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취리히의 암살단
하타 공항의 탑승구는 한산했다.
바닥이 반질거리는 홀은 목재 건축물이었고 사면이 유리벽으로 되어 있어서
밖의 푸른 잔디와 야자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앞쪽의 유리벽 밖으로 비행기의 둥근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면
마치 풀숲 위에 세워진 조용한 호텔의 로비쯤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통로의 양쪽에 각기 번호÷가 씌어진 탑승구가 있었는데 어느 곳으로 떠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백인 한 명이 오른쪽의 통로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통로 끝에는 양쪽 날개에 검정색 프로펠러 엔진을 단 가루다 항공의 여객기가 세워져 있다.
고동규가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2시에 출발인데 늦으시는데요."
"아직 1시 30분이오."
던지듯 말하고 난 김칠성이 다시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탑승구의 자동문은 가끔씩 열리면서 승객들을 안으로 밀어 넣는다.
옆쪽의 일등석 라운지에 들어가 있던 조웅남이 모습을 나타다.
그의 뒤를 강대흥과오종표,박은채의 순서로 따르고 있다.
"어뜨케 된 거여? 2시 비행긴디."
조웅남의 목소리가 넓은 홀을 울렸다.
기다리다가 조바심이 나서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동문이 열리더니 깅원국이 모습을 나타냈다.
옅은 색 양복 차림에 조그만 손가방을 든 간편한 차림이다.
"형님 ,"
김칠성이 자리에서 튕기듯이 일어섰고 조웅남은 이미 두 팔을 휘저으며 그에게로 다가가고 있다.
"아이고 형님."
조웅남이 둥근 몸을 반으로 꺾었다.
"형님, 이게 얼매 만입니까?"
"그래, 잘 있었냐?"
김원국이 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검게 탄 얼굴에 건강한모습이었다.
"칠성이는 살이 붙은 것 같구나."
김원국의 말에 김칠성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형님, 그 동안 건강하셨습니까?"
"건강허시고만 그려 ."
조웅남이 긴원국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 들었다.
머리를 돌린 김원국의 시선이 고동규에게 가서 멈추었다.
긴장한 고동규가 한걸음 다가오자 김칠성이 나섰다.
"형님, 안기부의 고 중령입니다. "
"그래 이야기 들었어, 임 부장한테서."
"잘 부탁합니다. "
고동규가 머리를 숙였다.
"저를 동생처럼 생각해 주십시오."
"그래, 상황이 이래서 내가 임 부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어. 아무튼 잘해 보자구."
"예, 아무쪼록 잘 지도해 주십시오."
그들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앞쪽으로 나아갔다.
강대홍과 오종표가 후춤거리며 비켜 섰다.
=1들은 김원국과 처응 대면하는 것이다.
"형님, 야가 강대흥이라고, 그러고 야는 오종표, 대홍이 동생이오.
하와이에서 왔다고 지가 말씀 드렸던‥‥‥‥
조웅남이 그들은 가리키며 말하자 김원국이 머리를 끄덕였다.
강대홍과 오종표가 허리를 직각으로 구부렸다.
"잘 왔다 "
그러고 난 김원국의 시선이 힐끗 박은채를 스쳤으나 아무도 소개하려 나서지 않는다.
그들은 한무리가 되어 탑승구로 다가갔다.
자카르타의 하타 공항을 이륙한 에어 프랑스 기는 3만 피트의 상공에서
기수를 고정시키고는 직선으로 날아가고 있다.
맑고 쾌청한 하늘이어서 비행기는 이제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시속 950킬로미터의 속도였다.
김원국이 통로 옆자리에 앉은 고동규 쪽으로 몽을 돌렸다.
"임 부장한테서 대충은 들었는데,
북한이 한 달의 기간을 준 것은 미국 내부의 분열을 노린 술책이라고. 그런가?"
"예, 그리고 그 술책이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 같습니다. "
"외무 장관 안승재 씨는 언제 취리히에 오나?"
"2, 3일 안에 도착합니다. "
"비공식 방문이겠군."
"비공식도 아닙니다. 비밀리에 입국하는 것이지요.
물론 CfA 놈들에게 체크되겠지만요."
입맛을 다신 김원국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조웅남은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는 잠이 들어 있었고
고동규 옆의 김칠성은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일을 잘못되게 할 수도 있어.
북한에게 꼬투리를 잡히면 그땐 방법이 없어."
김원국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으나 긴장하고 있던 고동규는 모두 알아들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북미 회담 결과만 기다릴 수는 없다고 부장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
"그건 나도 동감이야. 그래서 섬을 나온 거네, 고 중령 "
"어차피 북한은 남침 계획을 굳힌 상황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말이군 "
"예, 회장님."
김원국이 힐끗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철저히 우리 존재를 숨겨야 돼. 그래서 임 부장이 나와 내동생들을 필요로 했겠지만."
"애국심이 투철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
"애국심 없는 사람도 있나?"
"도망치는 고위 공직자들도 있습니다,
회장님.외국에 있는 자식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각료도 있고요."
"앞으로 날 형님이라고 부르게, 고 중령. 그게 편해, 난."
"예, 형님."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어때, 군인인 자네의 판단은?"
"집니다, 분하지만. "
"그렇게 쉽게?"
"주변의 색은 것들을 너무 많이 보아 온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현실적으로는 어떤가?"
"국력과 전투기의 숫자, 병력 비깃, 대포의 우열로 전쟁의 승패가 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사기 문제인가?"
"전쟁이란 단어를 쓰는 것마저 기피해 왔습니다 우린 우선 준비가 덜 되어 있습니다. "
김원국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강대홍과 오종표는 나란히 앉아 서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고 그 뒤쪽에 앉은 박은채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는 창 밖으로 머리를 돌렸다.
"저 여잔 스위스에 도착하면 풀어 줘. 데리고 다닐 수는 없다. "
머리를 돌린 김원국이 말하자 고동규가 를 바라보았다.
"괜찮을까요? 우릴 모두 파악하게 되었는데요."
"상관없어.농들은 저 여자를 주목하지도 않을테니까.
저 여자의 특기를 써먹을 기회는 생기지 않을 거야."
"취리히가 회담 장소라는 것을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계의 정보 요원, 언론인들이 모두 모여들고 있어요."
