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3. 섬을 떠난 은둔자

오늘의 쉼터 2014. 12. 16. 16:44

3. 섬을 떠난 은둔자 
  

 

담배 연기가 자욱한 커피숍은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입구에 사람이 들어설 때마다 잡음이 많은 라디오의 볼륨을 낮추었을 때처럼 조용해졌다.

대형 유리벽을 통해 옆쪽의 호텔 로비를 바라보고 있던 오종표가 머리를 돌렸다.
   "형님, 시간이 왜 되었는데‥‥‥‥
   "기다려. 곧 올 거다. "
강패홍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2시 10분이야. 10분밖애 지나지 않았어."
계엄령이 내려진 으스스한 상황이었지만 이곳은 열기로 가득 차있다.
동대문 옆에 있는 휴스턴 호텔은 3급 호텔이었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권의 방문객이 많았다.

근처에 동대문 시장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 한국인들로 들끓고 있는 이유는

근처의 귀금속 상인들과 거간꾼들이 몰려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찾아오는 고객들이 있다. 대부분이 귀금속을 사려는 사람들이었고

금값이 네 배나 뛰었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일어나 한꺼번에 몰려나갔다.
유리벽을 통해 로비로 들어서는 두 명의 중년 남녀가 보였는데

자의 손에는 패 묵직한 손가방이 들려 있었다.

돈 가방이다.

집안의 금고에 오랫동안 박아 두었던 만 원권 뭉치들을 들고 나와 금과 바꾸는 것이다

금이 있으면 외국에 나가서도써먹을수 있고 설령 북한이 내려와 화폐개혁을 해도 상관이 없다.

지금 외국에서는 한국돈을 마러 주지도 않고 있었다
    "제기 랄‥‥‥‥ 
입속으로 중얼거리듯 오종표가 투덜거리는 순간 강대홍은 호텔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세 명의 남녀를 보았다.

30대 중반의 여자가 두 명의 건장한 사내들을 양옆에 달고 있었다 보디가드이다.
    "왔다. "
강대홍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이미 오종표도 보았는지 얼굴이 굳어 있었다.
손에 패 묵직해보이는 가죽 가방을 든 여자는 곧장 커피숍으로 다가왔다.

짙은 색 투피스 차림의 그녀는 조금 살이 붙기는 했지만 눈에 띄는 용모였다.
커피숍에 들어서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더니 턱을 들고 안을 훌어 보았다

그리고는 강대홍을 발견하자 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미안해요, 늦어서, "
앞자리에 앉은 여자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서 짙은 향냄새가 풍겨 왔다.
"여기까지 오는데 두 번이나 검문을 받았다니까요,

글쌔. 건성으로 신분증이나 보면서 무슨 검문을 한다고."
강대홍의 시선이 옆쪽 자리의 사내들에게로 가 있는 것을 알아챈 여자가 다시 환하게 웃었다.
   "내 동생들이에요. 여자 혼자 이걸 들고 오기가 해서‥‥‥ 험한 세상 아녜요?"
   "그렇지요."
   강대흥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우린 짐을 호텔 방에 두었으니 같이 올라가십시다.

여기서 계산 하기는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시간도 없으니까 어서 끝내야죠."
   그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에 멈추어 설 때까지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로비에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 귀금속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었고 간혹 일본인이나 동남아인들같이 보이는 얼굴들도 섞여 있었다.
   "얼마나 가져왔습니까?"
   여자의 옆에 바짝 붙어선 강대홍이 낮게 물었다. 옆쪽에 선 사내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금 2킬로하고 다이어, 백금이 왜 돼요."
앞을 바라본 채 여자가 소근대듯 대답했다.
여자는 청담동에 자기 소유의 7층 빌딩과 여성용 고급 의류 매장을 갖고 있는 세실 정이다.

녀는 국내 굴지의 재벌인 국도 그룹 황 회장의 정부였지만

강대홍과는 서너 번 몸을 섞은 사이가 되어 있었다.

강남의 고급 카바레인 영락 클럽에 단골로 드나들면서 일회용 상대를 낚는 것이 취미였던

세실 정이 허우대 멀정한 강대홍을 놓칠리 없었고 강대흥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렸다.
   "달러는 충분해요?"
복도를 걸으면서 세실 정이 물었다. 빈 복도여서 그녀는 마음놓고 큰소리를 낸다.
   "충분해요, 친구가 쾌 많이 가져와 주어서."
강대홍이 어깨를 치켜올렸다가 내렸다.
   "하와이에서 왜 날렸던 이 몸이오. 과소평가하지 말아요."
   "그건 나도 들었어요, 그곳에 있는 친구한테서."
그들은 복도 끝 방 앞에서 멈추어 섰고 오종표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열쇠 구멍에 꽃았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몇백만 달러도 가져을 수 있는데, 미 군용기편_f_E . "
그러면서 강대흥이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 표정 그대로 굳어졌다.
   "꼼짝하지 말어 , "
그녀의 옆쪽에 서 있던 30대 후반의 사내였다.

사내의 손에는묵직한 콜트가 들려 있었고 끝에는 긴 소음기까지 부착되어 있다.
   "그냥 쏴 죽이고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꼼짝 말란 말이다. "
   "움직이지 마, 이 새끼야."
그러면서 뒤쪽에 서 있던 사내도 총구를 그의 등에 대었다.
   "어이쿠, 이런."
강대흥이 눈을 치켜뜨고 세실 정을 바라보았다.
   "정 여사, 이게 무슨 짓이야? 나하고 당신 사이에."
세실 정이 웃었다.
   "이봐, 잘난 연장 자랑하는 거야?"
사내 한 명이 강대홍을 돌려 세우고는 온몸을 손바닥으로 훌푹 내렸다.

그리고는 손에 잡히는 것이 없자 다시 한번 흥어 보더니 오종표에게로 다가간다.
   "야, 이 씨발놈아, 나 건드리지 마. 흥분되니까."
   사내가 머리를 미는 바람에 얼굴을 벽에 부딪친 오종표가 버럭 소리를 쳤다.
   "정 여사, 이 강대홍이를 그토록 못 믿으셨나?"
   "믿을 놈이 따로 있지. 네가 하와이에서 무슨 짓을 하고 온지도 내가 다 아는데."
세실 정이 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내 한 명이 오종표를 밀치고는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다.

오종표와 강대홍은 그들에게 둥을 밀려 고꾸라지듯 안으로 들어섰다.
   "돈 가방은 어디 있지?강 사장 "
가방을 내던진 세실 정이 두 손을 허리에 짚고는 강대홍을 쏘아보았다.
   "어서 내놔, 죽기 싫으면."
   "내놓으면 일찍 즉을텐데."
강대흥이 혼잣소리처럼 말하면서 방안을 뒤지고 있는 사내의 됫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내 한 명은 이쪽으로 총구를 겨눈 채 움직이지 않는다.
   "쏴 죽여, 귀찮으니까 "
세실 정이 자르듯 말하고는 강대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새끼부터 ."
   "아이구."
강대흥의 얼굴이 금방 하알게 굳어졌다.
   "좋아, 정 여사. 내가 달러를 주겠어."
   "어디 있는지 말만 해."
   "저기, 텔레비전 수상기 밑이야."
손을 들어 텔레비전 수상기를 가리키자 방안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수상기를 들면 아래에 있어, "
사내 한 명이 서둘러 텔레비전 수상기로 다가갔다. 세실 정이 힐끗 강대홍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내는 총을 이쪽으로 겨눈 채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오종표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방안이 터져 라갈 것 같은 폭음이 울리면서 산산조각이 난 텔레비전 파편이 날았다.

