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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장 평양으로 13

오늘의 쉼터 2014. 12. 5. 11:44

제36장 평양으로 13

 

 

한편 부친의 장례식에 떳떳하게 나서지 못한 또 한 아들이 바로 원술이다.

적자 다섯 가운데 원술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라 평소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아들로 누구한테나

원술을 첫손에 꼽곤 했다.

그러나 원술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기백이 출중한 반면 그 성품이 유달리 모가 나고 교만하여

형을 대할 때도 공손하지 않고 아우들을 대할 때도 자애롭지 못했다.

화랑이 되어 무리를 이끌고 다니면서는 민가에 함부로 피해를 끼칠 때도 있었고,

낭도들을 가혹하게 다루어 원성을 사기도 했다.

사촌이자 흠순의 아들인 반굴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칼에 죽어 만인의 칭송을 받을 때에도

원술은 오히려 반굴을 비난하며,
“적장을 이겼다면 모를까 져서 죽임을 당한 반굴이 어찌하여 영웅이란 말인가!

내가 만일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결코 반굴과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고 호언하여 저를 따르던 낭도들로부터도 빈축을 샀다.

더구나 아버지 유신의 공으로 젊은 나이에 문벌이 높아지고 장수 노릇까지 하게 되니

누구 앞에서건 안하무인으로 설쳐대기 일쑤였다.

그러던 원술이 석문벌에서 패하여 돌아오자 유신으로서는 일견 괘씸한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기왕 용서를 해줄 양이면 차제에 사람의 도리를 가르쳐 못된 버릇을 고쳐놓아야겠다 결심했다.

“천하의 이름난 사람들은 대개 젊어서 큰 고초를 겪게 마련이지만 내 자식들은 그렇지를 못해

늘 걱정이었는데, 이제 원술이 사람 구실을 할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다행이오.

제 놈이 헤치고 나오면 한 생을 얻는 게고, 그것조차 못한다면 하는 수 없는 것이니

부인은 티끌 같은 정에 연연하여 자식의 앞길을 망쳐놓는 일이 없도록 하오.”

이런 말로 두 내외가 함께 마음을 다잡았던 것인데,

그만 끝을 보지 못하고 유신이 먼저 천수를 마치고 말았다.

아버지 살아생전은 고사하고 장례마저 지내지 못하게 된 원술은 크게 낙담한 나머지

한때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자 했다.

그는 혼자 산 곡간을 정처 없이 떠돌며 한탄과 자책으로 소견세월을 하다가

이듬해 유신의 소상(小祥)에 미복으로 참례한 뒤 집안끼리 가깝던

소성거사(小姓居士) 원효(元曉)를 찾아가 출가할 뜻을 밝혔다.

원효가 원술의 얘기를 묵묵히 다 듣고는,

“도령은 아직도 선친의 진적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소.”

하고서,

“일생을 전장에서 보내신 선친이시오.

싸움에 이기고 지는 것은 매양 있는 법인데 어찌 석문벌의 일 하나만 가지고 그토록 화를 내셨겠소?”

하고 물었다.

원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러기에 저는 더욱 선친의 마음을 모르겠습니다.”

하자 원효가 원술을 물끄러미 보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태대각간께서는 고금을 통틀어 예사로운 분이 아니셨으니

자식을 귀애하는 마음 또한 어찌 범부와 같았겠소.

석문벌의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소승이 병문안을 갔더니

이제 원술이 사람 구실할 때를 얻었다며 기뻐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소.

이래도 선친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시겠소?”

원술은 원효를 통해 비로소 유신의 뜻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자

새삼 설움이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

나라에는 패장이요,

집에서마저 쫓겨난 뒤로 원술도 조금씩 철이 들어가고 있던 터였다.

이를 알아차린 원효가 다정한 어투로 원술을 달랬다.

“아직 태평성세가 오지 않았는데 도령이 출가를 하는 것은 필경 선친의 유지가 아닐 것이오.

태대각간께서는 평소 당신의 뒤를 이을 만한 아들로 누구한테나 도령을 첫손에 꼽으셨으니

이를 잘 헤아려보시오.”

이때 원술은 한산주 북변 아달성에서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낭도였던 소나(素那)에게

몸을 의탁하여 지내고 있었다.

그는 금성을 떠나 다시 아달성으로 돌아가다가 돌연 길에서 마음을 바꿔 가림군

소수로 있던 이복형 시득을 찾아갔다. 전날 유신이 시득을 집으로 데려와 형제간에

상견례를 시킬 때 다른 형제들은 모두 방에 들어가 시득과 맞절을 했지만 유독 원술만은,

“적자가 어찌 서자에게 절을 한단 말이냐?”

하고서 만나지 조차 않으려고 했다.

유신이 몇 번이나 불러 할 수 없이 가서도 끝내 절은 하지 않았고,

유신이 가락국의 법도를 말하며 호형호제를 당부했을 때도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내가 저를 만고에 형이라 부를 일이 없다.”

하고 혼자서만 코 방귀를 뀌었다.

그 뒤 백수성에서 성주와 원군의 장수로 만났을 때 시득은 원술이 반가워,

“아우님 오셨소!”

하고 덥석 알은체를 하니 원술이 시득을 왈칵 밀쳐내며,

“누구를 보고 함부로 아우래?”

여러 사람 앞에서 무안을 주었다.

그랬던 원술이 시득을 제 발로 찾아간 것은 그사이 인생의 쓴맛을 보고

사람이 판연히 달라진 거 라고밖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런데 유신이 죽고 나서 고단한 세월을 살기는 시득 또한 원술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가림군 갯가에서 선박에 관한 일을 맡아보고 있었는데,

외사정이 돌고 난 뒤 외관의 관리가 대거 바뀔 때 새로 부임한 태수가 하필이면

원천과 교분이 두텁던 대관(大寬)이란 자였다.

