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2. 계엄령

오늘의 쉼터 2014. 12. 16. 15:56

2. 계엄령(1)

 

 

 

   1월 12일 정오.
   "예비역 동원령을 내리면 사흘 안에 2백만 명이 동원됩니다. 그리
고 45세까지의 방위군을 추가로 편성하면 다시 150만 명의 병력이
생깁니다. "
   국방 장관 김형태의 말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현재 기름 보유량은 65일분이며 전시 체제로운영하면 120일 정
도는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정부의 양곡 보유량은 950만 섬으
로‥‥‥
   "잠간만."
   대통령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북한은 단 열흘에 남한을 점령하겠다고 했어요. 열흘이야, 국방장관. "
   "예, 각하, 그것은 허풍입니다. 6 · 25 때처럼 우리가 기습을 받는것도 아니고 우리의 대비도‥‥‥‥
   "합참 의장의 생각은 어떠시오?"
   대통령의 시선이 합참 의장인 강동진 대장에게로 옮겨졌다
   "그들이 열흘 안에 남한을 장악할 수 있겠소?"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는 40년 동안 연구해 두었습니다만 각하."
   강동진의 말에 방안의 시선들이 그에게로 모아졌다.

청와대의 회의실 안은 당과 정부, 그리고 군의 고위 간부들이 모두 모여 있었지
만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각하, 전시에는 작통권이 한미 연합 사령관인 매그루더 대장에게 이양됩니다 "
   "그건 알고 있소, 합참 의장."
   "놈들의 말대로라면 한 달가까운 시간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병력과 장비가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
    "만일에 말인데 ‥‥‥‥
    대통령이 말을 멈추고는 헛기침을 했다.
    "전시 상황이 되었을 때 매그루더가 작전을 변경한다면,

예를 들어 군대를 움직이지 않는다든지 후퇴를 한다든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각하."
    강동진이 눈을 치켜뜨고는 상기된 얼굴로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연합사에 부사령관인 이영규 대장이 있습니다.

작전 계획에 없는 일이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각하."
    "전시에는 2군도 연합 시령관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되어 있더군, 이제는."
    "군을 철저히 통제하시오, 장군."
    "예 , 각fl."
   "오늘 밤 자정을 기해서 대한민국은 전시 체제로 들어갑니다. 총
리와 대표께서는 오늘 저녁까지 준비를 마쳐 주시오."
   총리와 당 대표가 대답하자 대통령은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혼란이 일어날 겁니다. 사재기는 말할 것도 없고 남쪽으로, 또는
국외로 도망치는 사람들도 생길 것이고‥‥‥ 이 모든 예상 상황에 대
한 준비를 해두어야 합니다. "
    "군은 이제 국민의 생명과 나라를 지키는 책임을 지게 되었소. 우
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 주시오."
    왼쪽 줄에 앉은 장군들에게 한 말이었는데 상석에 앉아 있던 김형
태가 머리를 들었다.
   "각하, 군은 국가와 국민, 그리고 각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저
희 3백만 국군은 일치 단결하여 적을 분쇄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
다. "
   대통령과 시선이 마주친 김형태가 우뚝 말을 멈추었다.
   그는 6 · 25 때의 국방장관 신성모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신성모
는 전쟁 직전에 북한이 남침하면 반격해서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
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대통령과 국민들에게 호언했었다.
   "믿겠소. 여러분이 최선을 다하리라는 것을."
   굳어진 얼굴로 대통령이 말했다.
   "오늘 밤에 국민들에게 특별 성명을 발표하겠습니다. "
54 밤의 대통령 제3부 - I
   그는 피로한 듯 손을 들어 눈두덩을 눌렀다.
   오전 8시 30분에 시작된 회의는 벌써 세 시간 반이 넘게 진행되고
있었다.
   "자,서두릅시다. "
   대통령이 번쩍 머리를 들고 말했다.
   "우리 국민은 위대한 국민이오. 이보다 더 큰 역경도 겪어 이긴 우
수한 국민입니다. 힘을 냅시다, 모두 "
    "장관, 잠간."
    청와대의 복도를 나와 현관으로 나온 안승재는 부르는 소리에 몸
을 돌렸다.
    안기부장 임병섭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멈춰 선 그들의 옆을
군 시령관들이 스펴 지나갔다.
    "장관, 청사로 가시지요?그렇다면 같이 가tf시다. "
   입병섭의 말에 안승재는 잠자코 머리를 』1덕였다. 같은 학자 출신
으로 관직에 올랐으나 이쪽은 다소 내성적인 성격인 데 반하여 임병
섭은 추진력이 있는 적극적인 성격의 사래였다. 그러나 안보 회의나
각료 회의에서 둘의 호흡은 잘 맞는 편이다. 그들은 안승재의 차 됫
좌석에 나란히 앉아 청와대를 빠져 나왔다.
   "취리히에 있는 요원에게서 아침에 정보를 받았습니다. "
   눈이 녹아 을씨년스러운 길가를 바라보던 임병섭이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김사훈과 로젠스턴 둥이 만난 곳은 취리히 교외의 조
그만 별장이었어요. 미국측 참석자는 로젠스턴과 패트릭스, 그리고
말루치도 합께 있었습니다. "
                                                    계엄령 55
    안승재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별장을 알아낸 것이 중요한 일
은 아니다.
    "장관, 내 생각에 놈들은 정해진 날에 치고 내려을 것 같소. 이것
 은 우리에게 어떤 양보를 받아내려는 엄포가 아니오."
    임병섭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려던 그는 잠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안승재가 금연가임을
생각해낸 것이다.
    "담배 피워도 좋겠습니까?"
    "괜찮습니다. "
    임병섭이 불을 붙인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길게 내뱉었다.
    "장관,단신으로 취리히에 가시면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을 겁
니다. 그것도 비공식 방문이니."
   임병섭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장관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나 같아도 그랬을 겁니다. "
   안승재는 잠자코 앞을 바라보았다.
   회의가 끝나고 대통령과 몇 사람의 요인만 남았을 때 안승재는 대
통령에게 취리히에 가겠다는 요청을 했던 것이다.

미국과 북한측이 1월 20일에 다시 만날 때 현장에 가서 미국측 대표인 로젠스턴과 접
촉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설령 회담에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로젠스턴과 가까운 곳에 있겠다면서

얼굴을 붉힌 안승재를 바라보던 대통령은 허락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비공식 방문이었다.

아니, 비밀 입국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안승재는 회담에 필요한 아무런 조건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선전 포고를 한 북한에게 이쪽은 경제 협력 문제를 늘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놈들이 한 달 기간을 준 것은 미군으로 하여금 몸을 랠 시간을 준 것 같습니다.

장관, 놈들은 2월 말의 미국 대통령 선거 시기를 노린 거요."
   임병섭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클린트나 공화당의 제이슨이나 수십만 미군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모험을

하려고 들지 않을 거라고 믿은 거요."
   "러시아와의 냉전이 끝난 후로 미국이 견제해야 할 세력은 일본이오.

중국은 러시아와 어깨를 부딪치고 있으니까 그들끼리 견제하라고 내버려 두고."
   임병섭이 재떨이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재를 바닥에 떨었다.
   "남북한이 어느 쪽으로 합법이 되건 미국의 우방만 되면 상관이 없지요.

