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5. 역습

오늘의 쉼터 2014. 12. 17. 13:34

5. 역습(1)

 

 

   찰스 월튼이 로비로 내려오자 기다리고 있던 마크 캔들이 다가와 섰다.
   "보스,저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변소에도 제대로 갈수가없습니다. 
그렇다고 내몰 수도 없고 말입니다. "
   캔들은 혹인으로 월들의 보좌관이다.

2미터 가까운 장신에 두 팔길어서 마치 오랑우탄과 같은 모습이었다.
   월들이 잠자코 로비를 둘러보았다.

저녁 8시가 넘어 있었지만 로비의 이쪽저쪽에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신문과 방송 기자들이 진을 치고 모여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월튼을 알아보고 이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중이다.
   "마크, 오늘 새벽에 에센으로 간다. 준비하도록."
   월튼이 소근대듯 말하자 캔들이 눈을 꿈백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몇 시에 출발합니까?"
    "3시. 그때쯤이면 저놈들도 긴장이 풀어져 있겠지."
    기자들이 다가왔다. 미국 기자들이었는데 그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다.
    "월튼 씨 회담은 내일 몇 십니까?"
    누군가가 묻자 월튼은 손을 저었다.
    "난 아는 바 없소."
    "당신이 모른다니 말이 안됩니다.

어차피 회담 결과는 우리를 통 발표해야 할테니 털어 놓으시죠."
    그러자 뒤쪽에서 부하들이 다가와 그들을 몰아내었다.
    "마크, 비상구를 통해 뒷문으로 나가야 돼.

