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삶과죽음 사이로
섬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이재영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햇살이 방안에까지 가득 들어차 있었고 열려진 창문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몰려 들어왔다.
누운 채로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맑은 공기 냄새가 느껴졌다.
그 속에는 바다와 땅과 나무의 냄새가 한데 뒤섞여 코가 시린 듯했다.
방은 2층에 있었으므로 아래쪽의 소음도 이제 귀에 들려 왔다.
아이들의 깔깔대며 웃는 소리도 들렸고 어디선가 누군가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도 났다.
바람에 횐 망사천으로 만든 커튼 자락이 부드럽게 펄렁이고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이재영은 맨발로 창가로 다가가 섰다.
아래쪽으로 숲과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잔디가 깔린 정원에서 놀고 있는 것은 김칠성의 딸인 영옥이였다.
한세라와 김경지가 잔디밭 가의 나무 의자에 앉아 영옥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에 도착한 이재영은 사흘 밤낮을 배와 비행기에 시달렸던 참이라 늦잠을 잔 것이다
한동안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이재영은 서둘러 옷을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시중 드는 여자로 좌이는 원주민이 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이재영은 잠깐 주방을 기웃거리다가 아래층의 응접실로 들어섰으나 집안은 비어 있었다.
그녀는 현관으로 나와 정원 쪽으로 다가갔다.
"이제 일어나셨네. 곤히 주무셔서 깨우지 않았어요."
조웅남의 부인인 김경지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아침을 먹었는데 집안에 들어가시면 유사가 있을 거예요.
1 여자가 아침을 차려 줄테니까 드세요."
"그보다도 어젯밤에도 뵙지 못했는데 주인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려야‥‥‥‥
선 채로 이재영이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 외출하셨나요?"
김경지와 한세라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다가 한세라가 머리를 돌려 영옥이를 바라보았고 김경지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영옥이가 넘어졌는지 투정을 부리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한세라는 오히려 이쪽으로 머리를 돌려 이재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분, 돌아가셨어요, 아들과 함께. 강만철 형님께서 돌아가실 때 TfOl ‥‥‥‥
그녀의 목소리는 화난 듯 컸고 얼굴은 말하는 사이에 뻣뻣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우리들도 여기 와서 알게 되었어요.큰형 님께서 비밀로 하라고 하셨는가 봐요."
"너무하세요, 큰형님. 아내와 자식이 그렇게 되었는데 와 보시지도 않으시고‥‥‥‥
한세라가 치켜뜬 눈으로 울고 있는 영옥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달래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영옥이는 더욱 크게 울었다.
"무덤에는 잡초가 가득 자라 있었어요.
그래서 어제는 우리들이 가서‥‥‥‥
그러자 김경지가 힘겹게 자치에서 일어나 영옥이에게로 다가갔다.
이재영은 얼굴을 굳힌 채 한세라와 시선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영옥이의 울음 소리가 그쳤다.
그러나 한세라는 그쪽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이재영도 마찬가지였다.
"함마 아저씨가 오셔서 영옥 아빠와 함께 장례를 치렀다고 해요.
이제는 나도 영옥 아빠가 나에게 한 행동이 이해가 가요.
겨우 돌아 온 날더러 형님 생각을 하고 울었다고 했어요.
내가 살아온 것이 고맙지만 형님께 미안하다고."
이윽고 한세라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우린 태훈이와 태훈 엄마가 가여워서 며칠 동안이나 울었어요.
그런데 지금도 눈물이 남아 있네."
한세라가 손가락 끝으로 눈물 흔적을 지웠다.
"나는 내 남편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사람 성격으로 보아 자꾸 죽을 자리를 찾으러 뛰어다닐 거예요.
그 형님에 그 동생이니까."
"묘지가 어디예요?"
이재영은 자신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는 것을 들었다.
영옥이를 안은 김경지가 다가와 아이를 한세라에게 넘겨 주었다.
"숲속에 있어요. 마을의 묘지인데 아마 지금 형님이 가 계실 거예요. "
형님이라면 강만철의 부인인 안미혜였다.
그녀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남편이 묻혀 있는 섬으로 데려다 달라고 계속 떼를 썼었다.
"나하고 같이 가요,가고 싶다면."
김경지가 이재영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가면서 숲속에 있는 꽃으로 꽃다발을 만들어요. 우리는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어요."
이제 한세라는 영옥이를 안은 채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이재영은 김경지의 뒤를 따라
넓은 잔디밭을 건넜다.
아침 햇살이었지만 피부에 닿는 감촉은 따가웠고 잔디밭을 건너 숲으로 들어서자
아래쪽에서부터 열기가 뻗어 올라왔다.
그들은 숲속의 오솔길을 걸었다.
"이곳은 마치 삶도 죽음도 없는 곳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허리를 굽혀 이름 모를 꽃을 꺾어 든 김경지가 말했다.
"실감이 나지 않아요,
그렇게 아름다운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 그리고 태훈이, 걔는 못 보았어요,
여기서 태어났기 때문에."
바다 쪽에서 올라온 바람에 야자수의 넓은 잎이 펄럭였다.
그러나 아래쪽에는 바람 끝이 닿지 않아서 풀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난 무감각해요.
영옥 엄마는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자꾸 현실감을 느끼는 모양이지만."
김경지가 꽃을 따다 말고 허리를 굽힌 자세로 이재영을 바라보았다.
"울고 있군요, 이재영씨."
이재영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손에 쥔 꽃이 코를 스쳤으므로 재채기가 났다.
"너무 괴롭혀 드렸어요, 김원국씨를."
김경지가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낮게 불어 와 풀잎과 그들의 하반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서워요,그 사람."
"큰형님을 사랑하고 계시는군요. 우리들도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김경지가 다시 허리를 굽혀 꽃을 꺾었다. 그들은 오솔길을 따라 숲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도 했지요.이재영씨가 여기 있으면 큰형님은 돌아오시지 않을 것 같다고."
이재영은 대여섯 송이의 꽃을 쥔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이 아름드리 나무 둥치를 돌자 시야가 트였다.
앞쪽은 200굉 쯤 되는 잘 다듬어진 잔디밭이었다.
군데군데 나무를 깎아 만든 묘비들이 세워져 있었으나 밝은 햇살 때문인지
묘지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잔디밭의 맨 뒤쪽부분에 흰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앞에는 새로 만든 것 같은 나무 십자가가 꽃혀저 있었고 그 옆에 한 묶음의 꽃이 있다.
안미혜가 머리를 들어 다가오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햇살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온해 보였다.
"어서 와요."
안미혜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어머,꽃이 예쁘네,난오면서 이런 거 못 보았는데."
그녀는 이재영이 손에 쥔 꽃을 보았다.
"저기, 형님하고 태훈이 앞에다 놓으세요."
