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옥의 밤거리
마당으로 내려선 김원국은 담장 밑의 나무 벤치에 앉아 있는 이재영에게 다가갔다.
발에 밟힌 마른 나뭇잎이 버석이는소리를 내었는
데도 이재영은 건너편의 야산을 바라본 채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그래, 나한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나?"
다가선 그가 묻자 이재영이 머리를 들었다.
처음 만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길고 현란하게 물결치는 듯했던 머리칼을 뒤쪽에서 묶어 위로 뭉쳐 올렸으므로
부드러운 목의 곡선이 드러났다.
바람이 불어와 마른 나뭇잎 두어 개가 그녀의 무릎 위에 떨써졌다.
진 바지 차림이어서 허벅지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였다.
"전 돌아가지 않겠어요."
나뭇잎처럼 건조한 목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아직도시션은 똑바로 김원국을 향하고 있다.
"그대로 이곳에 있겠어요. 그렇게 해주세요."
54 밤의 대통령 제2부 -lU
"안돼 ."
김원국이 머리를 저었다.
"이런 축사에서 여자들을 고생시킬 수는 없어 이곳에 비하면 만탄 섬은 천국과 같은 곳이지."
김원국이 벤치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그녀와 나란히 건너편의 야산을 바라보았다.
바람결에 짐승의 노린내와 분뇨 템새가섞여 콧속으로 들어왔고 야산의 나무들은
모두 앙상한 가지만을 내보이고 있을 뿐이다.
및바랜 색깔로 덮인 산야는 마치 겨울이 오기도 전에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만탄 섬은 하늘이 언제나 파랗고 햇살은 따뜻해.
바다는 맑아서 물속의 고기가 보여. 섬 사람들은 인정이 많고 착하지."
바지 위에 떨어진 나뭇잎을 털면서 깊원국이 말했다.
"먹을 것도 충분해.어선이 큰 놈으로 두 척 있는데 거기서 잡은 고기를 먹고,
남은 걸 팔아 섬 사람들의 생필품을 넉넉하게 공급해 주고 있어."
"저는 싫어요."
고집센 아이처럼 이재영이 머리를 몇 번씩이나 저었다.
"남게 해주시지 않는다면 이곳을 떠나겠어요.하지만 섬에는 안가요. "
아래쪽의 축사에서 백동혁과 서너 명의 부하들이 이쪽의 농가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이쪽을 바라보더니 어슷하게 옆쪽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농가의 변소 쪽이었으나 그곳을 지나면 뒷문이 나오기는 챘다.
김원국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한국에 있다가 잡히면 징역을 살아야 돼. 아마 몇 년쯤은 살아야 할걸?"
"상관없어요."
"쓸데없는 고집."
길게 연기를 내뿜으면서 김원국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말 듣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데려갈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
이재영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의 말에 승복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만탄 섬으로 떠나게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강만철의 부인인 안미혜의 바램이기도 했다.
비좁은 농가의 방 두 칸에서 생활하는 것은 감옥 생활과 다름이 없었고 언제 경찰의 손길이 뻗쳐
올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나날이었다.
조웅남의 부인인 김경지와 안미혜,한세라와 이재영 등 네 명의 여자와 세 명의 아이들이다.
"저는 다른 분들하고는 입장이 달라요. 그리고 여기 남아서 할 일도 있고."
이재영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당신을 돕겠어요, 무슨 일이든."
"이제 그럴 일은 없어,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싸울테니까
그리고 하나씩 둘씩 피투성이가 되어서 버려진단 말이다.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죽게 될 거야."
김원국의 말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는 이재영의 드러난 목덜미에 시선을 주었다가 머리를 돌렸다.
"섬으로 가. 가서 기다려 ."
"기다리 라구요?"
퍼뜩 시선을 든 이재영이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피우다 만 담배를 땅바닥에 버린 김원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씨가 점점 추워져.쫓겨 다니는 사람에게는 추운 날씨도 짐이 돼."
몸을 돌린 그가 마당을 가로질러 걸었으나 이재영은 아래쪽으로 시선을 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농가의 안방으로 들어가던 김원국은 대청에 서 있는 백동혁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뒷문으로 해서 집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예, 큰형님께 보고 드릴 말씀이 ‥‥‥‥
두 손을 앞으로 모은 백동혁이 한걸음 다가섰다
"아랫동네에 면사무소 직원이 와서 여기 사정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왔던 사람이 아니어서 ‥‥‥
호구 조사차 지난번에 왔던 직원에게는 백동혁이 백만 원을 건네 주었다.
그에게 이쪽은 수양 생활을 하는 신흥 종교 단체라고 설명해 주었지만
백만 원의 효력이 얼마나 갈지 불안했던 것이다.
아랫동네란축사에서 300미터쯤 아래쪽에 있는 여섯 채의 농가를 말한다.
그곳에는 50대 미만의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여섯 명의 할아버지와 다섯 명의 할머니가
농사를 지으며 산다.
짝이 맞지 않는 것은 한 집의 할아버지가 몇 년 전에 상처를 했기 때문이다.
그곳의 집 세 채에 방을 얻어 부하들이 묵고 있었는데 다시 면사무소 직원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김원국이 잠자코 있자 백동혁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선 붙잡아 두었습니다. 전처럼 돈을 주어야 될지, 아니면‥‥‥‥
"네가 보니까 어떻더냐?"
"전에 왔던 사람하고 다릅니다. 잡히고 나니까 고분고분해졌습니다만 아무래도‥‥‥‥
"풀려 나면 터뜨릴 것 같단 말이지?"
"네,형님 , "
"네가 결정해라."
김원국이 불쑥 말하자 백동혁이 졸린 듯한 눈을 치켜올렸다.
