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벌거벗은 여자
"이것은 내란이야. 정부는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하고 있고."
이중설 대통령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원탁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는데 시선 끝이 날카로워서
감히 아무도 눈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
"김원국 조직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지 않는가? 시내에서 수류탄을 던져 사람을 살상하다니."
그의 말소리가 찌렁이며 방안을 울렸다.
회의를 시작한 지 20분이 넘었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발언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대통령의 질타만 쏟아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태평성대라는 보고만을 받아 왔어.
어느 한 사람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책임있게 일하는 공직자가 없단 말01야."
말을 멈춘 이중섭의 시선이 좌우를 훌다가 안기부장인 안길중에게서 멈추었다.
그의 시선은 곧 반대쪽에 앉아 있는 내무장관 박민평에게로 옮겨졌다.
"여덟 명이 죽고 스물세 명이 다쳤다니,
이것은 전쟁이 난 것이나 같아. 치안 상태는 지금 공백이야.
무정부 상태와 같아. 그렇지 않는가,박 장관."
드디어 과녁이 정해졌으므로 박민평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허리를 폈다
질풍노도와 같이 쏟아지는 이중섭의 질타를 섣불리 상대 했다가는
애꿎은 벼락을 맞기 십상이고 한숨 돌리기를 기다리면 이중섭이 냉정해진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우선 면목이 없습니다. "
박민평이 먼저 머리를 깊게 숙였는데 그것을 바라본 강한석이 희미하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중섭은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잘못을 먼저 시인하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솔직하고 기개 있는
성품으로 보이겠지만 이쪽은 일국의 장관이다.
잘못 한번이 보통 사람보다 몇백 배 몇천 배의 비중이 있는 것이다.
그는 우선 장황 하더라도 이제까지 치안에 노력했던 상황을 설명했어야 했다.
아니나다를까 이중섭이 턱을 치켜들고는 머리를 돌렸다.
"전 경찰력을 동원해서 김원국 일당을 완전히 뿌리 뽑겠습니다.
따라서 ‥‥‥‥
"언제는 동원 안했나?"
"네, 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건씩 테러와 강도 사건이 발생하고 있어.
경찰청에서는 사건 발생을 덮어 둔다는 말도 있던데 "
"그럴리가, 저는 금시초문입니다. "
"그러겠지."
박민평이 손수건을 꺼내기도 어려웠는지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씻어내었다.
"이제는 총과 수류탄이야. 도대체 총기들이 어떻게 해서 그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나?"
이중섭의 시선을 받은박민평이 머리를조금돌려 옆쪽에 앉은국방장관 김동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김동진이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비서실장인 윤성하가 조그맣게 헛기침을 했다.
"각하, 김원국을 잡으려는 수사망이 점점 압축되고 있습니다.
몇 시간 차이로 그자를 놓쳤습니다만,
신문과 방송으로 그자를 계속 찾고 있으니 만치 ‥‥‥‥
"그것이 벌써 몇 달째란 말인가?
그자는 정권 자체를 농락하고 있어. 국가의 위신이 걸린 문제야."
"경찰 병력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민평이 머리를 들었는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국방부의 도움을 받으면 어떨까 해서,수도권의 군대 병력을 일부만이라도‥‥‥‥
"안돼요."
무우를 자르듯이 싹뚝 말을 끊고 나선 것은 이제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총리인 장희만이다.
그는 주름진 얼굴을 들어 똑바로 이중섭을 바라보았다.
"각하, 군대는 안됩니다.
국민들이 불안해할 것이고 치안 문제로 국방 의무를 지고 있는 군인을 동원시킬 수는 없습니다. "
"옳은 말씀이오 그럴 수는 없지 . 다른 나라들도 불안한 눈으로 볼 것이야."
이중섭이 머리를 끄덕이자 김동진이 헛기침을 했다.
"만일 군대를 동원한다면 방위의 공백이 생깁니다.
군인은 그저 국방에만 전념하도록 해야 합니다. "
다시 궁지에 몰린 박민평이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씻었다.
강한석이 상체를 세우고는 이중섭을 바라보았다.
그는 유일하게 이 자리에 참석한 입법부 의원이었는데
그가 여당 대표라는 직함도 있었지만 이중섭이 참석케 한 것이다.
"각하, 김원국과 그의 일당에 대한 현상금액과 포상급수를 올리고
그들의 사진을 텔레비전에 방영시키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자들은 기반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터여서 곧 잡히거나사살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
이중섭이 잠자코 있었으므로 강한석이 말을 이었다.
"행정부 내에 김원국의 옹호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부를 혼란에 빠뜨리려고 어떤 공작을 하였는지도
백일하에 드러났고 도태 되었습니다
이제 이 일로 더이상 각하께 심려를 끼쳐 드리지 않겠고
모두 경제 부흥만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
회의를 마치고 청와대의 현관을 나오던 강한석은 계단 아래에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장희만 총리에게 다가갔다.
"먼저 가신 줄 알았습니다, 총리님."
웃음 띈 얼굴로 강한석이 말하자 장희만도 주름진 얼굴을 폈다.
"잠깐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요,
괜찮으시다면 제 차를 타고 같이가시면서‥ 모셔다 드리지요."
"총리께서 말씀하시는데 제가 어찌‥‥‥
자신의 승용차는 뒤를 따르게 하고 강한석은 장희만의 차에 함께 올랐다.
예순다섯 살로 강한석보다는 5년 위인 장희만은 정통 행정관료 출신이었다.
지난 정권 때 부총리를 끝으로 장희만은 관직을 떠났다가
이중섭에 의해 총리로 발탁되었는데 대통령은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을 높게 산 것이다.
총리의 관용차가 정문을 지나자
부동 자세로 서 있던 경비 경찰들이 일제히 경례를 올려 붙였다.
"아까 하신 말씀 중에서 김원국 일당을 옹호했던 세력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
장희만이 머리를 돌려 강한석을 바라보았다.
주름 투성이의 검은 얼굴에서 삼각형 눈이 이쪽을 향해져 있다.
"그 세력이란 전 안기부장 이찬형씨를 말하신 것이지요?"
"그렇습니다,총리님 ."
강한석이 부드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경찰 내부에도 있었습니다. 총경급이었는데 ‥‥‥
"그런데 그런 말씀, 각하를 모신 자리에서 하셔도 될까요?
더구나 일국의 장관들이 여럿 있는데."
