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6장 평양으로 14

오늘의 쉼터 2014. 12. 5. 11:59

제36장 평양으로 14

 

 

원술은 미복 차림으로 가림군에 와서 처음에는 신분을 감추고 사람들에게 물어 시득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시득의 소식을 들어 알게 되자 태수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자니 자연히 자신의 신분도 밝혀야만 했다.

비록 집안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았지만 원술은 세상이 다 아는 유신의 아들이자 왕실의 외척으로,

당대 최고 명가의 자제였다.

게다가 국선에 뽑혀 얻은 우레 같은 명성이며, 젊은 나이로 아찬에까지 오른 고귀한 문벌은

저자의 삼척동자도 익히 알던 바여서 지방 태수인 대관 따위가 넘볼 인물이 아니었다.

“어이쿠, 이게 누구십니까? 원술 도련님이 이 누지에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요?”

원술을 만난 대관이 맨발로 뛰어나와 연방 허리를 굽실댔다.

“태수에게 거두절미하고 한말씀 드리겠네.”

“우선 안으루 좀 드시지요. 궁벽한 곳이지만 제가 정성껏 뫼시겠습니다요.”

“들어가나마나, 그대는 무슨 연유로 나의 형과 그 가솔들을 옥에 가두었는가?”

원술의 책망하는 소리에 대관은 홀연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가 나의 형님인 시득을 옥에 가두지 않았는가?”

재차 다그치는 원술의 말에 대관은 설마 싶었던지 헤실헤실 웃기까지 했다.

“농담도 잘하십니다.

도령의 형님이야 당나라에서 돌아온 삼광 나리가 있을 뿐인데 어찌 시득을 형이라 하십니까요?”

시득이 원술의 형일 거라곤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한 대관이었다.

그런 대관을 향해 원술은 점잖은 소리로 말했다.

“시득은 나의 하나뿐인 이복형일세.

근자 선친의 기일을 당하매 워낙 마음이 허전하여 형제간의 정리나 풀고자 왔더니

소문에 죄를 짓고 옥사에 갇혀 지낸다고 하니 놀랍고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네.

나의 형님이 대관절 무슨 대역죄를 지었기에 그 식솔까지도 옥고를 치르는지,

아우 된 도리로 반드시 그 내막을 알아야겠으니 어디 자초지종을 말씀해보시게.”

“시, 시득이 도령의 형님이라니 그, 그게 정말입니까요?”

“내가 할 일이 없어 공무를 보는 데 와서 농지거리를 하겠는가?”

비로소 사태의 심각함을 알아차린 대관은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원술이 묻는 말에 답을 할 형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엉겁결에,

“죄송하오나 제게 약간의 말미를 주십시오.

금일 안에 사정을 알아보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바로잡겠습니다요.”

하며 내막을 모르는 듯이 둘러대니 원술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전에 마읍성 성주 원천이란 놈이 하도 형님을 괴롭혀 내가 죽여 버리려 하였는데

당나라 놈들과 싸우느라 그럴 틈을 얻지 못했네.

이제 누구든 내 형님을 시쁘게 여기거나 모함하는 자가 있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니

그대는 부디 내 말을 명심하게나.”

하고 매섭게 오금을 박았다. 원술의 모질고 별난 성품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대관은

엄동에 찬 죽 먹은 사람처럼 사지가 절로 떨렸다.

그는 망설일 것도 없이 전후불계하고 옥으로 달려가 시득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워낙 과문하여 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만 죽을죄를 지었소!”

시득은 대관의 돌변한 태도에 한동안 어리둥절했지만

그의 고백을 통해 원술이 왔음을 알게 되자 비로소 사정을 짐작했다.

그는 애걸복걸하며 사죄하는 대관에게 오히려 부탁하기를,

“선친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을 공을 세울 때까지 태수께서는

이 일을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파설하지 마시오.”

하니 대관이 급한 마음에,

“여부가 있겠소!”

당석에서 쾌히 대답하고는 짐짓 감격한 얼굴로,

“그래서 여지껏 세상에 비밀로 하고 지냈구려.

아,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까닭 없이 공을 미워하였으니 실로 부끄럽기 한량없소.

원천은 나와 동문수학한 사이지만 내가 벼슬길에 나설 적에 그의 집안인 달관의 도움을 받은 터라

나로선 무시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소.”

하며 저간의 얽힌 것을 털어놓았다.

이리하여 옥사에서 풀려난 시득은 원술과 근 보름을 함께 지냈다.

원술은 예전과는 달리 살가운 말투와 공손한 태도로 시득을 깍듯이 형이라 부르며

살아온 옛일을 물었고, 시득은 그런 원술이 고마워 정담 중에 자주 콧날이 시큰해졌다.

