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번데기 13
병달은 퇴근하자마자 인화가 일하고 있는 대학로 카페로 달려갔다.
“오늘 새벽에 오시기로 되어 있죠?”
“네.”
인화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병달은 카페 주인인 친구에게 사정을 말하고 인화와 함께 카페를 나섰다.
“정말 고마워요.”
인화는 조선족 교회를 통해 경기도 고양시에 아담한 농가를 하나 구입할 수 있었다.
병달이 돈을 보태긴 했지만 전적으로 진국의 힘이 컸다.
“제가 뭘요. 진국 선배가 가장 힘을 썼는데.”
“언제 그 분 모시고 저녁이라도 한번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
“그렇지 않아도 앞으로 인화 씨 도움을 받을 날이 올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병달은 오전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두 사람은 전동차를 타고 원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십분여 벽제 방향으로 들어가면
인화가 가족들과 함께 살 농가가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몇 시죠?”
“5시 20분이라고 그러셨어요.”
퇴근 무렵이라 그런지 전동차 안엔 사람들로 붐볐다.
인화는 자연스럽게 병달의 팔짱을 꼈다.
“지금 중국은 무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어요.
아직 죄인들을 공개 처형할 정도로 인권이 바닥인 나라지만 말이에요.”
“그러니까 너도 나도 중국에 달라 붙으려고 하죠.
세계 전체 인구의 20%나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전 목숨이라도 내 놓겠어요.”
인화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저 역시 조선족이긴 하지만 중국 사람이나 마찬가지예요.
중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잘 안 믿는데,
한번 믿으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놓는 민족성을 가진 사람들이거든요.”
“그렇다고 인화씨가 목숨을 내놓을 거 까진 없어요. 옷가게 차리는 건데요 뭘.”
“제 뜻이 그렇다는 거예요.”
인화가 병달을 팔을 꽉 잡았다.
전동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벽제 방향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그 동안 얼마나 치우고 닦고 청소를 했는지 어제까지 사람이 살았던 집 같았다.
병달이 사립문 앞에 서서 인화의 손을 들어보았다.
손바닥이 갈라지고 터진 피가 밴 자국도 있었다.
집은 넓은 마당도 있고 집 뒤로 텃밭도 있었다.
예전엔 창고로 쓰던 방까지 합하면 모두 방이 네 개나 되었다.
“가족이 모두 몇이라고 했죠?”
“엄마, 아빠, 여동생이랑 저 이렇게 넷이에요.”
인화가 병달을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시면 추울 텐데 훈훈하게 해 놓읍시다.”
병달이 앞서서 마루가 딸린 안방 쪽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현대식 입식 부엌으로 꾸며져 있어 생활하기 불편함이 없었다.
“모두 그 진국 선배라는 분이 해주셨어요.”
“허, 참. 그 양반이 도대체 언제 이런 걸 와서 했단 말야.”
방안도 장판과 도배가 새로 되어 있었고 어지간한 가구도 마련되어 있었다.
방안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인화가 차를 내왔다.
“냄새가 독특한데요.”
“용정차에요. 진짜 용정차는 구경하기 힘들어요.”
“이건 진짠가요?”
인화가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사람들은 상당수 기름에 튀긴 음식을 먹는데도 비만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차에 있어요.”
“꼭 난(蘭) 꽃에서 나는 냄새 같은 게 나네요.”
“맞아요. 지금은 용정에서 나지 않는 것도 용정차라고 하는데
그래도 용정에서 나는 차를 제일로 쳐주죠.
실은 그 지방에서 나는 물로 차를 우려내야 제 맛이긴 한데.”
다소곳이 앉아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난이었다.
“이제 고생 끝났어요. 앞으로 돈 모으면 여기서 디자인 공부도 할 수 있어요.”
“너무 고마워요.”
인화가 갑자기 병달에게 안겨왔다.
그 바람에 놀란 병달이 찻잔을 넘어뜨렸다.
분위기가 깨질까봐 병달은 잔이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인화가 병달을 지긋이 쳐다봤다.
어디선가 소쩍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한 겨울에 짝을 잃은 모양인 듯 구슬프게 울었다.
병달은 손을 뻗어 인화의 입술을 매만졌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멋지게 살아갈 수 있을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화는 병달의 얼굴을 양손으로 쥐었다.
“저는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감히 분에 넘치는 일인 줄 알지만… 병달씨를 사랑해도 되는 지요?”
“무슨 소리를 합니까. 인화씨가 뭐가 못났다고 그런 소리를 합니까.”
병달은 인화를 세게 껴안았다.
인화의 몸이 연하게 떨렸다.
