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6장 평양으로 15

오늘의 쉼터 2014. 12. 5. 12:12

제36장 평양으로 15

 

 

평소 원술과 소나가 아달성의 장정들을 모아놓고 칼 쓰는 법을 가르칠 때

모여든 구경꾼들이 탄복을 금치 못하던 것은 구칠검법(九七劍法)이라 일컫던 속검술이었다.

그것은 나뭇잎 하나를 허공에 띄우고 그것이 땅에 떨어질 때까지 빠르면 아홉 번,

느려도 일곱 번 정도로 조각을 내는 것이었는데, 흔히 속검의 절정이라 일컫는 도검술이었다.

소나는 속검을 쓰는 자들이 입신의 경지라 찬탄하는 구검(九劍)의 단계를 지난 사람이었다.

허리를 잔뜩 낮춰 무리를 지나치며 휘두른 속검에 말갈병 10여 명은 거의 동시에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소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말을 몰아 또 다른 무리를 향해 달려갔다.

성의 도처에 깔려 있던 말갈병들은 약탈을 하는 데 정신이 팔려 한동안 소나가 나타난 것을 알지 못했다. 주둥이가 터지게 생쌀을 우물거리는 놈, 가축을 잡아 생고기를 먹는 놈들이 부지기수였고,

얼마만큼 배를 불린 축들은 재물을 탐하거나 성안의 여인들을 붙잡아 겁탈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소나와는 반대편에서 또 한 사람의 검사가 무인지경 말을 달리며 약탈자를 응징하고 있었으니

바로 원술이었다.

소나의 집에 식객으로 얹혀 지내던 원술은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수련을 나갔다가

말갈병의 침략 소식을 들었다.

그는 태수 한선이 어렵게 대하는 바람에 성중의 노역에서 늘 열외가 되어 지냈고,

그 바람에 성에 남아 있던 유일한 장정이 되었다.

원술은 곧 소나의 집으로 달려와 부리나케 무기와 갑옷을 갖추고 말에 올랐다.

원술이 소나를 발견한 것은 혼자서 근 6, 70명의 목을 치고 난 뒤였다.

모여 있던 말갈병들이 뱃길처럼 갈라지며 우왕좌왕 달아나는 곳을 보니

소나가 피를 덮어쓴 채 열심히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원술은 급히 소나가 싸우는 곳으로 달려가며 소나에게 쫓겨 달아나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겼다.

“자, 이것 받게나!”

소나에게 가까이 다가간 원술은 집에서 가져 나온 소나의 칼을 훌쩍 집어던졌다.

그제야 원술이 왔음을 알아차린 소나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조반은 드셨는가?”

“아무렴. 든든하게 먹었네.”

“이것들이 죄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어림잡아 1천 명쯤은 되지 싶네.”

“하면 자네는 마구간으로 가서 군마에 무기를 실어 후문으로 보내게나.

우리 군사들이 후문에서 기다리고 있을 걸세.”

“혼자서 괜찮겠는가?”

“염려 말게. 이까짓 말갈의 오합지졸쯤은 1만이라도 두렵지 않네.”

원술이 성안의 말먹이는 곳으로 달려가고 나서도

소나는 종횡무진 말을 달리며 한껏 말갈병을 유린했다.

원술이 건네준 손에 익은 칼이 있으니 싸우기가 한결 편했다.

그의 화려하고 능란한 검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했다.

이근행이 소나와 원술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럴 무렵이다.

며칠째 굶주렸던 그도 부장 4, 5명과 함께 어느 민가에서 밥을 훔쳐 먹고 있다가

안색이 백변해 달려온 군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큰일 났습니다! 성 중에 미친 놈 둘이 말을 달리며 우리 군사들을 해치는데

마치 감나무에서 감을 따듯이 목을 벱니다!”

“밥을 먹다 죽은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열씩 스물씩 덤벼들어도 죽는 것은 되레 우리 군사들뿐입니다!”

“벌써 그 두 놈의 손에 죽은 자가 1, 2백을 헤아립니다!”

이근행은 밥을 입 속에 구겨 넣은 채 벌떡 몸을 일으켰다.

“두 놈이 1, 2백을 죽였다고?”

“그렇습니다.”

“그놈들이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이냐?”

“한 놈은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고 나머지 한 놈은 아까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자!”

이근행은 부장들을 이끌고 소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얼마를 안 가서 과연 한 장수가 번개 같은 솜씨로 칼을 휘두르는 광경과 마주쳤는데,

이근행이 보는 앞에서만도 3, 4명이 다시 목숨을 잃었다.

“대체 저것이 사람이냐, 귀신이냐?”

