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끝없는 도피 ▷▷▷
"저기 온다. "
그들을 먼저 발견한 것은 김 칠성이었다.
승용차의 뒷좌석에 앉아 자는 줄만 알았던
그가 옆쪽의 골목 입구로 들어서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을 본 것이다.
"가만 있어라_ 아직 나가긴 이르다. "
앞좌석에 앉아 있던 백동혁이 부스럭거리며 상체를 움직이자 김칠성이 다시 말했다.
어둠에 잠겨 있는 골목을 밝혀 주고 있는 것은 쓰레기통 옆에 세워진 가로등 하나였다.
」0미터쯤 되는 골목은 중심 부분만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서인지 스산한 데다가
지저분했고 양쪽 끝은 어둡다.
그러나 서초 모텔로 들어서는 직선 코스였으므로 차에서 내리면 이 골목을 통과해야 된다.
사내들이 가로등 밑을 지나게 되자 모습이 뚜렷이 드러났다.
여섯명이다.
그리고 뒤쪽에 다섯 명이 또 있었다. 모두 열한 명인 것이다
앞을 바라보던 백동혁은 숨을 길게 밴었다가 다시 천천히 그리고 깊게 들이마셨다.
그놈들은 안정태가 거느리고 있는 부하들 중의 일부였다.
안정태는 가정을 갖고 있지 않은 부하들을 일정한 곳에 합숙시키고 있었는 데
서초 모텔도 그 합숙소 중의 하나이다.
놈들은 열두 시간 근무를 마치고 합숙소로 돌아오는 참이고 이곳의 책임자는
리즈 호텔에서 영업부장 직을 맡고 있는 민기찬이라는 것도 알아 놓았다.
놈은 무술의 유단자이고 특히 검도가 5단이라는 것이다.
이쪽은 서초 모텔 옆의 장어구이집 앞에 주차시킨 수산물 센터의 배달용 승합차 안이다.
바로 옆의 서초 모텔 앞에는 경비원 두 명이 서성거리고 있지만 이쪽을 눈여겨 보지는 않았다.
"자. "
외마디 소리를 뱉으면서 김칠성이 문을 열어 첫히자숨을죽이고 있던 백동혁이 앞쪽에서 뛰쳐나갔다.
놈들과의 거리는 10미터가 조금 넘었다.
대여섯 번 발을 떼면 되었다.
바바리 코트의 자락을 펄럭이며 백동혁은 김칠성의 앞장을 섰다
손에 든 목검을 위쪽으로 치켜든 자세였다
그의 뒤를 김칠성과 세 명의 부하가 따른다.
다섯 명과 열한 명의 대결이다
이쪽의 다섯 명은 모두 입을 꾹 다 물고 눈을 치켜뜬 자세로 부딪쳐 갔는데 저쪽은 달랐다.
앞장선 사내들이 주춤 멈추었고 그러자 뒤쪽의 사내들과 뭉친 형태가 되었는데
다섯 명이 물이 쏟아지듯 덮쳐 가자 어지럽게 엉클어지면서 한두 걸음씩 물러섰다.
그 동안에 저희끼리 부르고 소리네고 말도 안되는 외마디 소리들을 어지럽게
뱉어낸 것은 물론이다.
김칠성은 사내들의 중심 부분으로 쳐들어간 백동혁이 목검을 내려쳐 사내 한 명의
골통을 깨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또 다른 한 명의 배를 찌른다.
"에에익 !"
저도 모르게 기합 소리를 뱉어낸 김칠성은 손에 들고 있던 곡괭이 자루를 내려쳐
사내 한 명의 어깨뼈를 부수었다.
맞는 감촉이 손에 뿌듯하게 전달됨과 동시에 사내의 처절한 비명이 뒤를 따랐다.
번득 이는 칼날이 희미한 불빛을 뚫고 그의 가슴을 스치고 지났다.
그는 다시 곡괭이 자루를 휘둘러 등을 보인 사내의 등판을 찍었다.
등뼈가 부러진 모양으로 사내가 그 자리에서 앞으로 엎어지다가
다른 사내와 엉키면서 같이 넘어졌다.
골목 안은 비명과 고함 소리로 가득 찼는데
이것은 모두 안정태의 부하들이 지르는 소리였다.
소리를 지르는 사내들로 치면 틀림없이 그농들이었던 것이다.
놈들은 모두 손에 칼과 쇠뭉치를 쥐었으나 기습을 당하는 바람에 제대로 쓰지를 못한다.
한 방의 총성이 골목 안을 울렸다.
그러나다시 비명이 계속 되다가 이윽고 멈추었다.
시간은 2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좁은 장소에서는 적은 인원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다.
숫자가 많은 상대방은 효과적으로 그들의 이점을 운용할 수가 없다.
김칠성은 곡괭이 자루를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에 울렸던 총성이 궁금하기도 했다.
사내 여섯 명이 서 있었다 이쪽의 다섯 명보다 한 사람이 많다.
그들은 어느 결에 가로등이 서 있는 부분까지 밀고 와 있었으므로 부하들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 서 있었다.
그러나 낯선 얼굴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는 지금 백동혁과 마주 보고 서 있었는데
손에 날이 시퍼런 일본도를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발밑에 엎드려 있던 사내 한 명이 두 팔을 땅에 짚고 상반신을 세웠으므로
김칠성은 곡괭이 자루를 휘둘러 사내의 어깨를 쳤다.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면서 사내가 땅바닥에 코를 박았다.
이곳저곳에서 사내들의 신음 소리가 났다.
"돌아간다. "
김칠성이 소리치듯 말하자 백동혁이 주춤 머리를 들었고
그 순간 칼끝으로 백동혁의 얼굴을 겨누고 있던 사내가 일본도를 내려쳤다.
백동혁이 옆으로 몸을 비껴 칼을 피하고는 가로등 빛이 비치는 얼굴에 웃음을 띄었다.
김칠성은 자신의 말에 백동혁의 자세가흔들렸다는 것을 알고는 한걸음 물러섰다.
부하들도 이곳저곳의 어둠 속에 선 채로 목검을 든 백동혁과 일본도를 든
민기찬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벌써 여러 합째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고 민기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번들거렸다.
"of otol!"
다시 민기찬이 골목 안을 울리는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칼을 위로 번쩍 치켜든 자세였다.
그는 백동혁을 위에서 아래로 반쪽을 낼 듯이 내려 치고는 번쩍 몸을 돌리면서
동작을 바꾸었다.
헛칼질을 했고 그 사이에 백동혁의 목검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몸을 비튼 민기찬은 상반신을 숙이면서 백동혁의 목검을 피했다가 눕혀 들고 있던
칼을 휘둘러 백동혁의 옆구리를 쳤다.
백동혁의 목검이 칼날을 받자 민기찬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주위에 둘러선 김칠성과 부하들을 의식하지 않는 눈치였다.
입맛을 다신 김칠성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쓰레기통 옆에 놓여 있는
검정색 비닐 자루를 집어 들었다.
묵직한 자루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김칠성은 그들에게로 한걸음 다가갔다.
"야, 임마."