인화의 입술이 병달의 입술을 찾았다.
병달의 몸도 떨렸다.
‘마음가는 대로 살자, 마음가는 대로.’
병달은 이렇게 마음을 정한 후 격렬하게 인화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숨이 멎는 듯했다.
아이처럼 아직도 발간 살들이 병달의 눈앞에 드러났다.
인화의 몸은 전체가 촉촉했다.
병달은 스폰지에 물이 스며들 듯 그녀에게 빨려 들어갔다.
때론 얕게 때론 깊게 병달은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때마다 인화의 목 깊숙한 곳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제 몸이 부서지더라도 병달씨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내가 중국에서 난처한 일을 당했다면 인화씨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살들이 뜨겁게 부딪혔다.
하지만 병달의 몸놀림도 인화의 몸놀림도 여전히 어색했다.
밀고 당길 때 호흡이 맞지 않았고 병달은 인화의 젖가슴을 만지려다
긴장해서 가볍게 떨기까지 했다.
“호, 혹시 아직도 총각이세요?
한국 남자들 군대 갈 때 다들 경험한다고 하던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병달은 자신이 총각인 게 쑥스러웠다.
인화가 병달의 손을 잡아 자신의 중심으로 끌었다.
“병달씨 부인이 되고자 하는 욕심은 없습니다.
다만 정인으로라도 있게 해주시면 전 그걸로 고마울 따름입니다.”
병달의 손이 미끄러지듯 인화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숲은 무성했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나 인화는 이미 집으로 올 때부터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를, 저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인화씨 계십니까?”
누군가 밖에서 인화를 불렀다.
인화와 나란히 누워 있던 병달은 후다닥 몸을 일으켜 옷을 걸쳤다.
그리곤 인화를 내려다 보았다.
“여기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인화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인화씨~.”
병달이 귀를 기울였다.
“진국 선배 목소린데요.”
인화도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머리를 매만졌다.
“서, 선배. 저 병달인데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당에서 쿡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을 열어보니 어둠이 아직 짙게 깔려 있지만
어슴프레 모습을 드러낸 이는 짐작대로 진국이었다.
“선배가 여긴 어쩐 일로…”
병달은 진국을 흘겨봤다.
행여 인화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이구 이 사람아. 여기 있을 줄 알았지.
퇴근할 때 부리나케 어디론가 내뺄 때 알아 봤어.”
진국이 거실 마루로 올라왔다.
거실 마루도 제법 훈훈해져 있었다.
“그나 저나 어쩐 일입니까?”
인화도 고개를 모로 꼬고 나타나 진국에게 인사를 했다.
“다른 게 아니라 인천공항에 가야 할 거 아냐.
마침 거기서 일 봐주신 목사님도 그 길로 들어오신다길래 만나 뵐려고.”
진국이 거실을 둘러보고 안방을 기웃거렸다.
“꾸며 놓고 나니 훌륭하네.”
“선배 고마워요.”
“내가 뭘.”
진국이 손사래를 쳤다.
“그나저나 너도 똥차라도 한 대 뽑아야지.”
“지금에서야 생각 없이 그냥 왔다는 걸 깨달았네요.
렌트라도 해 가지고 왔어야 했는데.”
“이미 지난 일이고. 어서들 준비해.”
진국이 재촉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새벽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선배님도 참 정성입니다.”
“오지랖이 넓어서 그런 거지.
나중에 장가가면 마누라가 무척 피곤하다고 할 거 같아.”
세 사람은 진국의 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새벽길을 달려 5시 조금 지나서 인천공항 대합실에 도착했다.
“무척 피곤들 하실 거야.
북경에서 바로 오지 못하고 여기저기 거쳐서 오셔야 했으니까.”
인화가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나저나 무슨 대책 좀 나왔어요?”
“대책은 무슨 대책. 그냥 부딪혀 보자는 말만 난무했지.”
“무슨 일이에요?”
침묵만 지키고 있기 답답했는지 인화도 입을 열었다.
“아, 병달이가 이야기 안 했던가?
우리 팀 보고 중국에 총판을 내라는 오더가 떨어졌어요.”
“내면 되잖아요?”
병달은 순수한 인화가 재미있고 서글펐다.
순수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늘 당하고 사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박춘만 과장. 차 실장에게 산삼을 선물로 주고도 안심이 되질 않았다.
차 실장이야 제 속만 챙기기로 유명한 때문이었다.
“아침 밥 꼬박 챙겨 먹는 사람이 이게 뭐야?”
박춘만의 아내 조현실은 절반도 비우지 못한 그의 밥그릇을 들여다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입맛이 없네.”