시초에는 상대를 하려고 달려왔던 이근행도 막상 그가 칼 쓰는 것을 목격하고는

나설 마음이 싹 달아났다.

“저건 속검이다.

속검을 쓰는 자는 하나라고 얕잡아봐서는 큰일 난다.

 어서 활 부대를 데려오라!”

성급히 뛰쳐나가려는 부장들을 가로막고 이근행이 말했다.

지시를 받은 부장 하나가 급히 달려가 활을 든 궁수 20여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들은 범처럼 날뛰는 소나를 포위하고 일제히 활을 쏘았다.

“됐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지켜보던 이근행이 마상에서 박수를 쳤다.

궁수들이 쏜 화살 가운데 두어 개가 소나의 어깨와 등에 박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활을 맞은 소나는 조금도 아파하거나 머뭇거리는 기색이 없었다.

“이놈들!”

오히려 그는 더욱 맹렬한 기세로 칼을 휘두르며 궁수들을 향해 달려들더니

미처 도망가지 못한 궁수 10여 명을 단칼에 베어 죽이는 것이었다.

“안 되겠다, 달아나자!”

혼비백산한 이근행은 부하들을 이끌고 정신없이 도망갔다.

이렇게 소나는 혼자 말을 탄 채 저녁까지 싸웠는데,

그가 죽인 말갈병의 숫자는 대략 3백여 명을 헤아렸다.

하지만 이근행은 휘하의 궁수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소나를 그의 집 앞에서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제깟 놈이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다지만 어찌 수백 개의 화살을 칼 한 자루로 막아내겠느냐!”

이근행의 명령을 받은 궁수들은 소나를 향해 일제히 화살을 퍼부었고,

수백 개의 화살이 벌떼와 같이 날아들자 마침내 소나도 온몸이 고슴도치처럼 변하고 말았다.

그는 그처럼 참혹한 꼴로도 당장 쓰러지지 않고 얼마간을 더 분전하다가 마지막에는

구혈에서 피를 쏟으며 비틀거렸다.

그리곤 갑자기 궁수들을 향해 돌진하여 한 놈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는 그대로 머리를 박고 죽으니

붙잡힌 궁수도 함께 머리가 깨져 덩달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지독한 놈이다!”

이근행은 눈살을 찌푸리고 치를 떨었다.

후문에서 기다리던 태수 한선이 수백 명의 아달성 장정들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이닥친 것은

소나가 죽은 직후였다.

그들은 원술이 풀어 보낸 말을 타고 일제히 성안으로 흩어져 말갈병들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소나에게 기가 질렸던 이근행은 수백 명의 장정들이 나타났다는 말에 더럭 겁부터 났다.

“먹을 것을 챙겼으면 그만 매초성으로 돌아가자!”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아달성을 도망쳐 서둘러 매초성으로 돌아갔다.

말갈병들이 물러가고 나서 원술은 고슴도치가 되어 죽은 소나의 참혹한 시신을 발견했다.

그는 말에서 뛰어내려 소나의 주검을 부여잡고 짐승처럼 울부짖다가

이내 벌떡 일어나 태수 한선과 장정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소나는 죽음으로써 성을 지켰는데 그의 덕으로 살아남은 우리가 어찌 소나의 원수를 갚지 않겠는가!”

한선을 위시한 장정들도 슬프고 화가 나기는 원술과 마찬가지였다.

“매초성으로 갑시다!”

“반드시 소나의 원수를 갚읍시다!”

분노한 이들은 그 길로 말을 달려 이근행의 뒤를 추격했다.

한편 인근의 다른 성으로 약탈을 나갔던 군사들도 성민들의 목숨을 건 악착같은 저항에 크게 당황했다. 칠중성에서는 소수 유동(儒冬)이 결사대를 조직해 죽음을 불사하며 극렬히 응전하였고,

유동이 전사하고 나자 결사대의 기세는 오히려 더욱 거세게 달아올랐다.

적목성을 침략한 말갈병 1천도 현령 탈기(脫起)가 이끄는 향군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드는 바람에 큰 낭패를 보았으며,

석현성의 당병은 비록 성은 얻었지만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에게 군사의 절반을 잃고 말았다.

당초 이근행이 자신의 체면을 과시하고자 데려온 거란과 말갈의 병사들은 대부분 싸움에 능한

군사들이 아니었다.

숫자로는 20만을 헤아렸지만 그 중에 쓸 만 한 자는 1만이 채 되지 못했고,

유주와 병주에서 급히 끌어 모은 당병(한족) 2천 정도가 그나마 병기를 다룰 줄 알았다.