"돈을 주어서 입막음이 될 것 같으면 그렇게 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으면‥‥‥‥
말을 멈춘 김원국이 힐끗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가 몸을 돌렸다.
안방으로 들어가 마당으로 향한 창문을 열자 헐벗은 산야가 시야에 들어왔다.
평평한 마당이 끝나는 쪽에 놓여 있는 빈 나무 벤치도 보였다.
한동안 그쪽을 바라보던 김원국은 창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나는 이 일이 끝나면 군복을 벗을 작정이오. 그것으로 책임을 질겁니다 "
황인규가 똑바로 머리를 들고 김칠성을 바라보았다.
"이런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 분합니다,이제 와서 말하는게 어울리지는 않지만."
"나는 이미 목숨을 버렸습니다.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도 않구요. "
꺼칠하게 자란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김칠성이 말했다.
의정부 교외에 있는 조그만 매운탕집 안이었다. 열 평도 되지 않은 홀과 한 개의 방이 있었는데
그들은 매운탕 냄비를 사이에 두고 방에 마주 앉아 있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임종휘란 놈의 경비 상태는 알겠습니다.
물론 놈들은 모두 총기로 무장하고 있겠지요?"
"그럴 겁니다. 청와대 출신이라 경호원들을 그쪽에서 데리고 왔을 수도 있지요."
"그것, 거창하구만, 열 명이 넘는 경호부대에 둘러싸여 있다니."
"이무섭이도 지원해 주었을 거요."
김칠성은 식탁의 한쪽에 놓여 있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황인규가 그려 온 임종휘 저택의 약도였다.
"어차피 한판 붙을 바에는 많을수록 좋지. 옛날 생각이 나는구만."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식탁 위에 놓인 술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황인규가 물었다.
"어떻게 하다뇨? 뻔하지 않습니까? 모조리 죽여 없애는 것이지요.
잡고 자시고 할 경황도 없을 것이고."
"저택에는 어떻게 진입해 들어갈 겁니까?"
"글쎄, 그것이 ‥‥‥‥
눈을 꿈택이며 황인규를 바라보던 김칠성이 입맛을 다셨다.
"벨을 눌러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불을 지르고 소방수가 되어서 쳐들어 가는 것은
누가 한번 써먹어 버렸으니 ‥‥‥‥
"나는 당신들 작전에 참가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조언은 해드릴 수가 있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안됩니다. "
"알고 있어요. 그 방법은 돌아가서 상의해 볼랍니다, 이제 이것이 있으니까."
김칠성이 약도가 넣어진 호주머니를 손으로 두드려 보였다.
"방법이 있겠지요. 이것보다 더 큰일도 해치운 우립니다. "
"인원은 몇 명이나 됩니까?"
"열 명 정도, 나까지 포함해서요. 그것으로 충분해요."
"열 명이라‥‥‥
황인규가 힐끗 김칠성을 올려다보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1것저것 반찬을 뒤적일 뿐 입에 넣지는 않는다.
"임종휘는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아요. 공식적인 회합에 참석하지도 않고,
용무가 있는 사람이 가끔씩 저택을 방문할 뿐입니다. "
머리를 든 황인규가 말했다.
"그리고 아들 한 명이 있는데 미국에 있어서 가족이라고는 부부 두 사람뿐이오."
"그 여편네도 같이 죽여 줘야겠군."
김칠성이 소주병을 들고 물잔에 소주를 채웠다.
"아들놈이 미국에 있다니까 대는 끊기지 않겠구만. 그놈한테는 다행한 일이오."
그러자 황인규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소리 죽여 숨을 내뱉었다.
김칠성은 그가 이쪽의 능력에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아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겉돌고 있는 것이다.
황인규는 김칠성으로부터 보다 구체적인 작전을 듣고 싶어했으나
그가 들은 것은 죽인다는 소리가 대부분이다.
물잔에 담긴 소주를 벌컥이며 마신 김칠성이 빈잔을 내려놓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까."
임종휘가 창문의 커튼을 젖히자 아침 햇살이 응접실 안을 가득 채웠다.
늦가을이어서 정원의 나무들은 마른 가지만을 하늘을 향해 내 뻗고 있었다.
소파로 돌아온 임종휘는 시계를 올려다보고는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쥐었다.
다이얼을 누르는 사이에 경호원 한 명이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응접실의 옆을 가로질러
현관 쪽으로 사라졌다.
이층 양옥이었고 건평이 150평 정도여서 경호원 십여 명이 상주하고 있었지만 번잡하지도 않다.
신호가 갔으므로 임종휘는 버릇처럼 헛기침을 했다.
"여보세요."
이무섭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나야."
"아, 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도청 방지 장치를 해놓아서 걱정할 것은 없었으나 이무섭은 그에게 호칭은 붙이지 않는다.
"며칠 전에 감시 카메라의 녹화 필름을 점검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 보였어 ."
임종휘가 차분하게 말했다. 저쪽의 이무섭은 숨을 죽인 듯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궁금할테니 까 말해 주지, 지난번에 전방으로 옮겨진 사람이야.
끈질긴 사람이더구만, 우리 카메라가 대로까지 포착하고 있는 것을 몰랐던 모양인데.w'-
"녹화된 걸 조사해 보다가 우연히 발견했다는구만."
"잘 알겠습니다. "
"매서운 놈이더군. 집념이 강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전화기를 내려놓은 임종휘는 탁자 위에 장치된 벨을 눌렀다.
십 초도 되지 않아서 40대 초반의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단정한 양복 처럼에 각진 턱을 가진 차가운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그는 임종휘의 경호 책임자로 있는 한치규였다.