그녀가 눈으로 가리킨 긋에 두 개의 십자가가 꽃혀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재영씬 처음이지만 반가워하실 거예요, 형님은 "
이재영에게는 안미혜의 목소리가 마치 꿈속인 듯 가늘고 맑게 들렸다
그러자조금 전의 김경지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은 삶과 죽음이 성장의 과정처럼 자연스러운 곳인지도 몰랐다.
정기욱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버리고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면서 웃었다.
"병신 같은 놈들, 살고 죽는 것은 운명이다.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살아.
그까첫 권총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고 명줄이 길어지는 것이 아니다. "
"그렇지만 형님, 우리만 빼놓고 안정태나 박용근의 애들은 모두 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겨우 권총 두 자루를 준 것은 말 하자면 ‥‥‥‥
"말하자면 뭐냐?"
유택상이 말을 멈추자 정기욱이 와락 다그쳐 물었다.
"말하자면 뭐냔 말이야?"
"예, 우리는 될 대로 되라고 버려 둔 것 같다는 생각이‥‥‥‥
"버려? 우리를? 웃기지 마라."
뒷자리에 등을 묻으면서 정기욱이 입술을 씰룩여 다시 웃었다.
승용차는 장안동의 타임 클럽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까지 단골로 다니던 레오날드 클럽은 그날 이철우를 만나고 나서부터 발을 끊었다
왠지 기분이 께름칙했기 때문이었다.
"이래봬도 강북 지역의 기반은 단단히 잡혀져 있어.
숫자는 적지 만 내가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단 말이다. "
"그건 그렇습니다, 형님 ."
유택상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김동천의 후임으로 정기욱의 심복이 된 30대 후반의 사내였다
눈이 크고 코와 입도 커서 얼른 눈에 띄는 얼굴이었는데 체격도 우람해서
마치 중국 영화에 나오는 옛날 장군 타입이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전과자 출신으로 정기욱과는 감방 동기생이다.
그의 죄명은 사기와 강도였으나 정기욱이 겪어 본 바로는 사람이 정직하고 순박했다.
더구나 승용차의 한쪽을 들어 옆으로 눕히는 힘이 있어서 심복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개새끼들, 권총을 쥐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두리번거리는 꼬락서니를 생각해 봐라.
언제 어디서 조웅남이나 김칠성, 오함마가 쳐들어 올지도 모른단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
정기욱이 자르듯 말하자유택상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김원국의 일당은 이쪽에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이 처음에는다행이었으나 지금은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유택상이 첫기침을 했다.
지금 정기욱은 이무섭이 총기를 구입하여 안정태와 박용근의 조직원을 중심으로 분배해 주고
이쪽에는 권총 두 자루만 보낸 것에 열을 받고 있었다.
말은 운명이네 뭐네 하고 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이다.
"형님, 제가 말단들 사이의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만‥‥‥‥
몸을 돌린 유택상이 아랫배에 힘을 주며 그를 바라보았다.
"소문이라니? 뭐냐?"
"우리 조직에서 김원국에게 세금을 낸다는 것입니다.
하도 얼토당토않는 말이어서 제가‥‥‥‥
"누가 그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기욱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유택상이 꿀컥 침을 삼켰다.
"그저 흘러 다니는 소문입니다,형님.꼭 누구라고는‥‥‥
그래서 제가 그런 말 하는 놈이 있으면 입을 찢으라고 했지요."
정기욱이 씨근거리면서 그를 노려보았으나 아직 입을 열지는 않고 있다.
"제가 말씀 드린 이유는 형님께서 신경을 쓰셔야 할 것 같다는 뜻에서 ‥‥‥‥
"내가 무슨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이냐?"
갈라진 목소리로 정기욱이 물었다.
"김원국이더러 쳐들어 오라고 부탁을 해보란 말이냐?"
"박용근이나 안정태가 그렇게 소문을 내는지도 모릅니다. "
"개자식들."
승용차는 타임 클럽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미리 연락을 해 놓았으므로 클럽의 현관 앞에는 지배인과 웨이터들이 도열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술맛이 달아난듯한 얼굴로 정기욱이 차에서 내리자 지배인이 뛰 듯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현관 앞에 모여 있던 웨이터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정기욱은 목을 뻣뻣하게 세운 채 입구로 들어섰다.
그의 뒤를 유택상과세 명의 부하들이 따랐다 타임 클럽은 룸살롱이어서 입구에서부터
방이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고 복도는 두 사람이 나란히 가면 확 찰 정도로 좁다.
지배인을 앞장세우고 맨 끝쪽의 밀실로 다가가던 정기욱은 옆쪽의 방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사내 한 명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정기욱은 눈을 치켜뜨면서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육중한을이 반대쪽의 벽에 부딪쳤고 사내가 찌른 칼날은허공으로 치솟았다.
"이 자식 !"
복도가 떠나가도록 고함을 지른 것은 뒤를 따라오던 유택상이다.
그가 발을 들어 사내의 복부를 차자 정통으로 배를 채인 사내가
입을 쩍 벌리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쪽 방에서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가 손에 번쩍이는 칼을 들었고 복도는 좁다
유택상의 주먹이 사내 한 명의 머리를 치는 순간 칼날이 번쩍이며 그의 등에 찍혔다.
정기욱은 발을 들어 앞에 선 사내의 사타구니를 찍어 올렸다.
그러자 입구 쪽에서도 서너 명의 사내들이 그들을 향해 뛰쳐 들어왔다.
정기욱은 칼날을 팔목으로 받으면서 사내의 턱을 쳐올린 다음 반대쪽 문에 몸을 바싹 붙였다.
그러자 권총 생각이 났다. 차에 두고 온 것이다.
유택상이 무릎을 꿇은 채 사내 한 명의 사타구니를 움켜쥐자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났다.
그때 정기욱은 자신이 등을 기대고 있는 문이 안쪽으로 열리는 것을 느꼈다.
몸이 반쯤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목이 선뜻해 짐을 느꼈다.
그리고는 뜨거운 것이 목에서부터 흘러내렸고 이어서 극심한 통증이 왔다.
칼에 베인 것이다.
정기욱은 몸을 돌려 마악 다시 칼을 치켜든 사내의 얼굴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손이 눈에 닿자 눈알 속으로 손가락을 힘껏 집어 넣었다.
사내가 방안이 떠나갈 듯 비명을 질렀고, 무슨 말인가를 외치려고 입을 벌린 정기욱은
자신의 입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목이 아래쪽으로 꺾여졌다.
머리를 든 이철우가 앞에 앉은 서대식을 바라보았다.
"내가 정기욱이를 며칠 전에 만났었어 이야기를 좀 했다. "
"그 사람, 겁없이 돌아다닌다고 소문이 났었습니다.
그쪽 지역은 김원국이가 자주 나타나지 않아서 그랬는지‥‥‥‥
서대식이 입맛을 다셨다
"우리 쪽이 잔뜩 긴장하고 있습니다.