차는 세 대면 될 거야. 앞뒤에서 경호하고."
   월튼이 로비의 구석 쪽으로 발을 떼며 말했다.
   "에센에서 회담이 끝날 때까지 우리 손님들은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위장해야 된단 말이야."
   그들은 창가로 다가가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았다. 호텔 정원의
그늘진 곳에는 아직 녹지 않은 흰 눈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보스,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저쪽이 걸리는데요. 그놈들이
꼬리를 잡히면 우리까지 들통나는 것 아닙니까?"
   캔들이 말하는 것은 북한 쪽이다. 로스앤젤레스의 빈민가에서 자
라난 그는 멕시코인과 동양인을 싫어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싫어하
는 인종이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굳이 그길을 감추려고 하지 않
았다.
   월들이 머리를 끄덕이며 캔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마크. 하지만 놈들은 이미 에센의 회담 장소로 가는 중이
170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야. 지금 우리가 연막을 피워 주고 있는 거라구."
    "그렇군요."
    회담 장소가 정해진 것은 세 시간 전이었다. 취리히 북쪽으로 20
킬로미터쯤 떨어진 에센이란 조그만 마을은 곧 전 세계 매스컴에 등
 장하게 될 것이다.
    "마크, 우선 요원 열 명을 추려서 에센으로 보내라. 위치는 이곳이
야. "
    월튼이 주머니에서 쪽지 한 장을 꺼내어 그에게로 내밀었다.
    "숲속의 단층 양옥인데 은퇴한 정부 공무원의 별장이야. 가면 북
한측 경비원들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 서툰 놈들이 실수나 하지 않을까요?"
   "글쎄, 가서 가르쳐 주라구."
   "밀리건을 팀장으로 해서 보내지요, 보스."
   "그게 좋겠군."
   "시내에 일렬 정보국 요원들과 중국 정보부원이 득실거리고 있습
니다. "
   머리를 끄덕인 월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비에서 이쪽을 힐끗
거리는 사람들 중에 동양인도 섞여 있었다. 기자들로 보이지만 정보
요원일 수도 있다.
   "한곽의 미스터 정이라고 했던가? KCIA 요원 말이야. 그 친구에
게 손댄 것이 누굴까?"
   "글쎄요, 하도 여러 정보 기관이 몰려 있어서 아직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
   캔들이 쪽지를 호주머니에 넣고는 이맛살을 조금 찌푸렸다.
                                                      역습 171
   "한국놈들의 행방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보스,놈들의 컴퓨터
기록이 깨끗한 걸 보면 KCIA가 놈들의 신원을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는데요."
   "하긴 신원이 모두 알려진 KCIA 요원들보다 노출이 안된 새 얼
굴들을 보냈는지도 모르지 ."
   캔들이 서둘러야겠다는 듯 몸을 돌렸다.
   로비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휘적이며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캔
들을 보고는 몰려들었다가 요원들에게 다시 밀려나고 있었다.
   "저것들은 한국인이야. 내기를 해도 좋아."
   다케무라가 눈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로비는 왜 넓었고 창가에는 20여 개의 티 테이블이 있었으나 빈
자리가 없었다. 대부분이 기자들인 그들은 쉬지 않고 지껄이면서 로
비의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다. 10여 년 전 아랍의 왕이 투숙한 이후
로 처음 맞는 이런 상황에 호텔의 종업원들도 덩달아 활기 있게 움직
이고 있었다.
   "여자는 신참이야. 이런 일은 익숙지 않은 것 같군. 얼굴 표정을
보면 알아."
   다케무라의 말에 사쿠라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릴 적에 오사카의 내 옆집에 한국인 가족이 살았어 내 또래의
사내 아이가 있었는데, 김이었던가?"
   "저놈하고 비슷하단 말이냐?"
   "아냐. "
   다케무라가 다시 눈으로 가리킨 쪽에 동양인 남녀가 앉아 있었는
112 밤의 대통령 제3부 -I
데 주위의 소음에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탁자 위에 두 팔꿈치
를 대고 상체를 기 울이고는 무언가 이야기에 열중해 있다.
   "그놈은 나하고 국민학교도 같이 다녔어.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
었는데 ‥‥‥‥
   "김치 도시락도 싸가지고 왔겠군."
   "공부를 섹 잘했지. 하지만‥‥‥‥
   "하지만 뭐?"
   "한번도 반장이나모범 학생이 된 적이 없어.왜냐하면 매일싸웠
으니까. 나하고도 여러 차례 싸웠지."
   "질이 나쁜 놈이었군 "
   "아니, 우리가 싸움을 걸었기 때문이야. 한국인은 그놈 하나밖에
없었거든."
   "그놈 아버지는 택시 운전사였는데."
   "택시에서 김치 냄새가 났겠구만."
   "어느 날 내가 그 집 담장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에 담 너머
로 내려다보았지.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싸움 연습을 시키고 있
더ㄹf."
   "아들 녀석은 기를 쓰고 아버지를 향해 발길질을 하고, 아버지는
팔굽으로 치는 흉내를 내며 자식을 가르치고‥‥‥‥
   "흥."
   "그 다음부터 나는 놈에게 시비 거는 패에 끼지 않았어."
   "왜? 겁나서?"
                                                     역습 173
"아니, 어쩐지 싫어져서."
"어쨌든 저놈은 한국놈이야, 저년도."
    강대흥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박은채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벌써 여러 장 사진이 찍혔어요. 옆쪽의 조각상 옆에 서 있
는 놈이오. 돌아보지는 마시오."
   박은채의 표정이 굳어졌으나 얼굴을 돌리지는 않았다.
   "아마 사진을 현상해서 서울에 있는 CIA요원에게 보내겠지요.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언제까지 이렇게 앉아 있어야 되죠?"
   "시간이 다 되었어. 우린 지금 선 보이려고 왔으니까."
   "시간 되면 그냥 나가는 거예요?"
   박은채가 묻자 강대홍이 씨익 웃었다.
   "은채 씨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뱃심이 있어요. 마음에 듭니다. "
   "명분이 있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난 신세를 갚을 것도 있고."
   "자, 이쯤 하고 나갑시다. "
   강대홍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도 따라 일어섰다.
   로비는 아직 기자들의 떠들섹한 말소리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들
이 풍기는 분위기는 거칠었지만 활기차 있었다. 그리고 기대감이 배
어 있어서 들떠 보이기도 했다. 사건을 기다리는 기자들의 속성 때문
이다.
   강대홍의 팔을 긴 박은채는 호텔의 현관을 나와 옆쪽의 주차장으
로 다가갔다.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 있어서 피부에 와닿는 공기는 얼
음처럼 찼다.
174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내가 잘 해냈는지 모르겠네."
   박은채가 흔잣소리처럼 말하자 강대흥의 어깨가 슬쩍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우린 미끼요, 은채 씨. 당신의 어색한 태도가 놈들의 시선을 끌어
주었거든."
   "이쪽으로 두 놈이 따라옵니다. "
   "누군데요?"
   "중국놈인지 북한놈인지, 아니면 일본농일 수도 있고. 난 도무지
구분을 못하겠어 ."
   그들은 넓고 샐렁한 주차장의 입구로 들어섰다. 야외 주차창은 들
어오고 나가는 차량들로 왜 붐비고 있었다.
   라이트를 켠 캐딜락이 그들 옆을 천천히 스치고 지나갔고 앞쪽에
서는 커다란 바퀴를 붙인 지프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들이 주차장 귀퉁이에 주차시켜 놓은 검정색 볼보로 다가갔을 때
