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6장 평양으로 11

오늘의 쉼터 2014. 12. 5. 10:54

제36장 평양으로 11

 

 

누구 앞에서나 호언장담하던 풍훈의 예상이 최초로 빗나간 것은 국원의 완장성에 이르렀을 때다.

“아니, 저것이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오랫동안 고국의 사정을 알지 못하던 풍훈은 완장성의 웅장한 규모를 대하는 순간

너무도 기가 차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풍훈에게 유가가 따지듯이 물었다.

“고함소리 한 번에 무너질 거라던 낡고 부실한 성곽이 바로 저것이오?”

무참해진 풍훈은 애써 놀라움을 가라앉히고 황급히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맞받았다.

“그사이에 보수를 한 모양이오.

성이란 게 본래 헐 수도 있고 지을 수도 있는 것인데 수상할 거야 있소?”

그런데 선군 당보군들이 완장성의 웅장함을 미처 다 살피지도 아니했을 때였다.

갑자기 천지를 울리는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성문이 일제히 열리더니

말을 탄 기병들이 사방에서 달려 나오고 성루에선 수백 명의 활을 든 궁척 부대가 나타나

어지럽게 화살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기겁을 한 당보군들은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유가와 풍훈도 달려오는 군사와 쏟아지는 시석을 피해 급하게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왔던 길로 도망가라! 어서 이 사실을 중군에 알려야 한다!”

유가는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흩어지는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배를 걷어찼다.

그가 얼마만큼 완장성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이 쥐새끼 같은 놈아! 네 감히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냐?”

꺾어진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무기를 갖춘 한 패의 군마가 길을 막고 있다가 앞선 장수가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유가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으나 옆에 있던 풍훈은 사정이 달랐다.

마상에서 늠름하게 소리치던 장수도 당군에 섞인 풍훈을 알아보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너는 진주의 아들 풍훈이 아닌가? 네가 여기에 어인 일인가?”

장수는 약간 뜻밖이라는 듯 풍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풍훈은 일순 무참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것저것을 따질 형편이 이미 아니었다.

“피치 못할 곡절이 있어 왔으나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소.

옛정을 생각하여 길을 비켜주든지, 그게 어렵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소!”

“너 하나라면 모를까 내 어찌 당나라 놈들에게 길을 열어주겠느냐?”

“그럼 하는 수 없는 일이오!”

풍훈은 누구보다 먼저 칼을 뽑아 들었다.

그것은 몰락한 명가 후예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으리.

하지만 자존심만 가지고 싸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양측의 군사들이 장수들의 명령 하나에 한 덩어리가 되어 뒤엉켰지만 승패는

 싸우기 전부터 갈린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살길을 찾아 달아나던 당군들은 체계도 없고 여유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부하들이 베이고 찔리는 것을 본 유가가 우레 같은 고함을 지르며

개원의 목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가상하게도 적장을 쓰러뜨려 적의 사기를 꺾으려 부린 용기였으나

이는 거꾸로 유가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악!”

칼날과 칼날이 맞닥뜨리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진 이는 다름 아닌 유가 자신이었다.

장수마저 잃은 당군의 사정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바닥에 나뒹굴던 유가의 몸은 당황하여 날뛰는 당군들의 말발굽에 처참하게 짓밟혀 삽시간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같은 시각, 맹부와 위사원이 이끄는 중군 1만도 위급한 사정에 빠져 있기는 선군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들은 선군의 깃발 표지가 끝나는 수레봉 계곡에서 문득 이상한 낌새를 채고 행군을 멈추었다가

역시 미리부터 기다리고 있던 복병의 습격을 앞뒤에서 동시에 받게 되었다.

중군을 공격한 장수는 진왕과 흥원 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왕에게 큰 죄를 지었으므로 금성을 출발할 때부터 반드시 공을 세워 속죄하리라

잔뜩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삼한의 구분이 없어져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도 다투어 공을 세우고 출세를 하는 판에 여기서마저

신임을 얻지 못한다면 일문이 스러지는 것은 불을 보듯 했다.

진왕은 백제인과 신라인으로 구성된 백금무당 5천여 명을 이끌고 중군의 앞을 들이치고

흥원은 구칠당 3천을 거느리고 후미를 급습하여 닥치는 대로 적을 무찔렀다.

