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의혹
이철우가 방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안정태가 일어섰다.
"대장님, 오래만에 뵙습니다. "
"그래, 전화는 자주 했지만 만난 지는 왜 되었어."
악수를 나눈 그들은 마주 보고 앉았다. 리즈 호텔에 있는 안정태의 방이었다.
이철우로서는 이 방에 처음 들어와 보는 것이 된다.
"요즘 분위기가 어수선한데, 며칠 전에는 이재영이를 빼앗겼다면서?"
방안을 둘러보던 이철우가 지나치는 말처럼 물었다.
"네, 말씀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뒷처리에 정신없이 매달리다 보니까‥‥‥‥
"하루에도 대여섯 건씩 일이 터지더군, 김원국의 흉내를 내는 놈들까지 합하면 수십 건씩."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저희 조직이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던데, 내가 보기에는."
안정태가 퍼뜩 시선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김원국의 조직은 김철성, 오함마, 그리고 조웅남이 이끄는 무리들인데
모두 열 명 안팎이어서 3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이쪽은 조직원만 해도 수천 명이었고 경찰 병력까지 합하면 수백 배의 인원이 있다.
"마음을 놓기에는 일러. 김원국이를 잡기 전까지는 말이야."
"놈은 곧 잡힙니다. 이제는 한군데에 하루 이상머물러 있지도못합니다.
부하들도 하나씩 둘씩 떨어져 나가고 있지요.
다친 놈들만 해도 대여섯 명이 넘습니다. "
"모두 정예야. 악에 받쳐 있고 똘똘 뭉쳐 있어서 우리 애들은 기세를 빼앗기고 있어.
그러면 싸우기도 전에 지는 거야."
맞는 말이었으므로 안정태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공격하는
쪽과 방어하는 쪽의 자세가 다르기는 했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던 이철우가 머리를 들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자네를 만나자고 한 것은 달리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인데 ‥‥‥‥
"내가 데리고 있는 애들이 있어. 모두 여섯 명인데, 자네도 알지?"
"네 압니다. 모두 한솥밥을 같이 먹었는데요."
"그애들을 자네가 데리고 있어 줘야겠어 내가 그 부탁을 하러 온 거야."
안정태가 헛기침을 하고는 머리를 들었다.
"대장님 말씀이신데, 당연히 받아들여야지요.
대장님도 곧 공직에 복귀하실테니까
그애들이 먼저 오는 것도 상관 없습니다. "
"성실하고 의리있는 애들이야."
"알고 있습니다. 간부급으로 채용하겠습니다. "
"이렇게 어수선할 때 쓸모도 있을 거야."
"고맙습니다, 대장님 ."
이철우가 손바닥으로 꺼칠하게 자란 턱수염을 쓸었다.
"난 단장님을 만난 지도 오래되었어. 자넨 자주 만나는 것 같던데 내 안부나 전해 주게."
"저도 가끔 전화나 받을 뿐입니다. 바쁘신 것 같아서요."
"내 충성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씀 드려 줘.지금이라도 단장님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고."
"네, 대장님."
"이 사람아, 대장, 대장 하니까 어색해. 차라리 형님이라고 불러 ."
"알겠습니다, 형님."
이철우가 횐 이를 드러내며 웃자 안정태의 얇은 입술도 위쪽으로 치켜올라갔다.
"그럼 내일중으로 애들을 보내겠네."
자리에서 일어서는 이철우를 잡으려는 듯이 안정태가두 손을 내밀며 따라 일어섰다.
"이렇게 그냥 가시면 어떡합니까? 우선 차나 드시고 저하고 저녁에 식사라도‥‥‥‥
"아냐, 바쁜 사람 잡고 있을 수는 없어."
이철우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안정태를 바라보았다
"애들을 총기로 무장시켜 . 김원국의 일당으로 보이면 가차없이 쏴 죽여.
경찰에서도 그렇게 지시가 내려진 모양이니까."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홍콩에서 며칠 전에 물건이 도착했거든요."
머리를 끄덕인 이철우는 몸을 돌렸다. 복도 끝의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이철우를 배웅하고 돌아온 안정태는 소파에 앉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전화기를 쥐었다.
"죄송합니다. 안정태한테서 연락이 와서요."
휴대폰의 스위치를 내린 이무섭이 머리를 숙였다.
"이철우가 찾아왔다고 하는군요. 그 친구가 데리고 있던 애들을 취직시켜 달라고 했답니다. "
임종휘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어 녹차를 한모금 마셨다.
"안정태가 그러겠다고 했답니다. 모두 여섯 명인데 이철우의 심복들이지요."
"이철우,그 친구도 곧 복귀시켜야 하지 않TR어?
하다못해 유통 회사라도 관리하게 말이야. 그래서 차츰차츰 기반을 닦도록 해주어
"네, 그럴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직 시기가‥‥‥ 원체 언론의 표적이 되어 온 사람이어서요."
"안됐써, 가족까지 잃고."
"김원국이 데리고 있는 부하들은 30명 남짓입니다. "
이무섭이 말머리를 돌렸다.
"며칠 전 잡은 부하 한 놈이 털어 놓았습니다.
여자들은 모두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보내고 남자들만 움직이고 있더군요."
"30명이라고 하지만 소동을 부리는 효과는 3천 명 이상이야.
이렇게 나가다가는 강한석씨에게 화살이 돌아가."
"그 전에 잡습니다. 아니면 죽이든지요.
이제 안정태의 부하들이 총기로 무장되었거든요."
이무섭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힘이 실려 있었다.
"김원국의 조직도 분열되는 조짐이 보입니다.
잡힌 놈의 말을 들으니 조웅남이가 이탈해서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모양입니다.
김원국과 연락을 끊고 있다고 합니다. "
"총리와 대통령에게 보낸 안기부의 자료가 마음에 걸려 .
고성섭이가 다시 써낸 서류는 믿을 수가 없어 "
"고성섭의 사표는 어제 날짜로 수리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이제 안기부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
"하지만 놈들이 문제를 던져 놓고 떠났어. 끈질긴 놈들이야 "
이무섭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소리 죽여 코로 숨을 뱉어냈다.
하나씩 일이 정리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또 다른 일들이 생긴다.
이제 그들이 권력의 핵심 부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강한석은 이찬형을 견제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차츰차츰 이쪽의 물에 젖게 되었다.
