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번데기 11
해외영업 1팀은 ‘코지’의 핵심 멤버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강 실장이 자신의 심복이 될만한 인물들을 골라 만든 팀이었다.
또한 해외영업 1팀은 이미 인프라가 단단하게 갖추어져 있어 사원들이 일하기도 편한 곳이었다.
모두 강 실장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중경을 비롯해 여섯 사람이 쿠바라는 맥주집으로 들어섰다.
“우리 꼭 미팅하는 기분입니다.”
해원과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박장수가 앞좌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박장수는 이미 결혼도 했고 경력사원으로 들어왔지만 직급은 중경보다 아래였다.
해외영업 1팀의 구성원이 남자 세 명과 여자 세 명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남자들 끼리 앉았고 여자들도 나란히 앉았던 것이다.
“그렇죠. 애들도 아니고.”
해원이 자신의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중경의 곁에 앉아 있던 박장수를 자신의 자리 쪽으로 몰았다.
“해원씨 김 대리님 좋아하는 거 아냐?”
박장수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안 돼요?”
해원이 의자를 바짝 당겨 중경 가까이 앉았다.
중경은 좌중을 둘러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생맥주가 나오고 훈제 요리가 나왔다.
술이 몇 순배 돈 뒤 박장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휄라사에 문제가 생긴 겁니까?”
다른 팀원들은 휄라를 그만 둔 영업사원에게 ‘코지’가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 지금 밝히는 게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경은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럼 뭐 김 대리님이 잘못한 것도 아니네요.
도둑놈이 마음 먹으면 열 놈이 지켜도 당한다는데 마음먹고
그렇게 시작한 놈을 어떻게 합니까.”
해원이 먼저 두둔을 했고 나머지 팀원들도 동조를 했다.
“그래도 내 잘못이 큽니다.”
중경은 목으로 넘어가는 맥주가 씁쓸했다.
“그래서 대리님 기분이 우울했구나.”
해원이 더 바짝 당겨 앉았다.
중경은 해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술잔을 기울이는 회수가 늘어나며 저마다 곁에 앉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느라
중경과 해원에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해원의 손이 자연스럽게 중경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중경은 그녀의 손을 들어 떼어내기가 난감해 그대로 두었다.
“나 만나는 여자 있거든.”
중경이 나지막이 해원의 귀에 속삭였다.
“송림 선배? 그래서요?”
해원이 삐쳤는지 톡 쏘듯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중경은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라와 있는 해원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머, 나의 실수. 제가 워낙 스킨십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요.”
‘올해 여자들이 많이 달라붙는다고 조심하라고 했는데…’
중경은 올해 초 송림을 기다리던 사주카페에서 본 토정비결이 떠올랐다.
송림을 기다리기 무료해 재미 삼아 보았던 것인데 올해엔 승승장구하지만
여자를 조심하라는 점괘가 나왔던 것이다.
2차로 옮긴 자리에는 전해원과 박장수 그리고 중경만이 남았다.
참치횟집이었다.
세 사람 앞에 붉고 흰 참치 살들이 수북하게 쌓인 접시가 나왔다.
해원이 중경과 장수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해원씨는 술이 센 모양입니다.”
“학교 다닐 땐 한술 했는데 지금은 별로예요.”
해원이 잔을 들면서 장수의 눈치를 봤다.
장수는 그런 해원의 눈짓을 모른 척했다.
중경은 오히려 장수가 고마웠다.
해원이 세련되고 매혹적인 여자이긴 했지만 지금 송림과 채연을 감당하기에도 힘들었다.
“장수씨는 집에서 마나님이랑 토끼 같은 자식들이 안 기다려요?”
해원이 기어코 노골적으로 자리를 피해달라는 말을 했다.
“장수씨 애들도 있었습니까?”
중경은 박장수의 얼굴로 보나 차림새로 보나 결혼을 했어도
아이들까지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대학에 들어가자 마자 만난 여자랑 2학년때 결혼했죠.
애가 생기는 바람에 말입니다.”
“그럼 지금 애들 나이가…”
“하나는 아홉 살이고 하나는 일곱 살입니다.”
“둘씩이나.”
해원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요즘은 둘이 기본이죠.
인구도 줄어들고 있는 판국에 나라도 애 많이 나아서 애국 해야죠.”
“짐승!”
해원이 입을 삐죽거렸다.
“애 둘 낳으려면 여자가 얼마나 고생인 줄 알아요?”
“낳다보니까 그렇게 된 거지.”
“그러면 해원씨는 몇이나 낳고 살 생각입니까?”