두 장수가 공을 다투며 아귀같이 달려드는 데 반해 당군들은 적지로 깊숙이 들어오면서부터

연일 밤잠을 설쳐 몸이 극도로 피로해진 상태였다.

양군은 중식 때부터 해거름까지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살육전을 벌였으나 갈수록 밀리는 쪽은

당군이었다.

설상가상 완장성에서 쫓겨 온 기병들과 이를 추격해온 개원, 당천의 군사까지 가세하자

그나마 사력을 다해 대항하던 당군의 기세는 여지없이 꺾여버리고 말았다.

우왕좌왕한 당군들은 도망가기에 바빴고 신라 군사들은 사람을 죽이기에 정신이 없었다.

이천과 소경의 경계인 수레봉 협곡에는 당군의 시체가 땅을 덮었고 흘러나온 피는 황토를 붉게 물들였다. 맹부는 사력을 다해 퇴로를 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뒤를 쫓아온 흥원의 칼에 진작 반 토막이 났고,

완장성에서 쫓겨 온 향도 풍훈도 흥원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다만 체격이 작고 몸이 날렵한 위사원만이 홀로 끝까지 싸우다가 스스로 대장기를 분지르고

말배에 모로 붙어 간신히 목숨을 구했을 뿐이었다.

이들 가운데 풍훈은 왕제 개원의 손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당했으나 본래 성품이 너그러운 개원은

그때마다 번번이 풍훈을 칼등으로 치며,

“지금도 늦지 않았다. 어서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하고 투항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풍훈은 개원의 권유를 묵살했다.

“신라 임금은 나의 원수요 신라는 내게 원수의 나라다.

어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겠는가!”

풍훈은 살기를 체념한 듯 악을 쓰며 울부짖었다.

개원은 그런 풍훈이 문득 불쌍하여 슬그머니 도망갈 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흥원을 맞닥뜨렸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풍훈은 당나라에 유학생으로 있던 흥원의 아들들과 절친한 사이였고,

흥원의 사위인 원천과도 자별한 우애가 있었다.

그는 친당파의 좌장 격인 흥원을 만나자 죽은 아버지를 본 듯 크게 반가웠다.

“나리를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하여 친히 무기를 들고 나오셨습니까?”

“자네는 풍훈이 아니던가?”

풍훈이 허리를 굽혀 깍듯이 인사를 건네자 흥원도 뜻밖인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네야말로 이곳에 어인 일인가?”

“저는 설인귀 장군을 따라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러 왔습니다.”

흥원은 그제야 풍훈이 향도로 온 것을 알아차렸다.

“소문에 듣자니 나리께서도 억울한 일을 당하셨다고 하던데 차제에 저와 같이 힘을 합해

무도한 법민을 몰아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풍훈은 흥원이 어쩔 수 없이 출장한 줄 지레짐작하여 한 말이었다.

그러나 흥원의 태도는 갑자기 달라졌다.

“무엄하구나! 네 어찌 함부로 우리 대왕을 능멸하는가!”

흥원의 꾸짖는 소리에 풍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니, 나리……?”

당황한 풍훈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으려니 흥원이 다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긴말 필요 없다. 나는 계림의 신하요,

너는 당나라의 향도로 왔으니 어찌 전장에서 사사로움을 논하겠나!”

말을 마치자 그대로 칼날을 세워 달려들었다.

풍훈 으로서는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엉겁결에 칼을 뽑아 들고 맞상대를 했지만 그는 흥원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풍훈은 놀란 가슴을 채 가라앉히기도 전에 그만 흥원의 칼질에 목이 떨어져 죽으니

한때 천하의 명장으로 추앙받던 김진주의 가계가 이로써 완전하게 끊어지고 말았다.

선군과 중군이 참패하자 설인귀는 군사를 되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군막을 치고 잠자리에 누웠다가 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위사원 으로부터 전황을 보고받고는,

“아아, 하늘이 이 설인귀를 버리는구나!”

하며 크게 탄식했다.

황주벌의 악몽이 되살아난 설인귀는 살아남은 군사를 점고할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후군을 이끌고

천성으로 퇴주했다.