부사장님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오전 내내 사무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서대식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이철우가묵고 있는 영동의 아파트로 찾아왔다.
오늘도 이철우가 점심 식사를 마칠 때쯤 해서 그를 찾아와 어젯밤의 사건을 이야기해 주는 참이었다.
"그런 소문도 있었습니다. 정기욱이가 김원국에게 테러를 당하지 않으려고 돈을 바친다는‥‥‥‥
"어차피 정기욱의 역할은 모두 끝난 참이었다. 정기욱이가 자신의 기반을 굳혔다고 믿는 순간이
이쪽에서 보면 그의 역할이 끝난 순간
서대식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으므로 이철우는 커피잔을 들고 부드럽게 웃었다.
"정기욱은 세상의 이목을 분산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어.
본래 우리의 계획에는 말이다. "
"대장님, 정기욱이는 김원국의 습격을 받아 죽었습니다. "
"그래, 어쨌든."
"대장님 말씀은 마치 정기욱이를 우리 조직에서 "
"내 말이 그렇게 들렸다면 잘못이다. "
커피잔을 내려놓은 이철우가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12월에 접어들자 매섭게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어서 유리창의 귀퉁이에
하얗게 물기가 얼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철우가다부진 턱을들고 서대식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김원국의 처자식을 죽인 것은 나야.
그놈은 지금복수귀가 되어서 나를 찾고 있을 것이다.
놈은 지금 나를 치는 대신으로 부하들을 수없이 살상하고 있는 거야."
"대장님, 김원국의 처자식을 죽인 것은 대장님이 아닙니다.
뒤쪽으로 돌았던 박치술이와 변일태가 했습니다.
그들도 죽었지만 말입니다. "
"내가 명령했다 걸리적거리는 것은 모두 죽이라고."
"대장님, 김원국이는 잊으셔도 됩니다.
우리는 강만철이를 죽여서 놈들의 기세를 꺾었고 이제 김원국이는 곧 끝장이 납니다. "
서대식의 말이 끝나자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이철우가 휴대폰을 들고는 스위치를 올렸다.
"여보세요."
"나야. "
"아, 네, 접니다. "
이철우의 시선이 힐끗 서대식을 스치고 지났다. 서대식이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철우가 이런 식으로 전화를 받는 것은 이무섭밖에 없다.
"자네 어젯밤의 사건 소식 들었지? 장안동의 클럽 사건."
"아, 예,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방심했던 모양입니다.
사전에 클럽 안을 점검했어야 했는데."
"김원국,그놈 일당이 안쑤시고 다니는 데가 없어.
그런데 이 소령, 이제는 자네가 나서 주어야겠어, "
"무엇을 말씀입니까? 저는 이제‥‥‥‥
"정기욱의 조직을 맡아 주게.
우선은 그쪽의 부사장인 오금택을 얼굴로 내세우겠지만 자네가 관리에 뛰어들어야겠어."
이철우가 앞에 앉은 서대식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오금택은 전문 경영인 출신의 부사장이었다.
정기욱은 강북의 십여 개의 업체를 직접 관리한 데다가 유통 회사가 있었고
백여 개의 업체들로부터는 매월 세금을 거둬들여 왔다.
"저,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셔야, 제가 아직 마음의 준비를 못한 상태라서 ‥‥‥‥
앞에 앉은 서대식이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이철우를 쏘아보았다.
"이 사람아,생각할 것이 뭐가 있어?모두가 자네를 필요로 하네.
내일 아침에 유통 회사로 나와, 10시까지. 내가 오금택이한테 이야기를 해놓을테니 까."
그리고는 미처 이철우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무슨 말씀이셨습니까?"
조바심이 난 듯 서대식이 이철우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나더러 정기욱의 조직을 맡으라는 거야."
"그건 당연한 일이지요. 맡으선야 합니다. "
"내일 아침에 출근을 하라는데, 유통 회사로."
"제가 모시고 가지요. 창덕이하고 진찬이, 오석이 모두 부르겠습니다.
우리도 이제 그쪽으로 옮겨야지요."
서대식이 허리를 펴고 얼굴에 생기를 띠었다.
"이제야 대장님이 빛을 보시는군요. 고생하신 보람이 있습니다. "
"단장님도 대장님을 잊으신 것이 아니었구만요. 저는 한때 오해를 했었습니다. "
이철우는 서대식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었다.
마냥 기뻐하기만 하는 서대식은 얼른 이 일을 동료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듯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어딜 다녀온 거냐?"
오함마가 방으로 들어서며 묻자 백동혁이 방에서 튕겨 오르듯이 일어섰다.
"예, 시내에, 정보원들한테서 이야기 좀 듣고
"그렇다면 그 이야기를 나도 듣자."
아랫목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오함마가 백동혁을 바라보았다.
김원국과 김칠성은 저녁 무렵에 서울로 들어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밤 1 1시가 지난 산속의 굿집에는 오함마와 백동혁을 비롯한 대여섯 명의
부하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예,요즘 유흥업소들은 거의 폐업 직전이 되었습니다.
경찰 병력이 무더기로 진을 치고 있는 데다가 저희들이 닥치는 대로 공격을 해
시민들이 밤에 외출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오함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백동혁이 차근차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알고 있어. 너, 다리 아프겠다. 편히 앉아라."
"괜찮습니다, 형님."
"임마, 편히 앉으라면 앉아."
"예, 형님 ."
백동혁으로서는 오함마가 김 칠성보다 더 어려운 형님이었다.
그는 큰형님인 김원국을 따라 섬생활을 하다가 왔으므로
백동혁으로서는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말수가 적은 오함마는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김원국의 주위를 맴돌면서 시중을 든다.
그의 행동은 백동혁뿐만 아니라 장우길이나 다른 부하들에게도 귀감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백동혁이 편하게 앉자 오함마가 머리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계속해 보라는 시능을 했다.
"이제 놈들은 공공연하게 총기를 휴대하고 다닙니다. 경찰청에서도 묵인해 주는 모양입니다.
총기 소지로 문제가 된 일도 없었습니다. "
"그래, 이제 밤거리에 총소리가 요란하겠어, 전쟁이 나는 것처럼 "
"정기욱이를 우리가죽였다고 언론이나 이무섭 일당이 떠들고 다닙니다만
안정태의 부하들이 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날 밤에 불알이 터진 놈하고 눈알이 빠진 놈해서 두 놈이 병원에 실려 갔다가
안정태의 부하들이 어디론가 데려갔다고 합니다. "
"그렇겠지,우리가 하지 않았으니까.
이제 필요가 없으니까 정기욱이를 제거했을 거다. "
"이철우가 정기욱 조직의 배후 실력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유통회사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는데요,
아직 표면에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
"그것도 당연하지."
오함마가 천천히 머리를 』1덕였다.
"놈들은 이제 기반을 거의 닦아 가는구나.그런 샛각이 들지 않아?"
