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번데기 5
박 과장이 보자기를 풀었다.
안엔 다시 나무로 만든 상자가 단단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차 실장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저희 당숙 어른께서 산엘 좀 다니시거든요.”
“산?”
차 실장은 여전히 건성으로 들었다.
박 과장은 꼼꼼하게 붙여 놓은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얼마 전에 꿈을 꾸시곤 산엘 가셨는데 아 글세, 귀한 물건을 캐셨지 뭡니까?”
박 과장은 몸을 낮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TV에도 나오셨는데 혹시 보셨나 모르겠습니다.”
박 과장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자 차 실장이 몸을 앞으로 조금씩 기울였다.
“그럼 혹시?”
“네, 실장님이 상상하는 게 맞을 겁니다.”
박 과장이 나무 상자의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뚜껑이 열리자 진한 삼내가 물씬 풍겨 나왔다.
“사, 산삼!”
차 실장은 소리를 지르려다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곤 뒤를 둘러보았다.
주방에서 일하는 여자가 설거지를 하는 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서, 서재로 들어가세.”
차 실장은 나무 상자를 들고 박 과장의 손을 잡아 끌었다.
차 실장의 서재도 으리으리했다.
체리톤의 장식장이 두 면을 채우고 있었고 한쪽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데
북한산 정상이 한눈에 올려다 보이는 전망을 지니고 있었다.
거실과 마찬가지로 작은 응접탁자와 소파가 있었다.
“그래 이게 정말 산삼이란 말인가?”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여는 차 실장의 손이 떨렸다.
분명 삼이었다.
어린 남자와 어린 여자를 연상시키는 모양새의 두 뿌리 산삼이었다.
차 실장은 입을 벌린 채 닫을 줄 몰랐다.
“나 같은 문외한이 봐도 한 눈에 딱 산삼이란 걸 알아보겠나. 그려.”
차 실장의 눈에 흥분이 가득했다.
“박 과장 그런데 왜 이걸…”
“실장님도 왜긴요.
당연히 회사 발전을 위해 두루두루 수고하시는 실장님이 드셔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늦은 밤 실례를 무릅쓰고 달려온 거 아닙니까.”
“정말로 나한테 주는 건가?”
차 실장의 입이 찢어졌다.
“몇 년쯤 된 거라고 하던가?”
“한 놈은 백년쯤 됐고 한 놈은 칠십년산이랍니다.”
차 실장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잠시 차 실장은 나무 상자의 뚜껑을 천천히 닫고 박 과장에게 내밀었다.
“실장님, 마음에 안 드십니까?”
박 과장이 깜짝 놀라 차 실장을 바라보았다.
“산삼 싫다는 놈이 대한민국 천지에 어디 있겠나?
내 일단 박 과장의 의중을 명확히 모르니 일단 이야기부터 들어야 하지 않겠나?”
차 실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가 의중은 무슨 의중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올 연말 가기 전에 회사 감원이…”
차 실장이 느닷없이 다가와 박 과장의 어깨를 쳤다.
아니, 이 사람아,
내가 박 과장을 붙잡아야 할 판인데 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했는가?
이런 거 아니어도 다 알아서 처리할 건데 말야.”
차 실장은 슬그머니 나무 상자를 다시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저도 실장님께서 저를 생각해 주신다는 걸 알기에 가만히 있는 것이
부하 직원된 도리가 아닌 거 같아,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성의로 준비한 겁니다.
마침 당숙어른께서 또 흔쾌히 내놓으셨구요.”
“허허, 참. 그 당숙어른이라는 분 정말 화통 하신 양반이시구만.”
“시골에서 소문이 자자하시죠.”
‘뇌물을 주고 받는 자리는 빨리 떠라.’
그게 박 과장의 지론이었다.
만원짜리 상품권이라 하더라도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박 과장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 그래. 밤도 늦었느니 사모님이 걱정하시겠네.”