금방 횐 연기가 자욱하게 덮여 온다.

레비전이 들리는 순간에 총을 겨눈 사내를 방패로 삼아 파편을 피한 강대흥은

한걸음에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비틀거리는 사내가 권총을 겨누는 순간 강대홍은 발을 들어 사내의 턱을 차올렸다.

턱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무릎을 꿇더니 방바닥에 엎어졌다.
   "종표야, 죽었냐?"
사내의 손에 쥐어진 권총을 빼앗아 든 강대흥이 소리치자 오종표가 엉덩이부터 일으켜 세웠다.
   "살아 있어_3., 형님."
   "나가자."
서둘러 문으로 다가간 그들은 방안에 쓰러져 있는 세 명의 남녀를 바라보았다.
   텔레비전을 들어 올리던 사내는 폭발과 동시에 튀어 반대편 벽에 박혀져 있었으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세실 정은 살아 있었다.

드린 채 두 팔로 방바닥을 휘저으며 일어나려고 한다.
강대흥은 총을 들어 그녀의 등에 대고 두 발을 쏘았다.

그리고는 턱을 채여 엎어져 있는 사내의 등에도 다시 두 발을 쏘았다.
   "잠시다, 형님."
그녀가 가지고 왔던 가죽 가방을 집어 든 오종표가 서두르듯 말했다.

1들은 한걸음에 서너 개씩 비상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야, 이 새끼야, 그것 버려!"
2층을 내려오던 강대홍이 오종표가 쥐고 있는 가방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년이 제대로 가져왔을 것 같아?"
   "잠간 보기나 하구요."
오종표가 허덕이며 말하더니 뛰는 속도를 늦추었다.

1충의 로비로 내려간 강대흥이 가쁜 숨을 가라앉히며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 나갔다.

엘리베이터 쪽에 사람들이 몰려 서 있었지만 아직 사건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5층의 현장은 사람들이 몰려가 있을 것이고 곧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현관을 나오는데 오종표가 바쁜 걸음으로 쫓아왔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오종표가 입맛을 다셨다.
   "수석이오, 형님. 돌멩이가 들어 있더란 말입니다. "
=I들은 서둘러 호텔을 빠져 나왔다.
그들이 파타야에 돌아왔을 때는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이제 폐업한 것이나 다름없는 클럽이어서 주차장은 샐렁했고 클럽 안내판도
덩그마니 벽에 기대어 방치되어 있다.
   "제기랄, 이놈의 세상."
오종표가 클럽의 현관 유리문을 열면서 투덜거렸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왜, 임마, 다 그런데 뭘 그래?"
갑자기 뒤에서 걸쩍지근한 목청이 울렸으므로 둘은 소스라쳐 몸을 돌렸다.
   "아이고 형님."
강대홍이 허리를 꺾으며 신음처럼 말했다.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
김칠성과 조웅남의 두 거구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느그덜, 이 빈집에서 뭐 허냐?"
조웅남이 클럽과 그들을 싸잡아 훌어보면서 물었다.
   "꼭 도둑놈들맹키로."
강대홍과 오종표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저, 요즘 저희들은 이곳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클럼을 지킬 애들도 없고 해서‥‥‥‥ 
강대홍이 말하자 조웅남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대로 놔두고 우리허고 같이 가자."
   "예, 형님 ."
   대답부터 하고 나서 강대홍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디로 말입니까?"
   "따라와. 이야기할 것이 있어."
김칠성이 자르듯 말하고는 조웅남과 함께 몸을 돌렸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거리에는통금에 걸리지 않으려는 듯사람들이 바쁘게 서두르고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굵고 짧은 사이렌은 계엄군의 순찰차가 내는 소리였다.
   "우리는 결단코 괴뢰 도당들의 남침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정일의 주구들은 이미 동족임을 포기하고 이제 짐승의 무리로 변해 있습니다.

그들은 경제 정책 실패에 대한 북한 인민들의 불만을 남침으로 해소시키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땀 흘려 이룩한 재산과 산업을 송두리째 강탈하려고 합니다. "
대통령의 열떤 연설은 이미 15분이 넘게 계속되고 있는중이었는데 호소력이 있었다.

저녁 9시의 특별 방송이었으므로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전 채널을 통해 전국으로 방송되는 중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경수로 건설 자금으로 막대한 자금과 시설을 대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땀 흘려 번 돈이 몇조 원이나 그들에게 제공되었습니다.

을 막으려고 말입니다.

무슨 핵입니까?

그것은 우리 대한민국을 위협하기 위해서 개발한 것입니다.

그것을 막으려고 우리가 자금을 제공하여 경수로를 건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상대는 미국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중국? 아닙니다. 같은 동족인 대한민국이었단 말입니다.

 40여 년 동안 오직 군사력만을 확장하여 동족을 말살시키고
모든 것을 애앗을 준비를 해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
   대통령의 얼굴은 열기로 들떠 있었다.

두 눈을 치켜뜨고 두손으로 연단을 잔뜩 움켜쥐고 있다.
   "철천지원수라는 미국에게 꼬리를 치면서 동족인 대한민국을 무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러시아와 중국에게 아부하여 기름과 기계,식량을 얻고,이제는 미국의 발바닥을 할으면서

김정일 도당은 대한민국이 원수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한국을 공격하여 자신들의 기아를 해결하겠다고 합니다. "
   "잘 하시는군."
   텔레비전에서 눈을 땐 오학봉이 아내에게 말했다.
   "북한이 판단을 잘못한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이쪽의 방비뿐만이 아니라 국민들의 적대감도 높아지고 있어."
   "세용이한테 돈을 더 주었으면 좋TR는데."
아내가 바짝 그의 옆으로 다가앉았다.

대통령의 특별 방송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신이 공항에 사람을 딸려 보내면 안돼요?"
   "이 사람이 정말?"
   오학봉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신 날 죽이려고 그래?"
   "설마요."
   "설마라니,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기린 건설 김 사장은 처자식을 모두 보냈어요.

아마 있는 돈도 모두 걷어서 함께 보냈을 거요."
기린 건설 김 사장의 부인 고 여사와 오학봉의 아내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녀는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두 아들과 함께 어제 미국행 비행기를 탄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 그놈 보내는 것만 해도 얼마나 위험한 일이 ㄹ』 "
   "우리뿐만이 아닐 거요.교통부 장관 아들들도 미국에서 오지 않았다던데 "
   "조용해. "
   대통령이 연설하는 텔레비전 쪽으로 머리를 돌린 오학봉이 꾸짖듯 말했다.
   그는 통상 산업부 차관이었고 새로 편성된 전시 내각의 산업 감독관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전시 상황이라고 해도 국가의 경제와 산업은 움직여야만 했고 생산과 수출입도 최대한 유지시켜야 한다.

