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개와 늑대의 시간

제5장 몽정기 2

오늘의 쉼터 2014. 12. 25. 20:05

제5장 몽정기 2

 

 

“이게 뭐야?”


강 실장이 중경 앞에 서류철을 내밀며 뚫어지게 쳐다봤다.

 

“저희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대안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에 가서 그 속옷들을 걷어 오겠다고?

 

한 달은 걸리겠네. 그리고 그 속옷이 아직 남아 있을까? 경비는 어떻게 하고?”

 

강 실장이 혀를 찼다.

 

“김 대리, 위기관리 능력이 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

 

강 실장의 싸늘한 목소리에 중경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이건 우리만의 문제가 아냐. 원단 납품업자도 있고 봉제업자도 있잖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중경은 그래도 강 실장의 뜻을 알아 차릴 수가 없었다.

 

강 실장은 딱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내가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라고 한 건 피해를 같이 나누어야 한다는 말이지.

 

프랑스까지 갔다 오라는 말이 아냐. 고통을 분담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그들도 손해를 봐야지.”

 

“하지만 원단 납품업자나 봉제업자들에겐 천 만원도 타격이 매우 클 텐데요.”

 

“그럼 우리는 타격이 없는 건가?

 

개네들한테 사정을 설명하고 이달에 지불할 재료비나 인건비를 좀 줄여달라고 말만 슬쩍 던져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같이 공동 책임을 지려고 할 테니까.”

 

“그래도 계약상…”

 

강 실장이 다시 혀를 찼다.

 

“그러니까 말만 흘리라는 거지.

 

안 그러면 이 손실을 영업2팀에서 책임질 건가?

 

지금은 인건비 때문에 섬유산업이 하향 길이야.

 

‘비라’도 이미 대대적으로 중국과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기고 있어. 내 말 무슨 뜻인 줄 아나?”

 

중경은 그래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두부나 콩나물이라도 돈이 된다면 대기업이 뛰어드는 판이지만 이건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계약 위반이었다.

 

물건이 ‘코지’ 손으로 넘어오면 그때부터 ‘코지’의 재산이었다.

 

그들에게 사기 피해의 고통을 나누자는 말을 약자의 목을 쥐는 간악한 수법이었다.

 

게다가 많은 섬유업체들이 중국으로 공장을 옮겨가고 있다는 말까지 하라니….

 

하지만 중경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강 실장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니 방향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술 한잔 먹으면서 인간답게 이야기하라고. 첫째도 이익 둘째도 이익이야.”

 

“네, 알겠습니다.”

 

중경은 서류를 들고 강 실장의 방을 나왔다.

 

강 실장은 일어와 영어, 불어까지 세 개의 외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

 

기획도 치밀하고 머리 회전도 빨랐다. 디자인을 보는 감각 또한 탁월했다.

 

하지만 냉혹하고 냉철했으며 남보다는 자신이 먼저였다.

 

직속 부하들에게 그래야 살아 남는다고 가르쳤다.

 

‘어차피 세상이란 게 적자생존이고 약육강식 아니었냐.

 

그렇게 살지 못했다면 지금의 강 실장이 있었겠어.’

 

중경은 마음을 다잡고 사무실로 돌아온 뒤 원단 공장이 있는

 

음성과 봉제공장이 있는 봉천동에 각각 전화를 걸었다.

 

“오늘 그 쪽 사람들 하고 회식 있어요?”

 

전부터 끈질기게 달라붙던 해원이 알은 체를 했다.

 

“일 처리할 게 있어서…”

 

“술자리 같던데 여자가 끼면 더 부드러워지지 않을까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중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자이너 일이 재미없어요?”


중경은 차를 몰고 신림동 쪽으로 향하며 해원에게 물었다.

 

차엔 해원과 같은 디자이너인 박장수와 기획을 담당하는 정혜영도 함께 앉아 있었다.

 

“해원씬 디자이너보다 경영에 더 관심이 많은 거 같아요.”

 

박장수가 슬쩍 거들었다.

 

“매일 속옷만 디자인하는 거 지겹잖아요.”

 

해원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가 집어넣었다.

 

귀여운 구석이 많은 여자였다.

 

“그래, 해원씨는 앞으로 뭐가 되고 싶습니까?”

 

“여자 오너가 되는 게 꿈이에요.”

 

“여자 오너라…”

 

“코지처럼 실속 있고 이 정도 규모의 회사 오너요.”