뒤쪽에서 빠른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시오, 잠간만."
   영어다. 영어에 익숙한 박은채는 그것이 일본식 발음의 영어라는
것을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몸을 돌린 1들 앞으로 두 명의 동
양인이 다가왔다. 호텔의 로비에서 보았던 사내들이다.
   "당신들, 한국인 아니오, 남쪽의?"
   앞장션 사내가 어깨를 펴며 물었다. 보통 체격이었으나 눈매가 날
카로운 사내였다.
   "그렇소만."
                                                      역습 175
    강대홍이 박은채의 앞으로 나섰다. 그도 영어가 능숙했는데 이번
 에 뽑혀 온 사내들 중에서 영어 실력이 제일 처지는 것은 조웅남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몇 개의 단어만을 섞어 몸짓으로 하는 이야
 기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대방은 없다.
    "우리에게 볼일이 있소?"
    강대홍이 묻자 사내가 가볍게 머리를 11덕였다.
    "당신들, KCIA는 아니지요?"
    "KCIA? 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
    "어쨌든 이번 회담 때문에 온 것은 맞지요?"
    "무슨 회담 말이오?"
    "시치미뗄 것 없어요. 우린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건 점점 ‥‥‥‥
    강대홍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입을 벌린 채 바로 뒤에 있는 박
은채를 들아다보았다.
   "우릴 기다렸다구?"
   "그렇소. 당신들은 지금 CIA의 추적을 받고 있소. 덕분에 우리도
노출되고 있겠지만."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우린 일렬 정보국 요원이오."
   사내가 한걸음 다가서서 강대홍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릴 당신들의 근거지로 데려다 주시오. 책임자를 만나고 싶소."
   "허어, 이것 우습군. 책임자라‥‥‥‥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강대흥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
다. 그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박은채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뒤쪽에 늘
176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어서 있는 승용차 중의 한 대에 김칠성이 부하들과 함께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기대했던 상황이 아니었고 목표물도 다
르다.
   "좋아, 정 그렇다면."
   마침내 강대흥은 결심을 했다.
   "어쨌든 이곳을 나가기로 하지. 추운 데서 떨고 서 있을 수는 없으
니까. "
   "좋소. 우리가 당신 차를 타도 되TR소?"
   "마음대로."
   "뱃심이 있는 사람이군, 당신은."
   "지랄하네."
   그것은 한국말이었으므로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의상 내가 당신 및자리에 앉겠소."
   강대홍이 차의 키를 꽃자 사내가 운전석 옆자리의 문으로 다가가
며 말했다.
   "차가 있는 걸 보면 집에 있는 것 같아요, 거실에 불도 켜졌고."
   지희은이 옆자리에 앉은 고동규를 바라보았다. 운전대 위에 두 팔
굽을 올려놓고 상체를 기울인 자세였다.
   "이번 주일엔 북한 대사관 쪽에서 찾아오지 않았어요. 다른 방법
으로 접촉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서울에서 듣기로는 북한에서 문화재를 외국으로 팔아 넘기
는 루트가 있다던데, 아마 이농인 모양이군."
   고동규가 됫좌석으로 머리를 돌렸다.
                                                      역습 177
    "형님. 어떻게 할까요?"
    "들어가지 뭐 ."
    시큰둥한 얼굴의 조웅남이 길 건너편의 3층 벽돌집을 바라보며 말
 했다.
    "가서 인사나 허고 오지 뭐 . "
    지희은이 힐끗 고동규를 바라보았다.
    "그러지요. 그럼 미스 지, 당신은 여기서 기다려. 우리가 들어갔다
올테니까."
    가죽 점퍼의 지퍼를 올리며 고동규가 말하자 지희은이 자동차의
시동을 껐다.
    "저도 함께 가겠어요. 제가 벨을 누르는 것이 나을 거예요, 두 분
보다는."
    고동규가 다시 조웅남이 있는 쪽으로 머리를 돌렸는데 아무런 반
응이 없다.
   "좋아, 그럼 앞장서. 그리고 문이 열리면 비켜나."
   그들은 일제히 차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어두웠고 반들거리는 노면은 밤 추위에 얼어붙어 있어서
차도를 지나는 차량들은 그저 바퀴만 겨우 굴릴 뿐이다. 매운 바람이
휘몰려 왔으므로 지희은은 코트 깃에 머리를 묻었다.
   길을 건너 벽돌집의 층계를 오르자 커다란 목제 문이 앞을 가로막
았다.
   지희은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세대 주택이어서 문 안쪽
은 30평쯤 되어 보이는 로비였다. 안쪽의 벽에 붙여진 안내대에 앉
아 있던 경비원 제복 차림의 사내가 =I들을 바라보았다. 살쩐 얼굴에
175 밤의 대통령 제포뚜-I
 어깨가 넓은 40대의 백인이다.
    그의 좌측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고 우측에는 일층 주
 택의 현관문이 있다.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경비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는데 키가 2미터에 가까운 거인이었
다. 자신의 체격에 대한 뭇 사람들의 반응에 익숙한 터이라 그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놀라운 표정을 받아들이려는 여유 같은 것이
보였다.
    "2층의 주르메 씨를 찾아왔어요."
    지희은이 나섰다.
    "올라가도 되 겠죠?"
   "아니, 연락을 해봐야‥‥‥‥
    사내가 냄비 뚜껑만한 손바닥을 그들 앞므로 벌렸다.
   "기다려요, 여기에서."
   옆에 놓인 인터폰을 집어 드는 경비에게로 고동규가 한걸음 다가
섰다.
   "이봐."
   사내의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린 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렇게 서둘 것 없어. 잠깐만 이것을."
   그는주머니에서 1백 달러짜리 지폐 서너 장을 꺼내어 사내의 손
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친구를 놀래 주고 싶으니까, 당신은 모른 척하고 있기만 하면 이
자리를 계속 지키게 될 거야."
   경비가 손바닥 위의 지폐를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자 지폐는 보이
                                                     역습 179
  지 않았다.
     "가시지요, 형님."
     고동규가 계단 쪽으로 발을 떼면서 조웅남을 바라보았다. 조웅남
 의 뒤쪽에 가린 듯이 서 있던 지희은은 그가 경비원에게로 한걸음 다
 가서는 것을 보았다.
     "이 시키가 연락을 허은 어절라고 그려?"
     웅얼거리는 조웅탐의 한국말을 고동규도 들었다.
    "형님, 그렇지만‥‥‥‥
     계단에 한 발을 올려놓은 고동규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쪽을 바
 라보았다.
    "나 같어도 돈 먹고 연락혀 줄 거다. "
    조웅남이 다시 한걸음 다가서자 경비는 커다란 얼굴에 웃음을 띠
 었다. 두 볼이 계란을 담은 것처럼 부풀어올랐다. 조웅남의 두 팔이
 뻗쳐 올 때까지 경비의 얼굴에서 운음기는 남아 있었다.
    그와 조웅남 사이에는 폭이 5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간이 탁자
가 놓여 있다. 지희은은 조웅남의 두 손이 경비의 얼굴을 양쪽으로
감싸 쥐는 것을 보았다. 놀란 경비가 손을 들어 그의 팔목을 움켜쥐
는 순간 부드득 하면서 무엇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굵고 둔한
소리였다.
   지회은은 조웅남이 손을 떼고 비껴나자 그들이 들어왔을 때처럼
경비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저도 모
르게 손바닥을 입에 가져다 대고는 터져 나오려는 소리를 막았다.
   경비의 몸은 이쪽을 향하고 앉아 있었지만 얼굴은 뒤쪽으로 돌려
져 있었던 것이다.
   180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인자 되다. 이러은 안심이여."