조민섭이 충혈된 눈으로 안승재를 바라보았다.
대한항공의 특별기로 밤 1 1시에 출발하고 나서 꼬박 열 시간째 비행하고 있었는데
그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안승재가 회담에 참가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지만 자료는 준비해야만 했고
그것은 모두 조민섭의 몫이었다.
지금의 직책은 본부의 대사였지만 러시아 대사를 거친 중량급 외교관인 조민섭은
자원해서 안승재를 따라나섰던 것이다.
안승재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기내를 둘러보았다.
뒤쪽 자리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사내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똑같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임병섭이 딸려 보낸 안기부 요원들이다.
안승재가 머리를 저으며 시선을 돌리자 그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종석 뒤에는 스튜어디스 두 명이 이쪽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20인승의 쌍발 제트기는 인도양 상공을 지나는 중이었다.
"장관님, 북한이 이번 회담 장소도 취리히로 정한 것은 세계의 이목을 끌어 보려는 수작입니다.
꺼릴 것이 없다는 자세이기도 하구요."
조민섭의 말에 안승재는 머리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미국측 이야기로는 그들이 장소를 취리히로 정했다고 했지만 북한이 거부했다면 바됐겠지요."
"참담합니다. 아니, 비 참하다고 해야‥‥‥‥
조민섭이 부스스하게 일어선 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어 올렸다.
백발이 반쯤 섞인 머리였고 얼굴은 굵은 주름살로 덮여 있는 투박한 용모였다.
그는 러시아 대사로 있을 적에 차관 문제로 목이 달아난 사람이었다.
옐친이 한번 방한할 때마다 차관의 상환 계약서가 수정되었는데
조민섭은 한국측의 차관 문제 사절단이 방문하였을 때 러시아 정부를 강적히 밀어붙이다가
옐친의 화를 돋우었고 한국의 정치권에서는 그를 본국의 대기 대사로 불러들인 것이다.
"우린 고립되어 있습니다, 장관님."
"모두 내가 무능한 탓입니다. "
"잘 알고 계실텐데 소용없는 겸손입니다, 이제 와서."
어깨를 늘어뜨린 안승재가 시선을 돌렸다.
로젠스턴은 두 번이나 전화를 해서 취리히에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회담에 참석할 수도 없는 입장일 뿐더러 북한측을 자극하여 일이 꼬일 염려도 있다고 했던 것이다.
미국이 이 지경이니 다른 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중국과도 접촉을 시도해 보았으나 외교 부장 화인봉은 아예 상대도 해주지 않았고
국장급인 간부 하나가 전문을 보내어 방문 계획은 추후 상의해 보자고 했는데 이것은 모욕 그 자체였다.
이쪽의 장관을 중국은 두 계단이나 낮은 국장으로 상대하면서 대답을 피한 것이다.
일본은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방위대가 예비역까지 소집되어 있었고
전군에 비상 대기령이 내려져 있다.
그리고 하시모토 수상은 일본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성명을 발표 했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면서도 남북한 어느
한쪽도 옹호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안승재는 일본에 대한 기대는 갖고 있지 않았다.
아직 국민의 정서가 선뜻 일년을 받아 들일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아마 하시모토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어젯밤에 임 부장을 만났는데 CIA는 취리히 회담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내놓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
안승재가 말을 이었다.
"취리히에 안기부 요원 몇 명이 있지만 그들한테서 나오는 정보로는 윤곽을 알 수가 없습니다. "
"로젠스턴이 있는 호텔은 알 수 있겠지요."
"글쎄요,공식 회담 성격이 아니어서 처음부터 숨어 다닐지도 모릅니다. "
"그렇다면 우린 로젠스턴도 만나지 못한단 말입니까?"
조민섭의 이마에 굵은 주름살이 만들어졌다.
"어떻게든 그 사람이라도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우리의 입장을 전해야‥‥‥‥
"대통령 각하의 말씀대로 우린 내놓을 카드가 없어요.
미국이 저런 식으로 우릴 기피하는 이상‥‥‥‥
"방법이 있을 겁니다, 장관님."
시선을 떨군 조민섭이 혼잣소리처림 말했다.
"이대로 나라를 놈들에게 넘길 수는 없습니다. "
"차라리 본국의 훈령이나 지침이 없고,미국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는 지금이 흘가분하군요.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만."
"그래서 그토록 기를 쓰고 자원하신 겁니까?"
조민섭이 부드러운 얼굴로 안승재를 바라보았다.
"장관님도 잘 아시다시피 지금 우릴 도와 줄 놈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미국은 병력을 파병하지 않을 겁니다. "
"...
"배신당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수치 아닙니까?
우리는 이제까지 군사력을 키워 온 북쪽의 거지농들한테 경제 협력이네 뭐네 하면서
사정만 한 꼴이 되었습니다. 놈들이 저렇게 안하무인이 된 것은 모두 우리 책임입니다. "
구름충에 들어간 비행기는 위아래로 요동하기 시작했다.
스튜어디스 한 명이 일어나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안전 벨트를 매시지요."
머리를 끄덕여 보인 안승재가 조민섭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조 대사님. 결과가 이렇게 되었으니 나로서도 할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안승재는 안전 벨트를 매었다.
"그러나 끝까지 최선을 다해 봅시다.
취리히에 가면 우리를 도와 줄 사람들이 모일 겁니다. "
"잘 아시TR지만 김원국이라고 밤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사내요."
"김원국."
"그가 부하들을 데리고 을 겁니다. 임 부장이 부탁을 했어요."
"그가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글쎄, 그것은 잘‥‥‥‥
안승재가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그저 나는 그들도조 대사처럼 사심 없이 일을 해주리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오."
밤이 깊어지자 눈발은 뜸해졌지만 도로는 얼어붙어 있었다.
왼쪽의 호수에서 불어오는 강한 강바람이 택시의 측면과 부딪쳐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정상혁은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멀찍이 모퉁이를 돌아오는 차량 두어 대의 불빛이 보였지만 미행하는 차는 아닌 것 같다.
손목 시계는 12시 10분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호텔 앞에서 차를 버리고 미행자를 따돌린 지
두 시간이 넘은 것이다.