오학봉은 자신의 외아들인 오세용을 군수 공장의 기자재 구입 팀에 끼워넣어

내일 아침에 미국으로 보낼 계획이었다.
   "여보, 내일 세용이를 보내고 나하고 당신도 다음번에 떠날 수 없을까요?"
텔레비전을 향하고 있는 오학봉의 옆얼굴에 대고 아내가 다시 말했다.
   "베트남의 수상이었던 사람이나 장군들도 베트남이 망하기 전에 탈출해서 미국에서 삽디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
   "아, 시』1러 ."
오학봉이 버럭 소리를 쳤다.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다.
    "재수 없는 소리 그만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뭐가 재수 없어요?다른 사람들은 우리 같은 이야기 안하는 줄 아시우?"
아내는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모두 제 살길들은 마련해 놓고 있을 거요. 높은 사람일수록 더 그럴걸요.

그 사람들은 비행기를 대기시킬 수도 있으니까. 우리같이 어중간한 사람이나 당하게 될테지 "
   "이 여편네가 정말!"
   "날 버려 두고 당신이 떠나도 돼요. 세용이 혼자 보내는 게 걸려서 그래요."
   "이런 빌어먹을‥‥‥‥
   다시 텔레비전에서 몸을 돌린 오학봉이 아내를 바라보았다. 노여움이 조금 풀린 표정이다.
   "스물여섯이나 먹은 놈이니 제 앞길은 제가 닦아야지."
   "우리는 남들처럼 미국에 친척도 없단 말이에요."
   "돈도 10만 달러나 가지고 있어. 영어도 제법 하고."
   외아들이라 병역 면제는 되었지만 그의 여권에 도장을 받는데 학봉도 십년 감수를 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안기부의 박대규 차장이 도와 주지 않았다면 그것도 안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어, 놈들은 쉽게 넘어오지 못할테니까."
달래듯 말했으나 아내는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대통령의 연설은 끝부분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적의 침략에서 지켜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깁니다.

강하고 단결 된 힘으로 적을 격파합시다. "
오학봉은 아까부터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었는데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문득 깨달았다.
대통령은 연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통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통일은 식상한 단어가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동족간이라면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었다.

한민족의 통일 이라는 개념이 이제까지 심어져 온 이상

굳이 말한다면 병합이나 정복이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지긋지긋해 세용이는 한국에 돌아오지 말고 그곳에서 살아야 돼요."
   아내가 방을 나서면서 말했다
    "전시 상황이라 통화 검열을 할 거야. 그러니 나한테 전화 연락 할 것 없다. "
박도영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창 밖은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고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가 멈추었다.

유리창 너머로 서울 시가지의 불빛이 내려다보 였는데 등화관제를 하고 있어서

광고탑과 유흥가의 네온 사인은 모두 꺼졌고 한강변의 가로등도 보이지 않는다.
    "진 사장이 다 알아서 해줄테니까 넌 신경 쓸 일이 아무것도 없다. "
    "아버지, 정말 저는 이러고 싶지 않아요.

동료 직원들한테도 면목이 없고, 또‥‥‥‥

 

 

 

 

섬을 떠난 은둔자 (2)
  

 

박은채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박도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면목?얘가 아직 철이 덜 들었군.동료들이 네 인생을 책임져 준다더냐?"
   "그래도 친구들한테 인사도 못했는데."
   "뭐라고 인사를 할테냐?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네 허가증을 얻으
려고 계엄 사령부 놈들에게 얼마를 준지나 알아?우선 나부터 살고
볼 일이야. 살고 나서 통일이네 애국도 하는 거야."
아버지로부터 여러 차례 들어 온 말이었으므로 박은채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역 회사를 경영하는 박도영은 싱가포르에 지사가 있었고 상당한 액수의 자금도

현지 은행에 예치시켜 두고 있었다.

몇 년 전에 아내를 잃은 박도영은 무남독녀인 박은채를 회사 경영에 참여시키고 있었는데

이번에 싱가포르 지사로 파견하는 것이다.
계엄 사령부는 수출입 활동이 격감한 상황이었지만 합당한 사유라면 상사원의 출국을 금지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박도영은 박은채의 허가증을 급하게 얻으려고 상당한 액수의 돈을 쓴 모양이었다.
   "내가 보기엔 북한놈들이 쳐내려오면 미국놈들은 뒤로 빠질 거다.
어제도 필립한테서 전화가 왔었어.미국내의 여론도 그렇게 돌아간다고 하더라."
흰 머리가 반쯤 섞인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며 박도영이 말을 이었다.
   "북한놈들이 미리 남침하겠다고 통보한 것은 미국더러 전상자가 생기지 않도록 물러나 있으라는 수작이야. 필립의 의견도 그렇다. "
필립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박도영의 거래선이자 친구였다.

로스앤젤레스의 한국 교민들은 한국의 전시 상황에 맞추어 호국단을 결성하고는 전비를 갹출하고 있었다.

교민의 의용군을 파견한다는 보도도 있다 
박도영이 탁자 위에 놓인 위스키 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나도 곧 싱가포르로 따라갈 게다. 서울에 남아 있다가 공산당 놈들에게 당하고 싶지 않아.

남아 있다고 애국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도망친다고 반역자인 것도 아냐."
   "큰소리치던 놈들이 한두 놈이었더냐? 그농들더러 나라를 지키라고 해.

내 생각에는 그놈들이 나보다 먼저 떠날 것 같다마는."
   "아버지, 북한이 미국과 우리에게 뭔가 큰 양보를 얻어내려고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신문 사설에도‥‥‥‥
   "그 잘난 북한 전문가들 말이지? 그놈들이 야말로 반역자다.

북한 놈들이 쳐내려 왔을 때 그놈들은 공산당 놈들에게 그럴 게다.

우리가 이쪽 분위기를 흐트려 놓았습니다,

그러니 상을 주시오, 하고."
   "하나도 도움이· 안돼, 그놈들 이야기는. 그리고 신문도 마찬가지
"t. 계엄 사령부는 그것도 통제하지 않고 무얼 하는지 모르TR다. "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북한에게 쳐내려을 구실만 준다구요."
   "이미 그놈들에게 놀아나고 있어,이쪽은.그놈들의 의도를 알고 있는 놈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 차라리 남침해 온다고 믿고 있는 게 낫다. "
박은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큰 키에 마른 몸매였고 또렷한 검은 눈과 부드러운 입술이 화사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에 긴 머리는 뒤에서 끈으로 묶어 올렸다.
   "저 이만 가서 잘래요."
   "그래라. 비행기 시간은 내일 오후니까 아침에 천천히 준비해도 된다. "
응접실을 나온 박은채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방안을 무심한 시선으로 둘러보던 그녀는 이윽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세 식구가 동해 바닷가에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이 경대 위에 걸려 있었다.