 

전해원이 당찬 반면 박장수나 정혜영은 하루하루 만족하며 사는 듯했다.

 

중경은 체질적으로 해원 같은 여자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끊임없이 추구하고 활동적이고 앞으로 향해 쌓아 나가는 여자.

 

중경은 문득 몇몇 여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송림과 채연, 은경, 가이아 백화점의 해수까지 얼굴과 표정까지 또렷이 보였다.

 

스스로 원하지 않았는데 묘하게 얽혀 가까워졌고 한 침대에 뒹굴었던 여자들이었다.

 

“저도 박 대리님처럼 동기들 중에 가장 빨리 승진할 거예요.”

 

해원의 당찬 목소리가 잠시 여자들 환상에 잠겼던 중경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중경은 실소를 하며 해원을 슬쩍 쳐다보았다.

 

“해원씨 그러려면 죽어라 공부해야 됩니다.

 

난 회사 밖에선 나만의 시간을 갖는 걸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그렇게 살긴 싫네요.”

 

털털하게 생긴 박장수 다운 말이었다.

 

차는 어느새 신림동의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음성 원단업체 사장도 다섯 시쯤 출발을 한다고 했으니 모두 도착해 있을 터였다.

 

박장수와 정혜영은 청담동 명품 란제리 매장 때문에 약속이 있다며 택시를 잡아탔고

 

중경과 해원은 약속장소인 호프집 ‘불놀이야’로 들어섰다.

 

“사람들 만나기 전에 내 얘기를 먼저 들어요.”

 

중경은 아침에 강 실장이 해주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편한 술자리가 아니라는 것, 강하게 굴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죄송하다는 기미를 보여야 하는 자리였다.

 

“뭐 분위기 잘 맞추면 되는 거죠?”

 

“해원씨는 어떻게 생각해?”

 

“뭘요?”

 

“저들에게 공동 책임을 지운다는 거 말야.”

 

“어쩔 수 없죠. 세상 살아가는 생리가 그런 건데요.”

 

눈치도 빠르게 계산도 빠른 여자였다.

 

절대로 손해볼 짓은 하지 않을 여자였다.

 

중경과 해원이 홀 안을 둘러보았다.

 

“찾으시는 분이라고 계십니까?”

 

“길윤덕씨라고…”

 

중경이 종업원에게 물어보려 할 때 마침 길 사장이 룸 안에 앉아 있다가

 

화장실을 가던 길이었는지 마주쳤다.

 

“어이구 김 대리님 오랜만입니다.”

 

길 사장은 두 손으로 중경의 손을 반갑게 잡고 흔들었다.

 

“그런데 이 분은?”

 

“지난 연말에 새로 들어온 디자이너 전해원이라고 합니다.”

 

“하이고, 예쁘기도 하시지.

 

저기 3번 룸에 장 사장이 있으니까 들어가 계십시오. 전 화장실 좀…”

 

길 사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반면 장 사장은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저희의 잘못인 줄 알지만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중경도 내키지 않았지만 몹시 기분이 상한 듯 눈쌀을 찌푸렸다.

 

“어이 장 사장, 얼굴 좀 펴!”

 

길 사장이 중경의 눈치를 보며 의식적으로 손을 크게 놀려 장 사장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거야 그 휄라진 헤란지, 거기 직원 놈 잘못이지 어디 코지 잘못인가.”

 

“아, 근데 왜 똥 씹은 얼굴이야.”

 

길 사장은 한 발 더 나갔다.

 

약간 덜렁대는 그는 솔직하고 화끈했다.

 

뒤끝이 없었다.

 

하지만 장 사장은 좀 둔한 대신 꼼꼼하고 정확했다.

 

“장 사장, 내가 원단 밥 먹고 장 사장 실 밥 먹은 지 어디 한 두핸가?

 

코지처럼 수금 잘 해주는 회사가 또 어디 있었나?”

 

“그건 그런데…”

 

장 사장은 여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길 사장님 그리고 장 사장님, 실은 제가 계속해서 확인을 했어야 하는데

 

확인하지 못한 실수 때문에 오늘의 이런 사태가 빚어진 것입니다.”

 

해원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중경이 말릴 사이도 없었다.

 

어쩌면 그녀 덕에 일이 잘 풀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대리님께선 제 실수를 덮어주신 거구요.

 

이번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면 어렵게 잡은 직장을 잃게 됩니다.