"예, 그렇습니다, 형님."
"너는 별명이 개백정이라면서? 개장수를 했니?"
"아닙니다, 형님."
백동혁이 머리를 저었다.
"가끔 개를 잡았기 때문에, 목검으로요.
개를 죽이면 기분이 좋아
"소도 잡아 보았다면서?"
"예, 형님,하지만 소는 뼈가 단단해서 치는 맛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도 쳐보았어?"
"예, 형님, 몇 명 ‥‥‥
"여자는 있냐?"
"예, 형님, 지금 신촌에
"가끔씩 회포도 풀어?"
"예, 형님, 하지만 바빠서 오래 있지는‥‥‥‥
"너, 큰형님 형수님이 돌아가신 것 알고 있다면서? 칠성이 한테 들었는데."
"예, 형님, 우연히 제가 전화로·.
"지금 섬에 묻혀 계시다. "
"칠성이가 네 칭찬 하더라, 애가 곧고 세다고."
백동혁이 머리를 숙이고 방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조직에서 이런 칭찬은 군대에서 무공훈장을 받는 것과 같다.
오함마가 눈을 점벅이며 백동혁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너도 알다시피 우리 조직이 그렇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되었다. 언제 꺼질지 몰라."
"하지만 형님만 살아 계시면 우리 조직은 산다, 형님만 계시면."
백동혁은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고는 머리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형님은 형수님과 자식을 잃으셨어 장례를 치르러 섬으로 오시지도 않았다.
내가 치렀지, 칠성이하고. 그때 우리는 조직을 다시 일으키고 죽기로 약속했다. "
"형님, 저도‥‥‥‥
"끝까지 들어, 임마."
"예, 형님 ."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네가 형님을 살펴 드려라, 시키지 않더라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지금은 우리가."
오함마가 상체를 세우고 백동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말 알아들었니?"
"예, 형님. "
백동혁이 늘어진 눈쌥을 한껏 치켜올렸다.
"일이 끝날 때까지 여자를 만나지 마라. 알아들었어?"
"예, 형님. "
"그리고 형님 대신 죽어라. 알았어?"
"예, 형님 ."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은 채로 백동혁이 어깨를 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콧등을 타고 방바닥에 떨어졌다.
방안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문풍지의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촛불이 너울거리다가 다시 섰다.
어둠에 싸인 산속에서 이름 모를 산새가 울었다.
술잔을 든 김원국은' 앞자리에 앉은 고재철 준장을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에 근육질의 체격을 갖춘 고재철은 김원국의 시선을 받고는 한동안 마주 보았다.
"저는 처음에는 조금 놀랐습니다.
고 장군께서 지난번 각하의 특명을 받고 조사관이 되셨던 분인지는 알았습니다만
워낙 뜻밖이어서 김원국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을사는 끝난 줄로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 , 조사는 끝났습니다. "
고재철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황 대령이 그렇게 죽고 나서 나는 다시 시작했습니다 공식적인 일이 아니지요."
"위험하실텐데, 장군께서도."
김원국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김칠성이 입을 열었다.
"황 대령은 이무섭의 손에 죽었습니다.
아니 임종휘라는 거물이 뒤에서 조종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요."
"저도 황대령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사고를 당한 날밤에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로 했는데 "
고재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온돌방에 앉아 있는 것은 그들 셋밖에 없다.
이곳은 인사동의 골목 안에 있는 허름한 한정식 집이었다.
밤 11시가 넘어 있었기 때문인지 집안에서는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1러나 집 안팎에는 십여 명의 부하들이 어둠 속에 묻혀 경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임종휘씨는 아직도 군에 영향력이 있습니다.
미국과도 관계가 좋고요.
그가 배후의 우두머리라면 강한석씨는 꼭두각시 노릇을 한 것이지요.
둘을 정점으로 할 수는 없는 입장들입니다. "
고재철의 말에 김원국이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강한석씨는 권력에의 욕심에 처음에 는 귀찮은 불씨를 덮어 두려고만 했을 겁니다.
안기부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 자신의 권한을 침해당하는 느낌도 들었을 것이고,
이찬형씨에 대한 경쟁 의식도 있었겠지요.
그는 지금도 임종휘씨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모를지도 모릅니다. "
"알았어도 지금은 늦었지요."
술잔을 든 고재철이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는."
"임종휘는 강한석을 대통령으로 밀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김칠성이 묻자 김원국과 고재철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는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건 가상입니다만, 그렇게 되었을 때는 임종휘가 낮과 밤을 모두 장악하는 지배자가 되겠군요."
억양이 없는 고재철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강한석씨는 임종휘가 제공하는 돈과 조직, 그리고 유사시의 폭력까지도 필요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년말의 대선 때에는 야당 후보가 강할수록 극심한 혼란 상태가 될 것 같습니다. "
고재철의 말이 끝나자 김칠성이 상체를 세웠다.
"그렇다면 아예 씨부터 없앱시다. 강한석이를 말입니다. "
"임종휘가주모자다 임종휘가 있는 이상제2,제3의 강한석은 얼마든지 생겨난다. "
김원국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황 대령의 조사가 진실이라고 믿는다. "
김원국은 식탁 밑에서 노란색 서류 봉투를 꺼내어 고재철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것은 황 대령이 수집한 자료인데 안기부의 고 차장이 작성해서
대통령과 총리에게 보낸 보고서 사본입니다.
전 안기부장인 이찬형씨가 자리를 걸고 마지막으로 제출한 서류인데
고 차장이 얼마 전에 나에게 보내 주었지요."
눈을 치켜뜬 고재철이 서류 봉투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받아 쥐었다.
"제가 펴봐도 되겠습니까?"
"보여 드리려고 가져온 겹니다. "
고재철이 서류를 읽는 동안 김칠성은 위스키를 넉 잔 따라 마셨고
김원국은 손끝 하나 까닥이지 않고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이윽고 고재철이 머리를 들었다
"각하께서 이것을 보셨다면 지금까지 가만히 계셨을 리가 없습니 f."
"가만히 계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식탁 위로 상체를 조금 숙인 김원국이 고재철을 바라보았다.
"임종휘와 그와 연루된 군인들, 그리고 이무섭과 이철우,
거기에다 자신의 후계자로 내정된 강한석이까지 모두 구속시키실까요?"
"경찰청장인 박동호는 곧 내무장관으로 영전될 것입니다.
그도 구속시켜야 할 것이고‥‥‥‥
"집권 여당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됩니다.
정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대통령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버릴 겁니다. "
"하지만 이것은‥‥‥‥
"야당의 대선주자에게 좋은 일을 시켜 줄 수는 없지요.
그리고 이제까지 각하께서 이룩한 업적과 미래의 한국에 대한 설계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단 말입니다. "
"임종휘를 쳐야 합니다. 법을 적용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 힘으 김원국의 말소리가 단호해졌다.