"부르셨습니까?"
"응, 거기 앉아."
임종휘는 조심스럽게 앞자리에 앉는 한치규를 바라보았다.
청와대에서 인연을 맺은 후로 지금까지 5년이 넘도록 함께 생활해 왔다.
좀처럼 표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의 한치규는 임종휘의 그림자 역할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내가 이무섭이한테 황인규 이야기를 했어. 그쪽에서 처리할 거야. "
임종휘의 말이 끝나자 한치규가 머리를 들었다.
"하지만 각하, 황인규 한 놈으로 그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
"그놈의 배후 말인가? 정부 기관에는 없어."
임종휘가 머리를 저으며 입가에 웃음을 띄었다.
"그놈은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어.고재철이도 조사단이 해체되어서 그놈을 만날 이유가 없어."
"이동혁 사단장이 그를 풀어 놓아 주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곧 그놈과 동조하고 있다고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동혁이는 철저한 야전 지휘관이지. 그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경솔한 행동을 하지는 않아."
"황인규가 찍힌 날 사령관이 왔었습니다. 그놈이 행차를 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
"그게 무슨 꼬투리가 되겠나?후배가 선배를 방문하는 것인데."
"하지만 경비를 철저히 하도록 해. 문제는 안기부에 남아 있는 고성섭과 김원국의 잔당이야.
고성셥은 위아래에서 견제를 받고 있으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김원국이는‥‥‥‥
말을 멈춘 임종휘가 물끄러미 한치규를 바라보았다.
"김원국과 황인규가 손을 잡을 가능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보아야 해. 막바지에 몰리면 그럴 수도 있지."
"김원국은 이제 부하들이 서른 명도 넘지 않습니다.
축사에 머물 정도가 되었으니 곧‥‥‥‥
김원국은 수원 근처의 축사에 머물다가 다시 도망쳤고 경찰은 그들을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황인규가 김원국에게 나에 대한 것을 말했다면 김원국의 일당이 어떻게 나을 것인지는 뻔하다. "
임종휘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이곳으로 쳐들어토겠지. 그놈들은 충분히 그럴 만한 놈들이야."
"어림도 없습니다, 각하."
한치규가 머리를 조그맣게 저었다.
"차라리 그래 준다면 좋겠습니다. 속시원히 결판을 내주게 말입니다. "
"얕잡아 보면 안돼, 한 실장. 그놈들은 보통 건달들이 아냐."
"잘 알고 있습니다. "
대답은 그렇게 하였으나 한치규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김원국은 건달이었고 부하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공중 전화 박스에서 돌아온 이재영은 마시다만 커피잔을 들었다.
커피 전문점 안은 점심 후의 커피와 잡담을 즐기는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고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오랜만에 느끼는 밝은 분위기여서 이재영의 마음도 가벼워졌다.
김원국의 일행에게서 빠져 나온 부담감도 조금쯤은 덜어진 기분이었다.
지금쯤 안미혜 등 여자들과 아이들은 홍콩으로 향하는 여객선을 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홍콩에서 조직원의 영접을 받고는 곧장 비행기 편으로 만탄 섬으로 간다.
이재영은 가늘게 긴 숨을 내쉬었다.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더라도 김원국의 옆에 있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차갑고 냉혹한 사람이라는 말은 들어 왔지만 가까운 곳에서 느긴 것은
그도 똑같이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은 것은 엄격한 스스로의 절제 때문이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재영은 믿고 있었다.
그는 아내인 장민애를 사랑하는 평범한 사내인 것이다.
앞으로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으므로 이재영은 커피 한 잔을 다시 시켰다.
잡지At에 근무하는 친구인 오영희에게 옷가지와 돈을 부탁한 것이다.
그녀와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사이였고 몸매도 비슷해서 전부터 옷도 바꿔 입어왔다.
집으로 연락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경찰의 수사망에 걸릴 확률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두 잔째의 커피를 거의 다 마셨을 때 커피점의 입구로 들어서는 세 명의 사내가 보였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점퍼 차렴의 사내들이었는데 차림새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모두가 아무렇게나 옷들을 걸치고 있다.
그들은 입구에 멈추어 서서 안을 휘둘러보았는데 시선이 빈자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스쳐 가고 있었다.
이재영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순간에 사내 한 명의 시선과 부딪쳤고 사내는 탁자 사이를 헤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재영씨 맞지요?"
앞으로 바짝 다가선 사내가 물었으나 이재영은 대답 대신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난 중부서 형사과 소속 이 형사입니다. 같이 가주셔야겠는데요."
옆자리의 손님들이 모두 이쪽을 바라보았다.
뒤따라온 사내 한 명이 이재영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워 넣었다.
"자, 일어나요. 여기서 실랑이해야 망신만 당할테니 까."
"이것 놔요."
이재영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사내들이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웃었다.
"과연 보통내기가 아니시군. 하지만 할수없어, 연행해야 하니까 "
사내 한 명이 이재영의 팔을 끌어 잡는가 했는데 어느 사이에 한쪽 팔목에 철컥 소리와 함께
수갑이 채워졌다.
이재영의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이마에 조그만 땀방울이 배어 나와 있었는데 공기의 흐름에 닿아 서늘하게 느껴졌다.
양쪽 겨드랑이를 사내 두 명에게 들린 이재영은 커피점을 나왔다.
저쪽 구석에 기동대의 승합차가보였고 지나던 행인들이 발을 멈추고 모두 이쪽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한낮이었다.
"지금 중부서에 잡혀 있습니다. 내일종이떤 곧 검찰로 송치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
백동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장이 떨어져 있어서요."
"그 여자, 대체 어쩌려고 그런 거야?"