   조웅남이 경비의 얼굴을 이쪽으로 돌려 놓으며 말했다. 초점이 없
는 경비의 두 눈이 보였고 입은 반쯤 벌어져 있다. 우두커니 서 있던
고동규가 경비에게 다가갔다.
   저택 안은 조용하였지만 숨을 죽이고 있는 순간에는 수많은 소음
들이 희미하게 귀를 울렸다. 텔레비전의 웃음 소리와 발자국 소리까
지 벽을 뚫고 들려 오는 것이다. 그들은 경비원을 경비 테이블의 구
석에 쑤셔 앉히고 그 머리 위에 신문을 덮자 머리를 숙이고 테이블
안쪽을 바라보지 않는 한 경비는 보이지 않았다.
   "올라가자,"
   조웅남의 말에 고동규가 서둘러 앞장을 섰고 지희은이 꽁무니에
서서 2층의 계단을 올랐다. 곡선의 계단을 오르자 육중한 나무 문이
오른쪽에 보였다. 3층의 주택은 왼쪽의 계단으로 올라가는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2충에서 3층 저택의 입구는 보이지 않는다.
   문 앞에 선 고동규가 숨을 들이마시더니 벨을 눌렀다. 잠시 여유
를 둔 다음 두 번, 세 번을 누른다.
   "누구요?"
   문 옆의 스피커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대사관에서 왔습니다. "
   고동규가 문 옆의 스피커에 바짝 다가섰다.
   "북한 대사관의 미스터 김이오."
   "미스터 김?"
   "예, 미스터 리의 동료요."
   "710ㄹ」요."
                                                     역습 181
   고동규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돌아서는 순간 조웅남이 발 하나를
버쩍 치켜들었다. 고동규가 입을 쩍 벌렸고 지희은은 벽에 등을 붙이
며 온몸을 움츠렸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육중한 목제 문짝이 부서
지면서 안으로 확짝 열렸다. 조웅남이 두 팔을 쩍 벌리고 안으로 뛰
어들어 가자 권총을 빼어 든 고동규가 뒤를 따랐다.
   문 안쪽은 거실이었는데 20평이 넘었으나 비어 있었다. 단숨에 거
실을 뛰어 건넌 조웅남이 안쪽의 문을 발로 차 열었을 때 마악 이쪽
에 등을 보이며 오른쪽의 문을 열고 도망치는 사내가 보였다. 방안의
탁자에 놓여 있던 목이 긴 도자기 한 개가조웅남의 허리에 걸려 방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문을 어깨로 밀치면서 뛰어들어 간 조웅남은 서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드는 사내를 향해 두 팔을 뻗쳤다.
   사내가 이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그의 손에 쥐어진 권총이 보였
다. 30대 후반의 수염이 무성한 사내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
순간 조웅남은 어깨로 사내의 몸을 밀치면서 권총을 쥔 사내의 팔목
을 움켜쥐었다.
   벽에 온몸을 부딪힌 사내의 손에서 권총이 떨어졌다 사내가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다시 조웅남이 주먹을 뻗치자 억눌린 신음 소리가
길고 낮게 울려 나왔다. 배를 움켜쥔 사내가 방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과 동시에 고동규가 방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넌 옆방으로."
   권총을 움켜된 고동규는 숨을 들이마시고는 옆방의 문을 발로 차
열었다.
"f!    T:!"
182 밤의 대통령 제3부 -I
   방안을 울리는 총소리가 들리면서 벽에 걸려 있던 대형 거울이 산
산조각 부서져 내렸다. 고동규는 열려진 문 안으로 몸을 던지듯 굴러
들어갔다.
   "f! Tf!"
   그를 향해 다시 총소리가 났고 방바닥에 몸을 굴리면서 고동규는
냉장고 그늘에 선 사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퍽 ! 퍽 ! 퍽 !"
   사내가 털썩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앞으로 엎어지자 벽에 붙어 서
있던 50대의 백인이 두 손을 들며 고함을 쳤다
   "쏘지 마! 난 무기가 없어!"
   방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고동규는 발 아래에 쓰러진 사내를 내려
다보았다. 동양인이다. 아마 같은 한국인으로 북한 사람일 것이었다.
그가 백인의 등을 밀어 방으로 들어서자 조웅남이 눈을 번들거리며
다가왔다.
   "집안을 뒤져 봐라, 딴 놈들이 있는가."
   조웅남이 사내의 목덜미를 움켜쥐면서 말했다. 그는 발을 들어 사
내의 옆구리를 찍듯이 찼다. 다시 고동규가 밖으로 나가자 지희은이
주충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듯 걸음걸이
가 자연스럽지가 않다.
   "이 시키가 주루멘가 수루멘가 허는 놈 맞냐?"
   머리칼을 움켜쥔 손을 당겨 사내의 얼굴을 들어 보이며 조웅남이
묻자 지희은이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사람입니다. "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인 조웅남은 방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역습 183
주르메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방안을 둘러보던 지희은이 숨을 들이쉬고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방 구석에 주저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사내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두
눈을 부릅뜬 사내는 동양인이었는데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세 대의 승용차가 한적한 도로 가에 주차되어 있었다. 짙은 어둠
이 덮인 도로에는 차량의 통행이 드물었고 도로 아래쪽은 눈이 덮인
개울이다. 개울 건너편 숲의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쉴새없이 흔들리
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유리창 문을 닫은 김칠성이 옆자리에 앉은 시바다를 바라보았다.
창을 닫자 차 안은 따뜻했으나 억눌린 듯한 정적이 덮여 왔다.
    "믿을 수가 얼군. 갑자기 우리에게 정보를 주겠다니."
    김칠성의 목소리가 차 안의 정적을 깨었다.
    "우린 아직 당신의 정체를 확인하지도 않았어."
    "확인하고 자시고 할 여유도 없을텐데. 하지만 그러고 싶다면 당
신네 부장에게 물어 보시지. 대답해 줄테니까."
    시바다가 김칠성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지금 당신들에게는 우리밖에 도와 줄 사람이 없어요. 김 선생, 우
리는 당신들이 취리히에 온 것을 알고는 이틀 동안을 찾아 헤매었
소. "
    "그거 꺼림칙하군. "
    "중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측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두어야
할 거요. 당신들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는 모르지만."
184 밤의 대통령 제3부 -I
   "한국의 KCIA는 CIA에 의해 감시당하고 행동의 제약을 받고 있
어서 힘들테니까."
   "도대체 당신은 우리를 누구로 알고 있는 거야?"
   "조직원들이오. 김원국 씨를 대부로 모시고 있지요. 당신은 보스
중의 하나인 김칠성 씨이고."
   "우린 당신들이 취리히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아마 CIA
측에서는 당신들의 신분까지는 알아내지 못하고 있을 거요."
   "그런가? 대 단하군,"
   "그럴 것도 없지요.우린 투자한 만큼은 돌려 받으니까."
   김칠성이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옛날에 야쿠자와 한바탕 일을 치른 적이 있었지 그때 얼굴이 팔
린 모양이군."
   "글쎄 "
   "남북한이 전쟁을 한다니까 걱정이 되나?"
   "농담할 때가 아니오, 김 선생."
   "나도 마찬가지야. 난데없는 일본 정보국 요원의 제의가 믿기지
않는단 말이야."
   시바다가 힐끗 뒤쪽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뒤쪽에 있는 차의 윤곽
이 희미하게 보였다. 밤이 깊어 가고 있다.
   "필요할 때는 적한테서도 무엇인가를 얻어내야 할텐데, 김 선생.
지금은 적과 아군의 구분이 없는 상황이오. 어제의 적이 오늘에는 우
 군이 되었다가 내일 다시 적이 되는 세상이지, "
    머리를 든 시바다가 김칠성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역습(2) 