"임종휘, 이무섭, 이철우, 그리고 얼굴 마담격인 안정태나 박용근이를 차례로 깨면
강한석씨는 구속에서 풀려나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그는 각하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는 후계자가 될 겁니다 "
입맛을 다신 김칠성이 머리를 돌렸으나 고재철은 김원국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김원국이 말을 이었다.
"나는 요즘 각하께서 그것을 처리하실지 궁금합니다.
서류를 보았다면 말이오.
지금의 밤세계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우리들이 일으킨 테러로 밤에는 행인도 드물고유홍가는 폐쇄 직전입니다.
그런데 각하는 최후의 수단을 쓰시지 않고 있습니다. "
"그건 계엄령이지요.그것은 각하께서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가를 말해 주는 겹니다. "
"빌어먹을."
술잔을 움켜쥔 고재철이 어금니를 물었다.
그의 단단해 보이는 얼굴이 이제는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나도 군인이오.나나 황인규 같은 군인이 전체 군인의 99퍼센트 라는 말입니다.
몇 명밖에 안되는 놈들 때문에 ‥‥‥‥
"용기있는 군인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쁩니다. "
김원국이 술잔을 쥐며 그를 향해 말했다.
이중섭 대통령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뒤따라 들어온 비서실장 윤성하가 그의 책상 앞에 섰다
"각하,밤거리의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유흥가는 폐쇄 직전이고 어제도 강남의 나이트 클럽에서 ‥‥‥‥
"아침 신문에서 읽었어."
머리를 든 이중섭이 윤성하를 바라보았다.
"다행인 것은 시민들은 다치지 않은 거야,
몇 명이 실수로 부상당한 것을 빼고는 그런데 김원국이가 부상당한 시민들한테는
치료비를 듬뿍 보내 준다면서?"
"그건 잘‥‥‥‥
"어제 아주일보의 간부들이 인사차 왔을 때 들었어."
"각하, 내무장관은 각료회의에서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할 예정입니다
총리가 오후에 그 문제로 오십니다. "
"총리는 군대 파견에는 반대하고 있어, 지난번 회의 때도 그했는 01."
"각하, 외국 신문에 한국의 밤거리는 전쟁터와 같다는 기사가 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5.즘 관광객이 30퍼센트나 줄었습니다. "
"허어,그것 큰일인데.도대체 김원국이를 어서 잡지 못하고 무얼 하는 거야?"
이중섭이 두 눈을 치켜뜨고 윤성하를 노려보았다.
"그놈만 잡으면 끝날 일인데, 그렇지 않아?"
"그렇습니다, 각하."
"오늘 총리와의 회합을 취소하도록 해 만날 필요가 없어."
놀란윤성하가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전에 없던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기 상황이야. 그런데 총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은가?"
"네? 네, 저는 잘‥‥‥‥
비서실장이 손에 든 서류를 펴지도 못하고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갔다
이중섭은 책상 위에 놓인 빨간색 전화기를 들었다.
국무총리인 장희만과 연결된 직통 전화였다.
"여보세요."
다소 쇳소리가 나는 장희만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중섭은 상체를 세웠다.
그는 절대로 흐트러진 자세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총리, 납니다. "
"아아, 각하, 안녕하셨습니까?"
장희만의 목소리는 굳어 있었다.
아침부터 걸려 온 대통령의 전화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것이라는 경험 때문일 것이다.
"총리, 오늘 오신다고 했는데, 우리의 회합은 연기합시다. "
"예, 각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희만의 목소리는 떠 있었다.
김이 빠지는 일이었다.
지난 정권 때에는 대통령이 불신을 보여 주는 방법으로 그런 방법을 쓰기도 했던 것이다.
이중섭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총리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예, 각하, 말씀하십시오."
"정부를 대표해서 성명서를 내주세요.현 상황은 절대로 위기 상황이 아니라고,
그리고 밤거리의 난동은 조직 간의 분쟁일 뿐으로 정권에 하등의 영향이 없다고 하세요."
"물론 시민의 항의도 있을 것이오. 무슨 뻔뻔한 소리냐고 하겠지.
하지만 총리의 소신이라고 발표하세요."
"예, 각하,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나와 상반된 것처럼 현 상황을 분석해 주시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가 알테니까 말이오. "
"그럼 각하께서는‥‥‥‥
"대변인을 통해서 비공식적으로 분위기를 흘리겠소,
총리의 발표에 분개했다고."
"김원국이는 시민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고 하세요.
그 증거로 몇 명 다친 시민들에게 김원국이가 치료비를 주었다는 사실도 밝히시고,
아주일보의 강상현이에게 협조를 구하시면 좋아할 겁니다. "
"예, 각하."
장희만도 수십 명의 날고 기는 장관들을 통솔하는 총리였다.
이중섭의 의중을 읽게 되자 그의 말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총리 , 우리가 보이지 않는 힘에 실려 갈 정도로 우둔하지는 않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각하.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
"충격을 줄입시다. 우리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는 일이오."
"그렇지요."
"그럼 나는 당분간 총리의 얼굴을 보지 않겠소."
"서운합니다만 대국을 위해서 참겠습니다. "
대통령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는 기쁨에 장희만의 목소리는 오히려 들뜬 것처럼 들려 왔다.
신문을 내려놓은 임종휘는 앞에 앉은 이무섭을 바라보았다.
"총리는 내각을 대표하는 사람이야.
대통령과 견해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이렇게 성명을 발표하려면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정상인데 말이야."
"대통령이 총리와의 면담을 취소하고 나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청와대는 논평하지는 않았지만 대통령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는 정보를 흘리고 있습니다. "
이무섭이 말하자 임종휘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여론에서도 총리가 현실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군.
이제 총리는 옷을 벗어야 할 것 같구만 "
"대통령은 강경책을 쓰게 될 겁니다.
어쩌면 이번 일로 김원국의 숨통이 더욱 죄어지게 되었습니다. "
"군대를 풀지는 않아. 군경 합동으로 검문 검색을 강화시키는 것이 고작이야.
그리고 시민들도 이제는 김원국이를 두렵게 생각하고 있지 않아."
피로한 듯 임종휘가 손끝으로 눈두덩 이를 눌렀다.
"김원국이만 잡으면 끝나는 일인데 말이야. 그놈, 끈질긴 놈이야.
쥐새끼처럼 도망 다니면서 균을 퍼뜨리고 있어
나는 그놈이 이렇게까지 명이 길 줄은 몰랐어."
"안기부나 경찰청의 간부들이 그놈을 도와주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친구들이 모두 제거되었으니만치 ‥‥‥‥
"대통령과 총리에게 보낸 안기부의 자료 말인데,
아마 그 자료에는 내 이름이 거론되었을 것 같더구만, 배후의 중심 인물로."
"추측일 뿐입니다. 물증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인 강한석이가 우리들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충격을 받았겠지?"