김칠성이 불렀으나 민기찬은 백동혁을 노려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앞으로 내뻗은 팔에 칼을 세워 들고 있는 자세였다
"야! "
외마디 소리를 내면서 김칠성은 양동이만한 부피의 쓰레기자루를 민기찬의 가슴께를 향해 던졌다.
자루가 그의 가슴에 부딪치면서 쓰레기가 쏟아져 나왔다.
민기찬의 얼굴에도 튀었으므로 그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 순간에 백동혁의 목검이 날아 민기찬의 머리를 쳤다.
그러나 칼을 들어 목검을 받아낸 민기찬이 한걸음 물러서자
김칠성의 곡괭이 자루가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와 민기찬의 옆구리를 쳤다.
'퍽'하는 소리가 들리고는 민기찬이 몸을 비틀면서 한걸음 옆으로 물러서자
다시 백동혁의 목검이 그의 어깨를 쳤다.
민기찬이 칼을 떨어뜨리면서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은 이제 김칠성의 한걸음 앞에 등을 돌린 채 꿇려진 것이다.
번쩍 곡괭이 자루를 치켜들었던 김칠성이 값자기 움직임을 멈추고는 백동혁을 바라보았다.
"야, 니가 쳐라."
"예, 형님 ."
백동혁이 한걸음 다가가 목검을 치켜들었다
"비겁한 놈들, 정정당당히 승부를 내자."
한쪽 무릎을 끓었으나 머리를 치켜든 민기찬의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미친 놈, 여기가 도장이냐? 니가 검도인 이고?"
백동혁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개 백정이다, 이 새끼야."
목검이 날아와 민기찬의 이마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민기찬이 뒤로 반듯이 넘어지자 백동혁이 목검을 끌어들이면서 다시 말했다.
"너는 개고."
이찬형과 고성섭은 안국동의 한정식집에 마주 앉아 있었다.
밤이 왜 깊은 시간이었다
넓은 방이어서 두 사람이 술을 마시기에는 다소 썰렁한 분위기였지만
이찬형의 얼굴은 술기운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성섭이 따라 준 술을 받아 한모금에 들이킨 이찬형이 입으로 더운 김을 뱉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난 내일 각하에게 사직서를 올릴 작정이야,고 차장 책임은 나 흔자 지겠어."
그가 술기운으로 붉어진 눈으로 고성섭을 바라보았다.
"할수없지. 내가 더이상 일을 진행시킨다면 그것은 이제 반역이야.
정권을 위협하는 일이 돼."
"판단은 역사가 합니다. 부장님,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아님니다.
그리고‥‥‥‥
"시끄러워, 듣기 싫어."
이찬형이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낸 역사도 조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더러운 과거가 들추어지지 않고 묻힌 것처럼."
고성섭이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조웅남의 난동은 난동만으로 정리되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이무섭의 수사를 중지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
"이봐, 끝난 일이야."
머리를 저은 이찬형이 젓가락을 들었다가 내려놓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조웅남은 김원국의 오른팔이고 수배중인 인물이었어.
이무섭은 결백을 입증하려는 상황이었고.
이 빌어먹을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지?"
"이젠 기대할 것이 없네, 더이상."
"황인규 대령이 있습니다, 부장님 ."
고성섭이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증언할 겁니다.
기무시령관과 참모장이 이무섭을 옹호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위험해, 쓸데없는 짓이고."
이찬형이 머리를 저었다
"증거도 없어, 그건 추측일 뿐이야.
자네가 충고해 주게, 더이상 돌출되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길게 숨을 내쉰 고성섭이 시선을 탁자 위로 떨어뜨렸다.
두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주고받은 결론은 이찬형이
내일자로 사직서를 올리고 손을 떼겠다는 것이었다.
조웅남의 습격 사건은 아직도 여파가 가라앉지 않았는데 매스컴은 말할 것도 없고
시중의 여론도 김원국의 조직을 매도하고 있었다.
청와대의 관계자는 대통령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고도 전해 주었다.
이제는 안기부가 어떤 증거를 제시한다고 해도 늦은 것이다.
"부장님이 그러신다면 저도 그만두겠습니다. "
고성섭이 머리를 들며 말하자 이찬형이 혀를 찼다.
"그만두는 것보다 남아서 정리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네.자네가 그 일을 맡아야겠어."
"제가 그만두지 않더라도 잘릴 겹니다. "
"업무를 인수 인계하는 시간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쉽게 내보내 지는 못할 거야."
머리를 든 고성섭이 치켜뜬 시선으로 이찬형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탐색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나는 신문 수송 사건에 대한 책임,
경찰과 비협조적인 자세를 취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거야.
자네는 남아서 조직을 정리하게. 아마 새로 온 부장도 자네를 필요로 할테니까."
".................."
"이제 김원국의 조직은 끝이 났네.지금쯤 근거지를 옮기고 있겠.....
"막다른 구석으로 몰린 사람들입니다.
제 생각은 이대로 끝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부장님."
"그러면 그럴수록 더 빨리 조직이 분해되어 가겠지."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저희들이 얼마쯤 억제시켜 왔습니다만."
"그럴 때는 자네도 경찰과 협력해서 그들을 빨리 제거해야 되지 않겠어?"
"제거하다니요?"
"내 말은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단 말이야."
그들은 앞에 놓인 술과 안주를 내려다보면서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휴지통에 담배 꽁초를 버린 황인규는 길가의 가게로 들어섰다.
대로에서 골목으로 꺾어지는 입구에 자리잡은 목이 좋은 가게였다.
부지런한 주인이 채소에서 과일과 반찬거리까지를 내다 파는 관계로
서너 명의 동네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우유 한 병 주세요."
황인규가 말했으나 비닐 봉지에 물품을 넣는 데 바쁜 주인이 턱으로 냉장고를 가리켰다.
"거기서 집어 가시지요."
우유를 집어 든 황인규는 몸을 돌려 가게 밖을 바라보았다.
골목길은 깨끗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으나 차두 대가 겨우 비껴 지날정도였다.
약간 경사진 도로는 100미터쯤 지나서는 왼쪽으로 꺾어져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쪽에서 올려다보면 커다란 철문이 달린 저택이 골목의 끝이었다
계산을 마친 손님이 나가자 다시 다른 여자가 책상 위에 물품을 쏟아 놓았다.
황인규는 마신 우유를 휴지통에 넣고는 다시 냉장고를 열어 종이 팩에 담긴 주스를 집었다.
"아저씨, 여기 주스 하나 더 마십니다 "
"그러세요."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조심스럽게 골목을 내려와 가게 앞에 멈추어 서더니
대로로 나갈 틈을 노리고 있었다.
이제까지 네번째 이곳에 왔지만 가게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전에는 대로 건너편의 분식집에 앉아 있거나 커피 전문점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지난 정권의 안보보좌관 임종휘가 살고 있는 집이 어디라는 것을 찾아내는 것은
황인규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기무사에는 그에 대한 자료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황인규는 계산을 치르고 가게를 나왔다
1 1월로 접어들자 날씨는 추위를 느낄 만큼 샐렁했고 오후의 약해져 가는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고 있었다.