시득으로선 적자인 원술이 일변 어려운 것도 사실이라 시종 공대하여 상전처럼 대하니

원술이 사나흘 지났을 때 돌연 가겠다고 나서며,

“형님이 저를 아우로 대하지 않으니 발씨가 미편해 더 못 있겠소.”

하였다. 시득이 적서의 구분을 말하고 또 국법의 지엄함을 들어,

“아우님은 진골이요 나는 6두품인데 어찌 국법을 어기겠소.”

하자 원술이,

“그것은 계림의 법도지만 형님과 저는 금관국의 사람이 아닙니까?”

하고서,

“어쨌거나 이곳에는 우리 형제밖에 더 있소?

저를 정말 동생으로 여긴다면 편하게 대해주시오.”

하고 부탁했다. 그래 시득이 술김에 두어 번 말을 편하게 했지만

뒷날 술이 깨고 나자 차마 하대가 어려워,

“아우님도 편하고 나도 편하게 말법은 차차 고칩시다.”

하였다. 시득이 무슨 말끝에,

“내게 아우님이 있다는 것만도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은 일인데 항차

이처럼 멀리까지 찾아주시니 이것이 꿈이라면 오래 깨지 말았으면 좋겠소.”

하니 원술 또한,

“부모형제한테 쫓겨난 제가 형님이 아니면 어디 가서 가슴에 맺힌 한을 풀고

지친의 정을 나누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우리 형제를 맺어주신 모양입니다.”

하여 둘이서 한참을 부둥켜안고 울기까지 했다.

가림군 태수 대관은 원술이 시득의 집에 머무는 동안 연일 사람을 시켜

술과 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날랐고, 한 번은 자신이 직접 주육을 들고 찾아온 일도 있었다.

원술이 그런 대관에게,

“이보시오 태수, 나는 얼마 아니 있어 갈 사람이라 아무렇게나 대접해도 그만이지만

여기서 사는 우리 형님네 식구들은 각별히 보살펴주오.”

하니 대관이 넙죽 엎드려,

“신이 태대각간의 소상에도 참석을 한 위인이올시다.

소수께서 누군지를 모를 때야 불경의 죄를 지었지만 어찌 알고서도 소홀히 하오리까.”

하고 대답을 차돌같이 하였다.


그럭저럭 보름여가 지나 원술이 그만 가림군을 떠나고자 하니

시득이 원술의 거처가 없는 것을 알고,

“가긴 어디를 가신단 말씀이오?

비록 궁하고 누추한 살림이지만 나와 함께 예서 삽시다.”

하며 붙잡았다.

이에 원술이 말하기를,

“우리 형제는 어떻게든 나라에 공을 세워 지난 허물을 만회하고 치욕을 설욕해야 할 형편들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찌 하룬들 다리를 뻗고 편히 잠을 자겠습니까?”

하고서,

“나라에서 조만간 당과 일전을 벌일 모양인데 만일 그렇게 되면 서해에 면한 이곳 가림군 일대가

격전장이 될 공산이 큽니다.

형님께서도 대비를 단단히 해두십시오.

저는 북변으로 가서 기회를 엿보겠습니다.”

하므로 시득이 그만 더 붙잡지 못하였다.

원술이 시득의 처자와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서려 할 때

시득이 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유신의 보검을 들고 나와서,

“아우님이 이걸 가져가서 반드시 아버님의 뒤를 이으시오.”

하자 원술이 한참 눈에 익은 보검을 내려다보더니,

“이건 아버지께서 형님께 준 것입니다.

제가 받을 물건이 아니올시다.”

하고는 슬그머니 시득의 손을 붙잡으며,

“제 마음속엔 이보다 더한 보검이 들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고 웃었다.

그 뒤에 원술은 아달성의 소나에게 가서 지내다가 법민왕이 평양성을 칠 때

유공의 군대에 백의종군하여 황주벌에서 탁월한 전공을 세웠다.

그는 소나와 함께 무명의 기병으로 참전하여 적군 수백 명을 주살했지만

정작 임금의 행차가 평양성에 진입하여 공을 논할 적에는 소리 없이 대오를 이탈하여

아달성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전투

이야기를 다시 본편으로 가져와 보자.

매초성을 장악한 뒤 이근행은 허기에 지친 말갈병 1천여 명을 추려 아달성 약탈에 나섰다.

이때 아달성 성주는 급찬 한선(漢宣)이란 자였다.

한선은 마침 장정들을 이끌고 성밖의 삼밭에 나와 삼을 심고 있다가 말갈병의 침략 소식을 들었다.

