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번데기 4
휴대폰이 꺼져 있다던 진국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봉수가 있는 곳까지 부리나케 나왔다.
홍익대 근처 먹자골목에서 술을 마셨으니
북촌 어디에 살고 있다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휴대폰을 왜 꺼 놓구 그래?”
수영이 잔뜩 삐져 툴툴거리는 바람에 진국이 퉁바리를 맞았다.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랬어, 그러니까 수영이 니가 이해 좀 해 주라.”
진국이 붉어진 얼굴로 너스레를 떨었다.
봉수는 그런 진국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봉수는 초저녁에 있었던 일들을 잊고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파장 무렵이었다.
친구들은 먼저 자리를 뜨고 송화와 수영 그리고 진국과 봉수만 남았다.
“요즘 오빠네 회사는 감원 안 해?”
두 테이블쯤 떨어진 곳에서 앉은 회사원들의 화제가 감원인 듯했다.
회사를 떠나는 동료를 위로하는 자린 듯 분위기가 침울했다.
송화도 그 테이블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 듯 갑작스런 질문이었지만 극히 자연스러웠다.
“조만간에 하겠지.”
진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새로 주문한 ‘모듬 참치’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어디 은행인지 모르겠는데 이번 연말 가기 전에 1,500명을 감원한다던데.
그러면 그 사람들 다 어디 가서 뭘 해 먹구 살아?”
수영이 위로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의 휑한 빈자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냐.”
진국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무튼 진국 오빠는 이상하다니까.”
“뭐가?”
“바짝 긴장해 있어도 살아 남을까 말까 하는데. 오빤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봐.”
수영의 말에 진국이 사례가 들었는지 콜록거렸다.
“나라고 별 수 있겠냐.
그런다고 부정적인 생각을 해봐야 나만 피곤하지.
그래서 아예 생각 안 하는 거야.”
“정말 태평이셔.
우리도 머잖아 졸업인데 세상이 이래 가지고 어디 취직이라도 하겠어.
더군다나 우린 여자잖아.”
송화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우리 선배들도 겨우 20%만 취직이 됐대. 나도 이 참에 고시나 준비할까?”
“소설 쓴다며?”
“소설 써 가지고 밥 벌어먹기 힘들겠어. 요즘 사람들 누가 책을 봐야 말이지.”
“하긴…”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던 진국이 한숨을 내쉬며 송화의 말에 동조를 했다.
“그래도 소설 쓰는 사람들 많더라. 책 잘 팔리는 사람들도 많고.”
“그건 모르는 소리야.
소설 쓰는 사람들 중에 한 1% 정도 자기 소설 써서 입에 풀칠하고 살 수 있을까 말까 할걸.”
“그럼 나머지는?”
“그냥 저냥 사는 거지.
결혼한 사람이면 마누라한테 뜯어먹고 결혼 안 한 사람은 돈 좀 있는 친구들 뜯어먹고 살고.
그런 넉살도 없는 사람은 그냥 궁핍하게 사는 거야.”
“그럼 그 1%에 들기 위해 죽어라 글쓰는 거야?”
수영이 세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 시시한 얘기하지 말자.”
봉수가 진국의 눈치를 보았다. 진국의 표정이 침울해 보인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하루에 한 시간 나도 택견 좀 가르쳐 주라.”
봉수가 진국에게 애교를 부리듯 코 맹맹한 소리로 말했다.
“그냥 도장 같은 데 가서 배우면 돼.”
진국은 시무룩하게 말했다.
“오빠, 택견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수영이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봉수를 쳐다봤다.
“그게 말이지…”
“너 무슨 말하려고.”
진국이 손으로 봉수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봉수는 술김에 불어버린다는 식으로
이인화를 구출하던 일을 낱낱이 풀어놓았다.
“정말이야?”
수영이 진국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진국이 고개를 떨구었다.
“세 사람을 한 순간에 때려눕히는데 이연걸이 따로 없더라니까.”
“오빠, 정말이냐고?”
수영이 재차 진국에게 물었다.
“그냥 그게 그렇게 됐어.”
진국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술잔을 들고 조금씩 술을 흘려 넣었다.
“그런 거면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녀야지.
그래서 훌륭한 시민상 같은 거 받아야 하는 거 아냐?”
“안돼.”
진국이 술을 탁 털어 넣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투에 세 사람이 깜짝 놀랬다.
“중국 삼합회 놈들이 귀에 들어가면 큰일나지.”
봉수가 눈짐작으로 진국의 의도를 설명했다.
“괜히 한 순간 만용으로 고기밥이 될 수는 없는 일이잖아.”
진국도 장난스럽게 넘어가려고 과장되게 손을 저어가며 설명했다.
“걔네들이 무방비였으니까 당한 거지.
준비를 하고 있었으면 택도 없는 소리야. 봉수야, 안 그러냐?”
“그, 그렇지.”
진국은 자리를 모면하려 그랬는지 종업원을 불러 술과 안주를 더 시켰다.