임종휘가 배후의 중심 인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두 달쯤 전이었다.
자료실에 들어가 퇴역 장성들의 행적 보고서를 읽던 그는 임종휘가
한번도 개인적인 용무로 외출한 기록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가 지난 일년 동안 외출한 것은 두 번뿐이었는데 한번은 미군 사령관의 초청으로
만찬에 참석했었고 다른 한번은 국회 국방위원장과 오찬을 한 것이다.
황인규는 임종휘의 기록이 조작된 것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군의 요직에 있었던 장교는 기무사의 보호 대상이 되었는데
그것은 첫째로 군사 기밀이 적에게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장성들은 한 달에 열 번 이상의 모임과 회의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데 반하여
임종휘는 일년에 두 번의 외출이라는 것이 말도 되지 않았다.
그것은 곧 기무사 자체 내에서 다시 만들어진 것을 의미했고
그럴 만한 힘이 있는 사람은 사령관과 참모장 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황인규의 머리속에는 피라밋의 정점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임종휘를 꼭지점으로, 사령관인 오성국과 참모장 안영찬,
그리고 이무섭과 이철우이다. 강한석과 박동호 등이 그들과 어떤 관계 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으나 호흡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대로로 나간 황인규는 팔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5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사단장에게 서울 출장의 허락을 받았으므로 오늘밤은 집에서 묵어도 되었다.
그가택시 정류장으로 발을 옮기는데 옆쪽을 스쳐 지나는 검정색 승용차가 눈에 띄었다.
사람들에 가려 차 안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뒤쪽의 번호판이 그의 시선 안에 들어왔다.
그것은 그의 눈에 익은 기무사 사령관 자가용의 번호였다.
승용차는 좌측의 신호등을 켜더니 대로에서 골목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어깨를 치켜올리면서 숨을 들이마신 황인규는 그제야 자신의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네번째에 가서야 확실한 증거를 잡은 것이다.
이제까지는 스스로의 확신은 있었지만 증거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노력의 대가가 오늘 이루어졌다.
한동안 승용차가 사라진 골목 입구를 바라보던 황인규는 몸을 돌렸다.
임종휘의 저택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는 골목 입구의 가게까지를 비쳐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승용차의 뒤를 따라 들어설 만큼 무모한 그도 아니었다.
두 시간쯤 후에 황인규는 마포의 조그만 일식집 밀실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고성섭이다.
어젯밤에도 과음을 한 고성섭은 피로한 듯 온몸을 늘어뜨리듯이 앉아 황인규를 바라보았다.
마악 주문을 마친 참이다.
"출장 나온 거구만, 전방에서?"
고성섭이 물었다.
황인규는 엽차잔을 내려놓고 고성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 조금 전까지 임종휘씨 집 앞에 있었습니다. "
눈을 꿈벅이며 고성섭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는다.
"오늘까지 네번째 그 사람 집 앞에서 감시를 했었지요.
믿을 만한 부하도 없는 일이어서요."
"잠간만, 도무지 나는 영문을 알 수가 없는데."
손을 들어 황인규의 말을 막으며 고성섭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사람이 어쨌다는 거야? 나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래?"
"임종휘가 이 사건의 최종 배후 인물 같습니다.
오늘 저는 그런 확증을 갖게 되었어요."
"이 사람, 정신 나간 소리 하고 있어 ."
고성섭의 얼굴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상체를 똑바로 세운 그가 황인규를 쏘아보았다.
"그 은둔자가 배후라니, 그리고 그 사건은 이제 끝났어. 자네 신문도 읽지 않았나?
오늘 우리 부장이 청와대로 갔어.사직서를 을렸단 말이야."
"상관없습니다, 나하고는"
"상관없다니?쓸데없는 말썽 일으키지 말라는 충고야,자네를 위해서."
"이미 한번 빼어 든 칼입니다. 내 목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군인으로서 명예를 걸고 있는 겁니다. "
눈을 치켜뜬 황인규가 고성섭을 노려보았을 때 문에서 노크 소리
가 들리더니 음식 쟁반을 든 종업원들이 들어섰다.
그들이 나갈 때까지 방안의 두 사람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다시 입을 연 것은 황인규였다.
"임종휘는 밤의 세계를 장악하고 다음달에 당 대표로 선출될 예정인
강한석을 조종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밤낮의 구별이 없는 혼란된 체제가 되고 임종휘는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됩니다. "
"선배님, 이것을 막아야 합니다. "
황인규가 차근차근한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까지 얘기하는 것을 마치자 고성섭이 잠자코
술잔을 들 꺼 한모금에 삼켰다.
"따지고 보면 오성국도 임종휘의 후배지. 임종휘의 배려를 받지 않은 장군은 거의 없어 "
술잔을 내려놓은 고성섭이 뱉듯이 말했다.
"나도 한때는 그가 초대한 파티에 나갔어. 그것이 은근한 자랑이 었지,
내가 아직 차장보도 되기 전이었으니까."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부터 분명히 해 놓고 말씀하세요."
"나는 손을 떼었어. 이것은 부장의 지시이고 통치자의 명령이기도 3H , "
"잘못된 지시나 명령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해야 참다운 공직자입니다.
현실에만 적응하려는 자는 국가의 녹을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
"자네 이야기는 객관성이 없어 "
"제가 출세를 위해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배님이 잘 아실 겁니다. "
고성섭이 찌푸린 얼굴로 술잔을 소리나게 식탁 위로 내려놓았다.
그들은 아직 안주 접시에는 젓가락도 대지 않았다
"내가 이야기할 성질은 아니다만 방법이 있다, 있기는.r
"있으면 해야지요."
황인규가 상체를 세웠다.
"말씀하십시오, 선배님."
"자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서 임종휘가 무고한 누명을 다면 어떻게 할테냐?
우선 그것부터 묻자."
쓰게 된
"예, 제가 죽음으로 사죄하지요.
그 사람의 명예를 세워 주고 죽겠습니다. "
"좋다. "
고성섭이 술잔에 술을 따르며 그를 향해 처음으로 웃었다.
"그때는 나도 책임을 져야지."
"커어, 술맛 좋다. "
붉은 입을 커다랗게 벌린 조웅남이 입으로 더운 김을 뿜으며 말했다.
그는 술병에 남아 있는 술을 종이컴에 따르고는 앞자리에 앉아 있는
손채석을 바라보았다.
"야, 채석아, 너도 한잔헐래?"
"저는 됐습니다, 형님."
"안헌다은 철수없지."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조웅남은 술을 벌컥이며 마시고는
종이컴을 구겨 차 바닥에다 버렸다.
"아직도 안 나오냐? 그노무 시키 말여."
그가 투덜대듯 말하자 손채석이 초조한 듯 상체를 숙여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차가 주차된 50미터 앞쪽에는 번쩍이는 조명이 현란한 유흥업소들이
지붕을 잇대고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크게 간판을 내걸고 있는 곳이 '야성 클럽'이다.
밤 12시 반이 되어 있어서 클럽 앞의 좁은 길에는 다소 인파가 줄어들기는 했다.
그러나 술취한 행인들 때문에 차량들은 아직도 거북이 걸음이었다.