그런데 이들이 약탈을 나갔다가 수백 명씩 돌아오지 못하니

이근행으로선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석현성에선 비록 선백과 실모를 죽이긴 했지만 목숨을 잃은 당병의 숫자 또한 1천을 헤아렸다.

적목성의 말갈병도 적장 탈기와 향군의 일부를 죽였으나 성안에는 들어 가보지도 못하고 쫓겨 오자

이근행은 비로소 만만하게 여기던 신라인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거참 이상한 일이다.

지난번 고간과 함께 남역에서 싸웠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칠중하에는 모두 악도리들만 있는 모양이구나.”

그러나 이는 칠중하의 백성들이 특별히 모질어서가 아니라

그사이에 나라의 내분이 사라지고 국론이 하나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삼한일족을 부르짖던 법민왕의 대범한 정책은 산곡간에 흩어진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에게

깊은 신뢰를 주었고, 대당 전쟁의 승리를 의심했던 일부 신라인들도 웅진을 멸한 뒤

임금이 친히 나서서 평양성마저 공취하고 나자 급격히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한 신라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게다가 유민들을 통해 당나라 치하의 폭정과 억압을 생생하게 전해들은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결전의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신라가 크게 떨치고 일어나 삼한을 하나로 아울렀는데,

아무려면 삼한의 백성들이 뭉쳐서 당나라 하나를 당하지 못하겠느냐고 사람들은 말했다.

물러났던 친당파 장수와 관리들이 스스로 뉘우쳐 조정으로 돌아오고,

종작없이 거리를 떠돌며 망국을 논하던 세객들은 일제히 사라졌다.

전날 무열 대왕과 김유신이 계림인과 가야제국의 유민들을 모아 치솟는 불기둥과 같이

단합된 국력을 과시하더니, 그 뒤를 이은 법민왕이 삼한 백성들의 민의를 결집하여

새로운 천하 강국의 역사를 열어가고 있었다.

이름난 모든 병서의 첫 장에 이르기를, 비록 바람 막힌 언덕에 의지하여 한 무리의 농부들로

군사를 삼을지언정 민심이 굳건하면 그 나라는 하늘도 넘볼 수 없는 강국이라 하였거니와,

법민왕의 신라가, 아니 삼한이 바로 그러했다.

이런 사정을 알 길 없는 이근행으로선 그저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칠중하의 백성들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하물며 이때 동원된 말갈과 거란병들은 대부분 마지못해 끌려온 자들이라

어려움에 처하자 불평불만이 팽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칠중하 강변의 다섯 성을 중심으로 이근행의 군사들은 신라 향군들과 대소 18회를 싸웠지만

그 와중에서 다시 6천여 명이나 되는 군사가 목숨을 잃고 전마 3만 필을 빼앗기는 대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설상가상 때는 바야흐로 겨울, 싸움도 제대로 못하는 군사들이지만 먹는 것은 남과 같이

먹어야 하니 날마다 수백 말씩 들어가는 엄청난 식량을 구할 길도 막연했다.

그런 가운데 매초성으로 쳐들어온 아달성 장정들에게 당한 패전은 너무도 뼈저린 것이었다.

특히 질풍신뢰(疾風迅雷)와 같은 기세로 말을 달리며 나무에서 감을 따듯 장졸들의 목을 베는

한 장수를 보자 이근행은 아달성에서 화살에 맞아 죽은 소나가 되살아난 것이라고 믿었다.

“속검을 쓰는 저 장수는 죽지도 않으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구나.”

그런데 누군가가 말하기를,

“저 자는 다름 아닌 김유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니 이근행은 더욱 두려운 마음이 앞서,

“그렇다면 이거야말로 보통일이 아니다.

어서 칠중성과 석현성으로 사람을 보내 군사들을 불러들여라.

아무래도 우리가 방향을 잘못 잡아 온 모양이다.”

하고는 곧 철군 명령을 내렸다. 졸개들뿐 아니라 이때쯤은

이근행 자신도 약속을 어긴 설인귀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하늘을 찔렀다.

그는 어디까지나 설인귀를 도와주러 북방의 군사를 이끌고 왔던 것인데,

정작 설인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니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미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이 시답잖은 용문 촌놈은 끝내 나타나지 않을 모양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만 생고생을 한단 말이냐?”

결국 그는 매초성에 주둔한 지 보름 남짓 만에 군사를 거두어 황급히 북방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이근행은 이듬해 토번과 싸움에 동원되었다가 하원군 군영에서 병사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6장 평양으로 17   (0) 2014.12.05
제36장 평양으로 16   (0) 2014.12.05
제36장 평양으로 14  (0) 2014.12.05
제36장 평양으로 13  (0) 2014.12.05
제36장 평양으로 12  (0) 2014.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