택시 운전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손님, 그루넘겐에 다 왔습니다. 내리실 곳이 어딥니까?"
"호숫가의 미라보 모텔이오."
"그곳에 머무르실 겁니까?"
"아니, 잠깐 일이 있어서 "
"그렇다면 내가 기다릴까요?"
정상혁은 나이 든 운전사의 등에 시선을 준 채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호숫가를 달리던 차는 길가에 늘어선 상가를 지나더니 다시 호수쪽으로 뻗은 길을 달려 나갔다.
"그래요.두 시간쯤 기다려 줘요.하지만 두 시간이 넘으면 그냥 취리 히로 돌아가시오."
정상혁이 말하자 운전사는 머리를 뒤쪽으로 돌리고는 기쁜 듯 웃었다.
주름살이 늘어지기 시작한 대의 독일계 백인이다.
"이 날씨에 취리히로 돌아가는 손님은 없어요. 밤도 깊었고, 돌아 오시는 동안 잠이나 자두렵니다. "
"모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 줬으면 좋겠는데."
"염려 마십시오, 선생님."
짙은 어둠 속을 달리는 택시의 앞쪽으로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한무리의 불빛은 시간이 지나자 여러 개의 강하고 약한 불빛으로 구분이 되었다.
"다 왔습니다, 선생님."
운전사가 차의 속력을 줄이며 말했다.
2차선 국도였으나 지나는 차량이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잠간 저쪽에 세워 주시오, 길가에 ."
정상혁이 운전사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렸다.
택시가 길가로 비껴나가 멈추어 서자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들었다.
운전사가 백미러로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다이얼을 누른 정상혁이 앞쪽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여러 개의 불빛이 미라보 모텔일 것이다.
"여보세요."
발신음이 끊기더니 김준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야, 난 지금 그루닝겐에 있어."
정상혁이 힐끗 운전사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그가 한국어를 이해할 리는 없다.
"미라보 모텔 근처야. 여길 둘러보고 돌아가겠어."
"저도 지금 막 집에 돌아온 참입니다. 조심하세요, 중령님."
휴대폰의 스위치를 끈 정상혁이 운전사를 바라보았다.
"갑시다, 모텔 근처로."
택시가 움직이자 그는 코트 단추를 채우고 장갑을 손에 끼었다.
정보원은 전임자 때부터 일해 온 스위스인이어서 믿을 만했다.
미라보 모텔에 북한인들이 투숙하고 있다는 것은 쓸 만한 정보였다.
회담이 곧 열릴 것이고 북한인들이 취리히에 몰려들고 있었지만
숙소를 찾아낸 것은 처음인 것이다.
그러나 정상혁은 모텔에 투숙하고 있는 것은 보좌관급의 북한인들이라고 믿었다.
아마 고취층은 대사관이나 보다 고급의 호텔에 묵을 것이었다.
택시가 모텔을 향해 속력을 내어 다가가자
그는 운전사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서 차를 멈추게 했다.
"여기요. 이쯤 해서 멈춰 주시오."
택시가 멈춘 곳은 모텔의 옆쪽으로 50미터쯤 떨어진 건물 앞이다.
문이 닫힌 선물 가게 앞의 차도에 택시는 미끄러지며 섰다.
"이건 두 시간의 대기 요금까지 포함된 거요."
정상혁이 지폐를 내밀자 운전사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세 시간을 기다려 드리지요, 선생님. 난 한 시간을 더 잘 수 있거든요. "
"그래 주시겠소?"
새벽에 취리히로 돌아갈 차편이 마땅한 것이 없기는 했다.
미라보 모텔의 현관문은 닫혀 있었지만 유리 문이어서 내부가 훤히들여다보였다.
좁은 로비 안쪽으로 프런트가 현관을 향해 배치되어 있었는데 머리가 벗겨진 비대한 사내가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로비에는 원형탁자 한 개와 대여섯 개의 의자가 놓여 있을 뿐으로 손님은 없다.
현관 앞에 서서 잠시 안쪽을 바라보던 정상혁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가 머리를 들었다.
두툼한 턱살이 늘어져 그것은 마치 음식을 저장하는 주머니처럼 보였다
코트에 묻은 눈가루를 털며 정상혁이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방 있습니까?"
사내는 잠자코 옆쪽의 벽에 걸려 있는 열쇠 한 개를 빼내어 그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210호실. 150프랑이오."
"날씨가 지독하게 춥군요."
"계단으로 올라가서 왼쪽이오."
벽에 붙은 열쇠걸이는 스무 개 정도였고 매달려 있는 열쇠는 7, 8개 정도가 되었다.
스무 개의 방에서 반 이상이 차 있는 셈이다
"여긴 숙박부도 쓰지 않는 모양이군."
지갑에서 돈을 꺼내면서 정상혁이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패 있겠는데."
"당신은 이곳에서 묵은 일이 없어요, 신사 양반 "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괜히 끄적거릴 필요가 없어."
머리를 끄덕인 정상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조용했고 로비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중국인들이 투숙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없어요, 신사 양반."
팔짱을 긴 사내가 턱을 끌어당기면서 그를 바라보았으므로 택살에 가려 목이 보이지 않았다.
"숙박부를 열어 봐도 없을 거요."
"이러면 알 수 있을까?"
정상혁이 지폐 몇 장을 꺼내어 그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1천 프랑이 넘는 돈이다.
사내가 힐끗 지폐를 바라보았으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301, 내가 기억력이 나빠서‥‥‥‥
"이거면 조금 나아질지 모르겠군."
그가 다시 두어 장의 지폐를 꺼내어 놓자
팔짱을 푼 사내는 앞에 놓인 지폐를 한 주먹에 움켜쥐었다.
"205호와 206호요. 두 명씩 네 명이오."
"중국인이오? 아니면‥‥‥‥
"글쎄, 동양인은 모두 똑같아 보여서 ‥‥
"지금 방에 있소?"
사내가 머리를 끄덕이자 정상혁은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201호 열쇠를 주시오."
"2백 프랑을 더 주시면 "
"지독하군."
"난 이 모텔을 25년째 운영하고 있어요. 신사 '강반, 나는 사람을 볼 줄 알아."
"알 만하구만."