 진골 대관이 시초에는 시득이 누군지를 모르고 잘 대해주다가

그가 전에 백수성 성주로 있었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는,

“원천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시득이 바로 너였구나.”

하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시득이 원체 과묵하고 덤덤한 사람이라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말이 없으니

면전에서 알랑거리는 자를 좋아하던 대관은 이를 시득의 천성인 줄 모르고,

“시득이란 자가 꽤나 오만불손한 위인이라고 하더니 겪어보니 과연 그렇구나.”

자신을 깔본다고 여겨 저 또한 시득을 탐탁찮게 대했다.

그때부터 대관은 기강을 잡겠다고 단단히 벼르고서 틈만 나면

시득의 거처에를 불시에 들이닥쳐 혹시라도 트집 잡을 일이 없나 눈알을 살천스레 굴려대곤 했다.

시득이 대관의 휘하에서 고된 시집살이를 반년이나 하던 끝에 하루는 밤에 꿈을 꾸었는데,

죽은 유신이 나타나 말하기를,

“얘야, 내가 너무 급히 오느라고 너한테 주려던 것을 주지 못했으니

내 기일에 맞춰 황룡사로 오너라.”

하였다.

시득이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뜨니 꿈에 본 유신의 모습과 육성이 너무나도 또렷해

차마 꿈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럭저럭 7월 초하룻날이 목전에 닥쳐와 시득이 대관을 찾아가서,

“제가 아직 탈상을 하지 못한 몸으로 선친의 제사에 다녀올까 하니 며칠 번을 빼주십시오.”

하고 정중히 부탁을 하였더니 대관이 대뜸,

“너의 아비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참 날도 더럽게 받고 죽었다.”

하고서,

“조만간 유신 장군의 기일이 돌아와 나도 금성에를 가야 하는데 너마저 없다면

이곳의 공무는 누가 보느냐?

네 아비 제사도 중하지만 그보다는 유신 장군의 기일이 훨씬 더 중하니

내가 다녀오고 나거든 가거라.”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시득이 행여 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될까 누구한테 건 자신이 유신의 서출임을 철저히 숨겼고,

또 설사 누가 용케 알아 그런 소리를 해도 동명이인이라고 우겨서 내막을 아는 사람이 드문 터였다.

임금까지 참석한 유신의 소상에는 경향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다시 구름처럼 모여들어

고인의 음덕을 기렸는데, 임지에 발이 묶여 기일을 그냥 넘기자니 시득의 절통한 마음이야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는 구슬픈 감회를 풀길이 없어 생전 출입하지 않던 민가의 색줏집에 가서 기생과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잠이 들었다.

꿈에 시득이 황룡사지 싶은 곳에를 갔더니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인 법당에 유신이 눈을 감고 앉았다가 시득이 들어서자마자

홀연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는,

“너는 어찌하여 이제야 왔느냐!”

무서운 표정으로 꾸짖고서 미처 변명도 하기 전에 불전을 무너뜨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라에 소문이 돌기를 황룡사 앞마당에 갑자기 돌풍이 일어나

불전을 무너뜨렸다고 하므로 시득의 마음이 더욱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대관을 기다리다 못해 허락도 받지 않고 금성으로 달려갔다.

처음에는 천관사로 갈까 싶었으나 꿈에 황룡사로 오라던 유신의 당부가 떠올라

황룡사로 갔더니 객꾼들은 모두 돌아가고 가까운 지친들만 남아 있었는데,

마침 시득을 알아본 이복아우 장이가,

“시득 형, 왜 이제야 오셨소? 어머니께서 형을 얼마나 기다리신 줄 아시오?”

하고는 시득의 팔을 이끌어 지소부인에게로 데려갔다.

시득을 본 지소부인이 일변으론 꾸짖고 일변으론 반가워하며,

“자네가 이제 보니 꽤나 무정한 사람일세.

내가 작년부터 자네한테 줄 것이 있어 눈이 빠지게 기다렸네.”

하고는 장이에게 집으로 가서 유신이 쓰던 보검을 가져오도록 했다.

“이 칼은 돌아가신 어른께서 향도를 이끄시던 약관의 나이에 중악(中嶽:팔공산)의 석굴에서

난승(難勝)이라는 도인을 만나 얻으신 것이네.

그때 어른께서는 이미 삼한일통의 대의를 품고 하늘에 정성껏 빌어 영험을 본 것인데,

이 칼이 아니었으면 천수를 누리지 못했을 거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네.

이제 이 보검을 자네가 간직하시게.”

“그토록 귀중한 보검을 하필이면 왜 제게 주십니까?

저는 이런 신물(神物)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지소부인의 말에 시득이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니 부인이 온화한 낯으로,

“어른께서 특별히 자네한테 주라는 유언이 있었고 내 뜻 또한 그러하이.

부디 이 보검을 가져가서 아버지의 뒤를 이으시게나.”

하였다. 시득은 너무도 흔감한 까닭에 몇 번이나 더 사양했지만

부인의 뜻이 워낙 완강한지라 두 번 절하고 엎드려 양손으로 칼을 받았다.

그러나 보검을 얻어 임지로 돌아오자마자 시득은 다짜고짜 옥사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태수 대관이 임지를 벗어난 죄를 거론하면서 노발대발하여 시득을 형틀에 묶어놓고 곤장을 쳐댔는데,

그래도 시득이 매만 맞을 뿐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자 나중에는 시득의 처자까지 잡아들여

징역을 살렸다.

원술이 시득을 만나러 가림군에 왔을 때는 한창 그럴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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