가져갈 짐이래야못가방 몇 개 뿐이었지만 짐을 꾸리는 데도 하루종일이 걸렸다.

그런데 저 사진을 빼놓은 것이다.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숨을 내쉰 박은채는 힘든 듯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조국애라던가,또는 공산당에 대한 불안감이나 분노의 감정은

아직 rl신의 가슴속에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지는 않다.

어렸을 때 6·B5를 겪은 아버지는 북한에 대해서라면 무조건적인 불신과 적개심을 보이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말대로 나서서 할 일도 없을 뿐더러 그의 책임도 아닌 일이었다.
박은채는 액자에 들어 있는 사진을 빼내어 방 한쪽에 세워 놓은 가방 속에 집어 넣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같이 떠나게 되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박은채는 문득 이렇게 떠나는 자신이 선택받은 자이고

그것에 대해 크게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다 다카오가 신발을 벗고 다다미 방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셨던 무라야마 고지가 그의 손을 잡았다.
   "혼다, 식사는 했나?"
   "했어 ."
그들은 낮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다다미방에 마주앉았다.
무라야마의 자은 집은 30평도 안되었지만 세 평쯤 되는 정원에는 손바닥만한 연못도 있다.

일본 자민당의 간사이며 외무 장관인 무라 야마는 이 자은 집으로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올랐다.

처음에는 검소한 생활로 매스컴에 떠들썩하게 보도되었다가 그가 자민당의 자금책인 것이 밝혀진

뒤로는 가면을 쓴 행위라고 지탄을 받았는데 지금은 잊혀지고 있다.

국민들은 쉽게 잊고 용서해 주는 것이다.
혼다 다카오와는 그가 정보 국장으로 가기 전까지 같은 연배로 같은 당의 의원 생활을 해서

 말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무라야마가 사기잔에 차를 따라 건네 주면서 입을 열었다.
   "미국은 예비군을 소집하고 있어. 한미 방위 조약의 작전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단 말이야.

성실한 우방으로 보이고 있어."
그는 한모금 차를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공군력도 증강되어 가고, 북한이 쳐내려오면 애 좀 먹을 거야."
    "이봐, 무라야마, 그런 이야기는 신문에도 났어."
    혼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캘리포니아의 바스토우에 모인 제82예비사단 병력은 소집 명령
이 내려진 지 이틀이나 지났는데 30퍼센트도 안돼. 그리고 네바다의
핸든 공군 기지에 집결한 75공수사단은 5박 6일의 야간 훈련을 시작
 했어. 그런데 그 훈련이란 것이‥‥‥‥
                                           섬을 떠난 은둔자 109
   혼다는 자신의 목소리가 크다고 느꼈는지 소리를 낮추었다.
   "훈련 계획에도 없는 야간 훈련이야. 놈들은 부대 원들의 외출 외
박을 통제하는 대신 영내에 풀어 놓고만 있어. 외부에는 야간 훈련을
한다고 해놓고."
   "우리 요원들의 눈을 속이지는 못해. 놈들은 움직이는 시능을 하
지만 실제로는 아니야. 무라야마, 한국이 야단났어, "
   "오후에 윈필드가 찾아왔어."
   무라야마의 말에 혼다가 눈을 치켜떴다. 로버트 윈필드는 주일 미
국 대사이다.
   "윈필드는 미국이 미일 방위 조약을 충실히 지킬 것이라고 하더
군.그리고 한국전이 발발했을 때 방위 조약대로 일본 기지 사용에
대해 확인을 하고 갔어, "
   "그 자식, 우리가 진주만 때 하던 방법을 써먹는군."
   "클린트가 하시모토 수상한테 전화를 할 거라고도 하더구만. 어떠
한 무력 도발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재천명하는 내용이라는 거
야."
   "선거 직전에 머리 왜나 아프겠어, 인기도 떨어져 있는 판에."
   혼다가 허리를 세우자 작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앉은키가 무
라야마와 비슷해졌다. 상반신이 긴 때문이다.
   "아침 회의 때 이야기 다 한 걸 또 중얼거리려고 날 부른 것은 아
닐테고, 날 보자고 한 이유를 말해, 무라야마."
   "성질은 여전히 급하군."
   "북한에게 엄중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 우리 정부가 하루종
110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일 걸려서 결정한 일이야. 나는 그것이 화가 나서 그래."
   "저녁 때 수상과 만나고 왔어,윈필드의 이야기를 전하러 갔을
때."
   무라야마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수상은 자위대의 파병도 고려하고 있어. 원내에서 가토가 발의할
거야. 그 전에 은밀하게 교섭해 나갈 것이고."
   "우리 쪽은 문제가 없겠지만 한국이 걸려 . 놈들은 철없이 반일 감
정이 강해.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군이 상륙한다면 소동이 날 거야."
   굳어진 얼굴의 혼다가 말을 이었다.
   "미국은 미국대로 지상군을 금방이라도 파견할 것처럼 해 보이면
서 일본군의 파병을 희석시킬 것이고, 아마 여러가지 경로로 압력을
넣고 방해를 할 거야."
    "수상은 가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하시모토가 노망은 안 들었군. 가만 있으면 안돼. 미국은 우리가
파병하면 어쩔 수 없이 지상군을 보내야 할테니 끌려 들어가는 셈이
되겠지 우리와 미군을 합쳐서 수십만의 사상자가 날 거야. 콜린트건
제이슨이건 총대를 멘 놈은 떨어지게 되어 있어,지금의 여론으로