쓴웃음을 지은 정상혁이 지폐를 내밀자 그는 열쇠를 그의 앞에 던졌다.
취리히의 암살단(2)
"물건이 부서지면 변상을 꼭 해야 돼 그러니 내가 확인하기 전에
떠나면 안돼요. 알겠소?"
"T:나가는 것이 많은 곳이로군."
열쇠를 쥔 정상혁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계단을 향해 발을 떼었다.
코트 호주머너에 넣어 둔 소형 카메라로 그들의 얼굴을 찍을 수
있다면 말할 필요도 없이 좋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얼굴만 머
리속에 넣고 다음 기회를 기다려도 될 것이었다.
방문을 연 김원국이 문 앞에 선 박은채를 보자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떴다.
"웬일이야?"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 왔는데요."
머리를 꼿꼿이 든 박은채는 긴장한 듯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다.
김원국이 잠자코 자리를 비켜 주자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 7171 f:of."
김원국이 소파의 앞자리를 눈으로 가리키자 박은채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짙은 색 스웨터에 진 바지 차림이었다.
"고 중령한테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군."
김원국의 말투는 가벼웠다. 소파에 깊게 등을 묻은 그가 박은채를
바라보았다.
"부담 느낄 것 없어. 내가 진작 알았다면 자카르타에서 내려 주었
을 거야."
"전 같이 일하고 싶은데요."
"그쪽이 할 일은 없어 "
146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입술 한쪽으로만 웃으면서 김원국이 머리를 저었다.
"여기선 그런 일이 통하지 않아."
"전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
박은채가 몸을 똑바로 세우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필사적인 표정
이다.
"그건 강대홍 씨가 저를 공항에서 빼내려고 만들어낸 이야기예요.
전 무역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
"전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고 독일어도 조금 압니다. 대
학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어요."
"사람을 약 먹여서 재우고 깡그리 벗겨 가는 여자가 아니란 말이
fl "
김원국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얼굴의 표정이 딱딱
해져 있다.
"네, 전 그런 일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
"강대홍과는 언제 알게 되었지?"
"공항에서‥‥‥ 저는 그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
"제 아버지가 허가증을 얻었는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 것인 줄 알았다면 전 출국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공항에서 처음 만났고, 이름도 모르는 사이인 강패홍이가 왜?"
#그건‥‥‥ H
박은채는 그제야 어떤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은 모양이
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취리히의 암살단 147
"그놈이 거짓말을 했군, 이런 상황에서, 여자 때문에."
김원국이 혼잣소리처럼 말하고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강대홍이 처벌받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나?"
"아녑니다. 그렇게까지는‥‥‥‥
"그놈 형님인 김 칠성이나 조웅남이 알게 된다면 강대홍은 당장에
처단될 것이다. "
"표정을 보니 그런 건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맞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일로 처, 처단된다고는‥‥
"우리와 함께 있고 싶은 이유는 뭐야?"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어서요."
"허가증을 위조해서 나라를 빠져 나오려다 잡혔던 너야.믿을 수
가 없어."
"제 의사가 아니었다고 말씀 드렸지 않아요?"
박은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치켜뜬 두 눈의 검은 동자가
김원국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다.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무슨 일이건 할테니까요. 지금은 한 사람
의 힘이라도 더 필요한 때예요, 회담을 증지시키기 위해서는."
"회담을 중지시킨다고 누가 그러던가?"
"조웅남 씨와 김칠성 씨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
한동안 방안에 정적이 흘렀다. 박은채는 온몸을 석고처럼 굳힌 채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김원국은 어두운 창 밖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
었다.
14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이윽고 김원국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래, 같이 일하도록 해, 당분간만 "
"고맙습니다, 선생님."
"강대홍의 일은 당분간 덮어 두기로 하고."
"제가 열심히 일하면 그의 잘못도 상쇄되리라고 생각합니다. "
"입을 다물고 있으란 말이다. "
"다물고 있겠습니다. "
"목숨을 바쳐서 일하는 것이다. 그럴 각오가 없으면 안돼."
"알고 있습니다 "
다시 시선이 마주치자 김원국이 머리를 돌렸다.
"돌아가라 "
자리에서 일어선 박은채는 문으로 다가갔다. 방을 나오면서 힐끗
뒤쪽을 바라보자 김원국은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고 있었다.
지희은이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는 오전 11시 정각이었다. 입구의
계산대에 앉아 있던 헬렌이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기계적인 웃음
이었으나 그런 경우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다. 콜머 호텔은 지희은의
아버지인 지한호가 경영하는 객실 60개의 조그만 호텔이었다.
입구에 서서 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벽에 붙은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김준호를 찾아내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지희은은 곧장 그에게
로 다가갔다.
"웬일이에요, 여기까지 "
김준호는 이곳이 처음이었는데 지희은이 호텔로 사람들이 찾아오
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취리히의 암살단 149
"급한 일이 있어서 들렀어."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30대 초반의 김준호는 정상혁
의 보좌관으로 취리히 대학에서 중세 유럽의 역사에 대한 석사 과정
공부를 하고 있다. 정상혁이 배려해 준 덕택에 대사관 일을 보면서
공부도 하고 있었는데 넉 달 전에는 서울에서 아내와 딸을 데려와 퀴
스나호트에 살림을 차렸다.
"정 중령하고 연락이 안돼, 숙소에도 돌아오지 않았고 출근도 하
지 않았어."
김준호가 희고 잘생긴 얼굴을 찌푸려 좌였다.
"어젯밤 그루넘겐에 갔어. 미라보 모텔에 북한 사람들이 묵고 있
다는 정보를 받고. 모텔에서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단 말
01야."
"거짓말이야. 정 중령은 모텔 앞에서 나에게 전화를 했어."
"경찰에 신고를 해야 되지 않아요?"
이제 지희은의 얼굴도 찌푸려졌다.
"대사관에는 보고했지요?"
"했어. 하지만‥‥‥‥
"하지만 뭐죠?"
"경찰에 신고는 안할 모양이야. 자체 내에서 수습하려는 것 같
아. "
"도대체 왜‥‥‥‥
"깊은 밤에 그루닝겐의 모텔에서 실종된 한국 대사관 직원, 그리
고 그곳에 있었을지도 모를 북한측 사람들, 높은 사람들은 그것이 신
150 밤의 대통령 제3부 -I
경 쓰이는 거야."