그리고 더욱 강한 힘으로 일본을 견제하고, 중국과 러시아, 일본과 한국,

이런 균형이 그들에게 바람직할 수도 있습니다. "
   "부장은 우리가 전쟁에서 진다고 생각합니까?"
   안승재가 묻자 임병섭이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은 신사요, 안 장관. 난 정보 업무를 맡다 보니까 이젠 사람들의 배후만 보여서 ‥‥‥‥
   "내 말에 대답해 보시오, 부장."
   "미군이 손을 떼는 순간 우리쪽의 사기는 단번에 떨어집니다.

런 경우에는 아예 미군이 처음부터 없던 것보다 못합니다. "
"그리고 놈들은 굶주려 쓰러지기 직전이오. 목적이 너무 분명하단 말이오.

이건 이념이나 사상 문제가 아닌 처절한 본능으로 달려드는 거요.

이만하면 대답이 되었습니까?"
   "국방 장관 말대로라면 우리의 3백만 가까운 병력이 휴전선으로 모입니다. "
   "놈들도 3백만이오, 장관."
   "이 조그만 땅덩이에서 역사상 유례 없는 대학살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장관."
   "난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믿고 싶습니다, 부장"
   임병섭이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는 구듯발로 짓이겼다.
   "아직 각하께도 말씀 드리지 않은 일이 있어요,

장관. 키드먼은 외국에서 우리 안기부 요원들이 움직이지 말도록 부탁해 왔어요.

북한을 자극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인데, 잘 알다시피 우리 KCIA는 CIA와 업무 공조를 하고 있어요,

우리 군과 같이."
   "장관이 취리히에 가실 때 사람을 몇 사람 같이 보내 드릴 생각이오.

나로서 도와 드릴 일이 있다면 그 일이고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
   "그들이 힘이 되어 드릴 겁니다, 장관. 강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이니까."
"어서 오시오, 강 장군, "
5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매그루더가 큰 키를 구부리며 강동진의 손을 쥐었다.
   "오늘은 내 방에 별이 열두 개로군 "
   그리고는 이영규의 손을 잡았다.

한국군 합참 의장 강동진과 한미연합 사령부 부사령관인 이영규가

주한 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를 방문한 것이다.
   상황이 심각한 때문인지 세 대장의 얼굴 표정은 굳어 있었다.
   "토니 미 첨한테서 하루에 세 번씩 전화가 오고 있어요."
   탁자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자 매그루더가 한국군 대장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친구는 본래 잔소리가 많은 보병 출신입니다.

장교가 되지 않았더라면 신병 교육대의 상사가 되어서 오클라호마에 박혀 있을델 01 "
   이영규가 힐끗 강동진을 바라보고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부관과 참모들을 모두 물리치고 대장 세 명만 모여 앉아 있는 것이다.
   "장군,우리 대한민국 정부는 오늘 자정을 기해서 계엄령을 선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 밤 비상 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특별 성명도 있을 것입니다. ."
   이영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장군, 계엄 시령관은 여기 계신 장동진 대장이 맡게 되었습니다. "
    "그렇습니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조금 빠른데. 국회는 소집하지 않습니까?"
    매그루더가 긴장한 얼굴로 묻자 강동진이 나섰다.
    "내가 이곳에 오는 도중께 들었습니다만 여야 대표는 이미 합의를 했고

오늘 밤 소집될 국회에서 계엄에 대한 모든 법안이 통과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이제 한국은 전시 체제가 되는군요."
    매그루더가 두 대장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미 방위 조약에 의해서 한미 연합군의 작전 통제권은 본인이 갖게 됩니다.

계엄 선포가 북한의 남침 위협에 의한 것이니만치 지금은 전시 체제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
    강동진이 굵은 눈쌥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계엄군은 내 통제 아래 두겠습니다. T·내 치안을 맡아야 하니까요."
    "계엄군이라‥‥‥‥
    매÷I루더가 손바닥으로 턱밑을 쓸었다.
   "이것 딱하군. 계엄군과 작전 군으로 전력이 양분되겠는데, 계엄군을 꼭 직접 통제하신다면."
   "본래 2군은 전시에도 연합사 소속이 아니었지요. 2군을 계엄군으로 하겠습니다. "
   "토니에게 이야기하겠습니다. "
   "오늘 밤에 2군 병력을 출동시킬 작정입니다, 매그루더 장군."
   매그루더가 머리를 들어 강동진을 바라보았다.
   매그루더는 이영규와는 자주 접촉하여 서로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지만 강동진과는

만나는 기회가 드물었다.

강동진은 하나회 출신들이 거세되자 새롭게 부각된 군의 중심이었다.
   "장군,전시에는 2군도 내 지휘 아래 들어온다는 것을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따라서 계엄 사령부에 연합사의 보좌관 몇 명을 파견하겠고 정기적인 참모 회의를 만들어 주시오.

2군과 공백이 있으면 안됩니다. "
   매그루더의 말에 강동진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군."
   "태평양과 대서양 두 곳의 함대가 곧 동해와 서해로 올 겁니다. 공
군력도 곧 증강이 될 것이고."
"난 이곳에 버티고 있을 거요, 당신들이 날 쫓아내지 않는다면."
그리고는 매그루더가 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1월 13일 새벽 2시, 동부 전선 제18연대 수색 중대.
   "씨팔, 웬 계엄령 . 이거 또 쿠데타가 일어난 것 아냐?"
   신동석 병장이 어깨를 펴고 내무반 안을 둘러보았다.
   군장을 꾸리느라 내무반은 소란스러웠다.

철거덕거리며 총의 노리쇠를 당겨 격발을 확인하는 소리 ,

반합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에 무엇인가 넘어지는 소리도 났다.
   "야, 이 이병, 너 이 새끼 그 군장 내려놓고 내것 좀 챙겨."
   그가 소리치자 구석에 앉아 있던 병사 한 명이 서둘러 나왔다.

된 얼굴의 신병이다.
   "예, 알았습니다. "
   "씨팔,제대 말년에 이게 무슨 일이야? 젠장 이거 총 메고 중앙청 앞에 서게 되는 거 아냐, 쪽 팔리게?"
   "어이, 신 병장, 넌 중앙청 앞에 서라. 난 오팔팔 앞에 가서 설테니까. "
   신 병장과 입대일이 한 달 사이어서 말을 놓는 사이인 3분대의 김을수 병장이 커다랗게 소리치자

서너 명의 병사들이 웃었다.

그러나 금방 웃음이 그치고는 다시 내무반은 긴장감에 쉽싸였다.
   계엄령은 밤 12시 정각에 발효되었다.

전후방의 모든 부대는 완전무장으로 대기해야 했다.

또 방송은 35세 이하의 모든 예비군은 즉 각 향토 사단에 집결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는 동원이라고 하였는데 매달 15일에 실시하였다가 중지된 민방공 훈련과는

분위기가 크게 달랐다.
   내무반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2분대장의 인솔로 나갔던 사역병들이 돌아왔다.

모두 양손이 늘어지도록 탄통을 들고 있다.