   "미국은 참전할 것같이 보이면서 우리 일본군까지 막파가 결정적
인 순간에 북한에게 남한을 넘겨줄 확률이 있다. 맞는가?"
    "지금의 상황으로는."
    머리를 끄덕인 무라야마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수상의 지시야. 혼다, 잘 들어."
    "말해, 무라야마."
                                           섬을 떠난 은둔자 1 1 1
    "정보국도 움직여 주어야겠어, 혼다. "
    혼다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몹시 답답한 듯 얼굴이 찌푸려져
있다.
    "자네 부하들을 동원해서 모든 상황을 점검해 줘. 그리고 정보가
있으면 그것을‥‥‥‥
    "그것을 어떻게?"
    "그것을 한국측에 넘겨주도록 해. 도와 주란 말이야. 그들은 아마
CIA의 견제를 받고 있을 거야."
    "수상의 지시인가?"
    "이런 바보같이 ‥‥‥‥
    무라야마가 혀를 찼다.
    "관료 생활을 오래 하더니만 답답한 녀석이 되었군, 너는. "
    "알겠다. "
    혼다가 자리를 고쳐 앉더니 무라야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럼 내 식으로 처리해 나가겠다. "
    "일이 있으면 나하고 상의하라구."
    "좋아. "
    크게 머리를 끄덕인 혼다가 식어 버린 찻잔을 들었다.
   1월 16일 오전 11시.
   대통령의 집무실 안이다. 탁자 앞에 앉은 대통령의 앞쪽으로 비서
실장인 박종환과 외무 장관 안승재, 안기부장 임병섭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조금 전에 옆방의 회의실에서 매일 아침에 열리는 계엄하의
비상 각료 회의를 마치고 그들 네 사람만 대통령 집무실로 자리를 옮
112 밤의 대통령 제3부 - I
긴 것이다.
   대통령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초췌해져 있었다. 엊저녁
의 연설에서 보였던 활기 있고 자신에 찬 얼굴이 아니다. 그는 앞에
놓인 우유잔을 들어 서너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입술 윗부분에
횐 우유 거품이 묻혀져 있다.
   "하긴 키드먼의 말도 일리가 있어. 안 장관이 와 있는 줄 알면 북
한놈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
   대통령이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미국측도 꺼림칙할 거야. 도마 위의 고기가 감놔라 배놔
라 하는 상황이 될테니까."
   "각하, 민국측이 전쟁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의도는 확실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어떤 조건이냐가 문제입니다만."
   임병섭이 입을 열었다.
   그는 키드던 국장으로부터 어젯밤에 전화를 받은 것이다. 미국측
은 1월 20일의 회담에 안승재가 취리히에 오는 것도 사양하고 있었
다. 북한을 자극할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전에도 있었습니다. 경수로 문제로 제네바에서 회담이
열렸을 때 그랬지요."
   "놈들은 우리가 미국의 속국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려 주려고
했어 ."
   대통령이 눈을 치켜떴다.
   "내 평생에 그렇게 자존심이 상한 적도 없었다. 부끄러웠어, 국민
들에게, "
   "각하께서는 당당하게 표현하셨습니다. 국민들은 각하를 이해하
                                          섬을 떠난 은둔자 113
고 있습니다 "
   임병섭이 말을 받자 대통령은 잠자코 머리를 돌려 안승재를 바라
보았다.
   대통령은 경수로 건설 문제가 북미 회담으로 결정되자 대 국민 발
표를 통해 주권이 침해당한 것 같은 대한민국의 외교 실정에 대해서
국민들에게 사과를 했다.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서 적절한 대응 방법
을 갖추지 못했던 자신의 불찰을 솔직히 털어놓았는데, 그러자 국민
들은 그것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솔
직하다는 표현보다 정치와 상황 감각이 뛰어난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외교 실무는 외무 장관의 소관이자 책임이다. 안승
재는 이제까지 한번도 감정을 표현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주관이
없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의논 상대가 되어 주고 있
어서 그는 대통령에게 의지가 되는 인물이었다.
    "안 장관의 의견은 어떤가?"
   "저는 잠입해서라도 취리히에 가겠습니다. "
    "호오, 잠입한다. "
    의외라는 듯 대통령이 눈을 점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
    "없더라도 효과는 있을 것입니다. 부담이라도 주겠지요."
   "안보 이사회의 소집도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저는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합니다. 각하, 이대로 앉아만 있을 수는‥‥‥‥
   안승재가 대통령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국이 요구한 유엔의 안전 보장 이사회 소집은 중국과 러시아,
114 밤의 대통령 제3부 - I
그리고 프랑스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고 있었다.
   북한이 남침 계획을 통보했다는 회의는 비공식 회의였을 뿐만 아
니라 그 사실을 믿을 수도 없고 현상황에서 보면 전쟁 준비를 하는
것은 오히려 남한과 미국이라는 이유였다.
   유엔 주재 북한 대사는 오히려 남한이 북침을 준비하는 상황이라
며 길길이 뛰며 비난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이 터무니없는 각본을 짜
고 북한을 공격하려 한다면서 동정을 호소하기도 했다. 또한 북한의
김사훈도 외신 기자들에게 자신은 취리히에 간 적이 없을 뿐더러 로
젠스턴이나 패트릭스를 만난 적도 없다면서 미국의 거짓말에 맹렬히
분개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머리를 」1덕였다.
   "좋아.가게,안 장관, 가서 소신껏 하게."
   "각하, 감사합니다. "
   "각하, 제가 어떻게든 도우려고 합니다. "
   임병섭이 입을 열자 대통령이 다시 머리를 』1덕였다.
   "그래,안 장관을도울사람은 임 부장밖에 없을 것 같군 어차피
우리 일이야."
   달리는 차 안에서 임병섭은 텅 비어 있는 광화문 사거리를 바라보
았다. 간간이 승용차들이 지날 뿐 넓은 길은 빈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후 1시면 며칠 전만 해도 차가 도로를 가득 메울 시간이었다.
   한산한 거리는 마치 평양의 거리와 비슷했고 이순신 장군 동상 밑
에 세워져 있는 두 대의 탱크가 더욱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길게 숨을 뱉어낸 임병섭은 차의 등받이에 깊게 등을 묻었다.
                                          섬을 떠난 은둔자 115
   탱크의 포신이 남대문 쪽을 향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자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적들은 남대문 쪽으로 해서 서울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을 향해 포신을 돌리려면 청와대 쪽으로 포신이 향해져야 한다.
   그때 카폰이 울렸다. 앞자리에 앉은 수행 보좌관이 전화를 귀에
대고 응답을 하더니 몸을 돌렸다.
   "부장님, 일본 정보 국장 혼다 씨입니다. "
   "흔다 국장?"
   번쩍 상체를 든 임병섭이 손을 들어 전화기를 받았다. 두 눈샙이
치켜올라가 있었다.
   "여보세요, 임병섭입니다. "
