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개와 늑대의 시간

제3장 충돌기 7

오늘의 쉼터 2014. 12. 17. 10:33

제3장 충돌기 7

 

 

 

 “강 실장이 잠깐 오라는데?”


진국이 봉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봉수에게 쏠렸다.

 

오전 회의 시간에 엄청 깨졌기 때문이었다.

 

경기가 어려울수록 연구 개발에 더 몰두를 해야 한다며 일본과 중국 등지로

 

직원들을 연수보내는 방안을 아이디어라고 내놓은 때문이었다.

 

“강 실장이 왜 부르지?”

 

“선배님, 그러게 이 불황 속에 해외 연수라니요?

 

불벼락 맞을 소리죠. 지금 몇 명 감원하느냐 어지러운 판국에 말입니다.”

 

병달이 버릇대로 눈을 껌뻑거리며 말했다.

 

“젊은 놈이 사고가 왜 그렇게 고루하냐? 가만히 있으면 우릴 누가 알마나 준대.”

 

“뭐 ‘가이아’에 납품하고 시장 점유율도 ‘비라’에 비해선 형편없지만 그래도 알아주는 편 아닙니까.”

 

병달이는 또박또박 말대꾸를 했다. 봉수는 그의 사고가 꽉 막혀 있는 듯했다.

 

“한국에서나 그렇지.”

 

“저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사장님 생각이 어쩐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요 간부들은

 

아무튼 지출을 가능한 줄이는 게 최선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봉수는 할 말이 없었다.

 

“사장님 생각이 진보적이라고 믿고 다이렉트로 연결이 되면 모를까.

 

그래도 장기간의 연수는 사장님도 반대할 겁니다. 그리고 누가 갑니까?”

 

병달이 여전히 툴툴거렸다.

 

“아무튼 너 갔다 와서 보자.”

 

“저는 나중에 보자는 사람 안 무섭습니다.”

 

병달이 능글맞게 미소를 지었다. 봉수도 어이없어 웃고 말았다.

 

봉수는 수첩을 챙겨들고 실장실로 향했다.

 

“들어와!”

 

실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강일환은 서류를 들춰보고 있었다.

 

봉수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비서가 녹차 두 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봉수는 녹차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잔에 남은 마지막 방울까지 모두 비웠을 때 강일환이 응접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봉수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앉지.”

 

강일환이 소파에 앉은 후 봉수도 자리에 앉았다.

 

“연수 말이야. 만약에 보내주면 자네가 갈 텐가?”

 

“네?”

 

“연수.”

 

“어디로 말입니까?”

 

“중국이겠지.”

 

봉수는 막상 아이디어를 내놓긴 했지만 구체적인 세부 계획이 마련된 건 아니라

 

뭐라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아직은 무리겠지? 아무튼 오전에는 내가 좀 미안했고.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 보지. 그리고 말야.”

 

강일환이 뒷말을 바로 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왜 사원 보험 들어준 거 있잖아.”

 

봉수는 웬 뜬 금 없는 소린가 싶었다.

 

“그 보험 담당한 여자 설계사 말야.”

 

“아, 네. 수정이요.”

 

‘강 실장이 수정이를 어떻게 알지?’


봉수는 강일환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정도가 아닌 듯했다.

 

“그 친구 어때?”

 

“뭐가요?”

 

“뭐 전반적으로 말야.”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보험 내용을 살펴보니까 좋고 해서 내가 다른 데도 추천을 해줄까 해서 말야.”

 

“아, 네. 수정이는 한 때 친하게 지냈습니다.

 

결혼해서 신랑이 죽을 때까지 연락이 좀 뜸했는데, 성격도 화끈하고 끊고 맺는 게 확실했고 뭐,

 

아무튼 예쁜 앱니다.”

 

“대학교 때는 어땠나?”

 

“자유분방한 편이었죠.”

 

“남자 친구들이 많았겠네?”

 

“그,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냥 남자들이 다 좋아했고 남자들 역시 수정이를 편하게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군. 자유분방했다? 알겠네. 그 아이디어 검토하지.”

 

강일환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봉수는 실장실에서 나오며 그가 부른 건 아이디어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정이 때문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른 곳을 소개해 준다는 건 빌미인 듯했다.

 

강일환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남을 대신해 영업을 해 줄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아주 색다른 문제였다.

 

‘수정이랑 무슨 일이 있었나?’

 

봉수는 한동안 실장실을 바라보았다.

 

“뭐래?”

 

“아이디어 검토해 본다고.”

 

“실장님 보기보다 쪼잔 하진 않네요.”

 

병달이 모니터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고 말을 거들었다.

 

“너만 하겠냐?”

 

“무슨 소립니까. 보너스 받고 그냥 지나가신 분들이 누군데요.”

 

병달인 신입사원이라기 보다는 과장쯤으로 보일 정도로 능글맞았다.

 

진국도 그저 웃고 말았다.

 

“그래, 오늘 한잔하자.”

 

진국이 병달이의 모니터를 쳐다봤다.

 

온통 한자만 적혀있었다.

 

“뭘 본 거야?”

 

“중국이요.”