“아, 큰일 났구나! 성안에는 죄 늙은이와 어린애들뿐인데 이 노릇을 어찌한단 말인가!”

한선이 속절없이 탄식하고 있을 때 문득 장정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섰다.

“태수께서는 말을 좀 빌려주오.”

한선이 누군가 싶어 보니 그는 다름이 아닌 소나였다.

“한주 총관 유공께서 나를 이곳에 보낸 까닭은 바로 오늘과 같은 일에 쓰기 위함이 아니겠소?

태수께서는 걱정하지 말고 장정들과 함께 성의 후문에서 기다렸다가 내가 안에서

말과 무기를 풀어 보내거든 채비를 갖춰 성안으로 오시오.”

“혼자 몸으로 무기도 없이 괜찮겠는가?”

“염려 마오.”

소나는 걱정하는 성주와 장정들을 뒤로한 채 홀로 쇠스랑 하나를 집어 들고 말 잔등에 올랐다.

그리곤 비호처럼 말을 몰아 아달성 으로 달려갔다.

소나는 백성군(白城郡:안성 일대) 사산(蛇山:천안군 직산면) 사람으로

그 아버지는 백제를 공포에 떨게 했던 당대의 용장 심나(沈那)였다.

백성군 태수로 오래 봉직했던 심나는 혼자서 수레 하나를 번쩍 치켜들 만치 기운이 장사인 데다

몸이 날렵하고 민첩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그런데 백성의 사산은 예로부터 백제와 국경이 맞닿아 있었으므로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심나는 싸움이 있을 때마다 친히 말을 타고 나가 싸웠는데 일생을 두고 단 한 번도

패한 싸움을 해본 일이 없었다.

인평(仁平:선덕 여왕 연호) 연중에 심나는 백성군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변읍을 침공한 일이 있었다. 이에 백제에서는 정병을 내어 급히 반격하므로 신라군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지러이 흩어졌다.

백제군이 달아나는 신라군을 추격해 사산 들머리 다리 위에 이르렀을 때였다.

건너편에서 돌연 한 장수가 필마단기로 나타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백제군 수십 명을 일시에 참살하고서,

“어디 다리를 지나가보라!”

하며 성난 눈을 부릅떠 군사들을 노려보았다.

백제군들은 심나의 위세에 눌려 감히 다리를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저 젊은 장수가 바로 신라의 비장(飛將) 심나다.”

“우리 장수들이 바로 저 심나에게 차례로 패했다더니 오늘 보니 과연 그럴 만하다.”

그리고는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내어 달아나고 말았다.

이때부터 백제에서는 심나가 살아 있는 동안 백성군에는 쳐들어가지 말라는 소리가

노래로 만들어져 불리기까지 했다.

심나는 그 뒤로도 전장마다 나가서 적잖이 공을 세웠던 사람인데,

아들 소나가 장성할수록 부친의 기백을 그대로 빼닮으니,

“용생용 봉생봉이다!”

용이 용을 낳고 봉이 봉을 낳는다는 찬사가 사산 일대에 자자하였다.

웅진을 멸한 뒤 총관 유공이 소나가 있는 줄을 알고 임금에게 청하기를,

“이제 백제가 무너졌으니 소나와 같은 이를 북변으로 옮겨 지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므로 심나 부자의 남다른 용맹을 알고 있던 법민이 아달성에 따로 집과 식읍을 주어

살도록 했던 것이다.

소나는 필마단기로 쇠스랑을 휘두르며 아달성으로 치달았다.

성안은 이미 말갈병이 도처에 깔려 함부로 재물과 식량을 약탈하므로 남아 있던

늙은이와 어린애들은 크게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늠름한 장수 하나가 말을 몰고 나타나 쇠스랑을 휘둘러 말갈병 4, 5명을

일시에 찍어 죽이더니 장검 하나를 빼앗아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는 신라에 심나의 아들 소나가 있는 줄을 모르느냐!

삼한 백성들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이 소나가 용납하지 않으리라!”

이를 본 거리의 말갈병들은 가소롭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저놈이 죽자고 눈알이 뒤집혔구나.”

“자고로 불거지는 놈치고 무사한 놈을 보지 못했다.”

“불쌍도 하다.

성안에 사지육신 성한 젊은 놈이라곤 대가리 벌게서 설쳐대는 저놈 하나뿐인 모양이구나.”

말갈병들은 혼자 나타난 소나를 얕잡아보고 곧 10여 명이 한꺼번에 와르르 달려들어 생포하려 했다.

소나는 달려드는 무리를 피해 잠시 뒷걸음질을 쳤다가 내처 질풍같이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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