 

요즘 취업하기가 얼마나 힘든 지 아시죠?”

 

해원은 세 사람의 눈치를 보며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허허 참…”

 

길 사장과 장 사장은 해원을 쳐다보며 안절부절 못했다.

 

중경도 서글픈 척해야만 했다.

 

“두 분 사장님 댁에 저만한 따님들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 딸도 요즘 취직 못해서 안달이오.”

 

시종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장 사장이 한탄하듯 내뱉었다.

 

장 사장의 말에 해원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하고 빛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장 사장님, 따님께서 취직을 했는데 따님 실수가 아니라

 

그 나쁜 사기꾼 놈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야 한다면 어쩌시겠어요?

 

큰 실수를 하긴 했지만 이 실수를 통해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중경은 두 사장의 얼굴을 보고 이미 판세가 기울었다고 느꼈다.

 

해원이의 KO승이었다.

 

두 사람을 만나러 나오기 전까지 고민하고 갈등했던 게 우습게 여겨질 정도였다.

 

“자자,장 사장, 그러자고. 사기꾼 같은 불란서 놈 때문에

 

한 아가씨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는 없지 않은가.”

 

“허~ 참,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어쩌겠는가.

 

자네를 내 딸이라고 생각하니 나도 맴이 괴롭구만.”

 

“그려, 장 사장 잘 생각했어. 옛날에 ‘비라’랑 일할 때 생각해 봐.

 

짧아야 3개월 짜리 어음이고 보통 6개월짜리 어음주지 않던가.

 

급할 때 30%도 넘게 깡해서 쓰지 않았나.

 

그거 치사하고 더럽다고 ‘코지’랑 손잡고 우리 언제 그런 속 썩어봤나?”

 

장 사장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원이 이번엔 장 사장 곁에 바짝 다가앉으며 장 사장의 팔을 끼었다.

 

“장 사장님 고마워요. 오늘 제가 두 분 사장님께 맥주 한잔 쏠게요.”

 

해원의 눈에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을 보고 장 사장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혹시 중국 거상 중의 한 사람인 호설암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 보셨어요?”


해원은 이제 길 사장과 장 사장 사이에 앉았다.

 

그녀는 술잔을 들면서 함께 건배를 청하기도 하고,

 

가끔 길 사장이나 장 사장의 손을 잡거나 기대곤 했다.

 

딸 나이의 세련된 여자가 살갑게 구니 두 사람은 신이 났다.

 

“그건 누고?”

 

네 사람이 생맥주를 만cc 정도 마셨는데 장 사장만 유독 얼굴이 붉었다.

 

해원의 애교가 낯 간지러웠던 듯했다.

 

“누군 누구예요? 청나라 말 중국을 주름 잡았던 중국 거상이지.”

 

“그런데?”

 

길 사장도 해원의 관심을 끄려고 애를 썼다.

 

중경은 그저 그런 그녀가 기특하고 귀여울 따름이었다.

 

“그 호설암이라는 사람 원래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 출신 사람이거든요.”

 

“장 사장이나 나나 마찬가지네.

 

혈혈단신으로 사업 이만큼 올려놓은 거야. 자수성가한 거라고.”

 

“사장님도 참, 누가 그걸 몰라요.”

 

해원이 길 사장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젊고 세련된 여자의 향기가 두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딸 같았는데,

 

술이 어지간히 들어가니 젊고 싱싱한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장 사장도 흥이 났다.

 

“그 호설암이라는 사람이 지금으로 치면 금융기관인 전장이라는 곳에

 

수금사원으로 일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아버지 죽자 가족들 부양도 그렇고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중경도 해원이가 거창하게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가 점점 흥미로웠다.

 

“워낙 성격이 꼼꼼한 사람이라 단 한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죠.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번은 엉뚱한 일을 저질러서 직장을 잃고

 

요즘 말로 술집 웨이터 생활을 하게 된 거예요.”

 

“꼼꼼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며?”

 

“끝까지 들어보세요.”

 

작고 조그마한 입술에서 조잘조잘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흘릴 수 없다는 듯 두 남자는 그녀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술기운으로 그녀의 입술이 더없이 예쁘고 촉촉해 보였을 것이었다.

 

“수금을 하다 보면 결손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랬는데 그런 집들이 어느 날 돈을 갚는 거예요.

 

회사에선 이미 결손으로 처리가 됐는데 말이에요.”