누구에게 하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김칠성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혹시 일부러 잡힌 것 아냐? 자수한 것이 아니냔 말이다. "
백동혁이 힐끗 김원국의 눈치를 살피고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거, 우리 내막이 샅샅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요, 형님?"
김칠성이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미아리의 허름한 여관방이었다 밖은 아직 한낮이었으나 햇볕이 들지 않는 방안은
어두워서 형광등을 켜놓았고 침대에서는 습기에 찌든 퀴퀴한 냄새가 풍겨 왔다.
김원국이 머리를 저었다.
"그럴 여자는 아니다. 일부러 잡힐 여자도, 그리고 입을 열 여자도 아니야."
"형님, 남자라도 견디어내지 못합니다.
그놈들이 알아내려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재영씨가 우리와 함께 지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형님이 지휘하고 계시다는 것이 폭로되면‥‥‥‥
"상관없다. 이미 저쪽도 알고 있는 일이야."
김칠성이 입맛을 다시고는 머리를 돌렸다.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백동혁이 상체를 세우고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저어, 제가 알아보았는데, 오영희라고 이재영씨 친구가 경찰에 신고를 해서 그렇게 되었답니다. "
"그래서 제가 그 여자를 어떻게 했으면 할까 하고‥‥‥‥
김칠성이 다시 입맛을 다시고는 머리를 돌려 벽 쪽을 바라보았다.
"내버려 둬라. 아마 그 여자도 협박을 받고 있었을 게다. "
김원국이 팔짱을 끼고는 물끄러미 백동혁을 바라보았다.
그 시간에 이재영은 중부 경찰서의 형사과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수감이 채워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허리를 꼿꼿하게 편 자세로 책상 건너편의 조사관을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 검찰로 가게 돼요.
가서 조사를 받겠지만 있는 대로 진술하는 것이 이로울 거요."
조사관은 40대의 머리가 희끗한사내였다.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마와 볼의 주름살은 그가 온갖 풍상을 겪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김원국의 조직원과 함께 다섯 달 가깝게 생활했어요. 그렇지요?"
타이프에서 손을 뗀 조사관이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렇다면 있던 곳이 어딥니까? 말해 봐요."
"말할 수 없어요."
"당신, 장난하지 말어 . 이래봬도 나는 왜 솜씨 있는 사람이야."
"변호사를 불러 줘요. 변호사 없이는 말하지 않겠어요."
"그것 참, 유식한 척하는군. 김원국의 일당이면 지금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조사관은 이제 말을 내렸다. 그가 뱉어낸 담배 연기가 책상을 건너와 이재영의 얼굴에 닿았다.
"그놈들을 만나면 가차없이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져 있어 .
밤거리를 무법천지로 만들고 있는 놈들이란 말이야."
"무법천지로 만든 것은 다른 사람들이에요. 김원국씨는 피해자구요. "
"신문에 그렇게 썼더군 덕분에 아주 일보가 폐간당할 뻔했지만 "
"난 그들 일당이 아녜요. 사실을 그대로 쓰다가 목숨을 잃은 뻔한 사람이에요."
"누구에게 말이야?"
"이무섭씨, 이철우씨, 그리고 지금 밤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무리들
"어이구 지긋지긋하군."
팔은 그렇게 했지만 조사관의 얼굴은 웃음으로 주름이 졌다.
"또 그 소리, 이봐,종이 친 일이야.막이 내렸다고.정신 똑바로 차려 "
옆자리의 조사관들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강한석이 이재영의 체포 소식을 들은 것은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비서관은 오후 2시경에 경찰청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는데 마침 강한석은
상임위원장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 여자, 김원국 일당과 함께 있었다는데, 곧 그놈들의 내부 사정을 알 수가 있겠구만."
강한석이 조끼의 밑쪽 단추를 끄르면서 비서관을 바라보았다.
"청장한테 이야기해서 철저하게 다그치라고 해. 그놈들 때문에 치안 상태가 최악이야."
"알겠습니다. "
"맹랑한 여자야, 신문에 내 이름까지 들먹여서 내가 애를 먹었어."
"그렇습니다. 특종을 잡으려는 욕심으로 지어낸 것이지요."
강한석이 머리를 끄덕이자 비서관은 몸을 돌렸다.
문이 닫히고 나자 강한석은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고 신호음이 들리자 그는 가죽 소파에 등을 깊숙히 묻었딘.
여당의 대표위원실답게 넓고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방이었다.
탁자 위에는 매일 갈아 꽃는 화초가 향긋한 냄새를 풍겼고 한쪽 벽에는 대통령이 친필로 써준 액자가
걸려 있다. '국태민안(etS료촛)'이다.
이제 위정자로서의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뜻이라고 강한석은 해석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저쪽의 응답 소리에 강한석은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아, 납니다. "
"대표위원님 아니십니까? 이렇게 갑자기 이무섭의 말소리는 정중했다.
"연락 받았지요? 이재영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 말이오."
"예, 듣기는 했습니다만."
"화근 덩어리 하나가 운좋게 잡혔어요.
지금 중부서 에서 조사를 하는 모양인데, 청장이 아직 언론에 알리지는 않았다고 합디다.
김원국의 조직이 긴장할 것 같아서 그랬다는데. "
"제 생각입니다만 그놈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놈들의 정보 망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
"어쨌든 그 여자한테서 김원국 일당의 내막을 캐내어야겠는데,
경찰과 검찰의 방법으로는 어딘지 부족해. 더구나 변호사까지 부르고 난리를 치면
언론이 떠들어 댈 것이고."
"내일 검찰로 송치된다고 하는데 그 사이에 직접 다그쳐 봐요.