   "임 부장, 나, 혼다 다카오입니다. "
   "웬일입니까, 갑자기?"
   그와는 서너 번 통화를 한 적이 있어서 목소리가 귀에 익다. 혼다
가 웃음 소리를 내었다.
   "임 부장, 지금 한반도 상공에 우리 일본의 위성 노부나가 호가 지
나고 있습니다. "
   "그런가요?"
   "지금 우리 통화는 어느 놈도 도청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
   "훌릉한 전자 장비요, 혼다 국장."
   임병섭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그러면 지금 내가 어디에 있다는 것도 아시겠구만."
   "임 부장, 우리 일본 정보국은 당신들을 도와 줄 계획이오."
   혼다의 목소리에서도 밝은 분위기가 사라졌다.
   "지금은 정보국의 차원에서 임 부장에게 협조 용의가 있다는 것을
116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말씀 드리는 겁니다, 임 부장."
    "국가 이기주의가 우선인 것이오. 임 부장, 우리 사이에 구차한 우
방이네 신의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
    "상황을 잘 알고 계시는 모양이군,혼다 국장께선."
   "잘 알고 있소. CIA가 당신들을 견제하고 있다는 것도. 미국 내의
지상군 동원 실태도 자세히 알고 있고."
   "미국이 좋아하지 않을텐데."
   "글쎄, 키드먼은 예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
요. "
   "통일 한국이 당신들에게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지요, 물론."
   "적화 통일이 당신들에게 바람직한 것도 아니지 않소?"
   전화기를 귀에 댄 임병섭이 잠자코 있자 혼다가 말을 이었다.
   "따라서 지금 남한과 일본의 목표는 같소. 서로 빼앗을 것이 없는
데다가 뺏기면 안되는 공동의 목표가 있단 말이오. 내가 도와 드리겠
소, 임 부장 "
   "받아들이겠소, 혼다 국장."
   "그래야 합니다, 당연히."
   손에 땀이 배어 나왔으므로 임병섭은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차는
겨울의 한산한 길을 속력을 내어 달려가고 있었다.
    공항 출국장 옆의 기념품 상점에는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고 점원
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문만 열어 놓고 점원은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았다.
                                           섬을 떠난 은둔자 117
    기념품 상점의 쇼원도에 등을 기대고 선 큰 키의 여자가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한 시선이었다. 검정색의 풍성한 느
낌을 주는 바바리 코트 차림으로 긴 머리를 뒤에서 묶어 올려서 얼굴
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눈꼬리가 살짝 치켜오른 생기 있는 눈과 곧고 단정한 입술이 눈에
띄는 여자였다. 두 손을 코트의 주머니에 찔러 넣고 선 그녀의 옆 밑
바닥에는 조그만 짐가방 한 개가 놓여 있었다 가벼운 여행길에 오르
는 차림이다.
    반대편 벽에 붙여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강대흥은 아까부터 그
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볼수록 신선함이 느껴지는 여자였다.
   "저 여자는 미국 시민권이 있거나굇발이 대단한 여자 같군요,형
님"
   .t.종표가 턱으로 앞쪽의 여자를 가리켰는데 마침 그녀의 시선이
오종표의 턱놀림을 보았다. 여자가 반쯤 몸을 돌리면서 시계를 내려
다보는 시능을 했다.
   덩달아서 시계를 내려다본 강대홍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오종표가
눈을 치켜떴다.
   "형님, 어딜 가시려고?"
   "시간이 좀 있어."
   "곧 형님들이 오실텐데
   "잠판이면 돼 ."
   강대홍이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가 앞에 멈추어 섰으나 그녀는 시
선을 돌리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
11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여자가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건 왜 물으세요?"
   "혹시 같은 방향이 아닌가 해서‥‥‥ 난 자카르타로 갑니다. "
   "난 아닌데요."
   잠시 말이 끓어졌다 여자가 저쪽으로 조금 더 몸을 돌렸으므로
강매홍도 그쪽으로 몸을 옮겼다.
   "어디서 뵌 분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난 강대홍이라고 합니
다. 영동에서 장사를 하다가‥‥‥‥
   강대홍이 열심히 말하자 여자가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한국 국적인가요?"
    그렇게 묻자 여자가 퍼뜩 머리를 들었다.
   "그래요. 한국인이에요."
   "이런 때 출국하시려면 영업 출장이라고 해도 계엄군의 허가를 받
기가 어려울텐데."
   "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좀 비켜 주시겠어요?"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여자가 굳게 입을 닫았으므로 강대흥은 입맛을 다셨다. 상황 때문
이기는 하겠지만 그에게 이것은 드문 경우였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호감을 보였고 적어도 말대꾸는 성실히 해주었다.
   "당신같이 멋진 여자가 눈앞에 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요. 그저 이야기나 나누고 싶었는데‥‥‥‥
   강대흥이 반걸음쯤 물러났다.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 마음이 심란하신 모양이라 내 말이 귀
                                           섬을 떠난 은둔자 119
에 들리지도 않는 것 같구만."
    "또 봅시다. "
    돌아서서 휘적이며 걸어오는 강대흥을 보자 오종표가 얼른 머리를
돌렸다.
   1월 16일 오후 2시.
   공항 입구의 국제 선으로 들어가는 차도에 차들이 밀려 있었다. 길
양쪽에 서 있는 군인들이 출국자와 환송자를 제각기 점검하고 환송
자에게는 통행증을 발부해 주기 때문이다.
   "출국하는 사람들이 봬 많네."
   김칠성이 혼잣소리처럼 말하자 앞좌석의 고동규가 머리를 돌려 그
를 바라보았다.
   "계엄 사령부 허가증을 위조한 일당이 어제 잡혔어요. 한 사람당
천만 원에서 1억까지 받았던 모양이오."
   "신문에는 나지 않았던데."
   "통제했지요. 놈들은 중형을 받게 될 겁니다. "
   "돈내고 산 놈들도 잡쳐겠군."
   "물론이오."
   무장한 군인들에게 여권과 허가증을 보인 그들은 출국장 앞에서
차를 내렸다.
   "억울헐 거여. 공산당 놈들이 쳐들어와서 몽땅 뺏어가은 말여."
   조웅남이 말하자 고동규가 머리를 』1덕였다.
   "하긴 그렇습니다. 하지만 놈들은 비겁한 반역자들이지요. 놈들
120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모두가 기업체 대표에다 사회 유명 인사들입니다. 아마 중형으로 처
리되겠지요."
    대합실의 입구에서 다시 허가증과 여권 검사가 있었다. 사람들로
들끓고 있는 대합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
다. 출국하는 들뜬 분위기가 아니다. 어느 공항이나출국장은 떠나는
사람이나 배웅하는 사람이나 조금씩 들뜬 기분으로 술렁대는 것이
정상인데 이곳은 무건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모두 긴장해 있다.
   조웅남이 두 팔을 휘저으며 출국장 입구로 다가가자 옆쪽에서 강
대흥과 오종표가 나타났다. 반가운 듯 그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져