 

“호설암 그 친구가 슬쩍 한거구만.”

 

해원이 두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손가락을 들어 가로 저었다.

 

해원에게는 남자들 애타게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

 

한꺼번에 모든 걸 보여주지 않고 조금씩 안달하게 만들어 막상 모든 걸 보여주었을 땐

 

남자가 여자에게 휘둘려지게 만드는 그런 힘이 있었다.

 

“호설암이 결손처리된 돈 중에 운 좋게 수금이 된 돈이 얼마나 됐냐면요?

 

조금만 더 모으면 쬐그맣게 자신의 전장을 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더라구요.”

 

길 사장은 500cc 술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감질나게 하는 이야기에 목이 타고 젊은 여자의 애교에 더 이상 못 참았던 모양이었다.

 

“하이고, 주인한테 들켰구만.”

 

해원이 단숨에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니 두 남자가 먼저 답을 꺼내며 맞장구를 쳤다.

 

온갖 세파를 다 겪고 살아온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나 오줌 마려운 데 화장실 좀 다녀온 뒤에 마저 얘기하면 안 될까?”


길 사장이 아랫도리를 붙잡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얼른 다녀오세요.”

 

해원이 허락을 하자 길 사장이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경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느라 애를 먹었다.

 

“이 보게, 해원양”

 

“어머, 장 사장님도 참. 해원양이 뭐예요.

 

그냥 딸처럼 생각해서 해원이라고 부르세요.”

 

“그, 그럴까? 해원아.”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뭐 씹은 얼굴이던 장 사장의 입이 헤벌쭉 해졌다.

 

길 사장이 들어와 다시 해원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원아, 호설암이 그 돈을 어쨌냐고?”

 

“어, 장 사장 언제 말 텄어?”

 

“지금.”

 

“그럼 나도 말 터?”

 

“말 트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요.

 

두 분 다 제 아버지 뻘이신데 그냥 해원아 하고 부르세요. 앞으로도 쭈욱.”

 

두 남자는 싱글벙글했다.

 

중경은 기가 막혔다.

 

처음 해원을 데리고 나올 땐 걱정스러웠는데, 그게 아니었다.

 

해원 덕에 얼굴 한번 붉히지도 않고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송림과 채연 때문에 멀리 하려고 했는데 오늘 하는 예쁜 짓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한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호설암 그 사람이 말이에요.

 

그 돈을 왕유령이라는 사람한테 모두 투자한 거예요.

 

결손처리된 돈은 물론이고 자기가 그동안 모은 돈까지요.”

 

“뭐야 그럼, 왕유령이라는 사람 요즘 말로 펀드 매니저, 뭐 그런 사람이야?”

 

“아니에요. 당시 청나라엔 벼슬을 할 수 있는 길이 세 가지가 있었대요.

 

과거를 보거나 전쟁이나 재해 등에서 공을 세우거나 아니면.”

 

“아니면?”

 

박자가 척척 들어맞았다.

 

해원은 이쯤에서 두 남자의 팔을 꼈다.

 

장난기 가득 든 얼굴이었다.

 

“관직을 돈으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왕유령이라는 사람한테 돈을 줘서 관직을 샀다?”

 

“그게 아니에요. 호설암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에요.

 

바로 그 왕유령이라는 사람이 언젠가는 자신을 도와줄 거라고 믿고

 

그 사람 됨됨이를 보고 그 사람한테 돈을 몽땅 준 거란 말이에요.”

 

끝이 어째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주고 관직 산 놈이 뭔 힘을 쓴다고. 조선이 망한 것도 그거 때문이잖아.”

 

“글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호설암 그 사람 그 길로 전장에서 쫓겨났죠.

 

그리고 요즘처럼 왕유령이라는 사람이 어디 사는지 뭘 하는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설령 벼슬을 했다고 해도 그 사람이 모른 척 할 수도 있는 거구요.

 

그런데 왕유령이라는 사람이 호설암이 본 대로 보답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호설암이라는 사람이 아직도 중국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기까지

 

왕유령이라는 사람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말들 해요.”

 

“아하, 그러니까 우리가 바로 호설암이네?”

 

장 사장이 무릎을 탁 쳤다.

 

“맞습니다.”

 

해원이 박수를 쳤다.

 

“그래, 씨발 나도 투자한 거다. 해원이한테.”

 

장 사장이 해원의 어깨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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