사건의 근본을 찾으려 하지 않고 우선 덮어 두고 빨리 인정을 받으려는 조급함이
그를 이제는 발을 삘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무섭은 강한석이나 박동호가 꼼짝할 수 없는 약점을 잡고 있기도 했다.
어차피 생사를 같이해야 할 입장이 된 것이다.
이쪽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강한석이나 박동호는 그 순간에 끝장이 난다.
"고성섭이가 사표를 내었다지만 잘 감시해야 할 거야. 놈이 황인규를 충동질해서
무슨 일을 벌일지도 알 수 없으니 말이야."
임종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인규가 내 집 근처에서 얼씬거린 것을 보면 고성섭에게나 아니면 김원국 일당에게도
내 이야기를 했을 가능성이 있어. 고성섭의 보고서에도 그것이 들어가 있을 가능성도‥‥‥‥
"여러모로 조사를 해봤습니다. 황인규는 사단에서도 고립된 입장입니다.
그가 기무사에서 축출된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요."
임종휘가 머리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의 나무들은 모두
잎들을 떨구고 마른 줄기만을 저녁 하늘로 내뻗고 있었다. 담장 안에
세워 둔 보안등이 어스름한 하늘에 부유스름한 빛무리를 만들고 있었다.
"저기, 감시 카메라가 하나 또 있어요."
이강일이 손을 들어 담장 옆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린 백동혁은 나무 줄기에 감춰진 듯 설치해 놓은 카메라를 보았다.
"빌어먹을, 꼼짝할 수가 없겠습니다. 골목 안에만 들어서면 모두 찍히게 되겠는데요."
그들은 골목 입구의 인도에 트럭을 세워 놓고는 짐칸의 천막 사이로
저택을 올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트럭에는 배추와 무우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김장철이었으므로 자연스럽기는 했다.
트럭의 뒤쪽에서 동네 아낙네 대여섯 명이 부하 한 명과 배추 흥정을 하고 있어서 떠들썩했다.
"그만 돌아가자."
벡동혁이 이강일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다. "
"골목으로 올라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저 위쪽 길은 좁고 그쪽 담장은 너무 높더군요."
이강일이 운전석 뒤쪽의 창을 손으로 두드리며 출발하라는 신호를 했다.
아낙네들이 왜 흥정하다가 가느냐고 화를 내었으나 그들은 차도로 차를 빼었다.
"함마 형님한테 수류탄 몇 개 빌려서 던지면서 쳐들어가는 수밖에요. "
배추 더미 워에 걸터앉으면서 이강일이 백동혁을 바라보았다.
"놈들이 맨손으로 있을 리는 없지요. 총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저쪽 놈들이 모두 권총을 지급받았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기관총도 있다던데요."
이강일의 시선이 백동혁 허리춤의 목검을 스치고 지났다.
"큰형님도 그것을 알고 계실까요? 놈들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
"어제 칠성 형님이 말씀 드린다고 했어."
백동혁이 던지듯이 말했다.
"큰형님은 그런 것 좋아하시지 않아. 총 같은 것 말이야,"
"내일 아침에 인천으로 가서 배를 타야 돼. 모두 준비되어 있으니까 걱정할 건 없어 "
방에 들어선 김원국이 말f'#자 이재영은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이재영씨는 잠자코 따라가기만 하면 돼. 참고로 이야기해 주지만
인천에서 만날 사람은 홍콩 사람이야. 황이라고 홍콩 암흑가의 거물급이지.
그사람이 당신을 배로 홍콩으로, 거기서 다시 만탄 섬으로 데려다 줄 거야."
"저 때문에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잠옷의 옷깃을 여미면서 이재영이 말하자 김원국이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다른 부하가 잡혔더라도 그랬을 거야.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 없다 "
"다른 부하라면 혼내셨겠지요."
"아마 단단히 ."
"그런데 저는 부하가 아니니까 내버려 두시는 건가요?"
"저녁에는 뭐라도 좀 든든히 먹어 둬 .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할테니까."
김원국이 말머리를 돌리자 이재영이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섬에 가면 푹 쉴 수가 있을 거야. 거긴 사유지라 아무도 침입할 수가 없어.
또 원주민들도 지켜줄 거야."
"제수씨들은 모두 도착해 있어 . 가면 반가워할 거야."
이재영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이틀 밤낮을 누워만 있었으므로 등이 아팠으나 정신은 맑았다.
침대의 옆쪽에 놓여진 의자에 앉은 김원국의 시선이 얼굴에 부딪쳐 왔으므로
이재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우리는 내일 다시 이동해야 돼.한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어,경찰의 추적이 심해져서."
"꼭 남아 계셔야만 해요? 이제는‥‥‥‥
이재영이 머리를 들고 묻자 김원국이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포기할 때가 되었지 않느냐고 말하려고 했나?"
그의 목소리는 낮고 억양이 없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안돼 . 그리고 난 돌아가지 않아."
"부탁이 있어요."
이재영의 시선이 똑바로 김원국에게 부딪쳐 왔다.
"저를 안아 주세요. 지금요. 다른 욕심은 부리지 않을테니까
"부탁이에요,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다면."
"그럴 리가 없지. 넌 아름다워. 그런 일로 좌절할 여자도 아니고."
"그렇다면 지금 어서요."
자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나 이재영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집안은 조용해서 자신의 거칠어진 숨소리를 억제하느라고 이재영은 숨을 죽였다.
이곳은 성남 근교의 대로변에 있는 이층 양옥집이었다.
오함마와 김칠성 등은 어디로 나갔는지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김원국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서둘 것 없다. 억지로 되는 일도 아니고,그런다고 나아질 일이 아니야."
"나는 너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 일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넌 강하고 분별력이 있는 여자야, 이기적이기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김원국이 이재영의 옷깃을 여미어 주었다.
이재영이 손끝으로 그의 손을 거칠게 밀어내었는데 그녀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래요, 갈게요. 갈테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 말아요."
"이 끔찍한 장면을 잊으려면 시간이 왜나 걸리겠지만 적응하겠어요.
가서 장민애씨와 친해지도록 노력도 하고."
"당신 말씀대로 난 분별력이 강하니까요.
손해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아요."
머리를 』1덕인 김원국이 몸을 돌히자 이재영은 와락 아랫입술을 물고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방문이 닫히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런 모습으로 앉아 있던 이재영은 이윽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자 긴장이 풀린 때문인지 온몸에 쌓인 나른한 피로감이 느껴지면서 가슴이 평온해졌다.