강한석이 머리를 돌려 장희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끝을 천천히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총리님, 이미 공직을 떠난 사람을 매도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찬형씨가 김원국을 옹호하는 바람에 우리 정부는 김원국 문제로
지금까지 머리를 썩히고 있지요.
이제 정부는 일사분란하게 이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 드린 겁니다. "
"결국은 각하께 드린 말씀이로군요."
"그리고 총리께서도 아셔야 할-것 같아서."
"김원국의 테러는 당연히 진압되어야 하고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이 석연치 않아요."
"석연치 않다니요?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는 마당인데."
"안기부의 정보를 가볍게 여기시는 것 같군요, 대표께서는."
이제는 강한석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승용차는 종합청사 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총리님, 안기부의 수장이 주관적인 해석을 내릴 경우,
그것이 얼마나 큰 부작용이 온다는 것을 지금 보고 계시는 겁니다. "
"대표님, 나는 오랜 공직 생활에서 얻은 교훈이 있습니다.
타는 사람을 믿지 않고 자료를 믿습니다.
그것으로 판단하는 버릇이 들었지요.
안기부에서 나에게 넘겨진 자료는 흠 잡을 곳이 없었습니다. "
"안기부에서 말입니까?"
상체를 세운 강한석이 장희만을 돌아보았다.
눈샙이 찌푸려진 표정이었다.
장희만이 가볍게 머리를 』1덕였다.
"안기부는 대통령 직속 기관이지만 행정부 소속이기도 하지요.
행정부 수반인 내게 김원국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는 것이 하나도 이상 할 것 없습니다. "
"대통령 각하께도 보고했겠지요?"
"당연하지요."
강한석이 입을 다물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고서를 올린 것은 이찬형일 것이다.
부장으로 있는 안길중은 아직 업무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찬형은 떠나면서 마지막 발악을 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대표님을 생각해서 말씀 드린 겁니다.
각하께서는 아까 아무 말씀 없으셨지만‥‥‥‥
장희만의 말에 강한석이 머리를 돌렸다.
"말도 안되는 소립니다.
이찬형씨나 고성섭이는 사건을 비뚜름히 보고 있어요.
얼토당토 않게 군부를 개입시켰습니다 "
"군부를 개입시켰다고 무조건 기피하거나 덮어 두는 것은 더 큰 화근을 남기는 겁니다.
군부라고 거창하게 말씀하시지만 실은 몇 명의 불순한 군인이지요.
하찮은 자들입니다. "
장희만의 퍼뜩이는 시선이 강한석을 스치고 지났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것을 과대평가 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결말은 나 있는 겁니다. 총리닝."
자르듯이 강한석이 말하자 장희만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지긍 당장 정부의 입장은 그렇지요.
하지만 나는 불안한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는 불씨 위에 가마니를 덮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종합청사가 눈앞에 다가왔으므로 강한석은 앞자리를 두들겨 차를 세웠다.
"총리님, 그럼 다음에 자세한 말씀을 나누기로 하치요."
"예, 언제든지 ."
장희만의 얼굴 표정은 주름살 투성이어서 언뜻 드러나지 않았다.
"일어나, 어서 ."
두 무릎에 얼굴을 대고 앉아 있던 이재영이 머리를 들었다.
담당 형사가 쇠창살 사이로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조사할 것이 있어 어서 나와."
자리에서 일어선 이재영은 그가 열어 주는 철창문을 빠져 나왔다.
"손 이리 내 ."
형사의 손에는 수갑이 쥐어져 있었다
그에게 두 손을 내밀며 이재영은 형사실 안을 둘러보았다.
점심때가 가까워진 형사과 안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타자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고 이곳저곳에서 거친 말소리가 났다.
문에서는 대여섯 명의 피의자들이 형사들에게 끌려 들어왔다.
"자, 가지."
그녀의 어깨를 밀어 문 쪽으로 향하면서 형사는 말했다
"오늘은 조사가 조금 길 거야."
상관없는 일이었으므로 이재영은 잠자코 형사과를 나왔다.
현관 앞마당에 내리쬐고 있는 햇볕을 보자 눈이 부신 이재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당 구석의 화단에 시든 코스모스 몇 그루가 늦가을의 햇볕속에 늘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주위로 서너 명의 사내 들이 다가왔다.
"내일 아침 9시까지요. 시간 지켜야 됩니다. "
형사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말하자 단정한 양복 차림의 사내가 한걸음 다가섰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 지킬테니까."
"내일 점심때에는 검찰로 넘겨야 하니까 그렇게 아시고."
" 글쎄 염려하지 마시라니까."
형사가힐끗 이재영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현관 앞에 주차되어 있는 승용차에 올랐다.
" 당신 왜 고집이 세다고 하던데."
단정한 차림의 사내가 옆자리에 앉어며 말했다.
그녀는 뒤쪽 자리에 양쪽으로 사내들을 끼고 앉혀졌다.
승용차는 경찰서를 빠져 나와 차도로 들어서더니 속력을 내었다.
" 김원국의 거처와 그놈이 누구와 함께 있는가.
숫자는 몇 명인가. 알고 있는 것만 말해주면 돼.
그러면 당신의 형은 가벼워질 수 있어. 아니. 협조해 준다면 아주 형을 없애 줄 수도 ......"
"당신들은 누구에요? 안기부에서 왔나요? "
이재영이 묻자 앞자리에 앉았던 사내가 머리를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 이 여자. 조금도 겁내는 것 같지가 않구만."
옆자리의 사내가 말했다.
그의 몸에서는 코를 찌러는 듯한 독한 향수 냄새가 풍겨 왔다.
사내가 길쭘한 얼굴을 쳐들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요즘 경찰은 민주적 이라고들 하지. 하지만 그것은 경찰서 안에서야. "
사내가 손을 뻗어 이재영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몸을 비틀어 그의 손을 떨어내려 하였지만 두 손에 수갑이 채워진 데다가 양쪽의 사내들이
바싹 조여 앉은 터였어 이재영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것, 치우지 못해?"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차 안에 타고 있던 네 명의 사내가 일제히 웃었다.
"이봐, 경찰서를 떠났다고 하지 않았어? 우린 신사적인 사람들이아니란 말이다. "
사내의 손이 허벅지의 안쪽으로 더듬어 올라왔다.
스타킹 위였으나 손가락의 촉감이 찼고 뱀이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너희들 검찰에 가면 성폭행으로 고발할 거야, 두고 봐."