내가 청장한테는 넌지시 이야기해 놓을 테니까 "
"그렇게 해주신다면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
이무섭의 목소리가 팽팽해졌다.
"하루면 되겠습니다.
천하장사에 제아무리 독종이라도 약점이 있는 법이니까요. 맡겨 주십시오."
"그렇다면 하루 더 경찰에서 잡고 있는 것으로 할테니까 넘겨 받아요. "
"고맙습니다, 대표위원님."
휴대폰의 스위치를 내린 강한석은 머리를 소파에 기대고는 길게 숨을내쉬었다.
그에게 지금 장애물이 있다면 김원국의 일당밖에 없다.
그들의 난동으로 밤거리의 치안은 마치 6 · 25 직후와 같은 혼란 상태에 빠져 들고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테러와 약탈이 자행되고 있었는데 이제는 가짜 김원국과 조웅남, 김칠성 등이
하루에도 십여 군데에서 출몰하는 형편이었다.
어중이 떠중이의 건달들과 불량배들이 그들의 이름을 사칭하고 강도와 강간을 일삼는 것이다.
대통령도 심기가 불안한 모양이었다.
어제 아침의 조찬 회동에서는 밤의 치안 상태를 문제삼아 내무장관인 박민평을 꾸짖었는데
그것은 마치 강한석을 향해서 그러는 것처럼 들렸었다.
박민평은 부임 한 지 1개월이 겨우 넘은 것이고 김원국의 사건은 강한석이 장관으로 있었을 때
발생한 것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시계를 올려다본 강한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의 삼역들과 저녁 약속이 있는 것이다
금테 안경을 쓴 데다가 양쪽 입안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그만 공을 집어 넣어서
얼굴이 더욱 넓게 보이는 오함마는 클럽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붉은색 재킷을 입은 웨이터 한 명이 다가와 그들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누구, 지명 웨이터가 있으십니까?"
"없어. 처음이라, 이곳이 ."
"그러시다떤 제가‥‥‥‥
웨이터가 바짝 다가서더니 온 얼굴을 펴고 웃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일행이 두 분이십니까?"
오함마의 옆에 서 있던 양용태가 머리를 11덕이자웨이터가 앞장을 섰다.
구찌 클럽은 나이트 클럽과룸살롱이 혼합된 스타일의 대형 클럽이다.
그리고 흘의 중심 부분에 무대가 있고 그곳에서 쇼와 마술,
또는 인기가수가 노래를 한다.
소란스러운 것이 싫은 사람들은 유리벽으로 방음 장치가 되어 있는 밀실에 들어가면 되었다.
그들은 무대가 훤히 바라보이는 밀실로 들어가 앉았다.
신바람이 난 웨이터가 주문을 받고 나가자 양용태가 오함마를 바라보았다.
"형님,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구만요. 하루 매상이 몇 천은 되겠습니다. "
오함마가 바깥의 홀을 바라본 채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장우길의 말이 맞다. 입구 한곳만 막아 버리면 오갈
데 없게 되어 있구만."
"비상구는 잠가 둔다고 했지만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
"2층의 사무실로 돈을 가져갈 거야. 그곳에서 박기섭이가 당했다는데 오늘은 거꾸로 되겠다. "
웨이터가 안주와 술을 들고 들어섰으므로 그들은 말을 멈추었다.
안쪽의 홀에는 이미 여덟 명의 부하들이 둘셋씩 짝을 지어 흩어져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곳은 박용근의 근거지 중의 하나였다.
영업부의 직원만 해도 30명이 넘는 데다가 유사시에는 웨이터들도 가세할 테니까
저쪽은 대략 50명이 넘는다.
그러나오함마는 열 명의 인원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숫자가 많으면 오히려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 치고 빠지는 데 장애가 된다.
꼬리가 길어지는 것이다.
"피어, 아가씨들을 부르시겠지요? 일류급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내보내도 됩니다. "
웨이터가 정중하게 물었다.
건장한 체격이었으나 얼굴은 조그마했는데 두 눈의 검은 동자가 바쁘게 구르고 있다.
"좋아, 데려와."
오함마가 말했다.
"팁은 두당 십 만원입니다. "
"그것 왜 그렇게 비싸?"
"일류입니다, 사징힘 ."
"아무리 일류라도 그렇지. 이건 씨, 사람을 어떻게 보구."
양용태가 와락 얼굴을 붉히며 웨이터를 노려보았다.
장우길한테서 들은 바로는 아가씨의 팁값은 7만 원이었던 것이라.
"이봐, 됐어. 데려와."
오함마가 머리를 끄덕이자 웨이터가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어차피 도로 찾을 돈이니까 놔둬라."
술잔을 쥐며 오함마가 말하자 양용태가 서둘러 술병을 들고 술을 채웠다.
9시가조금 넘은 시간이어서 2시까지의 영업 시간까지는 다섯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그 동안에 안의 상황이나 철저하게 확인해 둘 작정으로 일찍 들어온 것이다.
바깥의 무대에서는 다섯 명의 여자들이 긴 다리를 들어올리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은 아슬아슬한 비키니 차림으로 거의 알몸이나 마찬가지였다.
"형님, 이곳 영업부장 하명길이는 왕년에 대전에서 한가락하던 놈입니다.
안면은 없으시지요?"
양용태가 바깥을 힐끗거리며 물었다.
그는 충청도 괴산 출신이었는데 쌀가마 두 개를 양 어깨에 메는 장사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각처를 떠돌다가 도둑질과 강도로 5년쯤 학교를 다녔고
운좋게 김칠성의 눈에 띄어 인천의 횟집들을 관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까짓 놈, 내가 안면이 있을 리가 없다.