“그러게 술 좀 적게 먹어. 올해엔 담배도 끊는다며.”
박춘만이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려다가 말았다.
“조현실 여사. 아침엔 제발 잔소리 좀 안 하면 안될까?”
“내가 뭐 잔소리하고 싶어서 하나. 다 당신 몸 생각해서 그러는 거지.
우리가 당신 말고 누구를 믿어.”
박춘만은 대꾸를 하려다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요즘 당신 입맛 없다고 자꾸 그러는데 병원에 한번 가 봐.
30대 후반도 돌연사 조심하라고 하더라고.”
“여편네가 아침부터 죽는 소리는.”
기어코 박춘만은 화를 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달 안에 당신 건강검진 꼭 받아야 돼.”
아내는 그가 화를 내도 아랑곳하지 않고 젓가락을 놀렸다.
그는 젓가락을 탁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남들은 애들 키우면서도 나가서 돈만 잘 들 벌더라.”
박춘만은 그 동안 꾹 참았던 이야기를 기어이 터뜨리고 말았다.
아내의 얼굴이 번쩍 들려졌다.
입에는 밥이 한 가득 담겨 있었다.
박춘만은 아내의 입에서 금방이라도 밥알이 튀어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 미안해.”
그는 오랜만에 아내의 눈물을 보았다.
“누군 나가서 돈 벌고 싶지 않은 줄 알아?
나도 어디 공장이라도 다녀야겠다는 생각 안한 줄 알아?”
“대학까지 졸업한 사람이 공장은 무슨 공장.”
“당신은 참 세상 물정 몰라도 한참 몰라.
대학을 나왔어도 나 같은 아줌마를 어느 회사가 쓰겠어. 공장이라면 모를까.”
아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박춘만이 손을 뻗어 아내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가 요즘 신경이 좀 날카로워서 그래.
다른 회사는 다 감원하는데 우리는 아직 안했거든.
지금 이 나이에 정리해고 당해 봐. 내가 갈 데가 어디 있겠어.”
“당신이나 나나 참 지질이도 복이 없어.
우리 집이 조금만 잘 살았어도 당신 그렇게 힘들게 회사 다니게 안 했을 거야.”
박춘만은 코끝이 찡했다.
“그거야 내가 할 소리지.
우리 집이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어도 아파트에서 살 테고
당신 갖고 싶어하는 김치냉장고쯤이야 단번에 사주고 그랬을 텐데…”
그는 말을 꺼내놓고 보니 부질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놈만 안 아팠어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텐데…”
아내가 또 큰애 이야기를 꺼냈다.
“됐어. 지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면 됐잖아.”
아내가 박춘만을 지긋이 쳐다봤다.
그는 아내의 시선이 버거워 고개를 돌렸다.
막상 화를 내면 결국 자신만 손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우리한테도 볕 들 날이 있을 거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박춘만이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나설 때 아내가 따라왔다.
“차 조심하고.”
“아 이제 그 소리는 그만 좀 해.”
아내의 눈가는 여전히 붉었다.
“그리고 참 당신 회사 가는 길에 로또 1등 두 번이나 나온 집이 있다며?”
“2등하고 3등도 많이 나온 모양이더라.”
“이번 주는 매일 5천원 씩 투자해. 알았지?”
복권이라면 질색을 하는 아내였다.
아내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런 아내가 불쌍했다.
다른 남자를 만났다면 이토록 고생하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그래, 남들 다 되는데 우리라고 안 되겠어.”
그제야 박춘만은 문을 힘차게 열고 나갔다.
아내가 나직이 미소를 보였다.
박춘만은 지하철 역사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입맛이 없는 게 마누라 말대로 속이 이상이 있어서 그런 걸까?’
박춘만은 괜히 걱정이 일었다.
‘지금 병이 나면 방법이 없는데.’
박춘만은 전동차를 기다리는 무수한 사람들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전동차가 다가왔고 사람들 틈에 끼여 겨우 올라탔다.
신도림에서 2호선 전동차를 갈아탔는데 재수 좋게 빈자리가 있었다.
앞차가 떠난 지 얼마 안된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아 의자 틈에 끼어 있는 신문을 끄집어냈다.
요즘 출근길에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무료 스포츠신문이었다.
지하철 가판대의 돈줄이었던 스포츠신문들이 언젠가부터 팔리지 않아
판매원들이 대책 마련에 나섰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순전히 돈을 주고 사는 스포츠 신문이나 질적 양적으로
다를 바 없는 무료신문 스포츠한국 때문이었다.