 

   "당신의 보스 김원국 씨에게 전해요. 김 선생, 지금 취리히엔 어마
어마한 숫자의 정보 요원들이 몰려와 있소. 전쟁은 이곳에서부터 시
작되고 있는 거요."
   "전하기는 하겠어, 당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김 선생."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오."
   "당신네 대사관의 정보 요원은 북한 공작원이 죽였소. 그들은 중
국 여권으로 활동하고 있고 그루닝겐의 모텔에 투숙했던 네 명의 중
국인은 지금 북한 대사관으로 옮겨 왔소."
   "북한 공작원들은 30명 정도인데 대부분 시내의 북한 대사관 안
에서 요인들과 함께 기거하고 있어요."
   "미국측을 조심해야 될 거요. 그랜드 호텔과 미국 대사관, 그리고
시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요원들은 대략 80명이 넘어요."
   "회담 장소는? 그건 알아 보았소?"
   마침내 김칠성이 상체를 기울이며 시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건 아직 모릅니다. 지금도 그랜드 호텔을 우리 요원들이 감시
하고 있긴 하지만,북한 대사관 앞에서도‥‥‥‥
   "당신네 외무 장관이 유로 호텔에 묵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
다. 미국측에 의해 회담에 옵서버로 참가하는 것도 거절당했다는 것
도 압니다. "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김칠성이 머리를 돌리자 시바다도 하던 말
186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을 멈추었다.
   "무슨 전화야?"
   조민섭이 묻자 수화기를 내려놓은 고영석이 그에게로 한걸음 다가
섰다.
   "회담이 내일 열리는 것은 확실하답니다. 그랜드 호텔에는 아직도
로비에 기자들이 가득 차 있고 북한 대사관 앞도 마찬가지랍니다. "
   그는 서울에서부터 따라온 안기부의 연락관이었는데 방금 외부에
서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참이다.
   "누가 그래?"
   "대사관의 주재원입니다. "
   잠자코 앉아 있던 안승재가 고영석을 올려다보았다.
   "미국측이 대사관에 연락해 온 건 없나?"
   "그런 얘긴 듣지 못했습니다. "
   특별한 이야기였다면 대사인 모경득이 전해 주었을 것이다. 안승
재가 입을 다물자 방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로젠스턴의 경고 때문만이 아니라 언론에 노출되면 좋을 것이 없
다. 회담 당사자인 한국 외무 장관이 회담에 참석하지도 못하고 3류
호텔 방에 숨어서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이 발견되면 특종감이다.
   안승재는 탁자 위에 내려놓은 신문을 펼쳐 얼굴을 가렸다. 세계
언론은 이 사실에 대해 대한민국을 동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세계 각국은 약자를 잊고 강자에 대한 존경과 호의감을
품게 된다. 그것이 국제 사회의 흐름이다.
   강자가 존경받고 약자는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것이 역사였고 진리
                                                       역습 187
 였다. 그것은 개인보다도 단체가, 단체보다도 민족이나 국가 간의 관
 계에 이르면 더욱 철저해지고 명확해지는 것이다
    "장관님, 제가 잠간 밖에 나갔다 오런고 합니다만."
    조민섭이 안승재를 향해 말했다.
    "저야 얼굴이 잘 알려지지도 않았으니까, 대사관 근처에 가서 오
 대사를 만나 보고,또 그랜드 호텔에 가서‥‥‥‥
    "안됩니다. "
    신문을 접은 안승재가 머리를 저었다.
    "최선을 다하려는 것, 이해는 합니다만 소용 없는 일입니다. "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앉아 있을 수만은‥‥‥‥
    "사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요즘 깨닫고 있습니다. "
   안승재의 말에 조민섭이 눈을 꿈백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선뜻 입을 열지는 않는다. 고영석이 소리 없이 문 옆으로 물러나 자
리에 앉았다. 안기부의 고참 수시관인 그도 방안의 분위기를 온몸으
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오 대사한테도 절대 이 근처로는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
는 나라 망신을 시키고 싶지 않아요."
   "장관님, 로젠스턴에게 편지라도 보내시는 것이‥‥‥ 준비해 둔
자료가 있지 않습니까?그것을 첨부해서‥‥‥‥
    "어떻게든 전할 수 있을 겁니다. "
    "제가 전하지요. 제가 책임지고 하겠습니다. "
    문 옆에 있던 고영석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자 안승재가 머리를
저었다.
18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기다려 봅시다. "
   "벌써 밤 10A가 넘었습니다. 장관님, 회담은 내일입니다 "
   조민섭이 말했으나 안승재는 다시 신문을 펼쳐 들었다.
   결혼과 장례식, 그리고 구직과 구인 광고가 기재된 부분을 펼쳐
든 안승재는 한동안 신문을 내려놓지 않았다.
   대사관의 앞마당은 대낮 같은 불빛이 밝혀져 있어서 분수대 옆의
조그만 돌멩이까지도 환하게 내려다보였다. 정문 안에는 두꺼운 방
한복으로 몸을 감싼 경비원들이 벌려 서 있었고 건물의 현관 근처에
도 서너 명이 서성거리고 있다.
   김사훈이 머리를 들자 담장에도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 서 있는 경
비원들이 보였다. 창에서 몸을 돌린 김사훈은 소파에 기대앉아 있는
최대민을 향해 섰다.
   "남조선의 외무 장관 안승재가 취리히에 와 있다고 하는군. 조금
전에 로겐스턴으로부터 연락이 왔어."
   "그렇습니까? 애가 탄 모양이군요."
   최대민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해사한 용모에 영어와 중국어, 러
시아어에 능통했고 깨끗한 매너로 기자단의 평도 좋은 인물이다.
   "로젠스턴에게 매달리려고 왔겠지요. 온갖 수단을 다 쓰다가 안되
니까 그냥 몸으로 부딪칠 모양인데 ."
   "안됐어."
   "정말 안됐습니다 "
    =1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중국에 남조선의 총리가 방문하겠다고 외교부에 공식 서한이 접
                                                      역습 189
 수되었어 "
     김사훈이 소파의 앞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물론 중국측은 보류시켰고."
    "안됐습니다. "
    "자업자득이지.우리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께서는 선견지명이 있
 으셨어. 철저한 사상 무장만이 살길이라는 말씀이 진리라는 것이 증
 명되어 간다. "
    "인민군은 물론이고 인민들의 사기가 충천하고 있는 것이 제 눈으
로도 보입니다, 수상 동지 ."
    "이 대세는 미국도 막을 수가 없지 김정일 수령 동지께서 판단을
잘 하신 거야."
    소파에 등을 묻은 김사훈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계는 밤 1 1
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 생각입니다만 이런 식으로 두 달만 더 끈다면 남조선은 스스
로 붕괴되어 버릴 것 같은데요."
   최대민의 목소리는 가벼웠고 얼굴의 표정도 부드러웠다.
   "군대의 사기는 말이 아닙니다 남조선은 사상 무장에 실패했어
요. 우리에게 채찍과 당근의 양쪽 외교를 펼친다고 했지만 그들은 애
초부터 채찍이란 것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
들의 경제 협력 제의나 기타 통상 제의는 우리의 힘에 압박을 느껴
공물을 바치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
   "국민들은 그것으로 평화가 오는 것으로만 믿었지. 집권층도 그렇
게 선전했고."
   "우스운 일입니다. 문민 정부가 되면 북쪽 상황이 달라지리라고
190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왜 믿었을까요?"
   "집권층의 허세지 자가당착인데 그것을 지적한 자들은 시대에 역
행하는 극우 보수주의자로 소외되었어 ."
   "그런 상황에서 군인들의 기강이 잡힐 리가 없지요.군사쿠데타
로 정치 군인들에 대한 불신에다가 경제 협력이네 뭐네 하는 제 장단
에 제가 춤을 추는 것들로 군인들은 목표를 잃었고 목적을 잊었습니
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의 타락상이 온 인민에게 퍼져 개인주의,
황금 만능주의가 만연했고, 책임을 지려는 공무원, 군인들이 어디 한
놈이라도 있었습니까?"
   "급속도로 부패한 거야, 남조선은."
   "하늘이 주신 기횡니다, 수상 동지."
   "이 사람아,하늘이라니,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후계자이자
영도자인 김정일 동지의 혜안 덕분이야."
   "그렇습니다, 수상 동지."
   그러자 방문이 열리더니 공작원 한 명이 들어섰다. 북한에서부터
그들을 수행해 온 호위총국 소속의 대좌였다.
   "수상 동지, 보고 드릴 말씀이‥‥‥‥
   그들 앞에 부동 자세로 선 사내가 김사훈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급한 일인가?"
   이맛살을 찌푸린 김사훈이 물었다. 모처럼 좋은 분위기를 깨기가
싫은 것이다.
   "예, 대사 동지께서 보고 드리라고 했습니다. 저, 앙리 주르메가
살해됐습니다. "
   "앙리 주르메가?"
                                                     역습 191
   김사훈이 눈을 치켜뜨고는 한동안 숨을 멈추었다가 내쉬었다. 그
리고는 쏘듯이 묻는다.
   "살해됐다구? 언제? 어디서? 어떻게?"
   "30달 전에 자택에서 목을 매단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타살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조사를‥‥‥‥
   "지긍 그곳엔 누가 나가 있지?"
   "예, 대사관의 이필수 동지와 서너 명이‥‥‥‥
   "혼자 죽었나?"
   "아닙니다, 수상 동지 집안에 있던 두 명의 저회 공작원과 주르베
의 부하 한 명도."
   "모두 자살이야?"
   이를 드러내며 김사훈이 말을 씹듯이 묻자 대좌는 빳빳하게 몸을
굳혔다. 이것이 그의 책임은 아니지만 앙리 주르메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아닙니다, 수상 동지. 그들은 각각 총에 맞거나 목뼈가 부러져서
   "경찰은 강도의 소행으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집안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반항한 흔적이 많았습니다 "
   김사훈이 힐끗 최대민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대좌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과정을 수시로 보고해 주도록. 주르메의 변호사 로빈슨을 찾아서
즉시 그곳으로 보내도록 해. 경찰이건 뭐건 그곳 물건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란 말이야."
192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알았습니다, 수상 동지 ."
   대좌가 서둘러 방을 나가자 최대민이 길고 굵은 숨을 내쉬었다.
   "이거 갑자기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군.중국에 지불할 1억 5천
