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평양으로 12
유신의 두 아들
이쯤에서 잠시 얘기를 되돌려보기로 하자.
전날 김유신의 상사가 났을 때다.
그때 금성 유신의 집에는 경향 각지의 이름난 사람들은 물론이요,
평소 고인을 흠모하던 수많은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도성 전체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그만한 인파가 모인 것이 금성이 생기고는 처음 있던 일로, 태종무열 대왕의 국상 때보다도
오히려 조문객과 구경꾼이 많았다는 게 세간의 통설이었다.
나중에는 하도 사람이 많아 나라에서 호위병을 내어 유신의 집 근처에 번을 세우고
아무나 함부로 조문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는데,
지소부인이 이는 고인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군사를 물려줄 것을 간청하고는
대신 월성 밖의 천관사(天官寺)에 따로 빈소 하나를 더 마련하여
넷째 아들 장이(長耳)와 막내 원망(元望)으로 하여금 조객을 맞도록 하였다.
바로 이 천관사가 전날 유신과 애틋한 정분을 나누었던 천경림의 기생 천관(天官)을 기려 세운 절이다.
김유신은 말년에 홀로 가락국의 옛 도읍인 금관군(김해)에 내려가 며칠씩 머물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면 으레 수로 대왕의 탄강지인 구지봉(龜旨峯)과 적막한 왕릉 부근을 둘러보며
아련한 향수와 까닭 모를 비감에 젖곤 했다.
젊어서는 양조(兩朝:신라와 가락국)의 신하라 큰소리를 쳤고, 외가인 신라 왕실에서
전고에 비할 바 없는 대공도 세웠지만, 한낱 계림의 촌락으로 변한 자신의 본향과 흔적마저 사라진
옛 왕도의 황폐함 앞에서는 문득문득 허전한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나이를 먹고 신라에 세운 공이 높을수록 더욱 깊은 무상감으로 변해 뼈저리게 가슴에 와닿곤 했다. 유신이 자신의 뿌리인 가락국과 거기에 얽힌 지난 일을 회고할 때면 늘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것이
바로 젊어서 만났던 천관의 일이었다.
그때는 아직 뜻을 이루기 전이요, 어머니 만명부인의 엄격한 훈계를 거역할 수 없어 취중에 말목을
쳐가면서까지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렸던 것인데, 사연이야 어쨌든 일생을 두고 장부 가슴에
사모의 정을 아로새긴 여인이 있다면 오로지 가락국의 규수 천관이 있을 뿐이었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천관과 같은 기구한 여인이 생겼을 것이며,
자신 또한 어찌 정인(情人)과 헤어지는 모진 슬픔을 겪었으랴.
유신은 풍병을 앓기 얼마 전에도 금관군에 내려갔다가 젊은 시절 천관의 자태를 꼭 빼닮은 여인을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일이 있었다.
그 여인은 천한 부곡민의 아내였는데, 허름한 띠 집에 들어서자 급히 쌀을 안쳐 밥을 짓고
젖먹이를 달래느라 부산하였다.
그러는 중에 노역에 지친 남편이 돌아오니 서로 볼을 만지며 반기고 정담을 주고받는 모습이
여간 다복해 보이지 않았다.
울 밖에 서서 부러운 듯 내외를 훔쳐보고 섰던 유신이 그 길로 금성에 돌아와 사재를 털어 지은 절이
천관사였다.
그런데 그 천관부인과 유신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시득(金施得)이다.
유신은 천관에게 자식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일생을 살았다.
그가 젊어서 상수(볼모) 살이를 할 때 천관과 둘이 지내던 천경림 옛터에 천관사를 짓고는
천관의 아우이자 자신의 오랜 벗인 각간 천존을 찾아가,
“내가 그때 자네의 누이에게 몹쓸 짓을 하였는데 이제라도 절을 지어 원혼을 달래고자 하네.”
하니 수십 년간 그 일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던 천존이 한참 동안 유신을 물끄러미 보다가,
“망령 나기 전에 철이 들어 다행이오.”
칭찬인지 책망인지 모를 소리로 답하였다.
그로부터 자치동갑인 두 노장이 천관사에 자주 작반해 가서는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었는데,
하루는 천관사 승방에서 금관의 옛 풍습인 차를 달여 마시던 중에,
“우리 누님에게 소생이 하나 있는 것을 아마 모르지?”