독을 독으로 치료한다는 말이 있듯이 상처끼리 부딪치자 중화작용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방을 나온 김원국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응접실에서 서성대고 있던 김칠성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형님, 저쪽 놈들이 모두 총기로 무장하고 있답니다. 시내에 소문이 좌악 퍼져 있다는군요."
"그럴 법하군. 놈들이 총은 잘 다룰테니까."
그들은 소파에 마주 좌고 앉았다 오함마는 부하들을 데리고 시내에 나가 있었으므로
집안에는 김칠성과 서너 명의 부하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집은 부동산업자가 팔려고 내놓은 집을 그에게 500만 원을 주고 열흘 동안만 빌린 것이다.
부동산업자는 대강 눈치를 챈 모양이었지만 돈 욕심이 앞선 데다가 후환이 무서워 허락을 했다.
그러나 언제 집주인이 찾아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내일은 다른 곳으로 옮길 작정이었다.
"웅남이한테도 연락을 해줘라, 놈들이 총으로 무장했다고."
"웅남이 형님한테 말입니까?"
눈을 점벅이며 김칠성이 묻자 김원국인 머리를 』1덕였다.
"동혁이가 알고 있을텐데, 웅남이하고 연락이 되고 있지?"
"네? 네, 아마, 하지만 저는‥‥‥‥
얼마 전에 백동혁이가조웅남이 보낸 돈이라면서 5억을 가져왔었다.
그러나 김칠성은 그에게 조웅남을 어떻게 만났느냐고도 묻지 않았던 것이다.
"웅남이가 떨어져 있는 것이 지금 상황으로는 낫다. 차라리 잘된 일이야.
하지만 앞으로는 이쪽 지시를 받도록 해야 돼. 그 말을 전해라. "
"예, 형님 ."
"임종휘의 저택은 공격하기가 쉽지 않겠다면서?"
"예, 어제 동혁이가 다려왔습리다만 골목 끝에 있고 사방이 막혀 있어서요.
붙어 있는 집도 없습니다. "
"내일 아침에 이재영씨를 인천으로 데려다 주면서 황을 만나면 총기를 줄 거야.
내가 부탁해 두었다. "
김원국의 말에 김칠성이 상체를 세웠다.
"총기를 말입니까?"
"그래, 우리도 최소한의 무장은 해야지 당할 수만은 없다. "
"그렇다면 됐습니다. 한판 해보는 거지요."
김칠성의 말소리에는 생기가 차 있었다.
정기욱이 장안동의 레오날드 클럽에 도착한 것은 밤 9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그와 얼마 동안 동거 생활을 하던 박주현이 백동혁과 내통하고 문을 열어 주고는
돈을 챙기고 튀어 버리자 정기욱은 다시 흘아비 신세가 되었다.
그가 일주일에 한번꼴로 레오날드 클럽에 오는 것은 잠자리를 같이할 여자를 고르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배인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밀실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에게 지금 부족한 것이 있다면 마음을 채워 줄 여자였다.
돈도 쓰고 남을 만큼 있었고, 요즘 안정태나 박용근의 세력들은
김원국의 테러에 정신을 못 차리는 상황이었지만 이쪽은 그런 걱정도 없다.
두 다리를 쭈욱 뻗고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을 것이라고 정기욱은 믿고 있었다.
"사장님, 괜찮은 애가 두 명 있는데, 하나씩 들여보낼까요?"
지배인이 허리를 굽힌 채 묻자 정기욱이 혀를 찼다.
"임마, 같이 데려와. 하나씩이 뭐야? 내가 지금 선보냐?"
"알겠습니다, 사장님 ."
그가 물러나자 정기욱은 소파에 깊숙이 등을 묻고는 가슴에 느껴지는
흥분감을 음미하는 듯 얼굴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수백 번 이런 상황을 겪어 보았지만 이런 기다림의 순간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다.
더욱이 이쪽이 선택하는 입장이어서 여유도 있다.
그때 문이 열렸으므로 정기욱이 머리를 들었다.
"아니, 이게 ‥‥‥‥
놀란 나머지 입을 따악 벌린 정기욱이 엉거주춤 소파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오랜 만입니다, 정 사장님."
이철우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으나 뱃속에서 우러나온 듯 힘이 실려 있었다.
정기욱은 이철우가 내민 손을 잡았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
그와는 유통 회사를 시작하기 전에 이무섭과 같이 딱 한번 만났을 뿐이다.
그들이 서로 마주 보고 앉자 지배인이 여자두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가 이철우를 보더니 눈을 껌벅이며 정기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내 손님이야."
정기욱이 얼른 사라지라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여자들이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으나 이젠 여자 얼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배인은 눈짓으로 여자들에게 자리를 가리켜 주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여기 아가씨들이 왜 미인이구만 "
이철우가 옆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정기욱이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이형께서 갑자기 웬일입니까, 이런 곳까지?"
"정 시장님이 여기 잘오신다고 해서 기다렸지요.오늘로 사흘째요. "
"허어, 전화라도 해주시면 금방 만날 수도 있었을텐데요."
"소문나지 않게 만나려고 그랬어요."
정기욱이 어깨를 세웠다.
"그러시다면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우선 술이나 한잔씩 합시다. "
술상은 이미 차려져 있었으므로 이철우가 술잔을 내밀자 정기욱이 받아 쥐었다.
서로 잔을 권하여 한잔씩을 들이킨 그들은 술잔을 내려 놓았다.
여자들은 몸을 굳힌 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빈잔에 여자가 술을 채우고 나자 잔을 든 정기욱이 이철우를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일을 하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난 아직 생각 없습니다. 서둘 것도 없구요."
"김원국 잔당들이 요즘 발악을 하고 있어서 골치가 아즙니다.
이 선생께서도 걱정이 되실 거요."
그가 말하는 이 선생이란 이무섭이다.
이철우가 머리를 11덕였다.
"내가 정 사장님께 개인적으로 물어 볼 것이 있어서 ‥‥‥‥
"말씀하세요, 얼마든지 ."
"지난번 크리스틴 호텔에서 말입니다 "
"정 사장님 부하들하고 또 다른 사내들이 있었다는데,세 명이었지요?
우리 쪽에서 내 가족을 인수하려고 보낸 사람들 말이오."
