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평양으로 18
그 후의 일들
이로써 장장 7백여 년에 걸친 전국 시대는 막을 내리고 한반도에서는
새로운 통일신라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신라에 패한 뒤 당나라는 평양성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신성(新城)으로 옮겼고,
요동의 불복하는 무리에 대해 유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에 보장왕을 요동주도독조선왕(遼東州都督 朝鮮王)으로 삼고 부여융을
웅진도독대방군왕(熊津都督 帶方郡王)에 봉하여 양국의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보장왕은 요동에 와서 은밀히 말갈과 내통하다가 이치에게 발각되어
다시 앙주(?州:혹은 공주 ㎉州라고도 함)로 불려가고 말았다.
그는 서기 682년에 죽었다.
당에서는 그에게 위위경(衛尉卿) 벼슬을 추증하고 낙양으로 맞아들여 그 무덤에 비를 세웠다.
이후에도 당은 고구려 유민들을 하남(河南), 농우(?右) 등의 여러 주와 요동의 옛 성터에
나누어 살게 하였지만 대개는 신라에 도망하고, 남은 무리들은 말갈과 돌궐 등지로 흩어져
드디어 고씨(高氏)의 군장(君長)은 끊어지고 말았다.
부여융 또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전날 외백제가 있던 요동 금주만의 대방(帶方) 땅에서 죽었다.
당나라 무후는 부여융의 손자 부여경(扶餘敬)에게 관작을 이어받아 대방을 통치하게 하였으나,
발해가 건국한 뒤 그 지역을 차지하므로 드디어 부여씨(扶餘氏)의 국계(國系)도 처음 일어났던 곳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던 송화강 유역에서 크게 번성한 대중상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모아 대진국(大震國) 발해를 세운 것은 698년의 일이다.
발해는 그로부터 2백 년간 존속하며 번창하다가 당이 망한 후 급속히 성장한 거란에게 멸망하였다.
부여융을 따라갔던 백제의 마지막 명장 흑치상지는 좌령군 원외장군과 양주(洋州:섬서성 서향현)
자사로 복무하다가 678년,
당이 토번과 벌인 전쟁에서 대공을 세우고 좌무위장군 하원도(河源道:서녕시) 경략부사로 승진했고,
이듬해에는 역시 토번과 싸움에서 크게 이겨 하원도를 다스리는 경략대사가 되었다.
그 후에도 그는 해마다 토번, 돌궐과 싸워 이르는 곳마다 대승을 거두고 내란(서경업의 반란)까지
평정하여 그 벼슬이 연연도 부대총관, 강남도 행군대총관, 좌무위대장군, 우무위대장군, 검교좌우림위, 신무도 경략대사 등으로 승승장구하였다. 흑치상지는 이다조, 왕구언 등의 걸출한 당나라 장수들을
휘하에 거느렸을 뿐 아니라 돌궐 군대를 북방 사막 지대로 몰아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마침내는 그 공으로 연국공(燕國公)의 작위와 식읍 3천 호를 하사받고 연연도 대총관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시운이 불우한 탓이었을까, 혹은 나라를 잃은 장수의 당연한 말로였을까.
그즈음 제위를 탐내던 측천무후는 고밀(告密)이라는 일종의 밀고 제도를 만들어 당나라의 수많은
충신과 장수들을 숙청했는데, 흑치상지도 주흥(周興)이라는 악질 밀정의 무고로 응양장군 조회절(趙懷節)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가 교형(絞刑)에 처해지니
이는 무후가 황제에 등극하기 직전인 689년 10월, 그의 나이 60세 때의 일이다.
당은 법민왕이 살았을 때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음으로써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다가
태자 정명(신문왕)이 보위에 오르자 책봉사를 파견하고 다시 외교 관계를 재개하였다.
신라에 귀화한 고구려 왕자 안승은 온사문의 며느리인 이씨와 사이에 자식을 낳고 금마저에서 살았으나 당나라와 전쟁이 끝난 뒤인 680년, 법민이 의관의 딸이자 자신의 질녀를 아내로 맞게 하여 신라 왕실의 사람으로 편입시켰다.