신문을 보다가 오늘의 운세에 눈길이 갔다.
‘쥐구멍에 볕이 들었다. 북 쪽이 길하다?’
박춘만은 맥없이 웃었다.
전동차에서 내려 회사까지 다시 마을 버스를 탔다.
회사에 도착하니 30분 남짓 여유가 있었다.
커피를 한잔 뽑아 먹고 텅 빈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대외협력부 사무실. 말은 그럴듯하지만 회사의 온갖 잡무를 다 보는 곳이었다.
예전에 다니던 철강 회사가 부도가 난 뒤 ‘코지’로 자리를 옮긴 지도
벌써 8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8년의 세월에 과장이면 못난 것도 아닌데…’
그런데 박 과장은 자신이 못나게만 여겨졌다.
“어머, 일찍 나오셨네요. 축하드려요.”
미스 변이 사무실로 들어서며 인사와 동시에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박 과장은 눈가에 맺히려는 눈물을 얼른 지웠다.
“무슨 소리야?”
“모르셨어요?”
직원들이 하나 둘 출근을 했다.
“과장님, 아니 실장님 축하 드립니다. 오늘 한턱 단단히 쏘십시오.”
“진급 축하 드립니다.”
막내 사원이 들어서며 깍듯하게 축하를 했다.
“진급이라니?”
“게시판 아직 못 보셨어요?”
박춘만은 순간 전동차 안에서 본 스포츠 신문이 떠올랐다.
그는 부리나케 회사 게시판이 걸려 있는 복도로 달려나갔다.
‘박춘만, 홈쇼핑 담당 실장으로 승진.’
게시판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꿈인 것만 같았다.
박춘만은 차 실장 사무실로 달려갔다. 마침 차 실장도 출근해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실장님, 감사합니다.”
“무슨 소립니까?”
차 실장이 신문을 접으며 의아해했다. 그는 금시초문인 듯했다.
“저기 복도 게시판에…”
“뭐 재미난 거라도 붙었습니까?”
박 과장은 차 실장이 능청을 떠는 것인지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나 저나 잘 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할 얘기가 있었는데.”
차 실장이 박춘만을 손짓에 소파에 앉도록 했다.
“이거 내가 미안해서 뭐라고 말해야 좋을 지 모르겠네.”
“미, 미안하긴요.”
박춘만은 어리둥절했다.
“이번 대북 사업 말입니다.
아무래도 박 과장까지 같이 갈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오성 본사에 이미 팀이 꾸려져 있고 내가 거기 장으로만 가는 게 되어 놔서
나중에 자리가 생기면 부르겠습니다.
꼭 박 과장하고 같이 가려고 했는데 일이 내 마음대로 안되는군요.”
박춘만은 어찌된 일인가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가 승진을 해서 홈쇼핑을 맡게 된 건 그러니까 차 실장의 천거가 아니었다는 말이었다.
“그럼 제가 홈쇼핑 담당 실장이 된 걸 모르시고 계셨군요.”
“홈 쇼핑 담당?”
차 실장이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렇게 됐습니까? 그거 참 잘 됐네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모를 수가 있지?”
박춘만은 그의 앞에 앉아 있기가 멋쩍었다.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달려왔는데 그는 역시 제 속만 챙긴 속물이었다.
“다 실장님 배려로 제가 승진한 게 아니겠습니까.”
“허, 나도 박 과장을 데려가지 못하면 그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어쨌든 축하를 해야겠네.”
차 실장이 박춘만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 실장의 손이 미지근했다.
“그럼, 전 이만.”
박춘만은 소파에서 일어나 그에게 목례를 했다.
“박 과장 그때 그 집 말이오.
정말 좋았습니다.
앞으로 본사에 가면 자주 못 보게 되겠지만…
내 그동안 박 과장 수고를 생각해서 한턱 쏜 거니까,
에, 돈이 수월치 않게 나왔습디다.”
“아, 네.”
차 실장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 바람에 책상 위에 놓여져 있던 난 화분이 쓰러지며 박살이 났다.
그가 인터폰을 눌렀다.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겠습니까?
화분 손에 안 걸거치는 데다가 놓으라고 몇 번을 말했습니까?
얼른 들어와서 화분 치워요!”
차 실장은 애꿎은 비서에게 화를 냈다.
박춘만은 비서가 들어온 사이 그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데리고 가려고 했겠지. 여건이 안 되었을 거야. 그렇게 몰지각한 양반은 아닐 거야.’
박춘만은 비서를 야단치는 차 실장의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멀뚱 쳐다봤다.
차 실장이 창밖에 서 있는 박춘만을 힐끔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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