박용근 덕분에 서울에서 활개를 치게 된 모양인데, 오늘 날짜로 그짓도 끝이다. "
문이 열리자 바깥의 커다란 음악 소리가 들이닥쳤다.
웨이터가 아가씨 두 명을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자, 너는 저기, 너는 이쪽으로."
웨이터의 지시에 따라 아가씨들은 그들의 옆에 자리잡고 앉았다.
다소 과장이 섞이기는 했지만 여자들은 미인이었다.
특히 오함마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눈인 번쩍 뜨일 만큼 이목구비가 수려했다.
긴 생머리와 화장기가 엷은 옆모습이 누구와 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유혜진이에요."
그녀가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본명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이곳에서 지은 이름일 것이다
대부분은 성도 바꾼다
오함마는 잠자코 술잔을 들었다
양용태가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여자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는 오랜만에 여자 구경을 하는 셈이었다.
이제까지 이곳저곳 쫓겨 다니는통에 여자를 품에 안을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옆자리의 여자가 오함마의 빈잔에 잠자코 술을 따랐다.
그녀의 옆 모습을 보던 오함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주머니의 지갑에서 십만 원짜리 수표를 꺼내어 여자에게 건네 주었다.
"이걸 받고 나가, 어서."
양용태가 서둘러 여자의 허벅지에서 손을 떼었고 유혜진이라는
여자는 눈을 커다랗게 치켜뜨고 오함마를 바라보았다.
"자, 받아. 그리고 나가."
"안 받겠어요."
자리에서 일어선 여자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양용태가 눈을 껌벅이며 오함마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여자를 불러와. 웨이터에게 말해."
오함마가 앞쪽의 여자에게 말하자
그녀가 끄덕이며 일어섰다.
오함마는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이제 가슴이 뛰는 것은 가라앉았으나 온몸이 불덩어리가 된 것처럼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장민애와 닳아 있었다.
그녀의 옆 얼굴에서 지금은 만탄 섬에 묻혀 있는 장민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오함마는 빈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양용태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에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영업부장 하명길은 30대 초반이었으나 배가 나와서 40대쯤으로 보였다.
하는 행동도 점잖고 예의 바른 데다가 말투도 느려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 타입이었다.
그러나 그가 언제나 허리춤에 단도 두 개를 찔러 넣고 다니고
군대에서 배웠다는 칼 던지기가 백발백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지금도 시간만 있으면 사무실에서나 흘에서 단도를 날리는데 열 발짝쯤 떨어진 곳의
손바닥만한 표적을 어김없이 명중시키곤 했다.
하명길이 흘을 둘러보고는 사무실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하는데 부하인 흥진표가 다가왔다.
"형님, 요가하는 놈이 lOt분 정도 늦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 동안 스트립 쇼나 보여 주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 썩을 놈의 새끼."
하명길이 느릿한 말투로 욕을 했다.
"이따, 요가 끝내고 나서 몇 대 두들겨 줘라, 겁을 주란 말이여."
"예, 형님. 그리고‥‥‥‥
홍진표가 배시시 웃으며 =I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여?"
"예, 유혜진이 대기실에서 울고 있습니다.
손님한테 빠꾸 맞았다는데요."
"허어, 갸가 빠꾸를 맞어?"
하명길이 입을 벌렸다.
"자를 빠꾸세킨 놈이 있어?"
"예, 형님. 유혜진은 자존심이 상한 모양입니다.
처음 당한 일인 모양이어서요."
"어떤 농들인디?"
"처음 보는 놈들이 랍니다. 88번 이야기로는 촌놈들 같다는데."
"요새는 촌놈들 눈이 더 높은 모냥이여."
어쨌든 나쁘지 않은 기분이 되었으므로 하명길은 몸을 돌렸다.
유혜진은 구찌 클럽의 간판 스타였고 하명길의 정부이기도 했다.
생각 같아서는 들어앉히고 싶었으나 원체 대가 센 계집이어서
몸은 줄지 언정 살림 사는 것은 싫다고 했던 것이다.
그녀는 하명길의 감시 하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손님과 이차를 나간 적이 한번도 없다.
그가 2층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잡담을 하고 있던 세 명의 부하가 일제히 일어섰다.
그들을 지나 뒤쪽의 소파로 다가간 하명길은 길게 다리를 뻗고 앉았다.
부하들이 제각기 신문과 잡지를 펼쳐 들고 읽는 시능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울렸다.
부하 한 명이 수화기를 들더니 온몸을 굳히고는 하명길을 바라보았다.
"형님, 사장님이십니다. "
"어어, 그래?"
두 다리를 허공에서 방바닥으로 곧장 내려 찍으면서 하명길이 일어섰다.
"예, 하명 길입니다. "
수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그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나야, 별일 없냐?"
"예, 사징침, 별일 없습니다. "
박용근은 하루에 한번쯤 전화를 해왔는데 주로 수금 시간이 가까워질 때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에게 구찌 클럽은 주요 수입원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번에 이재동이 칼을 맞은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는 부쩍 몸을 사리고 있었다.
이제는 술을 마시러 외출하는 것도 삼가는 편이다.
김원국의 일당은 발악하듯 사방을 쑤시고 다녔는데 가짜 김원국과 조웅남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나타난다.
경찰 병력들이 거리마다 삼삼오오 배치되써 있었지만 서울 전역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자네 김원국이를 따라 다닌다는 이재영이라는 기자 알지?"
"예, 압니다. 여자 아닙니까?"
난데없는 물음이었으나 하명길이 그렇게 대답하자 박용근이 말을 이었다.