얼굴이 상기된 이재영이 두 다리를 잔뜩 오무렸으나사내의 손끝은 끝내 팬티에 닿았다.
이제는 두 다리로 사내의 손을 죄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성폭행이라, 그것도 괜찮군."
"네놈들이 경찰이냐?"
"그럼, 경찰이지 않구.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경찰이지.
너같은 흥악범의 일당으로부터 말이다. "
사내는 아침에 양파를 먹었는지 심한 입냄새가 났다.
두 무릎에 힘이 풀려 가기 시작하자
사내의 손끝이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깊은 부분을 건드렸다.
이재영이 머리를 들어 사내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얼굴에 침벼락을 받은 사내가 흠칫 머리를 뒤로 젖혔다.
"이런 망할 년이 ."
앞자리에 앉은 사내가 흥흥거리며 웃었다.
"개자식아, 날 우습게 보지 마. "
이재영이 소리치자 사내의 손바닥이 날아와 그녀의 뺨을 쳤다.
"이 쌍년!"
다시 한 차례의 손바닥이 날아 왔으나 이재영이 머리를 숙이자 콧등을 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자신의 코에서 따뜻한 것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야,코피 난다. 닦아 줘라."
앞자리의 사내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옆쪽의 사내가 휴지를 찾아 이재영의 코에 대었다
"놔! 이 자식들아!"
이재영이 거칠게 머리를 젓자 휴지에 묻은 코피가 얼굴에 범벅이 되었다.
"에이 씨발."
향수와 양파 냄새를 풍기던 사내가 휴지를 꺼내어 얼굴의 침을 닦았다.
코피 소동에 김이 빠진 모양이었다.
승용차는 시내를 빠져 나가 강변도로로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30미터쯤 뒤쪽을 따라가는 승용차에 타고 있던 최지수는
휴대폰을 꺼내고는 다이얼을 눌렀다.
신호가 가자마자 저쪽은 금방 전화를 받는다.
"형님, 접니다. "
"그래, 지금 어디냐?"
안정태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 왔다.
"지금 강변도로로 들어섰습니다. "
"어때? 상황이 ."
최지수는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없습니다, 저희들 빼놓고는요."
"그래도 조심해, 몇 바퀴 돌고 와."
"알겠습니다 "
스위치를 내린 최지수는 앞쪽을 달리는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됫자리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이재영의 머리칼이 보였다.
조금 전에 옆에 앉아 있던 부하가 손찌검을 하는 것이 보였는데
이재영이 반항했던 모양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안정태는 머리를 들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소파에 앉아 있던 이혜경이 두 무릎을 오무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 춤을 그만 추고 싶어요."
"왜? 인기가 좋다던데?"
"인기가 좋으면 윌 해요? 맨날 똑같은 일인데, 앞길도 보이지 않고."
"뭐, 다른 일 할 것 있나?"
담배함에서 담배를 꺼내 물면서 안정태가 물었다.
이혜경은 이제 공공연한 그의 애인이었다.
호텔 안은 물론이고 간부급부하들 중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혜경이 버릇처럼 머리칼을 귀 뒤쪽으로 쓸어 넘겼다.
"다른 일도 하기 싫어요."
"그럼 뭐 하려구?"
담배 연기를 내뿜자 연기는 그녀의 가슴께에 부딪쳐 산산이 갈라졌다.
이혜경의 시선이 똑바로 부딪쳐 왔다.
"집에 들어앉고 싶어요."
"요컨대 살림 차리고 싶다는 말이군 "
"넌 내가 좋아하는 몸을 가졌어. 너와 잠자리를 같이하면 원기가 나. 휠적을 느편단 말이다. "
"너와 섹스를 할 때는 꼭 호텔에서 했지 그렇지?"
이혜경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갑자기 내 방으로 찾아와서 일에 신물이 나니까 살림을 차리고 싶다고 하다니,
이거 놀라지 않을 수가 없군,"
안정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으나 이혜경은 따라 웃지 않았다.
"너, 그 전에도 두 번 살림 차렸었지?
어느 놈인가는 잊었지만 일 년 가랑 살았지. 그렇지?"
"싫으면 싫다고만 말해 주세요,사람을 고문하지 말고."
하얗게 굳어진 얼굴로 그녀가 말하자 안정태가 다시 웃었다
"영동에 카프리 클럽이라고 있어. 너도 들어 보았을 거다.
삼류이기는 하지만 이번에 내부 공사를 끝내고 오픈한 곳인데‥‥‥‥
"그곳으로 가서 일해. 아마 인기가 좋을 거다 "
번쩍 머리를 치켜든 이혜경이 그를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아랫입술을 힘주어 깨물었다.
"내가 영업부장한테 말해 놓을테니까 오늘 밤부터 당장 옮겨라."
"저한테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혜경의 말소리가 떨려 가더니 목이 메는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딸꾹질을 했다.
"저는 부시정설이 저를, 그래서‥‥‥‥
"네 잠자리 맛이 괜찮다고 했어. 잠자리 뿐이란 말이다 "
이윽고 이혜경의 눈에 가득 찼던 물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딴짓 하지 말고, 알았지?그렇게 했다가는 영업부장들한테 혼날 거야."
안정태의 말소리는 부드러웠고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그렇지, 카프리 클럽에서 전속 계약금을 왜 받을 수 있을 거다. "
"전 안 가요, 아무데도."
머리를 든 이혜경이 소리치듯 말했다
"집에 가겠어요. 일 안해요."
"그럴 수 없어 "
안정태가 머리를 저었다.
"내가 여자한테 빠질 놈이 아니라는 것을 네가 보여 줘야겠다.
네가 하도 소문을 내어 놓아서 말이야."
손을 뻗어 벨을 누른 안정태가 찬찬히 이혜경을 바라보았다.
"반항을 하거나 또는 내 험담을 만들어 대거나 하면 안된다.
그때는 어려운 일이 생길지 몰라.
이제까지의 인연을 생각해서 내가 미리 알려 주는 거야."
문이 열리더니 비서실의 부하가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응, 이 여자를 오늘 밤부터 카프리 클럽으로 옮기게 해라.
그쪽 영업부장에게 인계하도록."
"네, 부시정설 . "
부하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힐끗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 보았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도록 해. 그리고 입조심도 시키고 말야."
"네 , 부사장님 ."