"우린 그런 존재야, 지회은 씨."
김준호의 얼굴에 엷은 웃음기가 떠오르는 듯하다가 사라졌다.
시바다는 코트의 깃을 세우고는 기둥에서 몸을 반쯤 돌렸다. 공항
대합실은 사람들로 혼잡했고 쉴새없이 들려 오는 안내 방송으로 어
수선한 분위기였다.
"네 명인데요. 뒤쪽에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내가 둘 따라옵니다. "
옆에 선 다케무라가 말했다.
"일국의 외무 장관 행차치고는 초라합니다, 부장님."
"공식 방문이 아니니까 할 수 없지.그리고 행차 따질 입장이 아
냐, 저 친구들."
한국의 외무 장관 안승재는 일행들과 함께 대합실을 가로질러 걷
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는 듯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출입구
쪽으로 다가가고 있다.
"자,우리도 가자."
시바다가 움직이자 다케무라가 출입구 옆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부
하에게 눈짓을 했다. 부하가 재빠르게 유리문을 빠져 나가는 것이 보
였다.
안승재가 김포에서 대한항공서울발 취리히 행 특별기를 탄 것은
즉각 일본 정보국에 연락이 되었다. 일본만큼 한국에 대한 정보를 많
이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없다. CIA도 한국에 대한 정보에서는 일본에
밀리는 형편이었는데 그것은 일본 정보국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막대
취리히의 암살단 151
한 자금을 투입한 결과였다. 남한과 북한은 일본과는 우방이자 적대
국이었는데 그들끼리도 그러한 관계를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 방위
전략상 필요했기 때문이다.
안승재 일행은 택시 정류장 쪽으로 다가가 사람들이 서 있는 줄
뒤에 섰다. 눈가루가 바람에 날리는 쌀쌀한 날씨였다. 저녁 무렵이어
서 주변은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했고 길가의 가로등 빛은 점점 밝아
지고 있었다.
"이번 북미 회담에 참석할 수 있을까요? 저 사람 말입니다. "
다케무라가 턱으로 안승재의 뒷모습을 가리켰다. 택시가 드문드문
오고 있어서 안승재 일행은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참석 못해. 북한측이 거부할테니 까. 아마 미국측과는 만날 수 있
겠지만, "
시바다의 말에 다케무라가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안됐습니다. 자기 나라 일인데도 직접 나서지를 못하다니."
"자업자득이야. 누굴 원망할 것도 없다. "
검정색 벤츠 한 대가 다가와 그들 옆에 서자 그들은 뒷자리에 을
랐다.
"기다려라, 저놈들이 떠날 때까지."
시바다가 말하자 따뜻한 차 안에 들어온 다케무라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국 대사관 쪽에도 비밀로 한 모양이군요. 저렇게 택시를 기다
리는 걸 보면."
"그런 모양이군."
"한국 대사관은 지금 정상혁을 찾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실
152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종 신고를 하지도 못하고 말이지요."
택시 서너 대가 한꺼번에 몰려 왔으므로 시바다는 앞쪽을 바라보았
다. 안승재 일행은 맨 마지막 택시에 오르고 있다. 운전대를 잡고 있
던 부하가 브레이크를 풀었다.
"숙소만 확인하면 된다. 조심해서 따라가도록."
시바다가 운전석에 앉은 부하의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오갈 데 없는 자들이라 어차피 멀리 가지도 못할 것이다. "
"안승재가 나타난 건 하나도 도움이 안돼. 아니 오히려 방해가 될
거야."
로젠스턴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 망할 자식이 갑자기 나타나다니, 도대체 서울에서는 뭘 하고
있었길래 이제야 알게 된 거야?"
"일반 여권으로 가명을 쓰고는 특별기를 타고 왔습니다. 공항의
우리 요원이 그를 알아봤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온 것도모를 뻔했
어요. "
CIA의 찰스 월튼이 낮고 굵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중부 유럽의
지역 책임자로 이번 회담의 경비 책임자를 겸하게 된 40대 후반의
베테랑 요원이다.
"장관님, 내 생각이지만 한국의 안 장관이 곧 연락을 해을 것 같습
니다만."
"그럴 수밖에 ."
로젠스턴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나한테 매달려 봐도 나을 건 없
취리히의 암살단 153
어. 우리도 그 미친 놈들한테 뒤흔들리고 있으니까."
"한국인들이 여러 명 취리히에 들어왔습니다. 이틀 전인데,우리
가 파악한 숫자는 일곱 명인데요, 남자 여섯에 여자 하나."
"한국은 계엄령을 펴고 있어서 출국하려면 계엄 사령부의 허가장
이 있어야 해요. 그들은 상용으로 이곳에 들어왔는데 어제 시내의 전
호텔에 컴퓨터 조회를 했지만 없었습니다. "
"한국 기관원인가?"
"KCIA 명단은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어요. 그들 중 한 명만
KCIA였는데, 그도 행방을 감추었습니다. "
"이번 회담하고 관계가 있군 "
"안 장관의 입국과도 관계가 있는지 모릅니다. "
"그 친구는 지금 어디 있나?"
"곧 연락이 올 겁니다. 우리 요원 두 명이 따라갔으니 까요."
"일본 정보국 요원들이 안 장관을 미행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들은 우리보다 조름 먼저 정보를 입수했던 것 같습니다. "
"약삭빠른 놈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겠지. 동북아의 판도가 달
라질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로젠스턴이 탁자 위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을 마시고는 이
맛살을 찌푸렸다. 식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측의 정보 요원들도 대거 몰려왔고, 일본 정보국 요원들에다
북한의 공작원들,거기에다 한국의 정체 불명의 사내들이라‥‥‥ 전
쟁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구만."
154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아직 상대방들의 존재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서요. 서
로 쫓고 쫓기고만 있는 상황이지요."
그때 탁자위에 놓인 전화벨이 울렸고 월튼의 바지 주머니에서도
휴대폰의 낮은 신호음이 들려 왔다. 로젠스턴이 수화기를 들었고 월
튼도 휴대폰을 꺼내어 귀에 대었다.