“아직도 많은데…”
“오랫만에 너희들 만났는데 먹고 죽지 뭘. 그리고 아직 수고비도 못 줬잖아.”
“회사에서 알아서 하는 거지, 왜 오빠들이 신경을 써.”
“지금 감원 바람이 한참인데, 괜히 말 잘못 꺼냈다가 감원대상 1호로 올라갈라.”
진국은 예전의 모습을 찾았다.
과장되고 허둥대는 모습으로 돌아가자 진국다웠다.
하지만 봉수는 그런 진국을 보며 언젠가 입사수련회 교육과정에서 읽었던
호설암이라는 중국 거상을 떠올렸다.
쓸데없는 망상이고 묘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진국을 보면 그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과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늘 넉넉하게 타고난 듯했다.
하지만 호설암은 비천한 출신하고 가난한 출신이었다.
네 사람은 거나하게 취해 노래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봉수는 서서히 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중국을 예로 들어 빈부 격차가 심하다는 말을 병달이가 자주 했는데 자꾸만 그 생각이 들었다.
진국은 상해에 사는 모 갑부의 아들이고 봉수 자신은 시골에서 상해로 짐 싸들고 올라가
하루하루를 전전하는 노숙자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연말이 되면 더 씁쓸하고 우울했다.
“오랜만에 여기 와 본다.”
송화가 작업실로 들어서며 봉수를 바라보았다.
작업실은 천장이 높아 싸늘했다.
대학 시절에도 한 겨울에 들어오면 몸을 펼 수 없을 만큼 추웠다.
“조금만 기다려라.”
봉수는 석유난로에 불을 지폈다. 불꽃이 화르르 살아났다.
난로를 앞에 두고 봉수와 송화가 서로 의지해 앉았다.
“오빠는 그림은 정말 손 놓은 거야?”
송화는 느닷없이 그림 이야기를 했다.
“그림 같은 거 그려서 뭐하게. 내가 천재적인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데.”
“오빤 가을을 타는 게 아니라 겨울을 타나 봐.”
“겨울…”
송화의 말대로 봉수는 정말 겨울을 유독 쓸쓸하게 느끼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봉수에게 겨울은 늘 쓸쓸했다.
석유를 살 돈이 없어 추운 화실에서 손이 곱아 제대로 붓을 잡지 못했던 날들이 많았다.
그럴 때면 괜히 우울해졌고 쓸쓸했다.
“너는 정말 소설만 쓰고 살 거니?”
“별로 다른 희망도 없는데 뭘.”
“그게 또 무슨 소리야. 방송작가도 있고 회사 취직해서 카피라이터를 할 수도 있잖아.”
“그건 먹고 사는 데엔 지장이 없겠는데 내 꿈은 아니잖아.
그렇다고 취직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방송 작가는 뭐 아무나 되나.”
“그러니까 노력을 해야지.”
“꼰대 같은 소린 여전하네.”
송화가 미소를 지었다. 봉수는 웃고 말았다.
자신이 그런 말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봉수는 난로 속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불꽃처럼 그림에 미쳐있던 시절이 거짓말 같기만 했다.
디자이너로 회사를 다니고 있긴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속옷 디자인하는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꿈과 현실 속에서 괴로워할까?’
봉수는 송화의 어깨 위에 팔을 둘렀다.
뭔가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우리 여행갈까?”
“언제?”
“뭐 당장이라도 가지 뭐.”
봉수의 말에 송화가 눈알을 굴렸다.
“그럼 오빠 회사는 어떻게 하구?”
“월차 내지 뭐.”
“요즘 월차 내고도 눈총 안 받아? 그랬다가 감원 대상 제1호로 찍히는 거 아냐?”
봉수는 송화의 까만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가자. 이번엔 가도 제대로 가자.
그 동안 적금 들어 놓은 거 깨서 우선 중고차라도 하나 장만해서 떠나자.”
“오빠…”
봉수는 자꾸만 바보 같이 살아왔다는 생각만 들었다.
“여행가는 건 찬성인데 꼭 지금 당장 떠날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차 사려면 날도 밝아야 하고.”
송화의 말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봉수는 아직도 즉흥적인 기분이 남아 있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여겨졌다.
박 과장은 보자기를 들고 초조하게 차 실장의 집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차 실장은 얼마 전에 새로 이사를 했다.
전엔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았는데 답답하다며 평창동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집안에서 자란 휘어진 소나무가 대문 쪽으로 삐죽 나와 있었다.
‘업자들한테 돈을 얼마나 받아 처먹었으면…’
박 과장은 차 실장의 집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지금 자신의 전셋집도 겨우 유지하고 있는 판국이니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박 과장이 차 실장처럼 원단 업자들로부터 돈을 덥석덥석 받아먹을 수는 없었다.
차 실장이야 나중에 문제가 되도 비빌 언덕이 있지만 박 과장은 뇌물 문제가 불거지면
그대로 위로금 한 푼 못 받고 쫓겨날 터였다.
‘벨 누른지가 언젠데 아직도 문을 안 열어 주는 거야.’
박 과장은 발을 동동 굴렀다.