 

“노는 것만은 아니네요.”

 

애란도 다가와 네 사람이 가까이 모였다.

 

“아시아 하면 우선 중국이겠죠.”

 

“그래서 봉수가 가장 먼저 생각한 연수 지역이 중국이었다니까.”

 

“사실 중국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 ‘코지’에 중국 전문가가 나왔구만.”

 

봉수는 병달이의 모니터를 흘겨보며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중국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은 게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병달이가 알고 있다는 중국 이야기가 뭐 별스러울까 싶었다.

 

“중국, 우리 같이 내몰린 팀원들이 한번 도박해 볼 만합니다.”

 

늘 껌뻑거리던 병달이의 눈이 그 말을 할 땐 빛이 번득였다.

 

병달이의 강권으로 채연까지 낀 다섯 사람은 가리봉동으로 향했다.


“꼭 여기까지 와야겠냐?”

 

“선배님, 저는 중국어 배우려고 일부러 이 동네 와서 알바를 하기도 했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 조선족 아니냐?”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그리고 조선족이라고 해도 자기네들끼리는 북경어를 쓰거든요.”

 

대형 밴 택시는 어느새 가리봉동의 한 먹자골목 앞에 멈춰 섰다.

 

“따라 오세요.”

 

병달이는 네 사람 보다 앞서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병달씨 정말 재미있어요.”

 

채연이 병달이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병달이가 모델실에도 놀러 갑니까?”

 

“오다 뿐이에요. 이 옷 좀 입어 달라. 저 옷 좀 입어달라. 얼마나 주문이 많은데요.”

 

“보기보다 응큼하네.”

 

봉수는 병달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병달인 못 들은 척 하고 일행을 골목골목으로 데려갔다.

 

“여기가 차이나 타운입니다.”

 

병달이 손으로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한자 간판이 즐비했고 네온사인도 제법 화려했다.

 

골목을 가득 메운 냄새도 달큼했다. 일행은 사방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른 나라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여기 수육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집이 있습니다.”

 

“수육? 소 수육?”

 

진국이 물었다.

 

“조선족들도 우리만큼 개를 많이 먹습니다.”

 

“그럼, 개 수육?”

 

병달이는 막무가내로 일행을 밀고 끌고 해서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국의 여느 식당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바닥까지 온통 빨간 색이었다.

 

봉수는 인테리어 색 때문인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식당은 골목의 느낌과는 달리 매우 정갈하고 깔끔했다.

 

홀에 여섯 개의 테이블이 있었고 방도 따로 있었다.

 

병달인 카운터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고 반갑게 알은 체를 했다.

 

그 여자 역시 카운터에서 나와 병달이의 손을 잡았다.

 

조선족이라기보다 중국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인이야?”

 

“아닙니다. 길림성 쪽에서 살던 조선족입니다.”

 

“그런데 상당히 미인이네.‘

 

“땅도 넓고 사람도 많은 곳 아닙니까?”

 

“그래서 미인도 많다?”

 

병달이 고개를 끄덕이곤 일행을 방으로 안내했다.

 

“시켜서 정 못 드시겠으면 다른 걸 시키더라도 일단 개 수육을 드셔보세요.”

 

“여기서 알바 했던 거예요?”

 

“네, 한 육 개월 했어요.

 

육 개월 경험하면서 얻은 건데 중국 사람들 사실 사람을 잘 못 믿어요.

 

하지만 한번 믿으면 간이라도 빼줄 정도로 믿는 사람들인 거 같아요.

 

그리고 여김 마담한테 우리 고민을 이야기하면 혹 뭐라도 하나 건질 줄 압니까?”

 

딴엔 그랬다. 봉수는 그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론 대견스럽기도 했다.

 

“2010년도에 중국 속옷 시장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줄 아십니까?”


봉수와 진국 그리고 애란과 채연이 수육을 낼름낼름 잘도 집어먹었다.

 

한약을 넣고 삶은 돼지고기 같았다. 그런데 고량주 몇 잔이 들어가자 병달이 물었던 것이다.

 

“내가 알기로 중국 민족은 잘 안 씻잖아. 속옷의 판매량도 그런 문화와 연관이 있겠지.”

 

봉수는 목에서부터 뱃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잘 안 씻는 게 아니고 못 씻는 겁니다. 워낙 빈부 격차가 심한데다가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더 많으니까 못 씻는 거죠.

 

그건 여건의 문제지 문화의 문제는 아닌 거 같거든요.”

 

“흰소리하지 말고. 그래, 시장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데?”

 

“2010년 중국의 속옷 시장을 전문가들은 대략 우리 나라 돈으로 70조로 잡고 있어요.”

 

“70조?”

 

“오 년 뒤에 70조란 말야?”

 

“도대체 70조가 어느 정도 되는 돈이야?”

 

채연이 고량주 잔을 들고 애란을 바라보았다.

 

애란도 그 돈의 감을 잡지 못해 어깨를 들썩였다.

 

“잘 생각해 보세요. 속옷 하나만 놓고 70좁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전혀 감이 안 온다.”

