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번데기 6
사장이 먼저 박수를 쳤다. 모두 열정적으로 그를 따랐다.
“사장은 감상적인 면이 많은 것 같애”
봉수가 진국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래서 어려울 거야.”
진국이 봉수의 말에 나지막이 답을 했다.
차 사장이 주요 간부 몇 사람을 소개하자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진국과 봉수는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속닥거렸다.
“어렵다니?”
“감원이니, 해고니 사장이 보통 괴로운 게 아닐 걸.”
“감상적이라… 그런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보는 거야?”
“그러니까 아직까지 누구도 해고된 사람이 없잖아.”
“오성에서 가만히 있을까?
오성도 전체 인원 중 20% 정도를 이미 감원했다고 하던데.”
“그러니 더 괴롭겠지.”
진국이 박수를 쳤다.
봉수도 초점을 잃고 있다가 덩달아 박수를 쳤다.
차 사장이 강 실장에게 금일봉을 건네주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새해에도 열심히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러분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사장이 다시 한번 깊이 허리를 숙여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우리 사장님, 너무 멋지지 않아요?”
애란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반짝였다.
“선배님도 너무 감상적이세요.”
모처럼 병달이 입을 열었다.
“내가 뭘요?”
“매사에 감상적이시던데요.”
병달이 입안으로 술을 탁 털어 넣었다.
장난기가 섞여 있지 않아 애란도 가볍게 응수를 하지 못했다.
조선족인 이인화 문제에 대해 그는 꾸준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다고 애란이 먼저 나서서 묻기도 겁이 났다.
만약 일이 잘못되었다면 어찌해야 할까 싶었던 것이다.
그 사이 사장은 회식 장소를 빠져나갔다.
다시 소란스러운 회식자리가 이어졌다.
“저도 한잔 주세요.”
어느새 채연이가 애란과 병달의 곁을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적당히 불콰했다.
“그러고 보니 병달이만 빼고 우리 일본 팀 다 모였네요.”
“선배님들도 참,
저도 선배님들 거기 계실 때 애란 선배 연락 받고 서류 조사하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저도 같은 팀이죠.”
병달이 잔을 들고 모두에게 건배를 청했다.
병달이의 투덜거리는 말투 때문에 다들 웃었다.
“아직도 그때 그 조항을 누가 누락시킨 건지 모르겠어요.”
일본에서 열렸던 박람회 때 매장 인테리어나 매장에서
각 회사별로 브랜드 연출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삭제되었던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아마 결과가 나빴다면 우린 진작에 감원 대상이 됐을 겁니다.”
애란이 소주를 마시곤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그래도 다들 행복하시네요. 저는 이제 며칠 안 남았습니다.”
채연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저는 계약직이잖아요. 이 달 말이면 계약이 끝나요.”
“채연씨가 전속 맺은 지 벌써 1년이 지났습니까?”
진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채연을 바라보았다.
회식자리는 시간이 지나며 하나 둘 씩 정리되어 갔다.
그 동안 광고 모델로 계약을 맺은 홍라라가 와서 각 팀의 장들에게
소주 폭탄주를 한잔씩 돌린 후 노래를 한 곡 뽑았고
원단 납품 업체와 재봉 하청 업체 직원들이 와서 금일봉 등을 강 실장에게 전하고 돌아갔다.
밤 9시가 지나자 사람들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주요 간부들이나 이사들은 자리를 뜬 상태였다.
“우리도 일어나죠?”
“우리끼리도 이렇게 모처럼만에 가진 술자린데 2차 갈까요?”
애란이 해외2팀의 팀장답게 2차를 제안했다.
“그러죠, 괜찮다면 우리 수준에 맞는 곳으로 가죠.”
병달이 먼저 일어날 태세를 갖췄다.
“우리 수준이라니?”
“아, 왜 같이 있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그런 자리도 많잖아요.”