우리 쪽이라면 이무섭 쪽이라는 이야기였다. 이철우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놈들 세 명이 행방불명이 되었어요.
그래서 물어 볼 수도 없어서 ‥‥‥ 어땠습니까, 그날의 상황이?"
"글쎄, 나도 직접 참가하지를 않아서‥‥‥
김동천이를 보냈는데 그놈도 행방불명이지요."
"들었을 것 아닙니까?"
정기욱이 한모금에 술을 삼켰다.
옆자리의 여자가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어 내밀었으나 손으로 밀쳐내었다.
"너희들은 나가 있어."
눈을 부릅뜬 정기욱의 기세에 놀란 여자들이 서둘러 방을 나갔다.
"세 명이 버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고 합니다.
우리 애들은 버스 밖에서 놈들과 싸우고 있었고."
정기욱이 말을 이었다.
"그 친구들이 조금 있다가 다시 뛰어나왔다고 합디다. 그후에 고 태석이라는
놈이 뛰어 들어갔고, 그러다가 형사들에게 그 자리에서 체포되 었지요."
"버스 안에는 김원국의 부하 두 놈이 죽어 있었어요,
이형 식구들과 함께. 신문에 보도된 것과 같아요."
"세 명이 뛰어 들어갔다가 나오고 나서 고택석이가 뛰어갔다는 말씀인데,
세 명이 들어가기 전에 버스 안에 있던 두 놈이 일을 저질렀을 수도 있겠군."
"그럴 수도 있지요."
정기욱이 빈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그 여기자가 아주일보에 낸 기사를 읽으신 모양이군요.
우리 쪽에서 일을 저질렀다는 기사 말이오."
"난 보지 못해서 모릅니다. 그 세 명이 증인일텐데,찾아서
캐어 보면 알 수 있을텐데 말이오."
술잔을 쥔 채 이철우가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잡혀 있지 않은 시선이었다.
레오날드 클럽의 주차장은 현관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다.
주차장 담당 직원인 심형만은 피우던 담배를 땅바닥에 버리고는
왼쪽 끝에 주차되어 있는 중형 승용차 쪽으로 다가갔다.
"아저씨, 곧 나가실 것 아니시면 저 뒤쪽으로 차를 빼주세요.
뒤차가 곧 빠져 나가야 하니까요."
"알았어."
차창을 반쯤 열어 놓고 길게 누워 있던 사내가 짜증난듯이 말하고는
차를 앞쪽으로 빼었다가 뒤쪽 담장 근처로 후진시켰다.
"저거 누구 차야?"
후진시키는 승용차를 턱으로 가리키며 동료인 김기딜이 다가와 물었다
"서에서 왔대, 경비한다고."
"좇까네 "
김기덕이 어깨를 움칠 치켜세우면서 입술을 찌그려뜨렸다.
"경비는 무슨 경비, 김원국이가 이런 델 오겠어?
영동에 가면 잘 나가는 데가 수두룩한데 ."
클럽이나 살롱 등 유흥업소에는 한두 사림씩 전담 형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김원국 일당의 출몰을 경비하려는 의도였다 주차장담당
직원이 앞쪽으로 사라지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형사가 머리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계장님, 어떻게 하지요? 정기욱이를 기다릴까요?"
"기다리자구, 나을 때까지."
최순태는 의자에 등을 깊게 묻었다. 뒤쪽의 창문은 짙은 색으로 선팅이 되어 있어서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
"저 자식이 제일 신간이 편한놈 같구만 저봐,경호원도 몇 놈 안 된단 말이야."
최순태가 클럽의 현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현관 부근에 서너 명의 사내가 서 있었는데
잡담을 나누고 있는 듯 풀려 있는 자세였다.
박용근이나 안정태가 행차할 때의 요란하고 삼엄한 경호 대열과는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죽으려고 눈이 뒤집혔거나 아니면‥‥‥‥
앞자리의 형사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으나 최순태는 말을 잇지 않았다.
장안동이나 수유리 쪽에 기반을 닦고 있는 정기욱의 업체들은 박 용근이나 안정태의
조직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작기는 하다.
그래서인지 김원국의 테러는 박용근과 안정태의 업체들을 목표로 철새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조직별로 테러 발생 건수를 살펴보던 최순태가 정기욱의 업체들이 당한 건수가
박용근이나 안정태의 조직에 이해 현저히 적은 것을 발견했다.
업체가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비율이 낮은 것이다.
그것은 정기욱의 업체들이 다른 조직의 그것과 비교해서 규모가 작기 때문일 수도 있었으나
일단 최순태는 정기욱을 감시해 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계장님, 한 시간 전에 오성 클럽의 지배인이 습격당한 것 들으셨습니까?"
형사가 무료한 듯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들었어."
"이번에는 김원국의 부하 두 명이 죽었습니다. 이쪽은 지배인 한 놈만 다치고요."
"알고 있어."
"애들이 모두 총기를 가지고 있어요.
이제는 홍콩처럼 길거리에서 총을 쏘아 제끼게 되었습니다. "
"제아무리 김원국, 조웅남이라고 하더라도 총 앞에서는 꼼짝할 수 없겠지요
머지않아 끝장나겠습니다. "
"할수없는 일이지, 놈들이 먼저 수류탄을 던지고 난동을 부렸으니까. "
"무기는 어디에서 구해 왔을까요?한국에서 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홍콩이야."
이야기를 하면서도 클럽의 현관 쪽에 시선을 주고 있던 최순태가 와락 상반신을 앞쪽으로 굽혔다.
"가만, 저게 누구야?"
"누구라니요?"
클럽의 현관을 나와 금방 어둠 속에 상반신을 묻는 사내의 옆모습이 낯익었기 패문이다.
사내는 클럽 앞의 공터를 지나 주차장 앞길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왔다.
주차장 입구에 세워진 조명등의 불빛 속으로 사내의 모습이 들어섰다.
"어어, 저 사람이 ‥‥‥‥
최순태가 앞좌석의 의자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이철우였던 것이다.
"저 친구가 왜 여기에 ‥‥‥‥
"저건 이철우 아닌가요?"
그제서야 형사가 놀란 듯 말했다.
"정기욱을 만난 모양인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글쎄, 못 만날 이유도 없지. 그렇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할 건 없어."
이철우는 이제 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대로 쪽으로 갔으니
아마 택시를 잡아 탔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때 그 신문 기사에는 이철우가 배후 세력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거 아무래도‥‥‥‥
형사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이철우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같은 술집에 있었다고 그렇게 속단하지 말어."