이해경이 두 손으로 양쪽의 팔을 엇갈려 감쌌다.
두 눈이 안정태를 향해져 있었으나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데리고 나가."
부하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이해경이 머리를 들어 부하를 올려다보았다.
눈물 한줄기가 눈가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정기욱이 사무실로 들어서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복도의 한쪽 구석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와 시선이 마주친 것이다.
머리를 돌린 정기욱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은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책상 위에 놓인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는 수화기를 쥐었다.
"여보세요."
"저, 주성택이올시다. 어떻게 할까요? 제가 지금 사람을 보낼까요?"
"10분쯤 후에 보내. 그런데 ‥‥‥‥
정기욱이 수화기를 귀에 대고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십여 개의 업체들을 관리하는 데다가 유통 회사도 매출액이 급신장을 하고 있었다.
그에 걸맞게 꾸며진 사장실이었다.
그는 헛기침을 했다.
"요즘 사정이 좋지 않아.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우리 사정 말입니까? 아니면 정 사장님 사정이오?"
정기욱의 이마에 금방 힘줄이 솟았다.
"이봐,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알고 있다마다요. 그러시다면 그냥 돌아가지요. 그럼
"이봐, 잠깐 기다려 "
저쪽이 마악 전화를 끊을 기색이었는지라 정기욱이 버럭 소리를 쳤다.
"내가 이번 한번은 준비했지만 다음에는 곤란하단 이야기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최선을‥‥‥‥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지요."
"지금 사람을 보내 ."
수화기를 내려놓은 정기욱은 방의 구석에 놓여진 금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아래쪽에서 묵직한 가죽 가방을 집어 든 그는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복도에서 얼굴을 본 사내는 김칠성의 부하인 주성택이다.
며칠 전엔 김철성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부탁하는 연락이 왔었고 정기욱은 선뜻 승낙하기는 했다.
그러나 체면과 명예를 제일로 여긴다는 김원국의 조직이 거지처럼 손을 벌린다는 것에 대해서
연민과 함께 경멸의 감정이 일었고 그보다 앞선 감정은 불안감이다.
이제 마지막 숨을 쉬고 있는 김원국의 조직과 협조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기만 하면
이쪽은 하루아침에 끝장인 것이다.
책상 위에 놓여진 가죽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기욱은 이맛 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자신은 그들에게 협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한번 잡혀 가고 나거 협박을 당해 그렇게 된 것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와 협조해 본 적은 없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부하가 얼굴을 내밀었다
"사장림, 조카 되시는 분이 찾아왔는데요. 약속하셨다고 합니다 만
"들여보내."
부하가 사라지고 잠시 후에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양복 차림의 사내가 방으로 들어섰다.
불안한 듯 눈동자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있는 보통 체격의 사내였다.
"저어 ‥‥‥ 저는 심부름을 왔기 때문에 ‥‥‥‥
주춤거리며 다가온 사내가 목소리를 떨었다.
"여기서 가방을 주신다고 했는데요. 그걸 받으러 왔는데요."
"누가?"
정기욱이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누가 시켰는데 ?"
"주성택이라는 분이, 금방 전화를 하셨다고
"그 사람 잘아나?"
"아니,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자낸 뭘 하는 사람이야?"
"예, 저는 지금은 놀고 있습니다 일당 받고 전단을 나눠 주기도 하고, 또‥‥‥‥
"주성택은 어디에 있어?"
"예, 길 건너편의 제과점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
입맛을 다신 정기욱은 가방을 들어 사내에게 건네 주었다.
"이 일 하는 데 얼마 받았어?"
"예, 저 ‥‥‥ 10만 원 받았는데요."
"많이 받았구만 이렇게 쉬운 일에 말야."
가방을 움켜쥔 사내가 눈을 굴리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가봐. "
정기욱이 턱을 치켜올리자 사내가 발소리도 내지 않고 급히 방을 빠져 나갔다.
자리에서 일어선 정기욱이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길 건너서 제과점의 간판은 보였지만 안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보인다고 해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저께 밤에는 김원국의 일당이 구찌 클럽을 완전히 박살을내버렸다.
영업부장으로 있던 하명길을포함한 여덟 명이 시체가되었고
수십 명이 중상을 입은 끔찍한 사건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앉은 정기욱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김원국의 잔당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머리들은 펄펄 살아 있는 것이다.
그들의 힘은 아직도 무시할 수가 없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2억 원은 큰돈이기는 하지만 목숨값에다 비교하면 하찮은 돈이다.
지금도 하루에 2천만 원 정도의 수익금이 걷혀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고서의 사본이라도 있을 것이 아니오?그것이라도 가져와요."
안길중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나를 허수아비로 취급한 것이나 다름없어.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렸어야지 ."
"부장님, 그건은 지난 부장님이 결재하신 시힝입니다.
부장님을 허수아비로 취급했다는 말씀은 지나치십니다. "
머리를 든 고성섭이 낮으나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극비 사항이라 저희들은 사본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말도 안되는 소리 , 모든 보고서는 필름으로 보관시키도록 되어 있을탠게 ."
"부장님의 지시로 없앴습니다. "
안길중이 눈을 치켜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도 한때는 통일원의 차관까지 지내 보아서 행정 관료의 체질을 알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이쪽은 정보 기관이다.
그리고 한때는 힘과 권력의 상징이었던 곳이었다.
침을 끌어모아 삼킨 안길중이 길게 콧숨을 뿜어냈다
"고 차장, 나는 더이상 안기부를 그릇된 방향으로 끌고 가지 않겠소.
물론 앞으로 그런 일도 없겠지만."
"내가 책임자로 와 있는 이상 당신이 대통령 각하와 총리께 어떤 내용으로
김원국의 사건을 조사, 보고했는지 알아야겠소. 알아듣겠소?"
"알겠습니다. "
"내일까지 정확한 내용으로 보고서를 다시 작성해 오시오."
"내일까지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 보고서는 부장님 전결로 끝날 것이겠군요.
이미 각하께는 보고서를 올렸으니 말입니다. "
안길중이 고성섭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눈을 여러 차례 깔박였으나 시선은 돌리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이윽고 안길중이 시선을 떼며 말했다
"결정은 내가 한단 말이오, 고 차장."
"물론입니다, 부장님."
"김원국은 곧 체포될 것이오. 발악하고 있지만 며칠 가지 못해."