“오랜만에 락카페나 라이브 카페나 가볼까?”
“선배님들 세월 가는 줄 정말 모르시네.
라이브 카페는 받아줄 지 모르지만 락카페는 이제 고딩들이나 받아준단 말입니다.
나는 혹시 또 모를까.”
병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모두 일어났다.
“너 오늘도 차 끌고 왔어?”
진국이 신발을 신으며 봉수에게 물었다.
“응.”
“어쩔라고?”
“그러게 말이다.
처음 차를 장만해서 그런지 회식 있는 줄 알면서도 끌고 오게 되더라.
내 평생 그렇게 비싼 재산을 가져본 적이 있어야지. 집에 두자니 걱정도 되고.”
“차 사면 처음엔 다들 그래.”
진국이 웃었다.
“내일 너 혼자 회사 나올 거야?”
“미쳤나, 휴일에도 회살 나오게.”
봉수는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일 오후 늦게 진국과 수영, 그리고 송화와 함께 동해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이 세우는 계획을 엿듣고 병달이 달라붙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인화를 데리고 바람이라도 쐬이고 싶다는 데 말릴 재간이 없었다.
“대리해라.”
“그래야겠지.”
회식 장소는 완전히 파장 분위기였다.
진국도 음성의 공장엘 다녀온 터라 차를 끌고 왔던 것이다.
결국 다섯 사람은 회사 주차장으로 향했다.
“선배님들, 혹시 조폭 떡볶이라고 들어봤어요?”
병달이 말했다.
“조폭 떡볶이?”
“먹자골목에 공영주차장 있잖아요.
거기에 떡볶이를 하는 포장마차가 하나 있는데 주인 남자 덩치가 좋거든요.
팔뚝에 문신도 있고 그래서 사람들 사이엔 그냥 조폭 떡볶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맛이 기가 막혀요.”
병달의 말 때문에 다섯 사람은 괜히 공영주차장쪽으로 길을 택해 걸었다.
장사를 하는 남자의 모습도 사실 궁금했다. 병달의 말이 거짓이 아닌 모양이었다.
병달이 말한 포장마차 앞엔 남녀들로 득시글거렸다.
주인 남자는 한 겨울인데도 반팔 셔츠로 떡볶이를 뒤집고 있었다.
병달의 말대로 문신도 보였다.
다섯 사람은 떡볶이를 시키고 오뎅 국물을 마셨다.
날이 갑자기 추워진 덕에 떡볶이도 오뎅 국물도 달고 맛있었다.
“대리 두 명 부르셨지요?”
진국과 봉수가 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나와 회사 앞 도로변에 차를 세워두고 대리기사를 불렀다.
근방에 술집이 많아 그런지 대리 기사는 5분만에 나타났다.
“어디로들 가실 겁니까?”
“어디로 갈까?”
“일단 대리를 불렀으니까 좀 멀리 가죠.”
병달이 대뜸 끼어들었다.
애란은 그가 팀의 막내라는 이유로 그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럼 대학로로 갑시다.”
진국의 차에 채연이 탔다.
봉수의 차엔 애란과 병달이 탔다.
“잘하면 그냥 넘어가겠어요.”
“뭐가?”
“감원 말이에요. 아직까지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면 말이에요.”
“그러게.”
봉수는 병달의 말을 들으며 곁눈질로 대리기사를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낯이 익었다. 낯이 익은 정도가 아니라
한때 무척 친했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그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대리 기사는 봉수의 시선은 무시한 채 앞만 보고 운전했다.
“저 혹시…”
봉수가 대리기사에게 말을 건 순간 그가 고개를 돌려 봉수를 쳐다봤다.
그리곤 미소를 지었다.
그는 봉수의 대학 선배였다.
봉수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 그는 4학년이었다.
뜻이 맞아 어울렸고 술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림을 놓고 밤새도록 논쟁을 펼치기도 했던 사이였다.