"여보세요."
로젠스턴이 커다랗게 말하자 월튼은 휴대폰을 귀에 대고는 몸을
돌렸다.
"로젠스턴 장관, 난 한국의 안승재올시다. "
"아아, 안 장관, 웬일이시오? 거기 서울입니까?"
그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아니, 여긴 취리히요. 지금 도착했습니다. "
"아니, 저런, 난 모르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장관께 도움이 될까 해서 비밀리에 날아온 겁니다. "
"이런 세상에 ‥‥‥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북한 쪽이 좋아하지 않
을텐데."
"장관, 이제 그들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상관할 때가 아닌 것 같습
니다만."
"그건 무슨 말입니까?"
벌써 통화를 마친 듯 월튼은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물끄러미 로젠
스턴을 바라보고 있다.
"내일 나를 회담에 참석하게 해주시오, 장관. 그들에게 허락을 받
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데려가기만 해주시면‥‥‥‥
"장관, 그건 억지요.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관행을 무시하다니.
취리히의 암살단 155
그렇게 되면 회담은 당장에 결렬됩니다. "
"난 대통령께 허락을 받고 온 거요.난 그들에게 할말이 있습니
다. "
"내가 전해 드리지요, 장관.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안됩니다. 내가 직접 말해야 합니다, 한국어로. 토론하자는 건 아
닙니다 다만‥‥‥‥
안승재의 음성이 간절해서 로젠스턴은 그가 마치 앞에 있는 것처
럼 느껴졌다.
"로펜스턴 장관, 부탁이오. 날 회담장에 데려가 주시오."
"장관,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건 미국과 북한의 회담이오. 내일 그
들과 상의해서 당신을 비공식으로라도 참석시킬 것인가를 결정하겠
소. "
그는 이미 국무부 내의 참모들과 수백 가지의 예상 상황을 분석해
보았고 남한측이 내놓을 수많은 조건들에 대해서도 검토를 끝낸 참
이다.
북한의 침공 계획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은
한 가지밖에 없다. 남한의 무조건 항복이다. 그렇게 되면 피흘리지
않는 통일이 된다.
로젠스턴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안승재가 그런 카드를 가져왔
을 리는 없는 것이다.
"안 장관, 언론에 노출되면 좋을 일이 없으니까 그곳에 계시오. 내
가 내일 회담 내용을 바로 전해 드리겠소. 회담 도중이라도 상의할
일이 있으면 전화를 드리지요."
156 밤의 대통령 제8부 -I
"내 말 명심하시오, 장관. 그리고 내가 당신들의 입장에서 노력하
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마시고."
그러자 갑자기 온몸에 피곤이 몰려 왔으므로 그는 입맛을 다셨다.
저쪽이 잠자코 있었으므로 로젠스턴은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내려놓
았다.
"유로 호텔 724호실입니다. 일행 세 명은 옆방인 723호와 725호
를 쓰고 있습니다. "
월튼이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는 듯 낮게 말했다.
"일본측은 그의 숙소를 확인하고는 돌아갔습니다. "
두어 번 머리를 끄덕여 보인 로젠스턴은 벽을 바라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고 선생님이신가요?"
지희은이 다가가자 박물관의 기둥에 기대어 서 있던 동양인이 몸
을 바로 세웠다.
"지희은 씨로군."
"대사관에서 연락을 받고 오는 길입니다. 차가 막혀서 조금 늦었
어요. "
국립 박물관주변은 길 건너편의 중앙역이 붐비는 것과는대조적
으로샐렁했다. 아침 9시여서 아직 개장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불러내서 미안한데, 사정이 있어서 그랬으니까 이해하도록."
고동규가 들고 있던 담배를 앞쪽의 쓰레기 통에 던져 넣었다.
"잠간 나하고 갈 데가 있어, "
취리히의 암살단 157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고동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명령이나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것
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동규는 서울의 본부에서 온 상급자였고 게다
가 대사관의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아침 일찍 대사관의 안성민 참사관은 그녀에게로 직접 전화를 해
왔다. 본부에서 고동규라는 간부가 왔으니 국립 박물관 앞으로 9시
까지 나가라는 지시였다.
고동규는 앞장서서 차도로 다가가더니 검정색 볼보의 뒷좌석에 을
랐다. 그리고는 열린 문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서 타."
그들이 탄 차가 멈추어 선 곳은 리바트 강 근처에 있는 조그만 호
텔이었다. 국립 박물관에서 차로 10분 거리였으나 운전을 하는 한국
인은 지리에 익숙지 못했다. 길을 뱅뱅 돌았고 온 길을 다시 달리곤
하는 바람에 25분이 걸렸지만 고동규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쪽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지희은은짜증이 나 있었
다. 참사관의 말을 빌면 고동규는 간부 요원으로서 이쪽 상황을 책임
질 사람이었다.
그들은 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4층짜리 호텔이었으니 최
상층이다. 고동규가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 왼쪽 끝방 앞에 멈추더니
뒤에 선 지희은을 돌아보았다.
"여기야. 들어가자구."
"숙소이신가요?"
지희은이 건성으로 묻자 그도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를 따
15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라 방에 들어선 지희은은 주춤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위트 룸인
모양으로 그녀가 선 곳은 응접실이었다. 옆쪽의 문이 닫혀져 있었는
데 그곳이 침실일 것이다.
"잠간 여기 앉아서 기다려."
고동규가 소파를 턱으로 가리키며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금방 돌아올테니 까."
그가 방을 나가자 소파에 앉은 지희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들
이마시는 공기에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맡아졌다 아침이었으나 하
늘은 흐렸고 방안은 더욱 침침했다. 천장에 달린 둥근 형광등도 이
방의 어두운 분위기를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고동규는 본부의 간부 요원이었지만 대사관에도 마음놓고 들어을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간부 요원인 정상혁 중령이
실종된 지 사흘째가 되어 가고 있었지만 경찰에 신고도 하지 못한 상
황이었다. 』분쯤 시간이 지난 후에 방문이 열렸다.
고동규인 줄로만 알고 머리를 들었던 지희은이 눈을 치켜했다. 처
음 보는 남자였다. 장신에 체격이 컸고 두 눈이 곧장 이쪽을 보고 있
었는데 마치 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바로 고동규가
들어섰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지희은에게 고동규가 말했다.