만 달러를 그에게서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수상 동지."
   "현찰을 집안에 넣어둘 미련한 놈은 아냐, 앙리 주르메는."
   김사훈도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다.
   "하지만 이거 난처하군. 기름이 다음주 중에 수송되어 오는데."
   "주석 동지에게 보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해야지."
   자리에서 일어선 김사훈이 움직임을 멈추고는 최대민을 내려다보
았다.
   "정말 싫구만, 이런 보고는."
   지희은이 다가가자 김칠성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김원국이 머리를
들었다. 밤 12시가 지나 있어서 저택은 조용했고 언덕을 홀고 내려
온 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말씀 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
   굳은 얼굴로 그녀가 말하자 김칠성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거, 고 중령한테 말하면 안될까? 우린 지금 바쁜데."
   "고 중령이 결정하지 못할 일이에요."
   김원국이 손을 들어 김칠성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elot. "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아니면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서요. "
                                                     역습 193
     "전 이 일을 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본래 정보 수집이 임무였
 는데 지금은‥‥‥‥
    "그만두겠다는 얘긴가?"
    "저는 사실 정식 직원도 아니예요.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도록 되
어 있습니다. "
    머리를 」I덕인 김원국이 김칠성을 돌아보았다.
    "그만두게 해라, 동규에게 얘기해서."
    "형님, 하지만‥‥‥‥
    김칠성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제 마음대로 그만들단 말입니까?"
    "우리 상황하고 이 여자 상황하고는 다르다 이야기 길게 할 것 없
다. "
    김원국이 지희은을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수고했어. 앞으로 더욱 어려워질텐데 마침 잘 이야기
해 줬어."
   "그만두도록 해. 정보원으로 몇 년 근무했으니까 주의 사항은 잘
알 것이고."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으면 제 나름대로‥‥‥‥
   낮은 목소리로 지희은이 말하자 김원국이 허리를 저었다.
   "필요 없어."
   그가 머리를 돌렸으나 지희은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뭘 해?돌아가지 않고?"
194 밤의 대통령 제3부 - I
   김칠성이 쏘아붙이듯 말하자 그녀는 몸을 돌렸다. 가벼운 발자국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형님, 저걸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의 경우 일이 생긴
다면 우리들 모두가 노출되어 버립니다. "
    김칠성이 서류를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당장에 저년을 없앱시다, 놈들이 채가기 전에."
   "박은채를 불러와라."
   난데없는 말이었으므로 김칠성이 눈을 점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에게 이야기할 것이 있다. 어서 "
   "예, 형님 ."
   김칠성이 5분쯤 후에 박은채와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일주일이
넘도록 김원국과 대좌해 본 적이 없는 박은채는 긴장한 듯 눈꼬리를
세우고 있다.
   "거기 앉아."
   김원국이 턱으로 앞자리를 가리키자 그녀는 잠자코 자리에 앉았
다. 김칠성이 옆자리에 따라 앉는다.
   "늦은 시간에 불러내어 미안한데‥‥‥‥
   김원국이 말하자 그녀는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예요.모두 자지 않고 있습니다. 저만 잘 수가 있나요?"
   "이 기회에 이야기하겠는데, 거기도 그만두고 돌아가도록 해."
   박은채가 눈을 치켜떴다.
   "전 그때 말씀드린 대로‥‥‥‥
   "남자들이 해야 할 일들이야. 거기의 애국심은 인정하지만 몸으로
부딪칠 일들이 많아."
                                                      역습 195
     "돌아갈 수 없습니다. "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박은채가 김원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적응해 가고 있어요. 그런데 왜‥‥‥‥
     "형님 말씀을 들어."
     김칠성이 던지듯 말했다. 그는 아직도 박은채를 마취 기술자로 알
 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박또박 김원국에게 말대꾸를 하는 박은채를
 못마땅한 듯 노려보았다.
    "널 위한 말씀인데 받아들이지 않구 말대답을 하는 거야?"
    아랫입술을 깨문 박은채가 머리를 숙였다. 하얀 얼굴이 조금씩 붉
어져 가고 있었다.
    김칠성이 마무리하듯 말했다.
    "솔직히 마취 기술자는 필요 없어 그것에 넘어갈 놈들이 없단 말
이다. "
    "난 마취 기술자가 아니예요."
    박은채가 번쩍 머리를 들었다.
    "그건 강대홍 씨가 날 빼내려고 공항에서 거짓말을‥‥‥‥
    김원국의 눈빛을 보고 박은채가 말을 멈추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
다.
    "뭐라구? 마취 기술자가 아냐? 강대흥이가 거짓말을 해서 빼내?"
    김칠성이 눈을 치켜떴다.
   "아니 이게 도대체‥‥‥‥
   김칠성이 얼굴을돌려 김원국을본다 김원국이 입맛을 다셨다 그
러나 입을 열지는 않는다.
   "어떻게 된 거야?"
196 밤의 대통령 제3부 -I
   김칠성이 때려붙이듯 묻자 머리를 숙인 박은채는 더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안할 거야?"
   김원국의 앞이었으므로 목청을 높이지는 않았으나 김칠성의 기세
는 사나웠다.
   "대흥이가 빼내려고 거짓말을 한 건 맞다. 하지만 그것으로 놈을
처벌하지는 말아라."
   가라앉은 목소리로 김원국이 입을 열었다.
   "놈은 호인이야. 인간미가 있는 놈이다. "
   "형님,도대체‥‥‥‥
   손을 들어 김칠성의 말을 막은 김원국이 박은채를 바라보았다.
   "이것 봐, 지금도 그렇다. 강대흥의 이름을 다시 꺼내어 놈을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
   "수모나 고통을 당하더라도 참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야. 넌 번번
이 그것을 어겼어 너한테 이 일은 적합하지 않아."
   "형님, 그렇다면 이 여잔 누굽니까?"
   김칠성이 묻자 김원국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3개 국어에 능한 무역 회사 간부 사원이지."
   "그런데 형님이 어떻게? 그리고 강대흥이는?"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빼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야."
   "그놈을, 그냥 "
   당장에 일어나 나갈 듯 얼굴을 붉히며 씨근거리는 김칠성을 김원
국이 바라보았다.
                                                      역습 197
    "내버려 두라고 했다. "
    ‥‥‥‥예, 형님."
    김원국이 박은채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널 생각해서 한 소리가 아냐. 너 하나 때문에 우리가 위험해질 수
도 있어."
   "지희은이 그만둔다고 해서 보냈다. 그래서 다시 널 부른 것인
fl ."
   "절 남아 있게 해주세요."
   탁자를 내려다본 자세로 박은채가 말했다.
   "절대로 신경 쓰이게 해드리지 않겠어요, 저는."
    새벽 4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아직도 먹물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어두운 밤길을 세 대의 승용차가 속력을 내어 달려가고
있었다. 취리히 시내를 빠져 나와 북쪽의 산악 지대로 향하는 2차선
도로는 얼어붙은 눈으로 미끄러웠으나 차량들은 바퀴에서 흰 눈가루
를 뿜어내며 달려 나갔다 오가는 차도 없고 길가에는 이제 민가도
보이지 않았다. 라이트의 불에 드러난 길가의 눈더미와 잡목 숲은
어둠에 섞여 춥고 황량하게 느껴졌다.
   최성산은 세 번째 차의 뒷좌석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형 올스모빌은 차체가 넓고 아늑했는데 가끔씩 노면이 팬 곳을 지
나면서 가볍게 흔들릴 뿐 텅 빈 도로를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최성
산은 호위총국에 속해 있는 해외 공작반의 조장으로 이번 작전의 책
임자였다.
19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내년이면 장군으로 진급하게 되어 있는 최성산에게 이번 회담은
진급의 마지막 관문이나 다름없었다. 세계 각국의 정보원들이 들끓
고 있는 취리히에서 그들의 눈을 피해 이동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
니다. 더욱이 파리몌보다 더 귀찮은 기자들의 추적도 따돌려야 한다.
최성산은 창에서 시선을 떼었다.
   "선도차가 너무 빠르다. 속도를 줄이라고 해. "
   "예, 조장 동지."
   앞자리의 부하가 무선 전화기를 내어 들었다. 에센에는 6시 이
전에 도착할 것이었고 회담이 시작될 때까지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 승용차가 속력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조장 동지, 주르메를 친 것은 남조선 놈들이 아닐까요?"
   옆에 앉은 황태식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으나 차 안의 네 사람은
모두 들었다.
   "경비원부터 차례로 없애 버린 것은 보통의 강도들이 한짓이 아
닙니다, 조장 동지. 그리고 우리 공작원들도 그렇게 쉽게 당할 놈들
이 아닙니다. "
   "기습하면 할 수 없지."
   "경비는 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놈 목이 뒤로 돌려 졌어요."
   얼굴을 찌푸린 최성산은 입을 다물었다
   황태식은 그의 지휘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소속은 당 상임 위원회
의 해외 사업국 요원이다. 그가 매일 평양의 해외 사업 국으로 업무
보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최성산은 알고 있었다.
   "남조선의 안기부 요원들은 모두 CIA의 감시를 받고 있어, 황 동
지. 그 시간에 움직인 안기부 요원은 없어."
                                                     역습 199
    최성산이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남조선에서 일단의 사내들이 이곳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도착한 후에 모두 종적을 감추었는데 ‥‥‥‥
"미국측도 수색을 하고 있으니까 곧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어떤 놈
인지 ."
"당에서는 대단히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주르메가 보내야 할 돈