"강한석이가 우리와 연루되어 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이재영이는 폭로 기사가 허위라는 것도 밝혀졌구요."
임종휘는 한동안 그를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벽에 걸린 괘종 시계가 10시를 알렸다.
아침부터 이무섭은 임종휘를 찾아와 어제 오후의 총리가 발표한 성명서에 대해서
상의하고 있는 참이다.
"물론 여론에서 김원국이를 싸고 돈다는 인상이 풍기는 것이 꺼림칙하기는 합니다.
김원국이 부상당한 시민에게 위로금을 보낸다든지 하는 사실을 총리가 거론했다는 것도 말입니다 "
이무섭의 말소리가 정적을 깨었다.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심어 주지 않으려는 행동일 수도 있지요
그런 면에서 보면 총리는 정치적 발언을 한 겁니다. "
강한석씨한테는 아침 일찍 전화가 왔었어, 자네가 오기 전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임종휘가 말하자
이무섭이 퍼뜩 머리를 들어 I를 바라보았다.
"강한석씨한테서 말입니까?"
그래, 그 사람은 곧 총리가 옷을 벗을 것이라고 하더구만 대통령의 노여움을 샀다는 거야."
"당연하지요."
강한석씨는 단순해, 집착력과 명예욕은 대단한 사람이지만.‥‥‥
대통령은 강한석씨와는 다른 사람이야.
산전 수전을 겪은 백전노장이란 말이야.
안기부의 보고서가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덮어 두고 있을 사람이 아냐.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대한 반응이 있을 것인데 "
이무섭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임종휘는 한때 권부의 핵심에서 대통령 이상으로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다.
그는 통치자의 입장을 잘 알고 있다고 봐도 되었다.
임종휘가 말을 이었다.
이번 성명서로 득을 본 사람이 있어.
김원국인데,
그는 이것으로 크게 고무되었을 거야.
적어도 총리가 자신을 위험 인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게 되었을테니까."
"총리는 곧 옷을 벗게 될 겁니다. "
4벗건 안 벗건 간에 김원국은 자신감을 갖게 될 거야."
"놈은 곧 잡힙니다. "
그러자 임종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철우는 잘 하고 있나?"
"네, 의욕적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
우울한 분위기에서 빠져 나오려는 듯 이무섭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정기욱의 기반도 제법 단단했거든요.
이제 강북의 주요업체들은 모두 이철우가 관리하게 될 겁니다. "
"다행이군, 그가 마음을 잡았다니 ."
"충성심이 강한 녀석입니다. 절제력도 대단하지요."
"그를 믿는 모양이군."
"제가 각하를 의지하듯이 그도 저를 따르고 있습니다. "
"김원국의 조직도 마찬가지야.
놈들간의 의리는 목숨 같은 것을 하찮게 여길 만큼 단단하더군.
지금까지 이탈한 놈이 한 놈도 없는 것만 봐도 그래 "
"어떻게든 잡겠습니다 이제는 애들한테 총기를 나눠 주었으니
놈들이 쉽게 달려들지도 못합니다.
그 예로 요즘 사흘 동안 놈들의 테러는 두 건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변두리에서요."
"이쪽이 총기를 갖고 있다는 정보가 새어 나간 모양이군,
놈들에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들을 억제시키는 효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소문이 말씀입니다. "
머리를 끄덕인 임종휘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려져 있었는데 창 밖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눈가루가 보였다.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12월 중순에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같은 시간에 북한산의 굿집에서는 김원국과 김칠성, 오함마가 둘러앉아 있었다.
온돌방이었고 윗목의 장판이 몇 군데 해어져 있었지만 깨끗하게 닦여진 방바닥은 따뜻했다.
김원국이 방바닥에 펼쳐진 신문에서 시선을 떼었다.
"이무섭이가 이것을 보고는 왜 실망했을 것이다.
놈은 현재 상황이 최악이라는 발표를 기대했을테니까."
"총리가 우리들이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치료비를 보냈다는 것까지 발표한 것은 뜻밖입니다.
그것으로 대통령한테 상당히 질책을 당하겠지만‥‥‥‥
김칠성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어쨌든 총리가 현재 상황이 그렇게 위기 상황이 아니라고 말해 준 것은 그들에게 힘이 되었다.
"이무섭이는 거여동의 개인 주택으로 집을 옮겼다고?"
김원국이 묻자 김칠성이 머리를 」1덕였다.
"예, 형님, 아파트 주민들이 불평을 많이 했답니다.
밤낮으로 수십 명의 경호원과 경찰들이 득실거리고 있었으니까요.
거여동의 저택은 건평이 200평도 넘는 이층 양옥입니다. "
"이젠 공공연하게 나들이를 한다는데, 임종휘한테도 찾아가고."
"군 시절의 상관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찾아갈 때는 상당히 경계를 합니다.
안경을 쓰고 변장할 때도 있습니다. "
김원국이 잠자코 앉아 있는 오함마를 돌아보았다.
"이제까지 쫓겨 다니느라고 동생들을 제대로 돌보아 주지도 못했다.
제각기 딸린 식구들이 있을텐데,그들이 날 따라다니는 것을
수사기관이 알고 있을 것이고 그 가족들도 시달릴 거다. "
오함마가 눈을 껌벅이며 김칠성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동생들에게 돈을 모두 나눠 주어라.
가족들에게 보내 주도록 말이다.
우리 경비로 쓸 돈만 남겨 두고."
"예, 형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
오함마가 머리를 11덕였다.
"돈은 20억이 조금 넘습니다.
지금 데리고 있는 애들이 모두 32명인데 20억을 똑같이 나누면‥‥‥‥
"그건 칠성이하고 상의해서 나눠 주어라.
돈 보낼 때 조심하도록 하고. "
"웅남 형님이 데리고 있는 애들이 열 명 정도 되는데요, 형님 ."
"그렇구나. 웅남이하고는 연락이 되지?"
"예, 동혁이가 손채석이하고 하루에 두 번씩 ‥‥‥‥
"웅남 형님은 웅남 형님이 따로 알아서 하라고 하지요
그쪽도 돈을 왜 거두었을테니까요."
김칠성이 머리를 들고 말했다.
"형님 지시라고 말하면 됩니다.
구태여 이쪽에서 돈을 보낼 필요
"지난번에도 5억을 보내 왔으니 자금은 꽤 거둔 모양이 다만 그럴 수는 없다.
그쪽 동생들에게도 돈을 나눠 주어라, "
"예, 형님 "
"싸우러 가기 전에는 밥을 든든하게 먹어 두는 거야.
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동생들에게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다. "
"형님, 우린 살아남을 겁니다. 이길 겁니다. "
김칠성이 목을 세우고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돈을 바라고 형님을 따라다니는 애들은 없습니다. "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것이 아니다. "
"일이 끝나고 나서 하셔도 되는데요, 형님."
"당장 나눠 줘라."
김칠성이 잠자코 시선을 내렸다.