"하고많은 술집 중에서 왜‥‥‥‥
"이철우를 안 본 것으로 해. 골치 아프니까 말이야."
최순태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들기 싫어 내가따로 보고는 할테니까자 네는 입을 다물어."
"알겠습니다. "
산전수전을 다 겪은 형사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클럽의 현관이 떠들썩해지더니 현관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기욱의 벤츠가 전 』등을 켰다.
정기욱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휴대폰의 스위치를 내린 안정태가 이무섭을 바라보았다.
"이 소령이 정기욱과 만난모양입니다. 최 경감이 레오날드 클럽 앞에서 보았다는데요."
이무섭이 머리를 』1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경찰의 눈에 띄다니 그 사람,조심성이 없어졌군 "
"정기욱과 만날 약속을 하고 만났겠군요. 그렇다면 정기욱이한테서 보고가 왔었습니까?"
"아니,그런 건 없어, 같은 식구끼리 보고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그렇지 않은가?"
"물론 단장님께도 이 소령이 말씀 드리지 않았겠군요."
이무섭이 대답 대신 안정태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단장님, 제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진 알고 계실 겁니다. "
안정태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모금에 삼켰다. 얼굴이 검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물론 정기욱이는 내막을 모르고 있지만 현장 사정을 제일 잘 아는 놈이지요.
이 소령은 가족이 우리측의 계략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주일보에 그것이 보도되고 나서 눈치가 이상했었습니다 "
그는 술병을 들어 빈잔에 술을 채웠다. 영동에 있는 고급 요정인 가화의 밀실 안이었다.
넓은 온돌방에 시중 드는 여자도 없이 교자상을 사이에 두고 둘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다가 최순태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안정태가 다시 술잔을 들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지난번에 이재영이를 잡았을 때도 불안했습니다
이 소령이 알면 직접 심문하겠다고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몇 놈한테만 알려 카 센터 쪽으로 데려갔는데 그만‥‥‥‥
"혼자서 무슨 일을 할 수는 없어. 이철우는 남아 있던 심복들을 모두 자네에게 보냈지 않아?
그것은 자신의 충성심을 보인 거야.
설혹 미진한 점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 스스로에게도 다짐하였을 것이다. "
"단장님, 이 소령을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 그 부하들은 이 소령 말 한마디면 다시 돌아갑니다. "
"증거가 없어. 걱정하지 마라."
술잔을 든 이무섭이 자르듯 말했다.
"이철우는 심증만 가지고 나에게 등을 돌리지는 않는다. 나는 그 친구를 믿어. "
"나는 그 친구에게 다음주부터 유통 회사를 맡기겠어.그러자면
정기욱이와 일이 겹치게 되는데 마침 둘이서 잘 만났구만 그래 ."
"최 경감 이야기로는 정기욱의 지역에서는 김원국의 일당이 사건을 덜 일으킨다는 겁니다.
불안해서 정기욱이를 따라다녔는데 오늘 밤에 ‥‥‥‥
"업체들이 보잘것없으니까 그랬겠지 ."
"비율이 적다고 그러던데요. 김원국이가 그놈을 봐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
"그쪽 지역은 치고 도망치기에도 적당하지가 못해, 길이 막혀서 ."
이무섭이 잔을 들자 안정태가 술병을 들어 술을 채웠다.
"이 소령이 정기욱이를 만났다는 것을 흘려 넘기지는 않겠다.
앞으로는 이 소령의 주변도 바빠질 것이고."
술잔을 든 이무섭이 입술 끝으로만 웃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부하야. 나는 그에게 힘과 부를 함께 줄 것이다. 자네와 마찬가지로 말이야."
"저는 단장님의 심복입니다. 생사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
"알고 있어 우리 둘만의 비밀이 그렇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도."
"저는 불안합니다. "
"이철우의 가족은 원대한 계획에 따른 희생자였다.
그것을 기점으로 우리가 일시에 승기를 잡을 수가 있었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
"나는 내 부하의 가족을 희생시키고 그것이 탄로날까 봐 부하를
의 혹 143
매장시키지는 않겠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바로 내 앞에 앉아 있던
안정태마저도 나를 불신하게 될테니까."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겠다. 당당하게 맞서겠단 말이다. "
"잘 알겠습니다, 단장님."
술잔을 내려놓은 안정태가 상반신을 세우고는 앉은 자리에서 머리
를 숙였다.
"저도 당당하게 대하겠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니까 후련합니
다. "
"정기욱이 말인데 ‥‥‥‥
이무섭이 자연스럽게 말머리를 돌렸다.
"요즘은 얌전해지고 고분고분 시키는 일을 잘하고 있더구만. 기반
도 굳어진 것 같고."
안정태가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요즘 경호원도 몇 명밖에 데리고 다니지 않는답니다. 방
심하고 있다는 겁니다. "
이무섭이 술잔을 들고 한동안 잔에 담긴 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김원국 일당에게 습격당할 수도 있겠구만 그래 ."
머리를 든 이무섭이 말하자 안정태가 눈을 점벅이며 그를 바라보
았다. 이무섭이 잔을 들어 위스키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오후 4시 반밖에 되지 않았으나 산속에는 이미 햇살이 보이지 않
았다. 지프는 가파른 산등성 이를 깎아 만든 군용 도로를 달려 내려오
고 있었다.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가끔씩 돌멩이가 튀었고 바퀴가
144 밤의 대통령 제2부 -lU
길의 패인 부분에 빠져 차체가 덜컹이며 흔들렸다.
"시간은 충분하다 서두를 것 없다. "
운전병이 조바심을 내는 것 같았으므로 황인규가 말했다.
"너도 서울에 도착하면 차 가지고 집에 가 쉬어라. 집이 봉천동이
랬지?"
"네, 참모님 , "
상병 계급장을 붙인 운전병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내일 오후 3시쯤 내 집 앞에 차를 대면 된다. 그때까지 너도 푹
쉬어."
"네, 참모님 "
지프는 산을 거의 다 내려가고 있었다. 군데군데 산을 깎아 길을
넓히는 공사 현장이 보였다. 공병대대와 건설 회사가 합동으로 작업
을 하는 곳이다. 황인규는 점퍼의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들
었다. 운전병이 그가 다이얼을 누르는 동안 눈치 빠르게 속력을 줄였
다.