"어제의 회의에서는 어펀 결정이 있었습니까?
제가 참고로 알고 있을 내용이라도‥‥‥‥
"김원국을 빨리 잡으라는 말씀이셨소. 더이상 사회에 해를 끼치면 안된다고."
그가 말을 멈추자 한동안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고성섭이 머리를 들어 안길중을 바라보았다.
"그 말씀뿐이었습니까?"
"중요한 건 없소."
"김원국에 대한 보고서, 그것은 누구한테서 들으셨습니까? 각하입니까?"
"이봐요, 고 차장."
다시 안길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신, 태도가 불손해. 아까부터 참고 있었지만 이런 태도는 용납할 수 없어."
"각하와 총리께 극비리에 전달된 보고서입니다.
두 분 외에는 부장님께 말씀하실 분이 없습니다. "
고성섭의 말소리는 낮았으나 그의 시선은 똑바로 안길중을 향하고 있다.
"부의 책임자인 부장님으로서 그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
"당신에게는 말할 수 없어."
"저를 믿지 않고 계시는군요."
"당신이 행한 일의 결과요."
"그런 부장님께 제가 어떻게 충실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 명령을 거역하는 거야?"
"저를 파면시키겠습니까?"
"미리 준비하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군 "
"제가 남아 있는 것은 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위아래에서 정보가 차단되고 부장님 말씀대로 허수아비 생활을 하고 있지요.
이젠 부의 업무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습니다.
부장님이 결단을 내리시기 쉬운 시점of 되었지요."
"내일까지 보고서를 다시 작성해 와요."
"알겠습니다 "
자리에서 일어선 고성섭은 그에게 머리를 숙여 보인 다음 방을 나섰다.
긴 복도를 걸어 오른쪽 끝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다가가는데
계단의 난간에 기대 서 있던 사내가 몸을 돌렸다.
수사관인 남병준이었다.
고성섭이 그를 스쳐 자신의 방으로 들어 서자 남병준이 잠자코 그의 뒤를 따라왔다.
서류를 책상 위에 던져놓은 고성섭이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남병준이 한걸음 다가왔다.
"차장님, 연락했습니다. "
"수고했다. "
"그럼 저는‥‥‥‥
"너희들은 쉬어, 이제는."
"알겠습니다. "
남병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40대 초반의 그는 군시절부터 안기부로 옮겨서까지 10년이 넘도록 함께 생활한
고성섭의 심복이다.
고성섭은 자리에 앉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부의 대폭적인 인사이동이 있었고 이찬형이나 고성섭의 라인이 라고 찍힌 부원들은
가차없이 지방이나 보직이 없는 상태로 전출되었다.
남병준도 제3과에서 무보직 상태로 발령이 났는데 전혀 개의치 않고는
아예 노골적으로 고성섭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고성섭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지만 남병준이나 몇몇 부하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사직서를 던지는 것 밖에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머리를 의자에 기댄 고성섭의 눈에 시계가 보였다 오후 6시 5분 전이었다
"이거, 저녁때가 다 되는군."
사내 한 명이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짜증스럽게 말했다.
"말로 구슬려서는 안된다고 했잖아? 이년한테 뜨거운 맛을 보여 줘."
이제는 구슬리고 윽박지르고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방안에는
모두 다섯 명의 사내가 모여 있었는데 수시로 들락거려서 모두 몇 명 인지 알 수 없었다.
이재영은 앞으로 다가선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땅딸막한 몸매에
눈꼬리가 매섭게 치켜올라간 사나운 인상의 사내였다.
"야 이년아, 이제까지 점잖게 대해 주니까 우릴 가지고 놀아?"
불쑥 팔을 뻗은 사내가 이재영의 블라우스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블라우스의 단추가 떨어져 나가면서 옷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속에 받쳐 입은 셔츠의 깃을 움켜쥔 사내는 됫 호주머니에서 선뜻 칼을 뽑아 들었다.
셔츠의 벌어진 틈 사이로 칼날을 들이대 아래로 내려긋자셔츠가 둘로 갈라지면서
블래지어로만 가린 상반신이 드러났다.
이재영은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사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사내의 콧잔등에 조그만 땀방울이 배어 나와 있었고 눈 밑에는 왜 큰 점이 있다.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사내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야, 그년 아래도 벗겨!"
뒤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났다.
벽에 의자를 기대어 놓고 이제까지 입을 열지 않던 사내였으나
이재영은 그가 사내들의 두목급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반신에 걸쳐진 블래지어마저 떨어져 나T으므로 of 재영은 젖가슴을 드러낸
알몸이 되었으나 두 손이 의자에 됫결박이 되어 있어서 움직일 수도 없다.
사내가 스커트의 앞쪽에 손가락을 쑤셔 넣더니
앞쪽으로 불쑥 잡아 당기면서 칼날을 집어 넣었다.
옷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스커트는 두 동강으로 잘라져 나갔다.
"햐, 이년 몸매는 끝내주는군."
뒤쪽의 어느 사내가 말했으나 이재영은 이를 악문 채 앞쪽의 사내를 노려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팬티가분리되어 떨어져 나가자그녀는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그년을 바닥에 눕혀라. 밤새도록 뜨거운 맛을 보여 줄테니까."
뒤쪽의 사내가 다시 말했고 이재영은 차디찬 사무실 바닥에 눕혀졌다.
무의식중에 두 다리를 오무렀으나다가온사내들에 의해서 거칠게 양쪽으로 벌려졌다.
이재영은 눈을 치켜뜨고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사내 한 명은 머리 위에서 어깨를 눌렀고 두 명이 양쪽 발목을 잡아 누르고 있다.
불빛을 가리면서 또 다른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검찰로 송치된다고 믿고 있는 모양인데, 우린 상관하지 않아.
네가 사고로 죽었다고 하면 그만이다.
네가 잡혔다는 것을 비밀로 하고 있거든."
"죽여라, 이 자식아."
"김원국이한테 충성을 바칠 이유라도 있니? 네가 그놈 정부라도 돼?"
"죽여, 이 새끼야."
"네 그것을 걸레로 만들어 주마."
"그러림 , 이 더러운 자식아, "
위쪽에 떠 있던 사내의 얼굴이 갑자기 부풀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사내가 한걸음 뒤로 물러 섰으므로 이재영은 불이 눈부신 듯 눈을 찌푸렸다.