조웅남이 입을 벌리고는 커다란 소리로 트림을 했다.
더운 김과 함께 아까 먹었던 김치 냄새가 9인숭 승합차 안을 가득 메웠다.
"아따, 그노무 시키, 밀실에서 재미보고 나오는잡다. "
입맛을 다시면서 조웅남이 다시 투덜거렸다
그들은 수유리의 유흥가 골목에서 안정태의 부하들 중 중간 간부인 흥장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흥장규가 12시 조금 넘어서 '야성 클럽'에 들어가 수금을 하고 나 온다는 것은
알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두 대의 차에 탄 여덟 명의 부하들의 경호를 받고 하루 매상 천만 원 정도를
수금해 간다.
오늘은 홍장규를 두들기고 수금한 돈을 가져갈 작정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한때 수십 개의 업체들을 소유했었고 리즈호텔의 사장실에 앉아 군림하던 조웅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승합차 한 대와 일곱 명의 부하들이 남아 있었고
자금이 떨어져 수금한 돈을 강탈해 가려는 처지가 되었다.
"어어, 저기 나옵니다, 형님 "
번쩍 머리를 든 손채석이 소리를 지르듯이 말하고 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부하들이 서둘러 나가자 열어 놓은
문을 통해 서늘한 밤공기가 들어와 피부를 스쳤다.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오던 조웅남은 빈 소주병을 밟고는 비틀 거리다가 혀를 찼다.
차 밖으로 나와 서서 허리를 펴자 이제는 소변이 마려웠다.
그러나 지금 일을 볼 수는 없다.
클럽 앞에서 여자들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고 남자들의 고함 소리가 뒤를 이었다.
마악 승용차에 타려던 홍장규의 부하들은 난데없이 달려온 이쪽에
놀라 허둥거리고 있었다.
작전도 없고 대책도 없다.
그저 흥장규를 치고 돈가방을 빼앗아 오라는 것이 조웅남의 지시였기 때문이다.
비틀거리면서 클럽 앞으로 다가가는조웅남의 눈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내들
사이로 두목급으로 보이는 사내가 보였다.
정장 차림에 한 손에는 검정색 가죽가방을 들고 있는 것이다.
클럽의 입구 쪽을 손채석이 가로막고 있었으므로 그는 두어 명의 부하들에게
둘러 싸여 이쪽으로 달려나왔다.
클려 앞은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이쪽은 이미 도끼와 야구배트,
철근 파이프를 쥐고 이리 치고 저리 때리는 판이어서 저쪽의 기세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조웅남의 눈에는 이미 싸움이 끝난 것으로 보였다.
손채석이 쇠 파이프를 휘두르며 악을 쓰면서도 이쪽으로 달려오지
않는 것은 조웅남에게 선물을 안길 생각일 것이다.
조웅남은 두 손바닥을 입으로 가져다 대고는 침을 뱉었다.
그 순간 달려오던 사내들이 멈칫거리면서 서너 걸음을 반동으로 뛰어오다가 멈추어 섰다.
거리는 불과 서너 발짝 앞이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나오는 조웅남의 모습을 그제야 알아본 것이다.
조웅남은 홍장규의 한손에 날이 선 단검이 쥐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세 명의 부하들도 제각기 손에 단검과 쇠뭉치를 들고 있었다.
침을 뱉은 손을 잠깐 들여다본 조웅남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한 손을 바지 혁대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는 권총을 꺼내어 앞장선 사내를 향해 방아치를 당겼다.
"타앙!"
밤 하늘에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지자 클럽 앞은 순식간에 조용해 졌다.
다시 한 발의 총성이 울렸을 때는 클럽 앞에 남아 있던 저쪽의 부하
두어 명이 무릎을 꿇었다.
"타앙!"
세발째의 총알은 빗나갔는지 옆쪽의 시멘트 벽에 맞아 예리한소리를 내며 튕겨 올랐다.
"아이구, 형님."
홍장규가 가방을 떨어뜨리며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홍장규는 두 손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번쩍 치켜 들고 있었다.
두 명의 부하는 땅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고 남아 있던
부하 한 명은 혼이 나간 듯 멍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다
"워매, 이것이 좋기는 좋구나, 잉 ."
권총의 총구를 들여다보면서 조웅남이 감탄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의 뒤쪽으로 손채석과 부하들이 급히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웅남은 옆으로 몸을 돌리고는 담을 향해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이제는 도저히 오줌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배설을 시작 하는데 손채석이 달려들어 홍장규의 어깨를 발로 차 쓰러뜨렸다.
부하 한 명은 제결에 주저앉았고 손채석을 따라온 부하들은 조웅남을 보자
제각기 머리를 돌렸다.
"이거 웬놈이 소변을 보았나? 왜 이렇게 지린내가 나?"
이맛살을 찌푸린 최순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빌어먹을, 이놈의 시키들 뒤만 따라 다니는 데 지쳤다. "
"계장님, 조웅남이가 총을 쏘았다고 하던데요, 막판입니다.
그 자식이 총질을 하다니."
이갑룡이 다가오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플래시로 발밑을 비추었다
그는 물이 고인 땅바닥 위에 서 있었다.
"이거, 피 아냐?"
"피는 무슨 피가 그렇게 많아?"
최순태가 그로부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지럽게 플래시를 휘두르던 이갑룡은 벽에 그려진 물 자국을 보았다
물은 벽에 부딪치며 땅바닥으로 흘러내린 것이다.
"이런 쌈."
이갑룡이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어떤 놈이 오줌을 싼 거구만."
최순태는 골목 안을 둘러보았다.
부상자들은 모두 병원으로 호송되었고, 사건 현장의 정리는 끝나 가고 있었다.
조웅남이 홍장규를 쳐서 흥장규를 비롯한 부하 여덟 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수금한 돈을 몽땅 털린 것이다.
그는 몸을 돌려 지린내가 진동하는 골목을 빠져 나왔다.
"계장님, 이런 식으로 테러가 계속되다가는 밤거리가 무법천지가 되겠습니다. "
이갑룡이 옆을 따르며 말했다.
"기동대를 24시간 대기시켜 놓았어도 치고 도망가는 놈들한테 언제나 한발 늦는단 말입니다.
이번에는 신고가 발랐는데도 놓쳤어
.a. .
그들은 골목을 봉쇄하고 있는 경찰들 사이를 빠져 나와 승용차에 올랐다.
클럽의 앞쪽은 구경꾼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모두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들이 었다.
"젠장 구경이라면 밥 먹다 말고 뛰어 나오는 국민성이라‥‥‥‥
앞자리의 이갑룡이 투덜거리자
운전사인 고 순경이 차 앞을 가로 막은 군중들을 향해 경적을 울렸다.
승용차는 천천히 야성 클럽의 앞쪽을 지났다
"안정태가 열을 받겠군요.
엊그제에도 서초 모텔 골목에서 김철성이한테 열한 명이 당했는데."
차가 속력을 내자 이갑룡이 몸을 돌려 최순태를 바라보았다.