중경은 이야기의 중심이 자신에게서 장수로 옮겨간 게 고마웠다.
“많이 낳아야 하나면 좋죠. 안 낳을 수 있으면 안 나아도 좋고.”
“대를 끊겠다?”
장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거야 남자들 생각이지. 애 안 낳고 둘이 재밌게 잘 살면 되잖아요.”
“요즘 여자들 생각이 다 그래요?”
“다는 아니지만 결혼도 가능한 늦게 하려고 하고 아이나 가정 때문에
자신의 일이나 꿈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죠.”
“그럼 우리 마누라는 바보구만.”
장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해원이 손을 뻗어 장수의 손등을 쓸어주었다.
확실히 그녀는 스킨십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이해 받으려 하는 모양이었다.
“내 말도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 마누라 애들 위해 희생하겠다고 지금 호주로 애들 데리고 나가 있거든요.”
“기러기?”
중경이 그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서른도 안된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고루해요.”
“해원씨도 애 낳아 봐요. 안 그렇게 되나.”
중경은 툴툴거리듯 말하는 장수의 얼굴이 늙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오늘 선배네 집에 놀러 가겠다니까.”
해원은 술에 취해 중경의 집엘 놀러가겠다고 주정을 했다.
“김 대리님 해원씨 곤조가 보통이 아니네요.”
장수도 막무가내인 해원을 쳐다보며 웃고 말았다.
장수가 자꾸 쓰러지는 해원을 부축하며 말했다.
“모범 왔네요.”
중경과 장수는 해원을 억지로 택시에 태웠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해원은 몸을 가누지 못했다.
대학 시절 술을 잘 마셨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장수씨가 바래다 주십시오. 마침 장수씨도 같은 방향 아닙니까.”
“그, 그럴까요.”
장수가 해원을 밀치고 뒷좌석에 앉았다.
창 너머 안을 들여다보니 해원은 아예 장수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내일 뵙겠습니다.”
택시가 떠났다. 중경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 택시가 사라지는 걸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음, 우리 지금 강릉으로 가고 있거든. 내일 동트는 거 보려고.”
송림이었다.
마음대로 여행 다니며 살고 싶다는 게 올해의 소망이라고 말했었다.
“채연이는?”
“같이 있지.”
“언제 올 거야?”
“모레 쯤?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먹고 싶은 거?”
중경은 그녀가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징어나 먹고 싶은 생선 같은 거 말야.”
중경은 자신도 모르게 코끝이 찡했다.
우연찮게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건 없고?”
“채연이가 성산이라는 곳의 막걸리가 유명하다네. 자기 막걸리 좋아하나?”
“그래, 막걸리가 좋겠다.”
송림과의 통화를 끝내자 왠지 허전했다.
자신 있게 추진했던 일이 어긋난 때문인지도 몰랐다.
중경은 택시를 잡았다.
택시에 올라 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한 후 또 휴대폰이 울렸다.
송림이려니 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아저씨, 나야, 나!”
목소리는 낯이 익지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은경이, 이은경이 몰라?”
그래도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참, 내 쌍피라니까.”
아, 어린 소녀. 자신은 다 컸다며 어른 흉내를 내려고 했던 아이.
중경과 채팅을 하다 만났고 몇 차례 만나기도 했던 여자 아이였다.
겁없이 중경에게 달려 들었던 기억도 났다.
“지금 시간 돼?”
중경은 어느새 길들여진 모양이었다.
혼자 있을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중경이 쌍피를 만난 건 홍대 전철역 출구의 코코스 앞에서였다.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처음 중경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단발머리에 앳된 소녀만 찾았다.
하지만 그 기억은 1년 전의 것이었다.
“오빠!”
코코스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쌍피가 다가와 중경의 어깨를 쳤다.
중경은 그녀와 거리를 두고 한참을 쳐다봤다.
오빠라는 호칭도 낯설었다.
“나야, 나 은경이.”
“너 몰라보겠구나.”
“오빠도 멋있어 졌는데 뭘.”
“오빠…”
“싫으면 아저씨라고 불러줄까?”
그녀는 이제 소녀가 아니었다.
주름진 미니 스커트에 베이지 색의 스웨이드 부츠를 신고 청색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펑퍼짐한 청바지에 후줄근한 셔츠를 입고 다니던 때의 은경이가 아니었다.
“그 동안 애들 많이 꼬셨어?”
중경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은경이 중경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어디 가는데?”
“클럽, 그런데 커플 동반해야 입장이 되거든.”