"그년이 오늘 낮에 잡혔어. 지금 경찰에서 조사받고 있는 중이야. "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어. 비밀리에 수사를 하려고 그러는 모양이야.
이제 곧 김원국 일당의 내부 사정을 알게 되겠어. 그년이 붙어다녔을 테니까."
"잘 되었군요, 사징힘."
"하지만 경계를 늦춰서는 안돼 놈들이 더 발악할지도 모르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곳은 끄떡없습니다, 사장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하명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클럽을 한바퀴 돌아볼 생각이 든 것이다.
클럽 안에는 신사복 차림의 부하들 30명과 웨이터 복장을 한 30명의 부하들이 있다.
60명이면 김원국의 일당이 모두 쳐들어 온다고 해도 해볼 만한 것이다.
문 위에 걸린 시계가 밤 1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웅남의 흘랑 벗은 알몸은 마치 하마가 두 발로 서서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것과 같았다.
온몸에서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조웅남은 소파에 앉았다.
늘어진 방울과 검붉은 남성이 드러났으나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러은 형님이 있는 디가 미아리란 말여?무신 여관이라고?"
수건을 손에 쥐고 있었지만 닦기를 잊은 모양이었다.
치켜뜬 눈으로 조웅남이 손채석을 바라보았다.
"예, 핑크 여관이라고, 버스 종점 못 미쳐서 골목 안에 있습니다. "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조웅남은 손에 쥔 수건을 옆쪽으로 내던지고는 두 팔굽을 무릎 위로 내렸다.
그러자 온몸이 둥글게 되었고 손채석의 정면으로 보였던 남성과 방울이 가려졌다.
"예이고 씨발."
어깨를 늘어뜨린 조웅남이 한숨과 욕설을 뱉었다.
"얼릉얼릉 결판이 나야지, 내가 그 꼴 못 보겄다. "
"형님,동혁이한테는 할수없이 우리 있는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큰형님한테는 말씀 드리지 말라고도 했구요."
"말허은 안되여. 입을 놀렸다가는 주딩이를 찢을텡게."
"허지만 동혁이도 곤란한 눈치던데요.
큰형님이 물어 보시면 거짓말을 할 놈이 아닙니다 "
"어채피 식구덜미 쪼개져서 댕기게 되었다.
그것이 눈에도 덜 띄고, 형님도 이해허실 것이다. "
"허지만 큰형님 말씀을 듣고 움직이셔야
"그거야‥‥‥‥
할말이 막힌 조웅남이 상체를 세우고는 입맛을 W다.
이곳은 안양의 여관이었는데 김원국이 묵고 있을 미아리의 여관보다는 상급이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욕조도 깨끗하고 방도 넓다.
"여편네덜을 섬으로 보냈다니 잘헌 짓이여. 인자 형님이 발벗고 될 모양이 고만."
"예, 이재영씨는 거기서 빠져 나갔다가 잡혔다고 하더군요."
"그년, 잘되얀어, 여우 같은 년."
"01 ?"
"아녀, 아무것도."
손채석이 방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주워 조웅남 앞으로 내밀었다.
"그나저나 인자사 형님 소식을 들응게로 맴이 놓이는구만."
수건을 받은 조웅남이 몸에 붙은 물기를 닦았다.
손채석은 이틀간을 헤맨 괄에 백동혁과끈이 닿았고조금전에 그를 만나고 돌아온 것이다.
수원의 축사에 머물렀던 김원국은 떠돌이 신세가 되어 지금은 미아리의 여관에 있다.
조웅남이 수건을 내려놓고 상체를 세웠다.
양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었으므로 손채석은 서둘러 머리를 돌렸다.
"야, 채석아, 인자까지 우리가 모아 놓은 자금이 을매나 되냐?"
"예, 현금으로만 5억이 조금 넘습니다. "
"그렇다은 내일 동혁이를 만나서 그 돈을 싹 줘라.
형님이 돈이 없을 거여 칠성이허고, 함마,
갸들은 체면 챙기는 놈들이라 우리같이 강도질 못허는 놈들여."
"예, 형님 ."
"그런디 오늘 밤에는 어디로 가지?"
"영등포의 해성 살롱입니다, 형님. "
조웅남이 눈을 점벅이며 손채석을 바라보았다.
"거그는 한번 털었던 디 아녀?"
"아닙니다. 지난번 털었던 데는 유성 살롱이었지요."
"그런가?"
"하지만 요즘에는 경계가 심해져서 조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가짜 새끼들이 수도 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
"가짜 조웅남이 말이지?"
조웅남이 입을 벌리고 웃었다.
"내싸둬라. 갸들이 내 대신 뛰어 준다고 생각허은 되여.
이무섭이는 내가 둔갑술을 배웠다고 헐 것이다. "
"어제도 가짜조웅남이 두 명 잡혔고 가짜 김칠성이 한명 잡혔습니다. "
"인자 쬐끔 있으은 가짜 손채석이도 나을 거여. 그때 니가 내 기분을 알 것이다. "
부드러운 얼굴이 되어 조웅남이 손채석을 바라보았다.
새벽 1시가 되자 무대는 듬성 듬성 해졌으나 아직도 플로어에서
춤을 추는 손님들이 패 남아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이는 흘은 반쯤 빈 상태였다.
그 대신 웨이터들의 행동이 더욱 분주해졌다.
비뚤어진 빈 탁자와 의자를 바로 놓고 둘씩 셋씩 모여서 계산서를 맞추는가 하면
일어서서 나가는 손님들을 배웅하고 있다.
양용태가 술잔을 내려놓고 다시 오함마의 눈치를 살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손님들의 숫자가 줄어들수록 놈들의 숫자가 더욱 많아져 보이는 것이다.