                                                              들
이 있었는데 차질이 생겨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들을 찾아내라는 지시였습니다. "
   "나도 지시를 받고 있어, 황 동지 "
   "참고삼아 말씀 드린 겁니다, 조장 동지 ."
   최성산이 창 밖으로 머리를 돌리자 차 안은 다시 정적이 감돌았
다. 희미한 엔진 소리와 함께 차체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그들의 귀
에 들려 오고 있었다.
   "2킬로쯤 전방입니다. 사쿠라이 씨, 차량 시속은 60킬로 정도, 속
력이 아까보다 떨어졌군요."
   추적 장치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구로다가 말했다. 20대 중반으로
신참인 그는 온몸에 활기를 띠고 있다.
   "취리히 시에서 15킬로 벗어난 지점입니다 "
   사쿠라이는 구로다의 말을 들으며 무선 전화기를 들었다. 짙은 어
둠이 덮인 산길을 승용차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
   앞쪽을 달리는 북한인들의 차량은 보이지 않았으나 구로다가 안고
200 밤의 대통령 제3부 - f
있는 위성 추적 장치는 사방 50킬로미터 안에 있는 목표물을 놓친
적이 없다. 전화기의 발신음이 두 번째에서 그쳤다.
   "여보세요."
   시바다의 목소리다.
   "부장님, 접니다. "
   "그래, 지금 어디냐?"
   "북쪽 국도를 달리고 있습니다. 시내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입니71."
   "그랜드 호텔에서도 양키들이 떠났어. 놈들의 추적 방해가 심해서
우린 접근하지 못했는데 양키들은 헬리콥터를 탔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쪽은 놓치지 않습니다. "
   사쿠라이가 몸을 굽혀 앞자리의 추적 장치를 바라보았다. 가방처
럼 생긴 세 개의 알루미늄 케이스는 열려 있었고 스크린에서는 점이
길을 따라 북상하고 있다.
   "부장님, 2킬로 전방에 에센 마을이 나옵니다. 직진하면 메린드
마을이고."
   "좋아. 놓치지 마라."
   전화기의 스위치를 끈 사쿠라이가 다시 추적 장치를 굽어 보았다.
유럽 상공 위에 떠 있는 인공 위성 다케다 호는 북한인들이 탄 세 대
의 차량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다케다의 컴퓨터는 목표물의
모든 것을 입력하고 있어서 형체가 없어질 때까지 자동 추적을 한다.
사쿠라이는 구로다가 안고 있는 추적 장치가 무사하기만을 빌면 되
었다.
   새벽 5시 30결이었으나 안승재는 넥타이를 단정히 맨 양복 차림
                                                     역습 201
이었다.
    김원국이 방으로 들어서자 그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의
옆에 서 있던 머리가 반백인 사내가 김원국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주무실 시간인데 죄송합니다. "
    김원국이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김원국이라고 합니다. "
    "조민섭입니다. "
   안승재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김 선생."
   인사를 마친 그들은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다 아직 새벽이어서 호
텔은 정적으로 덮여 있었고 찻길을 달리는 차량의 소음도 없다.
   안승재가 충혈된 눈으로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넥타이의 매듭은
빈틈없이 매어져 있었고 머리칼도 빗어 넘긴 채 단정했지만 뜬눈으
로 밤을 밝혔다는 것이 얼굴에 드러나 있다.
   김원국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미국과 북한측의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밖에는
=1들의 감시 차량이 두 대 있더군요."
   "미국측이야 그럴 만한데, 북한은 왜?
   묻는 것은 조민섭이다.
   "북한 사람들도 알고 있단 말인가요?"
   "미국측이 알려 준 것 같습니다. "
   "그럴 리가‥‥‥‥
   멍한 얼굴의 조민섭을 내버려 두고 김원국이 안승재 쪽으로 몸을
202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돌렸다.
    "지금 북한의 김Al훈과 최대민은 취리히 북쪽으로 이동중입니다
회담장으로 가는 모양입니다. "
   "난 장관께 여쭈어 볼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
   "말씀하시지요."
   "만일 이번 회담에 장관께서 참석하시게 된다면 북한측에 어떤 제
의를 하실 생각이었습니까? 장관께서는 대통령과 상의하고 오신 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
   "물론 대통령 각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지요."
   "북한의 남침을 저지할 조건이 있습니까? 아니면 보류시킬 방법이
라도?"
   "없습니다. "
   안승재가 머리를 저었다.
   "온갖 조건과 방법을 다 써도 저 사람들의 행위를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그렇다면 참석하시려고 하는 이유는 핍니까?"
   안승재가 충혈된 눈으로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내 눈으로 보고 듣고 싶어서요. 북한이 날 젖혀 놓고 미국측에만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난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가를 직접 듣고 싶은 겁니다. "
"하지만 무리였습니다. 미국측에 부탁했지만 꼼짝하지 말고 기다
                                                      역습 203
리라고만 하는군요. 북한을 자극시킬 염려가 있다고."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없고 회담 참석만이 장관님의 목표였군
_a_. "
    "대통령 각하께서는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면 항복을 빼놓고
어떤 것이라도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
   "우리가 이제까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전쟁으로 파괴시킬 수는
없습니다. "
   한동안 안승재를 바라보고 있던 김원국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
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지리라는 걸 믿고 계시군요."
   "집니다, 분하지만."
   안승재가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고는 김원국을 쏘아보았다.
   "다른 모든 것은 북한보다 월등합니다. 몇 배, 몇십 배, 다만‥‥‥‥
   아랫입술을 혀로 축인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린 싸울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어요. 이유는 그것 하나뿐입니
다. "
   "사회가 부패했지요. 정치는 사븐오열되었고."
   "비판만 할 것이 아닙니다, 김 선생."
   조민섭이 몸을 꼿꼿이 세웠다.
   "민주주의 사회의 일부분이 과장되게 보일 수도 있어요.문제는
우리가 정신병자 집단을 동족으로 위쪽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오."
   그는 넥타이의 깃을 거칠게 잡아당겨 풀었다.
   "우리는 방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204 밤의 대통령 제3부 -I
   "다시 오겠습니다. "
   김원국이 몸을 돌려 나오자 자리에서 일어선 안승재가 문까지 따
tatl.
   "오늘 회담의 결과를 알고 싶습니다, 김 선생. 미국측도 연락을 해
주겠지만‥‥‥‥
   그는 얼굴에 씁쓸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부끄럽습니다.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다니."
   머리를 끄덕인 김원국이 잠자코 문을 열었다.
   "오늘은 눈이 내릴 것 같군요."
   김사훈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으나 앞자리에 앉은 로젠스턴과 패트
릭스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침 8시 10달이었다. 회담 장소인 에센의
조그만 별장 응접실에는 예전과는 달리 네 사람이 마주앉아 있었다
미국측 경호원이 들어가 그들 앞에 뜨거운 커피잔을 내려놓고 나간
참이다.
   "올해에는 북한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한국속담에 눈이 많이
내린 해는 풍년이 든다고 했는데."
   "김 수상, 유엔의 안보리가 내일 소집되는 것 알고 있지요?"
   패트릭스가 김사훈의 넋두리를 깨었다. 커피잔을 손에 쥐고 김사
훈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알고 있어요, 패트릭스 씨,"
    "오늘 회담의 결과가 내일 안보리의 북한 제재 방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 "
    "중국과 프랑스가 거부권을 행사한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의 선전
                                                       역습 205
 포고는 비공식적인 회담에서 나온 내용이오."
    "남한은 비록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방어용이라는 것을 증명시키
 기 위해 유엔 감시단의 파견을 요청했소. 12개국의 감시단이 휴전선
 에 배치될 거요."
    "그것도 압니다, 패트릭스씨, "
    로젠스턴이 헛기침을 했다.
    "우선 그쪽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우리쪽의 이야기는 나중에
되어야 할 것 같으니까."
    "좋습니다. 내가 먼저 시작하지요."
    김사훈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검고 납작한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빼내어 들었다.
   "우리는 남조선에 대해 2월 10일 12시 정각에 해방 작전을 시작
합니다. "
   로젠스턴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고 패트릭스는 커피잔을 내려놓
았다.
   김사훈이 말을 이었다.
   "작전 기간은 열흘,따라서 2월 20일에는 정전이 될 것이고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은 단일 국가로 미국과 상호 동맹 조약을 맺습
니다. 이것은 우리의 요망 사항이니까 참조만 해주시오."
   "우리는 남조선이 해왔던 것보다 더욱 강력한 동맹 관계를 맺고
싶숩니다. 한반도가 동북 아시아의 요지로서 우측은 일본,좌측은 중
국의 세력에 끼여 있는 군사 요충지라는 사실은 미국이 더 잘 알 겁
니다. "
   입맛을 다신 패트릭스가 의자에 둥을 기대었다. 그의 정면에 앉아
있던 최대민과 시선이 마주치자 패트릭스는 찌푸린 얼굴을 돌렸다.
   "우리는 통일이 된 후에도 당분간은 미군 주둔을 받아들이겠고 미
국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군사 기지, 예를 들어 울릉도 같은 곳을
미군 주둔 기지로서 영구 임차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
   "물론 미군의 주둔 비용은 조선 공화국의 부담이오.