“형…”
봉수는 그만 자신이 그에게 알은체 한 게 미안했다.
“잘 지냈냐?”
“서로 아는 사이세요?”
뒷자리에 앉아 있던 애란이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저랑 친하게 지냈던 선배님이에요.”
봉수는 다시 앞을 주시하고 있는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홍대 쪽에 대리 나올 때는 늘 조심했는데 결국 너를 이렇게 만나는 구나.”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디자인 회사를 한다고 들었는데.”
“요즘 불경기잖아.”
“그래도 그렇지. 대리까지 할만큼…”
봉수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 역시 입을 다물었다.
차가 혜화동 로타리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그가 입을 열었다.
“정말 세상 좁지? 그나 저나 정말 오랜만이다. 한 2년 됐나?”
앞서 가던 진국의 차가 소극장 골목으로 들어갔다. 봉수의 차도 뒤를 따랐다.
“오늘 시간 되세요?”
봉수는 문득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헤어지면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일행이 있잖아.”
“그림 그리셨다면 뭐 같이 있어도 무방합니다. 다 비슷비슷한 사람들인데요.”
병달이 애란의 눈치를 보며 그에게 합석을 제안했다.
봉수는 돌아가겠다는 선배를 붙잡았다.
병달과 애란도 거들었다.
진국 역시 봉수와 어울려 다니며 몇 번 만나 술을 마신 적이 있었던 터라 반가와 했다.
결국 여섯 사람은 지하에 있는 보난자라는 라이브 카페로 들어갔다.
병달이 길을 잡아 안내를 했다. 그의 친구가 주인이었던 것이다.
“괜히 객이 끼어서 분위기 흐려 놓는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정말 괜찮죠?”
봉수가 애란과 채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무렴요.”
“형, 너무 의기소침하지마. 옛날엔 안 그랬잖아.”
진국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제야 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무대에서 노래와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락커나 프로라기 보다 아마추어들 같아 보였다.
“직장인 밴드들이야. 자기들 좋아서 하는 거지.”
병달의 설명에 봉수와 그의 선배가 유독 연주하는 그들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잠시 후 생맥주와 훈제 오리가 안주로 나왔다.
“훈제 오리가 다른 곳에서 먹던 거랑은 좀 다른데요.”
애란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너도 나도 젓가락을 들고 안주를 집어먹었다.
봉수도 오리의 맛이 달착지근하면서도 매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에 착 달라 붙는 느낌이었다.
“병달이 친구가 누군지 음식 솜씨 하나 죽이는데.”
진국이 병달을 칭찬했다.
“제 친구 솜씨가 아니라…”
병달이 주방 쪽을 쳐다봤다.
마침 머리를 한 갈래 질끈 동여맨 여자가 안주 접시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이인화였다. 진국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애란과 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인화씨의 길림성 오리 솜씨입니다.”
병달이 설명을 할 때 이인화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그리곤 바쁘다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여기로 오자고 한 거군요.”
채연이 괜한 질투를 느끼고 입을 삐죽거렸다.
봉수의 선배는 그저 묵묵히 잔의 술을 비웠다.
봉수도 괜히 그를 붙잡았다는 후회가 들었다.
“형네 회사도 어려운 거야?”
진국이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말머리를 돌렸다.
“다들 그렇지 않냐? 너희들 ‘코지’에 들어갔다는 얘긴 들었다.”
“형도 참 연락 한번 하지 그랬어.”
“바빠서 연락을 못했지.”
그는 몹시 우울해 보였다.
봉수는 그를 비록 2년만에 보는 것이지만 한 십 년은 폭삭 늙어버린 듯했다.
그가 왜 대리 기사 일을 하는지 선뜻 물어볼 수도 없었다.
“너희들 처음에 봤을 때 괜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더라.”
그가 나이 든 사람답게 어색함을 먼저 풀어버렸다.
“형, 참. 애들은?”
“두 놈 다 잘 있지.”