"여보세요."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김칠성의 목소리를
황인규도 이제 구분할 수 있다.
"접니다, 황인규."
"아아, 황 대령님, 웬일이시오?"
"지금 서울로 가고 있는데, 7시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 "
"그러시다면 오늘밤 뵐까요?"
"아니, 오늘밤에는 약속이 있어요. 중요한 일이라‥‥‥ 내일 아침
에 만났으면 합니다 "
의 혹 145
"좋습니다. 전화 기다리지요. 그리고 별일 없으시지요?"
"나야 전방에 있는 몸이라 그쪽 돌아가는 것하고는‥‥‥ 그런데
그 일은 잘 되어 갑니까?"
"네, 원체 경비가 대단해서, 하지만 이제 우리도 준비를 마친 참입
니다. "
"어쨌든 내일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오전 9시에 전화를 드리지
요."
휴대폰의 스위치를 내린 황인규는 운전석 옆의 손잡이를 움켜쥐었
다. 지프는 산기슭을 돌아가는 비스듬한 곡선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포장되지 않은 길이 심하게 패어 있어서 지프는 거칠게 요동을 쳤
다. 도로의 옆쪽에서 공사를 하고 있던 인부들이 먼지에 눈살을 찌푸
리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4킬로미터 정도만 달리면 포장된 국
도가 나온다.
황인규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사단장인 이
동혁은 업무에 철저한 사람이었지만 황인규의 잦은 서울행에 대해서
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외압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기무
사령관인 오성국이 쫓아낸 인물이라서 접어 두고 평가하지 않았다.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면서 앞쪽에서 덤프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
다. 도로 공사에 쓰이는 트럭이다. 운전병이 속력을 줄이면서 라이트
를 깜박이자 트럭이 속력을 줄였다. 일차선이었지만 겨우 비껴 갈 정
도는 되는 길이다.
군용 도로여서 일반 차량으로는 뒤쪽의 산기슭에 있는 저수지에
가는 낚시꾼들의 차가 간혹 보일 뿐 차량의 통행이 드문 도로였다.
146 밤의 대통령 제2부 -lU
덤프 트럭이 지나가자 지프는 빈 길에서 다시 속력을 내었다.
오후 5시가 되어 있어서 산과 반대쪽의 들판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농부가 부족한 실정이어서 들판의 군데군데에는 무성한 잡
초가 자라 바람에 흔들렸다
운전병이 라이트를 켜고는 운전대를 고쳐 쥐었다. 어스름한 저녁
때의 운전이 하루 중에서 제일 힘들고 위험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 앞쪽에서 번쩍이는 불빛이 보였다. 크기로 보아
또 덤프 트럭인 모양이었다
"공사가 빨리 끝나야지 부대 이동에도 애를 먹고 있어."
혼잣말처럼 황인규가 말하면서 운전석 옆의 손잡이를 쥐었다.
"저놈의 덤프 트럭들이 길을 다 망가뜨린다니까."
운전병이 라이트를 두어 번 깜박이며 트럭에게 경고를 보냈다. 트
닉"1 』「 를더로노 ff니. 소T·옥덕글 굴 』굳'"1 모나.
운전병이 이제는 경적을 울렸다. 트럭이 이제 30미터쯤의 거리로
다가왔으므로 운전병은 길가로 차를 바싹 붙이고는 속력을 10킬로쯤
으로 줄였다.
트럭도 속력을 줄이고는 길가로 차를 붙이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황인규는 덮여 올 먼지를 예상하고는 미리부터 눈살을 찌푸렸다. 그
런데 트럭이 와락 속력을 내었다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트럭의 엔진 부분이 보였다.
놀라 눈을 치켜뜨고 입을 따악 벌린 그들 두 사람은 다음 순간 격
심한 충격을 받고는 지프의 유리창에 온몸을 부딪치며 튕겨 나왔다.
트럭은 지프를 앞쪽에 매단 채 길 옆의 조그만 개울 쪽으로 밀쳐
내었다. 지프는 개울가의 바위에 뒷부분을 부딪치고는 앞쪽에서 트
의 혹 147
럭이 다시 밀자 맥주 깡통처럼 우그러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
"임종휘 집의 보일러를 수리한 사람을 찾아냈지요. 그 사람한테서
대충 집안 구조를 들었습니다. "
김칠성이 종이를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어설프게 그려진 저택의
도면이었다. 군데군데 빨간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고 거리도 표
시되어 있다.
"건물이 왜 큽니다. 지하실에 직원용 식당도 있고 감시 카메라가
다섯 대나 있습니다 "
"경비원이 열 명 정도 된다고 하니 이무섭이나 이철우가 직접 관
리한다고 봐야 될 것이다. "
김원국이 도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김칠성과 백동혁은 서너 차례나 찾아갔으나 근처만 얼씬거리다가
돌아온 것이다. 저택은 고지대에 있어서 들어가는 입구는 기역자로
나 있는 골목뿐이었다. 그러나 양쪽의 골목은 모두 저택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놈들은 총기로 무장하고 있어. 섣불리 대들었다가는 이쪽이 당한
다. "
"우리도 갖출 것은 갖추었으니 이제 해볼 만합니다. "
김칠성의 말에 김원국이 머리를 저었다.
"밤거리에서 저놈들을 습격하는 것하고는 달라. 조금도 빈틈을 보
이지 않고 경계하고 있는 놈들이야. 그리고 만일에 실패한다면 안한
것보다 못하게 된다. 민가를 습격해서 민간인을 처치했다고 놈들은
148 밤의 대통령 제2부 -및
여론을 끌어낼 거다. "
소파에 등을 기댄 김원국이 머리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북
한산 기슭에 있는 단층집이었다. 방이 여섯 개나되는 왜 큰 기와집
이었으므로 부하들도 모처럼 비좁지 않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본
래는 쾌 유명한 보살 한 분이 점을 치거나 굿을 하기 위해서 지은 집
이었는데 보살이 죽고 나자빈집이 되어 있어서 그들에게는 안성맞
춤이었다.
부하 한 명이 죽은 보살의 단골이었기 때문에 집을 찾는 것도 어
렵지 않았다. 아침 해가 제법 높이 떠 있었지만 바깥 날씨는 추웠다.