훗날 법민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명은 안승을 잡찬으로 삼고 김씨 성을 주어 금성에 불러들이고
좋은 집과 전지를 하사하였다.
안승을 따라왔던 검모잠과 고연무 등도 대부분 신라의 품계와 벼슬을 하사받았다.
각간 천존은 전쟁이 끝난 3년 뒤(679년)에 천수를 마쳤고, 매초성에서 공을 세우고
복권된 원술은 벼슬이 잡찬에까지 올랐으며, 시득도 아찬으로 승차해 금성에서 이복형제들과
나란히 벼슬을 살았다.
그러나 법민을 도와 공을 세운 이의 뒤가 모두 화려했던 것은 아니어서 정명이 즉위한
바로 그해(681년), 잡찬 흠돌과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이 반역죄를 짓고 처형되었다.
특히 용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흠돌은 왕비의 아버지이기도 했는데,
정명은 장인을 처형한 뒤 곧바로 왕비를 궁에서 내쫓고 새 왕비를 맞아들였다.
또한 병부령을 거쳐 상대등까지 지낸 군관도 흠돌 등을 치죄하는 과정에서 불고지죄가 드러나
아들 한 명과 더불어 자진했다.
강수는 신문왕 정명과 같은 해(692년)에 죽었다.
나라에서는 강수의 죽음을 슬퍼하여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는데,
강수의 식구들은 이를 사사로이 갖지 않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 불사에 썼다.
그의 아내는 먹을 것이 궁핍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대신들이 이 말을 듣고 왕에게 알리니 왕은 따로 조 1백 석을 하사했다.
그러나 그 아내는 사양하며 말하기를,
“첩은 천한 몸으로 의식을 남편에 의지하고 국은을 많이 입었습니다.
지금은 혼자 몸이 되었사온데 어찌 감히 다시 후사(厚賜)를 받으 오리까.”
하며 끝내 재물을 받지 않고 낙향했다.
명장 죽지는 진덕, 태종, 문무, 신문의 4대를 섬기는 재상이 되었고,
김문영은 효소왕 대에 상대등을 지냈다.
흔히 통일의 3대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컫는 왕제 인문은 전쟁이 끝난 뒤
옥에서 풀려나 문무왕 19년(679년)에는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진군대장군행우무위위대장군(鎭軍大將軍行右武威衛大將軍)으로 전직되고,
효소왕 3년(694년)에는 보국대장군상주국임해군개국공좌우림군장군
(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으로 임명되었다가
그해 4월 29일 당경(唐京)에서 병사하니 이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인문의 부고를 듣자 측천무후는 크게 애도하며 수의를 내리고
조산대부 육원경(陸元景)과 판관 조산랑(朝散郞) 등에게 명하여 영구를 신라로 호송하였다.
효소왕은 슬피 울며 인문에게 태대각간의 벼슬을 추증하고 유사에 명하여
이듬해인 10월 27일, 금성의 서원에 장사지냈다.
인문은 일생을 두고 일곱 번 당나라로 들어가 숙위했는데 그 날짜를 모두 합산하면
장장 22년이나 되었다.
신문왕 대에는 고구려의 관리들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었는데,
백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국의 관등에 준하였다. 또한 신라 백성이 된 모든 유민들에게
군문을 개방하고 신라인과 차등 없이 군사로 복무할 기회를 주었으니 고구려민은 황금서당,
말갈민은 흑금서당, 금마저에 살던 보덕성민은 벽금서당과 적금서당,
그 밖의 백제 잔민들로는 청금서당을 만들어 기왕에 있던 백금서당, 장창당 등과 더불어
구서당(九誓幢)이라 불렀다. 구서당은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군대가 되었다.
해마다 전쟁을 치르느라 지나치게 기력을 소진한 탓이었을까.
선왕의 유업을 계승해 삼국통일을 완수한 삼한의 시조대왕 법민은 전쟁이 끝난 5년 뒤인
신사년(681년), 재위 21년 만에 55세의 아직 젊은 나이로 붕어했는데
그 날짜가 공교롭게도 김유신의 죽은 날과 같은 7월 1일이었다.