신사복 차림의 조직원만 해도 30명 가깝게 되었고 유사시에 행동대원이
될 수 있는 웨이터의 머리수가 30명 가깝게 되었다.
그러나 이쪽은 오함마까지 합해서 딱 열 명인 것이다.
오함마는 물잔에 가득 위스키를 따르고는 꿀컥이며 마셨다.
앞쪽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둘이서 양주를 큰 병으로 네 병을 마시고 있는 참이었다.
"형님."
양용태가 부르는 소리에 오함마가 머리를 들었다
"올라가고 있습니다 "
그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에 2층으로 올라가는 서너 명의 사내들이 보였다.
입구 근처의 벽에 붙여진 계단이다.
2층에는사무실이 있는 것이다
시계는 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시가 조금 지나서 웨이터가 들어와 계산을 치렀으니
지금은 2층 사무실에서 오늘 수입을 맞춰보는 시간이다.
오함마는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용태가 재빨리 따라 일어서면서 아가씨에게 10만 원짜리 수표를 건네 주었다.
그들이 밀실을 나서자 담당 웨이터가 재빨리 다가왔다.
"사장님, 가시게요?"
웃는 얼굴이었으나 눈동자가 반들거리고 있었다.
계산서에 30퍼센트 가랸 바가지를 씌웠어도 이쪽은 잠자코 계산을 치렀던 것이다.
놈은 만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쪽을 경멸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탁자 사이를 헤치고 나가자 이쪽저쪽의 좌석에서도 손님들이 따라 일어섰다
어지러운 음악 소리와 함께 아직도 한쪽에서는 남녀의 웃음 소리가 뒤섞여 들리고 있다.
오함마는 웨이터의 뒤를 따라 입구로 다가갔다.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입구의 근처에 벌려 서 있었는데 어림잡아서 열 명도 넘어 보였다.
빈틈없는 경비 태세였다.
흘 안에 있다는 것은 곧 놈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것이다.
오른쪽의 계단으로 시선을 던진 오함마는 그곳에도 서너 명의 사내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들과의 거리는 5미터쯤으로 가까워졌다.
오함마는 호주머니에 넣었던 두 손을 빼었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두 개의 수류탄을 한 개는 2층 계단의 입구에 다른 한 개는
현관 쪽의 사내들을 향해 슬쩍 던졌다.
이미 안전핀을 빼놓고 쥐고 있던 수류탄이다.
사내들은 오함마를 의식하고는 있었으나 그가 던진 것이 무엇인가는 자세히 분간하지 못했다.
오함마가 몸을 돌리면서 탁자사이로 몸을 숙이자
뒤따르던 부하들이 일제히 엎드렸고 그제서야 위기감을 느긴 사내들이
일제히 상반신을 이쪽으로 굽혔다.
"수류탄!"
누군가가 소리쳤는데 그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폭발음이 두 군데서 들렸다.
엎드려 있는 오함마의 몸 위로 나뭇조각과 끈끈한 덩어리들이 떨어져 내렸고
곧이어 심한 화약 냄새가 났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는데 아직도 흘 안을 가득 울리고 있는 것은 음악 소리였다.
몸을 일으킨 오함마는 어지럽게 뒤엉키고 수라장이 된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수십 명의 웨이터와 손님들이 문 밖으로 밀려 나가고 있었는데 그제서야
소동을 알아차린 남아 있던 손님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이쪽으로 몰려온다.
오함마는 이쪽을 의식하고 있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있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밀리면서도 한사코 이쪽을 향해 허우적거리며 다가오려고 했다.
이제 홀은 아비규환이 되어 있었다.
문 앞과 2층 계단 입구에 쓰러져 있는 사내들은 십여 명이 되었는데
사람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오함마는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호주머니에서 수류탄 한 개를 다시 꺼내어 계단의 위쪽을 향해 던졌다.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파편이 튀었고 그것은 수라장의 정점을 이루기에 충분했다.
오함마의 앞으로 피투성이가 된 사내 한 명이 다가왔다.
사람들에게 밀려서 부딪쳐 온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사내는 오함마가 수류탄을 던졌을 때부터 눈여겨본 사내일 것이다.
그는 이마가깨진 모양인지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오함마는 그가 한 손에 움켜쥔 단도를 보았다.
그러자 다음 순간 사내의 머리가 한쪽으로 휘청 하고는 사람들에게 밀려 보이지 않았다.
땅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로 양용태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 손에 길이가 50센티쯤 되는 쇠뭉치를 들고 있었다
흘은 지옥과도 같았는데 오함마가 계단을 반쯤 뛰어 올라갔을 때쯤에는
소음이 현저히 줄어들어 있다.
사람들이 셀물처럼 현관으로 빠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함마는 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고는 안전핀을 이빨로 잡아 뜯었다.
그의 뒤에서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는데 말소리는 없다.
모두 그의 부하들인 것이다.
그가 계단을 마악 오르자 사무실의 문이 와락 열리더니 사내 두 명이 뛰쳐나왔다.
모두 한 손에 권총을 쥐고 있었다.
"탕, 탕, 탕!"
연속으로 발사되는 권총 사격 소리가 들렸다.
엎드린 모함마가 던진 수류탄이 그들의 다리 사이를 빠져 사무실의 문지방에 걸려 멈추었다.
다시 폭음이 을리며 나뭇조각이 흩날렸다.
오함마는 자신의 몸 위에 떨어진 사내들의 조각난 몸뚱이를 털어 내며 사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호주머니에 든 마지막 수류탄을 꺼내어 안전핀을 뽑고는 부서진 문 안으로 집어 넣었다.
폭음과 함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 밖으로 지폐 조각이 하얗게 뿜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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