있었다.
   "형님, 이제 오십니까?"
   "그려, 일찍 왔구나, 느그덜은."
   티켓은 미리 받아 둔 상태이므로 그들은 곧장 출국장 안으로 들어
섰다.
   안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도열해 서 있었는데 한쪽 구석에 몰려 있
는 출국자들이 보였다.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허가증을 보십시다. "
   여권과 허가증을 넘겨준 김칠성이 조웅남을 바라보았다.
   "빠져 나가기 힘 들겠군요, 형님."
   조웅남이 혀를 찼다.
   "도망갈 놈들은 가라고 허지 왜 붙잡고 난리다냐, 난리가?"
   여권 검열이 끝나기를 기다리려고 그들은 벽 쪽으로 다가갔다. 조
웅남의 입술이 뒤틀려 있었는데 잔뜩 못마땅한 표정이다.
   "미 공군 기지 근처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답니다. 미군과 결혼한
                                          섬을 떠난 은둔자 121
한국 여자들이나 군속들에 끼여 미군기를 타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
에요."
   고동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군측쉐서 티켓을 판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한 장에 10만 달러
라는 말도 있고 50만 달러 상당의 귀금속이나 달러를 가진 사람에게
는 요금이 싸다고 하는데 ."
   "장사가 잘 되겠군 땅만 가지고 있던 놈들이 안됐어. 땅을 짊어지
고 도망갈 수도 없고."
   김칠성이 말을 받자 조웅남이 머리를 돌렸다.
   "거그 가서 우리가 장사허는 건디."
   "어디 말이요? 미국 말입니까?"
   "이런 빙신 같은 놈."
   욕을 얻어먹은 김칠성이 입맛을 다시고는 머리를 돌렸다 조웅남
이 고동규에게로 몸을 돌렸다.
   "거그가 어디여? 미군 기지가?"
   "오산, 군산, 대구 등이지요. 그곳에서는 하루에 너더댓 차례씩 군
용기가 일본으로 뜹니다. "
   "애들허고 거그 가서 사업을 벌이는 건디."
   그때 대위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사병 두 명이 그를 따르고 있
다. 그들을 지난 대위가 사람들을 향해 섰다.
   "박은채 씨 있습니까?"
   조용해진 사람들 사이에서 20대 중반의 여자가 두어 걸음 앞으로
나왔다. 바바리 코트의 벨트를 죄어 묶어 큰 키가 돋보였고 두 눈이
긴장으로 크게 뜨여 있다.
122 밤의 대통령 제B부 - I
   "전데요."
   "잠깐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가 다가오기도 전에 병사들이 다가가 그녀의 양팔을 잡았다.
   "이거 왜 이래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린 여자가 소리치듯 말했으나 반항하지는
않았다.
    "이봐, 대위 ."
    고동규가 여자 뒤를 따라 지나치려는 대위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야?"
    "허가증 문젭니다. "
    "위조한 거야?"
    "아닙니다. "
    잠시 망설이던 대위는 고동규의 시선을 받자 다시 입을 열었다.
    "계엄사의 장교 몇 명이 뇌물을 받고 허가증을 내준 혐의로 구속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허가증을 발급해 준 명단을 저희가 입수했
는데 ‥‥‥‥
    "저 여자도 끼여 있단 말이지?"
    "예, 중령님 ."
    몸을 돌린 대위는 바쁜 듯 여자의 뒤를 따라갔다.
    "저것 봐_5., 형님 ."
    오종표가 강대홍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저 여자‥‥‥‥
    "알고 있어, 임마."
    강대홍은 그를 젖히고는 앞쪽으로 나아갔다.
                                           섬을 떠난 은둔자 123
   "형님 ."
   조웅남의 앞에 선 강대홍이 두 눈을 부릅떴다.
   "형님, 저 여자를 빼내 주십시오."
   "누구 말이여?"
   김칠성과 이야기를 하던 조웅남이 멍한 얼굴로 물었고 김칠성과
고동규도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기 방금 군인들한테 끌려간 여자 말입니다. "
   "왜?"
   김칠성이 물었다.
   "아는 여자냐?"
   "네 , "
   "어떻게?"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
   "어떤 관겐데?"
   "예, 제 애인입니다 "
   잠자코 있던 조웅남의 목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씨발놈은 아는 년도 많고만. 해필이은 이런 디서‥‥‥
   김칠성이 다시 나섰다.
   "야, 임마, 허가·증 문제로 끌려간 모양인데 형님이 어떻게‥‥‥‥
   "저 애는 기술잡니다. 마취 기술자지요. 약만 있으면 틀림없이 일
을 끝내는 앤데 제가 하와이에 있을 때부터‥‥‥‥
   "하와이에 있을 때부터 알았어?"
   "예, 형님."
   "그런데 저 여잔 지금 어디 가는 거야?"
124 밤의 대통령 제B부 - I
    "예, 잠간 나가 있겠다고."
    김칠성이 머리를 저었다.
    "놔둬라. 우린 그런 일에 신경 쓸 형편이 아니다. 잊어버려, 임
마. "
    "형님‥‥‥‥
    그러자 강대홍에게 한걸음 다가간 조웅남이 냄비 뚜껑만한 손바닥
으로 그의 뺨을 쳤다. 면적이 넓은 만큼 소리도 컸으므로 출국대 근
처의 모든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지기미 씨발놈 같으니."
    조웅남이 으르렁대듯 말하며 머리를 숙인 강대흥을 노려보았다.
    "자지도 격판한 것이 지집을 밝히기는."
    머리를 돌린 조웅남이 고동규를 바라보았다.
    "야, 저 지집년을 빼내라."
   "예? 형님, 그것은‥‥‥‥
   "마취쟁이라는디 데꼬 가서 써먹을 수도 있겄다. 시원찮으은 갖다
버리면 되고."
   김칠성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조웅남을 바라보았으나 말리지는 않
았다.
   "뭐 혀? 니 끗발로 빼낼 수 있잖여?"
   조웅남이 다시 말하자 고동규가 마지못한 듯 몸을 돌렸다.
   승용차의 히터를 오래 틀어 놓았으므로 차 안의 공기에서 기름 냄
새가 났다. 운전석 옆쪽의 창을 손가락 한마디만큼만 내려놓았는데
도 그 부분만 마주친 얼굴의 피부는 얼음을 댄 것처럼 차다. 밖은 영
                                          섬을 떠난 은둔자 125
하 10도가 넘는 날씨였고 매서운 바람에 나무 밑에 쌓인 눈가루가
어지럽게 흘날리고 있었다.
    지희은은 및자리에 놓인 보온병을 들었다. 뚜껑을 열자 아직 따뜻
한 커피의 김이 피어올랐고 구수한 향기가 맡아졌다. 그러나 남은 커
피는 한 잔 분량밖에 되지 않았다 눈가루가 앞쪽 유리창에 덮여 왔
으므로 그녀는 윈도 브러시를 작동시키고 나서 잔에 커피를 따랐다.
얼어붙은 차도를 왜건 한 대가 바퀴의 체인을 덜거덕거리면서 지나
갔다.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도 저녁 때가 된 것처럼 하늘은 어두
웠다. 지희은은 커피를 한모금 삼키고는 길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렸
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3r즘짜리 벽돌 양옥집의 현관이다.
   눈가루를 뒤집어쓴 승용차들이 차도 가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고
인도 옆쪽으로 벽돌이나 대리석으로 건축된 주택들이 늘어서 있었는
데 인적은 드물다.
   한두 명의 통행인이 바쁜 걸음으로 지나갈 뿐이고 차도를 달리는
차량도 뜸한 주택가였다. 유리창 사이로 휘몰려 온 바람이 이마에 당
았으므로 그녀는 창을 끝까지 을렸다.
   벌써 네 시간레 이러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지루하지는 않았
다. 작년에 제네바에서는 호텔 앞에서 북한인을 일곱 시간 기다린 적
도 있었다. 커피잔의 바닥에 고인 마지막 한모금까지 마시고 났을 때