"벌써 첫눈이 내리는구나."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김원국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몇 년 만에 보는 눈이다. "
유리창은 벽에 통풍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넓이가 사방 30센 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유리창 밖으로 흩날리는 횐 눈이 보였다.
잠자코 앉아 있던 김칠성이 자리에서 일어서자오함마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방을 나가고 나서도 김원국은 창문을 바라보며 앉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은 불지 않았으나 숲속은 얼음 속처럼 차가웠다.
검은 바위와 나무 등걸, 그리고 말라 비틀어진 풀잎을 보기만 해도 써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풀잎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는 있었지만 금방 땅의 찬 기운이 몸에 퍼졌고
이제는 온몸이 얼어 버린 듯 떨리지도 않는다.
최순태는 머리를 들고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점점이 눈발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곧 어두워질 것이다.
담배를 피워 물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므로 최순태는 입맛을 다시면서 아래쪽의 굿집을 내려다보았다. 김선주의 집을 추적해 알아낸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그녀가 백동혁과 질은 사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형사들을 잠복시켜 놓았던 효과가 있었다. 점심때쯤 백동혁으로 보이는 자가 그녀의 아파트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받은 최순태는
저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당장에 그를 잡는 것보다 미행하여 김원국의 은신처를 알아내기로 결정한 것도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서두르느라 이곳에 집결한 것은 도봉서의 기동대 병력 50명 정도였다.
한 시간만 시간이 더 있다면 북부서와 청량리서, 본부의 병력까지 합해 천 명까지도
모을 수 있을 것이0.
눈발이 날려 손등과 얼굴에 떨어졌고 렌즈에도 육각형의 얼음 조각이 붙어 있다.
아래쪽에서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순태는 망원경의 렌즈에 떨어진 눈을 닦아내고는 다시 두 눈에 갖다 대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굿집의 정면이 드러났는데 마당에서는
다섯 명의 사내가 모여 서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건물의 옆쪽에서 사내 두 명이 한아름씩 장작더미를 안고 나타나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저쪽, 아래쪽에 두 놈이 있는데요, 보초인 모양입니다 "
옆에 엎드린 김 형사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어른거리는사내의 머리 부분이 보였다.
눈발이 점점 심해졌고 앞쪽의 시야는 잔뜩 흐려 있었다.
"방이 네 개에 헛간이 하나, 변소는 저기 옆쪽에 있군요.
이거,울타리도 없어 놓아서 사방이 비어 있습니다. "
"이봐, 기동대장을 불러 ."
김 형사가 몸을 틀어 뒤쪽을 향해 손짓을 하자
전투모에 M-16 소총을 든 기동대장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이, 김원국이 집안에 있는가는 확인하지 못하겠어.
하지만 날씨가 이래서 빨리 시작해야겠는데."
최순태가 말하자 기동대장이 머리를 저었다.
"북부서의 기동대가 올 때까지 기다립시다.
우리 기동대 50명 가지고는 아무래도‥‥‥‥
"이봐요, 50명이 모두 총으로 무장되어 있어.
북부서 기동대까지 합류시키면 좋기는 하지만 시간이 없단 말이오."
계급은 같은 경감이었지만 이쪽은 본부의 서열이 높은 위치였고
청장으로부터 이번 작전의 지휘를 맡은 몸이다.
기동대장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도봉서의 기동대만으로 놈들을 소탕한다면 당신한테도 좋지, 안그래요?"
"그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기동대장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굿집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굿집과의 거리는 100미터가조금 못되었다. 아래쪽의 도로는 이미 차단되어 있어f,」 놈들이 도망갈 길은 없다.
"놈들은 스무 명이 넘는 것 같습니다.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기동대장이 망원경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최순태에게 말했다.
"공격을 한다면 양쪽 측면에도 기동대를 배치시켜야 합니다. "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시작합시다.
공격 신호는 이쪽에서 할테니까 기다리라고 하고 내려보내요."
"알겠습니다. "
기동대장이 뒤쪽으로 물러가자 최순태는 호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오후 3시가 넘어 있었으나 눈발이 심해지는 산속은 저녁 무렵같이 어둑했다.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냉기가퍼진 온몸은 나무 토막처럼 뻣뻣해져서 감각이 없다.
"여보세요."
신호가 가자마자 저쪽에서는 전화를 받는다.
경찰청장인 박동호의 목소리였다.
"청장님, 접니다. "
"그래, 어떻게 되었어?"
박동호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에게는 10분쯤 전에도 보고를 하였었다.
"아직 북부서의 기동대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날씨가 어두워지고 있어서요."
"30÷븐쯤 걸린다고 하던데, 지금 가는 중이야."
"고분 후면 어두워집니다. 지금 시간이 딘시 10분전인데 , "
"왜? 놈들이 움직이려고 하나?"
"아닙니다, 아직은. 그렇지만 어두워지면 도망치는 놈들이 있을까봐서 ‥‥‥‥
"도봉서의 기동대만으로 충분할까? 그렇다고 군 병력을 지원받자면 시간이 패 걸려 ."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면을 포위하고 있으니까요.
놈들은 스무 명 정도입니다. "
"내가 10달 후에 연락할테니 기다리고 있어."
그러면서 박동호는 전화를 끊었다.
상부에 보고할 모양이었다.
기동대가 굿집을 향해 조심스럽게 내려가고 있었다.
옆쪽의 공격을 맡은 병력이다.
긴장과 추위로 굳어진 얼굴들이었으나 두 손으로는 제각기 M-16을 움켜쥐고 있었고
수류탄 발사기를 들고 있는 대원도 보였다.
최순태는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한사람씩 스쳐 지나는 대원들의
중무장한 차림새를 보자 마음이 놓인 것이다.
이만한 병력에 희력이면 김원국 일당이 백 명이 있다손 치더라도 몰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쪽처럼 무장된 병력이 아니다.
이쪽은 전쟁터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전투부대인 것이다.
그때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벨소리 대신 진동음으로 바러 놓은 것이다.
휴대폰의 스위치를 올리고 귀에 대자 박동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공격해. 나도 20분 후에는 헬기 편으로 그곳에 도착할테니까."
"알겠습니다, 청장님 ."
스위치를 내린 최순태가 머리를 돌렸다.
기동대장과 김 형사가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휴대폰을 귀에서 뗀 김칠성이 놀란 듯 눈을 치켜뜨고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형님, 우린 포위당했습니다. 경찰 병력이 산 쪽에 있습니다.
지괌 곧‥‥‥‥
"천천히 말해라."
김원국이 던지듯이 말하자 김칠성이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고 차장, 아니 고성섭씨인데요. 안기부에서 정보를 주었답니다.
우리측 누구를 미행해서 경찰이 여기까지 왔고 지금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것은
도봉서의 기동대 병력입니다.
50명 정도라는데요."
"눈발이 쾌 심해지는군."