차 실장이 일어나 대문 앞까지 따라 나왔다.
반 팔 셔츠에 반바지 차림이라 추울 법도 한데 차 실장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박 과장, 나만 믿게. 나야 박 과장 없으면 허수아비 아닌가.
그런 내가 박 과장 아니면 누굴 붙잡겠나. 안 그런가?”
“감사합니다.”
박 과장은 다시 한번 고개를 깊이 숙여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박 과장 저걸 어떻게 먹는 건가?”
차 실장이 박 과장의 귀 가까이 대고 물었다.
“당숙어른 말로는 그냥 잔뿌리 하나 남기지 않고 생으로 씹어 드시라고 하셨습니다.”
“쌩으로 말이지?”
“네, 쌩으로.”
차 실장은 서재에 두곤 온 산삼이 걱정되는지 부리나케 집안으로 들어갔다.
박 과장은 한동안 성채와 다를 바 없는 차 실장의 집을 올려다 보았다.
옷깃을 아무리 여며도 어디 구멍이라도 난 듯 찬바람이 밀려들었다.
박 과장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박 과장은 문득 학교가 떠올랐다.
“신촌역으로 갑시다.”
박 과장은 차창 밖에서 흘러가는 불빛들을 맥없이 쳐다봤다.
아무래도 뭔가 단추를 잘못 채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다시 채우기에는 늦었다는 후회도 일었다.
‘뭐든 시작하기엔 늦은 건 없다? 하지만 그러기에 나는 너무 많이 살아 버렸어.’
택시는 신촌역 사거리에 박 과장을 부려놓았다.
박 과장은 학창 시절을 자주 다녔던 철로 변의 선술집을 찾아갔다.
차 실장에게 산삼이라고 속인 장뇌를 사느라
적금을 깬 걸 아내가 알면 한바탕 난리가 날 터였다.
술이라도 마시고 들어가면 아내가 사정을 이해해줄 것도 같았다.
철길을 머리에 이고 있는 ‘촛불’이라는 술집은 여전했다.
주인도 바뀌고 실내 인테리어도 바뀌었지만 여섯 테이블 있는 작은 공간은 그대로였다.
“어? 과장님!”
누군가 박 과장을 알은 체했다.
박 과장이 어묵매운탕에 소주를 시켜 막 첫 잔을 들이키려고 할 때였다.
“자네들이 여긴 어쩐 일이야?”
박 과장이 올려다본 사람들은 진국과 봉수 그리고 애란이었다.
봉수는 박 과장의 잔에 술을 따랐다.
박 과장은 이미 취해 눈이 풀려 있었다.
그런데도 마다하지 않고 술을 받았다.
“뭔가를 시작하기에 내 나이는 너무 늦지 않았나?”
“그럼요, 박 과장님이 뭐 늙었나요?”
진국은 금방이라도 박 과장의 어깨를 두드릴 태세였다.
“그래, 난 아직 안 늙었어. 아직 30년은 더 일할 수 있어. 아무렴.”
한동안 술잔만 기울이던 박 과장이 술에 취하면 간간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애란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봉수와 진국은 박 과장을 혼자 둘 수 없을 것 같아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네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박 과장은 그 말을 끝으로 테이블 위로 폭 고꾸라졌다.
“이거 난감하게 됐네.”
“난감할 거 뭐 있냐? 우리가 계산하고 집에 모셔다 드려야지.”
진국의 말에 봉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박 과장을 부축해선 같이 택시에 탔다.
“그런데 박 과장님이 왜 여기서 술을 먹지?”
봉수가 창문에 머리를 자꾸 찧는 박 과장의 얼굴을 바로 잡아주며 진국에게 물었다.
“술이야 어디서 마시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내가 알기로 박 과장님 Y대 졸업했을 거야.”
“옛날 학창 시절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 박 과장님 좀 쓸쓸해 보이지 않았냐?”