휴대폰의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f41. "
   정상혁의 목소리였다.
126 밤의 대통령 제3부 - I
   "그쪽 어때? 아직도야?"
   "네 . "
   그녀는 벽돌집의 굳게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북한 대사관의
공보관 이필수는 지금 앙리 주르메의 집에 들어가 있었다. 요즘 들어
그는 일주일에 두 번꼴로 이곳에 찾아와 머물다 갔는데 그것은 북한
의 문화재 판매에 관한 일 때문일 것이었다.
   앙리 주르메는 취리히 시내에 쫴 큰 화랑을 운영하고 있는 거부였
다. 그가 북한에서 반출해 온 문화재를 팔아 1, 2년 사이에 큰 돈을
모았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다.
   "요즘은 이필수가 자주 그곳에 가는구만. 북한이 자금을 모으려고
애를 쓰는 모양이야."
   정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나왔다.
   "놈들은 문화재 가치도 모르고 있어. 그것을 한국의 미술상에게
팔면 몇 배 더 받을 수 있을텐데."
   "지루해요, 정 중령님,"
   지희은이 하품을 참으며 말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죠?"
   "이봐, 지금 한국에는 계엄령이 내려졌어. 언제 북한이 쳐내려을
지 토른다구 그리고 이곳은 그 진원지야."
   정상혁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린 놈들의 어떤 행동도 놓치면 안돼.
몇 명 안되는 인원이지만 하는 데까지 해보는 거야."
   수화기를 잠시 귀에서 떼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
려 왔다.
                                          섬을 떠난 은둔자 127
   "하지만 너무해요. 이곳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요원들을 증원시
켜 주지 않죠?세 명의 인원으로 뭘 어떻게 한다고‥‥‥‥
   그러자정상혁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차 안의 공기가 탁해져
있었으므로 지희은은 유리창을 조금 더 내렸다.
   "곧 사람들이 올 거야."
   정상혁이 말하자 지희은이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요원들이 와요? 언제는 요원들이 움직이지 못한다면서?"
   "아니, 다른 곳에서."
   그때 벽돌집의 나무문이 열리더니 이필수가 밖으로 나왔다. 검정
색 모피 코트에 손에는 가죽 가방이 들려 있다. 인도에 내려선 그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자 지희은은 몸을 굳혔다. 그의 시선이 이쪽을 스
치고 지났으나 눈치챈 것 같지는 않다. 차도에 세워진 그의 검정색
벤츠의 차체에는 눈가루가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지희은은 휴대폰의 스위치를 끄고는 브레이크를 풀었다.
   시바다 겐지는 검정색 벤츠의 뒤를 따라 흰색 시트로앵이 시야에
서 사라지자 옆에 앉은 다케무라 한죠를 바라보았다.
   "다케무라, 줄줄이 따라가는 걸 보면 서양놈들이 웃겠다. 우린 사
무실로 돌아가자."
   "부장님, 괜찮을까요? 저 여자가 다른 곳으로 샐지도."
   다케무라가 브레이3를 풀면서 말하자 시바다는 머리를 저었다.
   "이필수가 꼬리를 잡힐 농이 아냐."
   "그래도 앙리 주르메는‥‥‥‥
   "취리히에서 저놈은 북한 골동품을 받아 과는 거간꾼으로 알려져
128 밤의 대통령 제8부 - I
있어. 한국측이 알아낼 수 있는 것도 그 이상은 없을 거야."
   시바다가 힐끗 벽돌집을 바라보았다.
   "남한은 외국으로 반출된 유물들을 사들이려고 야단이고 북쪽은
정부에서 팔아먹는군."
   "북쪽이 남한을 점령하면 피 장파장이지요.제놈들이 판유물들이
돌고 돌아 남한에 와 있을 것 아닙니까?어차피 다시 갖게 되겠군
요."
   그들이 탄 차는 차량의 왕래가 많은 시내로 들어섰다. 인도를 걷
는 사람들은 추위에 잔뜩 웅크린 모습들이었다. 차도의 눈이 바퀴의
마찰에 녹아 질적였으므로 다케무라는 속력을 줄였다.
   시바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들었다. 40대 후반으로 짧
은 머리에 다부진 인상의 사내였는데 일본 정보국의 부장으로 국장
인 흔다 다카오가 신임하는 부하였다. 그가 다이얼을 누르자 곧 저쪽
에서 응답이 왔다.
   "여보세요."
   사쿠라이의 목소리였다.
   "나, 시바다야."
   "부장님, 이쪽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
   "말루치는 오늘 저녁에 그곳에 있을 거야. 아까 미국측한테서 들
었어 ."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도,"
   "기다려. 스케줄을 모르고 기다리는 친구도 있으니까. 그걸로 위
로를 삼고."
   "알겠습니다, 부장님 ."
                                          섬을 떠난 은둔자 129
    휴대폰의 스위치를 끄자 다케무라가 그를 바라보았다.
    "북한 공작원 몇 명이 숙소를 취리히 호 남쪽으로 옮겼어요. 어젯
밤에 비밀리에 움직였는데 무슨 꿍꿍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
    시바다가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회담이 시작되면 모일테니 어디에 처박혀 있건 상관없어 "
    "북한측 공작원 숫자가 쾌 되는 모양이던데요.곤도 이야기로는
30명에서 40명은 족히 된다고."
    다케무라는 붉은 신호등을 보고 차를 세웠다. 날씨가 어두워져 가
면서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했으므로 그는 윈도 브러시의 작동 속도
를 빠르게 조정했다.
   "우리측과 미국측도 몰려와 있고, 취리히의 물가가 뛰겠군요, 부
장님 ."
   "중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정보원들도 몰려와 있어. 아
마 세계의 이렇다 할 정보 기관들은 모두 이곳에 일급 요원들을 파견
해 놓았을 거야."
   신호가 바뀌자 다케무라는 차를 발진시켰다. 바퀴가 잠깐 첫돌던
혼다 시빅은 튀듯이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한국측은 웬일일까요? 정보 요원이 서너 명밖에 없으니."
   혼잣소리처럼 다케무라가 말하자 시바다가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그들대로 무슨 수를 쓰겠지. 가만히 앉아 있을 놈들은 아니니
까"
   "내일 외무 장관이 이곳에 도착하지요? 수행원은 세 명뿐이라면서요?"
   "그렇다더군. 비공식 방문이니까 이곳에서 그를 반길 사람이나 맞을 사람은 한 명도 없어."
   "감시를 받아 움직이지도 못할 거야."
   "안됐군요. 조만간 침공일이 다가오는데."
   "유럽의 한국 안기부 요원들은 모두 CfA에 파악되어 있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해.

동맹국 사이니까 정보가 샅샅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지."
   시바다가 얼굴을 허물어뜨리면서 웃었다.
   "우선 깔보이지 않으려면 이쪽이 강해져야 돼. 한국 사람들, 가엾
지만 정신 못 차린 대가를 받는 거야. 이건 딱 4백 년 전의 우리와 조
선의 전쟁 때와 비슷해. 남한은 당파 싸움과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던
조선과 비슷한 상황이야."
   "그렇습니까?"
   "지금은 명나라 대신 미국을 믿고 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상황이더 나쁜지 모르겠군."
앞쪽에 그들이 숙소로 쓰고 있는 모텔 건물이 보였다.

2층짜리 모텔 전체를 빌려 쓰고 있었기 때문에 현관에 모텔 직원과 함께 서 있던

부하 한 명이 아는 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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