선임 하사인 배 중사가 따라 들어오더니 소리쳤다.
   "M-16은 2백 발씩, 나머지는 분대별로 나눠. 로켓포는 스무 발이니까 열 발씩이다. "
   "이런 젠장."
   신동석의 얼굴이 하알게 굳어졌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그는 제대가 1개월 남은 말년 고참이다.

동부 전선 아래쪽의 바닷가에 있는 제3예비 사단의 수색 중대에서 토요일이면 읍내에서

외박을 즐기는 왜 괜찮은 30개월을 마악 끝내려는 참인 것이다.
   "이거 웬 실탄 "
   워커발 끝으로 탄통을 툭 차면서 신동석이 배 중사를 바라보았다.
그와는 오입 동서간이기도 했고 하사관 학교 출신으로 나이도 비슷
해서 제대 말년이 되자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62 밤의 대통령 제3부 -I
   "전쟁이라도 나는 거요?"
   "그걸 내가 아나? 하라니까 해야지."
   "제에기 말년에."
   "이봐, 10분 후에 중대장 검열이 있어. 서둘러 ."
   실탄 2백 발이면 탄창 열 개에 들어가는 분량이다.

신동석은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한성 소위는 중대장인 조명훈 대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지도의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중대의 방어 지역인 548 고지의 우측 능선이다.
   "우린 03:00시에 부대를 출발해서 08:00시까지는 방어 지역에 도착해야 돼 .

도착하면 취사차가 식사를 계곡 밑까지 날라다 줄 것이다.

식사는 각 소대별로 벙커 안에서 한다. "
   중대장이 머리를 들고 소대장들을 둘러보았다.
   "전시 상황이야. 이것은 훈련도 아니고 부대 측정도 아니다.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는 거야."
   "중대장님."
   제련재장인 김정환 소위가 중대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한성과 육사 동기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벙커에서 생활하게 되는 겁니까?"
    "그렇다. 탄약이 곧 보충될 것이고 주 ·부식과 야영 장비가 공급된다.

우리 중대뿐만 아니라 전군이 방어선에 투입된 거야.전쟁이란 말이다. "
    "놈들이 쳐내려옵니까?" 

 

 

계엄령(2)

 

 

 