이것은 쌍방의 협정에 의해야겠지만 미국측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
   "또한 우리는 중국과의 상호 방위 조약을 백지화시킬 용의도 있습니다. "
   "해방 후에 일절 숙청이나 보복은 없을 것이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주한 미군은 우리 공화국의 모든 치안 부서에 감시단을 파견 하여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의 일정 기간동안근무해 주기를 요청합니다. "
   "공무원, 군인, 경찰도 감원 이외의 조처는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유 재산을 그대로 인정하고 화폐도 남조선 화폐로 공화국을 통일시킬 계획입니다. "
   "잠간만."
   마침내 패트릭스가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잘 알겠소. 그 서류의 내용은'잠시 후에 다시 읽어 봅시다.

어차피 우리가 결정을 내릴 것도 아니니까."
    "그럽시다.

하지만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 미국쪽이 어떻게 나오든 우리는 작전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
    "일본이 오늘 중 중대 발표를 할 거요. 세계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남한에 파병할 수도 있다고."
    "국회에서 법은 통과되겠지요.

하지만 귀국 정부가 탐탁지 않게 생각할텐데. 특히 공화당의 보수파들이 말이오."
    "명분이 약해서 밀릴 거요."
    "시간이 걸리는 일이오.더구나대통령 선거 때이고 일본이 파병 하면

미국도 방위 조약을 지키기 위해 수십만이 파병되어야 하고,

십만 명이 죽습니다, 미군이."
    로젠스턴이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거칠게 비벼 끄고는 머리를 들었다.
    "남한의 군사력만으로도 당신들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어

우린 2개 함대의 공군력과 일본, 필리핀의 공군을 모아 당신들의 땅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자신의 목소리가 크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소리를 낮추었다.
"서로 핵을 안 쓴다고 하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어.

그리고 재래 전은 곧 지구전이 돼.

기름과 식량이 한 달분의 여유밖에 없는 당신들이 패망하게 될 거요."
"글쎄 . "
김사훈이 마른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아직 모르시는 모양인데, 우리 공화국 인민들의 대부분이 요즈음 이런 말을 하고 있어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

차라리 전쟁이나 일어나서 이밥에 고깃국이나 배불리 먹어 보고 죽자고 말이오."
"우린 전쟁을 하지 않으면 모두 죽습니다. 굶어 죽든지, 아니면 서로 죽이든지."
로젠스턴과 패트릭스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최대민이 불안한 듯 눈을 껌벅이며 김사훈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말을 이었다.
"정권의 위기지요. 돌아가서 내 말을 그대로 전하시오.

전쟁을 해서 남조선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우리가망합니다.

우린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
얼굴이 검붉게 달아오른 김사훈이 갑자기 말을 그치더니 덕을들 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부릅뜬 눈에 가득 물기가 고여 있는 것이 미국인들의 눈에 보였다.
                                                       
                               

 

'소설방 > 밤의 대통령'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죽음의 가치  (0) 2014.12.21
6. 혼란과 배신의 서울  (0) 2014.12.17
4. 취리히의 암살단   (0) 2014.12.17
3. 섬을 떠난 은둔자   (0) 2014.12.16
2. 계엄령  (0) 2014.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