"이러다가는 부하들이 남아 있지 못하겠습니다. "
"안정태는 당장에 동원할 수 있는 조직원만 해도 3천 명이 넘어.
모기한테 한 방 물린 셈치면 돼."
최순태가 등받이에 등을 대면서 팔짱을 끼었다.
"문제는 시민들이야. 자네도 아까 구경꾼들 표정 보았지?
도무지 무서워하는 것 같지가 않아."
"구경꾼들 아닙니까? 무섭고 흥한 것일수록 더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
"저희들은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야, 김원국이가 말이야."
"점점 김원국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어.
그놈은 지금 현대판 홍길동이가 되어 가고 있다구."
승용차는 동부 고속도로의 입구로 들어서더니 속력을 내었다.
밤길을 달리는 차량들이 적었으므로 고 순경은 마음껏 엑셀러레이터를 밟근 모양이었다.
"놈들은 사흘 간격으로 은신처를 옮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요."
이갑룡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신고 전화도 대부분 장난이고 기껏해야 놈들이 떠난 빈집을 가르쳐 주는 게‥‥‥‥
"연고자들, 이를테면 놈들의 마누라나 부모 형제들에게 감시를 붙여야겠어."
"계장님, 진작부터 지시가 내려졌지만 인원이 부족해서 애를 먹고 있다고 합니다.
밤거리 경비하랴,
업체들 주변에 24시간 교대 근무를 하랴,
다른 업무를 볼 시간이 없다고 불평이 ‥‥‥‥
"개자식들, 불평은 무슨 불평? 누군 놀고 있나?"
최순태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빌어먹을, 이 개자식은 전화 한 통 해주지 않는군."
새벽 3시 가까운 시간이었으니 자빠져 잘 놈들은 이미 잘 것이다.
이갑룡은 그가 누구를 향해 욕을 하는지를 알았다.
이것은 김원국 쪽과 안정태, 아니, 이철우와 이무섭 쪽의 전쟁이다.
어떻게 보면 경찰은 안정태의 조직을 돕고 있는 셈이 되었다.
"이봐, 우리도 어디 가까운 여관이라도 가서 자자구.
집에 들어갔다 출근하기에는 시간이 늦었어 ."
최순태가 말하자 이갑룡이 카폰을 빼어 들었다.
뒤를 따라오는 승용차에게 연락을 할 모양이었다.
안정태는 눈을 뜬 채 꼼짝하지 않고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11월 중순이어서 호텔은 히터를 가동시키고 있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쾌적한 공기가 방안에 흐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전에 시계가 8시를 쳤으므로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으나
안정태는 손끝 하나 까딱이기가 귀찮았다.
어젯밤 과음을 한 데다가 비몽사몽간에 치열한 섹스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호텔 밖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고
복도의 한쪽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도 났다.
그러자 옆쪽에서 나직한 숨소리와 함께 화장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어젯밤의 여자가 옆에 누워 있는 것이다. 그녀는 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제일 가는 미모와 몸매를 갖춘 무용수였는데
지금까지 세번 째 잠자리를 같이하는 여자였다.
그러나 이름은 모른다. 그녀가 이름을 말해 주었을테지만 번번이 잊었고
그것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은 없다.
그녀가 그와 잠자리를 같이한 대가로 받은 것은 아마 대령이 장군으로 진급되었을 때
변화되는 여러가지 상황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번 이상 잠자리를 한 여자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안정태의 부하들이
그녀를 어렵게 생각하리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 여자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도 없다
호텔과 십여 개의 업체들을 관장하고 있는 안정태의 애인인 것이다.
그녀는 예전처럼 차를 주차시키려고 애를 쓰지 않더라도 도어맨이 달려나와
대신 해주었을 것이고 피로하면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 방에 들어가 쉬기도 했을 것이다.
호텔의 바에서는 그녀가 나타나면 칵테일을 서비스했을 것이고 식당은 말할 것도 없다.
춤을 추기 싫어 테이블에 앉아 있어도 지배인이나
영업부장은 눈길 한번 돌히지 않았을 것이다.
안정태는 머리만을돌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긴 머리칼이 한쪽 얼굴을 덮었으나 깨끗한 피부와 짙은 윤곽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좋아하는 서구형의 미인이다.
오뚝 선 콧날과 다소 큰 듯한 입, 인조 눈샙이 아닌 짙은속눈샙이 가지런히
드리워져 있었다.
몸매도 일품이었고 손과 발도 잘 다듬어져 있는 데다가 잠자리의 기교도
요란스럽지도 움츠러들지도 않고 이쪽에 맞추는 스타일이다.
"야, 일어나."
저도 모르게 안정태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여자가 놀란 듯 눈을 떴다.
우산이 활짝 펴지는 것 같았고 맑은 눈의 한쪽에 조그만 눈꼽이 한점 붙어 있었다.
화난 듯한 안정태의 얼굴을 보자 여자는 상반신을 일으키다가 휘감긴 시트에 끌려
다시 엎어졌다.
그러자 여자의 머리칼이 안정태의 이마를 스치면서 향기를 뿜어내었다.
"야, 이것, 빨어, "
안정태가 눈으로만 아래쪽을 가리키며 겨우 상체를 세운 여자에게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남성은 발기해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몸을 감았던 시트를 벗어내고는 알몸으로 그의 하반신에 부딪쳐 왔다.
그녀의 둥근 엉덩이와 반들거리듯 윤기를 내는 어깨와 허리의 살이 보였다.
여자가 입으로 그의 남성을 물었을 때 머리맡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안정태는 손만을 뻗어 전화기를 쥐고 귀에 대었다.
"여보세요."
거친 듯한 그의 말소리에 놀란 듯 저쪽은 잠시 대답이 없다.
"여보세요."
한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눌러 일을 계속하라는 시능을 하고는
그가 조금 더 거칠게 물었다.
"rOt. "
짧게 대답한 저쪽의 목소리를 안정태는 금방 알아들었다.
이철우였다.
"아아, 예, 웬일이십니까?"
그의 놀란 듯한 목소리에 여자가 머리를 이쪽으로 돌렸다 물기에
젖은 입을 반쯤 벌린 채였다.
안정태는 여자의 머리를 아래쪽으로 다시 밀어 놓았다.
"자네, 오늘 저녁에 시간 있나?"
이철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안정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 시간을 내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
"오후에 단장님과 약속이 있어서요,무슨 일인지는모르겠습니다만. "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말이로군."
" 아닙니다. 제가 빠져 나오지요. 시간과 장소만 말씀해 주신다면."
뜨거운 열기가 아래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으므로 안정태는
하반신을 치켜올렸다가 내렸다.
여자가 머리를 끄덕이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대충 몇 시에 끝날 것 같나?"
"그것이 ‥‥‥‥ 잘 알 수가 없습니다만, 어쨌든‥‥‥‥
"그럼 오후에 다시 전화를 하지."
안정태는 다시 하반신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뜨거운 열기가 밖으로 분출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꼭 전화를 주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은 안정태는 억눌렀던 숨을 몰아 쉬면서 온몸을 늘어뜨렸다.
알몸의 여자가 방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들어섰고 곧 타월을들고 나왔다.