   이한성이 묻자 중대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연대 본부에 있는 동기에게 연락해 보았는데 거의 확실해 "
   소대장들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학군 출신으로 직업 군
인을 선택한 학사 장교였다. 을해의 소령 진급 심사에서 누락되어 내
년을 바라보는 입장이다.
   "언제입니까, 놈들이 내려을 날이?"
   제3소대장인 강 소위가 묻자 중대장이 머리를 저었다.
   "곤걸 모른다. 그리고 그건 바보 같은 질문이야. 놈들이 언제 내려
오겠다고 말해 줄 리가 있어?"
   "중대장님, 제 소대에 제대 말년짜리가 있는데요."
   이한성의 말에 중대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신동석이 말인가?"
   "예, 한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
   "데려가. 휴가는 물론 제대도 보류되었어."
   "알겠습니다. "
   "지금은 전시 상황이야."
   중대장이 허리를 펴고 소대장들을 쏘아보았다.
   "부하 관리를 똑바로 하도록. 항명은 총살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
나?"
   "웨, 알겠습니다. "
   소대장들이 일제히 대답하자 조명훈이 머리를 끄덕였다. 밖에서
차량들의 엔진 소리가 들려 왔다. 수송 부대의 트럭들이 장비를 싣고
먼저 떠나는 모양이었다.
64 밤의 대통령 제3부 - I
   1월 13일 새벽 4시.
   장농속에서 예비군복을 꺼내던 김명숙이 몸을 돌려 남편 장명환
을 바라보았다.
"여보, 당신 친구 있잖아요? 부대에 장교로 있다는
"그런데 왜?"
   내복을 잘아입던 그가 머리를 겨우 옷 사이로 빼내고 묻자 김명숙
이 허리를 폈다.
   "그분한테 전화해서 빠지면 안돼요? 정미 남편은 흥콩에 출장 가
있는 바람에 빠졌다는데 ."
   "난 안돼 외국에 가 있다면 모를까."
   "그러니까 그렇지. 약이 올라 죽겠어."
   김명숙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결혼 일년이 조금 지났으므로 아직
신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옷 이리 줘. 그냥 훈련일 거야."
   손을 뻗어 장영환이 예비군복을 집어들자 김명숙은 이제 울상이
되었다.
   "저봐요, 방송에서는 전시라고 하는데."
    라디오에서는 쉴새없이 예비군 동원령에 대해 방송하고 있었다.
동원 예비군은 06 : 00시까지 해당사단에 집결하여 신고해야만 했고
특별한 사유가 없이 불참하는 사람은 전시 법으로 처벌한다는 내용이
었다.
    "며칠 있다가 나을 거야, 지난 훈련 때처럼."
    장영환은 두툼한 내복 위로 예비군복을 걸쳐 입었다. 새벽 4시였
으나 사단이 있는 양평까지 가려면 두 시간이 꼬박 걸릴 것이다.
                                                     계엄령 65
    저녁 7시에 예비군 동원령이 내려졌고 자정에 계엄령이 선포되었
 다. 7시에 예비군 동원령이 내려졌을 때부터 서울 시내는 아수라장
 이 되었다. 신호를 무시한 차량들이 폭주하다가 곳곳에서 사고를 내
 었고 대부분의 도로는 마비 상태가 되어 있었다. 지하철은 시간을 지
 키지 않거나 아예 운행하지 않는 노선도 있었는데 안내해 주는 역무
 원은 보이지 않았다.
    버스를 길 가운데 내팽개친 운전사들은 제 집으로 달려 들어갔고
손님을 태운 택시는눈을씻고 찾아보려 해도 없다. 밤 12시에 계엄
령이 내려지자 시내로 진주한 군인들이 경찰과 합동으로 질서를 잡
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소란은 가라앉고 있었지만 아직도 도로 곳곳
은 막혀 있다는 방송이었다.
    "여보, 북한이 정말 쳐들어와요?"
    저고리의 단추를 채우는 장영환에게 김명숙이 바짝 다가섰다. 두
눈이 불안으로 크게 뜨여 있다.
   "그럴지도 몰라. 그러니까 당신은 아까 내가 말한 대로 아침에 성
남의 어머니한테 가 있어."
   장영환의 본가는 수원이었지만 아내가 친정에 가 있는 것이 편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 모양이다.
   "내가 일 끝나면 성남으로 갈테니까."
   "언제 끝나는데?"
   "글쎄, 곧 끝나겠지. 놈들은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해."
   "군대가 백만 명이라는데, 공군은 우리보다 두 배나 많고. 나도 신
문 읽어서 알아."
   "우린 미군이 있거든.미군 세 개 사단이 있어.그애들 공군까지
66 밤의 대통령 제3부 - I
합치면 북한놈들은 당장에 묵사발이야."
   장영환이 아내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김정일이가 후세인 꼴을 당하는 거야. 미군 몇십만이 몰려오면
당장 항복하게 돼. 우리나라는 통일이 되고."
   "통일되어서 뭐해? 나에게는 당신이 더 중요해."
   김명숙이 조금이라도 같이 있으려는 듯 장영환의 옷깃을 두 손으
로 움켜쥐었다.
   "당신이나 빨리 돌아와요. 당신 친구 만나서 아프다고 하든지 해
서."
   "알았어. 그러니까 성남으로 가 있어. 차 조심하고."
   "당신이나 조심해요, 여보."
   마침내 김명숙의 두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1월 13일 오후 4시.
   청와대의 대회의실에 대통령을 중심으로 당 대표를 비롯한 당의
간부들과 정부측의 전 각료가 모여 앉았다. 그리고 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당 삼역도 상기된 표정으로 대통령의 앞쪽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오전의 안보 회의에 참석했던 국방 장관과 군의 지휘관들은
자리를 비운 대신 보좌관들을 거느린 차관들이 긴장해 있었고 안기
부장과 외무 장관도 자리를 비웠으나 오후 5시에 다시 열리는 안보
회의에는 참석할 것이다. 그러나 대회의실에 모인 50여 명의 인사들
은 한국을 이끌어 가고 있는 주역들이다.
   회의는 이미 한 시간이 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상황 설명과 정부
의 대책에 대한 각 부처별 지시 시힝이 내려진 다음 보완사항이나
                                                     계엄령 67
 건의 사항이 논의되는 중이다.
    "1131. "
    문화공보부 장관인 이유석이 손을 들었다. 50대 초반으로 청와대
공보 수석 출신이었고 그 전에는 대한신문의 편집 국장이었던 인물
이다.
    "말해 봐요, 이 장관."
    대통령이 피로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대며 그를 바라보았다. 넓은
회의실은 열기로 가득 차 있었는데 잠시 술렁이던 장내는 다시 조용
해졌다.
   "각하, 오늘부터 모든 언론 매체를 사용하여 북한의 야심을 폭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국민들에게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 주는 것
이 제일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
   이유석의 말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회의실을 울렸다. 대통령이 잠
자코 그를 바라보자 그가 곧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일관성 없는 자세로 북한을 대해 왔습니다. 그들은 우리
를 처음부터 철저히 적으로 대해 왔는데 우리는 그들을 자극하지 않
으려고만 했습니다. "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이것은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행된 일이었다. 그는 대통령의 외
교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셈이었는데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
는 것이었다.
   이유석이 말을 이었다.
   "지금 북한의 남침에 대비한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이니 나라가 온
통 혼란에 빠질 것은 당연합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북한의
68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노동력을 수입할 계획을 발표했고 자동차 공장을 세운다고 언론에서
크게 떠들어 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라니요?"
   "이봐요, 이 장관."
   마이크를 켜고 나선 것은 당 대표인 임종호이다.
   "지금 그런 말을 할 시기가 아니오. 결론부터 말해 보세요."
   "결론은 하납니다. 말씀 드린 대로 그들과 같이 그들을 원수로 취
급하는 겁니다. 이제 더이상 1들에 대한 기대나 평화에 대한 헛된
희망을 국민들에게 심어 주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
   임종호가 입맛을 다시며 힐끗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목청을 가다
듬은 이유석이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도적놈들이 침공해 온다고보도
해야 하고 또 그것이 현실입니다. 40여 년 동안 피땀 흘려 이룬 우리
의 재산을 놈들은 며칠 동안의 전쟁으로 강탈하려고 한다고 말입니
다. 그들은 동족이 아닙니다. 수백만의 인명이 살상될 줄 알면서도
침공해 온다면 그들은 이제 철천지원수입 니 다. "
   모두의 시선이 이유석에게보다도 대통령에게로 모아졌는데 문득
머리를 든 대통령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전력을 기 울이도록 하시오, 이 장관."
   대통령의 말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그렇지, 날강도 같은 놈들에게 당할 수가 없지. 더이상 협상의 여
지가 없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국민들에게 놈들에 대한 적개심
을 심어 주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각하."
   "그들은 이제 더이상 동족이 아니오. 약탈자일 뿐이오."
                                                     계엄령 69
    "그렇습니다, 각하."
    "군의 사기도 적개심으로 고취되어 일어날 거요.그들은 우리를
죽이고 약탈하려고 하니까. 그것도 통일의 방법이라고 미화시키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반역자요. 즉 살인 공범이오. 즉결 처단해야 됩
니다. "
   모두들 숨을 죽이고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야당 대표인 김기표도
입을 열지 않는다.
   "우리는 빼앗길 수 없소, 이 장관.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적
개심을 강화시키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하시오. 당신의 책임이 큽니
다. "
   상기된 얼굴의 이유석이 머리를 깊게 숙이자 회의장은 조용히 술
렁거렸다.
   이제 정부의 방침은 이유석의 마무리 발언으로 확실하게 정리가
되었다. 외부의 기대도 없고,희망도 없는 남과북의 뺏고 뺏기지 않
으려는 짐승과도 같은 본능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같은 시각에 백악관의 2층에 있는 클린트 대통령의 집무실에 네
사내가 모여앉아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육중한 마호가니 책상은 지
난해에 클린트가 들여 놓은 버지니아 산 수공제품이었는데 너무 길
어서 벽에 붙여 놓은 책장을 위쪽으로 밀어 놓아야만 했다