"한 명씩 교대로 해라. 독한 년이다. "
이재영은 이를 악물고는 눈을 감았다.
온몸이 환한 불빛에 드러났고 자신의 몸 위로 쏟아지는 사내들의 눈길은
마치 송곳처럼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러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악문 이의 힘을 풀자 이가 마주치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그녀는 다시 잇몸에 힘을 주었다.
귀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겨드랑이에 사내의 팔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퍼뜩 눈을 뜨자 자신의 옷을 던 사내였다
사내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므로 이재영은 저도 모르게 몸을 틀었다.
"허, 이년이 급한 모양이군."
다리 쪽에서 사내 한 명이 들뜬 소리로 말했는데 방안은 묘한 흥분감으로 뒤덮여 있었다.
앞장서 가던 장우길이 걸음을 멈추고는 빌딩의 벽에 붙어 섰다.
뒤따라 간 김원국과 오함마가 그의 옆에 섰다.
"저기,카 센터의 뒤쪽에 있는 가건물입니다,여기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장우길이 길 건너편의 카 센터를 눈으로 가리켰다.
저녁 무렵이어서 불이 켜진 카 센터 안에 서성대는 사내들이 보였다.
마당에도 서 너 명의 사내들이 세워 둔 차 주위에서 얼정거리고 있었는데 종업원 같지가 않다.
"뒤쪽에 가건물이 있습니다. 뒤로 돌아가는 샛골목이 있는데 담장이 높습니다. "
카 센터는 길을 건너서 왼쪽으로 50미터쯤 떨어진 곳인 있었다
장우길은 먼저 정찰을 마치고 왔는데 안기부 요원의 자세한 설명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무섭의 일당들이 경찰에서 이재영을 uun내어 오는 것이 안기부의 정보망에 걸린 것이다.
그들은 김원국의 추적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뒤를 노련한 안기부 요원들이 따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안기부에 남아 있는 고성섭과그의 직속 부하들의 김원국에 대한
마지막 호의가 될지도 몰랐다.
"뒤쪽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앞쪽에 있는 놈들은 열 명쯤 됩니다. "
장우길이 김원국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이번 작전에 김원국이 나선 것에 흥분하고 있었다.
김원국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에게서 연락을 받은 지 다섯 시간이 지났다.
"차는 카 센터의 아래쪽에 대기시키도록 해라.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말이다. "
"알았습니다, 형님 ."
장우길이 몸을 돌려 뒤쪽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쫓던 김원국은 골목 안의 서점 앞과 가게의 입구등에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서 있는 부하들을 보았다.
장우길이 서점 앞의 사내들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지시하고는 다시 이쪽으로 뛰어왔다.
"함마, 너는 길을 건너서 카 센터를 곧장 쳐라,
나는 우길이하고 뒤쪽으로 돌아갈테니 까. 앞으로 10분 후다. "
김원국이 말하자 오함마가 머리를 끄덕였다.
"세 명만 데리고 가겠습니다, 형님. "
오함마가 부하 세 명을 연의 꼬리처럼 뒤에다 달고 행인들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사당동 사거리에서 봉천동 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다.
퇴근 시간이어서 인도에는 행인들로 가득했는데
그것이 몸을 숨기기에는 편리했지만 막상 행동할 때에는 커다란 장애가 된다.
우왕좌왕하는 인파에 걸려 뛰기에도 힘들고 애꿎은 사람을 다치게 할까봐
무기를 함부로 쓸 수도 없는 것이다.
김원국은 장우길의 뒤를 따라 횡단 보도를 건넜다
수십 명의 행 인들에 섞여 있었으므로 이무섭의 일당들이 이쪽을 발견할 확률은 적을 것이다.
짙어지는 어둠 속에 오함마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카 센터가 30미터쯤 앞에 보이는 곳에서 골목 안으로 꺾어져 들어갔다.
골목에도 행인이 많았고 동네 아이들도 가게 앞에서 재잘거리고 있다.
20미터쯤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왼쪽으로 꺾어지는 샛길이 나왔다.
가로등도 없고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 꽉 차버릴 정도의 좁은 골목이었다.
장우길이 앞장을 섰고 김원국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김원국의 뒤를 두 사람의 부하가 긴장한 몸짓으로 따라 붙고 있었다.
행인들 사이에 묻혀 카 센터 앞을 지나치면서 오함마는 눈만을 돌려 옆쪽을 바라보았다.
자동차가 두 대 세워져 있었는데 차 주위로 네 명의 사내가 모여 서서 잡담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그러나 쉴새없이 이쪽에다 시선들을 던지고 있는 것이 감시하는 역할이다.
사내 한 명의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을 느긴 오함마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얼굴을 돌렸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머리칼에는 반쯤 백발이 섞이도록 분장을 하였으니
만치 자세히 보지 않으면 60대의 노인이다.
오함마는 20미터쯤 걷고 나서 길가의 가게 앞에서 멈추어 섰다.
바깥 쪽의 창고 안에 한 명이 있었고 안의 사무실에는 다섯 명쯤이 모여 앉아 있다.
그가다시 몸을 돌리자 30미터쯤 앞쪽에 있는 길가의 토큰 판매소 앞에 서 있던
부하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은 시종일관 오함마의 행동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함마는 천천히 그들을 향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들과의 사이에 카 센터가 있는 것이다.
양쪽에서 동시에 치고 들어가면 되었다.
점퍼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그가 세 걸음쯤 걸었을 때였다.
오함마는 갑자기 눈을 치켜뜨고는 허리를 폈다
부하들의 등뒤로 달려드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은 길 안쪽의 구두가게 앞에서,
토큰 판매소 옆의 봉어빵 노점 옆에서 갑자기 달려들었다.
오함마는 무의식중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바로 앞쪽의 버스 정류장에서 그쪽을 향해 뛰어가는
두어 명의 사내들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경찰이다.
토함마는 이를 악물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잠복하고 있던 경찰들이 부하들의 긴장한 동작들을 보고는 덮치는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이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부하들은 악을 쓰며 대들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십언 명이 넘는다.
한명은 이미 땅바닥에 엎어져 있었는데 서너 명의 경찰이 깔아 뭉개고 있다.
그때 갑자기 총소리가 났으므로 사람들이 물고기가 흩어지듯 사방으로 튀었다.
오함마는 사람들 사이로 뛰면서 카 센터를 향해 수류탄을 힘껏 던졌다.