자리에서 일어난 김원국이 창 쪽을 바라보며 말하자 방안에 앉아 있던 사내들도 따라 일어섰다.
"포위되었다면 도망칠 길은 옆쪽밖에 없다.
아래쪽 길은 이미 막혀 있을 것이고."
김원국이 벽에 걸려 있는 점퍼를 내려 걸치며 둘러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밖에 있는 애들에게 준비시 켜라. 놈들이 우릴 감시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고."
백동혁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옆쪽으로 치고 나가면 개울이 나온다.
개울을 건너 산속으로 들어가 능선 두어 개를 넘으면 수유리가 나을 것이야.
흩어지더라도 만나는 장소는 국립의료원 근처의 아파트다.
애들에게 알려 주도록."
이제는 김칠성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내가 탈출로를 생각해 두었다.
이쪽 샛 문을 열고 일직선으로 달리는 10미터쯤의 거리가 문제야.
개울 근처에 경찰들이 잠복해 있다고 하더라도 나무에 가려서 조준 사격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김원국이 반대쪽으로 뚫린 샛문을 턱으로 가리켜 보이자
오함마는 창으로 다가가 눈만을 내놓고 밖을 내다보았다.
굿집은 일자형의 집이었고 한쪽에만 미닫이 식의 문이 있었으나
그들이 있는부엌 옆방은 벽이 뚫려 있어서 부져과통했고 부엌에는
반대쪽으로 나가는 샛문이 있다.
굿집은 산 중턱에 디귿(ㄷ)자로 패인 공터에 위치하고 있었다.
ㄷ자의 벌려진 부분에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고 나머지 삼면은 울창한 삼림이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굿집이 보이겠지만 옆쪽에서는 나무에 가져
굿집 근처에 바짝 다가오지 않는 한 보이지 않는다.
문이 열리더니 백동혁이 들어섰다.
두눈을치켜뜨고 있었으나늘 어진 눈시울이 조금 올려졌을 뿐이다.
"형님, 준비가 되었습니다. "
"좋아, 네가 앞장을 서라 우리가 뒤를 따른다.
모두 일렬로 뛰어 빠져 나간다. "
"예, 형님 ."
김원국은 방문을 열고 나와 봉당에 놓여진 신을 신었다.
옆쪽의 방문이 일제히 열리면서 부하들이 따라 나왔다.
지금이 제일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을 김원국은 알고 있었으므로
허리를 굽혔다가 펴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아직 어떤 기척은 없다.
눈보라가 심해지고 있어서 얼굴에도 차가운 눈송이가 부딪쳤다.
"자, 뛰어라!"
허리를 펴자마자 김원국이 낮게 소리치며 부엌 쪽으로 뛰어들었고
그의 뒤를 10여 명의 부하들이 따랐다.
두손으로 M-16을 움켜쥐고 있던 최순태는 마당에 모여 섰던 사내들이
하나씩 둘씩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가 저녁 먹으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났다 놈들이 부엌에서 저녁을 먹는 모양이었다.
"잘 되었군. 집안에 몰아넣고 한꺼번에 몰살을 시켜야지."
그들은 이제 굿방의 30미터쯤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러나 옆쪽으로 돌아간 대원들은 아직 it궈를 잡지 못했다.
최순태는 몇 번째 인지도 모르게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청장의 공격 명령이 있은 지 10분 정토가 지났다.
그러나 단 일분도 헛되게 보내지는 않았다.
기동대를 기다려 아래쪽에 배치시키고 굿집의 측면을 돌아 위쪽에 진을 치고 나서
이제 2,3분좋후면 옆쪽으로 돌아간 기동대에서 연락이 올 것이고 그때에는 공격이다.
항복을 권유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두 손을 들고 나을 놈들도 아니고 추운데 마이크도 없이 소리 지를 생각도 없다.
그때 굿방의 한쪽 문이 열리면서 서너 명의 사내가 나와 신을 꿰었다.
태연한 모습들이었다.
옆쪽의 방문들이 열리더니 다시 대여섯 명의 사내가 나왔는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최순태는 총을 움켜 쥐었다.
"저 자식들이, "
"아까 저녁 먹으려고 부엌에 들어가는 것 같던데요."
김 형사가 총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 다음 순간 사내들은 일제히 부엌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쏴! 쏴 죽여 !"
최순태의 목소리가 찌렁이며 산을 울렸고 그것에 스스로 놀랐는지 그의 머리끝이 쭈뼛 일어섰다.
기동대장이 쥐고 있던 M-16이 요란한 총성을 내면서 발사되자
횡대로 엎드려 있던 기동대원들이 굿집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두어 명의 사내가 부져 입구에서 몸을 뛰틀며 쓴러졌다.
"저기, 저기 옆쪽으로!"
누군가가 소리쳤고 최순태도 부엌 옆쪽으로 뛰쳐나가는 사내들을 보았다.
"저놈들! 놓치지 마라!"
총탄은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었는데 마치 숨어 있던 오리가 뛰쳐 올랐을 때
사냥꾼이 쏘아 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쪽은 굿방과 30미터쯤까지 내려와 있었지만 모두가 그 쪽을 조준할 수는 없다.
횡대로 엎드려 있었는 데다가 나무에 가려 총알이 튀기도 했다.
그래도 10미터쯤의 거리를 달리는 사내 중 벌써 두 명이 땅바닥에 몸을 부딪치며 쓰러졌다.
산속은 요란한 총성으로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그때 최순태는 부엌의 입구 쪽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사내를 보았다.
그는 이쪽을 향해 서너 걸음을 뛰다가 손에 든 것을 던졌다.
그리고는 풀숲에 엎드려 보이지 않았다.
"수, 수류탄!"
누군가가 소리를 쳤고 그 다음 순간 최순태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자신의 몸 위로 떨어지는 돌덩이와 부스러기에 온몸을 움츠렸다.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가 났고 다시 또 한 발의 수류탄이 터졌다.
총성이 조금 줄어들었고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렸다.
최순태는 눈에 들어간 흙을 손등으로 비비면서 앞쪽을 바라보았다.
사내들이 빠져 달아나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또 다시 바로 옆쪽에서 수류탄이 다시 폭발했고 이번에는 파편인지 돌덩이인지가
날아와 어깨를 쳤으므로 그는 이를 악물었다.
옆쪽에 엎드려 있던 김 형사가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는 신음 소리를 내었다.
어딘가를 다친 모양이었다.
수류탄 한 발이 다시 폭발했다.
이쪽은 이제 총성이 드물어져 있었다.
기등대 누군가가 대응해서 수류탄을 던진 모양이었다.
굿집의 한쪽이 폭발과 함께 부서져 하늘로 건물 조각들을 뿜어내었다.
다시 한 발의 수류탄이 굿집의 부엌을 뚫고 들어가 폭발했다.
이제 굿집은 지붕이 내려앉고 부엌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인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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