부음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거리로 뛰쳐나와 하늘을 원망하며 서럽게 울었다.
삼한 땅에 사는 백성들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성군의 요절을 절통해하는 데는 덜한 사람, 더한 사람이 없었다.
군신들은 왕의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고 유언에 따라 동해 어귀의 큰 바위에 장사를 지냈다.
그 뒤 세상에 전하기를 왕은 우리나라를 지키는 수호용(守護龍)이 되었노라 하고
장사 지낸 바위를 대왕석(大王石)이라 일컬어 오늘에 전한다.
또 한 사람의 영웅호걸이 타계하는 터에 미리 나타나는 징후가 없을 수 없어,
임금이 돌아가시던 해 정월 하룻날에는 종일토록 날이 어두워 밤과 같았고,
5월에는 지진이 났으며, 유성이 삼대성(參大星)을 범하는 일도 있었다.
또 6월에는 천구성(혜성)이 서남 곤방(坤方)에 떨어지는 기변들이 속출하였다.
왕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이 다한 줄 알고 태자 정명과 가까운 중신들을 불러 유훈을 남겼는데,
그 또한 불세출의 대인(大人)다운 마지막 자취인지라 이를 옮김으로써 긴 이야기의 마침표를
대신 코자 한다.
과인은 국운이 어지럽고 전쟁하는 때를 당하매 백제와 고구려를 쳐서 강토를 평정하였고,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하려는 자는 손을 붙잡아 원근의 땅을 고루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가르침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고 산 사람을 추모하거나 공덕을 시상함에 한 치의 소홀함이나 편중됨이 없이
관작을 골고루 나눠주었다.
병장기는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들은 평화의 터전에서 천수를 누리게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이고 덜어서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니 민생이 안정되고
나라의 우환이 없어졌다. 창고에는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감옥은 텅 비어 무성한 풀밭으로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를 대하매 부끄러울 일이 없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바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풍상을 겪다가 드디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리고,
정치와 교화(敎化)를 근심하고 걱정하다가 더욱 병이 깊어졌다.
운이 가고 이름이 남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가지이니 홀연히 지하로 돌아간들 무슨 유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어진 덕을 쌓으며 오랫동안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모든 재상들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가는 사람을 보내는 의리를 어기지 말고, 있는 사람을 잘 섬기는
예절을 등한히 하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촌각도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될 막중한 자리이므로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세월이 흐르면 산천은 변하고 세대 또한 옮겨가는 법이다.
오왕(吳王:손권)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금빛 광채를 볼 수 있으며, 위주(魏主:조조)의
서릉(西陵)에서도 오직 동작(銅雀:동작대)의 이름만 들릴 뿐이다.
옛날 만기(萬機)를 다스리던 뛰어난 영주도 마침내 한줌 무상한 흙무덤을 이루니
초부와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옆으로 구멍을 팔 따름이다.
이렇듯 분묘란 한낱 재물만 낭비하고 거짓된 평가만을 사책(史冊)에 남길 뿐 헛되이
인력(人力)만 노비(勞費)하고 유혼(幽魂)을 오래 머물게 하지는 못한다.
고요히 생각하면 그와 같은 일은 나의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숨을 거두고 열흘이 되거든 궁문 밖의 뜰에서 서국(西國:인도)의
예(불교 의식)에 따라 불로 소장(燒葬:화장)할 것이며, 복기(服期:상복을 입는 기간)의
경중(輕重)은 본래 상규가 있거니와 상(喪)의 제도는 힘써 검약을 좇을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 군, 현의 과세(課稅)는 그것이 꼭 필요하지 않거든
마땅히 헤아려 폐지토록 하고, 율령과 격식도 불편함이 있거든 즉시 편리하게 고치도록 하라.
나의 이러한 뜻을 원근에 포고하여 널리 알리고 주관하는 사람들은 이를 잘 시행할지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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