천존이 느닷없는 소리를 하였다.
이에 유신이 대경실색하여 오랫동안 뒷말을 잇지 못하니 천존이 허공을 향해 입을 열고서,
“아마 그해가 백정 임금(진평왕) 국상 나던 해일 게라.
누님이 살매현(청주) 북산으로 나를 찾아와 두두리 거사의 처소에서 몸을 풀고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를 끝내 안 밝히더니 신병을 얻어 돌아가실 무렵에야 내게만 살짝 실토를 하였지. 이 소리는 내 아우 천품도 몰라. 그저 하늘 알고 땅 알고 누님 알고 내 알 뿐이지.”
하고 덧붙였다.
유신이 시종 기가 막힌 표정으로 넋을 놓고 앉았다가,
“그 소리를 어째 지금에 와서야 하나? 자네도 이제 보니 참으로 모진 사람이야!”
하며 원망하자 천존이 허공에서 시선을 거두어 유신을 쳐다보고서,
“그 까닭을 정말 몰라 묻소?”
하고 반문했다.
유신이 본래 떳떳치 못한 일이라곤 없던 사람이지만 유독 천관한테만은 죄인이라고 여기던 터라
대꾸를 못하고 우물거리니 천존이 다시 허공으로 눈길을 주며,
“장군한테 누 안 끼치려던 누님 속도 알고, 누님 생각하는 장군 심정도 아니 나로서야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내가 무덤에 들 때까지 이 말을 안 하고자 했으나 우리 누님을 위해 절까지 짓고 마음을 쓰시니
이제라도 일러드리는 게 도리지 싶어 입을 여오.
천하의 김유신이 서출 하나 두었다고 새삼 흠이 될 것도 없을 게고.”
하며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유신이 서자 시득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시득은 그때까지 군승(軍勝)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군승이란 양자로 들어간 집에서 붙인 이름이지만 본래 이름은 시득(施得)이오.
두두리 거사가 일생을 베풀고 살아라고 시득이라 지어서 누님이 살았을 때는 그렇게 불렀는데,
그 아이가 지금 백수성 성주로 있소.”
천존한테서 자식의 이름이며 그가 천존의 주선으로 어느 5두품 집에 양자로 들어간 내력 등을
전해들은 유신은 수일 뒤에 미복을 입고 백수성에를 찾아가 군승을 만났는데,
자식은 장성하고 아비는 늙은 뒤에야 초면 상봉한 이들 부자는 그로부터 달소수를 함께 지내며
오래 맺힌 회포를 풀었던 것이다.
유신은 슬하에 아들 다섯과 딸 넷을 두고 있었지만 사모하던 여인의 유일한 소생에게서
각별한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군승은 군승대로 천하의 김유신이 아버지였음을 알고는
감정에 북받쳐 시종 울기만 했다.
부자가 함께 지내는 중에 유신이 군승을 찬찬히 살펴보니
외모도 천관의 흔적이 여실히 묻어 있었으나 무던한 인품도 나무랄 데가 없어,
“애비가 애비 노릇을 한 번도 하지 못했는데 이토록 잘 자라주어 참으로 대견하고 고맙다.
더구나 혼자 힘으로 성주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과연 천관의 소생이구나.”
하며 가까이 불러 어깨를 쓰다듬고 손등을 어루만지다가 헤어지면서 이르기를,
“언제 한만한 시절이 오거든 금성으로 오너라.
너의 형제들이 적지 않으니 내 살았을 때 면이라도 익혀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했는데, 곧 정월 명절이 돌아와 군승이 금성에를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금성에서 사람이 나와 짬이 나면 다녀가라는 유신의 뜻을 전하였다.
이리하여 군승이 당나라에 숙위로 가 있던 장자 삼광을 제외하고는
이복형제들을 빠짐없이 다 보고 유신의 앞에서 각기 맞절로 인사를 했다.
지소부인도 미리 얘기를 들었던지 군승을 마치 나갔던 자식 대하듯 살갑게 반기며,
“내 집이 자네 집이네. 나는 앞으로 자네를 내 자식들과 똑같이 대할 요량이지만
자네 마음이 과연 어떨까 몰라.