산의 중턱에 지은 집이어서 울창한 나무에 가린 굿집에는 햇살도 제
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형님, 어쨌든 저는 임종휘를 치겠습니다. 이렇게 이쪽저쪽을 쑤
시고 돌아다녀 보아도 나아지는 것도 없고‥‥‥‥
김칠성이 머리를 들고 말했다.
"머리부터 자르면 놈들은 흔들릴 겁니다. 잔챙이들을 건드리다가
하나씩 둘씩 우리 인원이 줄어들고 있지 않습니까?그럴 바에는 차
ffff ‥‥‥
"대통령이 실상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제일 중요한 일
이 야."
"그는 강한석이한테 흘려 있습니다. 기대할 것이 없어요."
"고 차장이 총리에게도 보고서를 올렸다고 했다. 총리는 정직한
사람이야, 실권은 없지만 "
"고 차장은 며칠 전부터 연락도 안됩니다. 시골에 내려갔는지 아
니면‥‥‥‥
의 혹 149
"자기 앞가림은 하는 사람이야.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
다. 하지만 임종휘의 집을 치는 것은 신중하게 계획해야돼. 한번에
결단을 내야 한단 말이다. "
미닫이 문이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오함마가들어섰다 눈썹을 찌
푸린 얼굴에 손에는 신문을 움켜쥐고 있다.
"형님, 어제 저녁에 황인규 대령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서울
로 오는 도중에 군용 도로에서 트럭과 부딪쳐서 ‥‥‥‥
"황 대령이 ‥‥‥‥
눈을 부릅뜬 김칠성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었다가 다시 앉았다.
"어제 저녁에 내가 전화를 받았는데, 오늘 아침에 만나기로‥‥‥‥
"이무섭이가 했을 겁니다. 황 대령이 우리에게 협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오함마가 앞자리에 앉아 김원국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운 군인이 죽었다. "
김원국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명예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목숨을 버려야 할 때도 아는
군인이었고."
"개죽음을 당한 것이지요."
"내 이 새끼들을‥‥‥‥
이를 악문 김칠성이 신문을 펼쳤다가 대충 큰 글자만을 읽고는 머
리를 들었다.
"트럭은 도난당했던 차였고 운전자는 도망쳤다니, 이것은 계획적
인 살인입니다. "
"신문에는 길이 좁고 저녁때여서 생긴 단순한 교통사고로 났습니
150 밤의 대통령 제2부 -lif
다. "
오함마의 말이 공허하게 방을 울렸다.
이제 안기부의 이찬형과 고성섭이 공직에서 물러난 데다가 경찰청
에서 그들을 돕던 이정환은 은퇴한 지 오래였고 유혁근은 골목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어젯밤에 군에 남아 있던 황인규가 산길
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다.
"우리도 복수를 합시다. 어차피 같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놈들
입니다. 우리도 가차없이 죽입시다. "
김칠성의 말투는 격렬했다.
요즘 들어서 그는 걸핏하면 흥분했고, 가끔씩 밤거리에 나가 안정
태나 박용근의 부하들을 만났을 때 온전히 놔두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제는 홍콩에서 총기류까지 들여온 참이다. 그는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눈치였다.
"어이그, 고것들 참말로 이쁘다. "
조웅남이 탁자 위에 펼쳐 놓은 권총과 수류탄, 기관총들을 내려다
보면서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인자는 걱정헐 거 을다, 힘들 것도 을고 한놈 한놈 쏴 죽일텡게."
"형님,강남역 사거리 근처에는 사복 경찰이 백여 명 깔려 있습니
다. 그쪽으로는 나가지 말라고 큰형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백동혁의 말에 조웅남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려, 알겄다. 형넘헌티 가서 고맘다고 전혀."
"돈을 보내실 필요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자금은 넉넉하시다구
요."
의 혹 151
"돈은 많을수록 좋은 거여. 쓸 디도 얼마든지 있고."
"하지만‥‥‥‥
"그러은 모아 두겄다고 혀라. 한목에 디릴텡게로."
"예, 형님."
마지못해 대답한 백동혁이 자리에서 일어싫으나총기류에 정신이
팔린 조웅남은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홍콩의 황용성이 이번에 가져온총기류를 김원국이 나눠 보낸 것
이었는데 조웅남이 거느리고 있는 십여 명의 부하들은 이제 모두 총
기로 무장하게 되었다.
백동혁이 응접실을 나오자손채석이 따라나왔다. 시흥에 있는 이
층 벽돌집이었는데 새로 지은 집이어서 벽에서는 아직도 회 냄새가
났다.
"앞으로는 네가 하루에 두 번씩 나한테 연락을 해줘, 아침 저녁으
로. 그래야 우리도 손발을 맞출 수가 있어."
몸을 돌린 백동혁이 손채석을 바라보았다.
"서로 정보를 교환해야 돼. 이건 큰형님의 지시다. "
"알았어. 웅남 형님도 군소리는 하지 않으실테니까."
손채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렇게 혼자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웅남 형님은 맨날 술타령이
야. 술 마시고 울 때도 있고."
그들은 현관을 나와 조그만 마당으로 나왔다 초저녁의 싸늘한 공
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똑같은 구조의 이층 양
옥집이 세워져 있었는데 아직 입주자가들지 않은 모양으로 인적이
없다.
152 밤의 대통령 제2부 -방
손채석이 다가와 물었다.
"일 끝내면 섬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데 무슨 섬이야?"
"아아, 인도네시아에 있어. 큰형님이 사셨던 곳인데‥‥‥‥
"좋으냐?"
"몰라, 안 가봐서 ."
섬이 좋아서 조웅남이 가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곳에는 강만철
의 무덤이 있다. 손채석이 들한지 아니면 몰라서 묻는지 알 수 없었
으나 백동혁은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우린 오늘밤에는 쉬어.오랜만에 집안에 모여 고기나 구워 먹을
작정이다. "
손채석이 뒤를 따라오며 말했다. 그들은 전에는 서로 안면이 있을
뿐이었으나 이렇게 쫓기는 신세가 되자 급속히 가까워졌다.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조웅남의 임시 거주지를 나온 백동혁은 멀찍이 세워 놓은승용차
로 다가갔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골목의 입구에는 행인이 드물었
는데 새로 지은 빌라 형식의 주택들이 제대로 팔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형님, 어디로 값니까?"
백동혁이 됫좌석에 앉자 앞에 앉아 있던 이강일이 몸을 돌렸다.
"시내로 들어가자, 우선 신촌으로."