   두 팔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클린트가 앞에 나란히 앉은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금방 전략 회의를 마치고 세 사람과 함께 집무실로 돌아
온 참이어서 다소 풀어진 태도였다.
   "지미, 매그루더가 적극적인 대비를 하TH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70 밤의 대통령 제8부 - I
데, 그 사람 성격이 그렇소?"
   지미 패트릭스가 마호가니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내려놓
았다
   "적극적인 대비는 곧 공격을 받으면 반격하Tf다는 것입니다. 제
프, 그리고 그는 상관의 명령을 거역할 사람이 아닙니다. "
   "미첨의 명령 말이오?"
   "아니,대통령 각하의 명령이지요.유사시에는 각하께서 직접 명
령을 내리셔야 합니다. 물론 미첨이 보좌해야겠지만, "
    왼쪽 끝자리에 앉아 있던 키드먼이 머리를 들었다.
   "각하,중국의 장자량 주석은 북경의 저택에서 움직이지 않습니
다. 하지만 진위 수상과 화인봉 외교 부장이 저택에 출입하는 것이
탐지되었습니다. "
   회의석상에서는 말하지 않은 내용이어서 클린트가 웃음 떤 얼굴로
CIA 국장을 바라보았다.
   "그 늙고 교활한 여우들은 북한군이 38도선을 내려을 때까지 병
든 시능을 하면서 우리를 피할 것 같군요, 키드먼 국장."
   "북한은 이미 그들과 합의를 했을 겁니다. "
   "중국의 지도부가 우리와의 대화를 피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암시를 주는 것 같은데‥‥‥‥
   오른쪽 자리에 앉아 있던 빌 로젠스턴이 입을 열자 모두 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어떤 암시요, 빌?"
   대통령이 묻자 로젠스턴이 힐끗 키드먼을 바라보았다.
   "월, 중국군은 우리가 움직이면 행동으로 나오TR지요?"
                                                    계엄령 71
   "물론이오,빌.미침 합참 의장 말대로 50개 사단이 일주일 안에
북한에 들어옵니다. "
   로젠스턴이 머리를 끄덕였다.
   "각하, 우리와 부딪치기 싫다는 중국측의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중 국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빌. 난 북한군만 해도 벅찹니
다. "
   "이번에 한국의 예비군이 동원되면 3백만 명이 됩니다. "
   "충분해, 그만하면, "
   패트릭스가 말을 받았다. 전략 회의에서는 이런 식의 발언은 하지
않았다.
   각군의 참모 총장과 합참 의장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북한의 침공
로와 이쪽의 대응 방법,군수 물자의 수송 관계에 이르기까지 세 시
간 가깜게 브리핑을 듣기만 했다 북한의 침공에 대비한 작전은 수십
년 동안 짜여져 왔고 연습도 해온 것이다.
   육군 참모 총장인 제임스 오닐은 이쪽의 선제 공격을 제의하였다
가 여러 사람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입을 닫았는데, 군인들이 방위 조
약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북한이 침공해
오면 이쪽이 반격한다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중국군이
북한을 지원하면 중국군과 싸우고 다음 상대가 러시아라면 그들과도
싸운다. 그리고 솔직히 그들을 설득하거나 의의를 달 명분도 이쪽은
없다.
   "여론 조사를 이 시점에서 한다면 우습지만 우리의 참전에 동의하
는 비율은 아마 20퍼센트도 되지 않을 거요."
72 밤의 대통령 제3부 - I
   패트릭스가 말을 이었다.
   "수십 명, 수백 명의 전상자가 문제가 아니야. 이건 월남전하고도
달라. 이라크 진격하고도 다르고. 순식간에 수만 명의 전상자가 생기
게 돼. 그때는 폭동이 일어날 거야, 이곳에서."
   모두들 잠자코 앉아 그의 말을 들었으나 누구 한 사람 반론을 제
기하지 않는다. 정부의 핵심 인물 네 명 모두가 마음을 정하고 있는
것이다.
   "키드먼 국장."
   대통령이 키드먼을 바라보았다.
   "어제 한국의 미스터 리와 통화할 때 걱정하지 말라고 해두었어
요. 방위 조약을 지키겠다고."
   커피잔을 집어 든 대통령이 한모금 마신 뒤 입맛을 다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동정을 철
저히 감시하도록 하고."
   "이런 지기미 ."
   거구를 흔들며 커피숍에 들어션 조웅남이 입술을 뒤틀면서 김칠성
을 돌아보았다.
   "전쟁 일어난당게로 한 놈도 없구나 잉?"
   "그렇군요."
   텅 비어 있는 커피숍을 둘러보며 김칠성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한가하게 커피 마실 상황이 아니지요, 형님."
   "도적놈의 새끼들."
                                                     계엄령 73
     조웅남이 지금 욕하는 상대는 북한이다 그는 어제 저녁 예비군
 동원령이 내려졌을 때부터 북한을 매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가 구사
 할 수 있는 모든 욕이 동원되고 있었다. 하긴 그의 기준으로 보면 턱
 도 없는 짓거리를 김정일이 저지르고 있었다.
    "지 에미허고 붙어먹을 놈들."
    이런 욕을 뱉으면서 조웅남이 창가의 자리에 앉자 김칠성이 옆자
 리에 앉아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으나 카운터에 종업원 한 명이 동
 그마니 앉아 있을 뿐 손님도 종업원도 없다. 시내 중심부에 있는 만
 다린 호텔은 일급 호텔이어서 외국 손님들도 많으련만 모두 방안에
박혀 있는지 아니면 공항으로 몰려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야, 10시라고 혔냐? 분명혀?"
    조웅남이 짜증난 듯 김칠성에게 물었을 때 커피숍의 입구를 들어
서는 두 명의 사내가 보였다.
   "저기 오는군요, 형님."
   사내들은 곧장 그들에게로 다가왔는데 앞장선 사내는 신문이나 텔
레비전에서 낯이 익은 안기부장 임병섭이다.
   "안녕하십니까? 김 사장, 조 사장님."
   다가선 임병섭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요즘 놀라셨겠지요?"
   "놀라기는 무신 ."
   조웅남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의 손을 잡고는 뒤에 선 사내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 이쪽은 내 보좌관 고동규 씨인데‥‥‥‥
74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
   눈빛이 날카로운 30대 후반의 사내가 그들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네 사람은 텅 빈 커피숍의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웨이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으므로 테이블 위는 비어 있었으나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 밖은 흥흥한 분위기의 전시 체제
인 것이다.
   지하철이 겨우 정상가동이 되고 버스가띄엄띄엄 눈에 띄었지만
시내를 운행하는 자가용 승용차는 대폭 줄어들었다. 영동에서 시내
로 커피 마시고 쇼핑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없어진 때문이다.
   그러나 경부선과 중부 하행선 고속도로와 국도는 새벽부터 주차장
이 되어 있었는데 추석 연휴 시작일의 체증 현상은 '강반이었다. 수십
군데에서 일어난 사고로 도로는 마비 상태가 되어 있어서 계엄 당국
은 오전 10시를 기해 전 도로의 하행선 통행을 금지시켰다. 일단피
난 행렬은 당국의 물리력으로 억제된 것이다.
   계엄 당국은 반국가적이고 파렴치한 해외 도피자를 엄단하겠다고
경고하고는 출국자는 계엄 사령부의 심사를 받아야만 한다고 발표하
였지만 아침부터 공항과 항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 모
두가 계엄 사령부의 승인을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거, 정신이 하나도 없군요. 하지만 며칠 지나면 정상이 될 겁니
다. "
   임병섭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한국 사람은 적응력이 강하니까요."
   "그런데 우릴 보자고 하신 건 무슨‥‥‥‥
   김칠성이 조웅남을 대신해서 먼저 물었다. 임병섭과는 서로 안면
                                                     계엄령 75
 이 있는 사이였지만 이제 기업인이 되어 있는 그들은 그와 이렇게 개
 인적으로 만나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 일 때문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임병섭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나는 체중 때미 병역 면제되었는디."
    찌푸린 얼굴로 조웅남이 입을 열었다.
    "공산당 놈들허고 잡헐라면 군대에 가야 헐 것 아뇨?"
    "김원국 씨를 찾아뵈어야 하겠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요‥‥‥‥
    "우리 성님까지 왜 그러쇼?"
    조웅남이 턱을 들었다.
    "섬에서 도 닦고 있는 사람 불러다가 뭐 헐려고 허쇼?"
    "형님, 잠간만요."
    김칠성이 가로막고 나섰는데 조웅남의 말을 그대로 받다가는 싸움
이 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희 형님과 저희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요, 엉뚱하게 생각되시겠지만."
   "안기부 요원들이 수천 명 되지 않습니까?그리고 우린 조직 활동
에서도 손을 떼었고요."
   "이곳 일이 아닙니다, 김 사장, 외국에서 해야 할 일이오."
   "외국에도 안기부 요원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린 CIA와 공조 체제를 이루고 있어서 모두 그들에게 파악되어
있어요."
76 밤의 대통령 제3부 - I
   김칠성과 조웅남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해가 안 가는데. 지금 같은 시국에 CIA 모르게 무슨 일을 하
시려고?"
   "외국에 나가 주셨으면 해서, 취리히에, 우리 외무 장관 안승재 씨
도 곧 그곳에 갑니다. "
   "가서 윌 합니까?"
   임병섭이 잠시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고동규는 커피숍 안을
둘러보는 시능을 한다.
   "북한의 공작원들이 취리히에 대거 몰려가 있습니다. CIA는 말할
것도 없고."
   임병섭이 말을 이었다.
   "미국은 우리 요원들이 스위스에 가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합니
다. 북한을 자극할 염려가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외무 장관도 비
밀리에 출국합니다. "
   "미치겠군."
   김칠성이 조웅남을 바라보았으나 그쪽은 입맛을 다시면서 입을 열
지 않는다.
   "곧 취리히에서 북미 고위급 회담이 다시 열리지만 안 장관이 참
석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
   "챙피헌 일이떡. 가시내 하나를 앉혀 두고 포주허고 손님이 조개
값 흥정허는 것 같고만 잉?"
   문득 입을 연 조웅남의 목소리가 컸으므로 고동규가 서둘러 주위
를 둘러보았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종업원이 힐끗 이쪽을 바라보고
는 머리를 돌렸다.