안정태는 전화기를 다시 집어들고는 다이얼을 눌렀다.
여자가 젖은 타월로 그의 하반신을 닦는 동안 그는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단장님, 접니다. "
그는 머리를 똑바로 들었다.
"이 소령한테서 방금 전화가 왔었습니다.
저녁때 만나자는 말이어서 제가 오후에 단장님과 약속이 있다고 했습니다만‥‥‥‥
여자는 그의 하반신을 꼼꼼하게 닦은 다음에 일어서서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던 안정태가 다시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은 안정태는 두 팔과 다리를 한껏 뻗으면서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온몸에 날아갈 듯한 생기가 넘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 새끼를 가만둘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언제부터 단장님과 같이 논다고."
서대식이 눈을 치켜뜨고 이철우를 바라보았다.
"대장님, 아무래도 우린 겉돌고 있습니다. 이게 뭡니까? 매일 기원에나 다니시고."
"시끄럽다. "
신문을 접어 탁자 위에 내려놓은 이철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놈이 윌 안다고 소릴 지르고 야단이냐? 건방지게."
잠시 주춤했던 서대식이 다시 머리를 치켜들었다.
"야단 맞더라도 오늘은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지금 대장님 주위에 남아 있는 것은 일곱 명밖에 없습니다.
모두 대장님의 심복뿐이지요.
나머지는 하나씩 둘씩 안정태나 박용근이 밑으로 빠져 나갔습니다. "
"당연하지,나하고 단장님이 합의해서 그렇게 한 거야.
그리고 당분간은 내가 나설 처지도 못되고, 너도 알고 있지 않아?"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태의 기반이 굳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
"더이상 지껄이면 용서하지 않겠다. "
이철우가 퍼뜩 눈을 치켜뜨자 서대식이 탁자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응접실 안의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철렁한 느낌이 드는 아파트였다.
가구는 새것이었고 갖출 것은 모두 갖추어져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서른다섯 평의 아파트가 확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흰색 벽에 붙여 놓은 흑색 소파와 회색및 찬장,
그리고 주방 쪽의 식탁은 검정색 니스칠을 한 데다가 여기저기 탁자는
연한 노랑색이다.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에서 제각기 주워 온 가구들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었다.
안주인이 없이 사내들끼리 살림살이를 장만했기 때문이다.
"대장님, 단장님째 연락해 보시지요."
서대식이 머리를 들고 이철우를 바라보았다.
아까보다는 다소 가라앉은 표정이었으나 어금니를 물고 있는 것이 이대로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안정태와 단장님이 오후에 약속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필요없다. "
자리에서 일어선 이철우는 벽에 붙여 세운 선반으로 다가가 위스키 병을 쥐었다.
언제부터인가 그에게는 아침에 위스키를 한두 잔씩 마시는 버릇이 들었는데
구태여 삼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알콜 중독도 아닐 뿐더러 설령 중독이 되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 끊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유리컵에 술을 8분의 1쯤 채운 이철우는 한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서대식을 내려다보았다.
"너도 일하고 싶으면 안정태나 다른 사람 밑으로 가라.
내가 간부급 자리를 만들어 주마."
"안 갑니다, 저는. 사람을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대장님."
눈을 부릅뜬 서대식이 그를 노려보았다.
"주인을 버려 두고 부하가 출세길을 찾아 떠나다니요.
그런 놈은 사람이 아닙니다. "
"난 네 주인이 아냐. 한때 네 상관이었을 뿐이야."
"전 대장님을 따라 이 일을 한 것뿐입니다
안정태나 이무섭이는 알지도 못했습니다. "
"말을 삼가라, 이 자식 ."
버럭 소리를 지른 이철우가 어깨를 펴고 서대식을 노려보았다.
"너는 내가 소외당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닙니다, 대장님, 대장님은 배신당하신 겁니다. "
그 순간 이철우가 집어 던진 술잔이 서대식의 얼굴을 스치고 벽에 맞아 부서졌다.
"건방진 놈, 보자보자 하니까 끝없이 기어오르는구나."
"저뿐만이 아닙니다. 남아 있는 일곱 사람 모두가 똑같은 생각입니다. "
"대장님은 싸움의 전면에 내세워진 척후입니다 제물이기도 하지요."
이철우가 술병을 움켜쥐고는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서대식이 말을 이었다.
"지금 대장님은 모든 오해가 풀린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김원국의 업체들을 관리하기에 아직 시기가 이르다면 다른 사업체를 세워
일을 맡길 수도 있었습니다. "
"그렇게 이야기가 되었다. "
술병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며 이철우가 말했다.
이제는 화난 듯한 표정도 아니다.
"난 곧 운수 회사를 하나 맡게 될 거다. 왜 커다란 회사야."
"그리고 조직과는 결별하게 되시겠지요."
"그까짓 운수 회사 하나를 받으신단 말입니까?
어떤 놈은 수십 개, 아니, 세금을 전국의 수천 개 업체로부터 거둬 들이는
위치가 되었는데 말입니다. "
"곧 달라질 거야. 안정태는 내 대역일 뿐이다. 그리고‥‥‥‥
다시 한모금 위스키를 삼킨 이철우는 입을 벌리고 더운 김을 뱉어냈다.
"나는 그런 큰 욕심은 없다. 주역은 단장이었고, 그 이상의 주역도 있어.
난 맡겨진 일만을 해왔고 주어진 것만을 받는다.
상관에게 충실하고 그 권위를 넘보지 않는단 말이다. "
"단장님과 안정태가 대장님을 견제하는 이유는 뭡니까?
회의에 참석하신 적도 없고 요즘은 만나시 지도 않지 않습니까?"
이철우는 술병을 내려놓고 조그맣게 머리를 저었다.
얼굴에 쓴웃음을 지은 그는 지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그만해라. 난 배신당하지는 않았다. 단장님과 안정태가 날견제할 이유도 없어."
"이유가 있을 겁니다, 대장님 ."
서대식도 지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제가 납득이 안되어서 그럽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구요.
대장님이 외톨이가 되어 가는 이유를 말입니다. "
승용차에서 내린 정기욱이 희빈 살롱의 안으로 들어서자
영업부장인 강용수가 허겁지겁 달려나왔다.
"아이구 사장님, 갑자기 연락도 안 주시고 이렇게
"김 상무 어디 있어?"
대뜸 정기욱이 묻자 강용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내실에 있습니다. 제가‥‥‥‥
"필요없어, 이 새끼야."
강용수를 젖히고정기욱이 어두운 복도를 앞장서 갔다.
그의 뒤를 7, 8명의 부하들이 따랐는데 모두 사나운 기세였다
"이, 이거 무슨 일이야?"
맨 뒤의 부하를 따라 잡은 강용수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내가 알아? 너희들이 알지."
쏘아붙이는 듯한 그의 말에 강용수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정기욱이 내실의 문을 열어 젖히자 탁자를 둘러싸고 밝아 있던
세 명의 사내가 튕기듯이 일어섰다.
전표를 정리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탁자 위에는 종이 쪽지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아이구, 형님, 웬일이십니까?"