저 아이들은 나이가 모두 자네보다 어리니 귀찮다 생각 말고 아우들을 잘 좀 가르쳐주시게나.”
정이 듬뿍 묻어나는 말로 환대하여 군승이 흥감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유신이 군승에게 양부모의 생사를 물어,
“모두 돌아가신 지 오랩니다.”
하자,
“그럼 내일은 관청에 나가 이제라도 너의 족보를 바로잡아야겠다.”
하고는 뒷날 관리들의 위계를 관장하는 위화부(位和府)에 직접 가서
군승을 자신의 서자로 등록하고 이름도 원래대로 시득이라 고쳤다.
이것이 5두품 군승이 6두품 시득으로 변하게 된 사연이다.
그러나 유신과 시득 부자의 인연이 원래 그처럼 미미한 것이었을까.
근 40년 만에 만나 겨우 육친의 정을 나누고 회포를 풀려는 차에 그만 유신이 풍을 맞아 쓰러졌고,
시득은 시득대로 전쟁과 공무에 쫓겨 한가로운 틈을 얻지 못하니 아버지가 와병 중이던 5년 동안에
문병이라곤 다 해야 고작 두세 번을, 그것도 선걸음에 급히 도다녀갔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시득이 울며불며 달려왔을 때 아버지 유신은 이미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뜬 뒤였다.
시득은 구름같이 모인 인파를 헤치고 유신의 집에 이르렀으나 혹 자신의 존재가 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될지도 모른다 싶어 조객의 행렬에 섞여 빈소에 절만 하고 물러났다.
시탕(侍湯) 한번 변변히 올리지 못한 자식이 무슨 자식이랴 싶은 자책감도 일고,
임종을 못한 것도 도리는 아니었다.
그런 주제로 상사를 당해 만인 앞에 나선다는 게 무슨 덕이나 보려는 듯 비칠까 기탄 스럽기도 했다.
게다가 조문객들에게 원술의 얘기를 귀동냥한 것도 시득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장자 삼광이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으니 상주는 마땅히 둘째 원술이 맡아 보아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원술은 지난 석문벌 싸움에서 패한 뒤로 집안에서는 끝내 용서를 받지 못했다.
유신은 산곡간에 숨어 지내다 찾아온 원술을 보자 가문을 욕되게 하였다며 칼을 뽑아 들고
직접 목을 치려했다.
개신개신 나아가던 병이 더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일 때문이었다.
유신의 불같은 성미를 잘 알던 원술이 황급히 달아났다가 나라에 돌던 부음을 듣고 달려와
어머니를 만나 뵙고자 청하니 지소부인이 셋째 원정을 통해 말하기를,
“여자에게는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있으므로 이미 과부가 된 내가 아들을 따르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원술과 같은 놈은 사람의 아들이 되어 아버지에게 아들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낸들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느냐?
아버지는 끝까지 그를 용납하지 않았으니 나 또한 그러하다.
썩 물러가서 평생 얼씬거리지 말라고 일러라!”
하고는 끝내 면대조차 거부했다.
이 뒷소문이 조객들 사이에 나돌자 역시 급찬 원천의 반역으로 석문벌에서 쫓겨 갔던 시득도
무참한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겪어본 지소부인이 비록 자애로운 사람이지만 적자를 용납하지 않는데 서자를 받아들일 리 없고,
그러구러 생각하니 아버지 살아생전 나라에 대공을 세워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것이
새삼 고개를 들 수 없을 만치 민망하고 가슴이 아팠다.
석문벌 패전 이후 시득 역시 백수성 성주 자리에서 면직되어 이때는 비교적 한직인
가림군(加林郡:서천)의 소수(少守)로 지내고 있었다.
당초 패전의 책임을 논할 때 시득에게는 공이 있었지 죄는 없다는 주장이
참전한 장수들 사이에 나돌았으나 성을 뺏긴 나머지 성주들을 모조리 면직하는 판에
시득만 예외로 둘 수 없다는 문관들의 징벌론이 더 우세하여 문책을 당했는데,
그나마 형벌과 삭탈관직을 면한 유일한 성주가 그였다.
시득은 이런저런 이유로 장례 기간 내내 뒷전을 맴돌다가 결국은 스스로 자식 노릇을 단념하고
임지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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