻자 루벤돌프가 손을 들어 앞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롤스로이스는 소리 없이 차도로 들어서더니 케 다리 쪽으로
달려 나갔다.
루벤돌프가 입을 열었다.
"앙리 주르메를 죽인 건 남한의 암살단이라고 하던데 ."
"글쎄요, 그것이 ‥‥‥‥
"나에게 숨기면 안돼요,미스터 리.우린 같은 편이니까.같은 배
를 타고 있단 말이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루벤돌프 씨.그래서 놈들을 찾고 있지
"암살단이 당신들의 공작원들도 호수 속에 집어 넣었고.그렇지
‥‥‥‥그렇습니다. "
"어제 당신 상관인 부대 사한테서 연락이 왔었어요. 앙리 주르메의
예금을 찾을 수 있겠느냐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오. 그 돈은 앙리 주
르메가 없으면 인출이 안됩니다. 하지만 예금 증서가 있다면 가능성
280 밤의 대통령 제3부 -I
이 있지요."
예금 증서는 없다.
이필수의 찌푸린 얼굴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을 만나자고 한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오.다른 일 때문
인데‥‥‥‥
"주르메가 갖고 있던 서류가 있었소. 언젠가 나도 한번 슬쩍 보았
는데 마약 도매상들과의 거래 관계가 적힌 서류였소."
이필수가 놀란 듯 머리를 들었다.
"난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요."
"그건 주르메의 일이었지. 당신네는 공급만 하고 돈만 받으면 되
었으니까."
"그는 거래 내역을 왜 꼼꼼히 기록해 두었는데 만일의 경우에 대
비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군, 말하자면 도매상이 쓸데없는 짓을 할 적
에 터뜨리겠다는 뜻이었는데 도매상들은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소."
"그런데 이번에 그 서류도 없어진 거야. 그러니 그 사람들의 입장
이 어떨 것 같소?"
"그 사람들도 모두 내 고객이오. 큰 고객이지."
"루벤돌프 씨, 난그 일을 도와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루벤돌프가 얇은 입술 끝을 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지. 사례금으로 20만 달러를
죽음의 가치 281
드리고, 이건 당신 개인에게 드리는 거요."
"글쎄, 저는‥‥‥‥
"『스위스 트리볼』지의 폴 니젠스키가 그 명단의 사본을 갖고 있
다가 CIA에게 넘겨주었소. 우리가 한발 늦었지요. 그리고 하마터면
당신네 나라는 전 세계인의 지탄을 받을 뻔했지. 아마 당신들이 남한
을 침공했을 땐 50개국쯤이 남한에 지원군을 파병하게 되었을 거
요.
"그리고 내 친구들도 땅에 묻힐 뻔했다니까.미국이 니젠스키를
협박해서 서류를 뺏지 않았다면 말이오."
"날더러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케 다리를 건넌 승용차는 우회전해서 벨류 광장을 왼쪽에 끼고 달
리고 있다. 오른쪽은 취리히 호수다. 한동안 호수를 바라보던 루벤돌
프가 입을 열었다.
"미국측에게 서류를 달라고 하시오. 그들은 그것을 스위스 정부에
넘기지도 못하고 안고만 있어. 주한 미군 사령관까지 바꾸고 의회 내
에서나 매스컴을 통해서나 전쟁시에 파병을 안하려고 공작을 하고
있던 클린트 정권이야. 이런 일이 터지게 되면 당장에 클린트에게 돌
멩이가 날아가. 아마 몇 달 남은 임기도 못 채우고 사임하게 될 거야.
재선은 꿈 같은 소리고."
"그 골칫거리 서류를 달라고 하시오. 그리고 시치미를 떼라고 해
요. 처음부터 못 보았던 첫처림. 그게 속이 편할지도 모르지. 물론 복
사는 해놓겠지만."
282 밤의 대통령 제I부 - I
택시에서 내린 안승재는 곧장 커피숍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뒤를
따라 내린 안기부 요원 고영석이 잠시 주위를 들러보다가 커피숍의
현관 앞에 섰다. 바람이 세었으므로 그는 코트의 깃을 올려 귀를 덮
었다.
대형 유리문을 통해 안승재가 백인 한 명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
가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잠시 서서 인사를 나누는 것 같더니 서
로 마주앉았다 아직 오전이어서 안은 손님이 별로 없었지만 따뜻하
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난 언론에 종사한지 30년이 넘었습니다. 내년이면 정년이 되지
요. "
폴 니젠스키가 도수 높은 안경알 속의 갈색 눈으로 안승재를 바라
보았다.
"내 아버지는 폴란드에서 독일군에게 잡혀 수용소로 끌려가 죽었
습니다. 케이크를 만드는 기술자였는데 착한 분이었지요. 어렸을 때
기억이 납니다. 행복했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유태인이었습니다 "
니젠스키가 얼굴예 부드러운 웃음을 띠었다.
"난 며칠 전에 당신네 대사관 직원이라는 사람에게서 』떤 서류를
받았지요. 그야말로 가슴이 뛰는 특종이었습니다. 북한의 마약 공급
과 그 도매상들의 내역이 상세하게 기록된 서류였지요."
몸을 굳힌 안승재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말의 흐름이 잘릴
것이 두려운 듯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가 묵고 있는 유로 호텔에 니젠스키가 전화를 해온 것은 한 시
간 전이었다.
『스위스 트리볼』지는 스위스 3대 일간지의 하나였고 니젠스키도
죽음의 가치 283
알려진 언론인이다. 그가 대단히 중요한 정보가 있다면서 비밀리에
만나자는 제의를 하자 안승재는 두말하지 않고 나온 것이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다 조민섭의 죽음이 겹쳐진 상황
이다.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터젠스키가 말을 이었다.
"난 오늘자로 신문에 내려고 했습니다. 대서특필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모양입니다. CIA에서 찾아왔
어요. 그들은 나에게 서류를 달라고 하더군요. 대단히 민감한 정치적
인 문제라면서 그리고 진위 확인도 하지 않고 실을 수가 있느냐고도
했습니다. 또 서류를 누구에게서 받았느냐고도 물었습니다. "
"누구에게서 받으셨습니까?"
안승재도 그렇게 묻자 니젠스키가 다시 웃었다.
"당신네 대사관 직원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보이지는 않더군요. 하
지만 서류는 확실한 진품이었습니다. 진위를 가릴 것도 없었어요. 서
류에 기록된 스위스 저명 인사들,그리고 엄청난 양의 마약,그것은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지요. 아마 북한은 그것으로 철저히 매
도당하게 되었을 겁니다. "
"하지만 당신은 CIA에게 서류를 돌려 주셨군요. 그렇죠?"
"그래요. 돌려 주었습니다. "
머리를 끄덕인 니젠스키가 가슴 호주머니에서 서류 한 통을 꺼내
어 그에게로 내밀었다.
"이건 그 서류의 복사본입니다. 나에게 전해진 것도 복사븐이었지
요. 내가 아는 한국 대사관원은 아무도 없고 당신 신분이 제일 확실
하니까, 신문에서 사진도 보았고‥‥‥‥
284 밤의 대통령 제I부 - I
안승재가 서류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
"난 아버지처럼 당하진 않습니다. 착한 케이크 제조 기술자인 아
버지는 케이크는커녕 빵도 귀한 수용소에서 2년을 버티다가 죽었지
요. 무기력하게 말입니다. 그들의 명분은 허상입니다.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에게는 나치나 미국이나‥‥‥‥
안승재가 천천히 머리를 」1덕였다.
"미국은 나치와는 다릅니다. 여론에 민감한 정치가들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지요,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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