하지만 밤새 말을 달려 천성 앞에 당도하는 순간 설인귀는 또 한 번 믿기 힘든 광경과 맞닥뜨렸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용문 촌놈아, 신라 장수 문충이 네 무덤을 파놓고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한 패의 군마를 거느리고 성문을 지키던 장수가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성루에는 이미 신라군의 깃발이 펄럭이고 활을 든 궁척 부대의 모습도 보였다.

창졸간에 간이 콩알만 해진 설인귀는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서남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만일의 사태를 생각해 향도 풍훈에게서 해안으로 통하는 여러 갈래의 길을 확인해둔 게 큰 다행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이근행 탓이다! 그 육시랄 말갈놈만 제때 나타났던들 어찌 오늘과 같은 수모를 당했으랴!”

설인귀는 달아나면서 눈에 핏발을 세워 이근행을 욕했다.

장수가 앞장서서 도망가는 판이니 두려움에 떨던 졸개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문충이 이를 내버려둘 리 만무했다.

“이놈, 인귀야! 당장 멈추지 못하겠느냐?”

패주하는 당군의 후미를 다시 문충의 군사가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당군은 이곳에서만도 무려 1천 4백여 명이 죽고 전마 1천 필을 빼앗겼다.

한편 이근행은 이때 삼국(당, 말갈, 거란)의 연합군 20만을 이끌고 매소천성(買蘇川城:양주)에 이르렀다. 그곳은 칠중성 근처 매소천의 깎아지른 절벽에 의지하여 세운 강변의 웅성이었는데,

매소천은 한성 북방 칠중하(임진강)의 한 지류였다.

그는 약정한 군기보다 보름쯤 뒤늦은 9월 마지막 날에 급조한 목선을 이끌고 그곳에 당도하자,

“설인귀의 군대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고 사방을 살펴댔다. 줄곧 요동의 격전지를 누볐던 이근행 역시 남쪽의 지리에는 서투른 장수였다.

설인귀와는 달리 그에게는 향도로 삼을 만한 자도 없었다.

그는 파병에 앞서 설인귀가 매소홀로 오라고 한 것을 매소천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설인귀는 인편에 매소홀의 소성이라고 분명히 일러두었지만 유인궤를 따라 칠중성에 주둔할 때

매소천을 알게 된 이근행은 무턱대고 그곳을 떠올렸다.

항차 매소홀도 매소천도 다 같은 국원 소경의 속현이었고,

매소천에도 매소천성 또는 매초성(買肖城)으로 불리던 성이 있어 이근행은

자신이 장소를 잘못 찾아온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체 설인귀는 왔단 말이냐, 안 왔단 말이냐?”

자신이 늦게 도착해 미안하게 여기고 있던 이근행은 설인귀의 군사가 도착했다는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자 도리어 버럭 역정을 냈다.

그의 불만과 노여움은 깎아지른 매초성의 험한 지세를 확인하는 순간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필이면 이런 난공불락의 험지로 오라는 까닭을 모르겠구나!

이곳보다는 오히려 전에 왔던 칠중성이 한결 낫겠다!”

하지만 직접 황제의 칙명을 받은 설인귀의 영을 거절할 형편도 아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매소천변에 배를 정박하고 군사를 풀었다.

매소천은 칠중하의 지류 가운데도 강폭이 넓고 유속이 완만한 곳이었다.

침략을 당한 매초성에서는 군사와 성민들이 일제히 몰려나와 시석을 날려대며 당군의 접근을 저지했다. 절벽을 사이에 둔 시석전은 그로부터 사흘 밤낮이나 쉬지 않고 계속됐다.

나흘째가 되자 성안의 화살과 돌이 모두 동이 났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강물에 떠내려간 침략군의 숫자 또한 엄청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근행은 20만이나 되는 군사들로 끊임없이 절벽을 기어오르게 하니

급기야 기가 질린 성주와 성민들은 식량과 가산을 챙겨 인근 성으로 뿔뿔이 달아나고 말았다.

매초성을 점령한 이근행은 반나절도 쉬지 않고 군사를 나누어 아달성(阿達城)과 칠중성,

적목성(赤木城)과 석현성(石峴城) 등 부근의 성들을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를 써서 성을 취하고 보니 성안에는 당장에 밥을 지어 먹을 양식 한 줌이 없었다.

며칠 동안 강물로 배를 불린 이근행의 군사들은 인육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굶주려 있었지만

정작 쌀 한 톨도 얻지 못하자 주변 성 들을 약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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