계엄령(3)

 

 

 


   "회담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약점이나 허점을 현지에서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주위가 철렁한데도 임병섭은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았다.
   "어차피 전쟁이 일어난다는가정 아래 나도 이 일을 결정했고

래서 당신들께 부탁하는 것이오. 당신들은 힘과 조직,

그리고 뛰어난 응용력으로 밤의 세계를 장악한 사람들이오.

그리고 당신들의 조국에 대한 충성심도 남다르고."
   그의 말은 열기를 띠어 갔다.
   "가서 일해 주시오, 무슨 기회든 놓치지 마시고. 놈들의 회담을 깨고, 합의를 지연시키고,

북한으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하고, 결국은 포기하게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도 좋습니다. "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당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빠지시겠군. 우린 밤의 조직이니까."
   "당연한 일이오."
   "아따 말은 거창헌디 을 어뜨케 혀야는지 하나도 모르겄다. "
   조웅남이 혀를 차고는 김칠성을 돌아보았다.
   강대홍은 본적이 전라남도 고흥이었는데 고흥이라면 장사가 많이 나기로 소문이 난 고장이다.

왜란 때에는 의병도 수없이 배출하였고 6 · 25 때는 전사자도 많이 내었는데다가

요즘은 씨름꾼과 싸움뿐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고흥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한 장대홍은 서울로 올라와 삼촌 집에 묵으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자 뜻을 세워 하와이 유학 길에 을랐다.

집안이 부농으로 여유가 있었고 부잣집 셋째 아들이라 운신이 자유롭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와이에서 그는 건성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주먹 사회에 발을 딛게 되었다.

185센티미터의 신장에 100킬로그램 체중의 떡 벌어진 몸에다가 태권도가 3단, 유도가 2단이었다.