 

봉수도 사실 그 액수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선배님들도 참. 그럼 우리 나라 1년 예산이 어느 정도인지 아세요?”

 

“우리가 그런 걸 뭐하러 알고 다니냐?”

 

“상식입니다. 상식!”

 

병달이는 답답한지 메추리알 만한 고량주 잔의 술을 털어 넣고 신음을 했다.

 

“얼만데?”

 

“120조요.”

 

“그래도 감이 안 오는데요?”

 

채연이 수육을 간장 소스에 찍어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그럼, 지금 약간 먼 거리에 있는 수도권 아파트 32평이 얼마쯤 하시는 줄 아세요?”

 

진국은 병달이 조금씩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그 역시 알지 못했다.

 

“선배님들 현대인 맞아요?”

 

“그러는 너는 어떻게 그런 걸 다 꿰고 사냐? 머리 복잡해 죽겠는데.”

 

“선배님들이 이상한 거예요?

 

현대는 숫자와의 전쟁이나 마찬가지에요.

 

수에 대해서 무감하면 부자도 될 수 없고 성공 또한 요원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까?”

 

병달의 말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공부들 좀 하세요. 어쨌든 수도권 인근 32평 아파트가 옵션을 포함해서 2억 조금 안됩니다.

 

그런 아파트를 2010년 중국 사람들이 속옷을 사 입는 돈으로 35만채를 살 수 있습니다.

 

이건 곧 35만가구가 생긴다는 거고 35만 가구라는 건 요즘 핵가족의 평균 인구로

 

계산해 봤을 대 대략 140만 명의 가족이 전세나 월세가 아닌 영원히 살 수 있는 집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리고 요즘 흔하게 몰고 다니는 싼타페를 350대를 살 수 있는 돈입니다.

 

그건 사실상 영업용을 제외한 우리 나라 자가용 숫자와 맘먹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중국 사람이 속옷으로 쓰는 돈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자가용 사는 돈과 맞먹는다 이 말이죠.”

 

일행은 그가 말한 내용보다 빈틈없이 느껴지는 수의 나열에 더 탄성을 질렀다.

 

진국은 서서히 실감이 갔다.


병달이 말한 돈이면 현재 1,000억 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코지’가

 

700년을 벌어야 하는 돈이라는 말이었다.

 

“그 시장에서 소외되면 지는 겁니다.”

 

병달이는 단언하듯 말했다.

 

“그거야 우리도 알지. 그런데 그런 큰 시장을 달랑 우리 다섯 사람한테 맡겨?”

 

봉수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선배님도 참. 외국 업체들은 이미 계열사 정도로 꾸려서

 

중국에 진출을 하고 있는 판국에 말이나 되는 얘깁니까?

 

우리 경쟁업체인 ‘비라’만 해도 중국에 지사가 있는 판국인데 게임이 되겠냐 이 말입니다.”

 

진국은 속속 병달의 말이나 행동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우린 뭐야?”

 

채연이 수육에다가 양념장을 듬뿍 발라 입에 넣었다.

 

“제 생각엔 스스로 지쳐 떨어져 나가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병달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애란, 진국 봉수까지 이미 그런 의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그렇게 밀려난 점에 대해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진국이 술을 입안으로 탁 털어 넣었다. 내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제가 보기에 여기 앉아 계신 선배님들은 사실 ‘코지’의 엘리트거든요.

 

이건 절대 아부성 발언은 아닙니다.”

 

“아부구만.”

 

봉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혹시 우리 회사 결정권자들 중에 누군가한테 미움 받으신 일 있습니까?”

 

“병달씨는 말야. 신입에다가 어수룩해 보이는데 그런 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예요?

 

혹시 오성의 숨겨진 자식이 회사에 있다는 소문, 그 당사자가 병달씨 아닙니까?”

 

병달이 술을 마시다 사례 걸린 듯 기침을 해댔다.

 

“그 소문 저도 듣긴 들었는데 그거 예전부터 있던 소문 아닙니까?

 

그러니 저는 절대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건 더더욱 말이 안되잖아요.”

 

“안 될 게 뭐 있겠어요. 우리 중의 누군가 오성 회장의 숨겨놓은 막내아들이고

 

그걸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 봐요. 새로운 세력이 하나 생기는 건데 당연히 밀어내야죠.

 

자기 밥줄이 끊길 지도 모르고 말이에요.”

 

“선배님도 참, 비약이 심하십니다.

 

제가 볼 때 선배님들을 껄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정돌 겁니다.”

 

“누가 그런 생각을 하느냐 말이지?”

 

“선배님들의 눈부신 발전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겠죠.”

 

병달의 말에 애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오성에서 계열사까지 통 털어 400명 넘게 감원을 했습니다.

 

코지라고 비껴갈 수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 선배님들을 경계한다면 이처럼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회사에 이윤을 만들어 주는 우리들을 밀어내기야 하겠어요?”

 

애란의 말에 병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배님들 보면 정말 요즘 사람들 맞나 싶을 정돕니다.

 

그런 선배님들 때문에 미래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싹이 더 크기 전에 잘라야 하지 않겠어요? 그 사람들 입장에선 좋은 기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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