“남자가 줄줄 따르게 생겼는데.”
“어떤 띨빵이 바람 맞히잖아. 내가 봐줘서 만나는 줄도 모르고.”
중경은 은경에게 이끌려 멕시코시티라는 클럽으로 들어갔다.
좌석이나 테이블 따위는 없는 스탠드 술집이었다.
들어갈 때 입장료로 맥주 두 병 값만 받았다.
클럽은 운동장처럼 넓었다.
그런데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오빠, 이런 데 처음이지?”
중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장처럼 넓은 클럽이었지만 홀 안은 열기로 후끈거렸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음악에 맞춰 제 멋대로 몸을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자꾸 어디로 들어가?”
은경은 대답하지 않고 중경을 중심으로 끌고 들어갔다.
“왔어?”
은경의 친구들인 모양이었다.
귀에는 물론 눈꺼풀에, 심지어 입술에까지 피어싱을 하고 있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제 머리색깔은 은경이 하나였다.
“우리 오빠.”
은경이의 친구들이 중경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좀 고색스럽네요.”
친구 중 하나가 중경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은경은 그렇게 말한 친구를 째려보았다.
중경은 웃고 말았다.
“고색스럽다니?”
중경이 은경의 귀에 대고 물었다.
예전엔 젖비린내가 났었는데 지금은 성숙한 여자의 향기가 났다.
“촌스럽다는 말이야.”
말을 나누기 힘들 정도로 음악소리가 커졌다.
사람들이 악을 쓰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중경은 바닥이 출렁거리는 기분이었다.
홀로 있는 게 싫어 은경이를 따라 나섰는데 여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음악이 오르가즘처럼 절정에 이르면 여기저기 서로를 끌어안고 입술을 빨거나 몸을 비벼댔다.
이번엔 중경이 은경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재미없어?”
“너무 시끄럽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나도 실은 재네들 재수 없어.”
은경도 쉽게 동조를 했다.
밖으로 나오니 숨통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째즈바나 갈까?”
“늙은이처럼 째즈바는 무슨 째즈바.”
“늙은 사람만 좋아하는 음악 아냐.”
“내가 가끔 가는 라이브 집이 있거든. 거기 가자.”
이번에도 결국 은경이 중경의 손을 잡고 끌었다.
예전엔 느끼지 못했는데 은경의 손은 섬뜩할 정도로 찼다.
겨울이라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가 중경을 데리고 들어간 곳은 보난자라는 라이브 카페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밴드가 공연 중이었다.
테이블 다섯 개에, 바를 갖추고 무대가 있는 작은 라이브 카페였다.
바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고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있었다.
좀 전에 다녀온 클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한적했다.
노래 소리만 아니었다면 너무 적적해서 뒤돌아 나갈 법했다.
“너도 이런 데 다니냐?”
중경으로서는 의외였다. 30대들이나 드나들 법한 라이브 카페였기 때문이다.
“오빠, 정말 촌스럽네. 노래 좋아하고 음악 좋아하면 됐지, 그게 어딘들 무슨 상관이야.”
은경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도 여긴 나한테도 너무 노땅스러운데.”
“언젠가 채팅하던 아저씨랑 여기서 만났거든.
난 사실 프로보다는 아마추어가 좋아.
제비도 아마추어 제비가 좋고 노래도 프로보다는 아마추어들이 부르는 노래가 좋아.
그러니까 오빠랑도 만났지.”
회사에서 우울했던 기분이 그녀를 만나면서 모두 풀어지는 듯했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홀안에 흐르는 노래는 김광석의 노래였다.
은경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중경은 그런 은경이 신기하기만 했다.
요즘 잘 나가는 젊은 가수들의 노래나 좋아할 법한 신세대이니 당연했다.
중경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새벽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내일 출근해야 돼?”
“출근해야지. 그런데 너 고등학교 졸업했지?”
“뚱딴지같기는…. 벌써 대학교 2학년인데.”
세월이 참 빨리도 흘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걸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곁에 있는 누군가가 변하는 걸 보아야 그제야 깨닫는다.
은경이처럼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 종업원이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어디 다녀?”
“내가 얘기 안 했나?”
중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대 역사학과”
중경은 노래부르는 가수에 정신이 팔려 있는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맹랑해 보였다.
한편으론 그런 맹랑함이 부러웠다.
그녀의 고등학교 성적표를 보았던 기억이 났다.
전교 수석도 했던 그녀였다.
“오빠, 오늘 집에 같이 가도 돼?”
느닷없이 중경을 쳐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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