검은 쇳덩이는 직선으로 날아갔는데 아직 아무도 눈치재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며 달려온 아낙네 하나가오함마와부및치며 넘어졌다.
총을 쏜 것은 경찰이었고 총에 맞은 부하 한 명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참이다.
이제 인도에 남아 있는 것은 경찰들뿐이었다.
행인들은 모두 빌딩 그늘에 몸을 숨기거나 오함마와 아낙네처럼 땅바닥에 넘어져 있다.
그때 유리창을 뚫고 들어간 수류탄이 엄청난 폭음을 울리면서 폭발 했다.
경찰이 부하들과 격투를 벌이자 주변에서 얼정거리던 사내들은
모두 카 센터의 사무실로 피해 들어가 있던 참이었다
유리창의 파편과 나뭇조각들,
그리고 불덩이들이 길로 쏟아져 나왔고 차도를 달리던 차량들이 연쇄 충돌을 하면서 멈추어 섰다.
그러자 뒤쪽에서 차량들이 달려와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앞차의 꽁무니를 들이받았다.
경찰들은 엄청난 소란에 휘말려 넘어 졌다가 겨우 일어났으나 충돌을 피하려는 차량 한 대가
인도로 뛰어 들어오자 이제는 차도로 흩어졌다 도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행인들은 서로 다투며 뛰어 달아났고 부서진 차에서 나온 운전자들도 차를 버려 두고 도망쳤다.
오함마는중년의 여자와 함께 길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주변에도 아직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서너 명 있다 카 센터는
이제 화염에 펀싸여 있었다.
불길 속에서 사람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폭음이 들리자 김원국은 장우길의 어깨를 딛고는 담장을 뛰어 넘었다.
이제까지 담장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뒷마당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그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앞쪽에서 사내 한 명이 달려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손에 쥐어진 날이 횐 칼이 보였다.
김원국은 발이 땅에 닿자마자 몸을 굴리면서 발길로 사내의 다리를 후려쳤다.
사내가 뛰는 반동까지 겹쳐서 땅바닥에 두 손을 짚는
순간에 튕기듯 일어난 김원국은 다시 발끝으로 사내의 턱을 찼다.
털컥, 소리와 함께 턱이 돌아간 사내는 하늘을 보면서 반듯이 넘어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카 센터는 계속 불타고 있었다.
뒷마당에는 콘테이너로 만든 가건물이 있었는데
김원국이 뛰듯이 다가가자 문이 열리더니 두 명의 사내가 뛰쳐나왔다.
그들은 다가서는 김원국을 보고는 주춤거렸으나 이미 거리는 3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김원국은 다시 한걸음을 크게 뛰면서 몸을 도약시켰다.
그러자 가건물에서 사내 한 명이 다시 뛰쳐나왔다.
두 손으로 허리춤을 움켜쥔 이상한 모습이었다.
김원국의 발길이 앞장선 사내의 가슴을 찍자
사내가 가슴에 담겨 있던 공기를 짧게 뱉으면서 널브러졌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사내의 손에서 하얀 불꽃이 보이면서 요란한 총소리가 났다.
몸을 굴린 김원국이 다리를 휘둘러 사내의 팔을 밑에서 차올렸다.
사내의 권총이 손에서 떨어지는 순간 벌떡 일어선 김원국이 주먹으로 사내의 눈 사이를 찍었다.
눈알이 튀어 나온 사내가 머리를 젖히며 넘어졌고 같은 순간에 겨우 바지춤을 올린 사내가
얼굴을 싸취며 비명을 질렀다.
장우길이 던진 돌멩이에 얼굴을 맞은 것이다.
김원국은 가건물의 문을 차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총소리가 나면서 팔의 바깥 부분에 뜨거운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방바닥으로 몸을 굴리자 다시 총소리가 났다.
이제 놈과의 거리는 2미터도 되지 않는다.
놈은 구석에 붙어 서 있었는데 사이에 의자 한 개와 희끗한 것이 놓여져 있다.
의자의 다리를 집어 놈에게로 던지려는 순간에 바깥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세 발을 연속으로 쏘아 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머리를 든 김원국은
손에 든 의자를 내려놓고 상반신을 세웠다.
사내가 벽에 등을 기댄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고 있었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시선은 이쪽을 향하고 있었으나 죽은 생선의 눈빛이었다.
김원국·은 두 팔로 바닥을 짚은 채 눈앞에 있는 물체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꼼짝하지 않고 있어서 의자와 같은 정물로 생각하였던 참이다.
그곳에는 알몸의 이재영이 누워 있었다.
얼굴은코피가터져 말라 엉망이었으나 두 눈은 한껏 치켜뜨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김원국은 그녀의 눈 끝에서 귀 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을 보고는
머리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장우길을 돌아보았다.
"옷을, 저놈들의 옷을 벗겨 와라."
"예, 형님 . "
권총을 손에 쥔 장우길이 몸을 돌렸다.
카 센터 쪽에서는 타오르는 불길에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불길에 막혀 이쪽으로의 진입이 어려운 것이 당분간 그들에게 여유를 주고 있다.
김원국이 이재영의 허리에 손을 넣어 일으켜 세우자
그녀는 잠간 어깨를 흔들었다.
두 손이 나일론 끈에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김원국이 우선 상의를 벗어 그녀의 상반신을 덮자 장우길이 다시 뛰쳐 들어왔다.
담을 넘는데 이재영은 몸을 움직이지 못했으므로 담 위에 부하 한 명이 올라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가 밖으로 내려놓아야 했다.
그들은 좁은 골목을 빠져 나와 직선으로 뻗은 골목의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 갔다.
큰길로 올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원국은 오함마가 이쪽을 기다리지 말기를 바랄 뿐이었다.
골목은 미로처럼 되어 있었고 폭음과 총성이 잠잠해 지자
구경꾼들이 몰려 나와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앞장선 장우길이 길을 헤치고 나갔다.
그 뒤를 이재영을 들쳐업은 부하가 김원국과 함께 따랐고
나머지 부하는 뒤쪽을 경계하며 뒤따랐다.
구불구불한 길을 20분쯤 헤쳐 나가자 김원국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뒤를 쫓는다고 해도 미로 같아서 찾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재영은 죽은 듯이 늘어진 채 부하의 등에 업혀서 가끔씩 헛소리같은 신음 소리만 뱉어냈다.