그중 나이 들어 보이는 사내가 얼굴에 웃음을 띄어 보였다.
반쯤 벗겨진 이마에 몸에는 살집이 많았고 혈색도 붉다.
그가 상무로 희빈클럽을 총괄하는 이재동이었다
"이 새끼, 너, 거기 앉아 "
정기욱이 소파에 털썩 엉덩이를 내려놓으면서 턱으로 앞자리를 가리켰다.
이재동이 문 쪽에 둘러서 있는 사내들을 눈을 한번 깜박이는 시능을 하며 훌어보았다.
웃는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지자 볼의 살집이 아래쪽으로 늘어졌다.
"예, 앉지요, 형님."
목을 늘어뜨리는 듯한 자세로 이재동이 대답하고는 자리에 앉았으나
나머지 두 사내는 아직 일어선 채였다.
"네놈들도 앉아."
정기욱의 말에 그들도 이재동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방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기욱은 이재등을 쏘아본 채 아직 입을 열지 않았고 문 앞에 둘러선 사내들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있다.
"너, 오늘 아침에 어디 갔다 왔어?"
정기욱의 양철판을 긁는 듯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었다.
번쩍 머리를 치켜든 이재동이 정기욱을 바라보았다.
"아침에요?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 실은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간이 안 좋거든요."
이재동이 걱정이라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매일 직업으로 술을 마시다 보니까 간이 말이 아닙니다. 혈압도 xlf‥‥‥‥
잠자코 그를 바라본 채 정기욱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재등은 정기욱과 비슷한 나이였다.
아마 한두 살쯤 많아서 마흔이 넘었을지도 모른다.
20년 가깝게 유흥가에서 굴러 다닌 이재등은 주먹 실력도 대단했지만
성깔도 독해서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사내였다.
그런 그가 조직의 일원으로 발탁되지 못한 이유는 주사가 심한 데다가
손버릇이 나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기욱은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재동에게 희빈 클럽을 맡기면서
단단히 경고를 했고 그도 서약서를 써 내었다.
"형님, 도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오신 겁니까?"
정기욱이 잠자코 있자 다소 여유를 찾은 이재동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정기욱이 생각에서 깨어난듯이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는손을들어 이재등을 가리키면서 문 앞의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부하들이 와락 덮치듯이 이재등을 향해 달려들었는데 두어 명은 정기욱
앞에 놓인 탁자 위로 뛰어올라 앞쪽에서 덮쳐 달려들었다.
"어어! 이 새끼들 봐라!"
이재동의 악을 쓰는 소리가 퉁탕거리며 의자가 넘어지고
그릇이 깨어지는 소리에 섞여 들렸다.
한꺼번에 대여섯 명이 덮치는 데다가 비좁은 방안이다.
아무리 완력이 뛰어난 이재동이라도 마음대로 팔 다리를 휘젓지 못하고
결국에는 바닥에 깔리게 되었다.
"이것 안 놔! 야! 이 새끼들!"
악을 쓰던 이재동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으나 부하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정기욱은 소파에 앉아 잠자코 그들의 소란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부하들이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하나씩 몸을 세웠고
이재동의 모습도 드러났다.
팔과 다리가 나일론 끈에 억세게 묶여 있는 데다가 옷은 어졌고
얼굴을 얻어맞아서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이재동의 옆쪽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사내는 방안의 구석으로 밀려났다가
문 앞에 있던 부하들에게 잡혀 꿇어앉아 있었다.
"야, 정기욱이! 너, 나한테 ‥‥‥‥
이재동이 시뻘건 입을 벌리고 다시 악을 썼다.
"너 이 새끼, 제 세상 만난 줄 아는 모양인데."
"이 새끼가!"
부하 한 명이 쇠장갑을 긴 주먹으로 이재동의 한쪽 볼을 치자
피가 탁자 위로 뿜어 나왔다.
아마 옆쪽의 이빨 대여섯 개는 물러앉았을 것이다.
"이재동이, 너, 박용근이를 믿고 그러는 모양인데 "
정기욱의 갈라진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너 이 새끼, 오늘 이태원에서 안재일이를 만난 것 알고 있어."
이재동이 눈을 부릅뜬 얼굴로 정기욱을 바라보았다.
정기욱이 말을 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만 말하면 살려는 주마.
만일 시간만 끌었다가는 내일부터 네놈은 사라지게 돼."
"날 죽이면 네놈은 온전할 것 같으냐? 증인이 수십 명이야, 임마."
피범벅이 된 입을 벌리고 이재동이 웃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된다면 모두 네놈 소행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넌 날 어떻게 하지 못해 "
정기욱이 머리를 끄덕였다.
"안재일과 내통한 것은 사실이구만, 이 더러운 놈, "
"개똥이나 고양이똥이나 마찬가지다, 더러운 것은."
"너는 오늘밤에 죽는다. "
"그렇게 되면 너는 박 사장님 조직에 정면 도전을 하는 것이 되지.
넌 아직 그럴 만한 실력이 없어."
"손을 잡았구만, 박용근하고."
머리를 끄덕인 정기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가게는 내가 관리하는 곳이야.오늘자로 이곳에서 떠나라.
박용근이가 여기까지 손을 댈 수는 없을 테니까 "
이재동이 머리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선뜻 입을 열지는 않았다.
분위기로 보아 살려 주는 것 같은데 바락바락 악을 쓸 이유도 없을 것이다.
"저 새끼 풀어 줘라."
부하들에게 이르고 난 정기욱은 내실을 나왔다.
복도 구석에는 강용수가 온몸을 굳히고 벽에 붙어 서 있었다.
정기욱이 잡자코 그를 스쳐 지나자 그는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가늘게 긴 숨을 뱉어냈다.
새벽 2시가 지난 강남역 근처의 유흥가는 바로 말 그대로 혼란 상태였다.
거리에서 택시를 잡으려는 취객들이 차도에까지 밀려 나와 소란을 피웠고
택시는'일차선에서 정지하여 승객들을 태우기도 했다.
나이트 클럽 앞에서 사내들이 드잡이를 하다가 그중 한 사내가 돌멩이를 집어 들자
상대방이 총알같이 도망을 쳤다.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서너 명의 여자들이 길가에 서서 승부가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좁은 골목 안에서는 오가는 차량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경적들만 울려 대고 있다.
무리를 이룬 남녀들이 클럽 옆쪽의 여관으로 몰려 들어가고 있는 것도 보였고
길 복판에서 허리를 기역자로 구부리고 있는 사내는 필시 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야,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 "
승용차의 문을 열고 나오면서 이재동이 소리쳐 말했다.
삼차선에 멈추어 선 택시들 때문에 더이상 승용차는 앞으로 나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 차선에는 택시를 타려는 취객들이 몰려 나와 있어서 차선을 바꿀 수도 없다.
이재등은 바바리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앞쪽에 보이는 '파도 클럽 '으로 다가갔다
파도 클럽은 박용근이 장악하고 있는 업체들 가운데 하나였다.
좌석 수가 500석이 넘는 대형 클럽이었고 종업원의 수만도 50명이 넘는다.