“그러게, 매일 여자 모델 다리나 훔쳐보던 양반인데… 오늘은 좀 그 분위기랑 달라”
진국과 봉수는 곤하게 잠든 박 과장을 바라보았다.
횡설수설하는 박 과장의 말을 종합해서 그의 집이 개봉동이라는 걸 알아냈고
한 연립주택 앞까지 그를 번갈아 엎다시피 해서 집 앞에까지 이르렀다.
“아, 이게 무슨 고생이냐.”
“그러게 말이다.
박 과장님 술 쎈 줄 알았는데 우리를 보자마자 취한 거 같아.”
“혹시, 연말 가기 전에 감원 발표가 있다는 데 그거 때문에?”
봉수가 진국의 등에 업힌 박 과장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쳐다봤다.
“할려면 빨리 빨리 해야지. 사람들 피를 말린다 말려.”
진국이 헉헉대며 말을 받았다.
“이 집이지?”
봉수가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저 여기가 박 과장님 댁이죠?”
문이 걸림쇠가 걸린 채 열렸다.
“맞는데요.”
“술을 좀 과하게 드셔가지구요.”
문이 닫혔다가 다시 활짝 열렸다.
박 과장의 부인인 듯한 여자가 나왔다.
“어이구 또 술이야!”
박 과장의 부인이 그를 인계 받았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차라도 한잔하고 가세요.
이이 사람 그냥 보냈다간 난리가 나요.”
진국과 봉수는 어쩌지 못하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진국은 봉수의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었다.
“너 그래가지고 언제 담배끊을래.”
“지금 담배 안 피게 생겼냐.”
봉수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난 박 과장이 그렇게 어렵게 사는 줄 몰랐다.”
박 과장은 집으로 들어간 뒤 희한하게도 술에서 깨어났다.
자신의 두 아들을 깨워 봉수와 진국에게 인사를 시키고 차를 대접했다.
박 과장의 집은 협소했다.
나름대로 성실하고 요령도 피우고 이재에 밝은 줄 알았기에 봉수나 진국은
그가 어느 정도는 갖춰놓고 살 거라고 짐작했었다.
하지만 그의 집은 낡은 다가구의 전셋집이었다.
거실에 세 사람이 앉으니 비좁을 지경이었다.
박 과장이 술에서 깨어났지만 마음은 술에 완전히 풀어진 상태였다.
‘나, 이거 전셋집이야. 그 동안 번 돈이 죄 어디 갔나 모르겠어.’
그의 부인도 남편이 부하 직원들에게 한탄을 하기 시작하자 다소곳이 앉아 그의 말을 들었다.
‘큰놈이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구멍이 생겼지.
이제 그런 소리 해봐야 뭐 하겠냐만 그 놈 밑으로 돈 많이 들어갔어.
뭔가를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말이야.’
박 과장은 그 뒤로도 횡설수설 말이 많았다.
봉수가 진국의 옆구리를 찔러 겨우 일어나 나올 수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돈 한푼 안 낸다고 타박할 게 아니다.”
봉수는 꽁초를 발로 비벼 껐다.
그 동안 박 과장에게 쌓였던 미움이 한 순간에 녹아버린 듯했다.
“실력도 있고 아부도 잘하는 사람이 왜 아직까지 과장인지 모르겠어.”
“그러게 말이다. 차 실장이 챙겨주지 않는 거지.”
“차 실장은 이번에 살아 남을까?”
“차 실장이야 오성의 먼 친척 된다며?”
“그래도 오성 회장은 인사문제에 있어서는 칼이라고 하던데.”
“그거야 다른 사람들 얘기지. 설마 자기 친척이나 가족들한테까지 그러겠어.”
거리는 자정이 가까워서인지 한산했다.
연말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 경기가 어렵다는 뜻일 터였다.
그나마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종종걸음을 쳤다.
밤하늘을 밝힌 십자가나 크리스마스 장식 불빛들만이 연말 분위기를 냈다.