그는 하와이 생활 10년 만에 독자 계보를 형성한 보스가 되었고 기존 조직인 일본과 미국의 세력으로부터도 인정을 받는 위치에 이르렀다. 그것이 그의 나
이 스물여덟 살 때였고 지금부터 2년 전이다.
   일취월장했고 갈수록 기세를 올리던 강대홍이 보따리를 싸들고 하
와이를 떠나게 된 것은 그의 표현대로라면 미국농과 일본놈이 배신
했기 때문이었다. 마피아와 야쿠자로부터 마약 판매의 지분을 얻어
서 유흥가의 일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던 그의 조직은 어느날 값자기
FB쩨 의해서 일망타진되었는데 그것은소탕 계획을미리 알아차린
마피아와 야쿠자가 희생양으로 그의 조직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강대홍은 서울로 돌아와 조웅남의 수하로 들어왔다. 영어
에 능통한 데다가 붙임성이 좋았고 술이 고래여서 여자를 밝히는 것
하나만 빼고는 조웅남에게 아주 귀염을 받는 부하가 되었다. 그런 그
가 이제 서울의 영동 한구석에서 계엄령을 맞게 되었다.
   "어이구 씨팔, 이거 어디 가서 분을 푸나.내가 무슨 죄가 있다
나이트 클럽 파타야는 4백 평이 넘는 규모에다 종업원이 백 명 가
                                                    계엄령 79
잡게 되었고 전속 악단과 무용수, 고정 출연하는 인기 연예인과 가수
들을 합하면 2백 명이 넘는다. 신임 사장으로 부임한 강대홍이 경영
을 맡은 지 오늘이 열흘째였다.
   텅 빈 클럽 안을 휘 둘러보던 강대홍이 앞에 서 있는 오종표를 바
라보았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이제는 공산당 놈들까지 내 신세를 조지려고 하다니. 하필 내가
클럽을 인수하자마자 쳐내려온다니 ‥‥‥‥
   "형님, 진정하십시오."
   오종표가 건성으로 말했는데 쾌 오랫동안 계속된 강대홍의 사설에
진력이 난 눈치였다. 그는 하와이 태생 한국인으로 강대흥을 따라 서
울로 도망쳐 온 유일한 부하였다. 서울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인
연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이민 3세여서 그에게 이곳은 낯설
고 땅설은 곳이다.
   "야, 진정하게 되었냐? 그 빌어먹을 놈들이 사흘만 일찍 이야기를
했어도 연예인들 전속금은 살았는데."
   강대흥이 땅이 꺼질 듯이 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쿠데타라도 일어났다면 다시 문 열 희망이나 있지,이건
도무지 ‥‥‥‥
   "형님, 전쟁 끝나면 열 수 있지 않습니까? 요즘은 전쟁이 빨리 끝
난다던데."
   "이런 병신 같은 자식."
    강대흥이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오종표는 언젠가 이산 가족이 무어냐고 물어 온 적이 있을 정도로
남북한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오후 』시가 되어 있었지만
80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넓은 흘 안에는 그들 둘밖에 없다. 종업원들은 대부분이 소집되어 군
에 들어갔고 남은 놈들은 모두 집구석에서 눈알을 굴리면서 귀를 세
우고 있을 것이다.
   "형님, 나갑시다. 여기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오종표가 사정하듯 말하자 어깨를 늘어뜨린 강대흥이 일어섰다.
그리고는 텅 빈 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이고, 내 돈‥‥‥‥
   "형님, 제발‥‥‥‥
   "아이고 이거 형님한테 미안해서 어쩌나.전속금만이라도 살았어
야 하는데."
   "아이고, 형님 "
   오종표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1월 15일 오후 2시,
   한미 연합군 시령관 이영규 대장은 영관 장교 시절에 미국에서 3
년 동안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영어가 유
창했고 미국 군부에 터놓고 지내는 친구가 많았는데 매그루더와도
평상시에는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전투복 차림의 이영규가 방으로 들어서자 매그루더가 자리에서 일
어섰다.
   "어서 오시오, 장군."
   이영규의 뒤를 따라 육군 참모 총장이자 계염 사령관인 강동진이
들어서자 문은 곧 밖에서 닫혔다.
   "바쁘시겠습니다, 강 장군."
                                                    계엄령 81
   강동진과도 인사를 나눈 매그루더가 옆에 선 신사복 차림의 사내
를 손으로 가ㄹ1켰다.
   "CIA의 톰 그랜트 차장이오. 어젯밤에 도착했습니다. "
   한국군의 대장들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잡아 흔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전시 상황이므로 그들이 앉아 있는 곳은 동두천에 있는 연합 사령
부의 지하 벙커 안이었다.
   "장군, 커피를 드시겠소?"
   매그루더가 묻자 한국군 대장들은 똑같이 머리를 저었다. 모두 딱
딱하게 표정들을 굳히고 있다.
   "곧 폭설이 쏟아진다는 위성 정보요.도로 정비를 단단히 해두어
야겠어."
   혼잣말처럼 말하는 매그루더를 향해 강동진이 입을 열었다.
   "장군, 미국 언론 보도에 대한 해명을 듣고 싶습니다만. 우린 대통
령의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
   매그루더가 얼굴에 씁쓸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건 오전에 우리 대사가 당신 장관에게 해명한 것으로 알고 있
는데 . "
   "그것으로 미흡해요, 장군. 이 상황에서 미국 일 간지들이 한국 파
병에 대한 여론 조사를 발표한 것은 일종의 기만 행위요."
   "장군, 나에게 그러실 것 없어요."
   매그루더가 파란 눈을 치켜떴다. 그는 갈퀴 같은 손가락으로 회색
머리칼을 긁어 올리고는 어깨를 폈다.
   "우리 여론은 이곳처럼 통제받지를 않아요. 제각기 성향이 있는
82 밤의 대통령 제3부 - I
데다가 정부에서 간섭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세 개 일간지가 한국 파병에 찬성하는 미국 국민의 비
율이 20퍼센트 내외라고 일제히 보도하는 건 기막힌 타이밍이지 않
소? 이런 상황에서 말이오."
   잠자코 앉아 있던 이영규가 헛기침을 했다.
   ·예비군 동원령은 언제 내려집니까?우린 그걸 알고 싶은데,장
군.
    "1월 21일경에 내려질 거요."
    그러자 매그루더의 옆자리에 있던 그랜트가 입을 열었다.
    -모든 건 정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근거는 없지만 일단 한국
 이 계엄령 상태가 된 이상 우리 미국도 그와 보조를 맞추어서 ‥‥‥‥
    "잠간. "
    강동진이 그의 말을 막았다. 이영규처럼 유창하지는 않으나 단어
 를 발음 기호 그대로 발음하는 정확한 영어였다.
    ·근거가 없다니? 북한이 침공해 온다는 정보는 당신들한테서 나왔
 지 않소? 당신들이 직접 북한 고위층에게서 통보를 받았으면서."
    ·물론이오, 장군. 우리측 패트릭스 보좌관과 로젠스턴 장관이 통
 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템방인 한국 정부에게 즉각 그 사실
 을 알렸고."
     "그럼 근거가 없다는 건 무슨 말이오?"
     #일부 각료들과 국회 의원들,또 군부에서도 그것은 북한의 엄포
  일 가능성이 많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어요."
     u그건 이미 우리 정부와 당신들의 정부측에서도 논의되었던 일이
  오."
                                                       계엄령 83
    이제는 이영규가 그의 말을 받았다 금테 안경을 쓴 이영규는 군
복을 벗으면 은행가나 학자처럼 보이는 말끔한 용모였지 만 지금은
단단히 몸을 굳히고 있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상황이 아닙니다, 그랜트 씨. 북한은 날
짜까지 지적한 선전 포고를 했고 우리는 당연히 그에 대한 방비를 해
야 합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선제 공격이 필요하다면 그것도 고
려해 보아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랜트가 머 리를 끄덕였다.
   "그건 군인들이 할 일이고, 방위 조약대로 진행이 되겠지요. 근거
가 없다고 아까 내가 말한 것에 신경을 쓰지 마세요. 그것도 미국 정
가에서는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데 내가 온 것은‥‥‥‥
   그랜트가자리를 고쳐 앉고는 앞에 있는 한국군의 대장들을똑바
로 바라보았다.
   "북한군의 두드러진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모두 알고 계시겠고."
   "움직일 필요도 없소,신사 양반.그놈들이 있는 곳이 공격 위치
요."
   강동진이 대뜸 말을 받자 그랜트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노농적위대 150만이 소집되었지만 이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북한군의 전선은 변화가 없어요."
   "우리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쟁 때 최전선에 나서는 것은 휴전
선 부근의 5개 군과그뒤쪽의 7개 군이오.노농적위대는후방근무
71, "
   "중공군의 움직임도 두드러진 것이 없어요.장군,국경 근처의 2
개 군단과 내륙의 5개 군단은 전혀 예전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
84 밤의 대통령 제3부 - I
   "이것 봐요, 그랜트 씨."
   강동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말을 하려고 이곳에 온 거요?"
   "북한은 이런 상태로는 공격하지 못합니다. 미국측에 미리 공격
날짜를 통보해 준 것은 미 국군과의 교전을 피하려는 의도로 생각하
는데 ."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소, 그랜트 씨. 여론 조사네 뭐네
하고 미국이 떠들썩한 걸 보면."
   "그렇지요. 하지만 그들은 이제 남한이 공격해 온다고 선전하고
있어요.당신들의 계엄령 상태의 텔레비전 보도와 전시 체제 상황이
북한 국민에게 그대로 방영됩니다 "
   "상투적인 수법이지. 우리도 몇십 년 전에는 그런 수법으로 국민
의 불만을 일시적으로 돌렸었지."
   "도발하지 마시라고 충고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여기 자료를 보시
오."
   그랜트가 옆에 놓인 서류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쳤다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상대방의 분위기에 서로 열기가 상승되다
가 부딪쳐 폭발하게 됩니다. 제동을 걸기에는 서로가 늦게 된단 말입
니다. "
   "무슨 소리, 일을 일으킨 놈이 누구인데?"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잠간만."
   매그루더가 그들의 말을 막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랜트 씨, 이제 정리해서 말씀해 주실까? 이쪽은 대통령에게 보
                                                    계엄령 85
고해야 할테니까 말이오."
   머리를 끄덕인 그랜트가 입을 열었다.
   "2월 10일까지는 25일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어느
및 그 날짜에 속박받고 있는데 그것이 문젭니다. 전쟁은 내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어요. 그리고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
   그랜트는 서류를 앞쪽으로 밀어 놓았다.
   "이것은 북한군의 주요 인물에 대한 동향과 군부대의 현황입니다.
당신들의 자료와 비교하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
   이영규가 서류를 받아 옆에 있는 강동진에게 넘겨 주자 그랜트가
말을 이었다.
   "닷새 후의 회담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릅니다만,회담은 열
리기로 다시 확인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만이라도 도발하지 마시도
록 충고를 드립니다. "
   "고맙소, 그랜트 씨. 당신은 우리에게 조금 숨을 돌리게 하시는군.
하긴 당신같이 냉정한 사람도 우리에겐 필요하지요."
   얼굴의 근육을 부드럽게 이완시키면서 이영규가 말하자 강동진이
입맛을 다셨다.
   "한편으로는 김빠지게 하고 있는 거요, 이 신사 양반은. 이 분 말
씀만 듣고 앉아 있다가는 쳐내려온 북한놈들을 이불 속에서 맞게 될
지도 몰라, 우리는."
   548고지는 휴전선 남방 15킬로미터 지점에 있었으나

앞쪽이 평야 지대였으므로 방어에는 적격인 고지였다.