골목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이 그들을 힐끗거렸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아, 저기 있습니다. "
앞장서 가던 장우길이 소리치면서 손을 들어 앞쪽을 가리켰다.
골목의 끝 부분에서 지나치는 자동차의 불빛을 본 것이다.
이리저리 구불거리는 골목을 30달 가깜게 걸었으니
아무리 방향감각이 혼란되었다고 하더라도 카 센터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장우길이 먼저 뛰어나가 길가에 서서는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차선 도로에 차량들의 왕래가 빈번하였으나 어딘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김원국은 골목의 그늘에 서서 부하의 등에 업힌 이재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두 눈을 감은 채 그녀는 조그맣게 신음 소리를 내뱉고 있다.
한번 교대를 해 업었는데도 부하는 온 얼굴에 땀을흠뻑 적시고 있었다.
"저 , 저기 ‥‥‥‥
부하가 말하는 소리에 김원국이 머리를 들었다.
길가에 승합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장우길은 보이지 않았다.
"형님이 저 차에 탔습니다, 어서."
그들은 골목을 나와 승합차로 달려갔다.
승합차의 운전석에 장우길이 앉아 있었는데 운전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뒷자리에 김원국과 이재영을 업은 부하가 을라타자 장우길이 차를 발진시켰다.
"여긴 봉천동 달동네입니다. 저희들이 거기까지 내려갔습니다. "
장우길이 백미러를 바라보며 커다랗게 말했다
"이제 염려할 것 없습니다, 형님 ."
김원국이 창문을 열자 밤공기가 차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공기가 눅눅하게 습기를 띤 것으로 보아서는 눈이든 비든 내릴 것 같았다.
이재영은 남자용 바지와 점퍼를 걸친 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차가 흔들렸으나 몸을 바로잡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차 안에 실내등은 켜놓지 않았지만 건물에서 비치는 갖가지 색상의 불빛들이
그녀의 얼굴에 빛조각을 연달아 찍고 사라졌다.
김원국은 그녀가 눈을 뜨는 것을 보았다.
시선이 그를 향해져 있다.
"함마가 걱정이야, 우리와 뒷마당에서 합류하기로 했는데 오지 않았어, 아무도."
김원국의 말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그가 이재영을 쏘아보았다.
"너의 쓸데없는 고집으로 이런 일이 생겼다. 바보 같은 여자같으니‥‥‥‥
이재영이 다시 눈을 감았다
승합차는 이제 팔차선의 대로로들어 서더니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운전석 옆자리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아래쪽이다.
"잠자코 엎드려 있어!"
및자리에 탄 부하가 바닥을 보면서 외치자 소리가 그쳤다.
"내, 이 개새끼들을‥‥‥‥
이를 악물고 가건물에서 나오던 최순태가 땅바닥에 침을 뱉고는 주위를 쏘아보았다.
이곳저곳에 모여 있던 경찰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개새끼들, 옆에 골목이 있으면 그쪽에도 경비를 세웠어야지, 안 그래?"
그러자 경찰들이 머리를 돌렸으므로 최순태는 아예 가래를 긁어모아 땅에 뱉었다.
이재영을 뺏긴 것은 경찰 책임이 아니다.
이무섭의 일당에게 넘겨 주었다가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최순태는 입맛을 다셨다.
그들이 이재영을 하루만 빌려 간다고 했을 때 혹시나 하고
그녀를 데려간 장소에 경찰을 잠복시켰던 것은 잘한 일이었다.
어쨌든 김원국의 부하 한 명을 사살하고 다른 한 명을 생포한 것으로 포상을 받게 될 것이다.
나머지 한 놈은 수류탄 폭발 소동 때 도망쳐 버렸지만 아까울 것은 없다.
그러나 이재영을 긴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졌다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화가 나 있던 참이라 거칠게 응답하자 저쪽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데 ."
"0)0),01. "
최순태는 온몸을 굳히고는 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청장인 박동호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에게는 조금 전에 상황 보고를 해주었었다.
"이봐, 이재영이를 우리가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몇 사람 밖에 안돼 .
아직 언론이 눈치채지 못했어 그렇지?"
박동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담당 형사 몇 명하고 계장, 과장, 그리고 서장이
"내가 서장한테 이야기했어. 이재영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라고."
"예, 청장님."
"거기 있는 놈들한테도 그렇게 말을 맞추도록 해."
"네, 염려 마십시오."
전화가 끊겼으므로 최순태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다섯 명이 죽고 열두 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부상자 중에는 경찰관 두 명도 끼어 있었다.
수류탄의 파편에 맞은 형사가 한 명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놈들을 잡다가
갈비뼈 두 대가 나간 것이다.
소방차에서 뿌린 물 때문에 뒤쪽 마당은 물바다가 되어 있었으므로 최순태는
조심스럽게 발을 떼어 카 센터로 들어섰다.
슬레이트 지붕은 내려앉았고 내부는 폭발과 소방차의 물줄기로 쓰레기장이 되어 있었다.
형사들이 이곳저곳을 뒤지고 있었는데 마당 건너편에는 아직도 구경꾼들이 흩어지지 않고 있다.
"어이, 나 좀 봅시다. "
최순태가 부르자 한쪽 구석에서 형사들과 함께 서 있던 30대의 사내가 다가왔다.
짧은 머리에 다부진 인상의 사내였다. 안정태가 보낸 사내였다.
아마 보스급은 될 것이다
"애들한테 말이오, 여자를 데리고 있었다고 하지 말라고 해요.
이재영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잔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알TR소?"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어쨌든 면목없게 되었습니다. "
"조금 있으면 기자들이 들이닥칠 거요.
당신들이 이곳에서 그냥 공격받은 것으로 합시다. 알았지요?"
"알겠습니다 "
최순태가 몸을 돌려 현장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불타 버린 가구에서 흰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경꾼들 속에 서 있던 남병준은 최순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는
짧은 머리의 사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짧은 머리의 사내가
경찰이 아니라는 것은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경찰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본부의 최순태 경감은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었다.
그는 여자를 넘기고 손을 뗀 것처럼 보이게 해놓고는 덫을 쳐놓고 있었던 것이다
남병준은 몸을 돌렸다.
이미 밤은 깊었고 곧 눈이라도 내릴 것같이 습기를 떤 찬바람이 피부에 닿았다.
어쨌든 김원국은 여자를 가로 채 간 모양이었다.
그것을 최순태의 표정에서 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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