두 사람은 개봉동 사거리에서 각자 택시를 타고 헤어졌다.
봉수는 택시를 기다리며 진국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언젠가 스스로 밝힐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봉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송화구나.”
“오빠, 차 샀어?”
“너랑 같이 가기로 했잖아.”
“그럼 우리 내일 갈까?”
“그래. 그리고 우리도 겨울 여행 한번 가자.”
“그런데 우리끼리만 가?”
“그럼 누구랑?”
“진국이랑 수영인?”
“진국이가 월차까지 내면서 따라갈까?”
“월차는 무슨 월차 연말 공휴일 이용해서 가. 오빠 회사에서 찍히는 거 싫어.”
봉수는 통화를 끝내고 속주머니를 뒤졌다.
아침 집에서 들고 나온 통장이었다. 하루종일 차를 살까 망설였던 것이다.
문득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쯤은 나를 위해서 살아도 되는 게 아닐까.’
모처럼 ‘코지’의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음식점의 건물을 통째로 빌려 회식을 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다들 기분이 뒤숭숭했다. 보통 부서별로 회식을 하거나 했던 게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전 직원의 회식은 사실 인원 때문에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전체 회식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또한 회식 자리에 빠지는 날엔 인사고과에 불이익을 준다니 빠질 사람도 없었다.
머잖아 감원이 있을 거라는 소문도 사람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회식 자리는 회식 자리였다.
박 과장은 지난 일은 까마득하게 잊은 듯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술청을 넣고 잔을 받으며 돌아다녔다.
한 명이라도 더 눈 도장을 찍으려는 듯 그는 술잔 기울인 사람마다 눈을 맞췄다.
봉수와 진국은 그런 그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차 샀다며?”
진국이 봉수를 쳐다봤다.
“나만 바보처럼 사는 거 같아서 그냥 중고로 샀어.”
“뭐?”
“싼타페 중고.”
봉수는 오늘도 차를 몰고 나왔다.
회사 건물의 주차증을 차의 앞 유리창에 붙일 때 자신의 생에서
뭔가 새로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돈 많네.”
봉수의 눈에는 진국이 너스레를 떠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차를 장만하고 나니 기분은 좋았다.
신정 연휴 때 그 놈을 몰고 고향엘 갈 생각을 하니 적잖이 흥분이 되기도 했다.
“직장 잡고 차 사고 집 장만하고 장가가고 애들 낳고… 그러다 보면 우리 인생도 끝나겠지.”
진국이 술잔을 털어 넣으며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진국씨는 어느 때 보면 고리타분해요.”
마주 앉아 있던 애란이 입을 삐죽거렸다.
“원래 고리타분한 놈입니다.”
병달이는 묵묵히 술잔만 비웠다. 갑자기 좌중에서 박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차 사장이 회식 장소로 들어서고 있었다.
강 실장이 일어나 차 사장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맥주 잔을 들고 숟가락으로 잔을 두드렸다.
맑은 종소리가 났다. 좌중을 집중 시키는 그의 버릇이었다.
“자, 자. 사장님께서 오셨으니 한 말씀 듣겠습니다.”
강 실장이 차 사장을 직원들 중심으로 끌고 갔다.
“난 본래 연설 같은 건 체질에 맞지 않지만
그래도 전체 회식 자리니 짧게나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차 사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직원들 모두 귀를 기울였다.
“다들 아시겠지만 지금이 IMF 때보다 더 경기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 직원들의 노력으로 지난해보다 매출 실적이 20%나 상승을 했습니다.
그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해외 1팀과 해외 2팀의 노고에 감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차 사장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강 실장 곁에 앉아 있던 중경을 비롯한 해외 1팀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애란을 비롯한 해외 2팀 직원들도 일어났다.
“박수를 부탁합니다.”
요란하게 박수소리가 터졌다.
“다른 분들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수고를 하셨다는 걸 압니다.
자, 우리 자신을 위해 박수를 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