이재동은 취객들 사이를 지나면서 손을 들어 콧등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코뼈가 부러졌는지 콧등이 양쪽으로 부어 올라서 콧날의 윤곽이 두리넓적해져 있었다.
한쪽 이빨은 네 개가 뽑혀 나간 데다가 다섯 개가 흔들거리고 있다
내일은 치과에 가서 아예 틀니를 해 넣을 작정이다.
고가 한 무리의 취객들 사이를 빠져 나가는데 옆쪽의 조그만 카페 앞에서
사내 한 명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차도로 나가 택시를 잡을 모양이었다.
그가 다가오는 방향과 이쪽이 직진해서 가는 방향을 비교하면
니은(ㄴ)자의 각진 부분에서 만날 확률이 컸으므로 그는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다.
취객이 비틀거리면서 상반신을 숙였다.
이맛살을 찌푸린 이재동은 커다랗게 발을 떼어 그의 앞쪽을 지났다.
그 순간 이재등은 허리가 선뜻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무의식중에 상반신을 틀어
옆쪽을 바라보았다.
취객이 그와 몸을 부딪쳐 온 것이다.
사내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날카로운 눈빛과 꾹 다문 입술은
취한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 다음 순간 이재동은 뱃속에서 끓어 오르는 신음 소리를 뱉어냈다.
옆구리의 한쪽에 극심한 통증을 느긴 것이다.
"이봐, 이 새끼, 저리 못 비켜?"
뒤따라 걷던 부하 한 명이 외치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 왔다.
"어어, 저 새끼 ."
다른 부하 한 명이 소리를 쳤고 그들은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상반신을 숙이는 이재동과 차도를 뛰어 건너는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부하 한 명이 이재동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형님 , 형 님 "
옆구리를 움켜쥔 이재동이 머리를 들었다.
흐린 시선이었다.
부하는 움켜쥔 그의 두 손가락 사이로 거무스레한 물기가 번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어어어 ‥‥‥‥
이재동이 머리를 들고 길게 신음 소리를 뱉어냈다.
"형님!"
부하가 그의 어깨를 쥔 채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들 주위로 몰려들었고
다른 한 명은 사내를 쫓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파도 클럽의 밀실에 앉아 있던 안재일은 허둥거리며 들어선 부하를 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형님, 이재동이가, 요 앞 길가에서 부하가 손을 들어 옆쪽을 가리켰다.
"칼에 찔렀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누구한테?"
"장우길입니다. 김승진이 보았답니다. "
"장우길?"
턱을 치켜든 안재일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장우길이라면 구찌 클럽에 있다가 천일준을 불구자로 만들고는 튄 놈이다.
그가 지금 김원국의 일당과 몰려다니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런 빌어먹을 "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안재일은 부하를 쏘아보았다
"그래서, 그 새끼는 어떻게 되었어?"
"도망쳤습니다. 애들이 쫓아갔지만, 아직 , "
"이런 병신 같은 놈들, 애들을 모아라. "
"예, 형님 "
몸을 돌린 부하가 방을 뛰쳐나가자 안재일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얼굴이 나무 토막처럼 굳어진 그는 손을 뻗어 휴대폰을 쥐었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박용근은 목을 좌우로 저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무섭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왜? 무슨 일 있소?"
이무섭이 묻자 박용근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예, 김원국의 부하들이 칼부림을 했다고 합니다. "
"김원국의 부하라니? 누구 말이오?"
이무섭이 술잔을 내려놓고 상체를 세웠다.
"누가 다쳤소?"
"장우길이라고 구찌 클럽에서 난동을 부리고 튄 놈이랍니다.
그리고 찔린 놈은 우리 애들이 아닙니다.
정기욱 업체의 상무라는데,이름은 모르겠다는군요."
"이거 밤거리가 뒤숭숭해서 야단났습니다. 이놈들을 어서 찾아내 야겠는데."
이무섭이 힐끗 그를 바라보고는 다시 술잔을 들었다.
북한산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서울 외곽의 갈비집 안이었다.
그들은 방안에 앉아 걀비 안주로 양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바깥 쪽의 흘에서는 발자국 소리 한번 들리지 않았다.
식당은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다른 손님은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사장, 나는 마찰을 원하지 않았어요.
정 사장과 박 사장은 김원국의 세력이 소탕되는 데 각각 일조를 했고
지금은 그 공백을 메우는 데 필요합니다. "
이무섭의 차분한 말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박 사장도 알고 계시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
둥근 얼굴을 든 박용근이 부리부리한 눈을 굴려 이무섭을 바라보았다.
"전부터 정기욱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버려 둔 겁니다. "
머리를 끄덕인 이무섭이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씹어 삼켰다.
"김원국의 일당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어요.
놈들은 닥치는 대로 우리를 공격할 겁니다.
일부러 사회를 혼란시켜서 정부의 기능을 약화시키려는 거요.
국민에게 불안감을 심어 주려는 의도지요."
박용근이 잠자코 있자 이무섭이 입술 끝을 비틀면서 웃었다.
"놈들은 당한 일을 교본으로 적어 놓은 모양이오.
어리석은 짓이 지만 왜 성과는 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며칠 전에는 안정태의 수금 사원이 당했고. "
"우린 철저히 경비하고 있습니다. 인원도 늘렸어요.
그까짓 놈들은 합쳐 봐도 몇십 명 안됩니다. "
이무섭이 입맛을 다셨다.
"방심은 안돼요. 놈들이 기반은 잃었지만 우두머리는 대부분 살아 있어요."
"김원국이도 서울에 있다는 증거를 잡았습니다 인천 근처의 별장에서 묵고 있다가
경찰이 들이닥치기 직전에 거처를 옮겼어요.
놈은 당당히 흔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
"경찰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겁니다. "
"이제 그럴 사람도 없어요."
박용근이 눈을 점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새벽 2시가 넘도록 술을 마시고 있지만 이무섭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얼굴색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난 오늘 그 말씀을 드리려고 박 사징힘을 모신 거요.
세 조직이 협력해서 김원국의 테러를 막아야 한다는 것,
지금은 그렇게 해야 할 때입니다. "
이무섭이 머리를 들고 박용근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짙은 눈썹 밑의 날카로운 시선과 부딪치자 박용근은 탁자 위의 술잔을 쥐었다.
이무섭이 말을 이었다.
"각 조직의 조정은 내가 합니다 그것을 분명히 말씀 드리고 싶어서요.
자신의 위치에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를 불신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나 모르게 세력 확장이나 지역 정리를 하실 수는 없습니다. "
가볍게 헛기침을 한 박용근이 술잔을 들어 한모금을 삼키고 내려놓았다.
"그건 말씀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는 술기운에 불카해진 얼굴을 펴고 웃었다
"우선 김원국이나 잡고 보지요."
'소설방 > 밤의 대통령' 카테고리의 다른 글
3 . 벌거벗은 여자 (0) | 2014.12.06 |
---|---|
2. 지옥의 밤거리 (0) | 2014.12.06 |
밤의 대통령 제 2부 -3권 (0) | 2014.12.06 |
8. 습격 (0) | 2014.12.06 |
7. 수송 작전 (0) | 2014.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