"신촌이라면 저 ‥‥‥‥
"잠깐이면 돼 ."
"알았습니다. "
몸을 돌린 이강일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부하에게 눈짓을 하자 승
의 혹 153
용차는 차도로 들어섰다.
김선주가 신촌으로 집을 옮긴 지 두 달이 넘었으나 이사 갈 때 한
번 가보았을 뿐이다. 오늘은 일이 없는 날이었으므로 백동혁은 지나
는 길에 들러 볼 생각이었다.
"형님, 이젠 든든합니다. 호주머니에 이것이 있어서요."
이강일이 저고리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드려 보이며 웃었다.
"쌍놈의 것들, 수틀리면 그냥 쏘아 제끼는 것이지요, ."
"이 자식아, 누가 맘대로 쏘라고 그랬어?"
이맛살을 찌푸린 백동혁이 목소리를 높이자 이강일이 목을 움츠리
는 시늡을 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두려워하는 기색은 찾을 수가 없
다. 같이 쫓겨 다니면서 허물도 없어졌지만 형제간 이상으로 정이 들
었기 때문이다.
승용차는 서울로 뻗은 활차선 도로를 속력을 내어 달려나갔다. 아
직 러시아워 전이어서 길은 막히지 않았다.
좌석에 등을 기댄 백동혁은 김선주의 알몸을 머리속에 떠올리는
흐트리지 않으려는 듯 눈을 감았다.
오랜만의 만남이어선지 백동혁이 현관으로 들어서자 김선주는 얼
굴을 붉혔다. 저녁을 만들고 있었는지 아파트 안에는 된장찌개 냄새가 퍼져 있었다.
"어떻게 사는가 보려고‥‥‥‥
바바리 코트를 벗으며 백동혁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김선주가 옷을 받았다.
"저녁밥을 하는 모양인데, 난 안 먹어 "
먹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애들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나 혼자 먹을 수는 없어."
"그럼 불러요, 밥은 많으니까."
"안돼 . "
소파에 앉은 백동혁이 앞에 서 있는 김선주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가벼운 원피스 차림이었는데 맨발이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내려오자 자신도 모르게 힘이 갔는지 김선주의 발가락이 방바닥에
바짝 달라붙는 듯했다.
"그것보다도, 이리 좀‥‥‥‥
엄거주춤 엉덩이를 든 백동혁이 한 손을 내밀며 그녀를 빤히 바라 보았다.
"왜요?"
김선주가 눈을 치켜떴다가 한걸음 뒤쪽으로 물러섰다.
"나,급해."
"쥐가요?"
알면서도 시간을 끄는 것이 분명한 분위기였으므로 백동혁이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 금방 가야 돼."
"그러면 가셔야죠."
"이봐, 이쪽으로 와."
백동혁이 다가가자 그녀는 뒤쪽으로 물러섰다가 냉장고에 등이 걸려 멈추어 섰다.
"도무지 시간이 없어서 여기를‥‥‥‥
"신문 보았어요. 전쟁을 치르고 계시던데요."
또랑또랑한 말대답에 백동혁은 와락 짜증이 솟구쳤으나 그것과 아
래쪽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두 팔로 껴안았다.
"찌개가 끓어요."
김선주가 그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었으나 백동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하반신에 백동혁의 딱딱한 부분을 느낀 김선주가 얼굴을 붉혔다.
"이것 때문에 오신 거예요?"
"그럼 내가 무슨‥‥‥‥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밀려던 김선주가 손의 힘을 풀었다.
"밑에만 벗으면 돼. 시간이 없어."
"씻고 올게요."
"안 씻어도 돼."
백동혁의 손이 어지럽게 그녀를 더듬어 원피스 밑에 걸친 팬티를 끄집어 내렸다.
"방으로 가요."
아직도 냉장고 앞이었으므로 그녀가 그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응?"
김선주의 아래쪽을 더듬는 데 열중하던 백동혁이 얼뜬 소리로 물었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촉촉한 곳에 닿아 있었다.
"방으로 가잔 말예요."
"괜찮아, 여기도."
김선주는 냉장고 앞의 모노룹 바닥 위에 엉덩이를 대면서 쓰러졌다.
백동혁과 함께 넘어진 것이다.
등과 엉덩이에 차가운 감촉이 왔으므로 김선주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2미터만 옆쪽으로 가면 응접실에 깔린 양탄자 위로 옮길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에 자신의 다리가 벌려진 것을 보았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은 백동혁은 분주히 바지를 내리는 참이었다.
"동혁씨, 저쪽으로‥‥‥‥
그러나 상반신을 굽힌 백동혁은 서둘러 그녀의 다리 사이에 남성을 꽃았다.
그 순간 김선주는 저도 모르게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그는 거칠게 서두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녀에게 자극을 준 것이다.
백동혁이 쫓겨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은 김선주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절박하고 초조했는데 어느덧 그녀에게도 그것이 옮겨진 것이다.
이제는 김선주가 서두르기 시작했다.
거칠게 엉덩이를 들어올리며 그와 보조를 맞추었고 그의 입술을 찾아 세차게 빨아 대었다.
그러자 쾌감이 급속히 전달되어 왔다.
아랫쪽이 터지는 듯한 느낌이 왔고 서로 동작이 어긋나 백동혁의 남성이 빠져 나가자
그녀가 허우적거리 듯 손을 저어 그의 것을 쥐고는 다시 넣었다.
이윽고 그들은 똑같이 절규하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며 온몸을 경직시켰다.
"움직이지 말아요. 움직이지‥‥‥‥
두 팔과 다리로 백동혁을 휘감고 있던 김선주가 소리치듯 말했다
온몸을 늘어뜨린 백동혁이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그녀의 귓불을 깨물었다.
이윽고 김선주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는 커다랗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원피스가 배 위에까지 말려 올라가 있었으나 그녀는 그것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동혁은 일어서서 발끝에 뭉쳐 걸려 있는 팬티와 바지를 추켜을려 입었다.
그제서야 찌개 냄새가 코로 들어왔고 냄비 뚜껑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도 』에 들렸다.
백동혁은 그녀의 원피스를 내려 주고는 주방으로 다가가 가스의 불을 껐다.
"나, 바빠서 ‥‥‥‥
아직도 누워 있는 김선주의 머리맡에 선 그가 말했다.
그러나 김선주는 눈을 뜨지도 몸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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