지난 밤에 비가 온 뒤 바람까지 불어 날이 제법 추웠던 것이다.
담배를 꺼내 막 물려고 할 때 대문이 열렸다.
“회사에서 오신 분이라구요?”
집안 일을 하는 여자였다.
“실장님 계시죠?”
“네, 들어오세요.”
박 과장은 여자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박 과장은 대문을 딱 넘는 순간 그만 발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회사 임원들이나 이사들 집엘 업무 차, 심부름 차 드나든 적이 있긴 했지만
차 실장의 집처럼 화려하거나 으리으리하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거실까지 이어진 길은 까만 돌이 깔려 있고 돌 사이사이 땅 속에서 조명이 하늘로 뻗어 나왔다.
양 옆으론 한 겨울인데도 봄 인양 푸릇한 잔디가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
‘정원에도 보일러를 트나?’
그러고 보니 대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한기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현관 오른편엔 제법 규모가 큰 연못이 있는데 그 못은 얼지 않고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
연못 주변을 따라 등을 밝혀 놓았는데 등불이 못에 잠겨 제법 운치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도대체 돈이 얼마나 있어야 이런 집에서 사는 거지?’
박 과장은 집 바깥 구경을 하느라 발을 헛디뎠다.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떨어트려 깰 뻔했다.
겨우 몸을 중심을 잡고 식은땀을 흘렸다.
여자가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현관은 사방이 유리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어 센서 등이 켜지자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다.
차 실장 집의 현관은 박 과장의 안방보다 화려하고 컸다.
다시 거실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박 과장은 기가 죽을 대로 죽고 말았다.
거실 바닥에 깔린 바닥재는 대리석도 아니고 옥이었다.
바닥도 훈훈했다.
거실 소파에까지 걸어가는 동안 갑작스러운 훈기 때문에 이마에 땀이 다 맺힐 정도였다.
거실 구조가 특이했다.
거실 중심이 현관에서 들어서는 입구보다 한 계단 낮아 소파와 응접 테이블이 놓여져 있는
공간은 안락했고 한쪽 벽면엔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난로 속에 장작이 딱딱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이리 앉아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자가 소파를 가리켰다.
박 과장은 자신이 들고 온 상자를 쳐다봤다.
왜 그런지 그 상자도 자신도 다 헤진 양말도 너무 초라하게만 보였다.
“아, 박 과장님 오셨어요?”
차 실장의 부인이 먼저 나타나 박 과장을 아는 체했다.
박 과장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녀는 짧은 치마에 반팔 셔츠 차림이었다. 차 실장의 집은 한 여름이었다.
박 과장은 코트를 벗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우리 그 이가 지금 통화 중이거든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나오실 겁니다.
아줌마, 여기 시원한 차라도 한잔 내 드려요.”
박 과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차 실장과 나이 차이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부인보다 더 어려 보였다.
“미모는 여전하십니다.”
박 과장은 진심으로 칭찬을 했다.
“박 과장님도 참, 세상에 예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녀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나 저나 어쩌죠.
박 과장님 오랜만에 뵙는데 제가 일이 있어 나가봐야 하는데.”
“어휴, 저는 차 실장님 뵈러 온 겁니다. 저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박 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비굴하게 느껴진 때문이었다.
“그럴까요? 아무튼 우리 그이는 회사 사람들한테 소홀히 하면 난리가 나거든요.
그럼 전 올라가서 제 일 보겠습니다.”
그녀는 거실과 주방 사이에 난 계단을 타고 우아하게 올라갔다.
그녀의 치마가 펄럭거렸다.
집에 들어가면 늘 부스스한 머리로 음식 냄새만 풍기는
자신의 아내와는 너무 다른 세상의 여자였다.
박 과장은 그녀의 다리에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도 박 과장의 눈길을 의식하고 있는 듯 엉덩이를 더욱 요란하게 흔들며 올라갔다.
“박 과장!”
박 과장은 등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다.
“박 과장!”
“아, 실장님.”
박 과장이 다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뒤돌아 섰다.
차 실장 역시 반 팔 셔츠와 반바지 차림이었다.
“무슨 일인가?”
차 실장이 박 과장 맞은 편으로 걸어와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회사에서 볼 때와 달리 차 실장은 매우 여유로워 보였다.
“사람이 왜 그렇게 미련하나? 아, 더우면 코트를 벗던가.”
차 실장이 혀를 차며 박 과장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아, 네. 밖은 추워서 말입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일하는 여자가 오렌지 주스를 내왔다.
“들게.”
차 실장은 몸을 뒤로 한껏 젖힌 채 손만 까닥거렸다.
‘사장 저리가라군. 차라리 사장이 낫지.’
박 과장은 주스를 단숨에 비웠다. 덥기도 하고 목도 탔다.
“그래,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오늘 저녁에 제가 방문해도 되겠느냐고 회사에서 여쭈었는데 괜찮으시다고 하셔서…”
“내가 그랬었나? 그건 그렇다 치고 그건 뭔가?”
차 실장은 박 과장이 들고 온 보따리를 눈 여겨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