“둘이었나?”
봉수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는 대학 졸업하기 한 해 전에 결혼을 했다.
그 전에 동거를 하면서 낳은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두 놈 다 한국에 없어.”
그는 체력이 약해진 때문인지 빨리 취했다.
“봉수야, 진국아.”
봉수와 진국이 그의 곁에 앉았고 채연과 애란 그리고 병달이 마주 앉아 그를 쳐다봤다.
무대의 밴드는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너희들, 나처럼 살려면 결혼하지 마라.”
“형,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그가 손수 자신의 빈잔에 술을 따르려 했다.
봉수가 생맥주 병을 들어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실은 애들 두 놈 다 캐나다에 가 있거든요. 한국엔 나 혼자고.”
“유학 보낸 거예요?”
“유학? 그렇지, 유학. 마누라가 한국에선 도저히 뭘 못 가르치겠다는 거야.
우리 나라 교육 환경이 정말 안 좋긴 하지만 그래도 수십만 명이 교육을 받는 곳 아니냐. 그
런데 우리 마누라는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해주겠다며 두 놈을 끌고 나가더라.”
그가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형수님이 오죽했으면 그랬겠습니까? 저도 그 심정 알 거 같아요.”
“저도 시집 가면 한번쯤 애들 유학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는데요.”
애란이 분위기를 맞추느라 말을 거들었다. 그러자 그가 손사래를 쳤다.
“가족이 같이 가면 모를까,
남자는 한국에서 돈 벌고 부인과 자식만 내보낼 거면 아예 보내지 말던가.
그럴 여유나 자신이 없으면 아예 결혼을 하지 말던가,
그것도 안되면 결혼은 하되 아이를 낳지 말던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애란을 똑바로 쳐다봤다. 무안해진 애란이 술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런 말이 어딨어? 보통 사람들처럼 애 낳고 그냥 저냥 사는 거지.”
봉수는 그의 그런 모습이 불만이었다.
누구보다 당당했고 어느 누구보다 실력이 좋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도 결혼해서 애 낳아 봐라. 마누라가 애들 데리고 유학 가겠다고 해 봐라.
그 순간부터 남자는 정말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하고 만다.
내가 왜 대리를 하는 줄 아냐?
경기가 어려워지니까 일은 안 들어오지, 마누라는 돈 붙이라고 난리지.
투자하느라 여유자금은 없지. 어쩌겠냐?
도둑질을 할 수도 없고 회사 운영하면서 노가다를 뛸 수도 없잖냐.”
봉수는 목으로 넘어가는 술이 썼다. 그는 기러기였다.
“나는 기러기야.
너희들은 아직 결혼 전이고 애들 낳기 전이니까 모르겠지만
내 친구들 중엔 상당수가 기러기야.
얼마 전엔 애들 보살피라고 딸려 보낸 마누라가 바람이 나서
이혼하자는 전화를 받았다는 친구랑 서로 붙잡고 울기도 했다.
이건 가정이 아냐,
애들 교육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어서 쓰겠냐?
우리들 유학 가지 않고도 이 땅에서 훌륭하게 성장해 오지 않았냐?”
말을 하는 도중에 그는 눈이 풀려 제대로 뜨지 못했다.
“내가 괜한 자리에 와서 횡설수설해서 죄송합니다.”
그가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흔든 뒤 애란과 채연을 쳐다보며 사과를 했다.
“아니네요.”
“두 여자 분도 만약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뒤에 유학을 보내고 싶으시다면
남편과 같이 가지 않은 다음엔 유학 생각도 하지 마세요.
남자는 남자 대로 여자는 여자 대로 외로움에 지치고 돈벌이에 지치고
애들 뒤치닥거리에 지치고. 인간의 삶 그리 길지 않아요. 자신을 위해 살아요.
자신과 한때 사랑했던 상대를 위해 살아요.”
그는 그 말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비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