따라서 고지에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벙커와 참호가 능선을 따라 30미터 간격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수색 중대 제1소대 1분대는 능선 방어선의 우측 끝부분에 있는 벙커가 맡겨 졌으므로

신동석은 벙커 안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그의 앞쪽에는 이용식 일병이 라면 봉지를 배낭에서 꺼내고 있다.
신동석의 간식을 준비하는 것이다.

벙커 밖에서 수런거리며 쇠끝이 돌멩이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분대원이 참호 보수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때 발자국 소리와 함께 김형만 하사가 벙커로 들어섰다.

1분대의 분대장으로 나이가 신동석보다 두 살이나 어린 스물둘이다.
    "야, 이 일병, 너도 참호 보수 작업에 나가!"
    그가 소리치자 이용식이 엉덩이를 들었다.

그러나 움직이지는 않는다.
    "동작 봐라. 안 나갈 거야?"
    그의 목소리가 다시 벙커를 울렸다.
    벙커 안에는 그들 세 사람밖에 없다.

깅형만이 한걸음 다가서면서 눈을 치켜뜨자 견디지 못한 이용식이 신동석을 바라보았다.

그는 신동삭의 당번으로 언제나 열외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중대 최고참병인 신동석은 싱벙 시절부터 고참병 그룹을 이끌고 있었는데

학군 출신의 소대장들과도 연줄로 따져 친구의 친구뻘이 되었으므로 말년이 되자

말을 슬쩍 놓는 형편이었다.
    어차피 1,2년 후에는 사회에서 만나게 될 것이고 어슷비슷한 과정의 삶을 살아갈 참이다.

그러다 보니 소대장들도 굳이 계급을 따지려고 들지 않았다.

신동석은 엉기적거리면서 무겁게 엉덩이를 들었다.
   분대장이라고는 하지만 김형만은 고졸에 단기 하사 출신이어서 군대밥도 일년이 겨우 넘었을 뿐이다.

그는 이제까지 신동석에게 반말도 하지 못했다.
   "어이 분대장."
   김형만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판자조각처럼 굳어있다.
   "차렷 !"
   갑자기 김형만이 소리치자 신동석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풀썩 웃었다.
   "이거 웃기는구만 전시라고 광내기 시작하는데."
   "차렷!"
   "좇까고 있는데 ."
   그러자 김형만이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벙커 입구에 세워 둔 M-16을 집어 들었다.

철거덕 소리와 함께 노리쇠가 전후진하고 실탄이 쟁여지는 것을 신동석이 눈을 점벅이며 바라보았다.

이제는 얼굴의 웃음기가 가석져 있다. 총구가 그에게로 겨누어졌다.
   "차렷 해! 이 새끼야!"
   시키지도 않은 이용식이 이미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신동석은 아직 엉거주춤 두 발을 벌리고 있다.
   "이 새끼, 항명하는 거야?"
   김형만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쳐졌다.

이제 신동석의 귀에는 밖의 소리가 하나도 들려 오지 않았다.
   "어이, 분대장‥‥‥‥
   얼이 빠진 듯한 신동석이 한걸음 다가섰을 때 총소리가 났다.
   "타앙!"
   벙커를 가득 메운 총소리와 함께 신동석은 벽에 등을 부딪치며 주저앉았다.

앞으로 머리를 꺾은 그는 가슴을 뚫은 총탄 자국을 바라보더니 깊게 머리를 떨구었다.
   김형만이 들고 있던 총을 내리더니 온음을 떨고 서 있는 이용식을 바라보았다.
   "분대원을 집합시켜라."
   "예, 예,분대장님 "
   그러나 총소리를 들은 분대 원들이 이미 벙커로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중대장의 벙커 안이다.
   조명훈 대위는 피우던 담배를 땅바닥에 던져 비벼 끄고는 이한성 소위를 바라보았다.
   "다른 놈은 없나?"
   "예, 김을수라고 고참이 하나 있지만 아마‥‥‥
   "아마 혼이 나가 있Tf지."
   제교재장 김정환 소위가 한걸음 다가왔다.
   "제 소대의 고참 세 명은 별문제 없이 분대장들이 잘 장악하고 있습니다. "
   "전쟁이야. 어느 놈에게 잘 보이고 고과 따질 상황이 아냐."
   "알고 있습니다, 중대장님 ."
   "괜히 등뒤에서 총 맞지 말고."
   조명훈이 둘러선 소대장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소대를 확실하게 장악하도록 해. 죽은 신동석이는 항명으로 총살 당한 거야.

중대 원들은 모두 알고 있겠지?"
    "네 . "
    소대장들이 대답하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시체는 연대 본부로 옮기고 연대장한테 사실 그대로 보고 하겠어.

김형만 하사는 현위치에서 그대로 근무한다. "
    조명훈이 해산하라는 듯 머리를 치켜들어 벙커 입구를 가리키자 소대장들이 그곳을 나갔다.
그러나 이한성은 아직도 제자리에 서 있다.
    "왜?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나?"
    다시 담배를 꺼내 문 조명훈이 물었다.
    "아닙니다 다만‥‥‥‥
   "다만 무어?"
   "죽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
   "난 죽이길 바랬어, 이 소위."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은 조명훈이 힐끗 벙커 입구를 바라보았다.
벙커에는 두 사람밖에 없다.
   "군기가 개판이라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알았나?

자네는 나를 진급에 목을 매고 있는 학군 출신의 부패한 장교로 생각하고 있었겠지 ."
   "아닙니다. 저는‥‥‥‥
   "어떤.면에서는 맞아.대위에서 소령 진급을 나는 사회의 직장에

대리에서 과장 진급 하는 것쯤으로 생각했으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 그건 사실이야.

부대 내의 사고나 문제점은 될 수 있는 한 덮어 두려고 했고 말이야."
   "하긴 잘 장악되고 훈련된 부대에서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날 리는 없지 ."
   조명훈이 담배 연기 사이로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런 부대로는 전투가 안돼.

지금 와서 누구 잘잘못을 따질 겨를도 없고.

한두 놈 죽여서 놈들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단 말이야."
   이한성이 어깨를 굽히고 그를 바라보았다.
   "중대장님, 사기가 문젭니다. "
   "사71?"
   한동안 눈을 점벅이며 이한성을 바라보던 조명훈이 어깨를 치켜을렸다가 내렸다.
   "젠장 사기가 어됐단 말이야? 저 새끼들 대가리 굴리는 것이 우리보다 못한 줄 알어?

지금 와서 어설프게 사기 올린다고 교육을 시킬까? 그만둬. "
   "놈들이 저 아래로 몰려오면 죽지 않기 위해 싸워야겠지
도망치는 놈이 있으면 우리가 죽이고, 흥."
   조명훈이 다시 입술을 찌푸리며 웃자 이한성이 발끝을 모았다.
   "저는 제 위치로 돌아가겠습니다. "
   "f4t."
   머리를 끄덕인 그가 문득 이한성을 바라보았다.
   "동부 전선에서는 아마 자네 소대가 첫 총성을 울린 것 같구만 "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린 이한성이 벙커를 나오자 밖은 이미 짙은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진눈깨비가 섞인 밤바람이 얼굴에 부딪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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