"인사해. 앞으로 우리를 지휘해 주실 분이니까. 김원국‥‥‥ 선생
님이셔 ."
지희은이 머리를 살짝 숙였다.
"지희은입니다. "
서로 자리를 잡고 앉자 김원국이 고동규를 바라보았다.
취리히의 암살단 159
"이제 이 사람 한 명인가?"
"예, 형님 "
김원국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려졌다.
"교민이라면서?"
"네 ."
"정보 요원으로 일한 지 3년이 조금 넘었고."
"임시직이어서요. 일이 없으면 집안 일을 합니다. "
"지금 한국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지?"
"압니다. "
그리고 지희은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취리히에 있는 한국인들의 상
황도 별반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아. 그리고 우리가 네 도움을 받아야 할 일도."
지희은이 퍼뜩 눈썹만을 치켜올렸다가 내렸다. 서로 한국말을 하
고 있었는데 집안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그녀는 '너'란 단어가 영
어의 'You'처럼 보편적인 '당신'의 개념이 아닌 반말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때려붙이듯이 아랫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그녀가 머리를 들고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제가도와드릴 일이라곤‥‥‥ 저,지리나 행정 분야에는 김준호
씨가 저보다도 더 익숙합니다. 경력도 많고, 정식 직원이거든요."
고동규가 힐끗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그래 ?"
김원국의 시선과 부딪치자 지희은은 머리를 돌렸다. 김원국의 목
소리가 들렸다.
"그 친구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아나?"
160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출장 가 있습니다. "
"도망쳤어,가족과 함께. 아마 다른 나라로 갔을 거야."
지희은이 눈을 치켜뜬 채 멍한 얼굴이 되었다.
"어제 오전에도 제가 만났는데요. 그리고 대사관에서는 출장을 갔
다고 하던데 ‥‥‥‥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73지 직원들 사기 문제도 있고 하니까, "
"비겁한 놈이야. 어려울 때 조국을 배신한 놈이다. "
낮고 억양 없는 목소리로 김원국이 말했다.
"어디 가서 어느 나라 국적을 얻고 얼마나 잘살지는 모르지만 그
런 건 쓰레기다. "
..."
"네가 유일하게 남은 요원이야, 우리를 이곳에서 도와 줄."
지희은의 귀에 김원국의 말소리는 퀴퀴한 방의 구석구석으로 배어
것처럼 낮게 깔려 왔다.
들
그 시간에 중국 공산당 주석 장자량은 그의 붉고 거대한 접견실에
서 북한의 김달현 부수상과 마주앉아 있었다. 김달현은 한때 권력의
대열에서 밀려나 비날론 공장의 관리인으로 전락되었다가 끈기와 충
성심을 밑천으로 다시 복귀한 인물이다. 이제 그는 서열 10위의 산
업 경제 부장이자 김정일의 최측근이 되어 있었다.
긴장한 표정의 그는 장자량이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것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앉아 있는 마른 몸매의 통역이 누
군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 주위를 물리친 두 사람만의
취리히의 암살단 161
회동이다
이윽고 장자량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얼굴을 들었다. 70대 초반
이었으나 검은 머리에 얼굴의 피부는 탄력이 있었고 허리도 곧다.
"잘 알았소, 부수상. 김정일 주석에게 내가 서류를 잘 받았다고 전
하시오."
그가 온화하게 말하자 통역도 부드러운 한국어로 전달했다.
"우리는 피로 맺은 맹방이오. 어느 누구도 우리의 형제 관계를 깨
뜨릴 수 없다고 전하시오."
"감사합니다, 주석님. 저희 김정일 주석은 그 서약서대로 중국과
의 관계를 보전할 것을 맹세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꼭 주석께 전하라
고 하셨습니다. "
"잘 들었소, 부수상."
"주석님, 미국은 유엔의 안보리를 소집할 계획입니다. "
"우리 중국과 프랑스는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고 러시아와 독일은
기권하게 될 거요.상임 이사국 중에서 찬성하는 나라는 미국과 영
f, 일본밖에 없소."
"남조선의 총리가 북경에 올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때면 난 입원하게 될 것이고 수상은 출장을 나갔을 거요. 아마
우리 외교 부장을 만날 수는 있겠지요."
"남조선은 지금 혼란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
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간 후로 수만 명이 국외로 빠져 나가다가
체포되었고 군대의 사기는 엉망입니다. "
"듣고 있소."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주체 사상 조직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
162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습니다. 전쟁만 일어나면 우리는 승리합니다. "
"이번 회담에서 미국측에 동맹국 관계를 요청할 작정이지요?"
"예?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알고 있어요. 그리고 미국측도 알고 있을 것이고."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동북아에 보다 큰 세력을 가진 국
가가 필요할 거요. 남북한을 합친 군사력이면 일본과 대항할 만할테
니 까. "
"예, 주석님."
"우리 입장도 마찬가지고 러시아에도 해될 것은 없소.물론 러시
아 쪽으로 누군가를 보냈겠지요?"
"예, 주석님 "
김달현은 달변의 사내였지만 노회한 장자량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장자량은 김정일의 대부이기도 한 것이다.
잘난 척을 하거나 말재주를 부려서 통할 사내가 아니다.
"우습지만 소련 연방이 어처구니없이 해체된 뒤에 제일 타격을 입
은 것이 남조선이야. 그들은 동서 냉전 시대의 카드를 더이상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거든. 이제 미국의 관심은 일본 쪽이 되었지."
부드러운 표정으로 장자량이 말했다.
"우리 중국은 아직도 미국이 소련을 견제할 때의 준 동맹 관계에
있어.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할 책임이 있지."
"그렇습니다, 주석님."
"적절한 상황이오.다만 예정대로 빨리 남한 공략이 되어야 할텐
01."
취리히의 암살단 163
"열흘입니다,주석님. 전 인민군은 열홀분의 기름과 식량을 가지
고‥‥‥‥
"대전 북쪽의 지역만 점령해도 돼요. 그 상태에서 휴전해도 남조
선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지게 될 거요."
"네 ? fl ."
김달현은 전략 회의에 참석해 본 적은 없다 그의 얼굴을 힐끗 바
라본 장자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무운을 빌겠다고 전하시오."
"감사합니다, 주석님 ."
사명을 완수한 김달현은 부풀어 오르는 얼굴의 근육을 억제하면서
방을 나갔다.
장자량이 다시 자리에 앉자 반대쪽의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면서 큰
키에 마른 몸집의 노인이 들어섰다. 그는 수상인 진위였다. 그러자
통역이 소리 없이 자리를 뜬다.
"주석, 애비보다 나은 자식이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김정일은 경
솔한 점이 있습니다. "
진위가 김달현이 앉았던 자리에 앉더니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보
았다.
"서약서군요. 어디, 철판이라도 찍었던가요?"
"경솔하긴 하지만 상황 판단은 제법이오. 위기를 헤쳐 나가는 임
기응변도 그렇고."
"군부의 반발을 전쟁으로 막겠다는 발상은 예상하긴 했지만 조금
빠릅니다. "
"하긴 그렇소. "
164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장자량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군부뿐만이 아니오.전 인민이 폭발 직전에 있소.아마 세계에서
제일 참혹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북조선 인민들일 거요. 아프리카
의 황무지를 헤매는 유민들이 차라리 그들보다 낫소."
"남조선이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정비하자 북조선은 모두 심기
일전한다는군요."
"남조선만 점령하면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될테니까. 그것은 현실
이오. 김일성 시대의 꿈을 드디어 아들이 이루게 되는군.해방 전쟁
으로 남조선을 점령해서 말이야."
보위부 상사 김덕천은 평강 시내에 있는 보위 중대에
업무 보고를 마치고 시외곽의 근무처인 검문소로 돌아왔다.
제74 검문소는 일곱 명이 분조가 되어 열두 시간씩 근무하고 있었는데
주 임무는 작전 지역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것이었다.
검문소의 시멘트 막사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차단봉이 내려진 옆에 사내 두 명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봐, 저것들은 뭐야?"
그가 묻자 분조원 하나가 다가왔다.
"작전 지역 안의 반석 협동 농장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분조장 동무
"1런데 왜?"
"시내에 들어가겠다고 해서 못 들어가게 했더니 저러는군요."
"저런 간나 새끼들이."
몸을 돌린 김덕천이 사내들에게로 다가가자 그들은 땅바닥에서 느
린 몸짓으로 일어섰다. 둘다 50대 초반의 남루한 인민복 차럼이었고
수척한 몸에 얼굴은 추위에 얼어서인지 나무 껍질처럼 굳어 있었다.
이봐요, 당신들 왜 돌아가지 않는 거야?"
다가선 김덕천이 턱을 들고 묻자 흰 머리가 반쯤 섞인 사내가 한 걸음 나섰다.
"동무,우린 입대하러 나섰소.난 20년 전에 전차 부대의 상사로
제대했지만 지금도 땅크를 몰 수가 있소."
"난 기관포 사수였소."
대꼬챙이처럼 마른 다른 사내도 나섰다
"일등 사수 훈장도 가지고 있소, 여기."
사내가 주머니를 뒤져 녹슨 양철 조각 하나를 꺼내어 보인다.
"협동 농장에서 어떻게 나온 거요? 위원장이 내보내 줍디까."
잠시 어이없다는 듯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던 김덕천이 묻자대 꼬챙 이가 대답했다.
"군대에 나간다니까 보내 주었습니다. 여기 허가증도 있소."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요."
사내들이 내민 종이 쪽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김덕천이 내처말했다.
"어제부터 작전 지역 내의 사람들은 이동할 수가 없게 되었소. 그
간나 새끼들은 그것도 모르고 허가증에 도장을 찍어 주는구만."
"동무, 우릴 시내로 들여 보내 주시오."
흰 머리의 사내가 주름진 얼굴에 울상을 지었다.
"우리도 싸우고 싶소, 동무. "
"도대체 당신 나이가 몇이오?"
"쉰네 살이오. 하지만 ‥‥‥‥
"영감태기가 농장 일이나 하지 왜
"나도 남으로 쳐내려가고 싶소."
"치기는 누가 쳐 ."
김덕천의 눈꼬리가 빳빳하게 일어섰다.
"남조선 놈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데."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도 같이 막으려고 ‥‥‥‥
대꼬챙이가 얼른 말을 받았다.
나이는 들었지만 군 생활을 했던 때문인지 빠르게 상황을 읽는다.
김덕천이 혀를 찼다.
"돌아가요. 동무들을 받아 줄 부대는 없어.
자원 입대에도 해당이 안되고 소집 대상도 아니야, 동무들은 "
"싸우다 죽게 해주시오, 동무."
대꼬챙이가 바짝 다가서더니 그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이래도 저래도 죽기는 매일반이오, 농장에서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
"농장에서 왜 즉는단 말이이?"
"동무, 총알받이가 되어도 좋소, 우리들은. 위대한 수령님을 위해 죽을 결심을 했소."
"이 간나 새끼들이 정말. "
잡힌 소매를 뿌리친 김덕천이 소리치자 이쪽을 철끔거리던 부하들이 달려왔다.
"분조장 동무, 어떻게 할까요?"
그들도 시달렸는지 부하 한 명이 사납게 물었다.
"쫓아 보내. 말을 안 들으면 체포해서 보위부로 데려가고."
"차라리 그래 주시오."
흰 머리가 그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대꼬챙이가 어깨를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싸움터에 자원해 나간다는데 감옥에 처넣다니?그런 법이 어디있소?"
"싸우러 나간다고? 이 간나 새끼들이."
김덕천이 이를 드러내며 입으로만 웃었다.
"군대밥 축내려고 하는 줄 누가 모를 줄 알고?
너희 같은 놈들을 우리가 하나들 겪은 줄 알아?"
"수령님 핑계를 또 대었다가는 반역죄로 체포할테다. "
몸을 돌려 김덕천이 부하를 쏘아보았다.
"쫓아내, 저 거지 같은 놈들을."
"예, 분조장 동무."
막사로 발을 떼면서 김덕천은 어깨를 폈다.
바람이 거센 추운 날씨였지만 견딜 만했고 문득 남쪽은 날씨가 포근하다고 했던
동료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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